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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2년 3월 5일)

제목: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말씀: 갈라디아서 4:31, 5:1
대표기도: 김현숙 권사님
말씀읽기: 김수영자매(청년5국), 임채운형제(대학1부)

설교자: 박명수 교수님-초빙(서울신대 명예교수,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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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4:31,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갈라디아서 5:1,
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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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시점에서 중요한 일을 하는 교회가 중요하다. 

 
 
♣요약
우리 사랑의교회가 믿음의 4대가 금식을 선포하여 나라와 민족을 위해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이번 대선을 통해 세대와 성별, 지역, 계층, 이념 간의 갈등이 사라지고 복음의 능력으로 한반도를 나타내며 모든 영 가족이 목숨을 건 신앙으로 자주 독립을 이루어 낸 선대의 믿음을 이어 받아 위기를 극복해 낼 기도의 횃불로 타오르기를 한마음으로 결단해야 해야 한다. 지금 전쟁으로 비참함 가운데 있는 우크라이나를 불쌍히 여겨 속히 주님이 이 전쟁을 거두어 주시길 기도하며 아픈 영혼들을 치유해 주시길 주님 앞에 금식으로 나아가 기도의 실천을 이루어야 한다.
 
 

-바울은 지금까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서만 의롭게 될 수 있으며 모세의 율법은 이제 더 이상 효력이 없다고 말한다. 그런 다음 이제 그는 그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하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한다. 우리는 복음 아래에서 해방을 얻어 자유롭게 되었다. 또한 우리의 이 자유는 예수 그리스도에 기인된 것이다. 즉 우리를 자유롭게 하신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이 자유 안에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않는' 것이 우리의 의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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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3월 2일)

제목: "솔로몬이 구한 것은"
말씀: 열왕기상 3:5-10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설교자: 전승현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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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3:5-10

5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6 솔로몬이 이르되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그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항상 주사 오늘과 같이 그의 자리에 앉을 아들을 그에게 주셨나이다. 
7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8 왕께서 택하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10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든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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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에게
오늘 본문의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말씀이다. 우리가 솔로몬을 생각할 때, 솔로문은 지혜의 왕으로 기억한다. 특별히 우리에게 주신 이 말씀이 솔로몬이 지혜의 왕이 되는 과정이라고 살펴볼 수가 있다.
 
저도 어렸을 때, 주일학교에서 이 말씀을 참 많이 들었을 음을 기억한다. 특별히 어렸을 때, 이 말씀 가운데 제게 은혜로 다가온 말씀은 바로 13절의 말씀이다.
 
*열왕기상 3:13
13 내가 또 네가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왕들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 왜 이 말씀이 제게 은혜가 되었냐면 솔로몬은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간구했다. 하나님께서 솔로몬이 간구한 내용을 들으시고 흡족해 하신다. 그리고 솔로몬에게 지혜뿐만이 아니라 자기가 구하지 않은 것 부귀와 영화도 같이 주겠다고 말씀하신다.
 
어릴 때 이 말씀을 듣고 마치 전래동화 금도끼 은도끼를 말했을 때, 내 도끼는 새 도끼라고 그 할아버지가 두 도끼를 다 주었던 거처럼 저도 막연한 기대가 있었던 것 같다. 제가 하나님께 구했던 것, 받기를 원했던 것, 그것은 좋은 옷, 좋음 음식, 좋은 물질, 아무튼 내 눈에는 좋은 것들이 참 많았던 것 같다. 그런데 그것을 직접적으로 양심에는 찔림이 있었다. 그래서 솔로몬이 구했던 것처럼, 하나님, 저는 지혜를 받기를 원합니다. 솔로몬이 원했던 그 지혜를 허락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며 하나님께서 ‘네가 구하지 아니한 것 그 안에 있는 것을 내가 너에게 주겠다.’ 그런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마치 그 지혜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만능키처럼 느껴졌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내가 장성하고 목사가 된 다음에 너무나도 익숙했던 말씀을 묵상하게 되니까 이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뜻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단순하게 그렇게 지혜를 달라고 간구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오늘 이 말씀은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서 1천 번의 번제를 드리고 난 이후에 등장하는 이야기 이다.
 
여러분 솔로몬이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렸다. 혹자는 그 일천 번제가 횟수로 열 번의 번제라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일천 번의 번제가 합하여 하나님 앞에 드렸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찌 되었던 누구나 그렇게 쉽게 따라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제사이다. 그런데 솔로몬이 왜 예루살렘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 기드온까지는 약 10킬로나 떨어져 있다는데 그 기브온까지 가서 혼자서 간 것이 아니다.
여러분,
일천 번제를 드리기 위해서 이기에 일천 마리에 합당한 송아지와 양을 이끌고 그 기브온 산당까지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솔로몬이 왜 그 기브온 산당까지 가서 일천 번제를 드렸겠는가? 물론 자신을 이스라엘의 세 번째 왕으로 세우신 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하나님 앞에 일 천 번제를 드렸을 것이다. 단순하게 그냥 감사의 의미로 일천 번제를 드린 것이 아니라 오늘 본문과 같은 내용이 역대 하 1장에 등장하고 있는데 역대 하 1장에서 솔로몬서 하나님의 응답을 받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볼 수가 있다. 쉽게 생각할 아마 솔로몬의 마음 가운데 정말로 뜨겁게 하나님 앞에 간구하는 갈급함이 있었던 같다. 응답 받고자하는 응답 받고자 하는 기도의 제목이 있었던 것 같다.
 
여러분, 우리가 생각하기에 솔로몬은 왕이 되었다. 왕이 되었기 때문에 이제는 호의호식하면서 편하게 살 수 있겠구나! 로 쉽게 생각할 수 있지만 솔로몬 입장에서는 자기가 왕이 되었을 때 백성들을 어떻게 다스릴지를 고민했을 것이다. 솔로몬이 가진 큰 약점, 핸디캡을 살펴봐야 한다.
 
솔로몬이 가진
첫째 핸디캡은 무엇인지를 보자, 그것은 바로 나이이다. 오늘 본문에 말씀에서도 솔로몬이 이렇게 말씀한다.
 
*열왕기상 3:7,
7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종은 작은 나이라 출입할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한다. 여러분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은 40세에 왕이 되었다. 두 번째 왕 다윗은 30세에 왕이 되었다. 이 솔로몬은 아마 10대 후반이나 20대 전후에 왕위에 올랐을 것이라고 말한다. 솔로몬이 왕위에 올랐을 때, 단순히 나이가 어린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울은 40세에 왕이 되었을 때는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그들은 너무나도 오랫동안 왕이 있기를 원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해서 사울을 왕으로 초대 왕으로 세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환호성으로 기뻐한다. 두 번째 왕이었던 다윗은 이미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그의 인기가 하늘을 치솟았다. 그렇게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세 번째 솔로몬은 그 전에 업적이 있었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솔로몬은 다윗 왕이 50세쯤 늦게 얻은 아들이다. 얼마나 사랑하고 애지중지 했을 것이며 그냥 아들이 아닌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서 얻은 아들이며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이후 얻은 아들이기에 아마 다윗 왕에게는 그 어떤 왕자들보다 솔로몬을 사랑했을 것이다.
 
