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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1년 6월 26일)

제목:''통일의 온전함을 향한 처음 사랑''
말씀: 요한계시록 2:1~7
말씀읽기: 이재혁 형제, 신은영 자매)-북사선
기도: 한영애 부목사님
간증: 고요한, 김은주(반석학교)

설교자: 이기원 부목사님(북한선교사역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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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2:1~7,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6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 당의 행위를 미워하는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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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찬양의 마지막 부분의 가사가 특새(특별새벽부흥회)가 평양에서 이루어질 때까지였다. 특새가 속히 올 것을 믿는다. 이런 맥락에 성가대석에 앞 정광 스크린에 중요한 광고가 있다. 출애굽때 광고 못 들어서 출애굽을 못하는 소문이 있다. 평양 대부흥 120주년 기념 온전함을 세계에 비추는 제 30일차 글로벌 특별새벽부흥회예배가 있다. 1914년 1월 14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있었던 120주년을 기념하는 차원에서 우리 글로벌 특새가 준비되고 있으며, 주제는 “피흘림 없는 복음적 평화통일’을 주신 하나님께 영광”이다. 주후 2027년 1월 11~16일까지, 14일을 기준으로 해서 담임 목사님께서 말씀 하신다. 앞으로 6년이 남아있다. 장소: 평양 장대현교회-오정현 목사님의 강사로, 알겔라 독일총리, 그리스토레베르그 목사님 등, 평양 기도회를 이끄실 통일 지도자분들과 함께 할 계획이다. 이 날이 곧 올 거라 여겨져서 마음이 벌써 떨린다.
 
▷믿음의 선포이다. 현수막을 실제로 사용하길 기도한다. 찬양대에서 섬기신 분들은 손에 푸른 띠를 두른 것은 영생을 의미한다. 북한 땅에도 생명의 기쁨과 희망 그리고 영생이 임하길 바라서 푸른색으로 머플러까지 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감사함을 가지고 성령님의 역사로 이루어지길 소원한다.
 
성경에 보면 에베소교회에 보내진 편지가 두 통이 나온다. 하나는 사도 바울이 로마에서 가택 연금 상태로 써서 보낸 옥중 서신인 하나인 에베소서이며, 또 하나는 사도요한이 밤모섬에서 유배되어 있는 동안 써서 보낸 서신이 오늘 본문 말씀이다. 두 편지 사이에는 학자들 간의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약 40여년의 공백이 있다. 이 40여년 세월동안 에베소교회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먼저 에베소교회는 사도 바울이 3차 전도여행에서 세운 교회라고 하는데, 그렇게 간단하게 말하기는 사도 바울을 비롯한 너무나 많은 분들이 헌신을 해서 세워진 교회가 에베소교회이다. 우선 사도 바울이 선교 차원으로 처음 에베소를 방문한 것은 제 1차 전도여행이었고, 2차 전도여행에서도 에베소에 가려고 엄청 애를 썼으나 결국 못 가고 고린도에 가게 되었다. 거기에서 사도 바울과 평생 함께하는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난다. 항상 담임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대목이다. 사도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먼저 에베소로 보내는데 이 부부가 에베소에 가서 이런저런 준비를 하는 것이다. 개척, 교회 설립 준비를 시작하게 된다. 이렇게 시작한 에베소교회는 그 후 40년간 크게 성장했고, 소아시아 장자교회 정통교회인 파수꾼 교회가 되었는데 이런 교회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우선 사도 바울이 3년이라는 적지 않는 시간동안 사역을 했고 그리고 율법에 도통하고 언변이 뛰어났던 아볼로 디모데 두기고 심지어는 오늘 본문을 쓴 사도요한도 이 교회를 섬겼다. 이런 굵직한 지도자들의 섬김으로 많은 귀한 열매들이 있었는데, 주변에 소아시아 전체 교회를 섬기고 책임지는 많은 사역자들이, 다음세대 사역자들이 여기서 배출되었다. 그중에 성경에 뚜렷하게 나오는 대표적인 인물들은 소바도, 아리스다고 세분도 가이오 디모데 두기고 부르디모 디도 에바브라 골로새에 빌레몬이 다 이분들이 에베소교회의 출신들이다. 이렇게 에베소교회에서 배출된 인물들이 그 당시 소아시아 전체를 섬겼고, 한 시대의 영적인 흐름을 채우고 책임졌던 것이다. 그런 사역을 40년간 감당했던 예수님께서 사도요한을 통해 오늘 에베소서에 이어서 두 번째 편지를 보낸다. 어떤 내용인가?
 
*계 2:1절에 보면,
1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라 오른손에 있는 일곱별을 붙잡고 일곱 금 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이르시되.
♤사자 - 교회를 수호하는 천사(교회자체).
♤오른 손 - 예수님의 절대권능.
♤일곱별 - 일곱 교회 사자들.
♤금 - 예수님의 신성.
♤일곱 숫자 – 완전, 완성을 의미한다.
 
-수많은 교회가 있었지만 일곱 교회를 선택해서 이런 편지를 보내신 것은 단순히 에서버두사빌라, 이 일곱 교회에게만 쓰여 진 것만이 아니라, 그 당시 전체 초대교회 나아가서는 모든 지상교회 쓰여 진 편지라는 의미가 일곱이라는 완전, 완성을 상징하는 숫자에 담겨있다. 이 편지는 지상 모든 교회가 귀를 열고 들어야 하는 편지라는 것이다. 그리고 촛대는 1장 앞부분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것처럼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이다. 이렇게 오른 손의 권능과 일곱 교회 사자들을 붙잡고 신성을 가지고 계신 예수님께서 일곱 금 촛대사이를 거니시는 이가, 거니시는데 거니심을 나타내는 펠리파도는 주로 예수님의 깊은 교제와 동행을 보여 질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 이것은 즉 예수님께서 그냥 거니시는 것이 아니라, 그냥 돌아 다시는 것이 아니라, 쉬지 않고 교회를 위해 교회의 꺼져가는 등부를 켜시고 성령의 기름을 공급하시며, 하나님의 임재와 신성이 가득해야 하는 금, 촛대인 교회를 분주히 일하시는 이가 거니시는 이가라는 말이다. 그러면 에베소교회에게 예수님께서 먼저 칭찬을 하신다.
 
*계 2-3절 보면,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성경에는 ‘알고’, ‘안다’라는 단어가 세 가지가 나온다.
♤첫째는 경험으로 얻어진 지식을 통하여 아는 (기노스코).
♤둘째는 사실과 사건에 대하여 아는 전문적이고 기술적인 지식을 말하는(에피스타마이).
♤셋째는 신적 통찰력을 나타내는 직관적 지식, 하나님의 절대적 지식(오이다).

-오늘 본문에 사용되는 것은 ‘오이다’이다. 하나님께서 아신다라는 전지하신 하나님의 직관적 지식을 베이스한 ‘알다’이다. 이사야서에 “내가 그들의 사상을 아노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아시는데 무엇을 아시는가 하면, 에베소교회의 성도들이 교회를 위해 어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했는지를 아신다. 다음세대에 노력한 것들을 아신다는 것이다. 성경에는 수고에 해당하는 근위어가 두 개가 있다.
 
♤모크쏘스(살전 2:9)-애쓰고, 애써, 애쓴 것(고통스런 노동의 수고를 의미) + 포노스(계 16:10)-아파서, 아픈 것(몸과 마음이 아플 정도로 온 힘을 다한 수고) = 코포스-( 오늘 본문에 이 두 단어가 합쳐서 결과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애쓰고 아픈 실신상태.
-에베소 성도들이 교회들을 위해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몸이 부서지도록 뛰어다니고 헌신했는지, 또 그 과정에서 얼마나 몸과 마음이 상했는지 다 아신다는 것이다. 몸이 부서지도록 일했는데 엄한 이야기를 듣고 몸이 부서지도록 헌신했는데 어떻게 제대로 인정해주는 사람 알아주는 사람 하나 없는지,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오이다(예수님은 다 아신다)’ 다 아신다는 것이다. 얼마나 힘든지, 아픈지, 교회를 위해 헌신했는지를 예수님은 다 아신다는 것이다. 악한 자들을 구별하고 흔들리지 않고 리골라당까지 미워하며 배척하며 걸러 내면서 몸이 부서지도록 감당하면서 안에서 싸우고 바깥에서 싸우며, 몸이 부서지도록 감당한 수고, 심신이 무너지면서, 모든 인내와 참음을 견딤을 이제는 더 이상 못 하겠다라는 말을 하지 않고 더 적극적으로 여전히 섬기면서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성도님들을 예수님께서 칭찬해 주고 계신다. 다른 사람들은 다 몰라도 예수님은 알고 계신다. 다 몰라도, 예수님은 알아주신다. 그런데, 이렇게 칭찬만 끝나면 좋겠지만 예수님께서는 에베소교회를 책망하신다.
 
*계 2:4절에 보면,
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처음 사랑은 처음 하나님을 믿게 되었을 때,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순수하고 열정적인 신앙 안에서의 사랑을 의미한다. 에베소교회는 복음을 기쁨으로 받아들이고, 열정적인 사랑을 가지고 말씀을 기초로 생명력 있는 사여을 잘 감당하는 교회였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면서 언제부턴가 예수님을 향한 다른 성도들을 향한 그 처음 사랑과 열정과 헌신을 잃었다. 여기에는 이런 개인이 변했다, 사랑이 있다가 없어졌다는 의미도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세대가 바뀌면서 교회가 40년간의 세월동안 달라졌다는 의미도 있다. 전에는 정말 헌신적이고 물불 가리지 않고 몸이 닳아 없어지도록 목숨을 바치던 1세대가 지나면서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면서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에게 눈물을 흘려가며 말씀을 나누고 너무나 간절한 마음으로 안타깝게 사랑을 나누며 죽을 때까지 헌신과 소명을 감당하자고 다짐했던 그 세대가 지난 후 그 다음 세대는 그렇게 고생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나누면서 교회를 위해서 목숨 걸고 살고 싶지 않다고 하는 것이다. 사명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살고 싶지 않다는 신앙생활을 이제는 좀 편안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런 모습으로 변한 것이다. 다음 세대로 1세대의 헌신이 제대로 계승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에베소교회는 처음에는 사랑이 너무도 충만했다. 에베소교회는 그 어느 교회보다도 사랑이 많은 교회로 칭찬받던 교회였다. 40여 년 전에 사도 바울이 에베소교회에 쓴 편지 내용이 있다.
 
