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1년 7월 7일) 제목: "일상의 기적" 말씀 요한복음 2:1~11 설교자: 천동원 부목사님 ------------------------------------------- 요한복음 2:1~11, 1 사흘째 되던 날 갈릴리 가나에 혼례가 있어 예수의 어머니도 거기 계시고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11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 ▶유대인들에게 포도주는 기쁨을 상징한다. 유대 랍비들은 포도주가 없이는 기쁨도 없다라고 표현할 만큼 포도주는 기쁨 그 자체를 상징하고 있다는 것이다. 기쁨을 상징하는 포도주가 오늘 본문에 의하염 혼인잔치 집에 모자란 사태가 발상한다. 가나의 혼인잔치에 기쁨이 사라진 것이다. 완벽한 준비를 끝냈다고 생각했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포도주가 모자란 일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는 마치 인생의 불안전함을 대변하는 것 같다. 나름 친밀하고 완벽한 준비를 끝내고 이제는 샴페인만 터트릴 일만 고대하고 있을 때, 이같이 예기치 못한 인생의 불행이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어느 순간 우리 인생에 포도주가 떨어져 기쁨이 메마른 때를 맞이하게 된다. 행복에 겨워 결혼했던 배우자지만 그 관계에 더 이상 기쁨이 없어 서로간의 갈등과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성공의 신화를 꿈꾸며 쉴 틈 없이 달렸던 인생도 그 정점에 이르게 되면 깊은 허무함을 경험하게 된다. 그토록 갈구했던 그 성공 속에 더 이상 기쁨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순히 기쁨이 메마른 정도가 아니라 표류하는 인생으로 전락되기도 한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그 정도의 극한까지는 가지 않았다 할지라도 마치 살아있는 삶을 살지 못하고 삶을 견디고 있는 일은 없는가? 삶의 기쁨은 점전 사라져가고 활력은 떨어지고 또한 지쳐가고 있지는 않는가? 예기치 못한 모자란 포도주처럼 나름 준비하며 기대했던 일들이 한순간 무산되어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실의에 빠져 있지는 않는가? 그 사람은 사실상 하루하루를 표류하는 있는 것이다. 혹 인생의 기쁨을 누리고 있노라 자처하는 이도, 붙들고 있는 인생의 그 포도주가 언젠가는 고갈될 때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는 기쁨의 원천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매주일 담임 목사님의 온전함 시리즈 통해서 살펴보듯이 우리는 불완전하고 또한 온전하지 않음을 말씀 속에서 늘 상고하게 된다. 오늘 소개된 가나의 혼인집, 모자란 포도주 사건은 마치 우리 인생의 불완전함을 나타내고 있다. 본문은 예수님의 공생애 가운데 첫 기적의 사건을 우리에게 소개하고 있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사도요한은 이 첫 번째 기적을 표적이라고 불렀다. 이 표적이라는 의미는 보통 우리에게 정보를 주거나 혹 우리에게 방향을 제시할 때 쓰이는 표현이기도 하다. 그만큼 예수님의 첫 번째 표적은 특별한 의미를 담고 우리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본문의 말씀을 살펴보면, 예수님의 공생애 첫 표적으로 왜 하필 포도주 사건이냐는 의문이 든다. 표적의 내용과 그 규모에 의구심이 든다는 것이다. 여러분 그 상황에 들어가 보자. 시골 한 작은 마을의 혼인잔치 집에 우리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초청을 받으셨다. 이 시기는 예수님께서 지난 30년간 나사렛이라는 한 촌에서 이름도 빛도 없이 무명의 목수로 지내시다가 이제 때가 되어 공생애에 전면 등장한 시기였다. 그리고 당대 최고의 선지자, 세례요한으로부터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공생애 사역에 첫 걸음을 시작할 무렵이었다. 이제는 제자들을 거느리시고 자신을 메시아로 기대하는 제자들에게 믿음을 보여주실 구체적인 증거가 필요한 시기이기도 했다. 그 와중에 갈릴리 가나의 혼인잔치에 초청을 받으셨고, 결과적으로 공생애 첫 표적을 이곳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시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표적기사 내용을 보면,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혼인 집 모자란 포도주를 구한다. 여러분, 죽어가는 사람을 살려달라는 간청이 아니었다. 아니 인간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불치병이라든지, 아님 초자연적인 일을 두고 구하고 있지 않다. 