그렇게 솔로몬이 왕위에 올랐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하기에도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을 것이고 솔로몬도 익히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두 번째 이 솔로몬이 가지고 있었던 핸디캡이 있었다면 잘 알려진 출생문제이다. 여러분, 다윗의 정상적인 부인을 통해서 얻은 아들이 결코 아니다. 다윗이 자신의 충신이었던 우리아를 전쟁터에게 죽게 만들고 그의 아내 밧세바를 뺏어서 얻은 아들이 솔로몬이다. 여러분, 솔로몬이 생각하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를 왕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를 생각한 것이다. 여러분 알다시피 이스라엘 백성들이 호락호락 했던 백성들이 아니다. 왕 앞이라고 벌벌 기면서 떠는 그러한 사람들이 아니다. 앞에서 알다시피 다윗이 골리앗을 무찔렀을 때, 다윗을 칭송한다. 무엇이라고 하는가? ‘사울이 죽인 자는 천 천 이요,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라고 한다. 여러분 현직에 지금 사울이 있다. 그 와중에 사울을 깍아 내리는 일을 하고 있다. 이것은 그냥 다윗이 대단한 사람이다가 아니라 사울왕은 겁쟁이다. 골리앗 앞에서 벌벌 떨었는데 이 다윗은 사울보다 열배나 더 용감하다고 말한다. 여러분 그렇게 말하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큰 출생의 약점을 가지고 있는 솔로몬이 왕위에 올랐다. 아마 그 마음과 떨림과 두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여러분 그리고 솔로몬이 여러 가지 사역도 있었겠지만 해야 될 사역이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 다윗이 그렇게 오랫동안 숙원 했던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 것이다. 여러분, 이 성전을 지을 때 다윗이 모든 재원부터 건축할 것들을 준비했지만 이 건축을 누가 하는가? 이 건축은 사람이 하게 된다. 수만 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도해야 할 사람이 바로 이 솔로몬이다. 바로 자기가 다스릴 수 있을까? 과연 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왕으로서 인정을 받을 수 있을지에 두려움과 떨림이 바로 이 솔로몬에게 있지 않았겠는가? 역사적으로 보게 되면 어떠한 자가 왕위에 올랐을 때, 그의 자리가 위태로우면 자연적으로 따라오는 통치 방법이 있다. 피의 통치이다. 자기 자리를 위협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게 내 피붙이라고 할지라도 다 숙청한다. 그리고 백성들이 아무 말도 못할지라도 억압과 핍박을 하며 피의 통치를 하게 된다. 솔로몬이 다른 왕들처럼 생각했다면 그렇게 동일한 방법으로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한다. 하나님의 응답을 기대하면서 주님 앞에 일천 번제를 드리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서 나아가 하나님께 지혜를 간구하였다고 그렇게 생각할 수 있다. 오늘 본문의 내용과 똑 같은 내용이 역대하 1장에 등장한다고 했는데 물론 그렇게 나와 있다. 우리는 기브온 산당 그 지역 어디쯤에서 이 솔로몬이 하나님께 그렇게 간구 했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열왕기상 3장과 역대 하 1장에 나와 있는 내용에 약간의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바로 솔로몬과 하나님과 대화하는 그 공간적인 배경이다. 앞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여러분 오늘 솔로몬과 하나님과 대화하는 공간이 바로 솔로몬의 꿈이다. 오늘 말씀에서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기브온에서 밤에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리라고 한다.
 
*열왕기상 3:5,
5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열왕기상 3:15,
솔로몬이 깨어 보니 꿈이더라 이에 예루살렘에 이르러 여호와의 언약궤 앞에 서서 번제와 감사의 제물을 드리고 모든 신하들을 위하여 잔치하였더라.
-여러분, 여기 계신 분들 꿈을 한 번씩 다 꾸어보셨을 거라 생각한다. 꿈을 꾸게 되면 꿈속에 누가 등장한다. 내가 등장하지 않는 꿈은 거의 없다. 꿈은 내가 등장하기에 그 시점은 1인칭 시점일 것이다. 여러분에게 질문을 하나 드려본다. 꿈에 여러분의 의지가 발현이 되는가? 쉽게 말하면 ABC가 있다고 가정해서 그중에서 내가 ‘A를 선택해야지, B를 선택해야지, 아니 C를 선택해야지’ 내 생각과 내 의지가 그 가운데 발현이 되는가? 그렇지 않다. 내 꿈이고 내가 등장하지만 내 의지가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 꿈속에서 내가 그냥 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뿐이다. 이 시점이 일인칭 주인공 시점이 아니라 일인칭 관찰자 시점이다. 그래서 저는 혹시나 구약시대 때의 사람들은 지금의 우리와 다르게 꾸나, 우리보다 고도로 발달되어서 그 꿈속에서 자기의 의지가 발현이 되었을까를 생각해서 다니엘과 요셉의 꿈을 살펴보았는데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도 그 꿈속에서 지켜 볼 수가 있다. 무슨 말씀이냐면 우리는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만약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그 지혜를 구했다면 그는 그곳에서 일천 번제를 드리고 그는 계속 기브온 산당에서 머물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스려야 될지 그 통치 방법에 대해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솔로몬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다스려야 될지 모르고 있는 상황이다. 힘으로 해야 할지, 다른 무엇으로 해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때 하나님께서 꿈속에 찾아오신다. 그리고 네가 구해야 할 것이, 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스려야할 그 방법이 무엇인지를 그것을 가르쳐주신다. 그것이 무엇인가? 다른 열 왕 들처럼 힘으로 피의 통치를 하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혜로 솔로몬은 하나님의 지혜로 다스려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처럼 솔로몬이 하나님께 간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솔로몬을 간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그 꿈을 통해서 가르쳐 주신다. 또 하나는 우리는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지혜를 간구했다라고 말을 한다. 맞다. 솔로몬이 구한 것은 맞다 역대 하에서도 그렇게 말씀한다. 오늘 말씀을 살펴보니 약간의 미묘한 차이가 있다.
 
*열왕기상 3:9,
9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여기에서 솔로몬 엄격히 말하면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가르쳐주고 계시는데 지혜라고 언급하지 않으신다.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듣는 마음’이라고 말한다. 우리의 성경이 개역개정인데 옛날 개역한글 여기에는 ‘지혜로운 마음’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지혜를 구했구나! 쉽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히브리어 원어로 보면 듣는 마음, 들을 수 있는 마음으로 기록되어 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할 때, 듣는 마음이라고 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그것이 듣는 마음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11절에서는
 
*열왕기상 3:11,
11 이에 하나님이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장수하기를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 원수의 생명을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으니.
-송사를 듣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과 솔로몬의 대화를 말하는가? 아니다. 송사는 사람과 사람과의 이야기이다. 그것을 듣는 마음을 원했던 것이다. 여러분 듣는 마음이 과연 무엇인가? 특히 우리 성도님들 가운데 가정에 어린 자녀나 손자들이 있는 분이 계실 것이다. 대 여섯 살 되는 아이들은 대체로 어린이 집이나 유치원을 다니게 되는데 그곳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내가 있었던 이야기가 있다고 할아버지 할머니께 들어보라고 한다. 그러나 이 아이들이 말을 조리 있게 말을 못한다. 부모님이나 할머니나 할아버지를 찾아와 이야기를 하면 긴장하게 된다. 이 아이가 하는 이야기 속에는 많은 등장인물이 등장한다. 맨 먼저 이 이야기를 들을 때 이 등장인물들, 그리고 우리 아이와의 관계를 속히 캐치해야 한다. 이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그 중에 누가 우리 아이와 친한지 누가 친하지 않는지를 구별해야 한다. 아이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 빌런(악당)이 등장한다. 그래서 어떤 아이가 괴롭히는지, 어떤 아이가 친구를 괴롭히는지를 듣게 된다. 마치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들을 때, 학창시절에 영어 듣기 평가를 듣는 것처럼 귀를 집중해야 된다. 무슨 이야기인지를 알아들을 수 없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단어를 듣고 그 알고 있는 단어를 통해서 전체를 유추할 수 있다. 그래서 아이가 어떤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가 들어가면 아! 그랬구나 하고 반응을 하게 된다. 부모님이나 할배 할매가 알아듣게 된다. 혹시나 아이가 이야기를 하는데 아이의 이야기를 중간에 끊고 아이야, 네게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도대체 하나도 못 듣겠어! 라고 하며 좀 더 생각해보고 천천히 이야기 해보라고 하는 분이 여기에 있는가? 그렇지 않다. 어떻게 해서든지 그 아이의 숨소리조차도 집중해서 듣고자 하는 모습이 있다. 왜 부모가 그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 아이의 목소리를 집중하며 듣는가? 바로 당연하다. 사랑하기 때문이다. 여러분 우리가 생각할 때, 세상의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라 이야길 할지 모르겠지만 오늘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말씀하셨던 그 지혜는 듣는 마음, 바로 그 사랑하는 한 영혼을 그 사랑 가운데 하나님이 지혜가 있음을 말씀하신다.
 
