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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1년 7월 31일) 제목: ''그들의 믿음 되게 하소서'’ 말씀: 마가복음 2:1~12 찬양인도: 오준석 전도사님 사회: 김도훈 부복사님 설교자: 조성환 부목사님(SaGa 예배아카데미 학장) -------------------------------------- (마가복음2:1~12,) 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 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 ▶코로나 상황에 폭염이 더해지면서 쉽지 않은 기간인 것 같다. 작년 12월에 겪었던 혹독한 겨울에 참 오래간만에 처음이었는데, 오히려 그 겨울이 더 그리워지는 여름이다. 새벽에도 쉽지 않는 열대의 날들을 경험하면서 우리교회 성도님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연일 오르락내리락하는 코로나 상황 속에서 이 상황들이 그저 끝나기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환경에 아무리 어려울지라도 예배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우리가 더 힘쓰는 자 되기를 기도한다. 상황이 어렵고 마음속에 차오르고 할 때, 가끔 이 상황들에 대해서 입을 열어서 고백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서 이런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다윗에게 골리앗은 다윗이 반드시 밝고 지나가야 될 길들 주에 하나였듯이, 코로나와 폭염은 마찬가지로 우리의 부르심 속에서 반드시 밟고 지나가야 할 길들 중에 하나임을 믿는다. 계속 상황들에서 우리가 움츠려드는 것이 아니라, 상황들에 대해서 예수의 이름으로 선포하며 나아가야 하는 것이 삶 가운데 참으로 필요한 때이다. 너무나도 감사하게도 토비새예배 때마다 우리가 주일예배를 살려달라고 기도했다. 처음 그 표현을 접했을 때, 그 단어는 저에게 생소했다. 그런데 이 표현이 저의 마음을 저의 마음으 사로잡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주일예배를 살려달라고 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혼자 생각하면서 보통 일반적으로 우리가 기도할 때, 담임 목사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흔한 일인데 거기서 멈추지 않고 성도들이 이 험한 세상에서 성도님들이 어려운 시간들을 보내고 교회를 오는데 성도님들이 교회에 주차장만 들어서도 주님의 임재를 새롭게 경험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21년 전에 남가주토비새를 처음 접해서 그런 생소한 표현이 그때 생소했었다. 그 다음날 아침에 처음 예배에 참여했을 때, 왜 그렇게 토요 날 기도해야 하는지를 알게 되었다. 주일예배에 나타나는 성령님의 놀라운 임재가 감격스러웠고, 대표 기도를 하시는 분의 그 기도의 센텐스 끝에 제 주위의 앉아있는 성도님들이 대답하면서 ‘네 주님 그렇게 해주세요.. 네 주님 그렇게 붙들어 주세요.’라고 했다. 그 진심어린 그 고백이 저의 마음을 흔들었다. 오늘 아침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렇게 온라인이지만, 주중 교회 집회에 신실하게 참여하여 마음을 모아 예배하는 우리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격리 중에 집에서 예배를 드려보니까 토비새 같은 경우 주위 층간이 신경이 쓰이고, 또 모처럼 주말에 이웃에게 방해가 될까 해서 생중계를 크게 켜지 못하고 찬양을 따라 하기도 그랬다. 그런 상황들 속에서 여러분이 1년이 넘도록 여기까지 함께 해 오신 정성과 믿음이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자랑스럽고 대견하게 보인다. 오늘 아침에 온라인으로 들어오신 여러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우리교회 모든 주역들임을 믿는다. 찬송가 중에,,,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하리라. ~~ 나는 심히 고단하고 영혼매우 갈하나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나의 앞에 반석에서 샘물 나게 하시네.~~ 성령감화 받은 영혼 하늘나라 갈 때에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 인도하셨네, 영영 부를 나의 찬송, 예수인도 하셨네. ~,,, 문들아 들을 지어다~~영광의 왕께~, 왕께 만세.. 위대하신 주!~~♪ 본문에 2절에 보면, *마가복음 2:2절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 그 많은 사람들은 바로 *마가복음 1:45절에, 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 그 사람들이란,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들린 자를 치유하신 것을 듣고 모인 사람들이 그 모인 사람들이다. 