*에베소서 1:15-16절에 보면,
15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사도 바울이 모든 성도들의 서로 사랑을, 그 사랑을 듣고 감사하는 것이다.
 
또한 그 마지막 편지 부분에 보면
*에베소서 6:24절에,
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축도를 할 정도다. 에베소교회는 특별히 성도가 성도를 사랑하는 성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특별했던 교회였다. 이렇게 40년 전 그 당시 사랑이 차고 넘쳤다. 그리고 그런 에베소교회는 교회 안에 사랑하는 사람들만 있어서 사랑받기에 합당한 모여서 사랑한 것만은 아니었다. 반대로 사실 내가 포용할 수 없는,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모습과 조건을 가지고 있는 다양한 성도들이 에베소교회처럼 많았던 교회가 드물었다. 에베소는 도시 자체가 국제 도시였고, 여러 곳에 사는 사람들이 와서 살았는데, 설교 앞부분에서 보면, 에베소교회 일꾼들의 출생, 출신들을 보면 정말 다양하다. 이방인들도 있다. 그리고 골로새, 로마, 에베소 사람들도 많았지만 여기저기에서 다른 지역 사람들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안으로 하나가 되고 서로 사랑하는, 서로 다른 모습을 감싸 안아주는 진정한 영가족이었다는 것이다. 우리로 보면 강원도,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에서 오신 것이다. 양강도 함경도 자강도 평안남북도, 세계 방방곡곡에서 와서 다 모였는데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서로를 끔찍하게 사랑하는 영가족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사랑의 교회 처럼이다. 이 자리에 있는 우리들처럼 그런 모습이었다. 그런데 40년이라는 세월이 지나면서 에베소교회는 많은 풍파를 겪는다. 세상의 공격과 맞서 싸워야 했고, 교회 내부적으로 순결을 지키며 싸워야 했으며 니골라 당은 정말 힘들게 하는 세력이었고, 율법과 말씀의 기초를 쌓는 데는 이 에베소교회가 성공은 했지만 교회로서 복음의 순수성은 지켰지만 말씀의 진리에 올바로 서는 그 사명은 감당했지만, 그만 서로 사랑하고 돌아보면서 고통과 아픔을 나누면서 그 마음,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것이다. 다음세대가 더 이상 부모님들처럼 서로 사랑하며 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버렸다.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교회를 예수님께서는 책망하시고 꾸짖고 계신다. 감사한 것은 책망만 하시는 것이 아니고, 해결 방법을 또한 주신다.
 
계 2:5절에 보면,
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졌는지를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가서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처음 사랑을 회복하는 방법 3가지.
♤첫째
- 생각하고(Remember! 생각하라): 기억하고 예수님의 성도들의, 교회에 대해서, 그 순수하고 뜨거운 사랑을 잃게 된 이유를 생각해 보라는 것이다. 사람들과의 관계인지, 사역에서 받은 상처인지 등 실망의 포인트를 생각하고, 그리고 교회적으로는 1세대가 다음세대로 제대로 전달되지 못한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하라는 것이다.
 
♤둘째
- 회개하여(Repent! 회개하라): 마음을 돌이키고 목적을 갖고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나를 무너뜨렸던 시점을 생각하고 그 사람을 생각하고 그 정황을 생각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라는 것이다. 그것으로 사람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회개하라는 것이다. 용서를 빌고 회개하라는 것이다.
-
♤셋째 –처음 행위를 가지라(Return 처음 행위를 행하라): 사랑을 회복하는 행위를 가지라는 것이다. 퍼주고 퍼주어도 행복했는데, 모아서 헌금하고, 힘든 시간에도 교회에 나갔던 것을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그 행복을 느꼈던, 열정을 느꼈던 것으로 돌아오라는 것이다.
-그렇게 회개하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그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긴다는 것이다. 촛대는 교회를 상징한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긴다는 것은 그냥 옮긴다는 것이 아닌, 그 존재 자체를 없앤다는 것이며, 엄청난 말씀이다. 다른 성경에서는 등불, 등대라고 하는데 세상에서 빛을 비추는 등대 역할을 하기 위해 존재하는 교회가 그 교회를 더 이상 사명, 존재 가치를 할 수 없게 없애시겠다는 그런 경고를 하시는 것이다. 그 역할을 못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에 보면 사라진 교회들이 많다
 
*계 2:7절에 보면.
7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에베소교회에 쓰여 진 이 편지가 여기에서 교회에게가 아닌 교회들이다. 초대교회들에게만이 아니라 지상교회, 모든 교회에 들으라는 편지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귀 있는 자들은 잘 들어서 이기는 계속 이겨야 하는데 끝까지 이겨야 하는데, 그러면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를 먹게 해준다는 약속을 하시는 말씀이다. 여기에서 낙원은 ‘페러다이스’이다. 영생의 생명나무는 하나님의 나라를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사단의 유혹과 박해를 견디고 끝까지 승리하는 자는, 믿음을 끝까지 지키는 자는 이 나무의 열매를 먹는다는 것이며 영생을 누린다는 말씀이다. 우리 사랑의 교회가 이 처음 사랑을 잘 지키고 잘 유지해야 한다. 특히 복음적 평화통일을 통해서 허락하신 피 흘림 없는 복음적 평화통일에 대한 처음 사랑을 잘 감당해서 다음 세대에 신앙을 잘 계승해서 교회로서의 시대적 등대 역할을 끝까지 충성되이 감당하는 칭찬만 듣는 사랑의 교회, 성도가 되어야 한다.
 
♣요약
한반도에 피 흘림 없는 복음적 평화통일이 하루 속히 이루어지게 기도하며, 우리가 다가오는 통일사역을 이끄는 선봉장이 되어 귀하게 쓰임 받는 자 되어야 한다. 우리교회 북한사랑의 선교부와 반석학교가 남한에 거주하는 새터민들과 북한 지하교회 성도들을 섬길 수 있는 선교의 교두보가 되어 장차 주님 앞에서 통일시대를 이루는데 사명으로 헌신하며, 준비하게 하는데 부족함이 없어야 한다. 주님 안에서 서로 사랑하여 처음 사랑을 잃지 않고 그 열정으로 생각하고, 회개하고, 돌아와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음의 지경을 넓혀가는 헌신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체험한 에베소 교회는 서로를 구제하며 자비를 베풀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생활 초기에 가졌던 내적인 헌신과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을 잃어버렸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첫 사랑과 하나님 앞에서의 겸손을 회복하고, 자신의 삶에서 나타난 잘못을 고백함으로 촛대를 옮기게 되는 것을 미연에 방지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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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1년 6월 23일)
제목: ''너희 자녀가 묻거든''
말씀: 출애굽기 12:21~27
시회인도: 문진호 부목사님
설교자: 박주성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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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12:21~27,
21 모세가 이스라엘 모든 장로를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가서 너희의 가족대로 어린 양을 택하여 유월절 양으로 잡고.
22 우슬초 묶음을 가져다가 그릇에 담은 피에 적셔서 그 피를 문 인방과 좌우 설주에 뿌리고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라.
23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리려고 지나가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문설주의 피를 보시면 여호와께서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에게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
24 너희는 이 일을 규례로 삼아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
25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이라.
26 이 후에 너희의 자녀가 묻기를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하거든.
27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에게 재앙을 내리실 때에 애굽에 있는 이스라엘 자손의 집을 넘으사 우리의 집을 구원하셨느니라 하라 하매 백성이 머리 숙여 경배하니라.
 
 
▶우리가 상반기 동안에 온전함을 사모하며 달려왔다. 이 온전함이라고 하는 것은 신약의 그리스도인들,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만이 아니라 구약의 언약 백성이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었다. 오늘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온전함을 닮아가는 삶이 신앙의 표본이지만, 구약의 언약백성에게는 언약 백성으로서의 거룩한 삶을 추구해 가는 것이 신앙의 표준이었다. 온전함이란 단어를 구약에서는 ‘거룩함’으로 바꿀 수 있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룩해야만 거룩하신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고, 거룩해야만 하나님이 약속하신 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온전한 삶을 살 수 있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은 온전한 삶을 산다. 하지만 거룩하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은 온전해 질 수가 없다.
 
오늘은 온전함을 추구하는 삶의 과정 속에서 구약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요구하셨던 거룩함을 추구할 수 있는 방법들을 나누자.
 