여러분 예수님이 그렇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말씀한자는 누구인가? 예수님이 가까이 한 사람들인가? 아니다. 삽교를 보고, 수가성 여인을 보면 알 수 있다. 사마리아 여인, 병든 자들의 모습을 볼 때, 유대인들은 그들과 함께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과 함께 하신다. 그들과 함께하시고 그들과 대화를 하신다.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신다. 놀라운 것은 그 듣는 예수님을 통하여서 그 가운데 신뢰의 역사가 나타나고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지혜는 바로 이러한 것이다.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적인 지혜와 달리 내가 그 영혼을 향해서 하나님 아버지의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사랑하는 마음을 품을 때, 그 가운데 하나님의 마음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지혜를 달라고 할 때, 그 지혜는 내 옆에 있는 지체에 대해서 그 사랑하는 마음, 듣는 마음이 가능할 때, 그 가운데 하나님의 지혜가 임하게 된다고 말한다. 본문 말씀을 읽지 않았지만 16절 이후에 보면 솔로몬의 재판의 내용이 등장한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 잘 안다. 교회 나오지 않은 사람도 잘 알고 있다.
 
내용은 두 여인이 왕 앞에 나온다. 그리고 한 사내아이를 두고 서로 자기 아들이라고 주장한다. 이 이야기를 듣고 솔로몬이 칼을 가져오라고 한다. 그리고 무엇이라고 명령하는가? 이 아이를 반으로 쪼개라. 그래서 이 두 여인에게 한 쪽씩 나누어 주라고 한다. 그 때 이 이야기를 들었던 한 여인이 왕이시여 그리 말하고 한다. 이 아이를 저 여인에게 주라고 말한다. 반대의 여인은 그리하시라고 한다. 어차피 내가 못 갖게 될지 모르니 서로 나누어서 갖겠다고 말한다. 이 때 솔로몬이 아이를 죽이지 말자고 말한 그 여인이 진정한 아이의 엄마이고 쪼개라고 말한 여인이 가짜라고 판결한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들으면 정말로 솔로몬이 지혜의 왕이구나! 할 것이다. 이 단편적인 사건으로 인해서 등장함을 생각할 수 있다. 물론 맞다. 여러분, 이 이야기를 묵상할 때, 핵심을 더 깊이 묵상하게 되면 솔로몬의 지혜가 단편적으로 나타났다는 것은 단지 그것은 아니다. 16절에 보면 이 여인이 어떠한 여인이라고 소개한가? 창기 두 여자이다. 창기는 이스라엘 회중에 들 수 없는 부정한 여인이다. 오늘날에도 어떠한 사람이 이런 일에 그런다면 언론이나 뉴스에 관심을 가질지는 모르겠다. 이 여인의 신분이 드러나게 되면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듣기를 꺼릴 것이다. 그 이유는 부정한 여인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그 아이는 사생아이니 너희는 그러한 여인인데 과연 모성애가 있겠냐는 것이다. 너희 둘 중에 아무나 누가 키운들 무슨 상관이냐고 그렇게 쉽게 생각할지 모른다. 여러분 이 두 여인이 아닌 진짜 어미가 더 맞는 말일 것이다. 진짜 어미가 처음부터 솔로몬 왕에게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왕을 만난다는 것은 그리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당시 이스라엘의 어마어마한 강대국에 그 통치하는 솔로몬을 만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처음부터 만날 생각도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주위의 알고 있는 혹시나 아이를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을 찾아갔을 것이다. 이 아이가 내 아이라고 봐달라며 했을 것이다. 그런데 생각하기에 아무런 그 이야기를 듣지 않았던 것 같다. 결국에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 여인이 왕 앞에 찾아온다. 찾아왔을 때 그 궁전 앞에 몇 날 며칠을 울고 부르짖으며 왕을 만나기 위해서 외쳤을 것이다. 그런데 이 왕을 어렵게 만난다. 그리고 자기 이야기를 하게 된다. 세상 그 하나 자기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기대도 하지 않았던 그 왕이 그 여인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그 여인에 대해서 깊이 이해해보자. 여러분 이 여인이 처음부터 그렇게 음란한 곳에 빠졌겠는가? 아마 그곳에 갔을 때 과연 어떤 마음이었을까? 과연 할 수 있는 마음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 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고 그 어떠한 사람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구나, 그런 밑바닥 같은 그런 자괴감으로 그 앞에 가지 않았겠는가? 어찌 보면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뜻하지 않게 계획했던 것은 아니지만 뱃속에 아이가 생긴 것이다. 나는 비록 사랑받지 못했지만 뱃속에 있는 아니는 너무나도 사랑하는 아이로 키우겠다고 출산을 다짐하며 기다린 것이다. 아무 희망도 없었던 그 아이는 한 줄기 빛과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잃어버리는 일이 터지게 된다. 그런데 그때 솔로몬을 통해서 이 여인을 죽을 뻔 했고, 잃어버릴 뻔한 그 아들을 다시 찾게 된다. 이 여인에게 있어서 그 아이만 찾는 것을 끝났는가? 이 여인에게 있어서 더 구체적으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제가 상상하기로는 이 여인은 ‘나는 사랑 받지 못한 자니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으니 나는 이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그 마음 가운데 솔로몬의 그 듣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놀라운 치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 여인을 두 번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여러분 우리가 듣는 마음을 가질 때, 나타나는 놀라운 치유와 역사, 회복이 바로 이것이다. 놀라운 지혜가 세상 적인 지혜로 말미암아 회복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지식과 지혜가 넘쳐난다고 말을 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반대로 힘들다고 한다. 그 어느 때 보다 힘들다고 말한다. 세상의 지혜와 지식은 어떠한가? 내가 옳다고 나의 가르침을 받으라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혜는 결코 그렇지 않다. 정말로 비참한 자리에 있는 그 영혼을 찾아가 그 어려운 이야기들을 들어주고 긍휼이 여기고 그렇게 함께 나눌 때 놀라운 회복이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치유와 회복이 여인에게 국한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솔로몬에게도 있었을 것이다. 여러분, 누군가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마음을 갖는 것이 선행되어야 하는 조건이 있다. 그것은 내가 어떠한 존재인지 확신한 인식이 있을 때 그것을 들을 수 있는 마음이 있다고 생각한다. 솔로몬은 핸디캡이 있다. 출생의 비밀이 있다. 솔로몬이 그런 생각을 안했겠는가? 나는 왜 정상적인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게 태어나지 않았을까를 생각했을 것이다. 형들과 차이가 있고 형들에게도 구박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스스로 나의 인생이 박하고 왜 이렇게 태어났을 것이라고 이야기 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어떤 이름을 주시는가? “여디디야, 하나님은 너를 사랑하다. 너를 사랑한다.”는 이름을 준다. 그리고 그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하게 된다. 왕이 되었을 때 나는 이제 왕이야 하면서 우쭐대는 것이 아니라 솔로몬에게 있어서 정말로 미천한 나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시고 나를 세워주셨다고 그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고, 나에게 있어서 사람들은 창기라는 그 여인을 부정하고 말할 수 있지만 그에게 있어선 멀리하고자 하는 그런 영혼이 아니었다.
 
