♣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1년 7월 17일) 제목: ''고난 속에서 알게 된 사랑과 삶의 진정한 가치'' 말씀: 고린도전서 1:27, 28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찬양인도: 이다니엘 부목사님 설교자: 간증 박위 형제(유튜브 위라클 운영자) -------------------------------------------------
고린도전서 1:27, 28,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저는 어릴 때에 덩치가 컸다. 목소리도 컸다. 사진들을 보면 남들보다 건강하고 컸다. 대학교 때에 취업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옷을 좋아해서 패션기업에 인턴으로 취업을 했다. 정 직원으로 취업이 된 것이다. 톱니바퀴처럼 세상적인 쾌락으로 클럽을 다녔다. 주일날 기도하러 가서 세상의 쾌락을 포기할 수 없다고 했다. 죽을 때가서 하나님을 만나겠다고 했다. 술을 마시고보니 병실이었다. 중환자에 실이었다. 병원의 온갖 장치들로 싸여있었다. 나는 손톱이나 머리카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의사 선생님은 전신마비로 살게 되고 영원히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현실감이 없었다.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반드시 일어날 거라는 믿음을 갖고 희망을 가졌다. 응급실에 오신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생리가 끊어졌다고 하셨다. 충격으로 아버지는 땅바닥을 기어 다니고 계셨다고 했다. 우리 위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해서 생명을 위해서 기도를 하셨다고 한다. 의식이 돌아오지 않으면 수술을 하지 못한 상태였는데 아버지가 불러서 일으키셨다. 11시간 만에 눈을 떴다. 그래서 다행히 골든타임을 넘기지 않고 다행히 수술실에서 수술을 할 수 있었다. 어머니는 제가 꼭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에 영상으로 어머니가 그 상황에서 찍으셨다고 하셨다. 간증을 하기 위해서였다. 아버지는 책을 많이 읽으시는 지적인 아버지였다. 신앙적으로 이야기 하면 항상 평행선상이었다. 평생 전도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중환자실에서 아버지는 네가 믿는 하나님을 나도 믿겠다고 하셨다. 하나님을 믿는 것을 포기하신 것을 보았지만 그 상황에서는 기도하시고 싶으셨을 것이다. 일어나 전신마비로 일반병실로 갔다. 상상할 수 없이 상실감이었다. 병원은 치열한 전쟁이었다. 두 시간에 한 번씩 누군가가 뒤집어주어야 했다. 병원에서 누군가 씻어주어야 했다. 소변도 다 비워주어야 했다. 가족들이 다 했다. 아버지가 변을 치우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뒤로 눈물을 흘렸다. 그것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인턴 월급이 얼마 되지 않았지만 처음 월급에서 부모님을 드렸을 때, 행복했었다. 처음 입원했을 때는 간병인을 고용하려고 했다. 그런데 남동생이 대학생이었는데 형을 간병하겠다고 동생이 부모님께 말을 했다고 한다. 24시간 나를 위해 동생은 간병했다. 동생이 먼저 흔쾌히 희생했다. 동생의 말은 장애는 가족을 하나로 묶는 하나의 끈이었다라고 했다. 하나님은 가족과 저를 위로해 주어서 지치지 않았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였다. 전쟁 같았던 병실에서 기도실에 가서 기도했다. 예전대로 돌아가고 싶었다. 평생 읽지 않았던 성경책을 보게 되었다. 어느 날 남을 위해 기도하게 되었다. 병실에 있는 병자들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눈물의 기도였다 병원에 심각한 환자들이 많았다. 어떤 어머니가 자신의 아들이 뇌 손상으로 교통사고로 누워있었는데, 저를 보고 저만큼만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하나님께 그 때 기도했다. 기도 때마다, “위야 너는 정말 반드시 회복될 것”이라고 희망을 주셨다. 휠체어로 옮기기가 어려워서 남동생이나 아버지가 오셔야 옮길 수 있었다. 내 인생은 누구도 나를 대신 살아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 재활에 죽을힘을 다해 노력했다. 휠체어에 옮기기까지 피나는 노력으로 스스로 운전까지 하게 되었다. 독립적으로 혼자 다닐 수 있는 것에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재활이 기적이었다. 신앙생활은 반면에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다. 하나님 앞에 매일 정상이 되도록 기도했다. 친구가 공동체 생활을 하자고 했다. 청년부 예배를 드리자고 했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어마한 친구를 보내주셨다. 유준상이었다. 연예인은 아니었다. 휠체어를 타고 수련회를 가자고 했다. 그러나 저는 안 간다고 했다. 수련장에도 침대가 있다고 했기에 갔다. 수련회 기도시간에 이렇게 기도했다. 일어나도 좋으니 하나님이 살아 계신지 제 눈으로 보게 해달라고 간절하게 기도했다.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실망했다. 그런데 목사님이 기도해 주신다고 강대상에 올라오라고 하셨다. 치유 기도를 온갖 치유 집회를 다니게 되었는데 기복신앙처럼 느껴져서 안수 기도를 받기 싫었다. 모서리에 휠체어에 앉아있었는데 유준상이 저를 바라보니 모두가 저를 바라보았다. 손잡이인 휠체어를 밀어주어서 순식간에 밀어서 단상에 올려놓았다. 마가복음에 중풍병자를 고치신 장면과 같았다. 중보기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친구들이 20여명이 손을 대고 기도를 해주었다. 기도해주는 모습을 보여주시면서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중보기도야 하셨다. 부족한 믿음을 보시고 중보기도의 실체를 보여 주심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알려 주셨고 제가 주님과 회복되었다. 모태 신앙으로 공동체 신앙으로 성숙하게 되었다. 기도하고 서로 의지하니 깨닫게 되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알게 했다. 자기 의지 없이 고통 받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눈에 보였다. 불공평하게 보여서 하나님께 따졌다. 왜 공평하신 하나님이 왜 그들을 직접 도와주셔야 하지 않냐고 따졌다. 3일이 지나고 화장실에서 하나님을 만났다. 네가 가서 직접 사랑하라고 하셨다. 제 질문에 이해하시리라 여기지 않았었다. 고통 받는 사람들을 네게 직접 가서 하라고 하셨다. 사랑의 원리를 깨닫게 되었다. 사랑은 돈이 없어도 도울 수 있고 사랑할 수 있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면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셨다. 이 땅에 태어난 목적이 사랑하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것을 깨닫게 하셨다. 준비한 영상을 봅시다. 다시 눈을 떴을 때에 의사샘은 안 된다고 하셨다. 자꾸 시도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말했다. 나는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꿈을 찾아 도전한다는 마음으로 주님과 동행했다. 재활운동을 정말 열심히 했고 일도 하면서 산다. 믿음은 바라는 것에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에 증거니....~~~“위 일어난다는 구호로 살아왔다.” 주변 사람들에게 중보기도를 부탁했다. ‘위 플러스 미라클’의 뜻은 사람을 사랑하는 뜻이다. 삶의 소망을 주는 의미이다. 목사님과 매일 통화를 하면서 자신의 아들의 전신 마비로 힘든 아들을 위해 늘 통화를 했다. 위라클에서 그 자녀는 편집자로 일을 한다. 손이 안 좋은데도 다 한다. 사랑을 주기 위해서 울산으로 갔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사랑을 받았다. 우연히 위라클 체널을 보고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연락을 주신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적이다. 신우 신염(腎盂腎炎)은 열이 40도가 된다. 소변에 염증이 생겼었다. 이 질병도 너무 고통스러웠다. 비뇨기과에 입원을 했는데 혼자 젊은 사람이었다. 그것을 보고 한 시간 내내 울었다. 소리를 내서 울 수가 없었다. 동생이 곁에 있어서 모르게 울었다. 너무나 미래가 두려웠다.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는데 빌립보서 4장 13절이 떠올랐고 힘이 되었다. 마치 주문을 외우듯 세수를 했다. 갑자기 십자가가 떠올랐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영화 장면이 떠올랐다. 갑자기 가슴이 아팠다. 예수님의 고통에 비하면 내가 느끼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예수님으로 새 생명을 얻었다는 것을 그때야 느꼈고 깨달았다. 회개가 되었다. 알 수 없는 힘이 그 이후 생겼다.
*요한복음 3:16절에, 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주셨다. 너무나 감동적이었다. 어머님이 다섯 시간 이상 기도를 하셨다고 한다. 그 눈물을 항아리에 담아도 넘치도록 흐르셨다고 하셨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이 목숨보다 깊으니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마음을 주시고 다가왔다. 먹고 자고 밥 먹고 하는 것에 너무나 감사함이 다가왔다. 기적의 삶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기적은 제가 지금 살고 있는 그 자체이다. 남과 비교해서 부족한 것을 바라보지 말고 내가 누리고 있는 것에 감사하여야 한다.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은 주신다. 하나님은 약한 자를 사용하신다. 다윗이 골리앗을 이기고 모세가 출애굽을 하는 것처럼, 전신마비가 되어서 열심히 살아가니 이런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용기가 되기도 한다. 하나님이 도구로 사용하신다.
*고린도전서 1:27-28절, 27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말씀처럼 세상에 미련하고 약하고 천하고 멸시받은 사람을 택하셨다고 하신다. 하나님이 우리를 쓰신다는 것이다. 연약하기에 하나님을 드러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지금의 모습을 보면 고난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지만 전신마비로 삶의 가치를 알게 되었고 하나님과 더 친하게 되었다. --------------------------------
▷마무리 담임목사님, -암송이 잘 되게 외우고, 다음 주는 온전한 인격으로 합시다. 여름 기간동안 담임 목사님을 위해 기도합시다.
♣요약 그 위기의 고난 속에서 주어진 놀라운 기적, 박위 형제가 자신을 기적처럼 일으켜 주신 하나님을 신뢰하고 힘을 얻어서 남을 위해 오히려 중보기도로 기도했던 것처럼, 그 일상이 오히려 감사함을 깨닫고 감사한 것처럼, 우리도 그 일상을 감사하며 이 순간을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 주님을 찬양하며 닮아가길 기도해야 한다. 내 가는 길을 비추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길도 비추어 주시길 원하는 박위 형제처럼 우리의 삶도 골짜기로 걷고 있지만 우리는 담대히 그 사명을 감당하여야 한다. 믿음의 4대가 인생의 방향과 목적을 재설정하여 박위 형제의 인생에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다음세대가 새로운 감사와 새로운 감사가 되어 찾아오시기를 간구하며 그 박위 형제의 친구인 유준상 친구가 되어서 남을 위해 돕는 자가 되고, 우리는 이 코로나 시기에도 주님을 더욱 가까이 하여 우리가 변화되어 미래 사역에 존귀하게 쓰임 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어리석은 것들과 세상의 약한 것들과 세상의 비천한 것들과 천한 태생과 낮은 계급과 무식한 자들을 택하여 복음을 전하는 자로 쓰신다. 하나님은 어떤 도구와 그릇이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쓰시기에 가장 적합할까 하는 것을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아신다. 지체 높은 신분이나 인격자로서 그리스도인으로 부름 받은 자도 거의 없다. 전도자들이 가난하고 비천했던 것 같이 믿는 자도 대부분 그러하였다. 지혜 자나 권력자나 귀족 중에 십자가의 도를 받아들인 자는 거의 없었다. 그러나 복음 속에는 얼마나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있는가!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에 얼마나 적절한 지혜를 내셨는가를 살펴보자. 인간의 교만과 헛된 것을 타파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셨다'.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1년 7월 14일) 제목: )"By the Loving God"(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말씀: 로마서 8:37 설교자: 고석찬 목사님(대전 중앙교회 -초빙) ----------------------------------------------
*로마서 3:37절,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이 말씀은 이 교회 전체에 드리는 말씀이다. 끝까지 지켜 승리하는 주님의 교회 되시길 축복한다. 맬 깁슨의 영화 중에서 ‘렌섬(RANSOM)’이라는 영화가 있다. 이 영화는 렌섬이라는 단어가 ‘몸값’이라는 단어이다. 맬 깁슨이 연락을 받는다. 아들 숄이 유괴를 당했다. 그 몸값을 요구하는데, 200만불을 요구한다. FBI와 경찰이 같이 합작해서 범인을 찾으려고 하는데 잡히지가 않는다. 직감으로 알게 되어 이것은 돈을 주면 아들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아들도 죽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결단을 하고 누구든지 이 범인을 잡는 자에게는 200만 불을 주겠다고 홍보한다. 결국에는 범인을 잡게 된다. 그 범인은 경찰이었다. 그 범인을 잡고 마지막에 범인도 죽일 뿐만 아니라 아들도 구출해 내는 장면을 보면서 이 아버지가 야!!~‘살아 있다’라는 생각을 했다. 아들을 위해서는 모든 것을 다 하고 싶지만, 능력이 안 되어서 능력이 된다면 끝까지 지키고 싶은 것이 자식일 것이다. 그런데 인간 아버지도 이렇게 조금만 능력이 되고, 능력이 안 된다고 할지라도 정말 생명을 걸고 자식을 위해서 희생하고 결단할 것이다. 그렇다면 하늘과 땅을 가지신 우리 하나님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다 거시고 살려내실 수 있다. 성도들이 패배하는 것을 우리 하나님은 보실 수가 없다. 우리 하나님은 살아계시기 때문에 우리 하나님이 우리 자녀들이 실패하고 낙담하고 쓰러져 있는 것을 견딜 수 없으신 분이 하나님이실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로마서 3:37절,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우리 성도들에게는 ‘그러나’가 있다. 우리는 지금 코로나로 어렵다. 이 시기가 지나고 하나님의 은혜의 시기가 임하게 되면 이 일이 언제 있었는지 잊을 때가 올 것이다. 이 자리에 오기까지 우리 삶에 어려움과 가슴 아픈 일들이 있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아끼고 사랑하신다. 이번 주제가 ‘변화’는 새벽에도 말씀 드린 것처럼, 변화를 시작하신 분은 하나님이시고, 성령 하나님으로 우리가 변화되고 우리가 이기고 우리 하나님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로 인해 우리가 이긴다. 그래서 본문 앞에
*로마서 8:35절에 보면,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라 권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리랴.”