출애굽기에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한 다음에 언약 백성인 너희들이 거룩한 백성으로 살아가려면 구별된 삶을 살아가려면, 이러한 원칙을 붙들라고 하신다. 레위기 말씀이 있다. 레위기에는,,,
 
레위기에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5가지의 제사가 나온다. 번제, 소제, 화목제, 속건제, 속죄제라고 하는 다섯 가지의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께 예배하면서 거룩한 삶을 살라고 요청하신다. 그리고 후반부에는 7가지 절기를 알려주신다. 3대 절기는 유월절, 오순절, 무교절, 장막절, 이런 절기와 더불어 나팔절, 속죄일, 무교절 이런 절기들을 일곱가지 절기를 허락하셨다. 이 절기는 매년 반복되었다. 특정한 날에 그 절기를 지켰다. 그 절기를 통해서 하나님 백성들에게 허락하셨던 은혜를 기억하고 매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기를 원했다. 예를 들어서 유월절 절기는 이스라엘의 독립기념일과 같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하나님의 강한 손과 편 팔로 구원을 받은 것이다. 애굽의 모든 초태생들은 다 하나님께서 생명을 구원하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정을 지키신다. 오늘 읽은 출애굽기 12장이 그것을 기념하기 위한 유월절 배경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유월절 절기를 지킬 때에 하나님이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좌우 인방에 발라서 그럼 문지방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문설주에 바른 피가 문지방에도 피가 흐를 것이다. 그 피가 문에 사방에 붙어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표적으로 붙어있는 것을 하나님이 넘어가시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키시는 참 하나님이심을 증명해 주신 것이다. 초태생 생명들을 구원해 주시는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날 저녁에 5일 동안 골라둔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양을 잡는다. 그 고기들은 육회로 먹어서도 안 되고 물에 삶아서 먹어도 안 되며, 불에 구워서 쓴 나물과 함께 먹어야 했다. 먹는데 신발을 신고 허리에 허리띠를 띠고 그리고 서서 먹어야 되었다. 원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식사를 할 때에, 이렇게 비스듬히 먹었었다. 편안하게 누워서 먹었다. 그렇게 식사를 하는데 서서 신발을 신고 허리띠를 띠고 지팡이를 짚고 불에 구워서 쓴 나물과 함께 유월절 어린양 식사를 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녀들이 웃지 않겠는가? 오늘 본문처럼, 우리의 자녀가 이 예식이 무슨 뜻인지를 물을 것이다.
 
왜? 편히 먹지 않고, 누워서 식사를 하지 않고, 곧 떠날 것처럼 이렇게 서서 식사를 해야 하냐고 한다. 물어보면, 그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던 집에 어린양의 피가 표적으로 묻어 있는 것을 보시고 우리 집을 넘어가셔서, 조상들을 넘어서, 이스라엘의 초태생, 장자들을 다 지키시고 애굽의 장자들을 다 거두어 가셔서 우리가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구원을 얻게 되었다고 신앙의 기회로 삼았다. 그렇게 절기를 지키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차곡차곡 넘치도록 부으신 은혜들을 기억하면서 하나님 손 붙잡고 든든히 나아가는 삶을 살게 하신 것이다. 예배를 통해서, 제사를 통해서, 절지를 통해서, 구별된 삶,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역사였다. 하나님은 유월절만이 아닌 무교절에 한 주간 동안 이어진다. 이 절기는 무교병을 먹는다. 누룩을 넣지 않는 절기이다. 누룩은 반죽을 부풀게 하는 것이지만 그런데 출애굽 시에 갑자기 이스라엘이 짐을 싸들고 백성들이 애굽 땅을 떠나야 하는데, 떡 반죽 그릇을 안고 바로 출애굽의 여정에 동참해야 하는데 거기에 누룩을 넣어버리면 떡 반죽에 넣으면 반죽이 부풀어서 곧바로 떡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서 그 안에 누룩을 넣으면 안 되었다. 반죽을 옷에 둘둘 말아서 싸들고 반죽을 안고 출애굽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일주일 동안은 부푼 떡을 먹지 못하는 것이다. 베이킹 소다를 넣어야하는데 못하는 것이다. 어려움을 겪었던 것이다. 그냥 유월절을 지내고 나면 하나님이 출애굽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그 은혜를 기억하는 절기로 한 주간 동안은 무교절로 지키는 것이었다.
 
자녀들이 그렇게 물으면 하나님이 강한 손과 편 팔로 구원해 주신 은혜들을 자녀들에게 전하라고 하신다. 초막절 절기도 있다. 초막절은 장막절, 수장절이라고도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을 하고 나서 한 해의 농사를 다 짓고 추수해서 창고에 저장을 하고 나면(收藏節), 추수 감사절인 것이다. 그리고 나면 하나님이 늦은 비와 이른 비를 내려주셔서 한 해 동안 양식을 주심에 감사하는 절기를 수장절이라 한다. 그것은 산에 올라가서 나뭇가지를 다 엮어서 초막을 짓는 것이다. 그래서 草幕節이라고도 한다.
 
그래서 자녀들이 물어보면, 우리 조상들이 출애굽 하여서 40년 동안 광야 길을 걸을 때에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에게 신발이 헤지지 않게, 오직 떨어지지 않고 먹을 양식이 끊어지지 아니하도록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여주신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라고 말해주라는 것이다. 일 년 내내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면서 동행하면서 사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하나님을 예배하며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구별된 백성이 되도록 다섯 가지의 제사를 허락하셨다. 예배하는 민족이 되데 하셨다. 우리 사랑의 교회는 예수님의 온전함을 소망하며 달려왔다. 지난 상반기를 돌아보자. 43년의 역사를 돌아보면, 사랑의 교회는 예배에 목숨을 거는 교회였다. 우리가 정말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 위해, 우리가 거룩한 백성이 되기 위해, 우리가 구별된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그럼 우리가 예배해야 한다. 정말 우선순위를 두는 일이 예배이다. 토비새마다 마칠 때에 모든 성도들이 내일 예배와 말씀을 살려달라고 기도한다. 모두가 간절히 부르짖는다. 모두 부르짖고 늘 하나님 앞에 예배에 은혜와 말씀으로 충만하기를 기도한다. 예배가 우리의 삶을 거룩하게, 구별되게, 온전하게 하는 통로이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 찬양대는 흠없는 양을 하나님 앞에 가장 정성된 찬양의 예배들 드리는 마음으로 길고 긴 찬양 곡을 안 보고 찬양을 한다. 하나님 앞에 가장 최고의 경배와 예배를 표현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절기 관련해서도 연중에 은혜를 기억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은혜를 기억하고,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을 기억하면서 절기를 귀하게 올려 드린다. 그런데 다른 교회가 안 하는 것을 우리는 성령강림주일도 절기로 지킨다. 육신의 한계를 뛰어 넘는 성령의 은혜와 능력을 사모하면서 하나님 앞에 복음적평화통일의 주일도 지키면서 이 나라가 공산주의의 흑암아래 장악되지 아니하도록 물들지 않도록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에 감사하며 피 흘림 없는 복음적 평화통일을 위해서 간구하는 예배를 드린다. 특새, 세례 성찬, 등등, 그래서 하나님께 자녀를 허락해 주셔서 세례를 받으며 자녀들에게 신앙을 전수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절기를 지키는 것이다. 은혜를 기억하는 절기를 지키라는 것이다. 절기를 통해서 자녀들에게 전수하며, 거듭난 증표를 얻는 세례식을 절기로 삼는다. 구별된 삶, 거룩한 삶, 온전한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우리는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 우리는 거룩한 삶, 구별된 삶, 온전한 삶을 추구하며 참된 예배 자가 되어야 한다. 또한 우리 사랑의 교회는 많은 절기를 지키는 교회이다.
 
1. 우리 가정만의 절기, 나만의 절기를 지켜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이 지킨 일곱 가지 말고, 나만의 절기를 지켜야 한다. 그래야 거룩한 백성, 구별된 백성, 온전한 백성이 되는 것이다. 절기는 하나님께서 강한 손과 편 팔로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것처럼 그 구원의 은혜에 감격해서 매년 그 구원의 때에 은혜에 때에 하나님을 다시 기억하는 절기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구약 백성들에게만 나타난 것이 아닌, 우리가정, 나에게도 강한 손과 편 팔로 나타나셨다. 이미 우리에게 주워졌다. 그 강한 손과 편 팔로 역사하여서 그래서 안아주신 본당에, 우리가 주님의 전으로 나온 것이다. 그런데 나를 구원해 주신 이후에 그 은혜로 살면서도 잊고 매년 지나갈 때가 있다. 그것을 날짜로 정해, 규례를 세우라는 것이다.
 
대구에 서현 교회가 있다. 그 교회에 아시아에서 제일 큰 대리석 건물을 건축을 할 때, 전 세계에서 세 번째로 큰 대리석 건물 예배당을 건축할 때, 헌신하신 정규만 장로님이란 분이 계신다. 원래는 술만 마시면 아내를 때리는 자였다. 그런데 김익두 말씀 부흥회를 아내가 한 번만 참여해 달라고 요청해서 그 말씀을 듣고 변화가 되었다. 그래서 약전 골목에서 도배하는 풀을 가지고 일을 하던 사람인데 변하고 나니 사람이 되었다고 했다. 풀 팔아서 못살 것이니 약 짓는 법을 가르쳐 준다. 그래서 친구가 알려주어서 약재들을 다 구해서 약을 지어 팔기 시작했다. 그 장로님의 약이 같은 재료로 약을 지었는데도 약효가 있고 병이 잘 나았다고 한다. 뭐가 들어가는데 그렇게 약효가 좋으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답이 하나님께 기도가 하나 더 들어간다고 했다고 한다. 그렇게 장로님에게 돈을 쓸어 담도록 복을 주셨다고 한다. 그래서 건축을 할 때 십일조를 쌀뒤주에다가 헌금을 다 냈다고 한다. 그 헌금을 통해서 아시아에서 제일 큰 대리석으로 교회를 지었다고 한다. 헌신하신 분이다. 이 장로님 댁에는 약방 문위에 후지카 곤로에 시꺼멓게 된 남선 알루미늄 쭈굴쭈굴한 냄비를 벽에다 걸어놓았다고 한다. 물으면, 못난 사람이었는데 하나님이 복 주셔서 교회에 헌신하게 되고 먹고 살만큼 하나님이 주셔서 애굽 땅 종 되었던 시절을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교만치 않으려고 유월절 구례로 냄비를 걸어두었다고 한다. (냉장고를 규례로 삼는다고 박주성 목사님 사모님이 하신 규례가 있다. 중고 냉장고로 신혼을 시작했다. 전도사시절 사용하던 중고 냉장고였다. 사모님이 재활용 쓰던 냉장고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작아서 몇 개 넣지를 못했다. 결혼하고 나서 냉장고 작아서 음식을 넣을 수 없어 힘들었다. 그러나 그 장로님의 그 냄비 이야기를 듣고 나서 사모님이 냉장고를 규례로 삼았다고 하신다). 지금은 양문 냉장고를 쓰면서 전 애굽 땅 종 되었던 시절을 잊지 말기로 했다. 그래서 가훈으로 정해서 산다.
 