왜냐면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떠한 존재인지를 확고히 알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그렇다. 여러분들은 어떤 존재인가? 세상에서 어떤 권력을 잡고 있는가? 하나님은 그러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셔서 우리를 당신의 아들로 딸로 인 처 주셨기에 우리가 그러한 확고하다면 그 세상의 어느 이야기도 들어주지 못할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
 
제가 사랑의교회 부임하기 전에 제가 겁을 좀 많이 먹었다. 제가 신대원에서 전도사들 가운데 사랑의교회에서 사역하고 있는 전도사님이 하나도 없었다. 전도사들끼리 이야기를 많이 한다. 사랑의교회는 참 수준이 높다라고 말했다. 한 단편적으로 이야기 하자면 목사님이 설교를 끝나고 난 다음에 내려가면 성도님들이 원어 성경책을 갖고 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목사님, 오늘 보니 성경에는 이렇게 나와 있는데 어떤 것이 맞는지를 질문을 한다고 한다. 또 어떤 성도님은 주석책을 가져와서 목사님 아까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주석은 그렇게 표현되지 않는다고 말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부임할 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기도했다. 주님, 제가 설교한 다음에 그런 성도님을 만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참 감사하게 그런 성도님을 만나지 않았다. 모르겠다. 지금이라고 쫓아올지는 모르지만 그런데 제가 사랑의교회에서 사역하면서 느끼는 것이 있다. 전도사 시절에는 사랑의교회가 수준이 높다. 라고 이야기를 했지만 사랑의교회 성도들은 참 지혜롭다는 표현을 참 달리 표현했다고 여겨진다. 왜냐하면 다락방, 제자반 등에서 우리 성도님들의 듣는 연습이 너무나도 잘 되어있다. 청중의 모습이 아니다. 제가 제자반을 할 때, 한 여 집사님이 본인은 이야기를 한다. 가끔 평범하게 이야기를 하는데 저쪽 끝에서 한 집사님은 훌쩍 훌쩍 운다. 저는 고민한다. 저 집사님이 운다. 왜 울지를 생각해 보았다. 공감대가 있는지를 보게 된다. 돌이켜보니 다락방, 제자반 등에서 집사님들의 이야기 속에서 그 마음이 준비가 되어 있고 그 사랑하는 마음을 집사님을 통해서 발견하게 된다. 여러분 그렇게 듣고자 하는 마음이 있을 때 하나님의 임재가 임하실 줄 믿는다.
 
그 하나님의 지혜가 임할 때, 놀라운 치유와 응답을 경험하게 될 줄 믿는다. 오늘 모든 성도님들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을 받는 그러한 존재이다. 그런 성도님들임을 확신하며 그 사실을 잊지 말고 오늘 날 때로는 교회를 지탄하는 사람도 있다. 단 우리도 자녀들을 키우게 되면 부모님의 관심을 받기 위해서 뭔가를 때리고 부수고 하는 아이들이 있다. 좀 잘못된 행동을 하기도 한다. 그 아이는 그 행동이 나에게 관심을 가져달라는 것이다. 내 이야기를 들어달라는 것이다.
 
세상에서 교회에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이야기를 할 때, 지금 당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하는 나에게 아우성이니 발견해야 하면서 그 영혼에게 다가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 가운데 하나님의 지혜가 임하는 사랑하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요약
-이 말씀을 솔로몬이 주님 앞에 듣는 마음을 간구했듯이 우리에게도 그 듣는 마음을 허락하시길 기도하며 세상의 지혜와 지식은 어던 것도 치유가 안 되듯이 우리는 한 영혼을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며 듣는 마음을 가진 자가 되어 하나님의 지혜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한없는 사랑의 자녀임을 깨달아서 그 사랑의 눈으로 옆에 지체들을 바라보고 용서하고 이해하고 품어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로 인해서 소외 되고 상처 받은 자들을 온전하게 주님의 자녀로 치유받고 회복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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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2년 2월 27일)
제목: ''천국과 지옥''
말씀: 누가복음 16:19~31
대표기도: 장은진 부목사님
사회: 장광천 부목사님(1부)
찬양: 영광찬양대 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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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6:19~31,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 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코로나 이 비대면 시대에 대면 예배를 드리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환경과 믿음을 주심을 찬양한다.
찬양한다. 감사하며 제가 3주에 걸쳐서 재장에 대한 새 판짜기에 대한 말씀을 해드렸다. 매 시간마다 누가복음 16장 마지막 부분이며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영원을 위한 연결고리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의 삶의 부분들이 영원한 연결고리(eternally cartilage ring)가 되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예비적으로 말씀을 드렸고 또 부자와 나사로에 대해서 우리가 말씀을 들으면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확고하게 우리가 확신하면서 감사하면서 이 말씀이 우리에게 웨마(선량한)의 말씀이 되길 바란다. 요즘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강단에서 잘 안 전한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잊혀 진 교리나 가르침에 되기가 십상이다. 사실 맨날 지옥 설교하면 누가 교회를 나오겠나? 그러나 목회자로서 분명한 입장은 우리에게 죽음이 실재적인 것처럼 천국과 지옥도 실재적임을 확신한다. 그래서 오늘 간절한 목표는 여러분을 설득하기 위한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천국과 지옥을 말씀하신 것을 성경대로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저와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문제이다. 알다시피 어제 이어령 박사님이 소천하셨다. 십년 전에 사랑하는 딸을 먼저 하늘로 보냈고, 그분이 말씀하셨다. “죽음이 인생의 허무의 절대로 끝이 아니다.” 라고 하시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확고한 확신을 말씀하시면서 “천국의 실존을 믿는다.”라고 하셨다. 어제 빈소에 다녀오면서 한국의 지성 통령이나 다름없는데 그가 천국의 실존을 확실히 믿는다는 것이 한국교회의 은혜라고 느꼈다. 그 이박사님은 또 다른 이야기를 하셨는데 “과학을 적당히 알면 무실론 자가 되고, 과학을 깊이 만나면 하나님을 만날 수밖에 없다.”라고 하셨다. 그 말씀이 이해가 갈 것이다. 제 이야기가 아닌 오늘 성경 말씀의 누가복음 16장 19-31절의 말씀을 보면서 다 한 절 한 절 다 소상하게 말씀해 드리겠다. 오늘 성령이 스승 되셔서 진리가 되시고 그 말씀 한 절 한 절이 우리의 마음의 교훈이 되어야 한다.
 
▷오늘 나사로는 영생을 얻어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이름이 나타나지 않은 부자는 이름이 없다. 거지 나사로이다. 이름이 없는 부자는 지옥에 간 것을 보여준다.