단지 혼인잔치 집 모자란 포도주를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모자란 포도주가 예수님의 공생애 첫 표적으로 등장할 만큼 중대차한 심각한 문제였을까? 사실 그 기적 사건의 내용 그 자체만을 바라본다면, 이 모자란 포도주 문제는 굳이 예수님이 아니라도 수중에 돈이 있다면 얼마든지 인위적으로 해결 할 수 있는 문제였을 것이다. 우리는 마리아의 간구를 현실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공생애 첫 표적으로 등장할 이 기적 사건 앞에 죽은 자를 일으키는 것도 아니요, 인간의 손쓸 수 없는 불치병도 아닌, 어찌 보면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포도주 문제를 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공생애 첫 표적치고는 그 규모가 작고, 포도주라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적인 소제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주목하면 우리 예수님께서 이 모자란 포도주를 그분의 공생애 첫 표적으로 이루어 주셨다는 것이다. 이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이스라엘 혼례에 대한 구체적인 예가 필요하다. 고대 근동지역에서는 혼례에 대한 상호 관계적 요소가 있었다고 한다. 혼례를 준비하는 당사자는 물론이거니와 초대 받은 하객 사이에 상호간 책임져야 할 의무가 있었다는 것이다. 결혼 당사자는 하객을 위해 그 잔치 준비에 만전을 다한다. 또한 초대받은 하객 또한 결혼 당사자를 위한 혼인 선물을 제공함으로써 그에 상응하는 의무를 다한다. 이것은 상호간 엄격하게 준수해야할 책임이자 의무였다. 그러나 쌍방 간에 이것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이행되지 않으면, 법적행동이 가능했던 그 당시 고대 근동지역에 결혼문화였다. 소위말해 잔치 배설(排設)이 소홀하거나 초대받은 하객들이 그에 상응하는 보답을 이행하지 않으면 금전상의 보상을 요구하는 법적 행동도 불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객들도 가까운 지인 중심으로 구성되고 철저히 인바이트 문화(Invite culture), 초청문화로 이루어졌다. 우리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부문이다. 우리나라 혼례문화는 하객이 많을수록 미덕이 되기 때문에 당사자에게 초대받지 않아도 얼마든지 참석하여 축하하며 그 자리를 빛낼 수가 있다. 그러나 고대 근동지역에 결혼문화는 달랐다는 것이다. 서구 문화는 지금도 유지되고 있는데, 평소에 아무리 가깝다 할지라도 결혼 청첩장을 받지 않으면 찾아갈 수 없다. 결혼 당사자 또한 자신이 초대한 자들을 계수하여 자리 배열과 잔치를 배설하기 때문에 사전에 초청장 없이 찾아가는 것은 큰 결례가 될 수 있다. 고대 근동지역의 결혼 문화는 보다 엄격한 초청문화였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도 ‘예수와 그 제자들이 혼례에 청함을 받았다.’라는 분명한 전제를 놓고 있다. 본문에 이렇게 말씀한다. *요한복음 2:2절에, 2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례에 청함을 받았더니. -예수님께서 초대받은 이 혼례잔치에 포도주가 모자란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완벽한 준비를 끝냈다고 생각한 이 혼례 예식에 기쁨이 절정을 향하던 차에 포도주가 모자란 전혀 예상 못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사실 이것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다. 모자란 포도주 문제는 하객들의 원성을 불러일으켜 혼인잔치의 기쁨에 찬물을 끼얹은 그런 위기의 순간일 뿐 아니라, 앞서 말한 것처럼 급기야는 금전상의 무거운 책임을 져야 하는 법적 행동이 가능했던 심각한 상황을 의미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어머님 마리아가 다급히 예수님께 포도주를 아뢴 중요한 이유가 된다. 무엇보다 혼례 당사자는 마리아가 이 모자란 포도주 문제를 거론함에는 가까운 친척관계로 깊이 결부되어 있음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다. 여러분, 예수님의 첫 표적으로 사람을 살리는 기적이 아닌 평범한 포도주 사건을 보여주심에 주목하길 바란다. 많은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오해 중 하나는 내 관심사가 주님과는 상관없는 문제라 생각하며 스스로 하나님 앞에 제안하고 주님께 아뢰기를 주저하는 일이다. 이 문제가 예수님과 무관하게 보일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들이 보기에는 사소한 것 문제 같지만 내게는 더없이 중요한 문제가 될 수 있다. 바로 포도주 사건이 그러하다. 