개척 교회에서 시무를 한 적이 있다. 부교역자로 있다가 20일 금식 기도를 했다. 하나님이 부르신 대로 가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가나안이라고 말할 수 없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광야길이어도 믿음으로 선택하기를 기도했다. 그런데 하나님이 사랑의 교회에서 오라고 하셨다. 증표를 더 달라고 했다. 주보를 만드는 날, 광고내고 떠났다. 그날 하나님께 증표를 주시라고 했다. 애굽 땅 종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가정에 유월절이라며 절기를 지킨다. 하나님께서 강한 손과 편 팔로 구원의 은혜를 주셨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정에 하나님 베푸신 은혜가 있는지, 주님과 매일 함께 동행하기를 바란다. 그래서 1998년에 부임했다. 11월 11일을 절기로 지키고 있다.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하나님이 강한 손과 편 팔로 구원하여 주신 은혜를 지킨다. 때로는 외식도 한다. 자신의 절기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성도들이 되길 소망한다. 가정에 그 은혜의 절기를 지켜길 바란다.
 
2.절기는 숫자가 늘어나게 하라.

하나님은 강한 손과 편 팔로 구원하시고 나면 우리를 어려움이 또 와도 또 구원하신다. 가정에 삶 속에 은혜의 절기들이 여러 가지 더 있다. 이스라엘 민족이 7가지 절기만이 아니라, 에스더에 나와 있는 것처럼, 하만이 유대 민족 전부를 도살하려고 뽑은 날, 제비뽑은 그날,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구원을 얻게 된 것을 다시 기념하면서 부림절 절기를 지킨다. 새로운 절기를 허락하신다. 이스라엘 민족이 예루살렘 성전에 돼지 피를 뿌리면서 성전을 불결하게 한 적이 있었지만, 막하비 혁명을 통하여서 다시 성전을 깨끗하게 하여 수전절을 지킨다.
 
*예레미야 16:14-15절에 보면,
4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보라 날이 이르리니 다시는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지 아니하고.
15 이스라엘 자손을 북방 땅과 그 쫓겨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
-하나님은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만 구원해 내시는 분이 아니시다. 유월절 절기만 주신 것은 아니다. 북방 땅 사로잡혔던 바벨론의 포로에서도 자유케 하신 분이시다. 절대로 추억 속에 갇히게 하시지 않는다. 오늘 이 코로나 상황 속에서도, 오늘 직장을 구해야 하는 절체정명 속에서도, 암이라는 질병과 어려움 속에서도, 강한 손과 편 팔로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고 기억하게 해주신다. 우리는 구약의 언약의 백성들처럼 하나님을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이 허락하신 나만의, 가정의, 절기를 지키면서 동해하길 바란다. 자녀들이 묻거든 바른 믿음, 신앙의 명문 가문을 계승해 줄 수 있는 모두가 되기를 기도한다.
 
♣요약
애굽 땅 종 되었던 것을 우리를 구원하셔서 거룩한 백성, 구별된 백성, 온전한 백성이 되게 해주셨음에 감사하며, 우리 하나님의 절기를 매년 지키고, 나만의 절기를 세워 지킴으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찬양하고 예배하며 매일의 삶으로 살아내야 한다. 진정한 은혜의 절기를 잘 지켜 주님 주시는 복락을 누리기를 소원한다. 그리하여 자녀에게도 삶으로 믿음으로 신앙을 보여주고 계승하는 가정이 되어야 한다.
 
-애굽의 모든 초 태생이 죽임을 당하던 그날 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침까지 한 사람도 자기 집 문 밖에 나가지 말아야' 했다. 즉 그들은 출발 명령을 받을 때 다른 곳에 뿔뿔이 흩어져 있다가 대열에서 낙오되는 일이 없도록 문 밖으로 나가지 말아야 했다.
 자녀들이 이 의식에 대해 묻게 될 질문 : 이 예식이 무슨 뜻이냐. 이는 곧 다음과 같은 내용의 질문이다. "보통 음식을 먹을 때보다 이 어린 양과 무교병을 먹을 때 이같이 매우 주의를 기울이며 엄격하게 지키는 이 예식의 의미가 무엇이냐?"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 지키는 그 거룩한 규례들의 의미를 이해하는 것, 곧 그 거룩한 규례들의 특성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마땅히 가져야 할 관심사이다.
부모들이 자녀들의 질문에 대해 제시해야 될 답변 : 너희는 이르기를 이는 여호와의 유월절 제사라. 이 말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곧 "어린 양을 죽여 희생을 드림으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선조들을 위하여 행하셨던 기적과 은혜를 기억하려는 것이다." 그 당시에 하나님은 다음과 같은 일을 행하셨다.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우리를 구해내시기 위하여 애굽 백성들의 모든 첫 태생을 죽이셨다."
㉡"비록 우리도 여호와 하나님께 죄를 지었지만 일찍이 그 자비하심으로 이삭 대신 드린바 된 수양의 제사를 열납하셨던 하나님께서는 이때에도 어린양의 가족 제사를 명령하시고 또한 받으셨던 것이다. 그리하여 죽임당한 어린 양이 있는 집마다 그들의 첫 태생이 죽음을 면하였다. (踰越節)은 건너뛴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멸망케 하는 천사가 이스라엘인들의 집을 지나쳐 그들의 태생들을 죽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유월절은 때가 찰 때 우리와 우리의 태생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 드리는 위대한 제사의 보증으로서 기대하도록 계획된 것이었다. 이스라엘 백성은 경건과 즉각적인 순종의 태도로 이 가르침들을 받아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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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1년 6월 20일)
제목: ''증인(證人)의 사명(使命)을 통한 온전함''
말씀: 사도행전 1:6~8
기도: 박요셉 부목사님
찬양인도: 이원준 부목사님
사회: 윤하중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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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1:6~8,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 세상을 향한 모든 마음의 창문들을 닫아 내리고, 모든 시선을 주님께 집중할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의 삶과 생애 가운데, 우리 현장가운데 일하심을 확신한다. 오늘은 288의 형제, 자매들이 학습과 입교와 세례를 받게 된다. 코로나 펜데믹 어려운 상황 가운데서도 귀한 세례식을 하게 하심을 감사드린다. 오늘 증인의 사명을 통한 온전함은 선교 적 삶을 통한 온전함이다. 세례식 때에 설교가 좀 어렵겠지만 헌신된 내용의 설교이니 제대로 된 메시지를 받게 되심을 축하한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주시는 역사관을 갖고 하나님 앞에 서길 바란다. 예수님 처음 믿을 때부터 주님의 심정을 깨닫고, 처음 믿을 때부터 성도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고, 미리 보고할 영적 안목과 전투력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도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보고 미리 준비하는 영적 안목과 전투력이 있어야 한다.”“
-이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역사관을 가져야 한다. 그 역사관과 내 삶에 무슨 상관이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 대부분의 제자들은 예루살렘에서의 교육받은 이런 강남 같은 지역 출신이 아닌 갈릴리 촌사람들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갖고 있는 시각과 프레임이 무엇이냐면,

*사도행전 2:7절을 보면,
7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들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지역주의 대한 역사관이 있었다. 지역에 대한 편견이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는

*사도행전 4:13,
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인 제자들이 강력히 말씀을 전하니까 저들은 학문 없는 범인이 아니였다고 한다. .소위 엘리트 주의의 편견이 있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성령의 능력이 임하시자 비포와 에프터가 완전히 달라졌다. 특별히 역사를 보는 눈이 달라졌으며 지역주의 편견이 뛰어 넘고, 그 출신지역으로 귀 죽지 않았다. 엘리트주의의 편견에 매몰되지 않고 사회적 지위를 가진 대단한 사람들 앞에서도 귀 죽지 않았다. 그래서 그 귀 죽지 않는 증거가 무엇이냐면,

*사도행전 2:32절에 나와 있다.
32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이 모든 일에 증인이로다. 한다. 증인이라는 단어는 법정용어이며, 여기에는 자기 삶을 거는 것이다.
편견이나 엘리트주의라든지, 지역, 출신 등을 뛰어 넘는 것이다.
 

I. 모든 온전한 성도는 증인(證人)의 사명(使命)을 받은 역사관(歷史觀)을 가지고 있다.
 
-온전한 제자가 된다는 것은 이런 프레임, 편견 등을 처리해야 하는데, 어떻게 처리할 것이냐? 사도행전 전체 주제 핵심인 우리가 이 모든 일에 증인이다. 그리고 누가복음을 쓴 사람은 누가이다. 사도행전 1장, 2장은 누가복음 24장은 사도행전의 연속이다. 마지막 부분에 보면, 너희는 이 모든 일에 증인이라 말하고 있다. 주님의 그 소명을 받아서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는 것이다.
 
