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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2021년 8월 14일)

제목: ''군 선교사로 뜻을 정하라''
말씀: 다니엘 1:8, 사도행전 20:22~24
찬양인도: 이다니엘 부목사님
기도: 김도훈 부목사님
말씀읽기: 이두호(청년D국, 이승신(대학8부)
설교자: 김학주 장로님(중장-육사교회)
 
암송과 기도마무리-오정현 담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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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니엘 1:8, 사도행전 20:22~24.
*다니엘 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사도행전 20:22~24,
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군 선교사로 뜻을 정하여”.... (김학주 장로님 현 군 장교)
-이 귀한 자리에 제가 도저히 설 수 없는 자리인데 은혜로 여러분을 만나게 하심에 하나님께 저를 사용하여 주심에 감사와 찬양의 영광을 올려드린다. 사랑하는 담임목사님이신 오정현 목사님을 잠시 뵈었다. 새벽을 깨우는 사랑의교회 성도님들을 뵈면서 제가 많은 은혜와 도전이 됩니다. 나라가 많이 힘들고 어렵지만 여러분들이 이 기도의 자리를 놓지 않기 때문에 저는 소망이 있다고 보며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이끌어 가신다는 것을 확신을 갖게 된다. 저는 목사님께서 소개해 주신대로 평생 군인으로 살아온 사람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 말씀을 드린다고 하는 것이 좀 여러분에게는 생소한 삶이 될 수 있고, 그래서 좀 부담도 된다. 그러나 저는 우리 하나님께서 군에서도 계신 하나님이시고 여러분들이 늘 만나오신 하나님은 모두가 동일한 하나님이기에 저와 함께 하신 하나님을 증언하심으로서 여러분들에게 그 새로운 하나님을 다시 만나는 그런 기회가 되었으면 참 좋겠다. “여러분, 하나님은 살아계시지요?” 아멘,,,,아멘으로 고백하신 분들은 정말 복된 삶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하나님은 살아계신다고 이야기 한다. 정말로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만난 분이 얼마나 되겠는가? 보통은 습관적으로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도 있다. 그런 삶 가운데서 아주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가장 복된 삶이라고 여겨진다. 우선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에 성경이 믿어진다면 이미 하나님을 만난 사람들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체험 하신 분들이다. 또 하나는 어떤 분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분들도 계시다. 흔치는 않지만 어떤 때는 세미한 음성으로, 어떤 때는 정말 벼락같은 음성으로 들려주신다. 그런 분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직접 음성으로 듣는 사람들은 정말 얼마나 행복할까를 생각해본다. 삶속에서 많은 만나는 속에서 많은 일들을 통해서 어떤 때는 고난, 어떤 때는 감당할 수 없는 고난들 속에서 하나님께 매달릴 때, 그 하나님께서 정말 기가 막히게 저희기도를 들어 응답하시고 체험을 하면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는 생각이 든다. 나같이 작은 자가,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할 때, 기도를 들어주심과 응답을 받았을 때, 그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질 수 없을 것이다. 여러분 부모님에게 나의 소원을 이야기 하는 것처럼, 하나님께 부르짖고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고 그것을 날마다 경험한다면 그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떠날 수 없는 사람이다. 모두가 하나님을 만나셨으리라 믿고 또 그 살아계신 하나님을 날마다 경험하시는 삶이되길 원한 간절히 소원한다. 오늘 제목이 ‘군 선교사의 뜻을 정하여’이다. 선교사라면 하나님께 목숨을 드리는 것이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 삶을 드릴 때, 선교사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저에게 이런 선교사란 이름을 붙인다는 것이 어불성설이고, 말이 안 된다. 그렇지만 저는 육사를 갈 때 이런 마음을 정했다. 군대에 가서 하나님을 전하겠다고 마음먹었다. 하필이면 군인일까를 생각할 수 있지만, 불신자 가정으로 태어나서 고등학교 1학년 때, 하나님을 만나 예수님을 영접하고 제 인생이 바뀌었다. 고 1이면 어릴 때이다. 내가 어떤 인생을 살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인생일까를 생각해 보았다. 고민하고 기도하기에는 어린 나이였다. 그러나 그 때에 하나님이 강하게 인도하셨기에 제가 앞으로의 인생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복음을 전하는 인생으로 살아야 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신앙공부를 해서 목사님도 되고 싶었지만 저에게 결정된 길이 군인의 길이었다. 안 믿는 가정이니까 제가 선교를 해서 군에 간다고 하는 것은 이야기가 안 되었다. 그냥 군인이 되어야하겠다고 말씀드리니 굉장히 반대를 하셨다. 몰래 육사 원서를 사서 시험을 치렀고, 합격 후에는 할 수 없이 허락하시는 상황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제가 군인의 길을 들어섰다. 군인의 길은 쉽지는 않은 길이었다. 힘든 일이었다. 저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은 그 어려운 가운데서도 역사하시기에 제가 그 말씀을 드리려 한다.
 
저는 군선교사라고 이야기 했는데, 군인에 와서 보니 군 교회가 천 개가 넘었다. 다 포함해서 그런데 군 목사님들이 260명밖에 안 된다. 그러면 나머지 교회는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민간 목사님들이 파트 타임으로 하시거나 전임 사역하신 분들이 하신다. 한 육백여분이 계시는데 주일날 예배드리고 만날 기회가 없다. 그래서 저는 목사님들이 소중한 역할이 중요하여 군 복음과 선교를 위해서 더 중요한 것은 제가 걸었던 사람들 중에 장교와 군 지휘관들이었다. 그 지휘관들이 믿어서 견고히 하나님 말씀에 서서 하나님을 전하고 군인들을 이끌어가며 오히려 삶으로 보여 주어야 해서 하나님의 사람이 상관에게 부하에게 복음을 전하는 삶은 한 교회에서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제가 그 삶을 꿈꾸었고 그 길을 걸어가면서 많이도 넘어졌다. 그때마다 하나님은 일으키시고 기적같이 제 삶을 인도하셨다. 잠시 몇 가지 나누고자 한다. 제 나름대로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정말 잘 들어주신다는 것이다. 발견한 원리가 있다. 3가지 정도 이야기가 된다.
 
▷하나님이 응답해 주시는 세 가지 기도의 원리.
-첫째 -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낮추고 겸비하여 하나님만 바라는 기도.
-둘째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구하는 기도.
-셋쩨 –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리는 기도.
 
I. 첫째 -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낮추고 겸비하여 하나님만 바라는 기도.
-다 경험을 하겠지만, 제가 기다리는 하나님은 몇 가지 있다. 우선 우리가 이 선교사적인 마음을 갖고 복음을 전할 때에는 제 삶으로 보여 주어야 되기 때문에 많은 어려움들이 있게 된다. 오늘 본문에서 말씀한 것처럼 뜻을 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니엘 1:8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하고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도록 환관장에게 구하니.
 
*사도행전 20:22~24,
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나는 이런 삶을 살겠다는 뜻을 정해야 한다. 내 뜻이 하나님 뜻이냐고 말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정말 기도하면서 정하는 마음이라면 하나님 앞에서 뜻을 정하고 또 사도 바울이 죽음도 불사하는 선교사도 그렇다. 생명까지도 주는 삶이다. 죽을 각오로 가야 한다. 이러한 마음이 없이는 안 된다.
 
겸비하여 하나님만 바라보는 기도, 우리가 무얼 할 수 있는가? 그런 사람은 교만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겸비하여야 한다. 저는 다니엘을 참 좋아한다. 10대 소년 때 그 신앙의 본을 보였기에 제가 10대 때, 복음 안에서 육사를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은혜로 갔다. 이 다니엘이 그런 신앙을 가진 사람이다. 다니엘서
 
사도행전 20:22~24,
22 보라 이제 나는 성령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거기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알지 못하노라.
23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언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24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다니엘처럼 겸비하여 마음을 정하여 엎드려야 한다.
*다니엘 9:3,
3 내가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재를 덮어쓰고 주 하나님께 기도하며 간구하기를 결심하고.
 
*다니엘 10:2-3,
2 그 때에 나 다니엘이 세 이레 동안을 슬퍼하며.
3 세 이레가 차기까지 좋은 떡을 먹지 아니하며 고기와 포도주를 입에 대지 아니하며 또 기름을 바르지 아니하니라.
-하나님 앞에 엎드린 자세이다. 세상 것 좋은 것 다 내려놓고 나의 문제를 해결해 주신 그 하나님께 완전 엎드린 자세이다.
 
저는 금식 기도를 잘 하지 못하지만, 제가 금식 기도를 하면서 놀라운 경험을 한 적이 있다. 한 3일 쯤 후에 일어날 일을 그냥 다 보여주셨다. 정말 그 경험을 하게 하셨다. 저는 신비주의가 아니다. 그리고 매번 그런 경험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때를 그런 모습으로 하나님은 찾아오신 것이다. 3일 쯤 후에 일어날 일을 제가 절박하게 기도하니 다 보여 주셨다. 그리고 그대로 일어나고 이루어졌다. 정말 겸비하게 하나님만을 바라보면 그렇게 찾아오신다. 특별히 군 생활을 하면서 지휘관을 많이 했다. 지휘관이라고 하면 이 어깨에 녹색 견장을 단다.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이런 장자가 들어가는 직책이다. 이 지휘관은 부하들을 만나게 된다. 중대장 150명, 소대장 3-40명 정도, 대대장은 500명 정도이며, 연대장은 15-6백 명이 된다. 그 부하들을 만나게 될 때, 저는 견장을 다는 날부터 두 가지 기도를 한다. 하나님께 기도한다.
첫 번째는 제 부하들을 이 안 죽게 해주세요.
두 번째는 제 부하들 영혼구원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순서가 바뀐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영혼구원이 먼저이지만, 사실 죽지 않아야 영혼을 구할 수 있기에 복음을 위해서는 먼저 죽지 않게 기도한다. 왜 이런 기도가 필요하겠는가? 제가 대대장 때, 부하들이 한 500명 정도였다. 대대장을 할 때에 1991년 이었을 때이다. 그 당시에 우리 육군에서만 한해 450명 정도 죽었다. 지금은 육해군 다 포함해서 80-90명이 죽는다. 그렇게 생명을 존중하는 군인이 됐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죽어갔다. 그런데 그 때에는 육군에서만 1개 대대가 날아가 버린다. 그런일이 있었다. 그러니까 제게 맡겨진 그 생명들을 위해서 기도를 해야 했다. 요즘에는 좀 훈련이 약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저는 신앙의 양심상 군인으로서 해야 될 일이기에 아무리 위험하더라도 저는 해야 했다. 사실은 부하들을 그런 면에서는 좀 힘들게 했다. 그러나 훈련을 떠나서는 사랑으로 대하려고 했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사고의 위험이 더 많았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부하들이 죽을 수 있는 확률이 더 많았다는 증거이다. 저는 소대장 때, 후임 소대장이 죽었다. 육사 2년 후배였다. 제가 부하들과 매일 다니던 그 비무장지대에서 지뢰를 밟아서 후배가 죽었다. 부하가 밟은 지뢰를 본인이 밟아서 치우다가 죽었다.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 때에 제 전임자, 후임자, 다 사고가 나서 늘 죽었다. 제가 늘 가능성이 있는 그 위험 가운데 저도 있었다는 것이다. 어떻게 기도하지 않고 있겠는가?!!! “하나님 제 부하 좀 살려주십시오!”
 
*사무엘상 2:6,
6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하나님 앞에 엎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부하들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이럴 때 겸비해지고 하나님만 바랐다. 정말 놀랍게도 육사를 나온 사람으로서 소대장부터 연대장까지 기적이었다. 창군 이래 보직을 두 번씩 하게 된 유일한 사람이었을 것 같다. 그건 정말 기적이다. 한 번만으로 되는데 그걸 두 번이나 하게 하셨다. 저에게는 굉장히 손해 보는 일이었다. 그만큼 위험부담도 많을뿐더러 그것을 속히 마치고 참모의 전문성을 쌓아가야 하는데, 꼭 두 번씩 하게 하시니 손해 보는 느낌이었다. 여기에 비밀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이 저에게 부하들을 맡기신 것이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생명을 전할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위기와 기회는 늘 같이 있었다. 그러니까 기도해야 했다.
 
제가 극적인 상황을 소개하겠다. 다른 사람들은 한 번만 해도 그렇게 많이 죽는데, 제가 소대장부터 연대장까지 두 번씩을 다 해도 제 제 부하들이 단 한 명도 죽지 않았다고 하는 것, 정말 많은 위험 속에서 스스로 뭐라 할 수 없는 것이 기적이다. 하나님이 하시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기적이다.
 
제가 잊을 수 없는 날이 있다. 2002년도 3월 18일이다. 제가 연대장 시절에 철책선 비무장에서 연대장을 했다. 퇴근 후에 늦은 저녁을 먹고 있는데, 대대장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연대장님, 이등병이 탈영을 했습니다.”라고 했다. 비무장지대의 일근에서 탈영했다고 했다. 비무장지대에 인근에서 제가 그때 정말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생각하는 순간이었으며 ‘나도 군대생활이 이제 끝났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철책 선까지 지프차를 타고 올라가는 시간이 한 오십분 정도의 거리였다. 평상시에는 운전병에게 좀 빨리 가라고 했을 때인데, 그날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늘 하던 대로 정말 눈감고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 “하나님, 이제까지 수많은 고비를 넘기게 하셨으니 이번에도 살려주십시오.” 라고 했다. 제 인생에 그 오십분이란 시간이 가장 긴 시간이었다. 제가 할 수 없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오직 기도만 했다. 이 사람을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현장에 도착했을 때, 철조망에서 보니 넘어가 보려고 모래를 집어넣고 있는데, 20미터에서 수류탄이 터졌다. 거기에는 탈영한 병사가 있었다. 그 병사와 대치한 소대장, 중대장, 행정보관, 등 네 명의 간부가 한 불과 2-3미터 간격을 놓고 대치하고 있었다. 깜깜한 밤이니까 얼굴을 비추어가면서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 자리를 확인하고 내려가려고 하는데 한 밤 중에 수류탄이 터졌으니 제 정신이 아니었다. 대대장의 이름을 불러도 대답이 없고, ‘고종순’이란 대대장이었는데 그 사람을 불렀는데 대답이 없었다. 놀랍게도 그 이등병이 키가 180센티 정도 된다. 그 이등병을 제압을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결과적으로 파편 한 쪽도 아무도 안 맞고 멀쩡했다. 수류탄이 터졌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발생할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더 놀라운 것은 그 일이 있기 전, 병장이 그 이등병을 못살게 굴었다. 기압주고 심하게 대한 것이다. 병장이 군에서는 좀 높다. 이등병이 병장에게 함부로 못하는데, 그 이등병이 키가 큰데도 아주 작은 병장이 약간의 콤플렉스가 있었던지, 그 이등병 병장을 심하게 다루고 대하니 이등병이 실탄을 장전하여 쏘려고 총을 겨누었다. 방아쇠가 안 당겨졌다. 왜 그러냐면, 실탄이 정확하게 탄창에서 실탄이 나오려면 수직으로 꼽혀야 장전이 된다.


그런데 정말 용수철이 탄창에서 잘못되면 약간 사선으로 꼽히기에 완전하게 장전이 안 되기에 장전이 안 되는 것이다. 병장이 놀라서 그래 죽여보라고 이등병의 총을 빼앗고 자신의 총을 주었다. 얼마나 놀라서 이등병이 주눅이 들어서 발발 떨었던 것이다. 병장이 발로 차니 이등병이 밖으로 도망간 것이다. 병장의 총을 들고 나가면서 하늘을 향해 총을 몇 발을 쏘았다. 그래서 아까 그 자리에 온 것이다.
수류탄이 터진 자리에 간 것이다. 그리고 그 총으로 자살을 하려고 목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는데, 이번에도 총알이 안 나간 것이다. 그래서 거기서 잠시 유서를 썼다, ‘병장 너 죽어봐라’ 유서를 쓰는 동안에 소대장과 중대장 대대장 현장에 도착했고, 본인이 병장 총으로 자살이 미수가 되니까, 이제는 수류탄을 뽑아서 수류탄은 그 안전핀을 다 뽑고, 이것을 높으면 2,3초 후에 터진다. 그 상태로 40-50십 분을 대치하고 있다고 생각해 보면 아찔하다. 한밤중에,,, 제가 도착했을 때, 대대장은 연대장이 도착하기 전에 자신이 해결을 해야겠다고 여겼을 것이다. 죽든지 살든지, 설득해도 안 되니까 아주 순간적으로 그 병사를 덮쳤다. 밀어버렸다. 그곳이 약간 경사가 있었는데, 다행히도 뒤로 벌러덩 넘어졌는데 그가 수류탄을 놓친 것이다. 경사를 타고 내려가서 다른 곳에서 터진 것이다. 그것을 만약 안고 터졌으면 본인도 모두가 죽는 것이었다. 소대장, 중대장, 대대장, 연대장(장군)이 한 자리에서 죽는 사고가 어이 있겠는가? 연대장인 저는 안 죽는다고 안 죽는 게 아닐 것이다. 그 시간부터 해임에 군 생활이 끝날 것이다. 그 일이 있었던 것을 돌아볼수록 기가 막힌다. 한 가지만 해도 기적인데, 자기 총으로도 안 나가고, 병장 총으로도 같은 원리로 총알이 안 나가고 안 죽었다. 실탄으로 다 죽을 뻔했는데 다 무산되었던 것이다. 그 한 시간 사이에 3건이 연속적으로 발생 했다. 도저히 설명을 할 수 없다. 나중에 그 총들을 가지고 실험을 해보니 총알이 너무도 잘 나갔다. 하나님은 왜 이런 일이 있게 하신 것인지 그것이 의문이었다. 저는 그걸로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내 부대는 어떻게 해야 할지를 기도했다. 내 부대를 어떻게 이 부하들을 잘 관리할까를 기도했다. 깨달음이 있었다. 정말 더 놀라운 일이 있었다.
 
