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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1년 6월 19일) 제목: “생각과 생각사이에서” 말씀: 요한복음 1:1~4 설교자 : 이원준 부목사 성경읽기: 유영권, 서동주(청년 G국,A국) 사회: 송대영 부목사님 예배 인도 및 마무리기도: 오정현 담임 목사님 ----------------------------------------------- 요한복음 1:1~4,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AI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의 대부분의 것을 동일하게 하거나 더 잘 할 수 있다면, 인간을 인간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어떤 제품도 사용하고 평가해 보고 구매하는 것이 보편화되는 것인데 결혼이라고 하는 것은 일생 일대에 가장 중요한 결정을 하는데 있어서 남자와 여자가 동거해보고 하는 것이 왜 잘못된 것인가? 기독교는 기독교를 믿으면 되었지, 왜 다른 사람에게 믿으라고 강요하는가? 우리 청년들이 삶의 순간들 속에서 그리고 우리 삶의 순간들 속에서 맞닥뜨려지는 실제 질문들이다. 중요한 사실은 이 질문을 어떻게 대답 하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세계관 그리고 그 내면에 있는 그 사고의 체계가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을 주도적으로 잡고 있는 사고의 체계는 세속주의와 탈 근대주의 즉 포스트모더니즘이다. 새벽부터 주의, 주의 하니 주의 깊게 들어야 한다. 졸지 않기를 바란다. 세속주의란 종교와 신앙은 종교와 신앙의 영역에 머물러야 할 뿐 공공의 영역에서는 다른 영향력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그런 사고의 체계이다. 이처럼 세상 전체를 바라보는 이 사고의 체계들은 요즘에 일어나는 현대 문화의 현상이 아니다. 생각의 역사, 즉 천하의 역사의 제일 먼저의 질문은 아르케라는 무엇인가? 즉 이 세상 전체의 근원적이 무엇인가였기 때문에 삶의 모든 순간과 인류의 역사와 이 세상 전체를 바라보는 사고의 체계는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들은 생소하거나 또 놀라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함께 읽은 이 요한복음 1장을 처음 맞닥뜨렸을 그 수신자들은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을 통해서 실로 새롭고 놀라운 경험을 했을 거라 생각한다. 요한복음 1장은 창세기 1장과 그 구조적으로 유사함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창조하시고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는 그 빛이 바로 요한복음 1:1~4절까지 동일하게 반복된다. 다만 여기에서 말씀도 있고 빛이 있는데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고 읽었지만,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라고 수신자들은 들은 것이다. 이 로고스라고 하는 단어는 말씀, 진리, 소통 표현, 이러한 것들을 담아내는 말이 맞다. 그러나 요한은 요한복음의 메시지를 수신하였던 그 사람들은 유대인 뿐 만이 아니라 이미 다른 사고의 체계들을 구성하고 있던 헬라 문화권에 있었던 사람들이 받았던 소식이기 때문에 이 고로스가 하는 그 단어는 다른 의미, 그저 말씀이 가장 우리로서는 최고의, 최선의 번역이긴 하지만 원초적인 원리, 그리고 모든 것이 변하는 세상 속에서도 그 조화를 유지할 수 있는 이성과 같은 그 로고스라고 하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의미 때문이다. 태초에 로고스가 있었다 라는 이 표현은 처음 수신자들에게 매우 놀라운 일이었을 것이다. 요한은 요한복음 1장에서 이 당시 철학의 시류가 이야기하고 있던 그 로고스보다 훨씬 더 높고 위대한 진리를 선포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이 있게 한 그 능력은 단순한 괴력이나 어떠한 이성이 아니라 인격이신 하나님이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인격이신 그 하나님이 이 세상을 이해하고 있는 로고스의 개념을 뛰어넘어서 모든 우주의 존재에 이유와 기동력이 되신다고 1:3절에서 특별히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실은 무엇을 말합니까? 