어쩌면 그들은 엄청난 치유를 베푸시는 주님을 믿고 알기 원하는 것보다는 당장 자신의 육신의 현실적인 필요가 절실한 사람들일 것이다. 어쨌든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해결사 예수님을 바라고 모인 자들일 것이다. 도대체 왜 예수님은 그 누구도 행하지 못하던 나병환자를 치유하고 어눌한 자의 귀를 열고 눈 먼 자를 치유하셨는지를, 나의 문제만 모든 초점에 맞추고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한 자들이었을 것이다. 저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부모님이 삶이 무너져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하나님이 정말 계시다면 정말 도와달라고 하나님을 찾던 시기가 있었다. 그 당시에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것이 저에게는 사치였다.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이었다. 너무나 힘든 상황으로부터 해방을 받으면, 만약에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하는 그런 마음으로 하나님을 찾던 시기였다. 창조주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는 그때에, 그 끝에 인간을 만드셔서 각 사람을 향해 너무나 보배로운 생각을 가지고 다가오시는 것을 전혀 모른 채, 또 성자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동정녀 몸에서 나셔서 죄를 알지도 못하신 그분이 죄가 하나도 없으신 그분이 그 십자가에 오르셔서 인간의 죄로 인한 그 엄청난 진노의 잔을 담당하신 그 사랑을 아는 것보다는 당장 내가 사는 인생의 절박한 해결사로만 모시는 그런 수준의 삶이었다. 그러나 그 후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그 은혜가 있어서 예수전도 단이라고 하는 선교 단체에서 훈련을 받고 예배자의 삶을 살면서 바로 여기까지 오게 하셨다. 적어도 오늘 아침에 이 토비새에 나오신 우리 성도님들을 우리 삶에 여전히 도전이 있지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고 하신 그 약속을 의지 하면서 오늘 이 아침에 여러분들이 예배자로 참석하신 줄 믿는다. 예수님을 믿은 지 오래되었지만 여전히 우리가 자신의 문제로만 함몰되어 있다면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여전히 자신의 약점들, 상처, 내가 여전히 미워하는 그 사람, 나를 이렇게 만든 그 사람에 대한 감정들이 내 마음을 여전히 점령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현재를 온전히 사는 것이 아니고 여전히 과거 속에 사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예배에 참석한다. 출석하면서 우리가 아닌 오직 ‘내가’, 내가 은혜 받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내가 좋아하는 찬양을 하면 따라하고 내가 좋아하는 곡이 아니면 말고, 교회를 오래 출석했지만 섬기는 것과 봉사하는 기쁨보다는 그저 내가 은혜 받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고 그 삶이 모든 것이라면 우리는 삶을 돌아보아야 한다. 제가 섬기던 어떤 교회에서 본당 주차 시설이 700대였는데 이미 주차장이 다 차버리고 그래서 주차를 섬기는 성도님들이 교회 정문 앞에서 이미 다 찼다고 Full이라고 써놓고 다른 주차장으로 가시라고 안내를 해도 그래도 밀고 들어오는 성도들이 있었다. 주차를 섬기시는 분들이 너무 놀란 것이다. 그 차를 멈추려고 있는 힘을 다해서 멈추게 했던 기억이 있었다. 그런 일들이 여러 번 있는 것들을 보면서 얼마나 우리가 우리 중심에 삶을 살고 있는지 정말 우리가 속한 영적 공동체에 유익을 위해서 책임을 감당하고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그런 어린 아이와 같은 삶을 살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분들은 그날 설교나 찬양팀 찬양, 퍼포먼스나 연주에 의해서 은혜를 받았다고 고백하는 분들도 있다. 그런데 6절에 보니 또 한 그룹이 있다. *마가복음 2:6절에,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본문에 나온다. 서기관이라고 부르는데 이 신약시대에 율법학자로서 율법을 해석하고 율법의 요구 사항들을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서기관의 가르침대로 살아야 하지만 그들의 행위는 본받지 말라고 하신다. 