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1년 7월 3일)

제목:''하나님의 시선으로''
말씀: 사도행전 3:1~10
설교자: 윤대혁 목사님(LA 사랑의 빛 선교교회 담임)-초빙
 
기도: 김영수 안수집사님(목양5팀 남자대교구장)
찬양: 목양5팀-행군 나팔 소리에
말씀읽기: 곽승윤, 서유진(초등부, 소년부)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마무리 인도: 오정현 담임 목사님(암송과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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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3:1~10,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
2 나면서 못 걷게 된 이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3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그들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하나님을 찬송함을 보고.
10 그가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에게 일어난 일로 인하여 심히 놀랍게 여기며 놀라니라.
 
 

윤대혁 목사님(LA 사랑의빛선교교회 담임)
-이 새벽에 하나님의 은혜를 향하여 나온 온 성도들에게 주님의 크신 은혜와 축복이 임하게 될 줄 믿는다. 작년부터 전 세계가 겪고 있는 펜데믹(pandemic) 가운데에 모든 교회들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 될지의 길을 찾는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민 교회들과 많은 목회자들이 그 가운데에서 우리 사랑의 교회의 오 목사님의 말씀과 사랑의 교회 사역에 현장들을 통해서 펜데믹 가운데, 어떻게 교회가, 또 성도들을 양육하고, 사역해야 될지, 큰 은혜와 지침을 볼 수 있는 귀한 시간이었다. 이 자리를 통해서 오 목사님께, 교회의 성도님들에게 교회에게, 이민 교회를 대표할 수 없지만 큰 은혜를 받았음에 감사의 말씀을 진심으로 드리고 싶다.

 
-▷뉴저지 주의 드류 신학대학교에 있는 ‘레너드 스위트’라는 목사님은 교회가 시작되고 나서 교회는 ‘4가지의 단계의 변화(變化)를 갖는다’라고 이야기 하며 4M단계를 말하고 있다. 복음이 되고 나서 이후이다. 그 M자의 4개를 이야기 한다.

1M 첫째단계(Mission Church)-복음이 시작되고 나서 미션을 첫 단계로 시작한다고 한다. 복음을 전하고 많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것이 첫 단계를 뜻한다.

2M 둘째단계(Minist Church)-교회 안에 사역이 시작되면서 그 다음은 Minist Church로 바뀐다고 말한다. 교회마다 사역이 시작되는 것이다. (교회만의 교유한 사역, 이 교회는 말씀, 저 교회는 찬양, 저 교회는 양육이, 이런 교회만의 고유한 특징과 소문난 것 등)도 있으며, 교유의 특징이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3M 셋째단계(Maintenance Church)-시간이 지나면서 Maintenance로 바뀐다. 교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그동안 해왔던 많은 사역들을 안전하게 유지하기 위하여 새로운 도전보다는 문제가 없기를 바라는 교회로 바뀐다.

4M 넷째단계(Museum Church)-박물관 교회로 바뀐다는 것이다. 주일에 성도들이 오고, 평일에는 관광객들이 오는 유럽교회처럼 바뀐다고 하는 이야기를 했다.

-이것은 교회 변화뿐만 아니라, 시간이 흐르는 변화뿐만이 아니라, 우리들의 신앙을 점검해 볼 수 있는 시간이라 여겨진다. 펜데믹을 우리가 겪으면서 나는 무엇을 걱정했는가! 무엇을 고민했는가에 따라 나의 영적인 상태를 한 번 확인해 볼 수 있는 상황이다. 펜데믹이 터지고 나서 한 영혼이 혹시라도 잃어버릴까봐 고민하는 교회가 있었을 것이다. 펜데믹이 터지고 나서 앞으로 우리 교회 사역은 어떻게 되는 것인지, 이 교회는 어떻게 유지 할 수 있을 지를 고민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와 환경을 통해서 교회와 우리들이 고민하고 걱정해야 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복음의 사명, 한 영혼을 더 구원하기 위한 그 선교적인 삶과 그 사는 선교의 삶, 온전함을 이루어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그 삶을 우린 더 고민하고 기도하고 나아가야 될 줄 믿는다. 오늘 본문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고 계시는 본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제자들은 특별히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하였고, 뿐만 아니라 저주하여 그는 도망쳤다. 부활하신 이후에 나타난 그 예수님을 보고나서도 제자들과 많은 사람들은 두려워서 그들은 모일 수밖에 없었다. 오늘 이 3장의 내용은 2장과 4장에 중간에 있는 것이 3장인데, 이 3장의 내용은 사도행전에서 너무나 쉽게 보일 수 있는 앉은뱅이가 일어난 사건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장에 이어서 3장에 기록된 데는 특별한 의미를 담고 있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 충만하고 그가 온전해짐으로 무엇이 달라졌는가를 정확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본문이 이 3장에 말씀이다.