며칠 후 다시 듣게 되었다. 저희 연대 군목 대위 목사님이 저희 연대 목회를 했다. 그분이 부임해서 보니 부대에서 자주 사고가 나니 불안해지신 것이다. 그분은 늘 기도하시는 분인데 이 무슨 사고가 나거나 죽으면 내가 기도를 덜해서 나는 것으로 여겨서 거룩한 부담을 가졌다. 그래서 서울에 있는 작은 교회에 목사님께 전화로 부탁을 했다고 한다. 우리 부대가 좀 어려운데 우리 연대장님을 위한 기도를 해달라고 했다. 우리 김학주를 위해서, 66년대를 위해서 기도를 부탁받고 기도했다. 그분이 나를 알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그 기도부탁을 받고 그 목사님은 ‘이번 한 주는 김학주 66년대인 대령을 위해서 기도하자’ 라고 했다고 한다. 한 주간을 기도제목으로 했는데 그 기간에 그 일이 발생한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알지도 못한 분들이 저를 위해서, 연대를 위해서, 기도하게 했는가? 그런 일들이 그 주에 발생했는지를 생각하게 된다. 그런 퍼즐들은 충분히 맞출 수 있다고 본다. 저는 그런 하나님을 정말 많이 경험한다. 다니엘이 정말 겸비하여 자신을 낮추고 기도할 때, 하나님은 어떻게 응답 하셨는가?
 
*다니엘 9:23절에,
23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알리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환상을 깨달을지니라.
*다니엘 10:12
12 그가 내게 이르되 다니엘아 두려워하지 말라 네가 깨달으려 하여 네 하나님 앞에 스스로 겸비하게 하기로 결심하던 첫날부터 네 말이 응답 받았으므로 내가 네 말로 말미암아 왔느니라.
-기도를 시작할 첫 날부터 저는 이 말씀에 너무 큰 은혜를 받았다. 하나님은 우리와 거래를 하신 분이 아니며, 내가 3일 작전, 40일 작전, 그 기도 했으니 들어 주세요가 아니다. 정말 하나님만 바라보는 마음 중심을 보시고 그 순간에 이미 들으셨다. 저는 그렇게 마음을 다 드리는 것이며 정말 겸비하게 자지를 낮추는 것이 중요하다.

 
II. 둘째 –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구하는 기도.
둘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구하는 기도이다.
- 저는 군에 있으면서 특별히 이런 보직, 진급, 선두 주자로 가고 싶은 그런 마음이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제 마음대로 않는다. 어떤 사람은 높은 사람을 찾아다니기도 한다고 한다. 그때만 해도 저는 신앙 양심상 하나님께 기도해서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며 진급이지 제 방법으로 해서 진급을 하면 그것은 재앙일 수 있다고 여겼다. 장군이 되면 뭐하고 대장이 되면 뭐한가? 하나님이 주시지 않고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것이 선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도의 응답이어야만이 그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으로서 그 역할을 한다고 본다. 그런 마음으로 기도를 했다. 마지막 장군으로 근무를 했다. 마지막 장군 직위를 받는 일인데 그 해에 일 년을 잘 해야 좋은 평가를 받아서 좋게 추천서를 받는다. 뭐 여러 가지 조건이 있다. 심사중에 추천서가 가장 중요하다. 그래서 쉽게 말하면 잘 보여야 한다. 그해에 그분을 만나게 되었다. 얼마 후에 첫 번째 대면 결재를 하게 되었다. 십분 이십분, 계속 설명을 드려도 전혀 받아들이지 않고 이해를 못했다. 제가 볼 때는 대장이 그 정도 이해를 못하나하는 생각이 들고 그분은 제가 실력이 없다고 여기셨다. 결재를 안 해주셨다. 막 식은땀이 났다. 첫 단추를 잘못 끼워도 너무 잘못 끼우고 있다고 여겨졌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엄청난 자격지심이 생겼다. 이분과 인연이 되어 좋은 평가를 받아야 하는데 ‘완전히 다른 데로 빠지는구나!’ 했다. 그 순간에 저의 눈에 뭐가 들어왔냐면, 사령관님 책상에 명패를 보니 거기에 용이 두 마리나 있었다. 이제까지 수없이 많이 명패에서 봤던 것이다. 용이 사탄의 상징이라는 것을 별로 생각지 않았는데, 그것이 사탄의 상징이었다. 하나님께서 영적 싸움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주셨다. 그 때 첫날 깨닫게 해주셨다. 너를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으면 진급 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다음부터는 그 분께 가서는 그 명패에 늘 기도했다. “하나님, 제가 보고 할 때마다 보고를 잘 하게 해주시고 마음을 기분 좋게 사인을 해주게 해주십시오” 라고 어린애같이 기도를 하고 들어갔다. 그 후에 ‘하나님의 대사’란 책을 읽었는데, 그 책을 보고 김하중 대사의 책에서 보고 깜짝 놀랐다. 김대중 대통령 때에 늘 결재 판에 기도를 했다고 한다. 기도를 잊고 나서 들어오게 되면 다시 어느 날 문 밖에 나가서 기도를 했다고 한다. 제가 그 글을 읽으면서 그냥 감정이 바로 이입되었다. 그렇게 해서 치열한 영적 싸움을 하게 되었다. 그분은 나중에 알고 보니 정말 샤머니즘적인 불교신앙인이었다. 더 이상 이야기 안하겠다. 그렇게 하나님의 도움으로 잘 왔다. 그런데 9월이 되었다. 이제 진급이 되려면 한 달 정도가 남았다. 그때 중요한 회의를 두고 있었다. 대장 서열이 합참회장이 각 부대를 순회하면 장군들이 수없이 온다. 3성 장군, 4성 장군이 다 온다. 거의 백명 정도 함께 토의를 하는데 제가 그것을 맡게 되었다. 3시간 준비해서 주관하게 되었다. 이게 어렵다면 힘든 일이었다. 그분이 작전에 대가였던 분이 칭찬을 하는 법이 없는 분이다. 사정없이 질책도 한다. 그분이 내려온다고 하니 너무 부담이 되었다. 그러나 제가 기도를 하면서 그것을 준비했다. 그날 새벽에 기도를 했다. “합창 회장님의 눈을 가려 주시던지 정말 칭찬을 하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그렇게 기도를 했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그분이 돌아보시면서 “이제 됐다. 내가 보니 최고 수준이다.”라고 기대할 수 없는 최고의 칭찬을 하시고 가신 것이다. 바로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자기 참모들을 불러서 회식을 하는데 다 참모들이 장군들이다. 회식 중에 비서실장이 저를 더 한 번 인정을 받게 하려고 했다. 장군들이 밥 먹는데 장군들이 밥을 먹는데 불렀다. 좋은 자리인데 신이 나서 갔겠지만, 저는 그 자리가 어떤지 알기에 음주에 대해서 정말 가기 싫었다. 그 일이 역시 일이 벌어졌다. 음주에 대해서 절대 정죄를 하지 않는다. 어떤 면에서 군에서는 필요하다. 그런데 제가 하나님 앞에 엎드릴 때, 영적으로 큰 해악인지를 알기에 그것을 받을 수가 없다. “제가 교회를 다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 저는 술을 먹을 수 없다”고 했다. 그 자리가 어떻겠는가? 그분이 기독교 신앙인을 그렇게 싫어하는지 몰랐다. 술잔을 내려놓더니 한 참 째려보더니 “야 임마, 교회 다닌다고 술 안 먹어?”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제가 얼마나 쇼크를 받았는지 모른다. 우리들이 다 그런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마무리를 못하고 쫓겨나다 시피하고 나왔다. 정말 하늘이 노랗다는 것이 이런 것이다. 된 밥에 재 뿌린다는 것이 이런 것이다.
 
그리고 추석 연휴가 있었다. 3일간 출근을 한해도 되니까, 교회 가서 3일간 금식을 하면서 기도했다. 이제까지 수많은 고비를 넘게 하신 하나님이, 이때도 역사하실 것이라 여기고 이런 테스트를 하신다. 나중에 테스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몰랐다. 그 테스트를 통과하는 것이 정말 중요하다. 진급이라면 하나님의 방법으로 해주시길 기도했다.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며 대령으로서가 아니라 이제는 장군으로서 하겠다고 했다. 하나님이 원하시지 않는다면 그것도 거두어주시길 기도했다. 우리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출근했는데 며칠 후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해 진급이 동일한 방침대로 그 진급이 다 끝났다. 그 장군직의 방침이 수정되어서 내려왔다. 올해 장군들 진급자는 지휘관들의 추천서를 받지 않는다는 올해의 지침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당연히 추천서로 된다고 하였는데 갑자기 그 공문이 하달되니까 당황했을 것이다. 참모총장은 지휘권을 못하게 하냐고 했다. 그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나름대로 잘한다고 하는 중인데 다 반발하며 지휘권을 침해하느냐고 했다. 그러나 제가 진급이 되었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그 다음에는 다시 원위치대로 되는 방침으로 바뀌었다. 육군을 아시는 분들은 다 아실 것이다. 유일한 한 해로 기록된다. 하나님은 그렇게 역사하셨다. 그날 퇴근 후 집에 갔다. 군인 아파트 18평 그 작은 곳에 꽃바구니가 꽉 차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에 그것을 보는 순간에 아름다운 향기와 그것을 보는 순간에 속히 치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그것으로 마치 취하게 될 것 같았다. 될지 안 될지 불안한 상황이었다. 장군이 되었지만 달라진 것이 없다. 제가 그래서 꽃바구니를 다 교회로 보냈다. 다 치웠다. 하나님의 영광을 본 자들을 다 보았다. 그런데 그것이 이루어지고 나서는 다 재앙이 되는 것을 너무도 많이 보았다. 차라리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면 하나님과 동행했을 터인데, 그래서 지위가 높아지면 처음에는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구했는데, 어느덧 자기 것이 되면 막 나간다. 하나님의 영광이 싹 가려진 것이다. 제가 미련하게 그 길을 가면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III. 셋쩨 –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하고 기다리는 기도.
-저는 만 25년을 기도했다. 소령 때에 육군사관학교에서 훈육 관으로 생도들을 교육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2년을 마치고 야전으로 갈 때,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다. 생도대장이 부임해서 생도 규정을 바뀌었는데, 수요일 날 기,찬,불, 세 개중에서 다 했어야 했다. 의무적으로 다 예배를 드렸다. 저는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는 것을 알기에 생도들이 그 자리에 나와서 힘들어도 들어야 믿음이 생기고 들어야 그들이 복음을 전할 텐데,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왜 종교를 강요하게 되냐고 하면서 자율 종교로 변해놓았다. 그리고 그 다음 주 수요일부터예배당은 다 비었다. 텅 비었다. 생도 생활을 들여다보면 이해가 간다. 너무 힘든 생활이고 바쁘기에 생도들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 당시만 해도 힘들었다. 나오고 나서 하나님께 기도했다. 육사 생도대장이 되게 해달라고 했다. 다시 그 규칙을 바꾸고 싶었다. 그 기도를 기다리는데 15년이 되었다. 끝까지 선두 주자로 가야 생도들을 이끌 수 있고 생도대장이 명예롭기에 가고 싶었다. 결국에는 장군으로 생도대장으로 갔다. 13명중에 제가 갔다. 하나님은 정확하게 15년 만에 보내주셨다. 그 과정은 기가 막혔다. 하나님은 정말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사단장을 마치고 합참 작전부장을 할 때, 2010년 3월 20일에 천안 함 사건이 있었다. 제가 그때, 모든 책임이 왔다. 제가 너무 힘들어서 여러 가지 힘든 일이었다. 감사원에서 감사가 왔고, 저에게 용납할 수 없는 두 가지의 일이 있었다. 하나는 문서조작 허위 보고였다. 이것은 장군으로서도 그렇지만 평생 하나님을 섬기며 따라온 신앙 양심상 도저히 이해 할 수 없었다. 그 굴레가 씌워진 것이다. 제 부하가 170명이나 되었다. 그 사람들이 다 보는 자리에서 허위보고를 했겠나... 그런데 우리나가 가장 대표적인 그런 공정한 감사원에서 그런 결론을 내렸다. 기가 막혔다. 이제까지 군 생활을 한 것이 무언가 했다. 너무 안타까웠다. 46명이 죽은 일인데 그런데 그런 굴레가 씌워졌다는 것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제가 새벽 2-3시쯤 7층이었는데,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려고 했다. 평생 하나님의 사람이라 했는데, 나도 별거 아닌 사라마이구나! 하면서 억울함에 견딜 수 없었다. 그 때에, 멀리 보이는 국립묘지 불빛이 보였다. ‘너 죽으라고 군에 보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마음을 주셨다. ‘정말 억울한 사람은 국립묘지에 있는 저 젊은이들이다’라고 하시는 것 같았다. 저는 사단장을 마친 투 스타인데 그 때, 하나님께 잘못을 회개했다. 이제 억울하지 않다고 했다. 그때부터 하나님을 다시 만났다.
 
제가 보직이 해제 되었다. 합참작전 부장 자리는 동기생 중에서 가고 싶다고 하는 자리가 가는 것이 아니다. 한 명을 먼저 진급 시켜도 그만큼 중요하고 힘들고 바쁜 자리이다. 그곳에서 징계를 받고 물러났다. 대전으로 좌천이 되었다. 그때 하나님은 다시 찾아오셨다. 기도와 찬양으로 눈물이 되었다. 이 눈물이 회복된다고 하는 것은 엄청난 축복이다. 하나님이 눈물을 주실 때 여러분도 감사해야 한다. 놀라운 감사이다. 그리고 다시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제가 3성 장군이 된 것이다. 그것도 이미 끝났는데,,, 하나님은 기회를 또 주신 것이다. 후배들과 같이 군단장으로 내 보냈다. 정권이 바뀐 것도 아니다. 그 정권이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나님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다. 삼성장군은 동기들 중에 몇 명 나오지 않았다. 삼성장군 계급장이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 하나님께서 시켰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쓰실 것인지에 대한 생각만 있었지, 군단장을 제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 별 세 개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 그러나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삼성장군 계급장을 가지고 부하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너무나 행복한 삶이었다. 마지막으로 저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 것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20년 후에 알았다. 제가 1994년도에 대통령 휴가지인 청남대 경비대장으로 갔다. 저는 거기에 가기 싫었다. 저는 그 자리에 군 경력에 도움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왜 그곳에 보내셨는지를 몰랐는데 정확하게 20년 후에 어떤 사랑하는 목사님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제가 거기 가서 지낼 때, 제 부하였던 상병이었다. 그 병사가 어떤 기도를 했냐면 전임자가 불교신자였는데, 막사 하나를 비워서 불상을 갖다 놓고 장교, 군인들을 그곳으로 보냈다. 이 병사는 신학을 하다온 병사인데 신앙 양심상 도저히 갈 수 없었다. 안가니까 어떻게 되었겠는가? 계속 두들겨 맞았다. 엄정한 군대에서 계속 두들겨 맞았다. 막바지에 다다라서 백일 동안 기도를 하겠다고 했다. “하나님 저 백일기도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매일 기도할 수 있는 곳은 바로 방해 받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곳은 화장실이었다. 정말 뭐라고 해석할 수 없다. 정확하게 백일이 되던 날, 일이 있었다. 다른 병사가 그분이 오라하더니 우리 대장이 바뀐다고 했다. 그때에 전화를 하셨는데 제일 먼저 그곳에 교회에 있냐고 물으셨다고 했다는 것이다. 제가 그렇게 이야기 했다는 것이다. 그 병사의 기도를 하나님은 정확하게 백일이 되던 날 기도의 응답을 들어주셨다고 했다. 그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 그 병사는 목사님이 되었다. 제가 2014년도에 마지막 보직으로 헬리콥터를 작전하는 육군 항공작전을 했는데 그 때 초청을 해서 부탁을 드렸더니 무려 20년 만에 그 이야기를 해주셨다. 그 말씀에 얼마나 놀랐겠는가?!!! 여러분 하나님은 살아계신다. 정말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정말 그 하나님과 동행하시는 복된 삶이되길 기도드린다.
 
