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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1년 7월 11일)
제목: ''온전한 제자 서임식 1"
말씀: 이사야 6:1~8
기도: 임상규 부목사님
찬양인도: 이원준 부목사님
사회: 윤하중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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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6:1~8,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2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3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4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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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간절한 예배를 주님이 흠향하시길 바란다. 많은 성도들이 온전함 시리즈를 가지고 지난 6개월 동안 껍질을 깨는 기간, 묵은 땅이 온전히 기경이 되는 시간이었다고 한다. 모두가 다 같다. 온전함위 주제가 엄청난 부담이었고, 사모함의 성도들의 눈빛이 감당이 안 될 정도였다. 그러나 감당할 수 있는 환경과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오늘은 ‘제자 서임식 I’ 이라고 했다. 갑작스런 코로나 델타변이로 인해 준비한 서임 식을 연장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사랑의 교회만 바라보고 문제가 있으면 다 우리 교회를 찍어서 올리는 은사 받은 사람도 있다고 한다. 이게 서임 식, 위임식이다 하는 것은 사실 그동안 위임식을 한다고 하면, 당사자들은 그렇지 않지만, 많은 성도들은 축하하고 어떻게 보면 관람하는 것이다. 이 위임식은 여러분들이 직접 서임하기 때문에 성경을 놓고 해야 해서 사명의 깃발을 들고 해야 하니, 다시 한 번 마음의 소원대로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8월 29일 주일에 가을 시작 주일에 했으면 좋겠다. 아멘... !!! 오늘 하자고 하면 할 수도 있다.
 
지난 6개월간 성도의 온전함 시리지를 나누면서 왜 이렇게 이 코로나 펜데믹 가운데 이런 무게감의 말씀을 전하게 주님이 주셨음에 한 가지 명확한 것은 어려움과 위기가 사실은 카이로스 타임이 될 수 있다. 어려움과 위기가 우리의 때에 하나님의 신적 개입의 시간이 될 수 있다.
그 바벨탑 사건으로 창세기 11장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그런데 한 이름도 없는 촌부 75세의 아브라함을 부르셔서 하나님은 믿음의 조상으로 삼으셨고, 사사시대 말기에 혼란함이 극도였을 때에,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한나의 기도를 들으시고 사무엘을 예비하셨다. 유럽을 흔든 흑사병으로 인해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그래서 코로나 시대에 서서히 마무리가 되어가면서 하나님의 신적 개입을 통해 카이로스 타임을 경험할 수 있는 은혜 주시기를 소망한다.
 
오늘 본문 이사야는 구약성경의 예언서 가운데 노른자위아며, 하이라이트이다. 그중에서도 제일 높은 고봉이 바로 6장이다.

 
*이사야 6:1,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웃시야 왕은 16세 등극해서 52년 동안 예루살렘을 통치했다. 68세에 죽었다. 청소년 왕이었다 그러니 그 주위에 모사꾼들과 음모꾼들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자기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으니까 어릴 적부터 절실하게 하나님을 의지하여 신뢰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기뻐하셨다. 유대나라가 군사강국, 웃시야 때에 경제 강국이 되도록 하나님은 축복해주셨다.

 
*역대하 26:14~15절에 보면,
14 웃시야가 그의 온 군대를 위하여 방패와 창과 투구와 갑옷과 활과 물매 돌을 준비하고.
15 또 예루살렘에서 재주 있는 사람들에게 무기를 고안하게 하여 망대와 성곽 위에 두어 화살과 큰 돌을 쏘고 던지게 하였으니 그의 이름이 멀리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었더라.
-웃시야는 하나님의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한 국가가 되게 하셨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의뢰하니 하나님이 기이한 도움 심을 주셔서 군사 강국 실리콘 벨리를 만들어주셨다. 최정예군인이 된 것이다.
이것으로 끝나면 좋았을 것인데 바로 이어서 보면,

 
*역대하 26:16절에 보면,
16 그가 강성하여지매 그의 마음이 교만하여 악을 행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범죄 하되 곧 여호와의 성전에 들어가서 향단에 분향하려 한지라.
-그가 강성하여지니 마음이 교만해졌다. 잘된다고 할 때에 안정적일 때, 인간은 다 비슷하다. 인간이 잘 되면 교만해진다. 우리는 잘 될수록 몸부림쳐서 주의 은혜를 사모해야 한다. 그래야 은혜를 유지할 수 있다. 웃시야가 강대국으로 잘되니까 교만이 찾아왔다. 그 영광스런 제사를 제사장이 드려야 하는데 자신이 드렸는가? 자신이 제일인 줄 안다. 왕이 결코 할 수 없는 성전의 제사장 역할을 한 것이다. 그것을 본 대 제사장 아사랴가 놀라서 강직한 제사장들을 데리고 가서 왕께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 말리는 것을 무시하고 듣지 않았다. 교만한 것이다. 그래서 망하게 된 것이다.
 