-여기에서 환난을 어려움을 이야기 한다. 바깥의 고난과 그리고 곤고는 압박을 받는 것이다. 적신은 발가벗는 것, 너무 가난해서 모든 것이 다 벗어졌다할지라도 우리는 이 모든 일에 우리는 이긴다는 것이다. 여러분, 이 말씀 그대로 이루어지길 축복한다. 당장은 변화와 역사가 없다 할지라도 우리 하나님 말씀 이대로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시니 넉넉히 이기게 된다. 37절 말씀 성도가 그러나와 아픈 고난, 모든 것들 속에서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고 이야기 했다.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다른 말로 바꾸면 우리는 변화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 기뻐하시는 대로 변화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왜 이기는 것인가? 이유는 하나님 아버지 때문에 이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이긴다는 것이다. 아버지 때문에 이긴다. 우리는 죄 가운데서 이긴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기 성질도 못 이긴다. 우리는 이길 수 있는 것 하나는 우리 뒤에 하나님이 계시기에 우리가 이긴다. ※아들이 어렸을 때, 잊을 수 없는 사건이 하나 있다. 아이가 어리면 혼자서 대변을 못 본다. 모형을 앉아서 연습을 시킨다. 아내가 잠시 없어서 아들이 이것을 찾았다. 그래서 내가 갖다 주니 마치면 이야기 하라고 했다. 대변을 보고 나서 잘했다. 그런데 어느 정도 크고 나서도 그것을 자주 달라고 한다. 그리고 한 번은 대변을 보고나서 닦아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한테 그것은 네가 스스로 정리를 하는 것이 맞다고 알려주었다. 이야기를 하니 못 하겠다고 한다. 네가 닦으라 하니 못한다고 하면서 때를 쓴다. 손이 안 닿는다는 것이다. 순간 하나님은 팔이 다 닿게 만드셨다. 했더니 못한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제가 닦아주었다. 그날을 잊지 못한다. 그리고 돌아서서 울었다. 그 아이를 닦아주고 왜 울었냐면,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울었다.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분명히 아들이 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 나이였는데도 못한다고 했다. 하면 된다고 했는데, 못하겠다고 하는 아들을 아버지가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때를 쓰니 하나님을 생각했다. ‘하나님도 그러시겠구나!’~~ 했다. 하나님이 다 주셨다. 은혜도 힘도 다 주셨다. 살면서 겁나는 일이 있어서 그렇지, 습관이 되어서 용기를 잃어서 못하고 할 때 하나님은 너 할 수 있는데 왜 때를 쓰냐고 하시지 않으신다. 그 하나님 아버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은혜를 베푸심을 깨달았다. *이사야 49:15절에, 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 이 땅에 있는 부모가 잊을지라도 우리 하나님은 안 잊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을 살면서 이길 수 있는 이유와, 이 땅에서 당장 변화될 수 있는 것이 없어도, 성장이 더디다고 두려워 말고, 이것 때문에 절망하지 말라.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기에 이기게 되는 줄로 믿는다.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이유는? - 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의 아버지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다. 우리 부모도 이 땅에서 살면서 자녀에게 돈을 주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능력과 권세와 영광과 존귀가 있으신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니 우리가 이기는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왜 중요한가? 이 사랑은 모든 것을 이긴다. 아이가 태어나서 스스로 일어서기까지 학자들에 의하면 아이가 3천 번 정도 넘어졌다가 일어선다고 한다. 옆에서 도와주는 것이 부모이다. 남의 자식의 대소변을 닦아주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아버지들도 잘 못할 때가 있다. 자기 몸에서 난 아이를 보면서 변색만 봐도 좋아한다. 우리가 볼 때는 더럽지만 여전히 못 가린다 할지라도 부모는 안 그런다. 그렇듯이 하나님은 마취 권세 아래 눌려 있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그러한 죄인이라 할지라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주셨다. 그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셨다. 그리고 그것이 끝난 것이 아니고 우리의 죄 값을 다 치러 주시고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셨다. 뿐만 아니라 오늘 이 땅에 살면서도 우리에게 성령 하나님을 보내주셔서 날마다 우리와 동행하시고 우리와 함께 하시며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응답해 주시고 그리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와 동행하시도록 우리를 인도해 주신다.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가 이긴다는 것이다. 어느날 기도하시는 권사님이 찾아오셨다. 그래서 우시는 것이다. 왜 우시냐면 섬기시는 교회가 참 어려움을 당했다. 교회가 어려우면 참 아프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다. 그 교회를 사랑하는 영혼들은 그래서 아파한다. 그러면서 서로 사랑해서 영광을 드리는 것인데, 영광스런 교회에 영광을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우리 교회가 정말 좋았다고 말씀하셨다. 건강하게 잘 자랐다고 한다. 능력도 힘도 다 주셨다고 했는데 서로 사랑하지 못했기에 두 눈이 빠진 삼손이 되었다는 것이다. 두 눈 빠진 삼손처럼 되었다는 것이다. 두 눈 빠진 삼손은 목사님 삼손이냐고 질문했다. 삼손이 맞다고 했다. 삼손은 삼손이다. 두 눈 빠져도 삼손이다. 그런데 이것은 정말 큰 충격이었다. 자주 이 이야기를 하게 된다.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도와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에 원수가 더 많이 죽게 된 것이다. 두 눈이 빠진 교회와 성도는 어떠한지를 질문했다. 두 눈 빠진 성도여도 성도이다. 앞을 못 보아도 인생 전체가 다 망가진 자일지라도 하나님이 포기하지 않는 한 나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 앞에 우스운 사람이 될지라도 절망하지 말라.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질지라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셨기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이기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때문에 이기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넉넉히 이긴다고 하신다. 이 말씀은 정복자들보다도 뛰어나게 이긴다. 압도적으로 이긴다. 그분의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는다. 거뜬히 이겨낸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More than conquerors!’.....로마 전체를 평정하고 이 세상에 어떤 정복자들보다도 뛰어나게 압도적으로 우리가 살고 있는가? 여러분 그러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 때문에 이긴다는 것을 알고는 있다. 압도적으로 이기고 사는가? 여기에는 설명이 필요하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를 넉넉히 이기게 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의 방법으로 이기게 하신다. 그 방법은 멀리 보고 이기게 하신다. 지금 당장에는 지는 것 같지만 이길 기미가 하나도 없지만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넉넉히 이기게 하신다. 하나님은 멀리 보고 우리를 이기게 하신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사랑의 하나님은 넉넉히 이기며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하실 것이다. 단기적으로 보면 사람을 안 키운다. 능력 있고, 실력 있는 사람을 쓰기를 원한다. 지금 당장 준비되지 않았어도 키우고 길러야 하는데 멀리보고 길러야 하는데 당장만 보니 못 참는 것이다. 아무리 실수가 많아도 기다린다는 것이다. 아직 어리니 멀리 보아야 한다. 부모가 자식이 일어서기까지 삼천 번이나 넘어지고 일어서도 멀리 보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은 움직이지 못해도 멀리 보면 사랑하게 된다. 누군가가 우리를 멀리 보며 인도하는 것이라면 큰 은혜이다. 멀리 보는 사람이라면 정말 인도하신다. 도우시는 목사님은 신학의 길로 인도하셨다. 늘 멀리 보시고 기도하시고 일을 시키실 때도 내다보고 일을 시키셨다. 누군가가 멀리보고 인도하시는 분이 계신다는 것은 참 행복이다. 은혜 받고 죄짓고, 은혜 받고 쓰러지고, 사랑은 멀리 봐야 한다. 이것을 잘 모르면 실망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멀리보고 이끌어 가시는데,,, 성경을 보면, 요셉, 형들에게 배신 노예로 팔렸다. 인생 끝나 보인다. 그러나 형들에게 배신당한 게 억울했다. 자기 분에 못 참아서 자기 인생이 실패라고 했다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요셉이 애굽에서도 총리, 바로와 회복, 자기를 팔고 배신한 형들이 무릎 꿇고 엎드린 것을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다. 지금 당장은 배신당하고 노예로 팔려간 것이기에 인생이 끝나 보이지만,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면, 배신했던 사람들이 와서 절을 하는 것이다. 다윗도 환난에서 이기게 하신 것처럼, 그 노래가 간증이 되었다. 다윗을 왕으로 삼으시고 다윗의 혈통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오시는 것이다. 때가 되면 올리신다. 하나님은 다시 기회를 주신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고 이기게 하신다. 우리 주님은 멀리 보셨다. 십자가 뒤에 주의 자녀들과 청년들을 하나님은 보시고 계신다. 사랑은 멀리 보는 것이다. 멀리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보자. 이끌어 가실 것을 믿는다. 다니엘이 붙잡혀 갔을 때도, 어렸지만, 다 이기게 하셨다. 우리의 심장에 복음의 심장이 있느냐와 없느냐가 인생을 좌우한다. 우리를 멀리보고 계심을 확신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은혜 안에서 버티어야 한다. 더 쉽게 이야기 하면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려야 버스가 온다. 그런 것처럼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길목에서 계속 해서 기도하고 나를 준비하고 있어야 하나님이 움직이신다. 그렇지 않고 엉뚱하게 있으면 버스를 못탄다. 오늘 우리는 견디어야 하는데 길목에서 견디어야 한다. 먼저, 주일을 잘 드리며 견디라. 많은 사람들이 주일 성수하면 이것을 잘 모른다. 주일은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 패턴으로 봐야 한다. 성경 전체를 보면 가장 먼저 복을 주신다. 그리고 나서 복 받은 사람이 이것을 복을 나누게 하신다. *창세기 1:28절,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모든 것들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흘러가게 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가장 먼저 복을 주신다.
*창세기 12:2-3절,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신 이유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나누라고 하신다.