*누가복음 24:48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3년 동안 예수님께 훈련받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성령의 인도에 따라 자연스럽게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편견과 지역을 그리고 엘리트주의를 다 뛰어 넘는 하나의 어떤 의식의 혁명이다. 사람이 바뀌면 생각이 바뀌고, 사고가 바뀌면 사고의 체계가 바뀌어야 되는데 사고 체계의 새판을 까는 패러다임 시트가 일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 패러다임 시트는 어떻게 일어나는가?? 한 번 내가 새로운 꿈을 꾸고자 한 번 해보자는 것은 사치이고, 정말 중요한 것은 증인의 사명에 대한 올바른 역사관이다. 이런 역사관을 갖게 되면 우리는 모든 잘못된 것으로부터 뛰어 넘을 수 있다. 복음의 사역과 하나님 나라의 전체를 위해 다 부족해도 젊을 때부터, 한 가지 이 세상 끝 날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의 증인들이다. 이것만 잘 되면 지혜와 통찰력, 사람관계, 다 물질도 채우시고 모두가 형통인 것이다.
 
오늘 온전함 시리즈로 간절함으로 은혜를 받아야 한다. 처음부터 세례받는 형제 자매들이 증인의 사명을 하나님이 주시면,,, 그럼 예수님의 증인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
-(증인(말투스)-헬라어 => 순교자(martyr))-
 
무슨 말이냐면 예수님의 증인이 되려면 죽음도 무릎 써야 한다는 말이다. 순교를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바울이 그의 한 생에 사명을 하나님의 복음을 증언할 증인됨을 마치려면 자신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겠다는 것이다. 생명을 걸었다. 우리는 부끄럽다. 가지 중심으로 다들 어리버리하다. 생명은커녕 이익 왔다갔 다 한다. 예수님의 제자, 예수님의 증인은 같은 말이다. 순교의 축복이 엄청난 축복이다. 순교는 특별한 축복이며 복락이다. 그런 증인에는 삶의 증거가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짐 엘리엇이라는 청년은 에콰도르 출신의 순교자였다.
 
▷“하나님, 마른 막대기 같은 제 삶에 불을 붙이사 주님을 위해 온전히 소명하게 하소서. 나의 하나님 제 삶은 주님의 것이 오니 다 태워주소서. 저를 주의 연료 삼아, 하나님의 불꽃이 되게 하소서.”
-“영원한 것을 얻고자 영원하지 않은 것을 버리는 자는 바보가 아닙니다.“
-“침된 영광을 가져다주시는 영광의 왕이여, 어떤 고난과 치욕과 손실 앞에서도 우리가 뒤로 물러나지 말게 하옵소서.” - 짐 엘리엇-

-사역을 위해 목숨을 거는가? 이런 고백이 삶 가운데 뿜어져 나오길 바란다. 증인된다는 것은 선교사, 목사, 어떤 특별한 전도자만이 아닌, 평범한 우리도 매일의 삶에서 나타나야 한다. 증인의 삶이 나타나야 한다. 이런 삶에 비포와 에프터가 나타나야 한다. 오늘 세례자들은 서약을 할 것이다. 증인이라는 말은 법정용어이다. 서약에서 있듯이 세레, 입교, 학습자는 그래서 성도는 안목과 전투력이 있어야 한다.
 
▷증인의 삶의 범위는 무엇인가?

사도행전 1:8,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 우리는 지역적으로 이것을 무엇 때문에 증인이 되어야 하고 왜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예루살렘- 예수님을 못 박고 가시관을 씌우고 핍박한 곳이다. 새 역사.
*유대- 왜 증인이 되어야 하는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은 곳이다. 로마 식민지여서 힘든 곳이었다.
*사마리아-서로 상종도 하지 않던 곳이다. 그 땅도 밟기 싫어서 일부러 멀리 우회하여 다녔다. 민족적 인종의 편견을 뛰어 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이 단순한 지역이 아닌 마음의 지경이 포함된다.
*이방인- 이것은 종교적인 편견을 뛰어 넘는 것이다.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 단순한 지역만이 아니라 우리의 삶에 마음의 지경이 포함된다.
가이사의 집안까지 복음의 능력이 일어난 것이다. 선포했다. 대부분 노예들이 크리스쳔이었다. 모든 것을 뛰어넘은 것이다. 지역적 한계와 계층을 뛰어 넘었다. 사회적 계층을 넘고, 글로벌 역사관을 갖는 것이다.
 
*사도행전 1:8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루살렘-나에게 상처주고 힘들게 한 사람들.
-유대인-마음에 안 드는 사람,
-사마리아인-내가 무시하는 사람.
-땅 끝까지- 나와 상관없는 사람.
지역, 사회계층 한계를 넘어 그래서 가이사의 집안까지 복음의 능력이 임했다.
노예들의 복음 증거는 모든 것을 뛰어 넘은 것이다.
 첫 번째로 증인 된다는 것은 모든 한계를 뛰어 넘고 복음의 능력 안에서 증인의 사명이 선교적 사명의 삶으로 연결되어 있다.
 
 
II. 그러면, 온전한 선교란 무엇인가?
 
*신명기 10:14, 14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모든 인류의 창조에 다 하나님 것이다. 하나님이 통치하시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시편 24:1
땅과 거기에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가운데에 사는 자들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신명기와 시편의 이 말씀을 재해석 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오늘 우리가 알고 믿어야 하는 것이 사도행전 1;8절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을 다시 하나님께 되돌리는 역사라고 말한다. 우리는 단순히 가는 선교만이 아니고, 땅과 하나님께 속한 사람은 선교는 반드시 가는 선교 보내는 선교가 있는 것이다.
▷선교는 하나님께 속한 것을 다시 하나님께로 되돌리는 하나님의 역사(役事)이다.
그러므로 선교는 한 사람의 영혼을 구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하나님께 되돌리는 것이다. 6.25때에 서울을 수복하듯이, 하나님의 창조를 수복하는 것이다. 선교는 지역이나 계층을 다 뛰어 넘는 것이다.
우리 교회 주일학교 교육정책을 선교정책을 포함한다는 것은 세상 가치관이나 문화를 하나님께 되돌리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가는 선교만이 아니라 사는 선교이다. 방탄소년단(BTS)-‘봄날’을 들어보니 괜찮았다. 그런데 그런 노래를 부른다고 봄날이 오는가? 너무 오염된 우리가 정말 집중해서 사고체계를 바꾸어서 복음의 증인으로 사용되는 것이 하나님의 기쁜 자녀로 사는 것이다.

 
▷선교 ㅡ창조의 질서로 회복됨을 의미한다. 우리는 가는 선교만이 아닌 하나님의 계획에 절반만 수용하는 것이다.
 
아프리카도 다 가라고 하더니 본인들은 안가더라. 우리가 실제로 갈 수가 없듯이 우리가 살아내야 한다. 사도행전 성령을 받을 때에, 그래서 증인의 삶을 위해 수복시키기 위해서 사는 선교를 하니 하나님 나라가 회복된다.
 
※로잔 선교회 오천 명이 모인 곳이다. 케이프타운 ㅡ세계선교회에서 첫 시간에 한국교회가 모두 함께 헌신을 했더니 첫 시간에 인도하라고 했다. 우리교회 손경주라는 학생을 데리고 갔다. 북한의 고위층 딸이었다. 탈북 했는데 그녀는 사명을 받은 뒤에 순교했다. 네덜란드 로잔대회는 17년만에 케이프타운에서 했다. 케이프타운에서 순교자 딸을 위해 그녀의 아버지가 간증했다.
 
우리는 모든 한계를 뛰어넘는 공간적, 시간적, 초자연적을 체험하기를 바란다. 이제는 전천후 선교가 되어야 한다. 때를 얻든지 안 얻든지, 온 오프라인의 경계를 무너뜨려야 한다. 온전한 선교로 하나님 역사하길 기도한다. 영적인 전 방위적으로 증인의 사명을 가지고 우리 교회에 역사하시길 소망한다.
 
 
지역적, 영적한계를 깨뜨리고, 슬픔을 당한 사람도 이 가운데 많겠지만, 어떤 분들은 상처로 힘든 분들이 있을 것이다. 증인의 사명을 감당해야만 성령의 능력을 받지 못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어떤 사람에게 능력을 주시는가?
내 생각, 내가정, 내 자신, 내 이기주의를 원한다. 그러나

사도행전 1:6~7,

6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7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내가 언제 잘 되냐고 묻기 전에 네 삶을 위해서 살지 말라고, 증인된 사명을 감당 하냐고 하신다. 내 것만이 아닌 온전함의 고봉으로 가야한다. 성령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길 기도해야 한다. 지역의 한계, 영적인 한계, 계층의 한계를 뛰어넘어서 내가 능력이 아니라 성령께서 나에게 기름 부어주시길 소원해야 한다. 오늘 이 능력이 우리에게 충만하게 임하길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기를 간구한다.
 
우리는 세익스피어처럼 글을 쓰지 못하지만, 세익스피어의 천재성이 우리에게 들어오면 우리도 글을 쓸 수 있다. 음악인 모차르트처럼 그 음악이 식물도 살리는데 그 천재성이 없지만, 우리에게 주시면 할 수 있는 것이다.
 
▷증인의 사명은 내 자신의 의지적인 것이 아니라, 증인의 사명 자는 내가 이끄는 것이 아니라 사명이 나를 이끌어 주는 삶을 바라는 것이다. 이 사명이 우리를 끌고 나가길 기도해야 한다. 사명의 말이 마차를 끌어야 한다. Why not now!! 왜 지금이 아닌가? 라고 묻는다. 증인의 삶을 실천하고자 500명이 전력투구하여 120명만 남았다. 오늘 이 자리가 아니면 어디로 가야하는가?
 