*역대하 26:20

20 대제사장 아사랴와 모든 제사장이 왕의 이마에 나병이 생겼음을 보고 성전에서 급히 쫓아내고 여호와께서 치시므로 왕도 속히 나가니라.
- 아찔한 말씀이다. 하나님이 웃시야를 쳐서 졸지에 나병(癩病) 걸렸다. 나중에 아들이 대신 다스리고 나병이 걸려서 쫓겨났다. 약 10년간 유폐(幽閉)가 되어서 말년을 쓸쓸하게 보낸 것이다. 이사야가 이 사건이 마음에 각인되어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이는 시기에 다 포기하고 싶으 시기에,, 힘든 시기에, 리더가 제대로 없는 불안정한 시기에, 우리는 하나님은혜를 주셔서 이 만큼 경제적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 주셔서 나름 잘 살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영적으로 얼마나 건강 하는지를 영적으로 주님의 온전함을 닮아 가는지, 영적으로 우리는 얼마나 얻고 영적인 것을 먹고 살고 있는지를 보라. 물질적인 번영은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적으로 문제가 있다. 웃시야 시대에 사람들이 군사적으로 경제적으로 강국으로 잘 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오늘 본문 앞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볼 수 있다.

 
*이사야1:12에,
12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예배가 온전하지 못했다. 예배를 엉터리로 드리고 있다. 군사강국이고 경제 강국인데 영적으로 피폐(疲弊)해 있다. 듣기로는 우리 성도들이 온라인 예배를 드리면서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집중했다. 그런데 코로나가 길어지는 시간이 되니 예배의 자세가 흐트러지고 편하게 변하게 되고 있어서 아쉬움이 너무 크다. 그리고 이것은 온라인 생중계로 드리는 우리가 21세기 판 마당만 밟는 예배가 아닌가 한다. 마당만 밟는 것이 아닌지를 본 것은 온라인 생중계를 보면, 설교만 끝나면 접속수가 확 떨어진다. 마지막 찬양, 축도까지 드려야 예배의 온전함이니 꼭 지켜야 한다. 마치고 온라인 헌금도 드려야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인 것이다. 영과 진리로 예배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 비대면 좋아하다보면, 이 코로나 사태가 만들어 낸 사탄의 수류탄이 될 수 있다. 앞으로 2주간 비대면 예배를 드리라고 그러는데, 기가 막히다. 어디 정부가 예배를 드리라 말라 맘대로 하는지 정말 한심하다. 정부가 예배를 드리지 못하게 한다. 공산당도 아니고,,, 도대체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자유민주의가 아닌 듯하다. 교회가 정부에 길들여질 수는 없다. 만약에 우리가 드리는 이 주일예배가 내 인생의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예배이고, 우리 인생의 마지막 드리는 예배라면, 우리는 형식적으로 드릴 수 없다. 그러니까 이 코로나 사태가 예배에 있어서 알곡과 가라지를 구별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오늘 성도들은 한국교회 예배가 속히 회복되길 기도해야 한다. 단순한 예배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영적인 문제가 점검되는 시간이다. 마당만 밝는 자가 하나도 없었으면 좋겠다. 우리 사랑의교회 모든 성도들은 알곡 성도가 되길 소망한다.!!!~ 아멘.
 
▷본문 가운데 놀라운 동사 하나가 있다. 두 동사 가운데 하나만 오늘 하겠다.
 