*창세기 2:3절에, 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이런 하나님의 성품을 가지고 안식일을 보라. 하나님이 그 일곱 째 날을 복을 주셨다. 안식일을 정하시고 나서는 그 날에 복을 주셨다. 다른 날들과 구별되었다는 것. 하나님의 것. 제사장들에게 옷을 입히시고 양을 드리는데 하나님께 드리기 위해서 구별되었다는 것은 따로 떼어놓고 이 날을 하나님의 것으로 하셨다. 천지를 지으신 모든 날은 복되게 하신다. 일곱째 날에 복을 주신다. 그것을 지키는 것을 그 복을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누어 갖게 된다. 이것은 무슨 의미냐면, 하나님이 멀리 보고 계신다. 하나님의 안에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을 믿으며 살아가는 그 사람들에게는 반복해서 그 복을 주신다. 세월을 살아가면서 일곱 번째 날은 복을 받으면서 살아간다. 하나님의 계획이다. 오늘도 주일을 안식일로 주셨다. 주일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참된 안식을 주시는 날이다. 하나님이 시간 속에 복을 감추어 주시고 계신다. 누구든지 창조하신 하나님의 법칙대로 주님의 날로 믿는 자는 하나님의 복이 저절로 스며들도록 하나님께서 안배하시는 것이다. 어떤 어려운 자라도 주일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은 멀리보고 인도하신다. 우리가 버티면서 살 때 가장 큰 복이 주일이다. 주일에 받은 은혜를 가지고 나머지 사는 날은 월,화,수,목,금,토를 복되게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안식일에 대한 제도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는 것이다. 믿는다면 그 하나님 안에서 주일을 잘 지켜라.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잘 지켜라. *출애굽기 20:10절에, 10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이날은 하나님의 소유이다. 내 것을 가지고 인심을 쓰지 말고 이 날은 하나님의 날이다. 주일을 지키는 것이다. 주일을 잘 지키는 것은 내가 복을 받는 것이다. 이 시간 속에 복을 감추어 놓으셨다. 성도가 이 땅에 살면서 어떤 배신이 있고, 어려움이 있더라도 그 주을 지키면 하나님은 멀리 보심을 믿고 살아가야 한다. 주일 성수를 잘 해야 한다. 이번 수양회 기간에 고민을 잘 해서 주님을 잘 섬기는 주의 종으로 주일을 잘 지키며 살아가야 한다. 주일만 잘 지켜도 은혜가 된다. 주일은 율법적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다.
▷두 번째는 모든 하는 일에 대해서 모두가 예배가 되게 하라. 교회 안 밖에서 모두가 예배가 되어야 한다. 직장에서 일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로마가 복음화가 되고 크리스쳔이 7%였다. 사회의 영향력이 약했다. 교회는 거룩하고 세상은 거룩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창세기 2:5절에, 5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 - 땅을 갈다. 아직 땅을 갈 사람이 없다.
*창세기 2:15절에, 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에덴동산을 경작하고 지킨다. 아바드라는 단어이다. 아바드는 일하다와 예배하다이다. 에덴동산을 하나님이 맡겼을 때, 그 자체로만 보면 일이지만 하나님이 맡기신 것에 순종하기에 이것은 예배가 된다. 밭에서 경작하는 것은 동산을 지키고 돌보는 것이 동산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 다 예배와 같다. 내가 보기에는 사소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예배이다.
*창세기 1:28절, 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일이다. 이것이 문화명령이고 땅에 충만하고 다스리고 이것은 인생에게 준 명령이다.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것도 예배이다. 아이도 많이 나아야 한다.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다. 직장, 학교, 이 사회 발전을 위해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도 다 예배이다. 우리가 가장 중요하다. 그것도 예배이다.
*디모데전서 4:4-5절, 4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교회서나 어디서나 남과 비교하면 안 된다. 감사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 내가 큰일이든 작은 일이든 감사로 받으면 하나도 버릴 것이 없는 예배가 된다. 우리 주변에, 내 형편도 다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감사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는 것이다. 마음에 안 들어도 그 사람들 붙잡고 엎드리면 다 예배가 된다. 그렇게 기다려야 한다. *골로새서 3:23절,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어떤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 하듯이 하라. 여러분 무슨ㅍ일을 해도 그렇게 하라. *마태복음 25:40절, 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소중하든 안하든 큰 사람에게 하나 작은 사람에게 하나 다 하나님께 예배라는 것이다. 우리는 큰 사람에게만 하는 것은 큰 일이라고 생각하고 작은 사람에게 하는 것은 하찮게 여기는 것이 문제이다. *누가복음 16:10절, 10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니라. -크고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충성이 문제인 것이다. 하나님이 아무리 사소한 것, 작은 것을 해도 그것을 소중히 여기면 그것은 다 예배가 되는 것이다. *마태복음 10:42절, 42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작은 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 제자라는 것 때문에 이 작은 자 중에 냉수하나 준 것도 하나님은 잃지 않으신다. 하나님 앞에서는 사소한 일이 없다. 직업이나 일에 차이,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중요하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방향이 문제이다. 하나님이 내게 맡기셨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현장에서 예배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위를 중심으로 하나님의 복이 흐르게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라. 모든 일에 다 예배가 되게 하라. 공부하는 것도 섬기는 것도, 아주 작은 일이라도 성실하게 하다보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반드시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멀리 보시고 이끄신 분이기 때문이다. 주일을 잘 지켜서 복이 되게 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고, 모든 일에 예배가 되게 하며 여러분의 삶을 제물로 드리라. 세 번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제물로 드려야 한다. 나의 삶을 제물로 드린다. 새벽에 성경은 읽었지만 해석하지 않은 부분이 있다. 아래 로마서 12장 1절이다. *로마서 12:1절,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를 제물로 드리는 것이 예배라고 한다. 여러분 이것이 무슨 뜻인가? 제물로 드리지 못하면 예배가 안 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에 나와 있으니 함께 설명하겠다.
*마태복음 5:16절, 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여기에 보면, 두 사람이 나온다. 너희가 나온다. 너희는 제자들이다. 너희 빛은 누구에게 비추라는 것인가? 사람들에게 빛을 비치게 하라고 하신다.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영광 돌리게 하라는 것이다. 성도는 세상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있으면서 세상 사람들이 우리 성도를 보고 하나님께 영광 돌리게 하라는 것이다. 하나는 제사장이다. 구약에 누군가가 제사를 드릴 때에 제사장에게 나온다. 제사장은 그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간다. 그러니까 너희가 제사장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제사장이 사람들이 제물을 갖고 않는데, 화려한 옷을 입고 쇼맨쉽을 하는가? 그것은 큰일이 난다. 하나님 앞에 제물가지고 오는데 제사장이 너무 화려하거나 튀면 하나님께 집중이 안 되고 제사장에게 집중된다. 제물은 제단에 올라가면 죽어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제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영광이 흐르는 곳에 막지 말라는 것이다. 교회에서 섬기는 자리에서 너무 드러나서 예배드리러 왔는데 예배가 방해가 되고 시선이 집중이 되면 하나님께 예배가 막힌다. 내 주변에 모든 사람 관계에서 그 사람이 하나님께 가도록 다리를 놓는 것이다. 이런 삶을 살아야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다. 주일을 중심해서 복이 흐르게 하고 모든 일이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되게 하고 나 자신을 하나님께 영광을 위한 도구로 드려야 한다. 그러면서 멀리 보시는 하나님께 맡기면 된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 한마디로 인내 하고 버티어야 한다. 코로나 지날 때까지는 인내해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 속에 역사하고 계시지만 그 크신 역사가 일어나기까지 우리는 기다려야 한다. 은혜 받으면 좋았다가 하나님이 찾으면 없어져버리는 자 된 자를 보고 하나님이 어렵다. 우리가 믿지 못할까봐 성경과 교회를 주신 것이다. 성경, 교회, 우리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보고 참고 인내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살아야 한다.
※ 여호수아 국립공원(쟈수야 나무)- 이 나무는 약간의 고산지대에서 자란다. 팔을 벌리고 있어서 여호수아가 팔을 벌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 안쪽에 가면, 히든벨리가 있다. 뭐가 숨겨있어서 히든 벨리라고 했는지가 궁금했다. 완전 여기는 LA 사막지대이다. 여기에 여름에 바람이 불면 다 죽는다. 그런데 히든 벨리 안에는 야생화가 있다. 길을 걸어가다 보면 꽃들이 숨어있다. 그래서 학자들이 연구를 했다. 원인은 히든벨리는 큰 암석이 둘려 싸여 있어서 바위들이 뜨거운 바람을 다 등에 업어서 견딘다. 바가 오면 바위에 스며들어서 바위가 시원해서 꽃이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바위가 되어 줄 때, 히든벨리가 된다. 우리 집안에 히든벨리가 되는 것은 그냥 되는게 아니다. 그러나 이 순간 우리를 사랑하시는 일로 말미암아 주일을 지키면서 버티고, 작은 능력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버리고, 사명을 위해 버티고 냉수하나 주시는 것도 하나님은 기억하시니 나의 작은 능력이라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버티면 우리의 히든벨리가 만들어지는 것이 된다. 사랑의 교회가 아픔과 어려움이 있었다. 사랑의 교회가 든든히 서면 이 땅에 교회가 더욱 든든히 선다. 우리 사랑의 교회가 버티어야 히든벨리가 된다. 모두가 잘 되어 갈 것이고 우리 자녀도 잘 될 것이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계시기에 인내해야 한다. 힘든 가운데 하나님은 멀리 보고 계시니 우리를 이기게 하시니 이번에도 넉넉히 견디고 버티어야 한다. 우리 사랑의 교회가 견디어서 하나님을 넉넉히 이길 힘을 주실 것이다. 견고한 교회로 예배와 주일을 잘 지켜서 히든벨리인 우리 교회를 잘 지키고 버티어야 한다. 넉넉히 이기게 하실 것이다.
♣요약 모든 일에 다 예배가 되게 하라. 공부하는 것도 섬기는 것도, 아주 작은 일이라도 성실하게 하다보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반드시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멀리 보시고 이끄신 분이기 때문이다. 주일을 잘 지켜서 복이 되게 하고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 하고, 어디서나 모든 일에 예배가 되게 하며 우리의 삶을 제물로 드려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제물로 드려야 한다. 우리가 잘 견디면 하나님은 넉넉히 이길 힘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의 히든벨리인 견고한 교회로 예배와 주일을 잘 지키고 버티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아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와 참된 신자들 사이에 있는 사랑과 우정의 끈을 끊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다음 두 가지를 생각해 보면, 첫째, 그리스도는 이 모든 것 때문에 그만큼 우리를 덜 사랑하시거나 또한 그렇게 하려고 하시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그의 사랑을 감소시키는 원인도 증거도 되지 못한다. 이러한 것들이 우리를 다른 친구들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는 있다. 바울이 네로 앞으로 불려갔을 때 모든 사람들이 그를 버렸지만 그때에도 주님은 그 곁에 계셨다. 핍박하는 원수들이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다 빼앗아 갈 수 있을지라도 그리스도의 사랑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아무리 발악을 할지라도 참된 신자들을 비참하게 만들지는 못한다. 둘째, 우리는 이러한 것 때문에 그를 그만큼 덜 사랑하거나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가 그만큼 덜 사랑하신다고 생각지 않기 때문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비록 그 때문에 고난을 받을지라도 결코 그를 덜 사랑하지 않으며 그 때문에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결코 그를 나쁘게 생각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①우리는 이긴다. 묘한 방법으로이기는 것이지만 그것은 그리스도의 방법이다. 그것은 불과 검보다는 믿음과 인내로 이기는 좀 더 확실하고 고귀한 방법이다. 때때로 원수들은 자기들이 순교자들의 꺾을 수 없는 용기와 지조에 의해서 당황하고 압도되었다는 고백을 하였다. ②우리는 넉넉히 이긴다. 성도들은 정복자보다 더 나은 승리자이다. 먼저, 그들에게는 손실이 적다. 많은 경우에 정복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희생이 치러진다. 그러나 고난 받는 성도들이 잃는 것은 무엇인가? 물론 그들도 잃는다. 그러나 그들은 금이 용광로에서 잃어버리는 찌끼 같은 것밖에 잃어버리지 않는다. 다음으로 그들은 많은 이득을 얻는다. 그들에게는 명예, 평안, 그리고 시들지 않는 의의 면류관 등 전리품이 매우 풍성하다. 이러한 점에서 고난 받는 성도들이 승리한 것이라고 하겠다. 고난이 많을수록 위로는 더욱 풍성하다. 웃음을 머금고 화형 틀로 가며 불꽃 속에서도 노래하던 이들이야말로 넉넉히 이긴 사람들이었다.