 
*행 3:1절,
1 제 구 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 새.
-제 구 시는 오후 3시를 말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를 드린다. 오전 9시, 오후 3시, 오후 12시이다. 예루살렘 성전을 향하여, 성전에서 기도하는 유대인의 관습과 신앙의 모습들이 있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3시에 기도로 올라갈 때에 또 한 사람이 늘 성전에 매일 갔다. 그 사람은 성경에서 이렇게 소개한다.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이었다.’라고 한다. 이 사람 역시 베드로와 요한처럼 항상 매일 성전을 향하여 나갔던 사람이다. 이 나면서 못 걷게 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그 의 이름이 무엇인지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한 가지 알 수 있는 유일한 특징은 사도행전 4장 22절에 보면 있다.
 
*행 4:22절,
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그 사람의 나이가 나온다. 자신의 나이가 사십여 세라고 말하고 있다. 이 나이가 나왔다는 것은 이 사람이 성전 미문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들을 보냈는가를 한 번 유추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부모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청소년기, 13,4세부터 40여세에 근 25년이나 30년에 가까운 시간을 항상 어김없이 성전 미문 앞에서 구걸(求乞)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그의 날을 통해서 우린 유추해 볼 수 있다. 베드로와 요한도 매일 성전을 향하여 갔고, 그리고 매일 나면서 걷지 못한 사람도 매일 성전으로 갔다. 베드로와 요한은 기도하기 위해 갔고, 이 사람은 돈을 얻기 위해 구걸하러 간 것이다. 같은 장소였지만 오는 목적은 달랐다. 성전 미문은 예루살렘의 아홉 개의 문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문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성전 미문을 직접 보았던 이스라엘 역사가 요세프스는 이 성전 미문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 높이가 28미터였고, 이 문은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금과 은으로 입힌 황동 문이며 이중문으로 웅장하고 장엄하기가 그지없었다고 말한다. 이 문을 보기 위하여 베드로 요한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많은 유대인들이 왔다. 그 문을 통과해서 성전에 들어가면 내가 특별한 은혜를 받을 것이라 생각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많은 문 가운데서도 이 성전 미문을 통과해서 성전을 향하여 왔을 것이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베드로와 요한의 이 사람 앉은뱅이 된 만남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이 사람과의 만남은 오늘 사도행전 3장에서의 첫 만남이었겠는가? 성전에 하도 많은 사람들이 다니니까 이 구걸하던 베드로와 요한을 기억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은 성전에 가면 그 사람이 있었다는 것과 보았던 사람이다. 하지만 늘 보아도 베드로와 요한에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늘 있었지만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우리가 길을 가다가 누가 구걸하는 사람을 만나면 민망해서 우리는 얼굴을 시선을 주지 않고 돌려버린다. 그 사람의 이름이나 얼굴도 기억 못한다. 나와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혀 상관없는 만남이 오늘 어떤 만남이 되는가?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기적(奇蹟)의 만남으로 기록되어 있다. 대체 베드로와 요한이 어떤 변화, 어떤 온전함이 나타났기에 이런 변화된 삶을 가졌던 것일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처럼 살아가는 또 사는 선교의 삶 가운데서 오늘 변화를 우리는 보게 된다. 우리에게 온전함이 임하기 시작하면 우리의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우리의 관심이 바뀌기 시작한다. 오늘의 본문, 4절에 말씀을 보자.
 
*행 3:4절,
4 베드로가 요한과 더불어 주목하여 이르되 우리를 보라 하니.