♣요약
부족하고 연약해도 하나님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해주신다. 성령으로 하나 되게 하심에 감사하며, 죽든지 살든지 주님의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보혈로 구원받은 사람들이기에 어느 것이 진짜인지 거짓인지를 안다. 뜻을 정하라. 내 뜻이 아닌 하나님의 마음이라면 그 뜻을 정해야 한다. 선교사는 자기 목숨도 다 드릴 수 있는 마음이듯 다니엘도, 사도 바울도 그랬다. 죽음을 각오하고 갔다.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한다. 광복주일은 꼭 지키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주님은 감사하게도 34년을 지키게 하셨다. 구국의 기도를 위해 기도해야 하고 지도자의 복을 주시길 기도해야 한다. 위험에서 장로님을 지키신 것처럼, 주님을 두려워하는 자로 지도자를 주시길 기도해야 한다. 그 자리를 지키게 교회도, 개인도, 정부도, 제일 중요한 것이며 제일 두려워하고 주님이 모든 인사관리를 주님이 하시길 기도하여야 한다. 다니엘처럼 첫날부터 일어나야 한다. 이 민족을 살려주시라고 그런 마음으로 기도의 제목을 놓고 나라사랑, 민족사랑, 한국교회를 개인과 가정을 살려 주시길 기도해야 한다. 미국에서 있는데 한국이 텅텅 비었다고 하심이 마음에 그렇다. 여러분들이 일을 자리에 있어야 한다.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지켜야 한다. 이 민족의 지도자를 허락하시고 주님은 역사하실 줄 믿는다. 민족과 가정, 개인이 그 자리를 잘 섬기게 하시길 기도하며 지도자의 복을 주시며 군 선교가 회복되길 원한다. 군 선교를 살려주시고 모든 군목들을 사랑하여 그 어려움 가운데 눈동자같이 보호하시며 주님 앞에 겸비하게 기도하는 그 군인들과 군목과 지휘자들을 지도하시고 인도하시길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한국교회가 제대로 살아야하고 글로벌 스탠다드로 살아가야 하며 예배에 전력투구하는 군 선교를 사랑하시길 기도해야 한다. 영적인 확신과 기백을 가지고 주님 앞에 하나님 나라의 기도의 용사가 세상을 바꾼다.
 
※미국에 가서 보니 부교역자들이 11명 정도 모였다. 기도를 보면서 우리가 더 큰 교회를 위해 함께 죽을 수 있는 3명이 있는지를 어던 경우에도 왔다 갔다 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오늘 이 자리는 297명이 앉아야 한다.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배가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그렇게 가야 한다. 6700석을 가지고 99명을 가지고 예배를 드린다니 너무 아니다. 이대로 갈 수는 없다. 안타깝다. 교회를 보호를 해야 하지만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 사랑의교회는 목숨 건 몇 명이 일을 하게 된다. 온전한 인격-엄중히 방역지침 지키고 있으면 안 걸린다. 델타감염은 백신을 맞았다면 다시 감기 증상이라고 하니 두려움 없이 마스크 잘 하고 자유 함으로 예배해야 한다. 2주일 전부터 미국은 예배는 모두 다 나온 것을 보고 왔다. 우리도 자리를 지켜야 한다. 모든 중직 자들도 하나님이 그 자리에서 정말 필요한 사람들에게 갖게 해달라고 해주시길 기도해야 한다.
 
-바울은 현재 예루살렘 여행길에서 당하게 될 고통과 역경에 대한 그의 예상을 이야기한다. 바울의 진술은 다음의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1.그는 고난 받게 될 것을 분명히 예상했으며, 자신의 일상 업무를 그것에 대비하는 것으로 만들었다.
2. 즉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전진하기로 결심을 굳혔으므로 나의 어떤 기분이나 계획에 따르지 않을 것이다. 나는 성령의 인도하심에 따라 갈 것이며, 그가 나를 어디로 인도하심에 따라 갈 것이며, 그가 나를 어디로 인도하시든지 나는 그를 따라갈 것이다". 특히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들이 자신에게 닥칠 것인가를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일들을 바울에게 계시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하나님을 고대하고 그를 열망하기 위해서는 미래의 사건들에 관한 한 무지의 상태 속에 그냥 놔두는 것이 좋다. 우리는 장차 우리에게 닥칠 일들에 대해서 그리고 그 일이 낮인지 밤인지 아니면 몇 시에 닥칠 것인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속해 있어야 하며, 그분을 우리와 함께 관련을 맺게 함으로써 우리를 그의 눈에 선하게 보일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에게 폭풍이 닥칠 것을 대략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통과한 모든 성의 예언자들이 결박과 환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성령을 통해 그에게 전했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용감한 영웅적 결의로써 그의 활동을 계속하기로 결심하였다. '결박과 환난이 바울을 기다리고 있다'는 침울한 울림소리가 각 성으로부터 그에게 들려왔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로써 자신의 활동을 계속 진행할 수 있었다. 여기서 '이 모든 것들도 결단코 나를 사로잡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도 바울의 입에서 나온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바울은 여기서 다음의 세 가지 모본을 보여주었다. 바울은 그 결박과 환난을 무용지물로 만들다. 그는 '이 모든 것들도 결단코 나를 사로잡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것들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러한 것들은 마음에 두지도 않았으며, 다만 그리스도와 하늘나라를 마음에 간직하였다. 이 결박과 환난은 바울 자신의 활동을 방해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폭풍이 일어나는 것을 보았을 때, 그는 비틀거리면서 되돌아 간 것이 아니라 단호히 계속 진행하였다. 그것들은 바울에게서 마음의 평온함을 빼앗지 못하였다. 바울은 환난 중에서도 태연하였다. 천국에서 대화를 나눈 자들은 이 세상의 일상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위협적인 격노와 지옥 자체의 악의에 대해서도 경멸할 수 있다. 또한 그들은 이 모든 것들이 자신들을 해칠 수 없음을 인식하면서 자신들을 사로잡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4절). 생명은 감미로운 것이며 본래 우리에게 귀한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없다. 그러나 신앙의 눈으로 볼 때 생명은 상대적으로 비열한 것이다. 즉 생명은 그렇게 귀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즐거운 마음으로 포기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생명의 사역은 삶의 형식적인 즐거움이나 외형적인 삶을 확보하기보다는 보다 큰 우리의 관심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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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1년 8월 8일)
제목: ''욥의 고난''
기도: 김승진 부목사님
사회: 윤하중 부목사님
말씀: 욥기 1:1
설교자: 박희천 목사님(초빙)
--------------------------
 
욥기 1:1,
1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여러분 다시 뵙게 되어 감사드린다. 욥은 의인이었다. 따라서 의인다운 복을 받고 살았다. 아들이 일곱이요 딸이 셋이요, 모든 재산은 양이 칠천 마리요, 낙타가 3천이고, 소가 오백 결이니 찬 마리였다. 암나귀가 오백 마리였다. 이렇게 축복을 받고 살던 욥이 하루아침에 고난을 당했는데, 자녀가 다 죽고, 모든 제산이 다 없어지고, 더군다나 욥은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종기가 나서 질그릇 조각으로 너무 가려워서 긁을 정도로 어려움을 당했다.
 
의인 욥에게 왜 이러한 고난이 임했는가?
의인 욥에게 이런 고난이 임했다는 것은 욥 자체의 수수께끼만이 아니라 오늘 한국 교회의 전체의 수수께끼가 되어있다.
왜 의인이 이런 고난을 당하는가?
그래서 제가 아는 어떤 성도님들은 자기가 고난을 당할 때에, 새삼스럽게 욥기를 새롭게 연구하는 성도님들을 보았었다. 다시 말씀하지만 의인이 왜 고난을 당하는가? 욥 한사람의 수수께끼가 아닌 한국교회의 전체의 수수께끼이다. 왜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가의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먼저 욥을 위문하러 왔던 욥의 세 친구와 욥 사이의 갑론을박이 시작이 되었다. 욥의 세 친구는 욥을 위로하러 왔지만 실상은 ‘왜 내가 고난을 당하는가!’ 여기에 대하여 욥과 더불어 갑론을박이 시작이 되었다.
 
욥기 1장-31장까지 욥의 세 친구와 욥 사이에 갑론을박 시작되는데,,,
첫째 친구가 욥에게 말한다. “욥아, 네가 지금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너를 위로한 위로하러 왔던 우리들이 이런 말을 하는데 대해서 이런 말을 하는데 사실을 규명해야 할 것이 아니냐? 옛날부터 죄 없이 망한 사람이 없어, 그러니 네가 지금 이러한 고난을 당한 것은 무엇인가 네가 죄를 지었기 때문일거야.”라고 말한다. 거기에 대하여 욥의 답변은 “나 죄 지은 것이 없다.”라고 하자 욥의
 
두 번째 친구가 나타나서 “너 욥아, 너 그렇게 말하지 말고 다시 한 번 생각해봐, 아까 이 친구가 말했듯이 옛날부터 죄 없이 고난당한 사람이 없는데 너 그러지 말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구!” 말한다. 욥은 다시 말하기를 “나 죄 지은 것이 없는데”라고 답한다.
 
또 욥의 세 번째 친구가 말한다. “욥 이 사람아, 자네는 너무 고집을 부리지 말고 우리 셋이 다 자네보다 못한 사람이 아니야! 자네만큼 아는 것도 있고 경험도 있는데, 아까 두 친구가 말한 듯이 옛날부터 죄 없이 망한 사람이 없는데, 너는 무슨 죄를 지었을거야! 고집 부리지 말고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라구!” 라고 말한다. 욥은 다시 말하기를 “나 죄 지은 것이 없다”라고 대답한다.
 
 
이래서 내가 왜 고난을 당하는가에 대하 욥의 세 친구와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그러던 중에
욥기 31-37정까지 제4의 인물이 나왔다. 그 사람은 엘리후라는 사람인데 그가 나와 가지고 욥기 31~37장까지 혼자 이야기를 쭉 한다. 그 이야기의 내용이 결국은 욥의 세 친구와 대동소이하다. 예로부터 죄 없이 망한 사람이 없는데, 욥 네가 이 어려움을 당하는 것은 분명히 네가 무슨 죄를 지었을 거라고 한다.
 
엘리후가 욥기 32장에서 37장까지 혼자 쭉 이야기 한다. 이렇게 대화를 나눌 때에 여기에 하나님께서 개입을 하신다. 욥기 38-41장까지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욥에게 질문하신다. “야 욥아, 지금부터 너에게 묻겠는데 이 질문에 네가 알 수 있거든 답하라”라고 하나님께서 욥에게 연거푸 질문을 하신다. 이러한 사실이 왜 그런지 아느냐고 질문한다. 하나님께서 연거푸 질문을 하시는 것은 그 질문의 내용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 한 분만 알 수 있지, 다른 전혀 알 수 없는 그 어려운 질문을 하신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31-41장까지 왜 이렇게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만이 알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는 이 질문을 퍼부었을까?
그 까닭은 욥기는 밝히지 않는다. 좀 건방진 말씀이지만 이 사람의 해석은 이렇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나타나서 38-41장까지 왜 우주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 한 분만이 아시는 그 질문을 하시는가? 그 까닭은
“욥아 네가 고난을 당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네 세 친구와 너 사이에서 갑론을박이 벌어졌고, 제4의 인물인 엘리후가 말했지만 대답을 못했다. 그런데 오히려 네가 당하는 고난은 왜 주었는가? 내가 네게 질문이 우주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만이 알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알 수 없듯이 내가 네에게 주는 고난의 뜻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 한 분만이 알 수 있고 다른 사람은 다 모르는데, 너희들이 뭘 안다고 왜 하면서 이렇게 찢고 까부느냐? 오늘 네게 준 고난의 뜻은 누구도 몰라! 우주를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 한 분만이 알 수 있는 질문인데 너희들이 무얼 안다고 자꾸 따지느냐?” 하신다. 이렇게 연거푸 질문을 퍼부을 때에 질문을 받은 욥은 아찔했다.“하하 내가 경솔했구나!” 하면서 깨닫고 욥은 이렇게 말한다.
 
*욥기 42:1-6절에,
1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2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4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하나님의 질문을 받고 욥이 말하기를 아찔해서 하나님께 미안하다고 대답한다. “지금까지 왜 의인이 고난을 당하는가를 말해왔지만 결국은 내가 다 알지 못하는 사실을 말을 했습니다”라고 대답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의 뜻은 “하나님 한 분만이 알고 계시는데 우리가 뭘 안다고 찢고 까불었네요.” 라며 미안함을 깨닫는다.

*욥기 42:6절에,
6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자기가 알지 못하면서 왜 고난을 주느냐에 대해서 이렇게 한참 토론하는 것을 자복했던 것이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욥이 41:6절에 욥이 회개를 했는데 죄가 있었다고 말하는데, 욥이 홰개하는 것은 자기의 죄를 회개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주신 고난의 뜻을 알지도 못하면서 왜 고난을 주셨는지 따지는 것을 회개한다. 그러면서
 
*욥기 42:5절에,
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기의 42장 5절이 욥기의 요절이며 왜 의인 욥에게 고난을 주셨는가의 이유가 된다. 욥은 하나님의 질문을 받고나서 무엇을 깨달은 것이냐면, 내가 하나님의 질문을 받고 나니 믿어온 믿음이 주님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했는데, “이번의 고난을 통하여 주를 믿는 내 믿음이 한 층 더 올라서게 되었습니다.”를 고백한 것이다. 욥은 고난을 통하여 욥의 믿음이 듣기만 하던 자리에서 눈으로 보는 자리로 한 층 더 올라서게 된 것이다. 우리속담에 백문이불여일견(百聞이不如一見:백번 듣는 것보다 한 번 보는 것이 낫다.)이라고 하는 속담이 있듯이 욥은 이번 고난을 통하여 이날까지 믿음이 하나님께 대하여 듣는 자리에서 보는 자리로 한 층 더 올라서게 되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욥에게 왜 고난을 주셨나? 욥의 믿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하여 듣기만 하던 자리에서 보는 자리로 욥의 믿음을 한 증 더 높이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다. 이것이 욥에게 주신 고난의 뜻이다. 그러고 보니까 의인에게 주신 고난은 결과적으로 손해 보는 것이 없다.
 
왜 의인 욥이 고난을 당했는가?
그 뜻은 욥에 믿음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하여 듣기만 하던 자리에서 보는 자리로 한 층 더 높이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었다. 이것이 의인에게 주시는 고난의 뜻이다. 의인이 받는 고난은 우선 고난 같고 손해 같지만 결과적으로는 의인에게 복이 되는 고난이다. 그래서
 
*시편 119:75절에,
75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나를 괴롭게 하심은 성실하심 때문이니이다.
-시인은 자기가 고난을 당하면서 주의 심판은 의로우시고 주께서 괴롭게 하심은 성실함으로 말미암은 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다윗이 자기가 고난을 당할 때에 처음에는 몰랐지만 이것이 내게 손해요, 내게 고통인줄 알았는데, 결국은 보니 시인에게 주신 고난은 시인을 괴롭게 하고 시인에게 손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유익되게 하시는 성실하심 때문에 되었다는 것으 알게 되었다.
 
*이사야 38:17절에,
17 보옵소서 내게 큰 고통을 더하신 것은 내게 평안을 주려 하심이라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히스기야 왕이 병으로 앓고 있을 때에, 병 때문에 그가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래서 병이 나은 후 히스기야는 병이 나았다. 말했다. 히스기야 왕은 병으로 인해 내가 고난당하고 손해되는 줄 알았는데 결국은 보니까 내게 주신 것이 손해가 아니라 결과적으로 평안을 주시려고 병을 주셨다는 결과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의인에게 주시는 고난은 결과적으로 손해 되는 일이 없다.
 
오늘 하나님께서 왜 의인 욥에게 고난을 주셨는가? 그 까닭은 욥을 결과적으로 손해 되게 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욥의 믿음으로 하여금 듣기만 하는 자리에서 보는 자리로 한 층 더 높이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이 계신 것이다.
 
여러분,
의인이 당하는 고난은 결과적으로 손해가 되지 아니하고 결과적으로 의인에게 복이 되는 것이다. 우리도 욥처럼 고난을 당할 땡에 이것이 손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유익임을 알고, 의인의 받는 고난을 감사하게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요약
오늘 우리가 받은 말씀으로 욥처럼 고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의 뜻을 받아서 항상 결과적으로 손해가 되는 고통이 아님을 깨달아서 그 고난이 유익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아서 더욱 더 주님의 온전함을 향해 나아가며, 욥의 고난이 나에게도 한 층 더 믿음을 굳건하게 세우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항상 주님 앞에 겸손하게 무릎 꿇어 어떤 고난도 주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순종하여야 한다.
 