이사야 6:1~8,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 ▶우리의 간절한 예배를 주님이 흠향하시길 바란다. 많은 성도들이 온전함 시리즈를 가지고 지난 6개월 동안 껍질을 깨는 기간, 묵은 땅이 온전히 기경이 되는 시간이었다고 한다. 모두가 다 같다. 온전함위 주제가 엄청난 부담이었고, 사모함의 성도들의 눈빛이 감당이 안 될 정도였다. 그러나 감당할 수 있는 환경과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오늘은 ‘제자 서임식 I’ 이라고 했다. 갑작스런 코로나 델타변이로 인해 준비한 서임 식을 연장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사랑의 교회만 바라보고 문제가 있으면 다 우리 교회를 찍어서 올리는 은사 받은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게 서임 식, 위임식이다 하는 것은 사실 그동안 위임식을 한다고 하면, 당사자들은 그렇지 않지만, 많은 성도들은 축하하고 어떻게 보면 관람하는 것이다. 이 위임식은 여러분들이 직접 서임하기 때문에 성경을 놓고 해야 해서 사명의 깃발을 들고 해야 하니, 다시 한 번 마음의 소원대로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8월 29일 주일에 가을 시작 주일에 했으면 좋겠다. 아멘... !!! 오늘 하자고 하면 할 수도 있다. 지난 6개월간 성도의 온전함 시리지를 나누면서 왜 이렇게 이 코로나 펜데믹 가운데 이런 무게감의 말씀을 전하게 주님이 주셨음에 한 가지 명확한 것은 어려움과 위기가 사실은 카이로스 타임이 될 수 있다. 어려움과 위기가 우리의 때에 하나님의 신적 개입의 시간이 될 수 있다. 그 바벨탑 사건으로 창세기 11장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런데 한 이름도 없는 촌부 75세의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고, 사사시대 말기에 혼란함이 극도였을 때에,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사무엘을 예비하셨다. 유럽을 흔든 흑사병으로 인해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그래서 코로나 시대에 서서히 마무리가 되어가면서 하나님의 신적 개입을 통해 카이로스 타임을 경험할 수 있는 은혜 주시기를 소망한다. 오늘 본문 이사야는 구약성경의 예언서 가운데 노른자위아며, 하이라이트이다. 그중에서도 제일 높은 고봉이 바로 6장이다.
*이사야 6:1,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웃시야 왕은 16세 등극해서 52년 동안 예루살렘을 통치했다. 68세에 죽었다. 청소년 왕이었다 그러니 그 주위에 모사꾼들과 음모꾼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으니까 어릴 적부터 절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하여 신뢰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뻐하셨다. 유대나라가 군사강국, 웃시야 때에 경제 강국이 되도록 하나님은 축복해주셨다.
*역대하 26:14~15절에 보면, 14 웃시야가 그의 온 군대를 위하여 방패와 창과 투구와 갑옷과 활과 물매 돌을 준비하고. 15 또 예루살렘에서 재주 있는 사람들에게 무기를 고안하게 하여 망대와 성곽 위에 두어 화살과 큰 돌을 쏘고 던지게 하였으니 그의 이름이 멀리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었더라. -웃시야는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한 국가가 되게 하셨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의뢰하니 하나님이 기이한 도움 심을 주셔서 군사 강국 실리콘 벨리를 만들어주셨다. 최정예군인이 된 것이다. 이것으로 끝나면 좋았을 것인데 바로 이어서 보면,
*역대하 26:16절에 보면, 16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 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그가 강성하여지니 마음이 교만해졌다. 잘된다고 할 때에 안정적일 때, 인간은 다 비슷하다. 인간이 잘 되면 교만해진다. 우리는 잘 될수록 몸부림쳐서 주의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그래야 은혜를 유지할 수 있다. 웃시야가 강대국으로 잘되니까 교만이 찾아왔다. 그 영광스런 제사를 제사장이 드려야 하는데 자신이 드렸는가? 자신이 제일인 줄 안다. 왕이 결코 할 수 없는 성전의 제사장 역할을 한 것이다. 그것을 본 대 제사장 아사랴가 놀라서 강직한 제사장들을 데리고 가서 왕께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말리는 것을 무시하고 듣지 않았다. 교만한 것이다. 그래서 망하게 된 것이다. *역대하 26:20 20 대제사장 아사랴와 모든 제사장이 왕의 이마에 나병이 생겼음을 보고 성전에서 급히 쫓아내고 여호와께서 치시므로 왕도 속히 나가니라. - 아찔한 말씀이다. 하나님이 웃시야를 쳐서 졸지에 나병(癩病) 걸렸다. 나중에 아들이 대신 다스리고 나병이 걸려서 쫓겨났다. 약 10년간 유폐(幽閉)가 되어서 말년을 쓸쓸하게 보낸 것이다. 이사야가 이 사건이 마음에 각인되어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이는 시기에 다 포기하고 싶으 시기에,, 힘든 시기에, 리더가 제대로 없는 불안정한 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은혜를 주셔서 이 만큼 경제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주셔서 나름 잘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 얼마나 건강 하는지를 영적으로 주님의 온전함을 닮아 가는지, 영적으로 우리는 얼마나 얻고 영적인 것을 먹고 살고 있는지를 보라. 물질적인 번영은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적으로 문제가 있다. 웃시야 시대에 사람들이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강국으로 잘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오늘 본문 앞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볼 수 있다.
*이사야1:12에,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예배가 온전하지 못했다. 예배를 엉터리로 드리고 있다. 군사강국이고 경제 강국인데 영적으로 피폐(疲弊)해 있다. 듣기로는 우리 성도들이 온라인 예배를 드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집중했다. 그런데 코로나가 길어지는 시간이 되니 예배의 자세가 흐트러지고 편하게 변하게 되고 있어서 아쉬움이 너무 크다. 그리고 이것은 온라인 생중계로 드리는 우리가 21세기 판 마당만 밟는 예배가 아닌가 한다. 마당만 밟는 것이 아닌지를 본 것은 온라인 생중계를 보면, 설교만 끝나면 접속수가 확 떨어진다. 마지막 찬양, 축도까지 드려야 예배의 온전함이니 꼭 지켜야 한다. 마치고 온라인 헌금도 드려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인 것이다.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 비대면 좋아하다보면, 이 코로나 사태가 만들어 낸 사탄의 수류탄이 될 수 있다. 앞으로 2주간 비대면 예배를 드리라고 그러는데, 기가 막히다. 어디 정부가 예배를 드리라 말라 맘대로 하는지 정말 한심하다. 정부가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한다. 공산당도 아니고,,, 도대체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자유민주의가 아닌 듯하다. 교회가 정부에 길들여질 수는 없다. 만약에 우리가 드리는 이 주일예배가 내 인생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예배이고, 우리 인생의 마지막 드리는 예배라면, 우리는 형식적으로 드릴 수 없다. 그러니까 이 코로나 사태가 예배에 있어서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오늘 성도들은 한국교회 예배가 속히 회복되길 기도해야 한다. 단순한 예배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영적인 문제가 점검되는 시간이다. 마당만 밝는 자가 하나도 없었으면 좋겠다. 우리 사랑의교회 모든 성도들은 알곡 성도가 되길 소망한다.!!!~ 아멘. ▷본문 가운데 놀라운 동사 하나가 있다. 두 동사 가운데 하나만 오늘 하겠다. *이사야 6:1절에,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오늘 우리 삶 속에 주님이 어디 앉아 계시는가, 주님이 높이 앉아 계시는가, 영광의 보좌에 앉아 계신는가. 내가 더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지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사야 6:3절에,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사야 6:4절에,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이사야가 본 하나님은 영광이 충천한 나라이다. 하나님의 쉐키나의 영광이 가득 찬 것을 보았다. 오늘 찬송에도 생명과 빛으로 권능으로....!!!~~그걸 본 이사야는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고 찬양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찬양하는데 세 번이나 반복한다. 이것은 초월적 비교이며, 감당할 수 없는 비교이다. 카도쉬이다. 하나님의 거룩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스랍들이 그렇게 한다. 이 스랍이라는 것은 단어가 불타는 존재의 천사이다. 두 날개는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는 발을 가렸다. 얼굴을 가리웠다는 것은 너무나도 거룩하셔서 영광스런 하나님을 감히 볼 수 없어서 얼굴을 가린 것이다. 발을 가렸다는 것은 우리의 발이란 길 가는 것인데, 자기주도적인 삶을 말한다. 발을 가린 것은 자기 위지, 자기 길을 모두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이다. 모두 자기 주도적 삶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이다. 자기 발로 다니는 것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두 날개는 계속적인 섬김과 하나님께 언제든지 순종하는 것이며, 신속하게 순종하며 섬긴다는 것이다. 이 자세는 웃시야의 교만과 비교되는 것이다. ▷우리가 온전함의 고봉에 올라가기 위하여 이 서임식을 앞에 놓고 첫 번 째 생각할 것은?
I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본즉.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보지 않고서는 온전해 질 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과 온전함이 연결되어 있다. 사람들이 왜 온전해지지 못하는가? *요한복음12:43절을 보면, 43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면 온전해 질 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과 온전함,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 초월적인 것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평생 계속 바라보고 그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 속에 체득하고 매주일 이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영광을 경험해야 한다. 진실로 예배할 때에 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기 때문에 은혜를 받는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트럼펫이나 관현악을 들어서 마음이 찡했을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 예배하는 것이 가장 온전한 내 능력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것 때문에 온전한 것이다. 내 속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온전함이 되는 것이다. 내 능력이 아닌 내 속에 계신 하나님이 온전하게 나타남으로 온전해진다. 진정한 온전함은 내 능력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것 때문에 온전해 진다. 키는 하나님의 영광을 접목할 때 우리가 온전해지는 것이다. 우리의 재주와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성도의 온전함은 하나님의 영광과 접목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직결되어야 한다. 우리의 숙명론, 운명론을 다 뛰어 넘는 것이다. 안 믿는 인생을 뭐 좀 아는 사람들은 인생은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다 안다. 그래서 온전 론이 좀 어려운 말이다. 행위로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으로 승화되는 것만이 온전해지는 것이다. 주시면 실수와 실패도 없다.
*이사야 6:5절에,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주님 앞에 납작 엎드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럴 때에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신다. *이사야 6:6~7절에, 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그래서 죄가 사하여진다고 하신다. 할렐루야~!! II. 하나님의 영광을 본 성도는 온전해진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에 우리가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통하여 성도는 온전해진다. 성도의 온전함과 하나님의 영광이 직결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에서 말하고 있다.
*고후 4:17절에,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기가 막힌 말씀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가 고통을 받으면 그 고통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고난을 통하여 인격이 성숙되었다고 하지만, 성도의 고난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에 중한 것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이다. 고난과 환난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은혜가 부어지겠구나!!~~ 이 영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고난당한 백성에게 부어주시는 것이다. 그 기회를 받는 것이 온전해 지는 지름길이다. 세상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고난이 축복이 되는 이유는 고난을 통하여 엄청난 하나님의 영광을 부어주시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비포와 에프터가 분명해지는 것이다. 매주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줄 믿는다. 우리의 삶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빛나고 있는가? 바울은 실천한 사람이다.
고후 4:8~10절에, *고린도후서 4:8~10절에,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믿음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고난이 있어도 납작 엎드려서 자녀들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 신학과 연결된다. *에스겔 1:28절에, ~내가 보고 엎드려~~ *요한계시록 1:17절에, 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납작 엎드릴 때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 하신다. 그럴수록 주님을 닮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니 우리 모두가 앞으로도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있을 줄 믿는다.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있다.
III.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앞에 자신을 재발견하라. *요한복음 1:14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영광이 있으면 은혜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하나님의 영광이 은혜가 따르면 나를 재발견하게 된다. 나를 재발견할 때,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주님의 영광이 임하면 나를 재발견하는 영광의 선순환이다. 어떻게 재발견하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주님의 영광을 바라볼 때, 은혜의 선순환이 된다.