 
I. 지옥에 대해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누가복음 16:20,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 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19절 부자는 날마다 호의호식하지만 20절에 나사로는 그의 외모가 볼품이 없었고 거지였다. 헌데 투성 이로 부잣집의 대문 앞에 버려진 것이다. 온몸이 부스럼투성이로 헐었다. 그리고 부잣집 문 앞이 그의 생활터전이었다. 어떤 성경은 그가 부잣집 앞에 몸이 아파서 누워있었다고 말한다.
 
*누가복음 16:21,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부자가 먹고 남은 찌꺼기가 그이 음식이었고 어떤 사람들은 부잣집에 드나들던 사람들이 준 동전 하나를 던져주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았다고 한다. 나사로의 친구가 개들이었다. 개와 교제권이다. 친구가 개밖에 없다. 거지 나사로의 삶은 인생의 조그만 한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비참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 멋진 곳에서 외식을 하는 것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다. 밑바닥 인생이었고 인간적으로 자존감도 없고 미래에 대한 꿈도 품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나사로가 어느 날 죽었다. 제가 보기에는 나사로의 장례가 제대로 치러졌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 거지가 죽고 난 다음에 사람들이 아마 다 잊혀 졌을 것이며 아무도 애도하지 않았을 것이며 죽기 전 날 밤에 어떻게 보냈는지를 그의 임종이 어땠는지 아무도 몰랐다.
 
*누가복음 16:22,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러나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는 장사된다고 한다. 그가 숨이 멎는 그 순간 천사를 보았다. 부잣집의 문과는 비교가 안 되는 참으로 아름답고 고귀하고 멋진 진주 문을 보았다. 부잣집 문과는 비교가 안 되는 백배 천배 멋진 그 아름다운 문을 보았다. 천사들이 사람들처럼 동전을 던지는 사람들 대신에 오히려 두 팔을 벌려서 나사로를 환영했다. 이 땅에서는 환영과 대접을 받지 못했지만 놀랍게도 천사들은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으로 인도했다. 자 여기서 아브라함의 품은 예수님이 계시는 곳이고 지금 우리가 말하는 오늘 천국이 되는 곳이다. 더 이상 고통과 고난과 슬픔과 비참함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아니 모든 고통이 끝난 곳이다. 이렇게 말씀할 수 있다. 거지 나사로는 이 땅에서는 한마디로 패배자였지만 죽고 나서는 승리자가 된 것이다. 우리가 늘 이야기 하듯이 이 땅에서는 늘 우리가 순례자처럼 살지만 천국에서는 주인공처럼 산다는데 나사로가 그렇게 되었다. 자 거기에 비해서 부자는 뭐라고 되어있는가를 19절을 보면,
 
*누가복음 16:19,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날마다 호화롭게 물질과 시간을 향락과 쾌락을 위하여 허비한 사람이었다. 그 갖고 있는 물질들을 영원을 준비하는 연결고리로 사용하질 않았다. 한 마디로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사람이었다. 예전에 개역 판에서는 날마다 호화롭게 연락하는데 날마다. 파티하고 쾌락을 추구한다고 되어 있다. 그 집 문 앞에 있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고, 헌데로 부스럼으로 온통 병에 걸려 있고, 그 나사로를 어떻게 케어 할 마음이 전혀 없었던 사람이었다. 자, 이 부자도 이제 죽었다. 아마도 부자의 장례식은 어마아마하게 성대했을 것이다. 수많은 조문객들이 왔을 것이다. 유명 인사의 고별사를 들으면서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를 사람들이 말을 했을 것이다. 그의 시체를 담은 관은 화려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장례식에 온 사람들이 몰랐던 것이 있다. 장례식에 조문 와서 그 사람들이 몰랐던 것이 있었다. 그 사람들이 모른 것이 23절에 있다.
 
*누가복음 16:23,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여러분, 부자의 장례식에 조문객들이 부자의 추모사를 들으면서 부자가 지옥에 가 있을 거라고 누가 생각을 했겠는가? 똑 같다. 우리가 안타깝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 생명의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 피에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은 죽는 사람은 지옥에 가 있을 터인데 그걸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자 오늘 저는 제 이야기가 아니라 말씀대로 그대로 선포되길 원한다. 오늘 이 말씀이 왜 중요한지를 이 비유가 왜 중요한가? 이유는 우리의 이생에 끝나고 난 다음에 두 가지 목적지가 있다. 두 가지 목적지를 명확하고 분명하게 설명하기 때문이다. 천국이라는 목적지와 지옥이라는 목적지를 설명해 준다. 천국과 지옥의 중간 지대는 없는 것이다. 캐톨릭에서는 연옥이 있다고들 이야기 하는데 아니 연옥이 있기를 바라지만 연옥을 없다. 성경 어디에도 66권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특별히 예수님 믿는 우리는, 예수님의 피의 복음, 거듭나고 믿음을 가진 저희들은 죽으면 연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가는 것이다. 저는 제가 설교자로서 여러분들에게 오늘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우린 죽으면 천국에 가는 것을 믿기를 원한다. 예수님이 없이 죽으면 연옥이 아니라 지옥에 가는 것이다. 오늘 이것은 영원한 삶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죽고 난 다음에는 영원한 삶이 이어지는데 끝없는 기쁨의 삶이 이어지든지, 아니면 끝없는 슬픔에 이어지든지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면서 결코 어리석으면 안 된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의 복음, 피의 복음을 믿기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바로 가는데 우리가 즉시 가게 되는 것을 믿는 것이다. 생명의 복음을 믿고 있으면 주님 품에 바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분들은 죽을 때 편안하게 죽는다. 고통과 병중에 있던 분들도 주님 앞에 갈 때는 편안하게 갈 것이다.
 
데이빗 브레이너는 29세에 인디안 선교의 아버지인데 장인어른이 조나단 에드워드이다. 신학대총장이셨다. 미국의 지성인 중에 지성인이었다. 자기 사위가 29세에 하나님께 부름 받는 그 광경을 써 놓았는데 “내 사위 데이빗이 죽는 순간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온 땅 안에 가득 찬 것을 보았다.”라고 했다. 그 말은 허툰 말이 아니다. 의사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이 죽을 때 스데반이 돌을 맞아 죽으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예수님의 서신 것을 보고 영광중에 죽음을 맞이한다고 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주의 권속들은 예수님의 피의 복음을 믿고 영광중에 주님의 품에 안기기를 바라는 것이다. 정리하면
 
※죽는 순간 우리를 두 팔 벌려 환영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든지 아니면 이 세상에서 결코 알지 못했던 어둠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 어느 쪽이든 죽는 순간 우리의 미래는 돌이킬 수가 없다.
우리는 천사들과 구원받은 하나님의 신앙 선배들로 둘러싸인 찬란한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뵙거나, 아니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죄책감을 느끼며 버림받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두 극단 사이의 중간지대는 없다. 끝없는 기쁨이든지, 끝없는 슬픔이 있든지 둘 중에 하나인 것이다. 오늘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그 둘 중에 하나, 천국에 입성하기 위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민권, 비자를 주신 것을 믿어야 한다. 천국에 들어갈 시민권을 갖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빌립보서 3:20,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여러분과 나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대한민국의 패스포트는 세계 어느 나라나 다 가게 되는 것이 대한민국 여권이다. 그러나 여권이 없으면 어느 나라나 입국이 안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천국에 입성은 어떤 방법으로 시민권이 없으면 입성할 수 없다. 옛날에 미국 비자를 받기가 힘들었다. 비자가 없으면 못 들어갔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 저 나라에서는 비자가 발급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왜 이렇게 중요한가? 누가 천국을 가고 누가 지옥을 가는지를 정확하게 알려주기 때문에 이 비유가 중요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사회적 지위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부자여도 천국갈 수 있고, 가난해도 지옥갈 수 있고, 반대가 될 수가 있다. 사회적 지위에는 관계가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의 상태, 믿음의 상태가 중요하다. 믿음이 무엇인가? 오늘 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한다. 자세히는 말해주지 않지만 오늘 여기에 대한 믿음이 무엇인가? 왜 부자는 천국가지 못했고 나사로는 지옥을 가지 아니하고 천국을 갔을까?
 