보이는 생물들과 보이지 않는 미생물들, 생물을 뛰어넘어서 과학, 수학, 철학과 같은 그 학문들과 그 학문을 구성하는 다양한 법칙과 원칙들, 원리들,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 물리 상수와 중력과 무중력, 예술의 아름다움과 전파의 기류에 이르기까지 이 모든 것들은 그분으로 인해 그분으로 위에, 그분 아래, 존재한다는 것이다. 아브라함 카이퍼가 이 사실에 대해서 멋지게 표현한 것이 있는데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 만물이 존재하는 이유는 그것들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들이 하나님의 생각 안에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한다. -하나님이 로고스 그 만물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세속주의의 사고체계 가운데 움직이고 있는 사람들은 도전한다. 신앙은 신앙이어야지, 예수 같은 종교적 인물이 그 다른 공공의 영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은 잘못되어 있다. 라고 말한다. 이런 사람들이 이렇게 주장하는 데는 그들이 가진 핵심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어떤 공공의 영역은 팩트와 사실에 의거해야지, 가치, 신념, 종교 신앙과 같은 것들이 해석되어서는 안 된다는 그런 전제 때문이다. 정말 가치중립적인 팩트, 가치중립적인 세계관이 가능할까? 하나를 예를 들어보면, 미국의 천문학자, 1929년 에드윈 허블이란 천문학자가 허블법칙을 발표한다. 긴 얘기를 짧게 말하자면, 허블이라는 그 과학자는 우주의 빛의 파장을 연구하면서 '레든 쉬프트'라고 하는 현장을 발견하게 되고 이 적색편이 현장을 통해서 우주는 팽창하고 있음을 물리학적으로, 천문학적으로 정리해준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주의 시작점이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 우주의 시작점을 세속주의의 사고의 체계로 해석하면, 빅뱅우주론이고 우리는 이것을 바라보면서 부인할 수 없는 창조주의 힌트라고 말을 한다.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가치중립적인 그 어떤 영역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그 공공의 영역에서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우리의 신앙을 살아내지 않는 그 모든 동안에 이미 무실론 적 자유주의와 근대주의의 산물들이 그 자리를 차지해 버렸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 세속주의와 이 세속주의가 구축한 사고의 체계가 공공의 영역을 장악하기 시작할 때에, 그 생각과 생각 사이에서 만들어내는 인간과 세상의 모습은 우리에게 절망적이라는 것이다. 이 사고의 체계가 만들어 내는 세상은 어떠한가? 우리가 처음 이야기한 AI를 생각해보자. 세속주의 사고 체계에서는 인간은 고등한 동물내지는 기계적인 세포에 움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나아가서 사이보그, 또는 포스트휴먼(posthuman-현 인류보다 더 확장된 능력을 갖춘 존재)적인 존재가 인간보다 더 가치 있다는 주장, 이것들이 덜 가치 있다는 주장을 할 수 있는 논리적 근거는 가지고 있지 않다. 혼전 동거가 만들어 낸 수많은 내면의 파괴와 영혼의 피폐함, 다른 사람들을 향한 불신에 이르기까지 나아가서는 수많은 낙태와 유기되는 아이들을 생각할 때에, 그저 동물이나 기계로 만들어버리는 하나님이 전제되지 않는 이 세상은 그저 어둠일 뿐이다. 프랜체프 세이커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가치, 의미, 정의, 윤리, 도덕과 같은 이런 내용들은 세속주의 안에서 논리적으로 존재할 수 없지만, 슬쩍슬쩍 우리 안에 있는 세계관에서 무단으로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인가? 세속주의가 만들어내는 이 세상은 실제적으로 우리가 살아내지 못하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이런 세속주의 사고 체계에는 결국은 사람들을 어둠 가운데 가두어 놓게 된다. 이 로고스를 만나지 못하는 어두움은 그 사람들의 사고 체계를 그림자로 드리운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신앙은 가지고 있지만 로고스의 능력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 세속적주의 사고 체계가 만들어 놓은 그 경계선 안에 갇혀서 우리의 신앙이 마치 다른 곳에서는 제한되거나 좀 참아야 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그런 속박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다. 그런 속에서 여러분은 어떠한가? 