*이사야 6:7절에,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되어 자신의 죄가 사하여졌다. 이 은혜가 깨달아지길 바란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이 함수관계를 잘 감당하여야 한다. 그럴 때, 나 같은 죄인이 용서받았음을 감사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으며, 온전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영광은 하나님의 것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는 자에게 그 영광을 부어주시는 것이다. 그럴 때에 추상적인 용어가 있다. 우리 성도님들은 앞으로 이 영광은 환난과 역경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에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을 결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바울이 고린도후서 3:18절에 있다.
*고린도후서 3:18절에,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주의 영광을 바라보고 깨달으니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주의 영광을 바라보니 더욱 온전해진다. 우리는 봄으로써 변화되며, 우리가 공로의식이 아닌, 인간의 행위의식으로 연결되면 안 되며,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에 압도되어 기도할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온전함을 닮아갈 것을 확신한다. *로이드 존슨 목사님은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영광의 하나님만을 바라보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우리가 올라가야할 온전함의 고봉이 무엇인가? -거기 고봉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여 기다리실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라. ※영화 ‘불의 전차’란 영화가 있다. 그는 선교사 자녀였다. 스코트랜드 출생이다. 불의 전차’는 1924년 파리 올림픽 육상 금메달리스트인 ‘해럴드 에이브라함’과 ‘에릭 리델’ 두 선수의 기적 같은 감동의 레이스를 그린 실화의 영화인데, 그는 주일에 이길 수 있는 대회에서도 주일에는 예배를 드린 인물로 유명하다. 육상대회 결승이 있었는데 그는 주일이라며 전도 집회를 한 선수이다. 나중에 7월 11일 기회에 그가 400미터에서 세계 1위를 했다. “Not on glory Sunday.”로 유명하다. 22세에 영광이 금메달을 위해 세상의 금메달을 포기한 청년이다. 성경구절이 하나 있다. 그가 올림픽을 못하고 주일에 전도집에 가면서 쪽지를 건내 주었는데 그 안에 이런 구절이다. 에릭은 이렇게 이야기 했다. 200미터는 본인 힘으로 달렸고, 남은 200미터는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이겼다고 말했다. *사무엘상 2:30절 “나를 존중이 여기는 자를 내게 존중히 여기겠다.” 후에 그는 중국 선교사로 갔으며 주님 나라를 위해 순교한 자이다. 주일을 거룩하게 여긴 것처럼, 하나님의 면류관의 영광을 위하여 온전함을 사모하는 우리가 기도와 예배와 목자의 심정, 편지, 헌신된 삶으로 달려가서 모두가 다 21세기의 영적 엘 리더가 되어야 한다. ♣요약 우리가 사람의 영광을 사랑하는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려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은혜를 바라보며 2주간 비대면 예배를 더욱 거룩하고 정직하게 드려서 은혜의 진리가 충만하고 영광의 빛 앞에 자신을 재발견하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주님의 온전함을 닮아가야 한다. 주님의 영광의 은혜를 충만히 부어주실 길을 믿고 사모하여야 한다.
♣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1년 7월 10일)제목: ''온전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 말씀: 사도행전 20:22~24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말씀읽기: 조영광(대학4부), 정수진(청년부) 설교자: 한정훈 선교사님(체코) *예배인도 및 기도 마무리: 오정현 담임목사님 --------------------------------- 사도행전 20:22-24, 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한정훈 선교사님.- “온전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 -코로나 상황이 악화되고 델타 바이러스 재유행이 확산되는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사랑의교회를 지켜주시고 이 시대와 열방 가운데 복음의 등불을 밝혀 주신 주님을 찬양한다. 지난 2016년 특새 때에 이곳에서 파송을 받아 체코슬라비아로 갔다. 5년 동안 체코 선교와 저희 가정을 위해 담임 목사님과 성도님들의 기도와 후원으로 함께 해주시고 건강하게 잘 마칠 수 있었다. 잠시 안식 월을 맞아 고국을 방문하여 교회 앞에 선교 보고를 드리게 되어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여러분은 그 동안 어떤 길을 달려왔는가? 지금은 어떤 길을 달려가고 있는가? 그리고 앞으로 어떤 길을 향해서 달려갈 것인가? 바울은 *디모데전서 1:13절 말씀에,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푹행자였다”라고 고백을 했다. 하지만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 예수의 증인으로 사도와 선교사로서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이 달려가야 할 길과 주님께로 받은 사명 또한 다르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는 것이 바울이 계획하고 달려갈 길이고 또한 주님께 받은 사명임을 알 수 있다. 그 길 앞에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한 가지 성령께서 계속해서 바울을 깨닫게 하는 것은 결박과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주님과 복음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릴 뿐만 아니라 생명까지도 아끼지 않는 바울의 삶이 온전한 그리스도의 제자임을 깨닫게 해준다. 체코 기독교 역사에도 사도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걸었던 많은 영적 지도자들이 있다. 600년 전 체코의 ‘얀 후스’는 프라하 대학의 교수로서 학장, 총장으로서 교황과 당시에 성직자들의 부패와 그리고 면죄부 발행하는 성경에 위배되는 이 악행을 폭로하고, 성경으로 돌아올 것을 전파했다. 1402-12년까지 베들레헴 체플에서 라틴어로 된 성경을 체코어로 번역해서 체코어로 성경을 가르쳤다. 그러다가 총장에서 파면을 당하고 콘스탄티 공회에서 이단으로 정죄를 받아 위클리프와 함께 화형을 당했다. 20년 전에 이미 죽어서 이미 유해가 되었던, 위클리프의 시신까지 꺼내서 화형을 시켰다. 당시 공회에 참석한 교황과 황제 등 450여명의 제후들과 추기경들은 후스를 정죄하고 심판하기 위해 자리를 마련했지만 후스는 자신의 생명을 구걸하지도 않았고 복음 때문에 화형을 당했다. 후스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후스는 훗사-거위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름이다. ‘지금은 당신들이 거위 한 마리를 불살라 죽이지만, 백 년 뒤에는 백조가 나타날 것이다’ 백조가 바로 위텐베르크에서 종교개혁을 이루었던 바로 마틴 루터이다. 루터 또한 자신이 보헤미야 얀 후스의 가르침이 성경적이었고, 그의 사상과 그의 신앙을 따랐다고 라이프찌히 3차 논쟁에서 고백을 했다. 야누스를 화형 시킨 교황은 그 기세를 몰아 군병을 일으켜서 프라하에 남아있는 후스 파를 처단하기 위해서 전쟁을 일으켰다. 이 때 퇴역장군 얀 쥬시카 장군은 ‘만약 우리가 후스의 죽음을 그대로 방치하고 흩어진다면 더 이상 체코에서는 더 이상 종교개혁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후스파를 이끌고 프라하에서 70킬로 떨어진 남부 작은 도시 타보르에 도시를 건설하고 초대교회 성도들처럼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후스 전쟁을 15년간 진행한다. 당시 후스 전쟁에서 체고와 헝가리 독일에서 큰 승리를 거두었고, 가장 많은 때는 20만 명이 넘는 후스파들이 확장이 되었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이 전쟁으로 수많은 개신교도들이 목숨을 잃었지만 마틴 루터 종교개혁에 큰 영향을 끼쳤다. 100년 뒤에는 1620년 프라하 빌라후라 언덕에서 개신교와 카톨릭과의 전쟁이 벌어진다. 이 전쟁에서 개신교가 패배를 한다. 27명의 개신교 지도자들이 프라하 광장에서 처형을 당하고 재산과 집을 몰수당하고 3만 9천여 명의 기독교, 개신교들이 망명길에 오른다. 그리고 대부분의 평민들은 카톨릭에 복속이 된다. 그 때 마지막 형제 연합교단 목회자였고, 또 학자였던 요한 아모스 코메니우스가 망명길에 오르면서 성경을 기반으로 한 교육 사역을 시작하게 되고, 유럽 전역을 다니며 성경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사역을 계속한다. 이 전쟁이후에 유럽에는 30년 전쟁이 일어나면서 800만명의 사람들이 이 전쟁으로 인해서 목숨을 잃게 된다. 그 뒤 또 100년 뒤 1720년 수호돌 모라비아 형제단은 모라비아 작은 마을이 있다. 카톨릭 신자들로부터 큰 핍박을 받으며 신앙을 지켜야만 했다. 성도들의 집안에서 성경이 발견되면 이웃 카톨릭 사람들이 와서 구타를 하고 채찍질을 했다. 심지어는 쇠고랑을 차고 일을 해야만 했다. 신앙을 지키며 혹독한 핍박을 받던 수호돌과 플렉, 여러 마을 그리스도들은 ‘크리스쳔 나비다’라 리더를 중신으로 폴란드를 경유해서 독일 헤른후트에 정착한다. 550여명의 그리스도인들이 이곳으로 이주를 한 것이다. 그곳에서 독일 변호사였던 진첸 드루프 백작이 모라비안들을 받아주어서 그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고 24시간 기도회를 백년간 지속한다. 그리고 1760년 진첸드루프가 죽을 때까지 226명의 선교사들이 파송을 했고 이후 삼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선교사로 파송을 한다. 그들은 선교지에 가서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현지인과 동일한 삶을 살면서 자비량으로 선교를 했다. 모라비안 선교가 한국 선교에 중요한 기반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말 중요한 소식 하나가 있는 것은, 당시 모라비안 선교사들이 선교지로 나갈 때는 관을 짜서 가져갈 정도였다고 한다. 영국의 월리엄 캐리와 목회자들이 조지아 주로 선교여행을 떠나는데 4개월 동안 풍랑 이는 바다를 해매였다고 한다. 다를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는데, 모라비언 형제들은 모이면 시편을 묵상하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월리암 캐리는 오히려 물었다. 당신들은 두렵지도 않냐고 했다. 그러나 모라비안 들은 얼마 후면 사랑하는 주님을 만날 것인데 무엇이 두렵냐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월리암 캐리는 자신을 돌아보고 회심을 하고 다시 한 번 하나님 앞에 신앙과 앞으로 사역을 열어갈 때 모라비안 들이 함께 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오늘날 모라비안 그리스도인들이 전 세계 백만 명 정도 흩어져 있다. 그리고 헤르루트에는 6천여 개의 모라비안 가족들의 묘지가 있는데, 이곳에서 그랑즈의 선교역사를 증명해 주고 있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피묻은 복음을 자신들의 생명과 맞바꾸며 신앙을 지켜온 체코 그리스도인들은 역사 속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저희 가정을 체코로 부르셨다. 영상~