-욥은 매우 선한 사람이었다. 그는 뛰어나게 경건했으며 자기의 이웃 사람들보다 훨씬 훌륭했다. 그 사람은 순전하고 정직하여(1절). 이 말씀은 욥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 평가가 참됨을 확신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욥을 당신의 종이라 칭하시면서 그의 순전함과 의로움을 칭찬하셨다. 그러자 사탄이 욥의 신앙은 하나님의 물질적 복에 대한 기복적 신앙일 뿐이라고 공격하고 하나님의 허락을 받아 욥에게 고난을 주게 된다. 그의 믿음을 하나님을 더욱 강하게 하시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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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1년 8월 6일)
제목: ''두 번의 코로나, 그(He) 안의 온전함''
말씀: 시편 68:1,19
찬양인도: 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홍재훈 목사님,선교사님(중동A국, 로드마스터 대표)

마감암송인도: 오정현 담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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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68:1,19,
1 하나님이 일어나시니 원수들은 흩어지며 주를 미워하는 자들 주 앞에서 도망하리이다.
19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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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한국에 와서 이것저것 많이 하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상황이 규제와 제약으로 인해 잘 하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대면예배를 너무 드리고 싶었는데 아마도 다시 돌아가기 전까지 대면 예배를 드리기 어렵지 않을까 생각하게 된다. 어떤 가정과 교제하기 위해서 저희 남자팀, 여자팀, 저와 아들, 그 집에 남편 되는 사람과 아들, 그리고 저의 아내와 딸, 남녀가 분리되어서 약간 007작전을 하듯이 정부가 내리는 규제를 잘 지키면서 이곳에서 생활을 하고 있다. 참 많이 아쉽더라구요...이곳에 오면 자유롭게 예배하면서 하나님이 위로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새 힘을 받고 돌아가고 싶었는데 하지 못하는 상황이 많이 아쉽다.

 
제가 지내고 있는 곳은 코로나로 인해서 규제와 강화가 많고 유사점이 있는 그런 곳인 아라비아반도 석유부국 중에 한 곳이다. 그곳은 날씨가 매우 덥다. 한국도 덥지만 햇빛이 너무 세서 머리가 벗겨질 듯한 열사의 땅이다. 또 그곳을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한다. 그래도 그늘에 가면은 시원하지 않냐고 한다. 저희가 살고 있는 곳은 해안가를 따라 도시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여름에도 습도가 아주 곳이다. 그래서 여름이 되면 24시간 동안 에어컨을 켜두고 산다. 스스로 자발적인 격리를 하는 그러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또한 한국에서 보니 경제적으로 어려운 분들이 많듯이 제가 있는 지역도 석유 부국이다 보니 생활비용이 아주 비싸다. 그래서 일반 선교사님들에 비해 평균 비용보다 더 높이 필요하다.
저도 생존하기 위해서 그곳에서 여러 가지 일들을 지금까지 해왔다. 생존하기 위해서, 그 땅에서 뭔가를 하기 위해서는, 뭔가를 할 수밖에 없는 그러한 곳이다. 또한 그곳의 갔으면 청지기의 업무를 잘해야 한다. 지금도 여러 가지 하나님께서 주신 청지기 일들을 하는데 제약이 있는 것처럼 더운 날씨로 인해서 현지인들을 만나기가 참 어려운 곳이기도 한다.
 
또한 경제적 도덕적인 우월함으로 인해서 그들에게 다가가기에 참으로 많이 어려움 있고 열매가 없는 땅으로 많이 알려진 그곳에 있다. 지금 코로나 시대를 맞이하면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그곳도 그냥 이곳과 비슷한 곳이 아닐까를 생각을 해본다. 그런 곳에서 작년에 전 세계에 바이러스가 퍼졌다. 그곳에서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여러 가지 노력을 했다. 그러던 작년 성탄 이브 때에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선물을 받게 되었다. 성탄절 날 아부다비인 옆 도시로 제가 대면 예배를 드리러 갈 준비를 했다. 다른 도시로 이동시에 코로나 검사를 받게 된다. 그러나 24일 날 양성 판정을 받게 되었다. “하나님 너무 하시지 않나요?”라고 했다. 어떻게 예배를 드리러 가려는데 어떻게 이런 선물을 주시냐고 생각해 보았다. 그런데 그 결과를 받고나서 마음이 있기 전에 현재 일어난 일의 사건들을 수습하기에 급급했다. 바로 점심에 어떤 가정과 약속을 했는데 그 가정에게 저희 집에 오시지 말라고 알려야 했다. 코로나 양성을 받았다고 속히 알리고 싶었다. 그날 저녁에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사막에서 주님을 모르는 친구들을 초대하면서 그곳에서 사막 성탄 기념예배를 드리기로 준비하고 있었다. 사막에서 예배를 드리면 참 은혜가 되기도 한다. 우리 인생도 사막 같은 것이다. 그 사막에서 이정표가 하나 없는 방향의 감각이 전혀없는 사막 깊은 곳에서 주님을 찬양을 하다보면 우리의 인생길에서 주님만이 우리의 이정표 되심과 우리의 구원자 되심을 찬양하는 것이 너무 좋은 곳이다. 그곳에서 그 친구에게 예수님을 소개하며 나아가는 그런 부푼 마음이 있었는데 그것마저 이제 취소를 하고 격리에 들어갔다. 그 국가에서 주는 GPS시계를 차고 한 방에서 격리를 하게 되었다. 격리하는 동안에 가족들을 너무도 철저하게 격리를 시켰다. 방 밖으로 한 발자국도 못나가게 했다. 처음에는 대게 야속했다. 가족들에게 잠시만이라도 얼굴을 보겠다고 하니 절대 안 된다고 했다. 강력하게 FM대로 격리를 시켰다. 많이 아쉬웠지만 시간이 지나고 났을 때, 내 주면에 이렇게 철저하게 규칙을 잘 지키니 나도 그 정도를 잘 지켜서 그런 가족으로 인해 섭섭함도 있었지만, 참으로 감사했다. 격리하는 기간에 방안에 있어서 제가 얼마나 아픈지, 세상과 소통할 수 없는 그러한 상황에 있었다. 그래도 감사하게도 그리 많이 아프지 않고 한 3-4일 고열을 지나고 버티니까 다시 회복되는 그러한 은혜를 받게 되었다. 격리하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께 기도했다. 왜 이런 일을 허락하셨냐고,,,, 예배를 드리고 가고 싶었는데 혹시 제가 부족하여서 인지를 하나님께 질문했다. ‘성결하지 못해서 그러신지, 예배에 나아가는 그 자리를 하나님께서 막으셨는지요?’ 아니면 지난날을 돌아보고 부족한 것이 있는지를 질문했고 이 시간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자 하는 그런 것이 있는지와 처음에는 각성과 회개의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러면서 좀 여유가 생기니까, 내가 어디시 감염이 되었는가가 궁금해졌다. 몇 가지 의심의 장소가 있었다. 그 때 그 친구들과 그 장소들이 생각이 났지만 그 생각을 접기로 했다. 왜냐하면 제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괜히 알면 원망이 생길 것 같아서였다. 아량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차라리 모르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말에 가족들이 함께 격리를 하며 연말과 연 초를 망쳐버린 것 같은 그러한 죄책감이 있고, 양성 판결을 받은 이후에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에게 연락하면서, 특별히 하나님을 모르는 가정과 교제하면서 정말 즐거운 교제를 했는데 그 가정 가운데 너무 죄송하다고 말을 했다. 혹시 저로 인해서 바이러스가 감염되었을지 모르니 조심을 하라고 이야기를 해주었다. 검사를 해보도록 했다.
 
주님께서 오신 그 계절 가운데 그 땅에서 예수님을 선포하며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며 잘 지내고 싶었는데 저의 계획과 다른 하나님의 또 다른 계획으로 그 시절을 보내게 하셨다. 그 시절 가운데 갖는 마음이 그렇다. 그 시간을 보내고 있는 때에 막 회개를 했다. 회복이 된다면, 이제 자유의 몸이 되어서 격리가 풀리면 이제 다시 이웃들을 만나고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그러한 시간들이 허락되어 진다면 ‘이제는 이렇게 살게요, 남은 인생을 이렇게 살게요.’ 라는 그런 청지기의 삶의 대한 그런 계획들이었다. 마치 예수님이 이 땅 가운데에 오셔서 음부에 권세 아래 있을 때, 제자들이 흩어졌다. 주님의 부재, 우리는 더 이상 어리로 가야할 될지 모르는 우리의 이정표인 지도자가 없음으로 인하여 흩어졌던 제자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을 때, ‘주님,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살아날게요. 다시 살아난다면, 다시 저에게 자유가 허락 되어 진다면 그러한 마음을 다잡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격리가 풀렸다.
 
그리고 그렇게 살려고 노력을 했다. 그동안 못 만났던 친구들에게 연락을 했다. 연락을 못해서 미안하다고 했다. 사실 내가 코로나에 걸렸다고 알리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세상 가운데 코로나, 코로나, 해서 걱정들이 많은데 하나님과 동행하면 잘 넘어갈 것 같은데, 괜한 걱정을 세상 가운데 더하고 싶지 않아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담담하게 넘어가기 위해서 그냥 지냈다. 그리고 나서 이야기 했더니 나 코로나 걸렸다고 했다. 몇 명 친구들도 이야기를 했다. 자신들도 코로나에 걸렸었다고... 너도 나도 코로나에 걸렸다고 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죄인들의 모임인 듯, 컴잉 아웃, 코로나 양성을 경험했던 집단체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면서 그 죄인들이 서로 서로 나눈다. 이웃들에게 미안하지 않았냐고 서로 나누었다. 그냥 잘 살았는데 ‘내가 의도하지 않게 내가 죄인이더라.’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그런 부족한 사람인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냥 죄인이더라,,,, 성경에서 말하는 그 죄인이었다고 말했다. 그 죄인이라는 것에 묵상을 하는 그러한 시간을 갖었다고 이야기 했다. 내 이웃에게 얼마만큼 범죄를 했는지, 그것조차 알지 못하는 부끄러운 사람이었지만, 예수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는 하나님을 붙들고 그 시간을 버티려고 했다고 말했다. 매일 하나님 앞에 나아가면, 주님이 주시는 그 평안, 그 평안 속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시간을 가지려고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에게 주신 여러 가지 생각들, 그리고 이 땅 가운데 우리에게 주신 선물들, 우리는 세상에 있는 것, 유형의 가치들에 따라가 살아가는데, 그것이 아닌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십자가의 비밀과 그 무한하신 은혜와 사랑이 얼마나 중요한와 주님께서 주신 무형의 가치들을 묵상하며 지낸 삶을 살았기에 그래서 나는 이제부터 이렇게 살려고 한다고 그 집단 체 안에서 복음을 마음껏 나누는 복음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그러한 시간들을 주님께서 허락해 주셨다.
 
여러분, 세계 각지의 선교사님들이 코로나로 인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별히 경제적인 어려움이 외부적인 어려움보다 가장 크다. 가장 큰 어려움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하는데 그것을 잘 전해지지 못하는 그러한 제한된 제약된 환경인 것 같다. 저 또한 그것을 피해갈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코로나가 막 창궐하고 나서 어떻게 살아가야 될지, 또 대면 만남이 위축된 상황들 가운데서 여러 가지로 위축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에 저에게 주신 선물이 있었다. 코로나 시간들이 다 지나고 났을 때, 그 이후에 마치 하나님은 그 코로나에 걸린 사람의 깊은 마음을 아주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그 사람이 되니까, 이 시대에 맞는 그러한 사역으로 전환을 시켜 주셨다.
 
그래서 현지인들의 만남, 그리고 그 땅 가운데 디아스포라로 와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는 저임금 노동자, 그 친구들과의 사역들, 그리고 소명을 가지고 소명을 가지고 한인 디아스포라, 그 모든 사람들과 함께 어떻게 잘 지내면 좋을지, 이 코로나 시대에 맞는 사역으로 하나님께서 다 전환을 시켜 주셨다. 너무도 감사했다. 이 시기에는 마치 부재의 기간, 공백의 기간, 아무것도 못하는 그러한 시간 같은데 신실하신 주님은 쉬지 않고 일하시고 계심을 깨닫게 되었다.
 
주님은 일하시고 계신다. 작은 등 가운데 그 빛이 비추어져서 그 빛을 통하여 우리들 가운데 계속해서 부르시고 일하시고 나아가시는 주님, 그 주님을 경험하게 되었다. 사실 지난 상반기 동안 개인적으로 너무 감사했다. 주님이 이끌어주시는 그대로 그냥 따라가면서 그 선상에서 만나는 친구들과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며 너무도 감사했다. 사실 오늘 말씀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을 허락받으면서 그것을 나누고 싶었다. ‘여러분, 이 어려운 시기에도 하나님이 이렇게 일했다’고 나누고 싶었다. 이런 방법으로 그 땅에서 일하고 계심을 나누고 싶었다. 오늘은 그렇게 하지 못할 것 같다. 오늘은 저의 좀 부끄러운 모습들을 많이 나누게 될 것 같다. 그런 상반기 시간이 지나고 나서 제가 이 여름에 한국에 올 일정이 있었다. 그것은 중동에 떠나기 이전에 중동 학을 공부를 했었다. 하나님께 중동에 대해서 제가 더 알고 싶다고 기도했다. 가기 전에 그 땅을 위해서 계속 공부를 했다. 그리고 박사 과정을 다 마쳤다. 수료를 마치고 그 땅으로 갔다. 작년에 메일 한 통을 받았다. 당신이 수료한 지 10년이 되었는데, 어떻게 하기를 원하냐고 했다. 논문을 안 쓰면 끝나는데 어떻게 하겠냐고 메일이 왔다. 코로나 시기이니 시간이 많겠거니 하고 한다고 했다. 혹시 온라인으로 가능하냐고 했다. 논문지도를 받기로 하고 시작을 했다. 너무도 감사한 것은 그곳에서 있었던 그 사역들을 잘 정리할 수 있었던 그러한 시간이 되었다. 그동안 사역을 하면서 개인적으로 감으로 익혔던 것이 있다. 이 친구들과 동거동락 하면서 지낸 것 등과 그렇게 규정했던 것들이 있는데, 다시 한 번 사회과학적인 접근을 통해서 주님이 이것이 맞는지에 점검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친구들에게 어떻게 다가가는 것이 좋은지를 연구하는 그러한 사간을 갖게 되었다. 1차, 2차, 논문 디펜스를 온라인으로 마쳤다. 마지막에는 최종 심사에는 꼭 오프라인으로 하게 되니 오라고 했다. 그래서 그 일정에 마쳐서 한국에 오게 되었다. 제가 살고 있는 지역도 한국보다 조금 더 신규 확진 자가 매일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여러 가지 규제가 일어나고 학교도 온라인 오프라인을 계속 번갈아 가면서 지내고 있었다. 그래서 이왕 온라인 수업을 하는데, 한국에 올 때, 저희 아이들도 같이 오면 어떨지를 계획을 세웠다. 이번 여름에 하나님게 이렇게 지내고 싶다고 기도하고 간구했다. 그런 기회가 되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이곳에 오는 여정에 출발 선상에 서 있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오기 바로 오기 직전에 저희 아들이 갑자기 고열이 되었다. 아들이 고열이 심했다. 그때 코로나인가를 의심을 하게 되었다. 저희 아들이 고열이 일어나기 전에 친구네 집에 이틀 연속 방문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만약에 그곳이 가장 유력한 곳이라고 생각을 하고 그 친구 집에 이야기를 했다. 아들이 고열이어서 코로나일지를 모르는데 내일 검사를 하게 되었다고 그 친구들에게 조심하면 좋겠다고 알려주었다. 그런데, 황당한 답변이 왔다. 그 아들 친구 어머니가 그러냐고 하면서 그런데 코로나 이미 걸려서 격리 중이라고 했다. 코로나 걸린 지 일주일 정도가 되었다고 했다. 아들이 그 집을 방문을 했을 때, 방에서 격리 중이었다. 아들이 거기에 가는 것, 오늘 것, 몇 시에 올것인가를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때 아무런 이야기를 해주시지 않았다. 그리고 이틀이나 방문을 했는데,,, ‘나 사실 코로나 이미 걸려서 격리 중이었다’고 하는 것이 너무도 황당했다. 자신의 아들을 아직 검사를 못했다고 했다. 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우리 아들은 양성으로 나왔다. 그런 마음 가운데 분노가 차올라왔다. 사춘기 딸도 어마하게 분노를 하면서 마음에 안 든다고 했다. 막 화가 났다. 그러면 안 되어서 누르면서 괜찮아~!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루아침에 마음 가운데 증오 범죄자가 혐오 범죄자가 된 것을 느꼈다.
그 땅 가운데서 아랍 사람들을 특성들을 잘 알았다. 아랍의 문화를 잘 알았다. 이웃들이 그렇게 대했을 때, ‘이렇게 대할 수밖에 없어’라는 생각도 있지만,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아랍 사람들에 대한 증오가 막 일어났다. 주님께 ‘저도 한 순간이군요!’ 하는 것을 깨달았다. 중동을 가기 십년 전부터 중동을 위해서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리고 중동 사람들을 만나고, 지적인 것과 실질적인 것을 열심히 준비하면서 그 땅을 가기 위해서 준비했다.
 