로고스를 깨닫지 못하는 어둠 가운데 있거나 로고스의 능력을 경험하지 못하는 속박 가운데 너무나도 많은 우리의 삶의 모습들이 들어가 있지 않는가?? 우리는 적어도 분명하게 확실할 수 있는 그 어느 누구도 이런 영적인 어둠과 영적인 속박에서 우리 스스로를 구원해 낼 능력이나 자격을 갖추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구원자가 필요하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 영적인 어둠과 속박에 갇혀 있는 사람들에게 실로 위대한 역사를 이루시는데, *요한복음 1:4절에 이은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우리 하나님께서 로고스가 육신이 되어 어둠 가운데 들어오시는 이 로고스가 어둠 가운데 왜 들어오시는가? 그 이유는 그가 십자가를 지심으로 드러나는데, 십자가를 지심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마가복음 15:33절에 보면, 33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 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우리가 피할 수 없고 스스로 건져낼 수 없었던 그 어둠이 십자가 위에 임하는 것이다. 우리를 묶어놓을 수밖에 없었던 그 어둠이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임하는 것이다. 우리를 속박한 그 모든 것에서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데, *요한복음 8:31-32절에 보면, 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너희가 로고스에 거하면 우리를 자유케 하시겠다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당하는 것을 대신 당하시고 그 어둠이 막을 수 없었던 능력으로 모든 속박에서 풀어주시는 분,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인 줄 믿는다.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부활하신 그 주님께서 어떤 일을 이루시는지 보자. *고린도전서 1:19절에 보면, 19 기록된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그 예수 그리스도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인간이 가지고 있는 그 모든 로고스를 초월하는 역사를 이루어 내시는 것이다. 그분의 부활은 자연의 법칙 위에 그 계심을 로고스가 선포하는 사건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사고의 체계를 초월하는 사고의 체계를 우리 가운데 이루어 내시는 그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가운데 있는 것이다. 창조의 주인이신 그분은 창조에도 주인이신 줄 믿는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만 주인이 되시는 것이 아니다. 온 우주의 만물의 알파와 오메가 이신 분이시다. 모든 존재와 이유와 능력, 그리고 기도하시고 능력을 공급하시는 분인 줄 믿는다. 그 안에 영혼의 공허함은 끝난다. 세상이 이해되기 시작한다. 심지어 우리의 고통과 불편함을 해석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생긴다. 우리가 그 빛 가운데로 들어가게 될 때에, 방향이 없던 곳에 방향이, 가치가 없던 곳에 가치가, 자유가 없던 곳에 자유가, 생명이 없던 곳에 생명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이 생명을 입은 사람들이 이제 공공의 영역에서 생명을 선포하고 우리 모두가 함께 추구할 수 있는 최선을 함께 만들어가며 이웃을 보살피고 원수까지 용서할 수 있는 독생자의 영광을 나타내는 그 역할을 모든 영역에서 하게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사실로 때문에 우리 모두는 온전함을 사모한다. 그렇기 때문에 담임 목사님께서 주일 강단을 통해서 이 온전함은 단순이 우리의 종교생활, 단순이 교회 생활, 신앙생활이 아니라 우리의 지, 정, 의, 관계, 행실, 나아가서는 우리의 가정과 일터, 선교지, 창조세계, 그리고 사랑글로벌 아카데미가 포함하는 그 모든 영역에서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텔레이오스를 살아내시도록 우리가 함께 살아내도록 우리가 걷고 있는 것이다. 저명한 철학자 달라스 일리어드는 이런 이야기를 했다. ““Jesus Christ is smarter person than anyone who has ever lived on this planet.”= 예수 그리스도는 이 지구 위를 살았던 그 어떤 사람보다 똑똑한 사람이다.” 최고 권위자가 아니다. 