표면상에 드러난 이 포도주는 그 자체로는 지극히 사소하고 평범한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본문에 등장한 혼례 당사자로서는 그 경우가 다르다. 이 모자란 포도주 문제는 혼인잔치의 기쁨을 송두리째 앗아가고 법적분쟁으로 비화될 수 있는 급박한 상황이었다. 마리아가 이 문제를 예수님께 아뢴 정황으로 봐도 당장 수중에 돈이 있어도 이 모자란 포도주를 공수할 수 없는 절박하고 다급한 상황을 나타내고 있다. 오늘 본문은 우리 일상 속에 그것이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문제라 할지라도 아닌 주님과는 상관없는 모습처럼 와 닿을지라도 내게는 더없이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가 된다. 그 문제를 우리 주님께 아뢰면 우리 주님은 기적 가운데 일하시고 역사하심을 증거하고 계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남들이 보기에는 사소한 문제 같지만, 내게는 더없이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는 무엇인가? 과연 우리에게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 재정의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에게는 물질적인 문제가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청년들의 경우에는 취업과 결혼문제가 더없이 중요한 문제일 수도 있다. 부모의 입장에서는 사춘기를 둔 상황에서는 더없이 심각한 문제일 수 있다. 혹여 이런 문제로 기도하는 일이 “너희는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는 그 말씀을 생각하면서 세속적으로 느껴지고 또한 주님 앞에 송구함을 느끼고 있는지는 않는가? 마리아는 모자란 포도주 문제를 가지고 주님 앞에 나왔다. 결과는 물이 변해 포도주가 되었다. 동일하게 우리 주님은 우리 일상 속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시며, 함께 하신다. *시편 68:19절에, 19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저는 이 말씀을 접할 때마다 얼마나 가슴 뭉클한 감동을 받는지 모른다. 아무리 가까운 친구라도 심지어 가족일지라도 매일 자신의 고민과 고충 그 짐을 토로한다고 생각해 보라. 한 두 번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잘 받아주겠지만 그 일이 매일 반복된다면 누구도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은 다르다 날마다 매일 내 짐을 대신 져 주신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의 첫 번째 기적이 평범한 포도주 문제를 다루고 있듯이 우리는 우리 삶의 평범한 일상의 문제를 통해 주님을 만나고 느끼고 체험하기를 바란다. *시편 50:15절에, 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을 찾고 구할 때, 그 환난에서 우리를 건지실 뿐 아니라 그 일을 통해 주님께 영광을 받으시는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말씀하고 계신다. 여러분, 하나님의 응답을 우리 주님은 당신의 영광이라고 말씀하신다. 언제든지 환난 날에 하나님을 찾고 구하도록 우리를 초대하고 계신 것이다. 이 좋은 하나님 앞에 날마다 내 짐을 져 주시는 주님 앞에, 내 삶의 모든 문제를 아뢰고 위탁할 수 있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한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 소개된 물이 변해 포도주가 된 이 사건은 어떻게 기적이 일어나게 되었을까? 본문에 의하면 마리아가 모자란 포도주 문제를 예수님께 언급했을 때, 사실 우리 주님의 반응은 이것이 나와 무순 상관이 있느냐며 반문하셨다. *요한복음 2:3~4절에 3 포도주가 떨어진지라 예수의 어머니가 예수에게 이르되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하니. 4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마리아와 예수님과의 대화를 살펴보면, 우리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냉담하게 반응하시고 단호한 거절을 하신 듯하지만, 그러나 원문을 살펴보면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여자여,라는 단어는 귀나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당시 왕후를 부를 때 쓰는 급 존칭이다. 결국 주님은 어머니 마리아를 가장 사랑스럽고 부드럽게 보이는 단어를 사용하였다는 것이다. 조금도 불손하거나 거친 의미가 아니라 거절의 표시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여자야!, 이것이 나와 무순 상관이 있어!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어!” 