♣요약
우리는 증인의 사명을 가지고 지역, 계층의 편견을 뛰어넘어 생명을 거는 복음의 헌신을 실천해야 한다. 선교는 내 자신이 의지적으로 생각하고 만들어 내는 고상한 윤리가 아니며 증인의 사명자는 내가 사명을 이끄는 것이 아니라 사명이 나를 이끌어 주는 대로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 가는 선교와 사는 선교를 위해 성령의 능력을 부어 주시길 기도하며, 전천후 증인으로 사용되어야 함을 깨달아서 이 땅에서 복음의 증인으로 헌신하고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주님의 일에 헌신하는 자들은 주님께서 그 일을 할 수 있도록 자격을 부여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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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1년 6월 19일)

제목: “생각과 생각사이에서”
말씀: 요한복음 1:1~4
설교자 : 이원준 부목사
성경읽기: 유영권, 서동주(청년 G국,A국)
사회: 송대영 부목사님

예배 인도 및 마무리기도: 오정현 담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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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1:1~4,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AI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의 대부분의 것을 동일하게 하거나 더 잘 할 수 있다면,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제품도 사용하고 평가해 보고 구매하는 것이 보편화되는 것인데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일생 일대에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하는데 있어서 남자와 여자가 동거해보고 하는 것이 왜 잘못된 것인가?

기독교는 기독교를 믿으면 되었지, 왜 다른 사람에게 믿으라고 강요하는가? 우리 청년들이 삶의 순간들 속에서 그리고 우리 삶의 순간들 속에서 맞닥뜨려지는 실제 질문들이다.
중요한 사실은 이 질문을 어떻게 대답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세계관 그리고 그 내면에 있는 그 사고의 체계가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을 주도적으로 잡고 있는 사고의 체계는 세속주의와 탈 근대주의 즉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새벽부터 주의, 주의 하니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졸지 않기를 바란다.
 
세속주의란 종교와 신앙은 종교와 신앙의 영역에 머물러야 할 뿐 공공의 영역에서는 다른 영향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그런 사고의 체계이다. 이처럼 세상 전체를 바라보는 이 사고의 체계들은 요즘에 일어나는 현대 문화의 현상이 아니다. 생각의 역사, 즉 천하의 역사의 제일 먼저의 질문은
아르케라는 무엇인가? 즉 이 세상 전체의 근원적이 무엇인가였기 때문에 삶의 모든 순간과 인류의 역사와 이 세상 전체를 바라보는 사고의 체계는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들은 생소하거나 또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읽은 이 요한복음 1장을 처음 맞닥뜨렸을 그 수신자들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을 통해서 실로 새롭고 놀라운 경험을 했을 거라 생각한다. 요한복음 1장은 창세기 1장과 그 구조적으로 유사함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시고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는 그 빛이 바로 요한복음 1:1~4절까지 동일하게 반복된다.
 
다만 여기에서 말씀도 있고 빛이 있는데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읽었지만,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라고 수신자들은 들은 것이다. 이 로고스라고 하는 단어는 말씀, 진리, 소통 표현, 이러한 것들을 담아내는 말이 맞다. 그러나 요한은 요한복음의 메시지를 수신하였던 그 사람들은 유대인 뿐 만이 아니라 이미 다른 사고의 체계들을 구성하고 있던 헬라 문화권에 있었던 사람들이 받았던 소식이기 때문에 이 고로스가 하는 그 단어는 다른 의미, 그저 말씀이 가장 우리로서는 최고의, 최선의 번역이긴 하지만 원초적인 원리, 그리고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그 조화를 유지할 수 있는 이성과 같은 그 로고스라고 하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 때문이다.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 라는 이 표현은 처음 수신자들에게 매우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요한은 요한복음 1장에서 이 당시 철학의 시류가 이야기하고 있던 그 로고스보다 훨씬 더 높고 위대한 진리를 선포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이 있게 한 그 능력은 단순한 괴력이나 어떠한 이성이 아니라 인격이신 하나님이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인격이신 그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해하고 있는 로고스의 개념을 뛰어넘어서 모든 우주의 존재에 이유와 기동력이 되신다고 1:3절에서 특별히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합니까?
보이는 생물들과 보이지 않는 미생물들, 생물을 뛰어넘어서 과학, 수학, 철학과 같은 그 학문들과 그 학문을 구성하는 다양한 법칙과 원칙들, 원리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물리 상수와 중력과 무중력, 예술의 아름다움과 전파의 기류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은 그분으로 인해 그분으로 위에, 그분 아래,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이 사실에 대해서 멋지게 표현한 것이 있는데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 만물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들이 하나님의 생각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로고스 그 만물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세속주의의 사고체계 가운데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은 도전한다. 신앙은 신앙이어야지, 예수 같은 종교적 인물이 그 다른 공공의 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잘못되어 있다. 라고 말한다. 이런 사람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데는 그들이 가진 핵심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어떤 공공의 영역은 팩트와 사실에 의거해야지, 가치, 신념, 종교 신앙과 같은 것들이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그런 전제 때문이다. 정말 가치중립적인 팩트, 가치중립적인 세계관이 가능할까?
 
하나를 예를 들어보면,
미국의 천문학자, 1929년 에드윈 허블이란 천문학자가 허블법칙을 발표한다. 긴 얘기를 짧게 말하자면, 허블이라는 그 과학자는 우주의 빛의 파장을 연구하면서 '레든 쉬프트'라고 하는 현장을 발견하게 되고 이 적색편이 현장을 통해서 우주는 팽창하고 있음을 물리학적으로, 천문학적으로 정리해준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주의 시작점이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 우주의 시작점을 세속주의의 사고의 체계로 해석하면, 빅뱅우주론이고 우리는 이것을 바라보면서 부인할 수 없는 창조주의 힌트라고 말을 한다.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가치중립적인 그 어떤 영역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공공의 영역에서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우리의 신앙을 살아내지 않는 그 모든 동안에 이미 무실론 적 자유주의와 근대주의의 산물들이 그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세속주의와 이 세속주의가 구축한 사고의 체계가 공공의 영역을 장악하기 시작할 때에, 그 생각과 생각 사이에서 만들어내는 인간과 세상의 모습은 우리에게 절망적이라는 것이다. 이 사고의 체계가 만들어 내는 세상은 어떠한가? 우리가 처음 이야기한 AI를 생각해보자. 세속주의 사고 체계에서는 인간은 고등한 동물내지는 기계적인 세포에 움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나아가서 사이보그, 또는 포스트휴먼(posthuman-현 인류보다 더 확장된 능력을 갖춘 존재)적인 존재가 인간보다 더 가치 있다는 주장, 이것들이 덜 가치 있다는 주장을 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는 가지고 있지 않다.
 
혼전 동거가 만들어 낸 수많은 내면의 파괴와 영혼의 피폐함, 다른 사람들을 향한 불신에 이르기까지 나아가서는 수많은 낙태와 유기되는 아이들을 생각할 때에, 그저 동물이나 기계로 만들어버리는 하나님이 전제되지 않는 이 세상은 그저 어둠일 뿐이다. 프랜체프 세이커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가치, 의미, 정의, 윤리, 도덕과 같은 이런 내용들은 세속주의 안에서 논리적으로 존재할 수 없지만, 슬쩍슬쩍 우리 안에 있는 세계관에서 무단으로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인가? 세속주의가 만들어내는 이 세상은 실제적으로 우리가 살아내지 못하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이런 세속주의 사고 체계에는 결국은 사람들을 어둠 가운데 가두어 놓게 된다. 이 로고스를 만나지 못하는 어두움은 그 사람들의 사고 체계를 그림자로 드리운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앙은 가지고 있지만 로고스의 능력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세속적주의 사고 체계가 만들어 놓은 그 경계선 안에 갇혀서 우리의 신앙이 마치 다른 곳에서는 제한되거나 좀 참아야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속박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속에서 여러분은 어떠한가? 로고스를 깨닫지 못하는 어둠 가운데 있거나 로고스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는 속박 가운데 너무나도 많은 우리의 삶의 모습들이 들어가 있지 않는가??
 
우리는 적어도 분명하게 확실할 수 있는 그 어느 누구도 이런 영적인 어둠과 영적인 속박에서 우리 스스로를 구원해 낼 능력이나 자격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자가 필요하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 영적인 어둠과 속박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실로 위대한 역사를 이루시는데,
 
*요한복음 1:4절에 이은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우리 하나님께서 로고스가 육신이 되어 어둠 가운데 들어오시는 이 로고스가 어둠 가운데 왜 들어오시는가? 그 이유는 그가 십자가를 지심으로 드러나는데, 십자가를 지심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마가복음 15:33절에 보면,
33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우리가 피할 수 없고 스스로 건져낼 수 없었던 그 어둠이 십자가 위에 임하는 것이다. 우리를 묶어놓을 수밖에 없었던 그 어둠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임하는 것이다. 우리를 속박한 그 모든 것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데,
 
*요한복음 8:31-32절에 보면,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너희가 로고스에 거하면 우리를 자유케 하시겠다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당하는 것을 대신 당하시고 그 어둠이 막을 수 없었던 능력으로 모든 속박에서 풀어주시는 분,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인 줄 믿는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부활하신 그 주님께서 어떤 일을 이루시는지 보자.
 