여러분도 잘 아시는 것처럼 911 테러가 일어난 이후 그리고 나서 우리나라, 전 세계적으로 이슬람, 중동 땅에 갑자기 관심을 많이 갖기 시작을 했다가. 우리가 중동에 땅에 그냥 관심을 가졌던 것이 아니라 어떠한 계기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런데 모두 부정적이었다. 마치 우리를 위협하는 것 같은 그러한 그곳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보니 그곳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얻는 모든 정보들은 혹시 그 라가 우리를 해하지 않을까라는 그러한 관점으로 그들을 바라보게 되었다. 저도 공부하면 할수록 그들 가운데 무서운 일들이 참 많았다. 그러면서 제 안에 그들을 잘 알려고 공부했는데 그들이 더 무서워졌다. 그들 가운데 가까이 가지 못하게 하는 제 마음에 장벽들이 세워지는 것을 너무 느꼈다. 그 이후로 이슬람, 중동 관련 강의를 할 때마다 열심히 토로했다. ‘여러분, 이런 계기로 중동의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이런 높은 장벽을 우리 스스로 세우기 시작했으니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선교적인 마음으로 나아갈 때, 이 장벽이 얼마나 그들 가운데 다가가지 못하는 것을 스스로 깨닫는다‘고 하면서 그곳의 장벽을 허물어야 한다고 열변하고 다녔다.
 
그렇게 다녔는데 어떠한 사건, 작은 사건으로 인해서 제 마음에 그 장벽을 세우고 있었던 제 자신을 보게 되었다. 하나님 앞에 ‘제가 그런 사람이었군요!’ 하면서,,, 그런데 그것으로 인해서 온전하지 못한 것이 확 드러나게 되었다. 그런데 아들은 대게 담담했다. 코로나를 걸린 이후에 저희 가족이 다 코로나를 번갈아 걸렸다. 코로나를 걸려보니 회복되는 시기를 감 잡게 되었는데, 버티면 회복됨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아내는 계속 낫지를 않았다. 그런 상황이 벌어졌다. 그래서 힘들고 어려움 가운데 그 집을 향한 미워하는 마음이 계속해서 툭툭 나왔다. 그런데 저희 아들은 아주 담담했다. 그 친구랑 놀기를 원했다.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을 주님을 생각했다. 그래서 한국에 나오지 못했다. 그리고 그 친구랑 놀기를 원했다. 온전함의 고봉에 오른 저희 아들을 보았다. 주님께서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를 깨닫게 되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았던 마음을 갖지 못했음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가족들이 양성으로 판정을 받으면서 한국에 오지 못하게 되었다. 후에 가족들이 감사하게도 계속 검사 가운데 음성 판정으로 나왔다. 코로나 느낌이 있는데도 음성 판결이 나왔다. 다행히도 마지막 검사에서 음성이 나오자 감사하게 한국에 오게 되었다.
 
그런데 도착을 하고나서 다시 양성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다. 제가 세워두었던 모든 계획들, 어떻게 보면 한 가정으로 인해서 뒤죽박죽 된 느낌이 들었다. 항공권도 바꾸어야 하고 특히 저렴한 비행키 티켓을 바꾸기가 너무 힘들었다. 마음속에 어려움이 왔다. 또 계속해서 격리 장소를 찾아야 하는데 머무를 곳을 찾았다. 정하기가 힘들었다. 아쉬운 부탁을 하는 것 같아서 너무 힘들었다. 이전에 하나님께서 다 마련해 주셔서 오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 아닌 이제는 누구 때문에 그것이 무너진 것 같으니까 새로운 계획이 일어날 때마다 그 집, 그들이 원망스러웠다.
 
이곳에서 양성 판정을 받고 계속해서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다. 그런데 사랑의교회 예배를 드리면서 온전함 시리즈, 매주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으로 위로를 하셨다. 저의 부족함이 드러났지만 매주 위로의 시간이었다. 9년 전 마지막 설교했던 것과 함께 교제 했던 지체들과 마지막 설교를 하면서 이야기 한 찬양했던 것처럼,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냥 작은 제자로 살아가고 싶은데 중동에서 한 번 살아가려고 한다고 하고 지금보다 예수님 닮은 모습으로 여러분과 만났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 땅 가운데서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그 십자가를 지고 살아갔을 때, 제가 조금 더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있을 거라고 그런 설교를 하고 제가 떠났다. 갑자기 그게 생각이 났다. 그게 너무 부끄러웠다. 그렇지 못한 나, 제자들을 만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코로나 백신을 두 번 맞았다. 그리고 나서 한 달이 충분이 지났다. 그런데 또 걸렸다. 그 사실을 제가 아는 현지에 있는 지인분이며 사랑의교회 집사님께 이야기 했다. 그분이 모 병원에 연락을 해 주셨다. 그랬더니 그런 케이스가 좋다면서 그 병원 의사가 바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병원으로 갈 수 있는 권유를 받게 되었다. 목사님은 어차피 격리 치료를 받아야 하니 그렇다면 그 병원가면 잘 진려해 줄 것이라고 했다. 몇 번 피를 뽑으면 된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기뻤다. 어차피 격리할 것인데 연구 샘플이 되기로 했다. 그 병원으로 이송이 되었다. 이틀에 한 번씩 열심히 피를 뽑았다. 그 채혈하면서 처음에 이런 말을 했다. 간호사가 피를 뽑으면서 손이 무디다고 하면서 이해를 원했다. 그리고 나서 연구 동의서 같은 것을 작성하게 되었다. 피를 뽑고 이것을 얼마만큼 보관할지, 이러한 것들의 동의서였다. 작성하고 나서 설명할 때에 연구에 동참을 해서 소정의 30만원을 드린다고 했다.
 
힘든데 돈을 준다는 생각에 마음이 녹아지는 제 마음이 보였다. 여러 가지 일을 생각하게 되었다. 마음껏 피를 뽑으라고 했다. 피를 뽑자마자 실수하기도 했다고 더 피를 더 뽑아야 한다고 하면서 여러 번 뽑았다. 그 시간을 잘 지냈다. 여러 가지 일들이 많았는데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을 시켜 주셨다. 오기 전에 격리 중에 어려운 시간들이 있었다. 그러면서 그 어려움 가운데 마음 속에 불평이 있었어도 불만을 보지 않자고 하면서 그것을 보지 않고 무언가를 덮고 있고 누르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셨다. 사실 그곳 병원에서 일들이 있었는데, 일정 시간보다 회복되어서 속히 나올 수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 기쁘게 ‘오늘 퇴원할 것’이라고 했다. 너무 기뻤다. 그런데 하나님, 어디로 나가야 할지를 생각했다. 그런데 속히 나오다 보니 갈 곳이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너무도 감사하게도 오정현 담임 목사님께서 제가 갈 장소를 마련해 주셨다. 어떤 한 권사님이 병원에 입원했던 소식을 듣고 그것 때문인지, 쉴 수 있는 곳을 제공해 주셨다. 대게 큰 사랑을 받은 것 같은데 좀 부담스럽기도 했다. 너무 감사했다. 마치 자격 없는 자에게 부어주시는 그 하나님의 은혜, 그 넉넉함이 계속해서 부어졌다. 그때서야 조금 제가 은혜 속에 충만하게 거하니까 이전에 미워했던 그 친구들에게 그들을 용서하고 이해하게 되었다. 은혜의 폭포가 충만하게 내려갔을 때, 그 시간을 겪으면서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있었다. 한국에 와서 금요일에 설교를 하러 가는데 차를 몰고 가는데, 차가 막혀서 좀 늦었다. 마음이 좀 분주했다. 운전을 하다가 꺼어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빨리 가려고 하는 제 자신을 보게 되었다. 그런데 도착해서 깨달았다. 말씀을 전하러 갔다. 성령 충만하여 기쁜 마음을 창밖에 한국의 땅을 보면서 수많은 인파들을 보면서 주님 저들은 일을 마치고 ‘하나님의 청지기의 삶을 살았겠지요’ 하는 위로를 하면서 넉넉한 마음으로 운전하며 가야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지난 상반기 사역을 돌아보면서 너무 감사하게 잘 갔다. 그런데 잘만 갔지, 전심으로 그들을 사랑하지 못했던 것을 저에게 보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 코로나를 통해서 저에게 말씀하셨다. 경험한 코로나를 다시 한 번 경험하면 잘 할 줄 알았는데, 두 번째 코로나 때에 다시 깨닫게 하셨다. 그들은 전심으로 사랑하고 있냐고 하나님은 나를 더욱 깨닫게 하셨다. 하나님께서 저를 온전케 하시려는 그 메시지를 계속해서 부어주셨다. 그러나 그들을 사랑하지 못한 것에 회개했다. 사용만 잘하면 뭐하니,?? 전심으로 사랑해야 하는데 온전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메시지를 주셨다.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식을 들은 분들이 참 많이 걱정을 해주셨다. 자주 소식을 주시고 위로를 해주셨다. 두 번째 코로나였을 때는 육신은 너무도 건강했다. 피만 뽑을 뿐 건강했다. 크게 아픈 줄 알고 사랑해 주셨던 분들게 너무 죄송함이 있었다. 거짓말이 아닌가하는 죄송함이 있었다. 그러면서 저에게 주시는 몇 가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있었다. 너를 불쌍히 여겨서 그 땅에 관심을 일으킨 하나님, 그것을 경험하게 하게 되었다. 특별히 하반기에 뭔가를 준비해 가시는데 그 하반기를 위해서 힘을 실어주기 위한 그 땅을 온전케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들을 보게 되었다. 한 가지 놀라운 것이 있다. 지난 라마단 기간 동안에 서구 선교사님들에게 강의하는 일이 있게 되었다. 서구 선배 선교사들에게 강의하게 되었음에 너무 감사했다. 동양의 작은 사람에게 한 달 동안 강의하게 해주었기에 너무도 감사했다. 마치 그곳에서 지내온 나날들을 위로하시는 것 같았다. 위로와 격려를 듣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그곳에서 하나님이 일하셨던 그것을 나누고 하나님이 주신 노하우를 열심히 나누었다. 마지막 날 삼십 년 되신 미국 선교사님이 저에게 이런 질문을 하셨다. ‘너는 코로나 이전, 이후의 어떻게 현지인들과 정기모임을 할 수 있냐’고 하는 질문을 하셨다. 본인은 삼십년간 선교사로 있으면서 한 번도 그렇게 한 적이 없는데, 너는 어떻게 라는 질문이었다. 제가 사실은 노하우가 좀 있었다. 나름 동양인으로, 한국인으로 어떻게 접근하는지와 편하게 나누는 방법 등을 알게 되었다. 거절 받더라도 여러 가지 행함을 해야 하는 것에 대해서와 가장 중요한 것으로 선배님들의 기도라고 이야기 했다. 그 기도를 통해서 이런 선상에 있다고 고백을 했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 어떠하겠는가? 마치 예의상 한 것 같았다. 그분도 그러셨는지, 다시 되물으셨다. ‘너는 그것이 이전 선배들의 기도인 것을 어떻게 아느냐’고 했다.
 
초창기 때에 그곳에 가서 선물과 같은 영혼이 있다. 그 친구는 현지인이다. 그곳 친구는 한국 사람을 만나서 한국 이름을 받았다는 것이며, 그 이름은 ‘은혜’라고 했다. 그 한국인이 기독교인지 아닌지는 저도 모른다. 그리고 제가 만난 그 친구는 여전히 무슬림이다. 그 친구와 저는 특별한 인연을 갖게 되고 계속해서 섬기면서 저의 딸로 삼고 싶다고 했다. 저의 성을 주면서 ‘홍은혜’가 되었다. 그 때 많이 느꼈다. 선교의 역사, 아라비아 땅 가운데 지금 열매가 없음에 너무 많이 들었다. 그런데 그곳에 가서 사역을 하는데,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곳은 마치 코로나로 인해서 격리한 것 같은 부지한 것 같은 공백된 것 같은 그러한 곳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께서 놀라운 일들을 행하고 계셨다. 현지인들을 물이 일 듯 보내주시고 그들과 계속해서 모임을 하면서 날마다 복음을 쪼개서 전하게 되었다. 복음을 마음껏 전할 수 있었다. 너무도 감사했다. 그 때 느꼈던 것이 있었다. 이 친구에게 은혜라는 이름을 주었는데, 내 역랑을 아는데, 그것보다 더 어마한 은혜 가운데 사역을 하고 있었다.
 
내가 잘 해서가 아니라, 누군가 기도하고 이 맨 땅에 해딩을 하였기에 지금 하나님이 계속해서 일하시다가 성령의 바람을 불고 계신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 선배 선교사님에게 말씀을 드린 것이다. 그것을 제가 잘 알고 있다. 지금 코로나 이전 이후도 계속해서 복음을 쪼개서 나누어주고 있다. 그들이 회심하는 그런 열매를 보고 싶다. 그러나 회심을 안 봐도 좋다. 그 복음을 열심히 쪼개어 나누어 주는 것만으로도 너무너무 만족한다. 그런데 혹시 이후에 오는 또 다른 믿음의 사람이 ‘이곳에서 예수님을 마치 믿어요’라는 말도 하기 전에 ‘저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라는 그 선포, 그 고백 하나만으로 현지인들에게 그들에게 가서 ‘저를 양육해 주시오’ ‘저를 세례를 부어 주세요’ 라는 그런 일들이 일어날 것 같은 그런 소망을 저에게 하나님이 주셨다.
 
내가 이 땅 가운데서 하는 것은 보내주신 영혼들 가운데 외치는 자의 소리로 전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마치 격리의 시간 같지만, 규제와 강화가 많은 이 땅 같지만, 하나님은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느끼게 되었다.
 
여러분, 이 땅 가운데서 어렵지 않는가? 힘들지 않는가? 현실의 장벽이 너무도 높아 보이지 않는가? 교회가 답이 아닌 것 같은 그런 청년들을 보게 된다. “목사님, 목사님, 교회가 답이 됩니까?” 라고 절말 떠나가고 싶다고 이야기들을 해주어도 마음으로 그게 안 된다고 말한다. 힘들다고 말하고 있다. 저도 그랬다. 정답 같은 것은 아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런데 하나님이 정말 매주 한 마디, 한 발짝씩만 하나님은 주셨다. 그래서 그 친구에게 이야기 해주었다. 그 거대한 장벽을 우리가 무너뜨릴 수는 없지만 그 한 발짝 한 발짝 갈 수 있는 그 은혜만 구하지고 했다.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이 일어나시매, 하나님의 계획과 뜻을 가지고 일어나실 때, 하나님이 원수들을 흩으시고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주 앞에서 도망하게 만드신다고 말씀하신다.
 
*시편 68:19절에,
19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곧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셀라).
-날마다 우리 짐을 지시는 주, 이 장벽을 완전 무너뜨리시는 것이 아니라 오늘 힘듦을 이길 수 있는 그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고 나아가야 한다고 나눔을 가졌다.
 
성도 여러분,
매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짐을 지시는 경험을 하길 원한다. 그 하나님으로 인하여 온전함의 고봉을 한 발짝씩을 걸을 수 있는 은혜의 폭포수 가운데 충만하게 젖는 여러분이 되길 원한다.
 
기도제목이 있다. 하반기 중동 아라비아반도 GCC 5개국에 책을 발행하게 되엇다. 그 책에는 예수님이라는 말이 없다. 그러나 에스더 성경처럼 그 책을 통하여 이 사막에서 참 삶의 인도자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예수님의 향내가 나는 그러한 서적이 되길 원하는 마음으로 그런 출판 준비를 앞두고 있다. 그 책이 그 땅에서 잘 쓰여 질 수 있도록 그리고 그 책을 통해 보내 주신 영혼들과 잘 연결되었을 때, 저희가 그 영혼들에게 날마다 복음을 쪼개서 힘든 짐을 잘 짊어지고 예수님께로 인도하는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도록, 가정이 온전해 질 수 있도록 그리고 그 땅이 온전해 질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길 간절히 원한다.
 
 
♣요약
주님 안에서 온전함이 되길 더욱 소원하고 간구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음부의 권세 아래 우리를 온전케 하기 위해 우리의 죄를 사하시는 그 놀라운 일을 하셨는데, 우리는 하나님의 부재를 여기며, 실망하고 낙담하여 떠나갔던 우리가 되었음을 고백하고 회개해야 한다. 우리들을 사랑하여 주시길 기도하고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우리가 짊어질 십자가를 져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그런 온전함의 여정 길 가운데 매일 주님과 동행하여 살아가야 한다. 우리가 서 있는 삶의 현장 가운데 주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그 땅을 온전케 하는 기도와 돕는 선교가 되어서 작은 예수로 살아야 한다.
 