오늘 이 내용은 부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나사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나사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부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지옥 간 것은 이해가 되지만 나사로가 왜 천국 갔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사람이 있는데 부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나사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이 없으면 못 산다고 했기에 나사로는 히브리 이름으로 ‘엘리에셀’이다. 나사로는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라는 뜻이다. 히브리 식으로 말하면 그렇다. 죽었다가 살아난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있다. 성경에는 거지 나사로, 오빠 나사로, 두 종류가 있다.
 
부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요즘 이 땅에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부자들이 많이 있다. 자유주의 신학교에도 부자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철학 계 부자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부자들, 리차드 도킨스같은 사람들, 한국에 그런 사람도 있다. 이 사람 dowool 김 OOO씨 등이 있다. 이 사람들은 수많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데리고 간다. 그럼 이 사람들은 뭐라 하냐면 하나님을 인간이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천국과 지옥도 인간이 만들었다고 하면서 이들이 자꾸 그런 식으로 하는지 왜 이들이 철학 계 부자들인가? 철학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인가? 그 밑바닥을 보면 왜 그리 주장하는지를 한 마디로 본인들이 지옥가기 싫어서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지옥을 만들겠는가! 라며 지옥이 없다라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이 지옥의 교리를 어떤 신화적인 세계관으로 간주해서 완전히 배재하는 그런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 배경을 살펴보면 지옥가기 싫은 것이다. 사탄에게 속은 것이다. 왜냐면 사탄은 한명이이라도 더 지옥에 데리고 가려고 한다.
 
그래서 알시스 목사님 같은 경우는
“지옥은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낸다고 하신다. 만일 하나님이 악한 자를 심판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은 선한 분이 아니시다. 히나님이 정의와 공의를 완전히 포기 했다면 하나님은 선한 분이 아니시다.” -알시스 목사님-
-그래서 지옥에 대한 말씀이 인기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성경은 실재로 지옥이 존재하는 것을 말씀한다. 우리가 정직하게 맞닥뜨릴 수 있도록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지옥에 대해서 자주 말씀하셨다.
 
*마가복음 9:47-48,
47 ㆍㆍㆍ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8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거기 지옥은 실체인데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끄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신화가 아니다. 어떤 전설이 아니다. 이것이 실체이다. 그리고 오늘 지옥에 대해서 실체인 것을 오늘 24절부터 뭐라고 이야기 하냐면,
 
*누가복음 16:24,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부자가 부르는 것이다. 지옥은 신화나 전설이 아니라 지옥은 실체이며 지옥에서 오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지옥가는 사람은 오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천국도 그렇다. 오감이 무엇인가 듣고 보고 느끼는 것 다이다. 불러, 물 한 방울로 혀를 축이게 해달라고, 하면서 불꽃이 너무 괴롭다는 것이 무엇이냐면, 느끼고 만질 수 있는 것이다. 지옥은 그냥 하나의 신화가 아니고, 지옥은 형벌을 의식할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오감이 존재할 뿐 아니라 25절을 보면, 뭐라고 나오냐면,
 
*누가복음 16:25절,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기억하라고 한다. 기억도 존재하는 곳이다. 오감도 존재하고 기억도 존재한다. 이는 성경적인 배경을 가지고 생각할 때, 우리 모두는 이 지옥의 실체에 대해서, 성경은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보다 더 많이 지옥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제가 오늘 이 내용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늘 또박또박 한 절 한 절 예수님이 직접 이야기 하신다. 우리를 위해 피흘려 주신 이렇게 지옥에 대해서 결연하게 생생하게 말씀하신다. 그이유가 무엇인가? 여러분이나 저나 한 명도 지옥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이 사랑의 주님이 우리를 위해 피 흘려주시고 모든 것을 다 해주신 그분이 이렇게도 생생하고 결연하게 처절하고 확고하게 말씀을 하신 이유는...오늘 이 자리에게 말씀을 듣는 여러분과 저, 한 명도 지옥 가는 것을 주님이 원하지 아니하신다. 주님의 목자의 심정을 깨달아야 한다. 이 세상 사람들은 걸핏하면 지옥 이야기를 한다. 입시지옥, 이 세상이 지옥이라며, 헬 조선, 은퇴지옥, 세금지옥, 솔로지옥, 그냥 표현이지 그건 지옥도 아니다. 지옥이란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이 땅은 지옥이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고통을 겪어도 그 자체가 지옥이 아니다. 지옥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특별한 장소인 것이다. 그것은 말로 다할 수 없이 끔찍한 곳이다. 오늘 이 비유는 사랑의 주님이 재물을 어리석게 사용한 이 부자가 결과가 비참한 것임을 말씀하신다. 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주님의 이 말씀의 키는 무어냐면, “너희들이 살아 있을 때 지옥을 대비하라.”고 하신다. 죽기 전에 늙기 전에, 후회하지 말고 지옥을 대비하라고 하신다. 이 비유의 핵심은 우리가 살아있을 때 우리는 지옥을 어떻게 대비하고 있는가?
 
부자는 지옥을 대비하지 못했다. 매일 매일 호화로운 잔치와 쾌락을 누리면서 즐기며 살았다. 아마 세상의 모든 사람들도 부자수준은 아니더라도 자기 나름대로 최소한 즐기며 사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즐기면 산다는 것을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든 간에 지옥을 대비하고 있는가? 이다. 그래서 기가 막힌 것은...
 
많은 사람들이 지옥을 대비하지 않으므로 지옥을 대비한다.
-오히려 천국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비웃고 무시한다. 그러든 말든 우리는 이 땅에서 지옥을 대비하는 하나님의 신실한 남녀종들이 되는 줄로 믿는다. 좀 깊이 들어가면 천국을 준비하지 않는 사람은 지옥을 예비하는 것과 같다. 이제 좀 깊이 들어가 보자.
 
▷ 지옥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누가복음 16:24,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Lord have mercy on me!!!~ 부자가 지옥 가서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며 자기에게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부탁한다. 아주 늦기도 했지만 지옥에서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요청한다. 제가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열성적인 기도모임이 지옥에 있다. 가장 열심히 기도하는 자들은 바로 지옥이다. 지옥에서의 기도제목은 바로 자비를 구하고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한다. 자비란 협상력이 없을 때 구하는 것이 자비이다. 길이 없을 때 간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옥에서는 이기도만 열심히 한다. 참으로 비극적인 것은 너무 늦었다. Too rait. 중요한 것은 이 땅에서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구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 어디서 자비와 긍휼을 구할 것인가? 우리는 주님 앞에 천국과 지옥에 하나님의 자비를 믿고 구하면 천국을 가는 것이며 찬스가 있다. 그렇다면 가혹하다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아무도 지옥 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마지막 심판이 있다고 하셨는데 이 땅에서 자비를 구하면 천국에 간다. 아무도 지옥 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구원을 확실히 말씀하셨는데,
 
*히브리서 2:3,
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큰 구원을 말씀하는 것이 영광으로 생각한다. 오늘 이 큰 구원의 말씀을 만약에 등한시 여겼다면 어찌 그 결과를 피하겠는가? 우리가 지옥의 형벌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큰 구원의 진리를 우리가 붙잡는 것이다. 가혹하다고 하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 큰 구원을 외면하는 이유를 잘 알 것이다. 바울이 그냥 직시하면서 말한다.
 