이 표현과 “사랑하고 존경하는 내 어머니, 이 일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요? 아직 제 때가 이르지 않았습니다.” 이 표현과는 굉장한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씀하자면 표면상으로 모자란 포도주 문제가 무관한 문제이고 아직 기적을 베풀 때가 아니라고 거절하신 듯 하지만 결과적으로 예수님께서 이 포도주 문제에 개입하셨고, 기적을 베풀어주셨다는 것이다. 본문에서 우리 주님은 나와 상관이 없고 아직 내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당신의 말씀과는 달리, 왜 모자란 포도주 문제를 해결해 주셨는가?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의 사건을 살펴보면 이 본문의 내용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남자만 오천 명, 아이와 부녀자를 합하면 어쩌면 이만이 훨씬 넘은 큰 무리 앞에 우리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냐고 질문하신다. 그때 돌아온 제자들의 반응은 한결 같았다.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중에 빌립은 혹여 각 사람에게 조금씩 돈을 거둬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으로도 부족할 것이라는 부정적이고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아마도 그것에 있던 열두 제자 모두가 같은 생각이었던 것 같다. *요한복음 6:6절에,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이 말씀은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어떻게 이 무리를 먹이겠냐며 공을 제자들에게 돌리시는 듯 했지만, 결국 이 문제를 해결하실 이는 당신께서 친히 행하셔야 할 일임을 알고 계셨다는 것이다. 다만 이 상황 속에서 제자들의 반응, 그들의 믿음의 반응을 살피시기 위해 이 같은 시험, 믿음의 테스트를 하신 것이다. 오늘 포도주 사건도 같은 맥락이다. 예수님은 마리아의 믿음을 살피시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마리아의 반응이 참 놀랍다. *요한복음 2:5절에, 5 그의 어머니가 하인들에게 이르되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하니라. -마리아는 하인들을 불러 모은다. 그리고 명령하기를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당부한다. 이 때, 놀라운 반전이 일어난다. 모자란 포도주 문제가 예수님 당신 스스로도 나와 상관없는 일이며 아직 기적을 베푸실 때가 아니라고 말씀하셨지만, 마리아의 이 같은 반응 이후에 우리 주님은 움직이기 시작하신다. 일하시기 시작하신다. *요한복음 2:6~8절에, 6 거기에 유대인의 정결 예식을 따라 두세 통 드는 돌항아리 여섯이 놓였는지라. 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항아리에 물을 채우라 하신즉 아귀까지 채우니. 8 이제는 떠서 연회장에게 갖다 주라 하시매 갖다 주었더니. -하인들을 불러 모은 마리아의 행동이후 우리 예수님은 일하기 시작하셨다는 것이다. 사실 마리아는 주님께서 일에 관여하여 일 하실 것을 알고 있었다. 너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는 이 명령에는 예수님께서 이 문제에 지나치지 않으시고, 친히 개입하여 일하실 것을 믿고 기대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 마리아의 모습은 참된 순종의 모습으로 전적으로 예수님을 의지하고 예수님만을 바라보고 무엇이든지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을 기대하는 즉 예수님을 순종하는 신앙고백을 올려드리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 본문 5절 말씀에 너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한 말씀은 온전한 믿음의 성도에게 주시는 온전함의 황금률이다. 마리아의 명령대로 하인들은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순종했다. 이성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명령 앞에서도 그저 예수님이 말씀하시니 그대로 순종하며 따랐다는 것이다. 그 결과,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기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의 삶을 온전케 하심은 주님의 말씀을 믿고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따르는 믿음의 결단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포도주 사건을 살펴보면 5절은 예수님의 일하시기 전과 그리고 일하신 후에 큰 전환점이 된다. 