왜냐하면 서기관들의 위선과 외식, 간사한 마음을 아셨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23:3~7에, 3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그들이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그들이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그들은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 4 또 무거운 짐을 묶어 사람의 어깨에 지우되 자기는 이것을 한 손가락으로도 움직이려 하지 아니하며 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 술을 길게 하고 6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와 7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과 사람에게 랍비라 칭함을 받는 것을 좋아하느니라. -그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성전에서 제사 드리는 것과 연관된 모든 기득권을 챙기기 위해서 종교의 탈을 쓰고 회칠한 무덤으로 살아가던 종교 주의자들이었다. 또한 삶의 현장이었기에 종교지도들을 ‘독사의 자식들’ 이라고 부르신 것이다. 하나님보다는 자신의 명예와 사람들의 인정이 그들이 살면서 더 중요했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도 알아보지 못하는 육적인 종교인들이었다. 예수님의 생명, 설령의 인도, 이런 것보다는 알지 못하면서 오직 자기들의 위치를 가지고 일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사람들을 부리기만 하는 자들이고 마치 교회 오래 다닌 것이 오히려 자기들의 계급장이 되어버린 사람들이다. 결국 주님의 음성보다는 자신의 목소리가 더 커진 사람들이었다. 누가 조금만 다른 의견을 표현하면 마치 자기를 전체적으로 반대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성경은 이런 자들을 일컬어 자기 배를 위하여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한다. 가장 놀라운 것은 이 종교 지도자들이야말로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에 대해서 가르치는 사람들이고 하는 서기관들이었다. *이사야 35:5-6절에, 5 그 때에 맹인의 눈이 밝을 것이며 못 듣는 사람의 귀가 열릴 것이며 6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 같이 뛸 것이며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 -영적인 실체와 권능이신 메시아 예수님이 그들 가운데 오셨는데도 알아보지 못하고 거부하고 배척하는 종교인들이었다. 저도 이 짧은 인생을 살면서 이 말씀을 보면서 저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제가 50이 되었을 때에 희한한 경험을 했다. 사역도 많이 하고 예배음악을 많이 가르치면서 이제는 어느 정도 성숙한 나이가 되었으니까 중견나이가 되었으니까 대부분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나이가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어느 날 제자신이 진실 되이 틀릴 수 있다.고 하는 것을 경험하게 되었다. 저는 정말 진실했다. 그 아이디어와 정말 진실되이 믿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것이 틀렸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나이가 들수록 특징 중에 하나는 우리의 사고가 굳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을 경험하고 나서 저 자신을 믿지 않는다. 정말 믿은 것은 오직 주님 한 분이심을 고백한다. 그래서 자주나이가 들수록 정말 주님께 간절하고 진실되이 기도하는 것이어야 한다. ‘주님의 빛을 제 영혼에 비추어주시옵소서’ 정말 서기관과 같은 존재가 되지 않고 언제든지 제가 그렇게 될 수 있으니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빛을 비추어달라고 기도하게 된다. 어느 날 제가 좋아하는 목사님의 나눔을 접하게 되었다. 그분은 늦은 나이에 목사님이 되셔서 소매치기나 길거리 방황하는 아이들을 계속해서 섬기던 중에 하나님께서 교회 담임목사님이 되게 하시고 참 아름다운 삶을 사시고 참 존경하는 분 중에 목사님이시다. 그분이 설교 중에 말씀을 하시는데, 본인이 본당에서 기도를 마치고 나가려고 하는데 본당 문이 열리는 인기척을 듣고서 그냥 나가면 되는데, 문이 열리는 인기척이 나니까 다시 그 자리에 앉아서 기도를 했다면서 자신을 솔직하게 말씀하셨다. 설교를 통해서 고백하시는 것을 보면서 이 사람을 두려워하는 마음,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고자 하는 마음이 하나도 없다면 우리는 아마도 거짓말한 자들일 것이다. 