*로마서 2:5,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루아침에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찬스를 주고 주고 하신데도 불구하고 이 찬스를 자기가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거부하면, 고집 부리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진노를 쌓는다고 하신다. 이 말씀은 심판 날에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쌓지 아니하고 지옥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를 주님이 말씀해 주신다. 우리에게 찬스가 없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가혹한 것이 아니라, 진노를 우리가 쌓고 있고, 지옥은 세게 이야기 하면 주님이 지옥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노를 쌓아서 우리가 지옥에 가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이고, 이것이 반전이며, 이것이 답이다. 주님이 가혹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진노를 쌓아서 그래서 우리가 자발적 지옥행 열차를 타고 내릴 생각을 안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기회를 주신데도 불구하고 이 기회를 놓친다면 참으로 슬픈 일인 것이다. 그래서 지옥가지 않는 길은 이 큰 구원의 진리를 붙잡고 믿음으로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의 피로 덮고, 인간이 이 진노를 더 쌓지 아니하고 구원의 큰 길에 들어서야 할 줄로 믿는다. 그러면 어떻게 이 지옥을 피할 수 있는가? 구체적을 말하면,
 
II. 거룩한 거지가 되라.

-21세기의 거룩한 거지가 되어야 한다. 구걸하는 거지가 되어야 한다. 주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거지, 하나님의 자비를 구걸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죽고 난 다음이 아니라 구걸하는 거지라는 말은 주님의 피의 복음이 아니고는 안 된다. 나는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 땅의 부자들, 이 땅의 철학계의 부자들, 이 땅의 어떤 부자들, 세상의 부자들, 나는 돈이 필요 없다. 그런 분들은 구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에게 천국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거지 나사로는 구걸하는 나사로라는 뜻이다. 베깅(begging)이다. 이 땅에서 우리는 물질의 거지는 아니더라도 나사로처럼 천국에 관한한 물질의 나사로가 아니더라도 나사로처럼 천국에 대한 소망에 관해서 우리가 영적이 거지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걸해야 한다.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걸해야 하는 것이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천국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거지들만 가는 곳이다. 어떨 때는 이 땅의 삶이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내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울부짖고 간구하는 거지들만 가는 곳이 천국이다. 그런데 거만한 자세로 나는 하나님이 필요 없다. 나는 은혜가 필요 없다는 사람들은 반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간절히 사모했다.
 
*마태복음 5:3,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오늘 이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과 저는 영적인 거지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인 줄 믿는다. 나사로가 물질적으로 거지가 되었기 때문에 천국 간 것이 아니라 나사로의 영혼이 가난하여 간 것이고 그 영혼이 가난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간구했기 때문에 천국에 간 것이다. 그래서 그 이후에 보면 누가복음 17,18,19장에 보면, 나병환자 열 명도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며 18장에 맹인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고 베깅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천국 문을 열어주셨는데 영적으로 구걸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자가 천국가고, 세상으로 거만한 자는 지옥에 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지옥에 가겠다고 단호하게 결심하는 자가 왜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 앞에 천국이 열려있다. 영적인 거지들로 가득 차 있다. 지옥은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지 않는 교만한 자들이다. 결과는 누가 진정한 부자인가? 하나님의 긍휼을 많이 쌓은 자가 진짜 부자가 되는 것이다. 진짜 부자는 이 땅에서 화력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많이 받은 사람이 진짜 부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의사 누가는 거지나사로, 맹인들, 나병환자들, 죄인들이 영적으로 진짜 부자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님만 잘 믿어도 이 땅에서 영적이 부자가 되는 줄로 믿는다. 거룩한 거지가 된다는 것은 낭만적인 구호가 아니라, 천국과 지옥을 가느냐 못가느냐에 아주 인생에 아주 치열한 영적 실재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전력투구해서 말씀한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지옥 가는 자가 없기를 바란다. 그리고 부자는 지옥 가서 자비를 구하며 좀 어떻게 해달라고 하니까
 
*누가복음 16:26,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그러니까 지옥 간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고 하신다. 지옥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다고 예수님은 이 말씀을 분명하게 하셨다. 큰 구렁텅이와 꺼지지 않은 불이 있어서 안 된다. 이것은 미신이고 무슨 기복이 아니다.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예언하신 것이며 이것을 주님이 더 강조하신 것이다. 지옥의 확실성은 이 땅의 성도들에게 너무나 큰 도움과 격려가 될 것이다. 이 땅에서 고통 받는 성도들에게 감사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지옥의 교리는 우리 성도들을 영적으로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것이다. 마지막 결론은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리는 것은 설교자의 권위를 갖고 설교하는 것이 아니다. 무슨 교회의 권위나 예배자의 권위를 뛰어 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성령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생한 권위를 가지고 말씀을 드리는 것이다. 제가 드리는 말씀은 성경의 토시하나 빼지 않고 그대로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인 것이다. 세상이 말씀을 듣기 싫어한다고 해서 세상에 똑똑한 사람들이 말씀을 무시한다고 해서 이 진리를 선포하거나 부끄러워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 이 생생한 말씀을 믿지 못하고 듣지 않는 자는 지옥 불에 떨어져서 이제 지옥을 믿는다고 할 것이다. 그때는 이미 너무 늦는다. 감사한 것은 여러분 지옥 안 가도 도니다. 우리는 영적인 탈출구를 우리에게 주시고 기회를 주실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거절하면 방법이 없다. 이 땅에서 지옥에 가지 않고 필요한 것이라면 어떠한 희생을 치루더라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다. 여러분, 천국가기 위해서는 뭐든지 다 해야 한다. 살아 있을 때, 기회가 있을 때, 이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붙잡은 주의 권속들이 된 줄로 믿는다. 그게 28.29절에 있다.
 
*누가복음 16:28-29,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자기 집에 형제들을 지옥에 오지 말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으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신다.
 
*누가복음 16:30,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나사로라든지 아니면 죽은 자가 살아나서 이야기 하면 잘 들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성경을 안 믿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지막 31절에
 
*누가복음 16:31,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되면 다 믿게 되는 것이고 이 말씀을 안 믿으면 다 안된다는 것이다. 이게 결론이다. 그 말씀 한 절 한절이 내 마음에 교훈되시며 성령이 스승 되시고 진리를 가르치셔서 이 말씀 한절 한 절이 저와 여러분에게 살아있는 생명의 나침반이 된 것이다. 이 말씀을 믿으면 되는 것이고 이 말씀을 안 믿으면 죽은 자가 살아 나와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눈물을 흘리면서
 
*빌립보 3:18,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다른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을 안 믿는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철학계의 부자들, 이 세상의 똑똑한 부자들이 다 지옥이 없다 말하더라도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대로, 19-31절까지 이 말씀 그대로 믿어야 한다. 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됨을 감사해야 한다. 이사야를 보면
 
*이사야 43:1b,
43b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누가복음 10:20,
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항복하는 것을 기뻐했는데 하나님이 능력 받는 것보다 하늘에 너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에 기뻐해야 한다고 하신다. 족보, 후보, 명문학교 졸업 앨범 등에 나와 있는 이름보다도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일에 기뻐하자.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순간, 주님의 보혈이 나를 덮으시고 이걸 믿는 순간 우리의 이름이 주님의 생명책에 기록된다.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본향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재장에 문제가 뭐가 되는가? 그러한 것은 다 믿음으로 하면 된다.
 