본문을 살펴보면, 1~4절은 예수님의 일하시기 전이셨다면, 6~11절은 예수님이 일하시는 장면이다. 그 정점에 5절이 있다. 일하시는 후를 결정하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이 5절을 기점으로 볼 때, 5절 이전의 예수님의 모습은 마치 가나의 혼례의 잔치에 초청된 한 무명의 손님에 불과하지 않았다면, 5절 이후, 마리아의 행동이후에는 예수님의 위치가 변한다. 더 이상 손님이 아닌 하인들에게 명령할 수 있는 혼인잔치의 주인이 되신다. 무명의 손님에서 나와 이 잔치 집을 리더, 센토로 세워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리아가 예수님을 그 자리에 초대하고 있다는 것이다. 놀란 사실은 우리 예수님께서 혼인잔치에 주인이 되시고서 부터는 일하기 시작하신다. 때가 되지 않음에도 예수님은 움직이시고 기적을 베푸신다. 여러분, 예수님이 손님으로 계시는 동안에는 일을 하실 수도 하시지도 않으셨다. 그러나 주인의 자리에 서게 되면서, 우리 예수님은 이미 일하시기 시작한다. 4복음서에 의하면 우리 예수님은 당신을 맞이하지 않을 때는 능력을 베푸시지 않으셨다. 대표적인 예로, 고향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고 불신할 때, 주님은 그곳에서 많은 기사를 행하지 않으셨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은 누가 내 인생의 주인인가를 우리에게 질문하고 계신다. 예수님을 주인의 자리가 아닌 손님의 자리에 모신 사람이기에 우리 주님은 변화를 주시지 않는다. 주님을 내 인생의 어떤 자리에 모시느냐가 결정적이라는 것이다. 주님이 내 곁에 계셔도 주인으로 모시지 않고 중심이 되지 않는다면, 그 인생은 허둥대는 인생이다. 변화를 원하지만 변화지 않게 될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을 믿은 지 10년, 20년이 지나도 왜 변화가 없는가? 예수님을 알고 내가 그 능력도 안 되고 왜 내 삶 속에는 변화가 없고 기도의 응답이 없는가? 주님이 손님으로 계시는 동안에는 일하시지 않으신다. 주인으로 모셔야 한다. 우리 주님이 내 인생의 주인이 되실 때, 혹여 때가 이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주님은 나를 위해 일하심을 믿으시길 바란다. 오늘 본문에 우리 예수님께서 가나의 혼인잔치 집에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이 놀라운 기적을 베푸심에도 불구하고 이 기적을 알고 이 기쁨에 동참했던 이는,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이들로 제한된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동행 했던 제자들, 또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한 하인들, 즉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자들로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연회(宴會)를 책임지는 연회장(宴會場)조차 포도주(葡萄酒)의 기적 사건을 알지 못한다. 더구나 결혼 주체 당사자들 또한 모든 하객들도 알지 못한다. 물이 변해 포도주가 된 극상품(極上品)의 포도주를 맛보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포도주에 대해 칭찬을 할지언정, 정작 그 기적(奇蹟)을 베푸신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 오직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신 이들에게만 기적의 비밀을 알게 해주셨다. *요한복음 2:9절에, 9 연회장은 물로 된 포도주를 맛보고도 어디서 났는지 알지 못하되 물 떠온 하인들은 알더라 연회장이 신랑을 불러. -예수님의 첫 기적이 가나에서 행해졌다. 공생애 첫 번째 기적이 공개되었다. 그러나 모든 이에게 공개되었지만, 그것은 철저히 가리워졌다. 공개된 비밀이 되었다. 주님을 주인 삼은 자들에게만 나타난 제한적인 공개가 되었다는 것이다. 여러분, 예수님을 내 인생의 참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가? 그동안 우리는 매주일 담임 목사님을 통해 온전함을 주제별로 다루었다. 담임 목사님께서 언급하신 표현 중, ‘물 떠 온 하인의 심정’이란 말씀을 자주 말씀하셨는데, 결국 온전함의 고봉이란, ‘물 떠 온 하인의 심정’처럼 주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실 수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은혜요, 변화가 된 것이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제한된 역사이기도 하다. 우리가 똑 같은 주님을 모시고 알고 있어도 내 삶의 참된 주인으로 모시느냐. 모시지 않느냐에 따라 하나님의 역사는 다른 것이다. 