-선교는 주님께서 다 하신다. 주님께서 다 하셨다. 선교는 교회가 한다. 순교 영성과 모라비안 선교 영상을 통해 본 체코 땅에 오늘날 무신론자는 74%이다. 그리고 카톨릭은 명목상 20%정도이다. 하지만 개신교의 복음주의 성도는 1%가 안 되는 10면 정도이다. 우리 사랑의 교회 재적 성도보다다 적다. 하나님은 저희 가족을 영적으로 척박한 체코 땅에 보내 주셔서 제자훈련과 노방전도의 사역을 집중적으로 하게하셨다. ♤제자훈련 인터뷰 영상을 잠시 보겠다. 우리는 체코의 제자훈련 1기생이다. 밀루이떼!!~~(감사합니다). “체코 선교를 위해 기도와 후원해 주셔서 반갑고 감사합니다!~~-데이비드 피스카(청년 리더 전도자)- 하나님 말씀을 배우며 격려와 은혜를 받고 있다. 훈련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를 경험하고 서로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가고 있다.” -데이비드 형제는 김치도 잘 담근다.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의 길을 계속해서 달려가는 이 데이비드의 형제를 소개한 것은 칼 세미나 참석이후 양육과 훈련이 절실히 필요한 체코 교회에 제자훈련을 하고 많은 시간을 저와 함께 준비과정을 거치며 대학 청년들을 선발하여 면접을 하고 영어로 된 우리 제자훈련 교제를 체코어로 번역을 하며 제자훈련을 시작했다. 우리 오목사님께서 제자훈련에 대한 인터부를 해주셔서 체코 교회 매거진에 실려서 많은 목회자들과 교회들에게 제자훈련에 대한 체계가 이루어졌다. 2020년 6월 체코 제 1기 제자훈련 생 7명이 32주 과정을 마치고 수료를 했다. 얼마나 큰 감격과 감동이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지난 4월에 데이비드 형제가 위클리프 성경 번역 선교사로 헌신했다. 데이비드가 선교사로 헌신하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사랑의 교회 칼 세미나 훈련을 받고 체코 제자훈련 1기를 훈련을 시키면서 본인 스스로 말씀의 큰 은혜를 깨달아서 나아가 사랑의교회 성도님들이 체코의 선교를 위해서 매일 기도하는 것이 현장에서 성령의 역사로 나타났기 때문에 자기가 헌신하게 되었다는 것을 미팅에서 줌으로 고백을 했다. 데이비드 형제는 위클리프 성경번역 선교사로 헌신하여 9월부터 영국에서 언어과정을 마치고 아랍권 아시아나로 갈 계획이다. 데이비드의 고백처럼 사랑의교회 제자훈련 철학은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어디든 동일하다는 것을 말씀 드리고 싶다. 우리는 내일 주일 온전한 성도 서임 식을 앞두고 있다. 그러나 코로나 펜데믹 상황은 폭풍 치듯 개인의 삶과 교회 공동체, 나아가 국가와 세계 가운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 같다. 지구촌에 이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고통 가운데 있다. 그런데도 주님은 우리에게 “너희가 세상의 빛이다.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우리를 통해서 세상이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기 원하신다. 힘들고 어려울수록 교회는 세상의 등불이 되어야 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생명의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교회 공동체 속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로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우리가 달려가야 할 길을 멈추면 안 된다. 주님이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명령으로 주신 사명을 결코 잊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은 코로나 중에라도 감당해야 한다. 우리 전도팀은 코로나 이전에는 공원에서 거리에서 광장에서 겨울에는 쇼핑몰에서 대면 복음을 전하였다. 체코에서 지난 3월에는 코로나가 심한 때에는 확진 자가 만 명, 또는 만 오천 명의 확진 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170만 명이 코로나에 확진되었다. 검사하지 않는 사람들 포함하면 아마도 200만명이나 되었다. 그때도 우리는 거리두기와 정부 방역지침을 따르면서 허가를 받고 1인 마이크 전도를 계속했다. 광장이나 지하철 어귀에서 찬양을 하고 간증하고 워십을 통해서 복음을 전했다. 현재 체코는 70%가 백신을 맞았다. 하루에 일이백 명 미만으로 확진 자가 줄었다. 1% 체코 복음주의 교회와 성도들이 99%의 무신론 그리고 세속주의의 상대로 영적 전쟁을 벌이는 체코의 현실은 정말 힘든 상황이다. 동성애가 죄라고 설교를 하면, 어느 새 젊은 남자아이들이 저희 앞에 와서 키스를 한다. 체코에는 동성애자가 20만 명이 넘는다. 동성애 이슈가 무너지면 교회가 약해진다. 그리고 복음 전하기가 어려워진다. 아파트 베란다에서 감자를 투척하기도 하고, 술을 마시고 와서는 십자가를 불태우겠다고 협박도 한다. 심지어 앞에서 기타를 치면서 찬양을 하면 다른 악기를 가져와서 방해를 놓기도 한다. 열 명중에 여덟 명은 조롱의 눈빛을 흘기면서 지나간다. 그런 가운데 긍휼과 사랑의 마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그들도 복음을 듣고 구원 받아야 될 하나님의 사람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주님의 마음을 우리의 심정에 주셨다. 이렇게라도 전하지 않으면 체코 99%의 사람들이 진정한 복음을 듣지도 못하고 죽기 때문이다. 주님은 세상 사람들에게나 다른 종교에 그들에게 복음을 맡기지 않았다. 주님은 우리에게 복음을 의탁하셨다. 우리도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다. 우리 순장님들도 제자훈련을 받고 순장도 되고 교회 여러 직분과 직책을 맡고 또 선교사역에 힘쓰고 있다. ‘온전한 그리스도의 제자’는 어떤 모양이나 어떤 형태로라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 한국교회 역사를 보아도 힘들고 어려울수록 더욱 복음의 역사는 강력하게 일어난 것을 볼 수가 있다. 바울처럼 주 예수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을 동일시하는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이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기까지 하나님의 지혜를 모아서 특히 코로나 시대에 이 위기를 돌파해야 될 줄 믿는다. 주님께서 저희 가정을 체코에 보내주시면서 주셨던 말씀, 사명,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체코와 동유럽에 전파하는 일을 계속해서 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길 바란다. 그리고 체코와 동유럽에 정말 복음을 위해서 사명이 목숨보다 더 중요했던 사도 바울처럼 오직 성령의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서 화형을 당하기까지 자신을 굽히지 않았던 야뉴스처럼, 후스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체코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기를 목숨을 걸고 싸웠던 얀 쥬시카 장군처럼, 풍랑 이는 바다에서, 생명의 위협 속에서 잠잠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찬송을 드렸던 모라비안 들처럼, 그리고 온전한 제자의 삶을 계속해서 살기를 원하는 데이비드 픽사 형제처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신실한 제자가 되어서 이 위기를 극복하고 특히 사랑의 교회에 주신 한국교회와 세계교회, 북한교회, 열방을 복음화 하는 거룩한 사명을 주신 사랑의교회가 이 모든 위기를 세상보다 더 먼저 더 크게 뛰어넘어 하나님의 복음을 담대히 전하고 삶 속에서, 일터에서, 가정에서, 세상 가운데서 예수의 증인으로 살기를 소원한다. -----------------------------------------------------------------------------------------
▷담임 목사님.
-코로나 펜데믹에서 백년 만에 올까 말까한 이 어려운 가운데서도 주님을 찬양한다. 아멘, 10년 사역하고 체코에 간 한정훈 선교사님께 감사하다. 순장님들이 오셔서 오늘 찬양하니 너무 좋다. 조금은 조심이 되지만 우리가 정부에 대한 할 말은 많지만 조심한다. 주님이 주신 사명자로서의 몫이 있다. 사회 앞에서 가만히 있냐고 하는데, 싸우는 것이 다가 아니고 지혜가 필요하다. 코로나 검사를 다시 했다. 어제 밤 음성으로 나왔다. 이유는 지금 많은 사람들을 만나기에 우리 부부가 한 번 더 했다. 제일 다양하게 만나기에 기도하고 예배하고 설교한다. 그러나 비타민을 수시로 먹고 방역지침을 잘 지켜나가고 있다.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천 만 인구 가운데 체코는 만 명이 넘게 확진 자가 나왔다고 한다. 우리는 백신 어디 갔느냐고 묻고 싶다. 정부가 아무리 떠들어도 아닌 것은 아니다. 기도해서 속히 백신이 나오길 소망한다. 영국은 자유 함을 선포했다. 개인의 자유를 인정했다. 우리가 다 스마트 폰이 있기에 스스로 안 가고 스스로 하고 있으니, 그리고 교회도 거의 n차 확신이 없다. 한국 교회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 수많은 의료진과 교역자들이 알아서 하는데, 왜 정부가 통제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우리만 싸울 수가 없고, 한국교회에 자유를 박탈하지 말라는 것이다. 앞으로 정부 체제가 공무원 숫자가 많아지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처럼 말이다. 사랑의 교회와 한국교회는 개인의 자유가 하나님의 천부적인 확신이 필요하면 나중에 연대를 가지고 힘을 모을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작정을 하고 순장님들이 왔으니 자유민주주의와 이북과는 다른 자유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산업화에 감당하고 감당할 몫을 잘 지켜 주시길 바란다. 체코 개혁자 최초 쟌 후스이다. 기독교 개혁에 큰 헌신을 했다. 세계선교의 영적 자유를 위해서 노력했고. 종교개혁 자들이 5대 강령이 있다. 이 다섯 가지로 종교개혁을 단행했다. 마르틴 루터 3가지와 두 가지를 더하면 다섯 가지이다. 카톨릭과의 차이이다. 오직 성경은 당시에 사제의 전유물이었다. 누가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자국어로 해석이 안 되었다. 영어로 독일어로 번역했다. 당시에 한글은 양반의 글이 아니었지만 민초들을 누르고 솔라 스크립트의 성경의 절대 권리를 인정해야 한다. 온전한 서임 식을 놓고 고민을 많이 했다. 상황을 보니 4단계에서 내일 리더 서임 식을 그대로 다 하려고 하면 대한민국이 난리가 날 것이다. 내일은 조심을 할 것이다. 지혜롭게 마지막 승전가를 불러야 한다. 그래서 오늘은 이 성경도 준비를 했는데, 기도하는 가운데 9월 학기 시작하기 전에 하겠다. 예비 서임 식만 하고 본령은 8월 29일에 하겠다. 온전함을 이어서 영적으로 폭발하길 바란다. 비포, 에프터를 확신해야 한다. 솔라 크로와티라스 오직 은혜!!~ 지옥은 예수님을 안 믿으면 지옥을 가는 것이다. 균형감각을 가지고 왜 예수님의 피로 구원 받았기 때문이다. 영적인 성도들이 예수님을 안 믿으면 가는 것이다. ※종교개혁 신학 사상 다섯 솔라(Five Solas)
1. 솔라피데(Sola Fide)-오직 믿음 -하나님이 내리시는 은혜는 오직 믿음을 통해 받을 뿐이지 다른 어떤 것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2. 솔라 그라티아스(Sola Gratia)-오직 은혜 -구원에 필요한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덧입는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선물로써 하나님이 인간쪽에 아무런 조건을 찾지 않는다는 것이다.
3. 솔라 스크립투라(Sola Scriptura)-오직 성경 -진리냐 아니냐의 최종 권위는 오직 성경에 있다.
4.솔라크리스투스(Sola Christus)-오직 그리스도. -인간은 스스로 구원할 수 없고 오직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 값을 하나님의 의를 완전히 이룬 예수 그리스도 은혜로 덧입는 것 뿐이다. 거기에 요한 켈빈은 두 가지 추가
5.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a Deo Gloria)-오직 하나님께만 영광. -구원은 하나님이 시작하고 완성하시는 일이시며 거기에 인간이 참여하는 부분은 없기 때문에 모든 영광을 하나님이 받으신다. -이 다섯 가지를 어떤 상황에서도 한국교회와 사랑의 교회가 지켜 나갈 것이다. 이 마음을 가지고 함께 기도하자 정부의 영향을 받지 말고 우리 길을 가길 기도하고 한국 사회가 바로 가야하면 우리가 자유 해야 한다. 미국은 자유 함을 선포했다. 한국 치사율이 독감보다 낮다. 한국 교회의 은혜를 지켜 나가길 기도하자. 많은 사람들 접촉하여서 검사를 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방역지침 잘 지키면서 기도하자. 비포 에프터가 확실해 질 것이다. 내일은 예비 서임 식을 하고 8월 29일은 풀리면 50퍼센트가 모여 모두 예배하길 소원한다. 오직 하나님께 영광 돌립시다. 이제 암송을 하겠다. 이번 ‘사.겸.순.정.믿.선’-함께 공동체가 모여서 축복임을 확신하자. 암송을 하자. 암송 할 때 마다 새롭다. 말씀은 항상 새롭다. 능력 있다. 때마다 새롭게 하신다. 소식-온전한 서임 식, 내일은 예비 서임식이다. 성경은 8월 29일 나누어 책을 줄 것이다. 미국 대통령도 성경에 손을 얹고 한다. 온전한 제자훈련, 72구절 뒤에 나와 있다. 책이 글자도 크게 나와 있다. 종이 질이 좋다. 마음에 비석에 새기는 것이다. 비포와 에프터를 게시판에 써서 올려라. 청화지 서한 비림이라는 것이 있다. 중국이 자랑하는 유적지, 서열을 해서 그 사람의 인생관, 철학, 근면함이다. 중국에 유명한 자들을 거기에 비석을 세워두었다. 우리도 게시판에 하나님의 은혜를 비포와 에프터를 새겨서 주님의 기쁜 온전한 제자로 살기를 바란다. ♣요약 5년 동안 체코 선교와 저희 가정을 위해 담임 목사님과 성도님들께서 기도와 후원으로 함께 해주시고 그 기간 건강하게 잘 마칠 수 있었기에 감사와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온전한 그리스도의 제자’는 어떤 모양이나 어떤 형태로라도 복음을 전해야 한다. 우리가 달려가야 할 길을 멈추면 안 된다. 주님이 우리 모두에게 동일하게 명령으로 주신 사명을 결코 잊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은 코로나 중에라도 감당해야 하고, 체코와 동유럽에 정말 복음을 위해서 사명이 목숨보다 더 중요했던 사도 바울처럼 오직 성령의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서 화형을 당하기까지 자신을 굽히지 않았던 야뉴스처럼, 후스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체코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기를 목숨을 걸고 싸웠던 얀 쥬시카 장군처럼, 풍랑 이는 바다에서, 생명의 위협 속에서 잠잠히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찬송을 드렸던 모라비안 들처럼, 그리고 온전한 제자의 삶을 계속해서 살기를 원하는 데이비드 픽사 형제처럼, 우리 모두도 하나님의 신실한 제자가 되어서 이 위기를 극복하고 특히 사랑의 교회에 주신 한국교회와 세계교회, 북한교회, 열방을 복음화 하는 거룩한 사명을 주신 사랑의 교회가 이 모든 위기를 세상보다 더 먼저, 더 크게 뛰어넘어 하나님의 복음을 담대히 전하고 삶 속에서, 일터에서, 가정에서, 세상 가운데서 예수의 증인으로 살아가야 한다.