*고린도전서 1:19절에 보면,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그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모든 로고스를 초월하는 역사를 이루어 내시는 것이다. 그분의 부활은 자연의 법칙 위에 그 계심을 로고스가 선포하는 사건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사고의 체계를 초월하는 사고의 체계를 우리 가운데 이루어 내시는 그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가운데 있는 것이다. 창조의 주인이신 그분은 창조에도 주인이신 줄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만 주인이 되시는 것이 아니다. 온 우주의 만물의 알파와 오메가 이신 분이시다. 모든 존재와 이유와 능력, 그리고 기도하시고 능력을 공급하시는 분인 줄 믿는다. 그 안에 영혼의 공허함은 끝난다. 세상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심지어 우리의 고통과 불편함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생긴다. 우리가 그 빛 가운데로 들어가게 될 때에, 방향이 없던 곳에 방향이, 가치가 없던 곳에 가치가, 자유가 없던 곳에 자유가, 생명이 없던 곳에 생명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이 생명을 입은 사람들이 이제 공공의 영역에서 생명을 선포하고 우리 모두가 함께 추구할 수 있는 최선을 함께 만들어가며 이웃을 보살피고 원수까지 용서할 수 있는 독생자의 영광을 나타내는 그 역할을 모든 영역에서 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사실로 때문에 우리 모두는 온전함을 사모한다. 그렇기 때문에 담임 목사님께서 주일 강단을 통해서 이 온전함은 단순이 우리의 종교생활,
단순이 교회 생활, 신앙생활이 아니라 우리의 지, 정, 의, 관계, 행실, 나아가서는 우리의 가정과 일터, 선교지, 창조세계, 그리고 사랑글로벌 아카데미가 포함하는 그 모든 영역에서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텔레이오스를 살아내시도록 우리가 함께 살아내도록 우리가 걷고 있는 것이다.
 
저명한 철학자 달라스 일리어드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Jesus Christ is smarter person than anyone who has ever lived on this planet.”= 예수 그리스도는 이 지구 위를 살았던 그 어떤 사람보다 똑똑한 사람이다.” 최고 권위자가 아니다. 우리 중에 프로그래머가 있다면, 그 프로그램보다 더 고능한 로직이 있게 하시고, 모든 것에 질서가 있게 하신 그 코딩을 가능하게 하신 바로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어떤 경제학자보다 더 높은 권위의 경제학자는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만물의 수요를 아시고 인간의 내면을 아시고 역사의 모든 흐름을 주관하시는 그분을 을 수 있는 자는 없는 것이다. 예술가보다 더 뛰어난 예술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아름다운 자체가 존재하도록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술가 중에 예술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이 우리의 제자도의 모습이다. 이 진리를 우리 가슴에 담고 새로운 결단을 하자. 먼저 우리의 모든 교만을 회개하고, 우리의 마음에 높아진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가장 높은 분이신, 이 세상의 지혜와 총명을 부끄럽게 하시는 그들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새로운 정의와 새로운 사고 체계를 선포하신 그분께 항복하길 소원한다.
 
▷두 번째는 우리 제자도를 향한 새로운 결단이 있기를 바란다.
앞으로 수확할 때에, 앞으로 근무할 때에, 가정에서 모든 일과와 관계와 행실에서 그리고 삶의 모든 공공 영역을 살아갈 때에 우리 예수님께서 육신 가운데 성육신 하셔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게 된 것처럼 우리가 발 닫는 그 모든 영역에서 이 생명을 살아냄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성육신적 아버지를 통하여 독생자의 영광을 보길 소망한다. 우리가 걸어가는 모든 시간들은 기뻐하는 시간이 되고, 우리가 앉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시간들은 우리 주님으로 위한 시간이 되길 축복한다. 이 세속주의의 횡포와 무게 때문에 상한 마음과 다친 마음을 우리 청년들과 성도들에게 지금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란다. 내가 그 삶 속에 가장 높은 권위자이다. 그 음성을 들어야 한다. 상사, 거래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최고위 권위자이신 줄 믿는다. 이 믿음으로 온전함을 향하여 기쁨으로 걸어갈 수 있는 모든 청년들과 성도님들이 되길 소원한다.
 
♣요약:
로고스의 능력으로 우리를 붙잡아 주시길 기도하며, 우리의 마음에 높아진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이 세상의 지혜와 총명을 부끄럽게 여기며, 오직 우리 예수그리스도의 권위가 제한 없는 모든 영역에서 펼쳐지고 있음을 선포하시는 이 말씀을 쫓아 우리가 살아가길 소원해야 한다. 청년부에도 어떻게 역사하시는 것인지를 보고 깨닫기를 바란다. 시대의 젊은이들을 살리고 일터와 열방 가운데 온전함을 이루어가며 영적인 재생산의 사명을 감당하고 시대의 표준을 준비하는 온전한 제자로 거듭나야 한다. 그 삶의 고백들을 나누면서 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말씀이신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날에 우리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의 언어와 연설로 자기의 생각을 알리듯 하나님께서는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알리셨던 것이다. 세례 요한은 그 소리였으나 그리스도는 말씀이셨다. ‘말씀’, ‘이성’ 등으로 번역되는 ‘로고스’는 헬라인들의 우주관과 범신론적 사상이 담겨 있는 단어이다. 헬라인들은 우주가 저절로 발생, 영속하는 것이 아니라 신적 원리에 의해 형성,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원리가 바로 ‘로고스’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이 만물의 근원자로서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셨음을 증거 한다. 때문에 요한은 성부 하나님과 함께 만물을 창조하사 그것을 다스리고 계시며 성육신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친히 증거 하신 예수님이야말로 ‘로고스’라고 설파한 것이다.
 
 














▲ 백송이의 꽃바구니, 두 개나- 목사님 고생하신다고 보내주신 꽃을 모든 성도님들과 기쁨을 나누시는 담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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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1년 6월 16일)

제목: ''가장 큰 계명(誡命)''
말씀: 마가복음 12:28-34
설교자: 박성은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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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2:28-34,
28 서기관 중 한 사람이 그들이 변론하는 것을 듣고 예수께서 잘 대답하신 줄을 알고 나아와 묻되.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니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첫째는 이것이니 이스라엘아 들으라 주 곧 우리 하나님은 유일한 주시라.
30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32 서기관이 이르되 선생님이여 옳소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그 외에 다른 이가 없다 하신 말씀이 참이니이다.
33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자기 자신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
34 예수께서 그가 지혜 있게 대답함을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멀지 않도다 하시니 그 후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사진을 한 번 살펴보기를 바란다. 산헤드린(유대인들의 대표적인 의결기구)공회라고 하는데, 그 그림이다. 이 산헤드린 공회에는 총 71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이 좌 장급이 대제사장이다. 그리고 70명은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느냐면, 제사장 계열인 사두개파와 신흥 부자로서 영향을 발휘하고 있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에 정통한 서기관들로 구성되어 있다. 오늘날로 표현을 하면 우리나라로 치면,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가 전체적으로 총괄되어 있는 최고 의결기구이다. 일종의 국무회의라고 생각하면 된다. 이 공회에서는 유대 지역에서 일어나는 많은 난제들과 또 각 도시마다 나라를 대적하는 문제들을 가지고 산헤드린 공회에서 함께 논의하고 결정하고 법적으로 어려운 문제들도 최고의 권위를 가지고 정리하는 대법원 역할도 했다. 산헤드린은 많은 의제로 등장하게 되는데, 예수님 당시에는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 때문에 참 골치가 아파서 매번마다 등장하게 되었다. 이 사람들의 숫자가 만만치가 않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기아급수(기아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 숫자를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오병이어(五甁二漁)의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기적에서 남자 숫자만 오천 명이었다. 그 당시 여자와 아이는 숫자에 포함되지 않았으니. 성경학자들은 그 숫자를 합하면 만 오천 명에서 이만 명으로 보고 있다. 누구 한 사람이 연설을 하는데 이만 명 군중이 모였다고 생각해보자. 요즘도 경찰 측 추산과 주최 측 추산에 따라서 차이는 있겠지만 여론몰이로 보면 엄청난 숫자이다. 그 당시 예루살렘의 거주만이 몇 명 정도냐면 약 3 만 명 정도로 보고 있다. 그러면 감이 좀 잡힐 것이다. 산헤드린 공회에는 이 이만명 정도를 몰고 다니는 예수님을 예의 주시하시 않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이 세 부류의 당파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은 안 되겠다고 하며 없애려고 조직적으로 예수님과 목숨을 건 한 판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것도 제일 먼저 등장하는 첫 번째 선수는 바리새파, 네가 해!!, 일회전, 그것도 안 되면 사두개파, 그것도 안 되면, 3회전 율법에 정통한 서기관, 네가 등장해! 하면서, 이 세 주류세력이 아예 짜고 예수님을 코너로 몰려고 하는 심각한 논쟁이 있는 것이 오늘 본문이다. 이 사람들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는 말씀이다.
 