이런 부분들에 주님의 빛이 비추어질 때, 사람들을 두려워하는 마음,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그 마음보다도 하나님께 인정받고 싶어하는 그 마음이 내 안에서 점점 더 시간이 지날수록 커지기를 소원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예레미야 17:9절에, 9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심히 부패한 것이 마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마음을 들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면서 나아가야 한다. 한국 찬송가 중에 446장에 보면, ‘주 음성 외에는 참 기쁨 없도다.’ 너무나 귀한 찬양이다. 그 후렴에 보면 기쁘고 기쁘도다. 항상 기쁘도다 나 주께 왔사오니 복 주옵소서!~로 번역되어 있다. 찬양인도 단을 섬기면서 여러 곡들을 번역했다. 그중에 특별히 이 찬송에 후렴부분은 영어가사와 상당히 거리가 먼 번역으로 되어 있다. 영어가사에는 “I need Thee, O I need Thee; Even hour I need Thee!” = 내 삶의 순간마다 함께 하옵소서. “ Every hour I need Thee” = 함께 하옵소서 “O bless me now, my Savior, I come to Thee.” = 나 주께 왔사오니 복 주옵소서. -주님, 나는 주님이 필요합니다. 매 시간마다 주님이 필요합니다. 내가 주께로 가오니 구세주여 복 주옵소서.~!! 정말 이 가사의 이름대로 우리가 정말 솔직 한다면 내 주님, 매 시간마다, 주님이 나를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사람의 인정을 더 구하게 되고 사람의 인정을 그리워하게 되는 연약함이 내 삶 속에서 있음을 알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 가사처럼 오늘만 이 후렴 부분을 불러보자. -그 다음에 나오는 성경에는 ‘중풍병자’이다. 오늘날에는 의학이 발달해서 중풍 혹 즉 뇌졸중이 와도 시간 내에 병원에 가면 몸이 마비되어 움직이는 것을 피할 수 있지만, 예수님 당시에는 그 중풍이 정말 어려운 병이었다. 뇌졸중은 몸이 마비되기 때문에 평생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병이었다. 누군가의 도움이 아니면, 화장실 가는 것도 힘들었다. 그 마음에 답답함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가 있겠는가! 예수님 당시에는 매독이라는 성병도 그렇다. 오늘날처럼 항생제도 없으니 병이 오래될 경우 그것이 사람들로 하여금 중풍을 걸리게 하는 주요인이었다고 말했다. 이 병자는 스스로 움직일 수 없고 항상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하는 자신의 연약함을 절감할 때마다 자신의 죄를 기억하고 죄책감으로 몸부림쳤을 것이다. 그런데 이 중풍병자는 과연 누구인가? 바로 중풍병자의 모습이 우리 삶 가운데서 발견될 수 있다. 끊고는 싶은데 자기 힘으로 되지 않아서 낙망하는 자가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다. 또 우리의 죄로 인해서 죄책감으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을 더 이상 바라보지 못하는 영적 질식의 상태일 수 있다. 자신의 형편으로 좌절하고 낙담하고 지쳐있는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고 내 모습일 수 있다. 또 식어버린 부부의 사랑과 대화 속에서 서로 바라보며 아무런 기대조차 없는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상황일 수 있다. 바라볼 때마다 짜증나고 그렇다고 어찌할 수 없고 사사건건 부딪히는 상황들 속에서 우리는 안 맞아도 너무 안 맞는다고 하면서 살 수도 있다. 내 인생만도 버거운데, 우리에게 말도 못하는 우리의 자녀들의 방황과 상황들, 수없이 상처받고 멍들어버린 부모님들의 마음일 수 있다. 상황들을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제가 이 삶을 살아오면서 아이들을 키우면서 어떤 시기에 겪었던 마음들이기에 정말 이런 말을 할 때마다 그 때 아픔들이 기억 속에 남는다. 정말 자녀들과 행복하게 살아가는 살고 싶은데, 아이들의 방황과 중독, 그런 것들로 우리의 마음이 너무나도 피폐해지고 바로 이런 인생들 가운데서 내 자신이 중풍병자가 되어서 마비 된 것 같은 삶이 마비된 것 같이 절망할 때가 있다.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 그것으로 끝났다면 삶에 소망이 없을 것이다. *마가복음 2:3-7절,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바로 예수께 나아가는 것이다. 여기에는 예배라는 단어가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그 중풍병자는 그 친구들의 도움으로 그 지붕을 뚫고 통해서 예수님의 앞으로 나아간다. 여러분, 예배가 무엇인가?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이다. 주님은 무소부재(無所不在)하신 분이시다. 어떤 때는 우리 가운데 나타나실 때가 있다. 