-성령 충만하여서 온전함을 이룬 베드로와 요한의 변화는 수십 년 동안 앉아있던 이 사람에게 관심조차 갖지 않았는데 이제는 그 사람을 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사람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성령 충만하면 달라지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시선을 갖기 시작한다. 성령 충만하면 돈을 많이 버는 능력도 아니고 성령 충만함이란 사업의 성공도 아니고, 성령 충만함이란 명예를 얻는 것도 아니며, 성령 충만하면 예수 그리스도처럼 살아가는 것은 예수님의 관심이 나의 관심이 되고 예수님의 시선이 나의 시선이 되어지는 것이다. 그 삶을 우리가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어느 순간 내가 복음을 전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지금도 영적인 굶주림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관심을 갖는 사람이 되어져 가고 있는 것이다. 선교사님이 와서 선교 이야기를 하면 그 이야기는 다 특별한 사람들이 하는 일이라고 하는 내가, 어느 순간 선교가자고 할 때, 선교의 사인 업을 하고 있고, 선교 동호회가 되어 선교 가자고 말하고 있는 나를 보게 된다. 목사님이 우리 영혼을 위해서, 우리 이웃을 위해서, ‘기도합시다’ 그 이름을 호명 하시면,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사람인데,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할 때, 내 눈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게 된다. ‘내가 왜 이러지?’ 내 안에 온전함이 그리스도의 시선으로 나를 바꾸어가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이 펜데믹에서 정말 우리가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예수님처럼 되어 지고, 살아가는 이 온전함에 이르는 모두가 서야 될 줄 믿는다. 이 페데믹을 겪는 가운데 성도들의 유익이 어떤 것이 나타났는지를 많은 조사를 통해서 접하고 있다. 이민교회와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이지만 성도들이 잘 견딜 수 있을까?, 신앙적으로 잘 지켜나갈 수 있을 까를 얼마나 기도했는지 모른다. 하나님은 너무나 감사하게도 성도님들의 삶 가운데 비록 모이지는 못했어도 만날 수 없었지만, 이 펜데믹 가운데에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더 많이 읽게 되었다고 말하는 자도 있고, 성경을 1독,2독 했다는 자도 있고, 필사를 했다는 자도 있다. 내가 교회가 얼마나 은혜의 선물인지를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다. 교회를 사랑하게 되고, 성도들을 사랑하게 되고, 말씀을 사랑하게 되고, 그 은혜의 풍성함 등을 우리는 누렸으며, 그것으로 인해 우리는 새로운 변화가 있어야 하는데, 바로 베드로와 요한이 고백하고 있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살아가고 있는 삶을 우리가 누려야 될 줄 믿는다. 그 영혼에 대한 귀한 소중함이다. 그 마음으로 한국교회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부흥을 맛보았던 교회이다.