어떤 이에게는 그 일이 주님과 상관없는 일이 될 수 있고, 또 어떤 이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이에게는 주님과 상관있는 일이요, 아직 때가 이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사람을 위하여 일하신다. 여러분, 앞에서 주님은 우리의 일상 속에 기적을 베푸시길 원하신다고 말씀했다. 그러나 이 일상의 기적은 주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는 이에게 허락된 하나님의 제한적인 은혜이다. 내 인생의 절대 주권이 하나님의 손아래 있음을 고백하는 이에게 우리 하나님은 일하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이곳에는 주님을 내 인생의 참된 주인으로 모시어 나를 위해 주님이 일하시는 일상의 기적의 은혜가 있기를 소망한다. 공개된 비밀이 아닌, 내 삶 속에 밝히 드러나는 일상의 기적이 되길 축복한다. 끝으로 본문에서 물이 변해 포도주가 된 이 사건을 살펴보면, 예수님은 단순히 물을 포도주 맛이 나도록 흉내 내지 않으셨다. 조작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최상급의 포도주를 만드셨다. 앞서서 유대인들의 포도주는 기쁨을 상징한다고 말씀드렸다. 포도주의 기적처럼 우리에게 주시는 기쁨은 결단코 조작하지 않으신다. 기쁨을 흉내 내지 않으신다. 참된 기쁨을 주신다. 변하지 않는 영원한 주님의 기쁨과 만족을 주신다. 유대인들의 결혼 풍습은 처음에는 가장 좋은 포도주를 제공하다가도 점점 사람들이 취하기 시작하면, 질이 낮은 포도주를 제공했다. 본문에 등장하는 연회장도 10절에 보면,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요한복음 2:10절에, 10 말하되 사람마다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고 취한 후에 낮은 것을 내거늘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하니라. -유대인들에게 특별히 혼인잔치 집에 포도주는 기쁨, 그 자체를 상징했지만 혼인 집 포도주조차 좋은 포도주에서 질이 낮은 포도주로 대체했듯이 우리 인생을 영원히 만족시킬 기쁨은 없는 것이다. 그 기쁨이 변질되거나 혹은 모자란 포도주처럼 기쁨이 메마를 때를 언젠가는 맞이하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이 주시는 기쁨은 다르다. 우리에게 기쁨을 조장하지 않으신다. 왜냐면, 우리 주님은 기쁨의 근원이 되시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5:11절에, 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당신의 기쁨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주님을 만날 때 샘솟는다는 것이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고 경험할 때에는 이 기쁨의 있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물이 변화하여 포도주가 된 것처럼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신다. 두려움을 소망으로 바꾸신다.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신다. 죄를 은혜로 바꾸신다. 죽음을 생명으로 바꾸신다. 그래서 고린도 후서를 보면 다름과 같이 말씀하신다. *고린도후서 5:17절에,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 우리 예수님은 모든 것을 변화시키시는 전능자 하나님이시다. 마침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듯, 우리 주님이 일하시면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것은 은혜의 이야기이다. 은혜는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하나님은 항상 측량할 수 없는 은혜로 풍성히 채워주신다. 또한 이것은 온전함의 이야기이다. 우리 주님을 만나면, 물이 변해 포도주가 되듯 어떤 인생이라 할지라도 변화의 역사에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로 하여금 온전함의 고봉으로 오르게 하신다. 더 놀라운 사실은 우리 주님의 은혜는 끝을 더 영화롭게 하신다는 것이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유대인의 결혼 풍습은 가장 포도주를 먼저 내놓고 사람들이 취하면 질이 낮은 포도주를 내놓았다. 그러나 우리 주님의 은혜는 달랐다. 우리 주님은 끝을 더 영화롭게 하셨다. 여러분, 지금 우리의 형편을 두고 하나님의 은혜가 없다고 속단하지 말라. 하나님의 최고의 은혜는 항상 끝에 온다. 엄밀히 말씀하자면 우리는 끝이 보장된 인생이다. 여러분, 우리 성도의 끝은 무엇인가? 바로 영생이다. 우리는 끝이 다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성도의 끝은 항상 해피엔딩이다. 