*마가복음 12:13절에,
13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마태복음 22:15절,
15 이에 바리새인들이 가서 어떻게 하면 예수를 말의 올무에 걸리게 할까 상의하고
-작심하여 나쁜 의도를 가지고 집단적으로 예수님을 공격한다. 그 당시 심각한 논쟁이었던 세금 문제를 들먹이게 된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종교법에 따르면 오직 하나님께만 세금을 바치게 되어있다. 이것을 선전세라라고 한다. 바벨론 포로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 세계로 흩어지는 디아스포라가 되는데, 일을 열심 하다고 유월절이든 칠칠절, 부림절, 중요한 절기 때에 연봉의 을 성전에 와서 세금을 낸다. 그런데 이 때 상황은 로마의 속국이었다. 거기에 등장하는 직업이 있었는데 세리였다. 그들은 나라를 팔아먹는 자 같은 매국노 같은 존재였다. 힘의 논리로 따지면 조공을 바치거나 세금을 내야하는 것이 당연하다. 율법의 원칙으로 따지면 하나님께만 세금을 내야한다. 그래서 예수님께 질문을 던진다. “우리 세금을 어디에 내야 될까요?”라고,,, 어느 선택을 하던지 예수님은 올무에 걸리게 되실 것이기에 대답을 성전 세를 내야 한다고 하면 로마법에 걸리고, 로마에게 세금을 내야 한다고 하면 종교법에 걸리게 된다. 어느 것을 선택을 하던 예수님은 올무에 걸려서 감옥에 가실 수밖에 없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 때 예수님은 지혜롭게 말씀하신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하신다. 이것을 논의하고 해석하는 것은 어렵긴 하다.
두 번째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사두개인들이다. 핵심은 그들은 부활이 없다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아주 어려운 질문을 한다. 어떤 집안에 여덟 명의 형제들이 있는데, 첫째가 결혼해서 형수를 맞이한다. 불행하게도 첫째 형이 단명해서 죽게 된다. 첫째 형이 죽으니까 형수님이 홀로 있게 되니 이스라엘 법에는 여자가 남편이 없게 되면, 죽은 생명과도 같다고 했다. 하나님은 사람을 죽이는 것은 원하지 않기 때문에 둘째 동생이 형수님을 아내로 맞이해야 된다.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라고 한다. 둘째도 셋째도 다 죽고 넷째 다섯째,,, 여덟째까지 죽게 된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께 질문한다. 도대체 이 여인의 남편은 누구냐고 한다. 참 난감한 질문이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사람이 죽으면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 같다고 하신다. 25절에 말씀하고 있다. 여기도 어려운 내용이다.
 
▷오늘 우리가 이야기 하고 싶은 내용은 세 번째 논쟁에 있다. 바리새인, 사두개인, 서기관이다.
 
 
서기관이 등장하면서 율법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한다. 이 때 당시에 율법이 613개의 조항이 있었다고 한다. 모세 오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정리를 해보니까 이것 해!, 저것 해! 라는 조항이 248여개이다. 하지 말라는 조항이 부정적 명령이 365개 조항이나 된다. 이 조항들이 하나씩 하나씩 지켜가야 하는 율법의 완성에서 뿐만 아니라 구원에 이르게 된다라고 율법학자와 유대 지도자들, 서기관을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지키라고 한 것을 인간이 613개의 조항을 지킬 수 있는가? 난감한 문제가 발생했다. 율법사 입장에서는 그 조항을 구분을 해서 높낮이를 주어서 등급을 나누고 싶었다. 어려운 난제에 봉착한 것이다. 그래서 서기관은 당당하게 여기서 예수님께 질문한다. 모든 계명 중에 첫째가 무엇이냐고 질문하자, 예수님은 명확하게 답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라고 대답하신다. 오늘 본문에 율법에 대한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것을 분명하게 예수님은 못을 박는 것이다.
 
*마가복음 12:31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
-하나님을 사랑과 그와 같다고 하셨으니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을 동등하다고 하신다. 예수님은 둘 다 같다고 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이웃을 사랑하는 것, 자신을 사랑하는 것, 다 동일하다고 하신다. 중요한 특징 중에 하나는 율법을 명확하게 범주를 만들어 주셨다. 613조항을 다 정리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라와 이웃을 사랑하라’와 같다며 명확하게 정리를 해 주셨다.
 
두 범주에 속한 율법은 서열을 따질 것이 아니라 동등한 중요성이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율법의 우선순위를 정해서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성을 찾으려 한 바리새인들, 사두개인들, 서기관들의 의도에 일격을 가한다. 우리가 부모가 아이를 사랑할 때, 이것 해, 이것 하지마, 모든 것들은 부모의 자식의 사랑표현일 것이다. 근데 내 속에 자식은 절대 그러지 않는다. 순위를 나눌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이 정리한 가장 큰 계명, 이와 같은 율법을 통해 유대 지도자들에게 잘못한 것이 크게 세 가지가 있는데, 지적해 준다. 우리들에게도 지금 지적하고 계신다.


 
1.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37절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계명이고 강령이다. 누가 여기에 토를 달겠는가? 그날 유대 지도자들에게 이야기 하신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다 안다고 한다. 어떻게 사랑할 것인데? 무엇인 중헌디?, 그 조문에 대한 답을 내는 것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을 사랑할 때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 하냐고 하신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동일하게 지적하고 계신다. 예수님은 구약의 전통을 가지고 오셔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다. 이 때 마음은 외모와 상관없는 단어로 가식 없는 내면의 신실함을 가리킨다. 목숨은 생명을 뜻한다. 가시적인 행동으로 사랑하지 말고, 전인격적으로 하나님은 온 맘 다해 사랑하기를 바라신다. 그럼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하라는 사랑은 어떤 사랑인가? - 연애를 해보면 안다. 온통 자신의 마음이 그 사랑하는 사람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에게 이러한 사랑을 받고 싶어 하신다.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들, 자기의 자녀들이 온 맘 다해 사랑하기를 너무 원하신다. 하지만 유대 지도자들은 율법으로 선을 긋고 마음보다 형식을 중요하게 여기면서 하나님의 사랑은 사라지게 된다. 예수님은 이러한 유대지도자들의 태도를 아주 강력하게 지적하고 계신다.
 
 
2. 둘째로, 이웃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 다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또 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은 범위에 대해서 이웃의 범위에 심각한 도전을 주고 있다.
고르반(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렸다) 드렸기에 돈이 없다며, 내 부모를 공양하고 내 형제들에게 돕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상위법을 지켜서이라고 당연하다고 한다. 이렇게 자기의 책임을 회피하며 악용하기도 했다. 이웃이 아닌 사람들에게서는 자기들이 자기 기준으로 철저하게 이웃을 정했다. 그런데 이 본문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도 나오는데, 누가복음에는 놀랍게도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웃을 사랑하라, 고 말씀한 뒤에 어떤 본문으로 정리 하냐면,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로 정리를 하고 있다.
 
*누가복음 10:25, 28절에 보면,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입술로는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자신들이 정한 이웃의 범위를 정해져 있었다. 자기 스타일이 아니라고,,, 여러분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 우리가 정해놓은 기준, 우리가 편안하고 좋은 기준에 따라서 이웃을 정해놓고, 내 마음에 들면 참 이웃이고, 마음에 안 들면, 나쁜 이웃이라고 한다. 이웃에 들어가지도 않는다. 같은 민족인 사마리아 사람과 그 땅에 대한 혐오감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심했다. 그 당시 심한 욕이 ‘사마리아 같은 사람’이라고 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사마리아 여인의 만남 등, 예수님의 행적에 사마리아 인들이 주인공으로 많이 등장 시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우리가 정해 둔 기준, 아니라고 하신다. 정치가 정한 기준도 아니라 하신다. 세상이 정해준 기준도 아니라고 하신다. 문화가 정해주 기준도 아니다. 오직 하나님이 정해 주신 기준은 범위를 넓혀서 초월하여 이웃을 섬길 때, 가장 위대한 계명, “이웃을 사랑하라.”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더 나아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뛰어 넘어 원수를 미워하지 말고 사랑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마태복음 5:44절에 보면,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요한일서 4:21절에도
21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서기관들에게 지적한 이웃의 범위는 동일하게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도전하는 말씀임을 기억해야 한다.

 
3. 셋째로, 내 자신을 사랑하라.
여기서는 내 자신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인가를 지적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이웃사랑의 근거가 내 자신을 사랑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은 하나님을 사랑하는데서 시작되어야 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말로 표현할 정도가 아닌 깊고도 넓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다. 우리를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시고,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죽게 하신 분도 아버지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사망에서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 천국을 상속할 수 있게 한 분도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주님의 뜻에 따라 영원한 복을 누리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이것이 하나님 아버지 사랑이시다. 이 아버지 관점에서 이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 각자를 사랑하고, 바라보아야 한다. 키가 작은 것 등 세상의 시각이 아닌,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천국의 가치로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말 귀한 자이다. 자기를 쓰다듬으면서 자기를 사랑하고 다독여라. 그런 영적인 정체감이 없다면, 하나님은 정말 힘들고 어려우실 것이다. 우리 자녀가 뭐든 못한다고 하면 다 걱정일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천지를 만드시고 상속까지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믿음의 연륜 신앙의 깊이를 자랑하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과 그리고 서기관들이 던진 가장 위대한 계명은 동일하게 우리들에게 적용되고 있다.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온맘 다해 주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에 부끄럽지는 않는가? 이웃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내 주변에 원수들은 없는가? 내가 정하는 이웃의 한계를 정하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모시는 영가족들이다. 하나님은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는 행위가 아니라, 우리의 마음을 우리의 온 마음을 소중하게 보시는 분이시다. 부족함과 실수가 있다해도 애써서 이웃을 섬기려고 봉사하는 것을 주님은 원하고 계신다. 온맘 다해 하나님을 섬기고, 온 맘 다해 이웃을 섬기는 온전함에 이르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거는 기대이다. 그 기대대로 살아서 온전한 성도로 살아가길 소망한다.
 
 
♣요약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며 내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생명을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온전히 사랑해야 한다. 세상이 정한 이웃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하신 이웃을 온전하게 섬기며, 세상의 시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교회 지체들과 담임 목사님, 그리고 목사님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며, 온 맘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이웃과 나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큰 계명'을 실천하는 일이며 순종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자녀로서 더 큰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며 또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기타 제물을 드리는 것보다 낫다고 하셨다. 모든 율법은 이 두 가지를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올바른 이웃 사랑은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고 마음으로 미워하지 않으며 범죄 치 않도록 권면하고 보복하지 않으며, 원망하거나 업신여기지 않고, 도움을 주고 후히 대접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함께 기뻐하며, 하나님께 하듯이 사랑하고 덕을 세우며, 기회 있는 대로 선을 베풀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사랑하고, 외모로만 사랑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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