 
※우리 부모님은 개척교회를 하셨다. 상가 2층에 조그만 교회였다. 목회하실 때에 주일학교예배를 마치고 나면, 아버지는 열시쯤 봉고를 타시고 차량운행에 성도님들을 모시고 오시고 나서 11시 예배를 시작 될 때까지 방에 들어가셔서 말씀을 준비하시면 좋으실텐데, 교회 앞에 서서 서성거리셨다. 저 멀리에서 성도가 오지 않을까하는 마음으로 기다리셨다. 마치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시듯이... 누가 성경책을 들고 오면, 아버님은 부랴부랴 올라오셔서 중간층에서 기다리신다. 혹시나 우리 교회에 들어오시지 않나를 기다리신다. 그런데 들어오지 않고 훅 지나가면 마음이 훅 꺼진다. 그 모습이 기억난다.(짠함). 하루는 설교를 열심히 하시는데, 갑자기 설교 중에 말씀의 톤이 바뀌고 설교가 힘차고 재미있을 때에 느끼는 것은 우리 가족이 자연스럽게 살짝 뒤를 돌아보게 된다. 돌아보면 새 가족이 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너무나 좋으셔서 신이 나셔서 설교하시는 모습이다. 티가 났다. 그러다가 성도님이 안 나오면, 집사님이나 안 나오거나 아프다고 연락이 오면, 고기도 사주시고 위로 하신다. 우리는 신경도 안 쓰신다. ㅋ ~ 주일학교 때에 성경학교 때에 끝나면 하루는 피크닉도 있고 중고등부수양회도 있을 때에, 항상 외부에 가면 안전사고를 위해 조심한다. 그런데 항상 한 사람이 다칠 때가 있다. 대체로 목사님의 아들이 다치더라. 항상 그러면, 아버지는 말씀 가운데 이번 ‘수양회에 중고등부가 하나님의 은혜로 너무 좋은 시간을 보내고 와서 감사하다. 주일학교에서 수고하신 선생님들 너무도 감사하다. 이번에 많은 아이들 가운데 다친 아이가 우리 아이여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고’라고 말씀하신다. 나도 아프다, 무쇠 다리는 아닌데 그래도 그것을 은혜라고 말씀하신다. 이유가 뭐냐면, 성도님들 가족이 다치면, 혹여 마음이 시험 들어 주님을 떠나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다. 그게 안타까우신 것이다. 우리 아들이 다친 것이 얼마나 감사하다고 하신다. 간증하실 때마다, 그 마음을 그때는 서운했지만, 이제는 그 마음을 안다. 여러분 한국 교회가 이런 심정으로 성장한 교회들이다. 예수님의 마음과 하나미의 마음으로 충만했던 교회들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들의 마음일 어떻게 변하였나? 어는 순간 영혼에 대한 관심이 멀어지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목회자인데 영혼을 끝까지 사랑해야 하는 일이 사명인데 어느 순간 마음이 식어져 있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될 때가 있다. 가끔 성도님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고 간접적으로 들을 때가 있다. 교회 오면 얼굴을 찡그리고 오신 그분이 다른 교회로 갔다고 말씀한다. 얼마나 우리 교회를 사랑하는 것 같다. 내가 편한 것만 섬기며 살아오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된다. 새 가족을 하나님께서 보내 주시면 다락방에 순원에 넣어드리려 하면 한 영혼이 오면 감사했던 그 마음이 어느 순간 성도의 수가 차고 넘치기 시작하면 그 구역 원을 연약한 구역 원을 정말 잘하고 좋은 구역장에게 주면, 순장님이 지난 일 년 동안 힘들었다고 하면서 이제 가족 같고 집도 오픈하고 좀 안정되려고 하는데 그분을 주시면 분위기가 흐려진다고 말씀한다. 우리는 못 받는다고,,, 순장님께 나는 이렇게 전해드린다. 무슨 말씀이냐고,,, 하나님께서 보내신 영혼을 누구든지 기도하고 변화시키고, 나누어야지, 사람을 가리냐고 조언하고, 순장님이 되셔가지고 그러시면 안 된다고 말하고 싶지만 이야기를 듣고 보니 틀리지 않네요,,, 하면서 이 성도님을 안타깝게도 이리 보낼까, 저리 보낼까를 생각하게 한다. 많지는 않지만 간혹 경험할 때가 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그가 흘리신 피와 땀과 그 모든 희생에 이유가 어디 있느냐?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 역시도 그 사랑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그 사랑을 받았기에 우리 역시도 그 사랑을 하나님께 이 땅에서 드려야 하는 예수 제자의 삶을 우리가 살아가야 한다.
 
오늘 성전 미문에 나면서 앉은뱅이가 된, 30년에 가까운 성전에서 그 자리를 지킨 이 사람의 마음 안에 진짜 간절한 소원은 무엇인가? 이 사람의 소원은 그곳에서 돈을 벌어 부자가 되는 것이 소원이었을까? 만약 그것이 소원이었다면, 베드로 요한에게는 원수 중에 최고의 원수일 것이다. 나의 생계의 끈을 끊어버린 사람이다. 사도행전 16장에 말씀을 보면 귀신들려 점을 봐주는 계집종을 사도바울이 자유케 해서 고소당한다. 베드로와 요한이 딱 고소당하기 쉬운 컨디션인데, 이 사람의 간절한 소원은 무엇이었냐면, 오늘 본문 8절에 나온다.

 
*행 3:8절,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하니.