우리 중에 프로그래머가 있다면, 그 프로그램보다 더 고능한 로직이 있게 하시고, 모든 것에 질서가 있게 하신 그 코딩을 가능하게 하신 바로 그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어떤 경제학자보다 더 높은 권위의 경제학자는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만물의 수요를 아시고 인간의 내면을 아시고 역사의 모든 흐름을 주관하시는 그분을 을 수 있는 자는 없는 것이다. 예술가보다 더 뛰어난 예술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신데, 아름다운 자체가 존재하도록 하시는 분이 바로 예술가 중에 예술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것이 우리의 제자도의 모습이다. 이 진리를 우리 가슴에 담고 새로운 결단을 하자. 먼저 우리의 모든 교만을 회개하고, 우리의 마음에 높아진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가장 높은 분이신, 이 세상의 지혜와 총명을 부끄럽게 하시는 그들이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새로운 정의와 새로운 사고 체계를 선포하신 그분께 항복하길 소원한다. ▷두 번째는 우리 제자도를 향한 새로운 결단이 있기를 바란다. 앞으로 수확할 때에, 앞으로 근무할 때에, 가정에서 모든 일과와 관계와 행실에서 그리고 삶의 모든 공공 영역을 살아갈 때에 우리 예수님께서 육신 가운데 성육신 하셔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을 보게 된 것처럼 우리가 발 닫는 그 모든 영역에서 이 생명을 살아냄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에 성육신적 아버지를 통하여 독생자의 영광을 보길 소망한다. 우리가 걸어가는 모든 시간들은 기뻐하는 시간이 되고, 우리가 앉고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시간들은 우리 주님으로 위한 시간이 되길 축복한다. 이 세속주의의 횡포와 무게 때문에 상한 마음과 다친 마음을 우리 청년들과 성도들에게 지금 이 시간 우리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바란다. 내가 그 삶 속에 가장 높은 권위자이다. 그 음성을 들어야 한다. 상사, 거래처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최고위 권위자이신 줄 믿는다. 이 믿음으로 온전함을 향하여 기쁨으로 걸어갈 수 있는 모든 청년들과 성도님들이 되길 소원한다. ♣요약: 로고스의 능력으로 우리를 붙잡아 주시길 기도하며, 우리의 마음에 높아진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이 세상의 지혜와 총명을 부끄럽게 여기며, 오직 우리 예수그리스도의 권위가 제한 없는 모든 영역에서 펼쳐지고 있음을 선포하시는 이 말씀을 쫓아 우리가 살아가길 소원해야 한다. 청년부에도 어떻게 역사하시는 것인지를 보고 깨닫기를 바란다. 시대의 젊은이들을 살리고 일터와 열방 가운데 온전함을 이루어가며 영적인 재생산의 사명을 감당하고 시대의 표준을 준비하는 온전한 제자로 거듭나야 한다. 그 삶의 고백들을 나누면서 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는 말씀이신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마지막 날에 우리에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의 언어와 연설로 자기의 생각을 알리듯 하나님께서는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자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알리셨던 것이다. 세례 요한은 그 소리였으나 그리스도는 말씀이셨다. ‘말씀’, ‘이성’ 등으로 번역되는 ‘로고스’는 헬라인들의 우주관과 범신론적 사상이 담겨 있는 단어이다. 헬라인들은 우주가 저절로 발생, 영속하는 것이 아니라 신적 원리에 의해 형성, 유지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 원리가 바로 ‘로고스’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이 만물의 근원자로서 말씀으로 우주를 창조하셨음을 증거 한다. 때문에 요한은 성부 하나님과 함께 만물을 창조하사 그것을 다스리고 계시며 성육신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친히 증거 하신 예수님이야말로 ‘로고스’라고 설파한 것이다. ▲ 백송이의 꽃바구니, 두 개나- 목사님 고생하신다고 보내주신 꽃을 모든 성도님들과 기쁨을 나누시는 담임 목사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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