요한복음 2:1~11, 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유대인들에게 포도주는 기쁨을 상징한다. 유대 랍비들은 포도주가 없이는 기쁨도 없다라고 표현할 만큼 포도주는 기쁨 그 자체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쁨을 상징하는 포도주가 오늘 본문에 의하염 혼인잔치 집에 모자란 사태가 발상한다. 가나의 혼인잔치에 기쁨이 사라진 것이다. 완벽한 준비를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포도주가 모자란 일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인생의 불안전함을 대변하는 것 같다. 나름 친밀하고 완벽한 준비를 끝내고 이제는 샴페인만 터트릴 일만 고대하고 있을 때, 이같이 예기치 못한 인생의 불행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어느 순간 우리 인생에 포도주가 떨어져 기쁨이 메마른 때를 맞이하게 된다. 행복에 겨워 결혼했던 배우자지만 그 관계에 더 이상 기쁨이 없어 서로간의 갈등과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성공의 신화를 꿈꾸며 쉴 틈 없이 달렸던 인생도 그 정점에 이르게 되면 깊은 허무함을 경험하게 된다. 그토록 갈구했던 그 성공 속에 더 이상 기쁨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기쁨이 메마른 정도가 아니라 표류하는 인생으로 전락되기도 한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그 정도의 극한까지는 가지 않았다 할지라도 마치 살아있는 삶을 살지 못하고 삶을 견디고 있는 일은 없는가? 삶의 기쁨은 점전 사라져가고 활력은 떨어지고 또한 지쳐가고 있지는 않는가? 예기치 못한 모자란 포도주처럼 나름 준비하며 기대했던 일들이 한순간 무산되어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실의에 빠져 있지는 않는가? 그 사람은 사실상 하루하루를 표류하는 있는 것이다. 혹 인생의 기쁨을 누리고 있노라 자처하는 이도, 붙들고 있는 인생의 그 포도주가 언젠가는 고갈될 때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는 기쁨의 원천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주일 담임 목사님의 온전함 시리즈 통해서 살펴보듯이 우리는 불완전하고 또한 온전하지 않음을 말씀 속에서 늘 상고하게 된다. 오늘 소개된 가나의 혼인집, 모자란 포도주 사건은 마치 우리 인생의 불완전함을 나타내고 있다.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첫 기적의 사건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요한은 이 첫 번째 기적을 표적이라고 불렀다. 이 표적이라는 의미는 보통 우리에게 정보를 주거나 혹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할 때 쓰이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만큼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적은 특별한 의미를 담고 우리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공생애 첫 표적으로 왜 하필 포도주 사건이냐는 의문이 든다. 표적의 내용과 그 규모에 의구심이 든다는 것이다. 여러분 그 상황에 들어가 보자.
시골 한 작은 마을의 혼인잔치 집에 우리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초청을 받으셨다. 이 시기는 예수님께서 지난 30년간 나사렛이라는 한 촌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무명의 목수로 지내시다가 이제 때가 되어 공생애에 전면 등장한 시기였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선지자, 세례요한으로부터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공생애 사역에 첫 걸음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이제는 제자들을 거느리시고 자신을 메시아로 기대하는 제자들에게 믿음을 보여주실 구체적인 증거가 필요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 와중에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 초청을 받으셨고, 결과적으로 공생애 첫 표적을 이곳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시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표적기사 내용을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혼인 집 모자란 포도주를 구한다. 여러분,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달라는 간청이 아니었다. 아니 인간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라든지, 아님 초자연적인 일을 두고 구하고 있지 않다. 단지 혼인잔치 집 모자란 포도주를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모자란 포도주가 예수님의 공생애 첫 표적으로 등장할 만큼 중대차한 심각한 문제였을까? 사실 그 기적 사건의 내용 그 자체만을 바라본다면, 이 모자란 포도주 문제는 굳이 예수님이 아니라도 수중에 돈이 있다면 얼마든지 인위적으로 해결 할 수 있는 문제였을 것이다. 우리는 마리아의 간구를 현실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공생애 첫 표적으로 등장할 이 기적 사건 앞에 죽은 자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요, 인간의 손쓸 수 없는 불치병도 아닌, 어찌 보면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포도주 문제를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공생애 첫 표적치고는 그 규모가 작고, 포도주라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적인 소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주목하면 우리 예수님께서 이 모자란 포도주를 그분의 공생애 첫 표적으로 이루어 주셨다는 것이다. 이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이스라엘 혼례에 대한 구체적인 예가 필요하다.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혼례에 대한 상호 관계적 요소가 있었다고 한다. 혼례를 준비하는 당사자는 물론이거니와 초대 받은 하객 사이에 상호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었다는 것이다. 결혼 당사자는 하객을 위해 그 잔치 준비에 만전을 다한다. 또한 초대받은 하객 또한 결혼 당사자를 위한 혼인 선물을 제공함으로써 그에 상응하는 의무를 다한다. 이것은 상호간 엄격하게 준수해야할 책임이자 의무였다. 그러나 쌍방 간에 이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이행되지 않으면, 법적행동이 가능했던 그 당시 고대 근동지역에 결혼문화였다. 소위말해 잔치 배설(排設)이 소홀하거나 초대받은 하객들이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이행하지 않으면 금전상의 보상을 요구하는 법적 행동도 불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객들도 가까운 지인 중심으로 구성되고 철저히 인바이트 문화(Invite culture), 초청문화로 이루어졌다. 우리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부문이다. 우리나라 혼례문화는 하객이 많을수록 미덕이 되기 때문에 당사자에게 초대받지 않아도 얼마든지 참석하여 축하하며 그 자리를 빛낼 수가 있다. 그러나 고대 근동지역에 결혼문화는 달랐다는 것이다. 서구 문화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데, 평소에 아무리 가깝다 할지라도 결혼 청첩장을 받지 않으면 찾아갈 수 없다. 결혼 당사자 또한 자신이 초대한 자들을 계수하여 자리 배열과 잔치를 배설하기 때문에 사전에 초청장 없이 찾아가는 것은 큰 결례가 될 수 있다. 고대 근동지역의 결혼 문화는 보다 엄격한 초청문화였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와 그 제자들이 혼례에 청함을 받았다.’라는 분명한 전제를 놓고 있다. 본문에 이렇게 말씀한다. *요한복음 2:2절에,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예수님께서 초대받은 이 혼례잔치에 포도주가 모자란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완벽한 준비를 끝냈다고 생각한 이 혼례 예식에 기쁨이 절정을 향하던 차에 포도주가 모자란 전혀 예상 못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사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모자란 포도주 문제는 하객들의 원성을 불러일으켜 혼인잔치의 기쁨에 찬물을 끼얹은 그런 위기의 순간일 뿐 아니라, 앞서 말한 것처럼 급기야는 금전상의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하는 법적 행동이 가능했던 심각한 상황을 의미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어머님 마리아가 다급히 예수님께 포도주를 아뢴 중요한 이유가 된다. 무엇보다 혼례 당사자는 마리아가 이 모자란 포도주 문제를 거론함에는 가까운 친척관계로 깊이 결부되어 있음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다. 여러분, 예수님의 첫 표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기적이 아닌 평범한 포도주 사건을 보여주심에 주목하길 바란다. 많은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오해 중 하나는 내 관심사가 주님과는 상관없는 문제라 생각하며 스스로 하나님 앞에 제안하고 주님께 아뢰기를 주저하는 일이다. 이 문제가 예수님과 무관하게 보일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들이 보기에는 사소한 것 문제 같지만 내게는 더없이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다. 바로 포도주 사건이 그러하다. 표면상에 드러난 이 포도주는 그 자체로는 지극히 사소하고 평범한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본문에 등장한 혼례 당사자로서는 그 경우가 다르다. 이 모자란 포도주 문제는 혼인잔치의 기쁨을 송두리째 앗아가고 법적분쟁으로 비화될 수 있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마리아가 이 문제를 예수님께 아뢴 정황으로 봐도 당장 수중에 돈이 있어도 이 모자란 포도주를 공수할 수 없는 절박하고 다급한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일상 속에 그것이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문제라 할지라도 아닌 주님과는 상관없는 모습처럼 와 닿을지라도 내게는 더없이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가 된다. 그 문제를 우리 주님께 아뢰면 우리 주님은 기적 가운데 일하시고 역사하심을 증거하고 계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남들이 보기에는 사소한 문제 같지만, 내게는 더없이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는 무엇인가? 과연 우리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 재정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에게는 물질적인 문제가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청년들의 경우에는 취업과 결혼문제가 더없이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사춘기를 둔 상황에서는 더없이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혹여 이런 문제로 기도하는 일이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는 그 말씀을 생각하면서 세속적으로 느껴지고 또한 주님 앞에 송구함을 느끼고 있는지는 않는가? 마리아는 모자란 포도주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왔다. 결과는 물이 변해 포도주가 되었다. 동일하게 우리 주님은 우리 일상 속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시며, 함께 하신다. *시편 68:19절에, 19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저는 이 말씀을 접할 때마다 얼마나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는지 모른다.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심지어 가족일지라도 매일 자신의 고민과 고충 그 짐을 토로한다고 생각해 보라. 한 두 번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잘 받아주겠지만 그 일이 매일 반복된다면 누구도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다르다 날마다 매일 내 짐을 대신 져 주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첫 번째 기적이 평범한 포도주 문제를 다루고 있듯이 우리는 우리 삶의 평범한 일상의 문제를 통해 주님을 만나고 느끼고 체험하기를 바란다.
*시편 50:15절에, 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을 찾고 구할 때, 그 환난에서 우리를 건지실 뿐 아니라 그 일을 통해 주님께 영광을 받으시는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말씀하고 계신다. 여러분, 하나님의 응답을 우리 주님은 당신의 영광이라고 말씀하신다. 언제든지 환난 날에 하나님을 찾고 구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 것이다. 이 좋은 하나님 앞에 날마다 내 짐을 져 주시는 주님 앞에, 내 삶의 모든 문제를 아뢰고 위탁할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한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소개된 물이 변해 포도주가 된 이 사건은 어떻게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을까? 본문에 의하면 마리아가 모자란 포도주 문제를 예수님께 언급했을 때, 사실 우리 주님의 반응은 이것이 나와 무순 상관이 있느냐며 반문하셨다.