-다윗은 하나님을, 세상에서 환난과 고통을 당하는 당신의 백성을 간과하지 않으시고 세심하게 돌보아 주시는 ‘우리의 구원이신 하나님’으로 찬양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일순간도 잊지 않으시고 필요에 따라 채우시며 영원한 사랑과 구원을 공급해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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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2021년 8월 4일)
제목: "왜 주님은 나병을 만지셨는가?"
말씀: 마가복음 1:40~45
설교자: 윤현수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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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가복음 1:40~45,
40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42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43 곧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44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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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시절 미술 시간에 있었던 이야기이다. 정물화를 그리는 날이었다. 해바라기를 그리고 있얶는데그림에 문제를 발견하게 되었다. 실제 해바라기 꽃은 매우 밝은 꽃인데 이 그림의 꽃잎은 어둡고 칙칙했다. 마침 옆을 지나가시던 미술 선생님께서 상황을 말씀드렸다. 선생님은 붓으로 암술머리와 꽃잎 주변 배경을 어두운 색으로 덧칠을 하셨다. 그러자 그림에 해바라기 꽃잎이 환하게 밝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때 예술가의 회화기법과 선생님의 솜씨에 놀랐다. 틀렸고 망쳐버린 것 같은 작품도 선생님 같은 예술가가 덧칠하시면 좋은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혹 지금까지 그려온 내 인생의 그림이 엉망이라 할지라도 만약 위대한 미술가가 붓을 잡고 내 인생의 그림에 덧칠을 하신다면 분명 명작으로 변화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절망적인 인생 그림을 들고 나아온 나병환자가 있고, 천지를 지으신 예수님이 계시는데 이 두 사람이 만났다. 나병환자는 내가 내 마음대로 열심히 그려왔으나, 탄식어린 인생의 그림을 그려온 우리들의 자화상 같다. 그를 주님이 손을 대어 내밀어 고쳐주신다. 이 말씀 속에 담긴 진리를 해석해 나가면서 주님께서 우리의 인생 그림도 새롭게 변화주시는 은혜가 가득차길 소원한다.
 
오늘 본문 40절을 보자.
*마가복음 1:40,
40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우선 우리말 성경에서 나병이라고 번역된 이 질병은 히브리어로 ‘짜라트’ 헬라어로 ‘에투라’라고 하는 단어이다. 오늘날의 질병인 한센병과 유사해 보이는 부분도 있지만 정확히 같은 질병은 아니다. 그러므로 현대의 관점이 아니라 성경시대에 그리고 성경 자체적으로 어떤 질병이었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나병은 성경에서 중요한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 번째, 나병환자는 살아있는 시체와 같다. 민수기 12장에 보면 미디암이 하나님의 종, 모세를 비방하자 나병에 걸렸는데 살이 반이나 썩어 모태로부터 죽어서 나온 자 같다라고 말한다. 나병에 걸리면 살이 썩어간다는 것, 죽어서 나온 자, 즉 송장과 같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나병환자를 살아있는 송장과 같이 여겼다. 나병은 죄와 관련이 있다. 죄와 같다. 민수기 12장에 미디암이 나병에 걸린 것은 하나님의 종을 비방한 죄 때문이었고, 역대하 26장에 보면, 웃시아왕이 이마에 나병이 걸린 사건이 나오는데 이 때 웃시아도 율법을 어기고 성전에서 향로를 들고 분향하다가 나병에 걸렸다. 두 사람 다 죄를 짓자 나병에 걸렸다. 나병환자는 부정한 자이기에 이스라엘 진영에서 추방되어야 했다. 부정함이란 무엇인가? 성경에는 정결법이라고 하여 하나님 앞에 나아길 수 있는 상태와 관련하여 간단히 세 가지 구분이 있다.
❶거룩 -하나님께 속한 것, 하나님께 바쳐진 것.- 거룩한 것만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다. 성별된 것, 온전히 바쳐진 것, 오직 하나님만을 위하여 사용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담임 목사님을 통하여 ‘온전함을 사모합니다’를 통해 우리에게 큰 은혜를 베풀어주셨는데, 바로 이 온전함이 거룩함의 속성이요 거룩함의 비결이다. 우리는 모두 온전함을 사모하고 그 온전함의 고봉에 힘써 전력투구 하여 올라감으로써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항상 나아가서 충만한 생명을 누리길 간절히 간구한다.
 
거룩함 외에 부정함이란 상태가 있다.
❷부정함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는 상태, 이스라엘에서 부정한 자는 추방되게 된다. 이스라엘 진영 광야, 부정의 장소로 부정한 자는 추방된다. 이 거룩함과 부정함의 중간 상태의 정결함이란 상태가 있다.
 
③정결함 –거룩함과 부정함의 중간 상태인 거룩해질 수도 부정해질 수도 있는 그러한 상태이다.
 
이 세 가지 상태에서 부정은 전염성이 있기 때문에 정결한 사람이 부정한 사람과 접촉하면 정결한 사람이 부정해진다. 그리고 부정한 것과 거룩한 것은 절대로 접촉해서는 안 되는 상태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정한 하나님의 성소와 이스라엘의 진영을 더럽히지 않기 위해 진영 밖으로 추방되어야 했다.
오늘 본문의 나병환자는 레위기 13장과 14장에서 규정하는 대표적인 부정한 자이다. 그래서 나병에 걸리면 이스라엘 진영에서 추방되고 광야에 머물러야 했다.
 
*레위기 13:45~46절에,
45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46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여러분은 하나님의 관계의 측면에서 이 가운데에 어떤 상태에 있는가? 자녀들은 어떤 상태인가? 성경에 따르면 특별히 택하셔서 정결하게 하시고 거룩하게 성별하게 하지 않는 한 모든 인류는 원칙적으로 부정한 상태에 있다.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정결하게 되고 거룩하게 되는 길을 발견하고 그 길로 나아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전 생애를 통해 그 어떤 문제보다도 중요하고 절박한 문제이다. 오늘 본문도 바로 그 문제를 다루는 것이다. 나병의 중요한 특성의 또 한 가지는 나병은 인간의 힘으로 고칠 수 없다.
 
아람 왕이 아람나라에 대장군 나아만의 나병을 고쳐달라고 이스라엘 왕에게 편지를 보내자 이스라엘 왕이 ‘내가 하나님이 관대 나병을 고칠 수 있겠는가“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필시 이것을 핑계 삼아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는 이야기에서 볼 때, 성경에서도 나병은 오직 하나님만이 고칠 수 있는 질병이며, 인간의 힘으로 고칠 수 없는 병임을 알 수 있다. 레위기에 나오는 나병에 관한 그 긴 유래는 나병을 진단하고 정결해진 나병환자를 다시 진영에 복귀시키는 절차만 규정되어 있지 나병을 고치는 방법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나병환자는 사실상 부정하다는 선언을 받게 되면 언약에서 끊어지는 것을 의미했고 영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사형선고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나병의 특성을 생각해보면 어떤 생각이 드는가? 살아있으나 시체와 같고, 죄의 결과로 발생하였고,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에서 추방되고 사람의 능력으로 고칠 수 없는 나병환자의 모습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과 너무 유사하다. 나병환자는 아담이 범죄 하여 하나님의 낙원에서 추방된 모습을 보여주는 마치 시청각 교재와 같다. 그러므로 나병환자는 구원받기 전애 범죄 한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다. 모든 인류는 죽어가고 있고, 썩어가고 있으며, 하나님의 복과 임재로부터 추방되어 있고, 이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오늘 본문에 나병환자가 우리의 올림픽 국가대표 선수와 같아 보인다. 우리를 대표하여 예수님과 시합하려고 경기장에 오르고 있고 성경저자가 우리에게 그것을 녹화 중계방송을 해주고 있다. 나병환자가 예수님과 경기장에 올라서 어떻게 자신의 문제를 해결 받는지 우리 대표선수로서 그 이기는 장면을 확인하면 우리도 길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본문의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왔다. 40절에 예수님께 와서 이야기를 한다. 정말 주소를 잘 찾아왔다.
 
*마가복음 1:8절에,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성령님은 거룩한 영으로 세례를 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신다. 거룩한 영으로 세례를 받으면 모든 병이 씻겨나갈 것이다. 참으로 나병환자는 주소를 잘 찾아왔다. 나병환자는 결사적인 각오로 예수님께 찾아왔다.

*레위기 13:45~46절에,
45 나병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46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영 밖에서 살지니라.
-나병환자는 자신이 알리기 위해 부정하다고 외쳐야했고 진영밖에 혼자 살아야 했는데 이런 모든 규레를 다 버리고 예수님께 고침 받기위해 주님 앞에 나아왔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결사적인 각오로, 주님 앞에 치료받기 위해 왔다. 그리고 나병환자는 오늘 본문에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라고 말하고 있다. 마음을 쏟아 예의를 갖추고 주님 앞에 진지함과 겸손과 경배의 자세로 나와 있다. 그리고 나병환자는 ‘주님은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믿음으로 나아왔다. 나병환자와 같은 우리들, 큰 고통과 고난의 터널을 통과하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아마 이 수여저녁기도회를 듣는 성도님들은 예수님께 나아가는 길이 생명이 길이라는 것을 다 알 것이다. 교구 다락방 순원들 심방을 하면, 다락방에서 예수님께 나가는 길에 거부하겠다는 성도는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렇지만 주님 앞에 나오면서 이 나병환자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죽음의 결사적인 자세가 있는지는 우리 스스로 물어야 한다. 진실 된 겸손의 자세가 주님 앞에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그리고 믿음이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성도님들이 욥과 같은 길, 광풍이 일어나는 바다를 건너는 순간의 위태한 분들과 가족, 그리고 친척이 분명히 정상적이지 않는 고통을 겪고 있는 성도들을 만난다. 오늘 나병환자의 모습에서 우리가 반드시 가져야 할 자세가 나타나있다.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주님은 분명히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이러한 결사적인 자세와 믿음으로 주님께 나아오는 길이 우리가 은혜 받는 길이요, 회복되는 길이요, 고침을 받는 길이다. 이어지는 본문에서 이러한 나병환자에게 우리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과 행동을 확인해 보도록 하자.
 
*마가복음 1:41~42절에,
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42 곧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주님은 범죄 한 인류의 자화상인 나병환자에게 분명히 말씀하신다. ‘주님 저를 원하시면 깨끗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주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그리고 주님께서는 손을 내밀며 그에게 내밀며 깨끗하게 하셨다. 그런데 여기서 몇 가지 궁금증이 생긴다. 서두에 말씀드린 구약의 정결 법에 따르면, 나병환자, 부정한 자는 만지만 안 되게 되어있다. 정결한 자가 부정한 자를 만지면 정결한 자가 부정해진다. 그런데 왜 주님은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셨는데, 주님이 부정해 지셔야 하는데 나병환자가 정경하게 되었는가? 왜 하필 주님은 정결법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손을 대어 고칠 수 있었는가? 우선 왜 예수님은 부정해지지 않고 나병환자가 정결해졌는가? 왜 구약의 정결법이 뒤집어지는 일이 발생했는지를 확인해보자. 정결 법을 위반했는데도 부정해질 상황에서 부정해지지 않은 주님의 손은 평범한 인간의 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손이 매우 반복해서 등장하는데 이 점을 주목해야 한다. 주님께서는
 
*마가복음 1:30~31절에,
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마가복음 9:25~27절에,
25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26 귀신이 소리 지르며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나가니 그 아이가 죽은 것 같이 되어 많은 사람이 말하기를 죽었다 하나.
27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말 못하고 귀신 들린 아이의 손을 잡아 일으키신다. 이 마가복음에서 질병과 부정과 죽음과 장애를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고 구원을 주시는데 이러한 손이 과연 누구의 손인가? 이 손을 보고 누구의 생각이 나는가? 이것은 바로 구약성경에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그러므로 바로 여호와의 손의 권능이 예수님께 있다. 예수님의 손은 애굽의 열 가지 심판을 내리시고 바로의 압제에서 초자연적으로 구출해 내셨던 여호와의 강한 손의 능력과 구원을 재현하고 있다.
 
*출애굽기 6:1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제 내가 바로에게 하는 일을 네가 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보내리라 강한 손으로 말미암아 바로가 그들을 그의 땅에서 쫓아내리라.
 
*신명기 5:15절에,
15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네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거기서 너를 인도하여 내었나니 그러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명령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
-바로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셨던 여호와 하나님과 동등한 권능과 능력을 가지셨고 여호와와 같은 구원의 역사를 펼치시는 구원 주 하나님이시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손이 정결의 관한 율법을 능가하는 손이신 이유를 우리는 알 것 같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키셨던 시내 산에서 수여된 율법이 아니라 여호와의 강한 손이었기 때문이다. 율법을 지켜서 노예에서 해방되고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의하여 여호와의 강한 손이 역사하사 이스라엘이 죄악 된 구출되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강한 손과 편 팔을 재현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손은 구원 역사에서 율법보다 크신 손이시다. 율법에 앞서 계신 손이시며, 정결 법에 절대 갇힐 수 없는 차원이 다른 권능의 손, 여호와의 손이시다.

이처럼 예수님이 재현하고 계시는 여호와의 손은 구약성경에 여러 구절에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구원과 은혜와 자비를 베푸신다. 사무엘상 4장과 5장에서 여호와의 손은 하나님의 백성의 대적을 치시는 손으로 나타나신다. 에스라 7장에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인도하시는 손으로 나타나시며, 에스라 8장에서는 자기 백성에게 선을 베푸시는 손으로 여호와의 손이 나타나신다. 시편 10장에서는 가난한 자, 외로운 자를 도우시는 손이 여호와의 손이셨다. 전도서 2장에서는 우리에게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일상의 기쁨의 손이 여호와의 손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사야 14장에서는 여호와의 손이 열방을 점령하시고 통치하시는 전능자의 손으로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여호와의 손은 하늘을 지으시고 땅을 지으시고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는 창조주의 손으로 나타나신다. 여호와의 이 귀한 역사와 은혜를 묵상하면서 특별히 마음에 가는 부분이 전도서 2장에, 우리에게 먹고 마시며 수고하는 일상의 기쁨을 주시는 손이 참으로 감사하고 아름다운 것 같다. 왜냐하면 우리가 코로나 펜데믹 사태로 인하여 마음껏 먹고 마시고 우리의 일터와 사역현장에서 수고하며 일상의 기쁨을 누리는 것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 여호와 하나님은 특별히 이 손이 하루 속히 이 대한민국과 온 지구촌을 치료해주시길 간절히 소망한다. 오늘 우리에게도 우리의 부정이 씻겨나가고, 우리의 대적이 쫓겨나가고, 가난과 외로움이 회복되고, 우리의 일상이 회복될 수 있는 비결은 율법과 의식과 제도와 인간의 수단이 아니라 이러한 주님의 손이 우리의 병든 삶의 환부를 만져주실 것이다. 그런데 나병환자가 주님께 여쭙는 질문과 동일한 질문은 마음속에 생긴다. ‘주님 원하신가요? 그 손을 내게 대주시는 것을,,,’ 주님이 과연 우리도 만져주실까? 마가복음을 살펴보면 주님은 본문에 나병환자처럼 주님께 나아가는 모든 사람을 다 만져준다는 것을 우리들은 확신할 수 있다.

주님께서는 전능하신 여호와의 권능의 손을 재현하고 계시지만 왜 하필 정결 법을 어기고 손을 대시는 모습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아무에게나 손을 댈 수 없다. 지구상에 수십억명의 인구가 있지만 내 마음대로 가서 손을 펼쳐서 막을 수 있는 이성은 제게는 두 명 밖에 없다. 제 아내와 제 딸이다. 이와 같이 아무나 손대고 만질 수 없다. 우리는 악수할 때도 아무나 악수할 수도 없다. 바로 나의 친구 나의 가족, 나의 친척, 나의 교우들, 좀 더 넓게 정리하자면 아는 사람과 악수를 한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손을 대는 것은 이 나병환자와 가족이 되시길, 친구가 되시길 원하신다. 교우가 되시길 원하시고, 한마디로 아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신다. 특별히 정결 법은 접촉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명령을 부과하고 있기 때문에 나병위에 손을 대는 것은 매우 불쾌 하고, 거리끼는 일이고, 미련한 일이다. 한 마디로 고통스러운 일인데, 주님께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손을 대셨다고 하는 것은 주님은 매우 깊은 관계성을 형성하시기를 원하셨고, 본인이 불쾌함과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그와 관계하고 싶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손 대심은 바로 피조물의 고통 속에 창조주 하나님의 손을 재현하시는 주님이 참여하시겠다는 표시이다. 나병환자의 고통은 전혀 관계하지 않으셔도 되는데 거기 함께하고 나병환자를 위해서 함께 하시겠다는 것이다. 그 이후가 무엇인가? 이러한 관여와 관계 맺음은 주님의 사랑 때문에 발생했다. 오늘 본문에 불쌍히 여기사~라고 하는 단어가 나온다. 불쌍히 여기사, 헬라어 동사는 스플랑 크니스 페이스라고 하는 단어이다. 우리 한국식으로 번역을 하자면, 애간장을 태우는 자비와 사랑의 마음을 의미한다. 바로 우리 주님의 목자의 심정을 이야기는 단어가 바로 이 단어이다. 주님의 사랑의 마음, 목자의 심정 때문에 부정한 자에게 손을 내미셨다. 주님은 기독교적인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계신다. 기독교적, 주님의 사랑은 함께함과 희생을 동반하는 사랑이라고 보여주신다. 이렇게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고 그를 사랑하신 것은 더 큰 사랑, 더 큰 부정의 손을 대시는 것은 예고편에 불과했다. 