그 주님의 임재를 특별하게 약속하신 것이 바로 예배이다. *마태복음 18:20절에, 20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하나님을 거절하고 스스로 살려는 인간의 열망인 절대적인 고독과 불행을 내어던지고 주님 앞에 예배로 나아가는 것이다. 중풍병자의 가장 절박한 필요가 무엇인가? 당연히 중풍 병의 치유일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절박한 육신의 필요보다는 주님은 그 중풍병자의 정말 필요한 것을 아셨다. 그렇기 때문에 마태복음 2장에서 그 중풍병자의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가 만일 너의 병만 고치려고 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진정한 자유가 아니다. 질병의 문제는 언제든 또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너의 안에 있는 모든 죄책감, 두려움 자체를 나에게 맡기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현대의학은 모든 병의 근원은 스트레스라고 이야기 한다. 그러나 성경을 우리가 읽게 되면 그것 스트레스의 뿌리는 바로 우리 안에 깊이 자리 잡고 있는 죄책감이다. 바로 죄의 문제인 것이다. 예수님은 그 병을 고치시기 전에 우리 안에 있는 그 죄 문제를 해결하기를 원하신다. 여기에 친구들이 나오는데, 때때로 주안에 있는 자매들과 중보를 통해서 주님 앞에 나갈 만큼 인생의 어려운 일들이 닥쳐온다. 이 네 명의 친구들은 우리가 속한 다락방이며, 크게 보면 교회이다. 본문에 나오는 중풍병자는 정말 복 받은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참다운 친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남의 집에 지붕을 뚫어서라도 예수님 앞에 데려갈 수만 있다면 그 일을 하고자, 대가를 지불하고자하는 친구들이었다. 이것이 바로 다락방의 참 모습이다. 나아갈 수만 있다면 다락방의 참 모습이다 찬양 사역부에서 다락방을 섬기면서 암치료중인 교구장님이 최선을 다해서 날마다 카톡에 기도문을 올리시고 순장님들을 격려하고 섬기시는 모습을 보면서 교구장님이 몸이 연약한 상태에서 새벽에 일어나다가 힘을 주다가 넘어져 팔이 부러지는 안타까운 그런 상황이었는데, 순장님들이 합심하고 기도하고 교구장님을 위로하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바로 이 중풍병자를 주님 앞에 데리고 나오는 네 명의 친구들이 바로 순장님들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분들이라고 모든 것이 다 맞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내가 중심이 아니고 주님이 중심이기에 살아가는 삶이기에 그렇게 섬기고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이 죽기까지 사랑하는 존재들이다. 순원 각 사람에 대한 주님의 신뢰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우리의 치우치고 부족한 믿음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믿음과 신뢰를 우리가 알기 때문에 때로는 우리 서로를 통해서 우리를 깎아 가시고 다듬어 가시는 주님께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를 하나님은 깍아 가시고 다듬어 가시지만, 부부 관계가 깎아 가시는 관계가 있겠는가? 여기까지 하겠다. 그래서 부부관계 속에서 하나님은 계속해서 다듬어 가시고 우리 안에 있는 보배가 점점 빛나게 하시는 그런 귀한 계획과 선하심이 있다. 오늘 이 아침에 어떤 상황에 있든 우리가 그 주님의 선하심을 정말 붙들고 소원하길 간절히 바란다. *마가복음 2:5절에,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주님께서 그 중풍병자를 고치실 때에 그의 믿음이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그들의 믿음이라고 하신다. 항상 예배 때마다 내가 은혜 받는 것이 중요하긴 하다. 왜냐면 은혜로 살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지 않고 그들의 믿음이 될 때 우리 예배 중에 주님은 주님의 일을 이루실 것이다. 특별히 토비새에 나온 모든 성도님들, 우리가 온라인으로 집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 여전히 주님은 제한 받지 않으시고 주님은 주님의 일을 이루실 것임을 확신하고 약속하신다. 온라인으로 드리는 예배 가운데 우리를 살만하게 하는 것이 많다. 집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 정말 집중하지 않으면 온전하게 예배를 드리기가 어렵다. 그러나 어떻게 든 우리가 항상 예배로 주님 앞에 나아갈 때 우리가 정말 그들의 믿음이 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할 때, 우리 교회 가운데 주님은 우리가 가운데 계속해서 주님의 일을 하실 것을 믿는다. 