*요한복음 2:3~4절에 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마리아와 예수님과의 대화를 살펴보면, 우리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냉담하게 반응하시고 단호한 거절을 하신 듯하지만, 그러나 원문을 살펴보면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여자여,라는 단어는 귀나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당시 왕후를 부를 때 쓰는 급 존칭이다. 결국 주님은 어머니 마리아를 가장 사랑스럽고 부드럽게 보이는 단어를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조금도 불손하거나 거친 의미가 아니라 거절의 표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여자야!, 이것이 나와 무순 상관이 있어!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어!” 이 표현과 “사랑하고 존경하는 내 어머니, 이 일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요? 아직 제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이 표현과는 굉장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씀하자면 표면상으로 모자란 포도주 문제가 무관한 문제이고 아직 기적을 베풀 때가 아니라고 거절하신 듯 하지만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 이 포도주 문제에 개입하셨고, 기적을 베풀어주셨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우리 주님은 나와 상관이 없고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당신의 말씀과는 달리, 왜 모자란 포도주 문제를 해결해 주셨는가?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의 사건을 살펴보면 이 본문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남자만 오천 명, 아이와 부녀자를 합하면 어쩌면 이만이 훨씬 넘은 큰 무리 앞에 우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냐고 질문하신다. 그때 돌아온 제자들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중에 빌립은 혹여 각 사람에게 조금씩 돈을 거둬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으로도 부족할 것이라는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마도 그것에 있던 열두 제자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던 것 같다.
*요한복음 6:6절에,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이 말씀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이 무리를 먹이겠냐며 공을 제자들에게 돌리시는 듯 했지만,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실 이는 당신께서 친히 행하셔야 할 일임을 알고 계셨다는 것이다. 다만 이 상황 속에서 제자들의 반응, 그들의 믿음의 반응을 살피시기 위해 이 같은 시험, 믿음의 테스트를 하신 것이다. 오늘 포도주 사건도 같은 맥락이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믿음을 살피시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마리아의 반응이 참 놀랍다.
*요한복음 2:5절에,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마리아는 하인들을 불러 모은다. 그리고 명령하기를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당부한다. 이 때,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모자란 포도주 문제가 예수님 당신 스스로도 나와 상관없는 일이며 아직 기적을 베푸실 때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지만, 마리아의 이 같은 반응 이후에 우리 주님은 움직이기 시작하신다. 일하시기 시작하신다. *요한복음 2:6~8절에, 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하인들을 불러 모은 마리아의 행동이후 우리 예수님은 일하기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사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일에 관여하여 일 하실 것을 알고 있었다. 너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는 이 명령에는 예수님께서 이 문제에 지나치지 않으시고, 친히 개입하여 일하실 것을 믿고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 마리아의 모습은 참된 순종의 모습으로 전적으로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무엇이든지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기대하는 즉 예수님을 순종하는 신앙고백을 올려드리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 본문 5절 말씀에 너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한 말씀은 온전한 믿음의 성도에게 주시는 온전함의 황금률이다. 마리아의 명령대로 하인들은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했다.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명령 앞에서도 그저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그대로 순종하며 따랐다는 것이다. 그 결과,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삶을 온전케 하심은 주님의 말씀을 믿고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따르는 믿음의 결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포도주 사건을 살펴보면 5절은 예수님의 일하시기 전과 그리고 일하신 후에 큰 전환점이 된다. 본문을 살펴보면, 1~4절은 예수님의 일하시기 전이셨다면, 6~11절은 예수님이 일하시는 장면이다. 그 정점에 5절이 있다. 일하시는 후를 결정하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 5절을 기점으로 볼 때, 5절 이전의 예수님의 모습은 마치 가나의 혼례의 잔치에 초청된 한 무명의 손님에 불과하지 않았다면, 5절 이후, 마리아의 행동이후에는 예수님의 위치가 변한다. 더 이상 손님이 아닌 하인들에게 명령할 수 있는 혼인잔치의 주인이 되신다. 무명의 손님에서 나와 이 잔치 집을 리더, 센토로 세워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그 자리에 초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놀란 사실은 우리 예수님께서 혼인잔치에 주인이 되시고서 부터는 일하기 시작하신다. 때가 되지 않음에도 예수님은 움직이시고 기적을 베푸신다. 여러분, 예수님이 손님으로 계시는 동안에는 일을 하실 수도 하시지도 않으셨다. 그러나 주인의 자리에 서게 되면서, 우리 예수님은 이미 일하시기 시작한다.
4복음서에 의하면 우리 예수님은 당신을 맞이하지 않을 때는 능력을 베푸시지 않으셨다. 대표적인 예로, 고향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불신할 때, 주님은 그곳에서 많은 기사를 행하지 않으셨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은 누가 내 인생의 주인인가를 우리에게 질문하고 계신다. 예수님을 주인의 자리가 아닌 손님의 자리에 모신 사람이기에 우리 주님은 변화를 주시지 않는다. 주님을 내 인생의 어떤 자리에 모시느냐가 결정적이라는 것이다. 주님이 내 곁에 계셔도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중심이 되지 않는다면, 그 인생은 허둥대는 인생이다. 변화를 원하지만 변화지 않게 될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은 지 10년, 20년이 지나도 왜 변화가 없는가? 예수님을 알고 내가 그 능력도 안 되고 왜 내 삶 속에는 변화가 없고 기도의 응답이 없는가? 주님이 손님으로 계시는 동안에는 일하시지 않으신다.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 우리 주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실 때, 혹여 때가 이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나를 위해 일하심을 믿으시길 바란다. 오늘 본문에 우리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이 놀라운 기적을 베푸심에도 불구하고 이 기적을 알고 이 기쁨에 동참했던 이는,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이들로 제한된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동행 했던 제자들, 또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하인들, 즉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자들로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연회(宴會)를 책임지는 연회장(宴會場)조차 포도주(葡萄酒)의 기적 사건을 알지 못한다. 더구나 결혼 주체 당사자들 또한 모든 하객들도 알지 못한다. 물이 변해 포도주가 된 극상품(極上品)의 포도주를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포도주에 대해 칭찬을 할지언정, 정작 그 기적(奇蹟)을 베푸신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 오직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이들에게만 기적의 비밀을 알게 해주셨다.
*요한복음 2:9절에,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예수님의 첫 기적이 가나에서 행해졌다. 공생애 첫 번째 기적이 공개되었다. 그러나 모든 이에게 공개되었지만, 그것은 철저히 가리워졌다. 공개된 비밀이 되었다. 주님을 주인 삼은 자들에게만 나타난 제한적인 공개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을 내 인생의 참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가? 그동안 우리는 매주일 담임 목사님을 통해 온전함을 주제별로 다루었다. 담임 목사님께서 언급하신 표현 중, ‘물 떠 온 하인의 심정’이란 말씀을 자주 말씀하셨는데, 결국 온전함의 고봉이란, ‘물 떠 온 하인의 심정’처럼 주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실 수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요, 변화가 된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제한된 역사이기도 하다. 우리가 똑 같은 주님을 모시고 알고 있어도 내 삶의 참된 주인으로 모시느냐. 모시지 않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역사는 다른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그 일이 주님과 상관없는 일이 될 수 있고, 또 어떤 이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는 주님과 상관있는 일이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사람을 위하여 일하신다.
여러분, 앞에서 주님은 우리의 일상 속에 기적을 베푸시길 원하신다고 말씀했다. 그러나 이 일상의 기적은 주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이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제한적인 은혜이다. 내 인생의 절대 주권이 하나님의 손아래 있음을 고백하는 이에게 우리 하나님은 일하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이곳에는 주님을 내 인생의 참된 주인으로 모시어 나를 위해 주님이 일하시는 일상의 기적의 은혜가 있기를 소망한다. 공개된 비밀이 아닌, 내 삶 속에 밝히 드러나는 일상의 기적이 되길 축복한다. 끝으로 본문에서 물이 변해 포도주가 된 이 사건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단순히 물을 포도주 맛이 나도록 흉내 내지 않으셨다. 조작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최상급의 포도주를 만드셨다. 앞서서 유대인들의 포도주는 기쁨을 상징한다고 말씀드렸다. 포도주의 기적처럼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은 결단코 조작하지 않으신다. 기쁨을 흉내 내지 않으신다. 참된 기쁨을 주신다. 변하지 않는 영원한 주님의 기쁨과 만족을 주신다. 유대인들의 결혼 풍습은 처음에는 가장 좋은 포도주를 제공하다가도 점점 사람들이 취하기 시작하면, 질이 낮은 포도주를 제공했다. 본문에 등장하는 연회장도 10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요한복음 2:10절에,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유대인들에게 특별히 혼인잔치 집에 포도주는 기쁨, 그 자체를 상징했지만 혼인 집 포도주조차 좋은 포도주에서 질이 낮은 포도주로 대체했듯이 우리 인생을 영원히 만족시킬 기쁨은 없는 것이다. 그 기쁨이 변질되거나 혹은 모자란 포도주처럼 기쁨이 메마를 때를 언젠가는 맞이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다르다. 우리에게 기쁨을 조장하지 않으신다. 왜냐면, 우리 주님은 기쁨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5:11절에,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당신의 기쁨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만날 때 샘솟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경험할 때에는 이 기쁨의 있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물이 변화하여 포도주가 된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신다. 두려움을 소망으로 바꾸신다.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신다. 죄를 은혜로 바꾸신다.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신다. 그래서 고린도 후서를 보면 다름과 같이 말씀하신다.
*고린도후서 5:17절에,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 우리 예수님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시는 전능자 하나님이시다. 마침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듯, 우리 주님이 일하시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것은 은혜의 이야기이다. 은혜는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항상 측량할 수 없는 은혜로 풍성히 채워주신다. 또한 이것은 온전함의 이야기이다. 우리 주님을 만나면, 물이 변해 포도주가 되듯 어떤 인생이라 할지라도 변화의 역사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온전함의 고봉으로 오르게 하신다.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 주님의 은혜는 끝을 더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유대인의 결혼 풍습은 가장 포도주를 먼저 내놓고 사람들이 취하면 질이 낮은 포도주를 내놓았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은혜는 달랐다. 우리 주님은 끝을 더 영화롭게 하셨다. 여러분, 지금 우리의 형편을 두고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고 속단하지 말라. 하나님의 최고의 은혜는 항상 끝에 온다. 엄밀히 말씀하자면 우리는 끝이 보장된 인생이다. 여러분, 우리 성도의 끝은 무엇인가? 바로 영생이다. 우리는 끝이 다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성도의 끝은 항상 해피엔딩이다. 우리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우리 인생의 끝을 풍성하게 하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최고의 은혜는 항상 끝에 온다는 것을 믿고 지금의 처지와 상황 속에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인생을 풍성하게 이끄심을 믿고 인내 할 수 있는 자 되어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요한복음 2장에는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이 기적 사건은 예수님께서 신성을 지는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 거한 사건이기도 하다. 이 기적은 만물에 대해 당신을 메시아적 주권을 여지없이 드러내시고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그 권세를 밝히 드러내셨다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세 가지, 또다른 진리를 발견했다. 첫 번째는 혼인잔치 집에 모자란 포도주처럼 남들이 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문제라고 할지라도 내게는 더없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 문제를 주님께 아뢰면 우리주님은 짐을 지시고 나를 위해 일하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일상의 기적은 주님을 내 인생을 모시는 이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조장하지도, 흉내 내지도 않으시고 참된 기쁨을 우리에게 선사하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시다. 무엇보다 그 끝을 더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계신다. 우리의 주님은 우리의 일상 속에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시기를 원하신다. 주님 앞에 문제를 토설하고 주님을 내 인생의 주님으로 모셔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그 역사가 이루어지길 원한다. 우리의 삶 속에 온전한 고봉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손길을 매 순간 목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요약 오늘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처럼, 날마다 우리의 짐을 져주시고, 우리 일상 가운데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그 놀라운 기적의 은혜를 주심에 감사해야 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한 문제라 할지라도 내게는 더없이 중요한 문제이니 이 문제를 주님께 아뢰어서 우리 주님께서 기적으로 역사하실 것을 믿어야 하며, 물 떠 온 하인의 심정으로 주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온전함의 고봉으로 올라가야 한다. 우리 삶의 주제 권을 주님께 맡기고 참된 기쁨을 가득히 채워가는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하여야 되도록 기도하고 끝이 더 영화로우심을 믿고, 인내하며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 마리아가 믿음으로 간청할 때 예수님은 결코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예수님에 의해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듯이,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시면 우리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게 됨을 믿어야 한다. 무미건조한 삶이 기쁨과 희망에 불타게 되며, 무한한 질적 변화를 일으켜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