*마가복음 15:22, 25절에,
22 예수를 끌고 골고다라 하는 곳(번역하면 해골의 곳)에 이르러
25 때가 제삼시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으니라.
-십자가형의 특징은 죄수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못은 어디에 박는가? 손과 손목에 박는다고 하는데 우리가 요한복음서나 신약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박히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십자가는 이스라엘의 정결법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학자들은 정결법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레위기 16장에 대속 제에 드리는 속죄제와 의식들이 주님의 십자가에서 성취되었다고 해석한다. 총신대 박철현 교수님은 그의 레위기 주석에서 대속제일을 해석하면서 예수님께서 죽으심을 통해서 완전하고 영원한 대속제일 제물이 되셨다고 한다. 레위기 16장에 대속제일은 어떤 날인가? 이스라엘은 성소에 모든 부정을 씻는 날이었다. 그리고 대속제일은 이스라엘 회중의 모든 죄와 부정을 씻는 날이 대속제일이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대속제일의 성취로서 모드 택한 받은 백성의 죄악과 부정을 씻는 우주적인 대속제이 제단이요, 모든 부정과 허물을 씻는 우주적 대속제일의 제단이다. 모든 피조 세계의 만백성의 죄와 허물과 부정이 올려 진 그 제단에 우리 주님이 자신의 손을 내어 대시고 그 손이 십자가 제단에 처참하게 못에 박히시면서 결박되신 것은 우리 주님이 그 십자가 제단에 쌓여져 있는 모든 인류의 죄와 부정과 고통과 고난과 질병의 속량에 우리 주님이 손을 대셨다라고 우리는 볼 수 있다. 주님은 손이 고난당하시고 대신에 주님을 영접할 모든 백성들의 부정을 씻어주시고 정결함과 거룩함의 은혜를 주시는 장소가 십자가 제단이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나병환자를 만지신 예수님이 그 사건과 패턴이 거의 동일하다고 볼 수 있다. 나병환자를 만지신 것은 바로 십자가 사건이 상징적인 예고편과 같았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십자가에서 손뿐만 아니라 나병환자와 똑같이 되셨다. 나병환자는 부정한 자로서 이스라엘의 진영에서 추방되고 하나님의 언약에서 끊어지고 하나님 앞에 버림을 받은 자였는데,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하나님의 버림을 받았다.
 
마가복음 15:34절에,
34 제 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우리 주님이 나병환자처럼 십자가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버림을 당하셨다. 그리고 로마시대에 십자가에 못 박히게 된 사람의 이미지는 십자가에 달린 죄수는 송장과 같았다. 신약학자 마틴 렘헬이라고 하는 ‘십자가의 처형’이라고 책에 보면 당시 십자가에 달린 중요한 이미지를 설명하고 있다.

-“독특한 문제는 십자가형의 형태가 매우 다양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범죄자를 산 채로 달아 처형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방식으로 처형된 자의 시체를 십자가 위에 전시한 것인지의 사이의 구분은 항상 분명하지 않다. 어떠한 경우이든 간에 십자가형은 희생자를 대단히 모욕하는 방식이었다. 세네카에게 있어서 십자가 위에서 겪는 고통과 비결될 수 있는 인생, 그리고 처형될 것으로 유일한 위로를 삼는 인생은 더 이상 생명을 부지할 가치가 없다... 천천히 죽어가는 과정에 있는 사람은 더 이상 ’생명‘이라고 부를 가차가 없다.”- 마틴 렘엘 –십자가 처형-

 
 
그렇다면 우리 주님께서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나병환자를 다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게 만들어주신다. 자신이 송장과 같이 되셨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님의 고난당한 죄인들을 그대로 취한 모습은 복음서에서 나온다. 무덤가에 사는 광인을 고쳐 주셨는데, 주님은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다. 하나님께 버림받았고 송장과 같았던 환자도 주님은 회복시켜 주셨으나, 주님이 하나님께 버림받고 송장과 같이 되셨다. 고난 받은 모든 백성들의 아픔과 질병과 상처를 주님께서 다 짊어지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 주님은 고난당한 고통을 아신다. 나병환자와 같은 우리가 주님께 탄원할 때 그 고통을 들어주실 것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는 확신하여 주님 앞에 결사적으로 나아와야 한다. 교만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그 믿음으로 나아와야 한다.
 
*로마서 8:32절에,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내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요한일서 3:16절에,
16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에베소서 5:2절에,
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고린도후서 5:21절에,
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그 사랑이 그 아들과 함께 모든 축복을 우리에게 주시는 위대한 축복이 경험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그렇다면 이러한 은혜를 받은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거룩한 하나님이 자녀로서 일평생 하나님께 바쳐져서 사나죽으나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명령하신다.
 
*마가복음 16:14-18절에,
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18 뱀을 집어 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제자들은 주님을 닮아가고 함께 있고, 고난당한 주님의 길을 함께 가고 주님이 하신 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평생 설명하는 사람들이 제자들이다. 우리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셨던 그 사랑, 그리고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시며 보여주셨던 그 사랑의 길을 동일하게 걸어가야 할 것이다. 여기서 손을 얹어 병을 고치라고 하시는 말씀이 단순히 손을 얹으라는 그 은혜도 있겠지만, 그러한 의미를 훨씬 초월하는 것이다. 이 복음서 전체에서 우리 예수님이 손으로 행하신 모든 의미의 일을 그 안에 다 담고 그것을 승천하시면서 제자들에게 너희도 이와 같이 하라고 제자들에게 위임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이 희생하셨던 것처럼 나의 소유와 시간을 드려야 한다.
 
*갈라디아서 2:20절에,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한다.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히면 그분의 손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고난의 사명 가운데 하나로 고정되는 것이다. 주님과 함께 손을 대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 못 박인 자만이 주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기독교인이란,
주님의 사랑의 손으로 쓰임 받아 부정한 자에게 손을 대어 온 세상을 거룩하게 회복시키는 자이다. 우리 삶 가운데 항상 있어야 한다.


♣요약
나병환자를 치유하시는 말씀 속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은혜가 얼마나 크고 위대한 것인지를 조명하여 주심을 감사하며 우리가 믿음과 진실함과 결사적인 간절함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주님의 사랑과 능력의 손을 통해 거룩하고 정결한 주님의 백성이 되어야 한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주님을 우리가 닮아가서 세상의 죄악에서 부정을 깨끗하게 씻기어져서 주님 앞에 귀하게 쓰임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문등병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무릎을 꿇었다는 것은 겸손의 표시이다. 사실 문등 병은 잘 고칠 수 없는 병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 엎드리고 무릎을 꿇음으로써 결국 고침을 받은 것이다. 이처럼 어려운 문제는 예수님께 나아와야 해결이 된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들이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하시므로 언제나 그의 뜻은 선하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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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1년 8월 1일)

제목: ''치료하고 살리시는 조건''
말씀: 호세아 6:1~3
찬양인도: 오준석 전도사님
기도: 한재준 부목사님
 
설교자: 박성규 목사님(부산 부전교회 담임목사님)-초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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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세아 6:1~3,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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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하고 살리시는 조건(박상규 부전교회 담임 목사님)
-1975년도에 건축 기술자인 임채희씨는 사우디아라비아를 지원했다. 그 당시 대한민국에는 중동 산유국에 건설 붐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근로자들이 열사의 중동에 달려가 외화를 벌던 시대였다. 한국에서의 월급의 다섯 배에서 열배까지 올리는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중동 근무는 근로자들에게 매우 선호되는 직업이었다. 신혼의 꿈을 꾸던 그런 신랑이었던 채희씨는 아내와 함께 내 집 마련의 꿈을 안고 열사의 나라의 나라 사우디아라비아로 달려가는 것이었다. 그는 모래폭풍과 싸우며 그 뜨거운 더위와 싸우면서 하루하루 열심히 근무했다. 아내로부터 보내온 편지는 한없는 격려가 되었다. 그 당시에는 일 년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근무하면 서울에서 아파트 한 채를 장만할 수 있는 돈을 모을 수가 있었다. 매달 보내주는 돈을 성실하게 적금을 들어서 일 년 후에는 집을 살 수 있는 그런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드디어 일 년 근무를 마치고 김포공항에 도착했고 아내가 일러준 주소로 찾아가게 되었을 때 그는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집에는 아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주인이 있었다. 알아보니 동창회에 갔다가 어린 시절 함께 공부했던 사람과 눈이 맞아서 집을 팔고 도망간 것이었다. 아내를 포기하기에는 너무나도 사랑했기에 수소문해서 아내를 찾아가 설득하여 그 아내를 대려와 같이 살게 되었다. 이미 집은 다 사라졌고 그들은 월세 방에서 신혼의 삶을 살고 있었다. 오래지 않아 아들이 태어났다. 그런데 자신의 아들이 아닌 이 아이와 함께 그리고 배신한 적이 있는 아내와 함께 사는 것이 너무나 힘들었다. 그래서 그는 새로운 집을 마련하기 위하여 2차 중동근무를 지원했다. 이제는 쿠웨이트였다. 실은 다른 남자에게 마음을 주지 않겠다는 굳은 약조를 받고 그는 쿠웨이트로 날아갔다. 열심히 일하고 이제는 아내에게 월급 전부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생활비만 보내고 집을 살 수 있는 돈은 본인이 적립하게 되었다. 드디어 일 년이 되었다. 그는 쿠웨이트에서 귀국하여 살던 집을 가봤지만 역시 이번에도 아내는 다른 사람과 눈이 맞아 바람을 피우고 있었다. 그러나 너무도 아내를 사랑했기 때문에 이 아내를 설득하여 다시 데려와 살았다. 이제는 집을 장만했다. 이제는 꿈을 이루고 함께 그 집에 살고 있지만 이 남편의 마음속에는 나를 배신한 아내에 대한 분노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오래지 않아 둘째가 태어났다. 딸이었다. 자신을 배신한 아내가 자신의 자녀가 아닌 아들과 딸과 함께 산다는 것이 정말 힘든 일이었다. 차라리 모래폭풍이 이는 중동의 삶이 그리웠다. 그래서 그는 다시 3차 중동근무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이라크였다. 이라크에서의 근무지는 그 당시 이란과 이라크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근무지인 작업장 근처까지 포탄이 떨어지는 아주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그 위험한 상황이었기에 오히려 더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이기에 재희씨는 열심히 일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업장에 날아온 오발탄으로 말미암아 그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어버리고 만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고국의 아내에게 남편의 숨진 소식이 전달되었고 유족에게 보상금이 전달되었는데 그의 월급이 70만원이었는데, 보상금은 3500만원이었다. 그 돈은 부산에서 섬이나 어디에 집을 열채나 살 수 있는 거액의 돈이었고 그 보상금이 아내에게 전해지게 되었다. 남편의 죽음의 소식과 보상금의 소식을 듣고 그는 통곡하며 오열했다. 남편을 배신했던 것이 너무나 미안했고 너무나 죄송했다. 그녀는 자신을 위해 살다간 남편에게 송구함을 그는 멈출 수 없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이 이야기는 얼마나 우리 마음속에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을 자아내는 이야기인가? 그런데 이 이야기는 실화가 아니라 제가 호세아 1장을 현대적으로 각색했다. 여기 나오는 재희씨는 예수님이시다.
 
재희씨=예수님, -장차 신약에 오셔서 우리를 위하여 죽임 당하실 예수 그리스도, 그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호세아라고 하는 선지자는 비련(悲戀)의 선지자이다. 슬픔 사랑의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비련의 선지자이다. 어느 날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다. 호세아를 보면,
 
*호세아 1:2절에, ~너는 가서 음란한 여자를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 이 나라가 여호와를 떠나 크게 음란함이니라.~
-호세아는 북이스라엘의 선지자였다. 북이스라엘의 성도들이 너무나도 영적으로 타락하는데, 영적 간음인 우상 숭배를 저지른 것을 하나님께서 고발하며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말씀으로만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호세아의 삶으로 메시지를 전하게 해주셨던 것이다. 그래서 음란한 여자를 만나 음란한 자식을 낳음으로써 불륜의 씨앗인 자식을 낳음으로써 북이스라엘이 얼마나 타락했는지를 고발하며 그들의 회개를 촉구하고 있는 내용이 호세아이다.
 
*호세아서 1:3절에,
3 이에 그가 가서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맞이하였더니 고멜이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매.
-호세아와 고멜과 결혼했다고 한다. 히브리말로 그 어원이 끝이라는 뜻이다.
▷고멜-어원은 끝(end), 완전히 끝까지 가다.(come to an completely)
-고멜은 음란한 여자이고 성적으로 타락한 여자였다. 완전히 성적으로 문란하고 타락한 여자였다. 고멜이라는 이름을 통해서 하나님은 북 이스라엘의 영적상태를 말씀 하신다. 얼마나 우상숭배에 깊이 빠져있었냐면 더 이상 내려갈 수 없을 만큼 그들은 영적으로 심각한 타락에 빠져있었다. 호세아시대의 북 이스라엘의 왕은 여로보암 2세이다. 북이스라엘은 가장 넓었던 땅, 영토를 차지하고 있었던 시대였다. 그리고 가장 부강했던 시대이다. 그들은 그 부를 하나님이 주시지 않고 우상인 바알이 주었다고 착각함으로써 깊은 바알에게 빠졌던 시대가 바로 호세아의 시대이다. 어쩌면 대한민국의 오늘의 상황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선진국이 되었다. 제가 자라나는 60년대만 해도 우리는 헐벗고 굶주렸다. 지금은 정말 풍요롭고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 그렇지만 우리는 깊은 우상숭배(偶像崇拜)에 빠진 것이 오늘 우리 한국교회 우리 모습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말씀을 들으면 ‘목사님, 나는 우상숭배를 하고 있지 않아요!’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형상 앞에 절하는 것만이 우상숭배가 아니다.
 
*골로새서 3:5절에 보면,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무엇인가를 탐내고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라고 말씀하고 있다.
 
▷카일 아이들만 목사님의 [거짓 신들의 전쟁]이라는 책이 있다.
-여기에 보면 이 목사님은 현대인의 우상을 아홉 가지로 이야기 한다.
▷현대인의 아홉 개의 신.
①음식의 신
②섹스의 신
③오락의 신
④성공의 신
⑤돈의 신
⑥성취의 신
⑦로맨스의 신
⑧가족의 신
⑨‘나’라는 신
 
-①음식의 신-하나님보다 음식이 더 중요하다. 이 사람의 스마트폰에 수많은 맛 집의 사진이나 그림이 담겨있다. 메뉴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다. 이 사람이 주로 보는 것은 티브에 먹 방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은 음식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것이다.
 
-②섹스의 신–성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다. 남편과 아내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과 동시에 자녀를 낳는 이런 놀라운 복을 주신 것이 성이다. 그러나 내 배우자와의 관계를 넘어 또 다른 사람과 성관계를 맺는다면 이 사람은 섹스의 신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음란 영상물을 보고 있다고 한다면, 섹스의 신을 섬기는 것이다.
 
-③오락의 신-스포츠,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 그리고 우리가 인터넷 게임 등이다. 적절한 오락은 우리에게 어느 정도의 긴장을 풀어주는 유익이 있다. 그러나 적정선을 넘어선 오락은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우상숭배가 되는 것이다. 아이들만이 아닌 오락의 신을 SNS로 말하고 있다. 페이스북, 트위터 등 하루에 수없이 보고 있다면, 우리 한국 사람은 카톡을 수없이 보내고 시간을 보낸다는 것이 오락의 신이 될 수 있다.
 
-④성공의 신-더 높은 자리, 더 많은 명성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잃어버리고 있다면 그는 성공의 신을 섬기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이유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그리고 더 나아가 복음을 전하고, 만물을 충만케 하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사회의 시스템을 변혁하는 사명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과는 아무런 관심도 없이 오로지 더 높은 곳을 향하여 달음질치고 있다면 우리는 성공의 신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것이다.
⑤돈의 신-돈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복음 전파와 세상이 변혁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고 오로지 돈에만 매달린다면 그든 돈의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⑥성취의 신-성취의 신은 얼마나 좋은가? 그러나 과잉성취면 중독이라면 그것도 우상이 될 수 있다.
 
-⑦로맨스의 신-연애 감정을 말한다. 내 배우자가 아닌 사람에게 직장이나 동호회나 동창에게서 느낄 수 있는 것이 로맨스는 조심하지 않으면 불륜이 되어 섹스의 신이 될 수 있다. 부부가 오랜 결혼생활을 하면 로맨스의 감정보다 신뢰와 존경의 감정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안 된다.
 