*이사야 6:1절에,
1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오늘 우리 삶 속에 주님이 어디 앉아 계시는가, 주님이 높이 앉아 계시는가, 영광의 보좌에 앉아 계신는가. 내가 더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지를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사야 6:3절에,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사야 6:4절에,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이사야가 본 하나님은 영광이 충천한 나라이다. 하나님의 쉐키나의 영광이 가득 찬 것을 보았다. 오늘 찬송에도 생명과 빛으로 권능으로....!!!~~그걸 본 이사야는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고 찬양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찬양하는데 세 번이나 반복한다. 이것은 초월적 비교이며, 감당할 수 없는 비교이다. 카도쉬이다.
하나님의 거룩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스랍들이 그렇게 한다. 이 스랍이라는 것은 단어가 불타는 존재의 천사이다. 두 날개는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는 발을 가렸다. 얼굴을 가리웠다는 것은 너무나도 거룩하셔서 영광스런 하나님을 감히 볼 수 없어서 얼굴을 가린 것이다. 발을 가렸다는 것은 우리의 발이란 길 가는 것인데, 자기주도적인 삶을 말한다. 발을 가린 것은 자기 위지, 자기 길을 모두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이다. 모두 자기 주도적 삶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이다.
자기 발로 다니는 것은 하나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두 날개는 계속적인 섬김과 하나님께 언제든지 순종하는 것이며, 신속하게 순종하며 섬긴다는 것이다. 이 자세는 웃시야의 교만과 비교되는 것이다.
 
▷우리가 온전함의 고봉에 올라가기 위하여 이 서임식을 앞에 놓고 첫 번 째 생각할 것은?

 
I 내가 하나님의 영광을 본즉.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을 보지 않고서는 온전해 질 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과 온전함이 연결되어 있다. 사람들이 왜 온전해지지 못하는가?
 

*요한복음12:43절을 보면,

43 그들은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하면 온전해 질 수 없다. 하나님의 영광과 온전함,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함, 초월적인 것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온전한 제자가 되기 위해서는 평생 계속 바라보고 그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 속에 체득하고 매주일 이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영광을 경험해야 한다. 진실로 예배할 때에 그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기 때문에 은혜를 받는 것이다. 누가 뭐라 해도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보아야 한다. 트럼펫이나 관현악을 들어서 마음이 찡했을 것이다. 우리는 주님께 예배하는 것이 가장 온전한 내 능력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것 때문에 온전한 것이다. 내 속에 계시는 하나님으로 인해 온전함이 되는 것이다. 내 능력이 아닌 내 속에 계신 하나님이 온전하게 나타남으로 온전해진다. 진정한 온전함은 내 능력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것 때문에 온전해 진다. 키는 하나님의 영광을 접목할 때 우리가 온전해지는 것이다. 우리의 재주와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성도의 온전함은 하나님의 영광과 접목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직결되어야 한다. 우리의 숙명론, 운명론을 다 뛰어 넘는 것이다. 안 믿는 인생을 뭐 좀 아는 사람들은 인생은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다 안다. 그래서 온전 론이 좀 어려운 말이다. 행위로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으로 승화되는 것만이 온전해지는 것이다. 주시면 실수와 실패도 없다.

 
*이사야 6:5절에,
5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 우리는 죽을 때까지 주님 앞에 납작 엎드리게 되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럴 때에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신다.
 
*이사야 6:6~7절에,
6 그 때에 그 스랍 중의 하나가 부젓가락으로 제단에서 집은 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7 그것을 내 입술에 대며 이르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그래서 죄가 사하여진다고 하신다. 할렐루야~!!
 
 
II. 하나님의 영광을 본 성도는 온전해진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볼 때에 우리가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
-하나님의 영광을 통하여 성도는 온전해진다. 성도의 온전함과 하나님의 영광이 직결되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에서 말하고 있다.

 
*고후 4:17절에,
17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기가 막힌 말씀이다. 한 마디로 말하면 우리가 고통을 받으면 그 고통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고난을 통하여 인격이 성숙되었다고 하지만, 성도의 고난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에 중한 것을 우리에게 부어주시는 것이다. 고난과 환난이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의 은혜가 부어지겠구나!!~~ 이 영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고난당한 백성에게 부어주시는 것이다. 그 기회를 받는 것이 온전해 지는 지름길이다. 세상 사람들은 잘 이해하지 못한다.
 
▷고난이 축복이 되는 이유는 고난을 통하여 엄청난 하나님의 영광을 부어주시기 때문이다.
이것 때문에 우리가 비포와 에프터가 분명해지는 것이다. 매주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줄 믿는다.
우리의 삶속에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빛나고 있는가? 바울은 실천한 사람이다.