전통적인 찬양대는 입례 송, 기도 송, 그다음에 설교 뒤에 3-4분, 이런 것만이 자기들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미국 같은 경우는 벌써 많은 교회가 찬양대가 없어진다. 그러한 것들을 보면서 지금 이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기다리시는 찬양대, 찬양 팀, 성도님들은 어떤 것인가? 바로 담임 목사님과 함께 예배의 끝까지 영적 전쟁을 함께 감당하는 찬양 팀 성도들이다. 이 말씀에 근거한 믿음의 태도를 바꾸기 시작할 때, 예배드리는 태도가 달라지게 된다. 오늘 아침 특별히 찬양 팀과 찬양대원들 중에서 온라인으로 들어온 찬양대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여러분들의 숫자가 몇 명이든지 간에 그들의 믿음이 될 때, 바로 네 사람의 친구가 예수님 앞에 중풍병자를 데리고 나왔을 때, 그들의 마음을 보시고 역사하시는 주님이시다. 꽤 오래된 일이다. 남가주에 있을 때, 예배 기획을 하던 중에 성 금요일 날 하나님께서 아이디어를 주셔서 장로님 한 분, 교역자 한 분과 짝을 지어서 본당과 보조 예배 실에 배치를 하고 그날 우리 성도님들 중에서 본인의 질병 또는 가족의 질병을 위해서 기도받기 원하시는 분들을 위해서 기도를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그렇게 많은 분들이 질병을 위해 기도하고자 했다. 실질적으로 상황을 볼 때 얼마나 많은 분들이 줄지어서 나오는지, 성령대로 기도를 했는데, 굉장히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 시간을 마치고 성도님들이 좌석으로 돌아갔을 때, 담임 목사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다. 여러분들 중에 인생에 절박한 기도의 제목이 있는 분들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시라고 하셨다. 그렇게 말씀하시자 거의 80퍼센트 이상이 일어났다. 중요한 것은 그 자리에서 회개를 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지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가 지금은 비 대면으로 주일에 보지는 못하지만, 정말 주일 예배뿐만 아니라 우리 교회 수요, 토비새예배 때에 겉으로 웃고 있지만 속으로 많이 울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 줄 모른다. 한 번은 찬양대 지휘를 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어떤 여자 성도님이 몸 배 바지를 입고 들어왔다. 그분은 제 옆에 앉아서 보니 백도 없고 아무것도 없이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목사님의 설교 시간 내에 그 신발을 뒤집었다 엎었다 했다. 처음에는 ‘이 분이 마음이 어려우시구나!’ 했다. 그래서 그냥 기도했다. 주님 만져주시길 기도했다. 이 분이 정말 울기 시작했다. 그 경험을 하면서 조금 전에 말씀한 성 금요 예배 때에 80퍼센트 성도님들이 일어난 그 모습을 보면서 이것이 현실이라고 기도했고, 이민자이기에 더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교회에 주일예배와 모든 예배 가운데 정말 인생에 어려운 가운데를 통과하면서 나오시는 분들이 있다. 그런데 우리가 나의 문제가 여전히 있지만 우리가 내 문제에 함몰되지 않고 마가복음 2장에 약속하신 그들의 믿음이 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마다 그런 마음으로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가 상상치 못할 하나님의 일을 계속해서 이루어 주실 줄 믿는다. 이런 은혜가 그들의 믿음이 되길 축복한다. ♣요약 주님께서 역사의 시대마다 엄청난 도전과 시련들이 있었지만, 코로나 기후변화 그리고 혼란스런 정치적인 상황들 가운데 우리를 괴롭히는 것이 아닌, 우리가 더 주님 앞에 나아가고 또 우리를 주님의 형상으로 빚어 가시는 삶임을 믿고 감사하며, 주님만을 따라가며, 이 모든 상황을 나아지기를 기다리는 자들이 되지 않고 오히려 이런 상황일 때, 우리의 부르심을 더 믿고, 이런 상황에도 그들의 믿음이 되어 희생의 자리, 기쁨으로 나아가는 역사를 우리 가운데와 교회 가운데 내려주실 것임을 확신하고 기도해야 한다. 그들의 믿음으로 중풍병자도 주님 앞에서 치유를 받고, 본질적인 죄의 문제가 해결됨과 그 네 명의 친구들처럼, 우리는 주님만 만나게 되면 중풍병자와 친구에게도 임재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임재하실 줄 믿는다. 우리도 그들의 믿음이 되어 순종하여 매 순간, 매 시간 주님 앞에 나아가자. -이들의 믿음은 장애물을 극복한 불굴의 믿음이었고, 위험을 감수한 담대한 믿음이며, 타인을 위한 이타적 믿음이요, 구원의 열매를 맺은 결실의 믿음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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