-⑧가족의 신-배우자든, 자녀든, 부모님이든, 하나님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면 가족을 신으로 섬기고 있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큰 부자였지만 하나님은 돈을 가지고 그를 테스트하지 않으신다. 백세에 낳 너의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 단에 가서 번제물로 드리라고 하신다. 아브라함은 이 테스트에 합격한다.
*창세기 22:12절에,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여러분은 어떠한가? 혹시 가족의 신을 섬기고 있지는 않는가?
 
-⑨‘나’라는 신-‘내가 최고야, 내 의견이 최고야,’ 라고 하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나를 우상숭배 하는 데 빠진 사람이다. 현대인들은 ‘나’라는 신을 섬기는 사람들도 제법 많다.

 
.▷밀턴 로키치(1964년)라는 정신의학과 교수가 쓴 유명한 책이 있다. [입실랜티의 세 그리스도]-이것이 2017년도에 영화로도 나왔다. ‘세 명의 그리스도이다.’ 영화 [Three Christs] 이것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책이며, 영화이다. 1960년도 미시간의 한 입실렌티라는 한 도시에 있는 정신병원에서 과대망상증 환자를 치료하게 된다. 세 명이었는데, 이 세 명이 똑 같이 메시아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메시아이다’고 하면서 ‘내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은 자’라고 잘못된 과대망상에 빠져있는 환자들이었다. 로키치 박사는 이 사람들을 어떻게 고칠까를 고민했다. 저마다 메시아라고 말하니까 서로 모여서 함께 서로 대화를 하다보면, 다 메시아라고 한다. 그 메시아는 한 분이니까, 이러면서 현실로 돌아오게 집단 치료를 시도하게 된다. 집단치료가 시작된 날- 한 환자가 말한다. ‘나는 메시아야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 받았다.’라고 한다. 그래서 로키치 박사는 ‘언제 하나님께서 당신을 보내셨다고 말씀 하셨나요?’ 라고 질문했다. 답변은 ‘어제’라고 말한다. 그랬더니 다른 옆에 있는 환자가 ‘나는 너를 보내 적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세 번째 환자가 말하기를 ‘그러니까 너희들이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거야!’라고 말했다. 모두가 우주의 중심을 ‘나’라고 나를 우상으로 섬기고 있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우리는 볼 수 있는 것이다.
 
여러분, 여러분이 형상 앞에서만 절해야 우상숭배가 아니다. 그것도 우상숭배이지만, 카이 아이들만의 목사님의 아홉 가지 우상숭배 중에 그 하나라도 섬기고 있다면 우리는 그 가운데 가담되어 있는 것이다. 한 번 더 아홉 가지 우상을 읽어보면서 나는 어떤 우상을 섬기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여러분이 해당되어 있지 않는가? 적어도 현대인들은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우상을 섬기고 있을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카일 아이들만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우상숭배는 많은 죄 가운데 하나가 아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죄를 낳는 큰 죄이다. 우상숭배는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진 모든 문제의 본질이다.’라고 말한다.
 
여러분 보라, 섹스의 신을 섬긴 사람이 얼마나 문란해진 사람이 많은가? 지도자들 가운데도... 성공의 신을 섬기다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잊어버리고 이웃, 가족 사랑도 다 끊어진 사람이 이 시대에 얼마나 많이 있는가? 오락의 신을 섬기다가 신앙의 근본까지 잃어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돈의 신을 섬기다가 인생이 무너진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로맨스 신을 섬기다가 불륜으로 끝나 가정이 파탄으로 망가지 사람들이 이 시대에 많은가?
 
주안에서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간, 내 안에 있는 우상을 발견하고 이것을 찍어버리고 깨뜨려버리고 우리의 신앙의 새로운 결단이 오늘 이 시간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치료하고 살리시는 조건’이다.
-치료하고 살린다는 이야기는 지금 병들었다는 이야기이고 지금 죽어간다는 것이다. 본문을 보자.

호세아 6:1절에,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매 맞고 다치고 죽어가게 되었을까?

*호세아 6:10절에 보면,
10 내가 이스라엘 집에서 가증한 일을 보았나니 거기서 에브라임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혀졌느니라.
-에브라임은 북이스라엘의 가장 큰 지파이다. 에브라임을 말하면 북이스라엘 전체를 가르키기도 한다. 에브라임은 음행하였고 이스라엘은 더럽혀졌다고 한다. 영적 간음에 빠진 그들을 지금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우상을 숭배하는 것이다. 이른 바 혼합주의를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며 분노하신다. 그래서 이들은 매 맞고 죽어가는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들은 다시 치료받고 살아갈 수 있는가이다. 그 조건을 오늘 본문은 세 가지로 말씀하신다.
 
I. 여호와께 돌아가는 것이다.
 
*호세아6:1절에,
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치료받을 수 있는 조건, 살아날 수 있는 조건은 여호와께 돌아가는 것이다. 돌아가다의 히브리 동사는 굉장히 많이 나오는 동사이다.
▷돌아가다(슈브) -뜻은 ①돌아가다. ②.회개하다.(悔改)-여호와께 돌아가라는 것은 회개하라는 것이다. 그들이 회개하면 우상숭배를 회개하면 치료하고 살려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우리가 돌아갈, 회개의 대상에게 할 여호와는 어떤 분이신가? 여호와는 구약 성경에 많이 나온다. 하나님이란 말씀도 많이 나온다. 우리 말고 엘로 힘이라고 한다. 이 엘로 힘은 우리가 하나님을 가르킬 때에도 쓰고 천사에 대해서도 쓰고 또 하나는 이방 신을 가르킬 때도 엘로 힘을 쓴다. 그런데 여호와라는 단어는 정말 구별된 단어이다.


▶여호와
1. 이스라엘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다른 종교에는 없다. 오직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고유한 이름이다.
2. 생명을 주시는 분, 창조자.-죽어가는 자도 살리시고 창조하신 분이시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다.
3. 절대적이고 변함이 없으신 분.-모두는 상대적이지만 하나님은 누구에게든 절대적이며 변함이 없으시다.
4. 자기모순과 변함이 없이 영원히 사시는 분.-우리는 우리말을 지키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순이 없으시고 변함이 없으시고 영원히 사시는 분이시다. Ever Living의 하나님.
5. 지존 자, 본질상 이름을 부여할 수 있는 不可解하신 분.-스스로 존재하는 분, 우리 모두는 피조물이다. 그러나 그분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다. [출애굽기 3장 2절에-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I am Who I am.(스스로 존재하는 분)


그리고 놀라운 것은 본질 상 이름을 부여할 수 없는 분이시다. 그리고 인간의 머리로 다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 분이시다. 여호와라는 이름만 묵상해도 마음에 하나님에 대한 일어나는지 모른다. 생명을 주시는 분, 창조자, 절대적인 분, 변함없는 분, 자기모순이 없고 영원하신 분, 자존 자, 불가해 하신 분, 크고 광대하신 하나님이시다. 이 여호와께 돌아가면 우리를 살려주시는 줄로 믿는다.
 
-우리가 즐겨 찬양하는 ‘주님의 이름은 강한 성루, 그곳에 달려간 자 안전하리.’ ~
이 가사가 잠언 18정 10절에서 나왔다.


*잠언 18:10절에,

10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
-그분이 전능하시기 때문이다. 그분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요, 그분이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분이요, 그분이 절대적인 지위와 권력과 권세를 가지셨기에 그분을 믿는 자들은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여호와를 사랑하고 신뢰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분께 돌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돌아가다의 뜻인 히브리어로
‘슈브’는
①돌아가다
②회개하다.
③회복하다
④고치다.
⑤구조하다
⑥부흥하다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면 회개하고 회복하게 하시고 망가진 우리를 고쳐주시고 우리를 고난에서 구조해 주시고 그리고 다 죽어가던 우리를 부흥시켜 주신다. 우리가 회개할 때 부어주실 줄 믿는다. 오늘 우리가 회개의 기도가 있기를, 하나님과 우상을 섬기는 것을 모두를 섬기는 것을 고백하고 용서해달라고 회개하면 우리 모두에게 부흥을 주실 것이다. 여호와께 돌아가는 회개를 통하여,,,
 
*호세아 6:2절에,
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일으킨다는 단어가 헬라어 단어에 보면 부활이라는 단어와 같다. 이것이 어떤 신학자는 예수님의 부활을 예고한 말씀이라고 말한다. 더 이상 살아날 소망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살려주신다는 것이다. 여호와께 돌아가면,,, 이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내가 하나님을 떠나고 영적인 간음인 우상숭배에 빠져서 내 인생이 완전히 망가져 있다할지라도, 하나님께 돌아가면 하나님은 얼마든지 살릴 수 있다는 것을 믿는다.
 
※사역 반에서 어느 집사님의 간증을 들었다. 장로님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이분은 사업을 하다 보니 잘되어서 술친구가 너무 많이 생겼다. 알콜 중독에 빠지고 도저히 치료가 안 되어서 그 부인께서 정신병원에 입원을 시키게 되었다. 그런 후에 퇴원하고 교회에 왔다. 말씀의 은혜를 받고 찬양의 은혜를 받다보니까 술이 끊어지게 되었다. 그는 말씀과 찬양을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슈브’, 회개하고 치유를 경험하게 되었다. 최근에는 이 집사님이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정말 상처 입은 치유 자, 교회의 어떤 여자 집사님이 본인의 남편이 알콜 의전 증에 빠져있다고 도와달라고 한다. 그분을 살리는 일을 하게 된다. 우리가 여호와께 돌아가면 우리 인생을 회복시켜 주시고 고쳐주시고 부흥시켜 주시는 은혜를 죽은 지 2일 3일이 된 사람이 살아나는 것이 불가능 한데도 하나님이 살려주시는 것처럼 우리의 인생을 살려주실 줄 믿는다. 게임 중독인 자녀도 살려주실 것을 믿는다.

 
II. 여호와를 힘써 아는 것이다.
 
*호세아 6:3절에,
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 빛 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여호와를 안다는 것이 어떤 뜻인가? 이것은 인격적 신앙을 말한다. 인격적이란 성품이 좋다는 뜻이다. 그러나 신앙에서는 인격적이란 말은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가진 존재를 인격적이다. 하나님이 인격적이다, 우리도 인격적이다. 그리고 천사도 인격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짐승은 인격적이 아니다. 타락한 천사도 인격적이다. 그래서 감정과 의지를 공격하는 게 사탄이 인격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격적 신앙이 무엇인가?
지식적으로는 성경을 읽고 연구하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다.
▷=지식(성경을 읽고 연구)+김정(묵상, 기도 사랑)+의지(순종)
-우리가 성경을 읽고 연구하고 감정으로 묵상하고 기도하면 감사와 사랑이 나타난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나타나고 그다음에 의지적인 요소인 감사에서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인격적인 신앙은 하나님의 대한 사랑이 있는가?이다. 그 지식에 근거해서 그리고 사랑에 근거해서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이다. 여기까지가 인격적인 신앙이라고 말한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지식적인 사랑이 많은가? 하나님의 사랑이 식어져 간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순종이 없다. 이것은 지식적 사랑이고 신앙이다. 인격적 신앙은 지식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대한 사랑이 있는가이며 그 지식에 근거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있는가이다. 여기까지 신앙일 때 순종이 인격적 신앙이다. 머리로는 성경을 너무도 잘 알지만 하나님의 대한 사랑이 식어져버렸기에 그렇다. 하나님의 대한 사랑과 순종일 때, 인격적인 신앙이 된다.
 
▷제임스 패커는 책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라는 이 책을 80년대에 많이 읽었을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을 구분하고 있다. 하나님과 개인적인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고 내가 인격적으로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통해 경험하는 신앙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좋은 신앙이다. 영생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뜻이다. 영생은 지금 죽어 천국간다는 뜻도 있지만 지금 현재 여기에서 좋은 신앙은 하나님과 지식 감정 의지를 교제하는 삶,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삶이 영생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 바로(Knowing God)이다.
 
좋지 않은 신앙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다(Knowing about God). 바로 하나님과 교제도 없이 지식적으로만 하나님을 배우는 신앙은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도, 하나님의 뜻에 따른 순종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힘써 여호와를 알아야 한다.
 
이것은 무엇인가? 지식적, 감정적 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순종하면 우상숭배와 바알숭배에 빠지지 않는다. 우리가 신앙 생활할 때 전적으로 하나님을 알면 아홉 가지의 우상을 던져버리는 신앙의 좋은 결실을 만나게 될 것이다.
 
-여호와를 알게 되면 새벽빛처럼 우리를 인도하신다. 뿐만 아니라 비와 같이 늦은 비와 같이 하신다. 이른 비는 파종을 위한 비이다. 흙이 부드러워지도록, 늦은 비는 열매가 풍성해지도록 주는 비이다. 그래서 추수직전에 비가 많이 내리면 수분과 양분을 머금고 이 곡식들이 아주 튼실해진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지식적으로만 알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의지적으로 순종하지 않고 우상숭배에 빠진 삶에는 인생에 열매가 없다. 하나님께서 늦은 비의 은혜를 주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아갈 때 우리 인생의 풍성한 열매, 튼실한 열매를 맺게 하실 줄 믿는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치료하고 살리시는 조건.
1)여호와로 돌아가는 것(회개).
2) 여호와를 힘써 아는 것(전인격적 신앙).
 

III. 여호와를 인애하는 것이다.
 
*호세아 6:6절에,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제사는 오늘날 예배인데, 예배보다 인애를 원한다고 하신다. 인애는 어떤 단어인가? 인애는 히브리어로 헤쎄드이다.
 
▷(인애-헤쎄드)-충성, 사랑, 언약 적 사랑, 변함없는 사랑. - 영어성경에는 이렇게 번역되어 있다. 진정한 사랑은 충성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결혼의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는 이 사랑이 변질되지 않는 충성된 사랑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와 사랑의 관계에 원한다는 것은 예배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예배를 드리면서도 사랑의 충성이 진짜 사랑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결혼은 언약(covenant)이지, 계약(contract)이 아니다.

*말라기 2:14절에,

14 너희는 이르기를 어찌 됨이니이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기 때문이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서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거짓을 행하였도다.
-지금 하나님과 이스라엘, 성도들은 언약을 맺었다. 출애굽기 20장에 맺었다. 이 시내 산 언약을 맺기 전에 19장에서 이 언약을 지키겠냐고 할 때, 우리가 다 지키겠다고 말한다. 그 약속에 근거해서 20장을 주셨는데, 20장이 십계명이다. 언약 백성이 하나님 앞에서 지켜야 할 약속이다.


*출애굽기 20:3-5절에,
3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출애굽기 20:4절에,
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출애굽기 20:4절에,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질투라는 이야기는 속 좁은 사람, 째째한 사람의 마음을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자신을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째째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를 그렇게 사랑한다는 것이다. 너무나 사랑하기에 독점적인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고 우리도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호세아 6:6절에,
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오늘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주일에 한 번 예배하고 일주일 내내 아홉가지 우상 중에 하나에 빠져서 그 우상에 집중하고 있지는 않는가? 내가 예배를 드렸다고 하지는 않는가? 이것이 우리의 신앙의 병든 모습이며 이것 때문에 우리는 영적으로 침체하고 있다. 더 나아가 인생은 무너져 내리고 있을 수 있다. 우리 하나님을 순저하게 사랑해야 한다. 충성스럽게 나를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너희들과 독점적인 사랑을 원하신다고 하신다.
영상으로 예배를 드리고 주일만 예배드리고 다른 아홉 가지 우상숭배를 하고 있지 않은지를 깨달아야 한다. 우리 하나님을 순전하게 사랑해야 한다. 충성스럽게 사랑해야 한다.
 
*에베소서 6:24절에,
2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변함없이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은혜가 있을지어다.
-호세아 6:6절 말씀처럼 하나님을 인애하는 사람에게 은혜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 변덕 부리지 말고 하나님을 배신하지 말고, 우상에게 기웃거리지 말고,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백성들, 하나님의 신부들이 되길 축복한다.
 
▶하나님은 북이스라엘을 징계하셨던 하나님은 그들을 사랑하시기에 치료하고 살리신다. 세 가지 조건이다.
 
-치료하고 살리시는 조건,
1. 여호와께 돌아가는 것이다.-회개
2. 여호와를 힘써 아는 것이다.-지식(성경을 읽고 연구)+김정(묵상, 기도 사랑)+의지(순종)
3. 여호와를 인애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것, 충성하는 것이다. 우상에게 빼앗기지 말고 전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라.
 
 
 
요약
이제 우리 가정에 모든 우상을 버리고 전인격적 신앙을 가져서 이제는 감정적, 의지적으로 하나님을 순종하고 하나님을 힘써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온전하게 하나님만 사랑하고 치료해 주시고 살려주심을 믿고 순종하여 주님의 기쁜 자녀로 살아야 한다.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여야 한다. 여호와께 돌아가 하나님을 힘써 알아가고 하나님을 인애하며 충성하여야 한다.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는 데서 시작되었다. 여기서 회복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바로 알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닥치는 불행과 행복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다. 때문에, 재난에 빠졌을 때는 그 재난에서 자신을 구원하실 하나님의 처분, 곧 불쌍히 여기시고 건져 주실 것을 바라고 기다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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