 
고후 4:8~10절에,
*고린도후서 4:8~10절에,
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는 믿음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고난이 있어도 납작 엎드려서 자녀들과 함께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 신학과 연결된다.
 
*에스겔 1:28절에, ~내가 보고 엎드려~~
*요한계시록 1:17절에,
17 내가 볼 때에 그의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 같이 되매 그가 오른손을 내게 얹고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처음이요 마지막이니.
 
-납작 엎드릴 때 하나님의 영광이 임재 하신다. 그럴수록 주님을 닮아가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니 우리 모두가 앞으로도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있을 줄 믿는다.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 있다.

 
III. 하나님의 영광의 빛 앞에 자신을 재발견하라.
 
*요한복음 1:14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영광이 있으면 은혜가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하나님의 영광이 은혜가 따르면 나를 재발견하게 된다.
나를 재발견할 때,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주님의 영광이 임하면 나를 재발견하는 영광의 선순환이다. 어떻게 재발견하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주님의 영광을 바라볼 때, 은혜의 선순환이 된다.

 
*이사야 6:7절에,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 하더라.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되어 자신의 죄가 사하여졌다. 이 은혜가 깨달아지길 바란다.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이 함수관계를 잘 감당하여야 한다. 그럴 때, 나 같은 죄인이 용서받았음을 감사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으며, 온전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영광은 하나님의 것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사모하는 자에게 그 영광을 부어주시는 것이다. 그럴 때에 추상적인 용어가 있다. 우리 성도님들은 앞으로 이 영광은 환난과 역경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을 때에 우리가 주님을 닮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닮아가는 것을 결정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바울이 고린도후서 3:18절에 있다.

 
*고린도후서 3:18절에,
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주의 영광을 바라보고 깨달으니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주의 영광을 바라보니 더욱 온전해진다. 우리는 봄으로써 변화되며, 우리가 공로의식이 아닌, 인간의 행위의식으로 연결되면 안 되며,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에 압도되어 기도할 때마다 우리는 주님의 온전함을 닮아갈 것을 확신한다.
 
*로이드 존슨 목사님은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영광의 하나님만을 바라보라고 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만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우리가 올라가야할 온전함의 고봉이 무엇인가?
-거기 고봉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하여 기다리실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라.
 
영화 ‘불의 전차’란 영화가 있다. 그는 선교사 자녀였다. 스코트랜드 출생이다.
불의 전차’는 1924년 파리 올림픽 육상 금메달리스트인 ‘해럴드 에이브라함’과 ‘에릭 리델’ 두 선수의 기적 같은 감동의 레이스를 그린 실화의 영화인데, 그는 주일에 이길 수 있는 대회에서도 주일에는 예배를 드린 인물로 유명하다. 육상대회 결승이 있었는데 그는 주일이라며 전도 집회를 한 선수이다. 나중에 7월 11일 기회에 그가 400미터에서 세계 1위를 했다. “Not on glory Sunday.”로 유명하다. 22세에 영광이 금메달을 위해 세상의 금메달을 포기한 청년이다. 성경구절이 하나 있다. 그가 올림픽을 못하고 주일에 전도집에 가면서 쪽지를 건내 주었는데 그 안에 이런 구절이다. 에릭은 이렇게 이야기 했다. 200미터는 본인 힘으로 달렸고, 남은 200미터는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이겼다고 말했다.
*사무엘상 2:30절 “나를 존중이 여기는 자를 내게 존중히 여기겠다.” 후에 그는 중국 선교사로 갔으며 주님 나라를 위해 순교한 자이다. 주일을 거룩하게 여긴 것처럼, 하나님의 면류관의 영광을 위하여 온전함을 사모하는 우리가 기도와 예배와 목자의 심정, 편지, 헌신된 삶으로 달려가서 모두가 다 21세기의 영적 엘 리더가 되어야 한다.
 
♣요약
우리가 사람의 영광을 사랑하는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 납작 엎드려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은혜를 바라보며 2주간 비대면 예배를 더욱 거룩하고 정직하게 드려서 은혜의 진리가 충만하고 영광의 빛 앞에 자신을 재발견하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주님의 온전함을 닮아가야 한다. 주님의 영광의 은혜를 충만히 부어주실 길을 믿고 사모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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