우리 주님은 언제나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고 우리 인생의 끝을 풍성하게 하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최고의 은혜는 항상 끝에 온다는 것을 믿고 지금의 처지와 상황 속에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 인생을 풍성하게 이끄심을 믿고 인내 할 수 있는 자 되어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요한복음 2장에는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이 기적 사건은 예수님께서 신성을 지는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 거한 사건이기도 하다. 이 기적은 만물에 대해 당신을 메시아적 주권을 여지없이 드러내시고 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그 권세를 밝히 드러내셨다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통해 세 가지, 또다른 진리를 발견했다. 첫 번째는 혼인잔치 집에 모자란 포도주처럼 남들이 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하고 사소한 문제라고 할지라도 내게는 더없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 문제를 주님께 아뢰면 우리주님은 짐을 지시고 나를 위해 일하시고 역사하신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일상의 기적은 주님을 내 인생을 모시는 이에게 나타나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조장하지도, 흉내 내지도 않으시고 참된 기쁨을 우리에게 선사하시고 우리에게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하시는 분이시다. 무엇보다 그 끝을 더 영화롭게 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에게 증거하고 계신다. 우리의 주님은 우리의 일상 속에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시기를 원하신다. 주님 앞에 문제를 토설하고 주님을 내 인생의 주님으로 모셔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되는 그 역사가 이루어지길 원한다. 우리의 삶 속에 온전한 고봉으로 이끄시는 주님의 손길을 매 순간 목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요약 오늘 물이 변하여 포도주가 된 것처럼, 날마다 우리의 짐을 져주시고, 우리 일상 가운데 역사하시고 일하시는 그 놀라운 기적의 은혜를 주심에 감사해야 한다. 남들이 보기에는 지극히 평범한 문제라 할지라도 내게는 더없이 중요한 문제이니 이 문제를 주님께 아뢰어서 우리 주님께서 기적으로 역사하실 것을 믿어야 하며, 물 떠 온 하인의 심정으로 주님을 내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고 온전함의 고봉으로 올라가야 한다. 우리 삶의 주제 권을 주님께 맡기고 참된 기쁨을 가득히 채워가는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하여야 되도록 기도하고 끝이 더 영화로우심을 믿고, 인내하며 하나님만 바라보는 믿음의 제자가 되어야 한다. - 마리아가 믿음으로 간청할 때 예수님은 결코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기적을 체험하게 된다. 예수님에 의해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듯이, 예수님이 우리 속에 들어오시면 우리의 삶에 변화가 일어나게 됨을 믿어야 한다. 무미건조한 삶이 기쁨과 희망에 불타게 되며, 무한한 질적 변화를 일으켜 새로운 피조물이 될 것이다. a |
반응형
'★ 제자훈련-사역훈련 -주일예배-독후감'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주일예배(주후 2021년 7월 11일)''온전한 제자 서임식 I"(오정현 담임 목사님)-사랑의교회 ☆ (0) | 2021.07.11 |
---|---|
☆ 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1년 7월 10일) "온전한 그리스도의 제자로 살아가기"(한정훈 선교사님-체코)-사랑의교회 ☆ (0) | 2021.07.10 |
☆ 주일예배(주후 2021년 7월 4일) “일터의 온전( 穩全)함”(오정현 담임 목사님)-사랑의교회 ☆ (0) | 2021.07.04 |
☆ 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1년 7월 3일)""(윤대혁 목사님-LA 사랑의빛선교교회 담임)초빙-사랑의교회 ☆ (0) | 2021.07.03 |
☆ 수요저녁기도예배(주후 2021년 6월 30일)"풍성한 삶의 비결"(박인기 부목사님)-사랑의교회 ☆ (0) | 2021.06.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