-이 사람은 유대인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전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이 사람을 성전 안으로 들어가지 않게 하고 성전 미문에 내려다 주고 간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려고 예배하러 가는데 누구 한 사람 나를 성전 안으로 데려가는 사람이 없다. 마음이 어떠하겠는가? 나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예배하고 싶은데, 나도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하고 싶은데, 아무도 성전 안으로 데려가 주지 않는다. 내 간절한 소원하는 것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 예배하는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은 그 사람의 영혼에 있는 간절한 부르짖음을 듣기 시작했다. 이 사람의 간절한 소원은 하나님을 만나고 찬양하고 뜀을 뛰며 주 앞에 영광이 되어 주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가 펜데믹을 보내며,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분들과 상황이 힘든 분들이 참 많다. 하지만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 미래에 대한 막막함, 앞으로 어떻게 될지, 이렇게 많은 복잡함이 있을 때, 세상의 많은 사람들의 마음 안에 뭐가 생기는지 아는가?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고 있다. 나도 예수 믿고 소망을 얻고 싶은 것이다. 어려우니 돈과 어떤 것이 필요할 것이라 말하기도 하지만, 진짜 문제와 고난 앞에서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우리는 그 부르짖는 소리에 귀가 열려 있어야 되고 나아가야 된다는 것이다. 선교지에서 많은 선교사들이 말씀한다. 그 자리를 지킨 선교사님들이 “목사님, 펜데믹 전에는 30-40명이 신학교에 되지 않았는데, 신기하게도 80명이 등록해서 하나님 앞에 헌신하고 있어요”라고 말한다. 어려울 것 같았는데, 더 하나님을 찾는 물결이 있다. 이런 이야기를 한다. 한국교회는 여러 가지 일들 때문에, 강제적인 제약 때문에 힘들고 복음주의가 어렵고 신뢰가 말이 아니라고 하지만, 생각해보면 역사가운데 말이 되는 때가 있었는가? 편할 때가 있었는가? 환경이 모든 게 다 갖추어져 있었던가? 아니다. 계속 핍박과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는 온전함을 이루어가는 성도들을 통해서 복음의 역사가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환경과 상황을 뚫고 펼쳐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었다. 지금 우리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될 줄 안다. 여러분, 큰 교회가 있고, 작은 교회가 있다. 재정적으로 넉넉한 교회가 있고, 부족한 교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금과 은은 없지만 모든 성도님들이 갖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보배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는 얻은 자들이다.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할 때에, 하나님께서 이 이 땅에 놀라운 펜데믹 시대에 영적인 풍부만이 아니라 펜데믹 이후에 전에 보지 못했던 영적인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 가운데 허락하실 줄 믿는다. 하나님은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신다. 우리를 향한 계획이 있음을 믿는다. 우리 주변을, 가족을 살펴보라. 무엇이 필요한지를, 정말 회복을 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라.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 예수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자 되길 축원한다. 베드로와 요한은 성령 충만한 그 이전의 삶과 그 이후의 삶이 달라졌다. 온전함을 이룬 그 이전의 삶고 그 이후의 삶은 달라진 것이다. 우리 역시도 주님과 믿음의 선배들이 걸어갔던 그 길을 따라 우리 역시도 하나님의 시선을 가지고 지금도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헤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심정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자 되어야 한다.

 
♣요약
우리를 그리스도의 제자의 사명을 주신 것과 날마다 성령 충만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걷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어두워가는 이 시대에 우리를 빛과 소금으로 삼으셨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고 예수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온전한 삶을 이루어 이 땅에 많은 영혼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부족함 없는 하나님의 충성스런 제자가 되어 주님께 향한 시선이 되어야 한다.
 
-당시 유대인들은 3시(오전 9시), 6시(정오), 9시(오후 3시)로 시간을 정하여 하루 세 번씩 규칙적으로 기도하였다. 규칙적이고 성실한 신앙생활은 우리를 점점 성숙하고 능력 있는 신앙으로 이끌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간 때도 기도 시간이었다. 그때 그들은 성전 미문에 있던 앉은뱅이를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걷게 했다. 베드로의 치유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힘입어서 나온 것이다. 이처럼 기도의 능력은 사람이 감당치 못한다. 이때 치유 받은 앉은뱅이는 하나님을 찬미했다. 앉은뱅이는 배후에서 역사하셨던 하나님보다 도구로 사용된 인간 베드로에게 더 감사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릴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온전히 증거 한 것과 그 사실을 믿은 앉은뱅이의 믿음이 합치되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베드로는 자기 능력의 과시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는 데 만족했다. 이처럼 치유의 목적은 온전히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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