요약
우리가 육신의 한계가 있지만 우리가 모두가 천국에 가야해서 모두가 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스데반처럼 믿음의 부자가 되고 거지 나사로처럼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받아서 맹인과 나병환자와 거지가 구원 받듯이 우리의 눈이 모든 헌데와 모든 질병이 낫는 역사가 있기를 소망하며 우리 교회가 생명의 복음이 되어야 한다. 이 땅에서 어떤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예수님의 피의 복음과 생명의 복음을 믿고 찬란한 영광중에 두 팔 벌려 환영하시는 주님의 품 안에 영원히 안기며 지옥에 가면 이미 늦사오니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고 21세기의 거지가 되지 않기를 소원해야 한다. 천국과 지옥의 실재를 확신하며 경외하고, 우리나라의 대선과 우크라이나를 하나님이 외면하지 않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부자는 죽어서 음부에서 고통을 겪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겪는 일이, 그 사람이 겪는 일의 전부는 아니다. 이 세상에 있을 때 부자는 날마다 연락(宴樂)하였고 나사로는 극심한 고통을 당했으나, 저 하늘에서는 두 사람이 전혀 상반된 경우에 처해졌던 것이다. 부자의 두 가지 요구에서 처음에는 나사로를 통해 물을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부자는 살았을 때 좋은 것을 받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제 나사로가 위로받는 것이 마땅하다며 부자의 간구를 거절한다. 또한 그는 나사로를 형제에게 보내어 경고하게 해 달라고 했으나, 이 요구에 대해서도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들으면 된다고 대답했다. 이는 심판의 불가피성과 불변성을 나타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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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2년 2월26일)

제목: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말씀: 사도행전 4:18~21
말씀읽기 :
대표기도:

설교자: 최종민 부목사님(다니엘중등부), 이기호 부목사님(대학부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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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4:18~21,
18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니. 
19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20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21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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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그들은 사도들에게 ‘예수 이름으로 말하지도, 가르치지도 말라’고 협박했다. 공회원들은 정당한 방법으로는 사도들의 답변에 반박할 수 없으므로 사도들을 부당하게 위협했던 것이다. 이처럼 진리를 위협으로 막아 보려는 생각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실패할 수밖에 없다. 이들에 대하여 베드로와 요한은 사람의 말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더 옳다고 말하였으며, 또 자신들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답변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명령에 어긋난 법률을 단호하게 거부한 베드로의 태도는 초대 교회 이후 오늘날까지 계승되고 있으며, 어떤 위기 상황에서도 견지(堅持)되어야 할 황금률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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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2년 2월 20일)

제목: ''재물 사용을 권을 위한 메뉴얼''
말씀: 누가복음 16:14~18
기도: 강팔용 장로님
찬양인도: 쉐키나, 할렐루야찬양대
사회: 유선비 부목사님(3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
 
*누가복음 16:14~18,
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18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
 
▶ . 내가 아버지와 맨날 있는데 나를 위해 잔치 한 번 하는 일이 없거늘 동생은 허랑방탕하고 창기와 함께 돈을 다 녹여먹였다며 화를 낸다. 심하게 자기 동생을 공격한다. 첫째 아들의 마음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오늘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말씀을 다 하고난 다음에 바로 14절에 보면
 
*누가복음 16:14,
14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돌아온 탕자의 비유에서 첫째 아들의 마음속에 바리새 적 속성이 있었고, 그 다음은 청지기 비유 다음에 이 바리새인은 큰 아들 같이 비슷하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 모두에게 바리새 적 속성이 있다는 곳이다. 큰 아들은 바리새 적 속성이 있었고,
 
*누가복음 16:16,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 집안의 큰 아들로서 주님의 심정을 깨닫지 못하는 둘 다 하나님의 나라에 진짜 탕자들이었다. 이렇게 복음의 신비가 있다. 우리에게 돌아온 탕자 가운데 큰 아들이 되지 않도록, 유대판인 바리새인이 되지 않도록, 재정에 있어서도 돌아온 탕자가 귀환하듯이 새 판짜기로 귀한 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첫 번째로 평생에 기억을 해야 한다.

 
I. 재물에 있어서도 바리새 적 자기 의를 탈피해야 한다.

-내가 무슨 바리새 적과 무슨 상관이 있냐고 하겠지만 아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한다. 속으로는 좋아하면서 경건한 척 그러는데 이것이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있는 가운데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이것을 영원한 연결고리로 사용하라고 하신다. 그리고 작은 재물에 충성해야 큰 권능을 맏기신다고 했다.
 
*누가복음 16:13,
13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흥하고 비웃었다. 왜냐하면 대게 바리새인들은 다 부자들이었다. 그런데 그 부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들어서 자기들을 축복해 주셨다고 한다. 부자로 사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킨 증거라고 생각했다. 자기들의 의가 부(富)로 나타났다고 생각했다. 아주아주 틀렸다.
여러분, 자기들이 율법을 잘 지킨 그 공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의 재물과 부가 정말 율법을 잘 지켜서 얻은 것인가? 결론은 아니다. 그러면서 15절을 보면,
 
*누가복음 16:15,
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저희들 스스로 돌아온 탕자가 못 됐다고 하고 청지기
 
바리새인들뿐만 아니라 우리 바리새 적 속성을 조심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지나간 인생의 여정에 고난과 인생길 가운데 수고를 많이 했는데 그런 고난을 통하여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신앙인으로서는 바보 멍청이들이다. 예수님이 계속해서 그들의 가식을 꾸짖을 때,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우리 속에 들어 있는 속성에 대해서 주님은 도전하시는데 뭐라고 하시는가? 16절에 보면,
 
*누가복음 16:16,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14, 15, 16절마다 여러분들에게 해석을 하고 있다. 16절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을 말씀하신다. 구약은 요한의 때까지라고 말씀한다. 우리 교회 중직 자들도 이해가 쉽지가 않다.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이며 세례요한의 때까지 구약이다. 예수님 오시고 난 다음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한다고 한다. 하나님 나라가 천국이라고 했다. 예수님 오셔서 복음의 생명력 있는 복음이 선포되고 난 다음에는 사람마다 특별히 이 사람은 구원 못 받아, 이 사람은 틀렸어, 이 사람은 절대 구원 받을 사람이 아니야, 창기라든지 죄인들, 이런 사람들은 절대로 구원 못 받는다고 바리새인들의 머리에는 꽉 차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에 신비한 복음이 전파되고 난 다음에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라고 했다. 이 뜻이 무슨 뜻인가?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다. 들어보았지 않는가? 이 율법과 구역의 시대가 끝나고 난 다음에 예수님 오시고 난 다음에 복음이 선포되고 나서 비록 죄인이다. 비록 세리이다. 이 사람은 안 된다는 그런 사람도, 심지어 십자가의 강도들도 복음을 깨닫고 복음에 부복하며 피의 능력에 이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천국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천국에 침입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프레임에 갇혀서 자기들의 의에 갇혀서 죄인들과 창녀들과 함께 하는 예수님에 대해서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은 절대로 구원 못 받는다고 하고 우리와 비교해서도 절대로 안 된다고 말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새로운 복음을 받아들이지를 못한다. 완고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사실은 그들이 천국 탈락이다. 그들이 천국탈락이다. 사실은 죄인과 바리새인들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는 그 사람들이 바로 그 과부가, 그 어려운 사람들이, 오히려 천국을 침노해서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자가 된다.. 이 차이를 알겠는가? 복음의 신비함이 있다.
 
여러분들에게 말씀하는 가운데 여러분들이 평소에 재물에 대한 일반적인 생각들을 좀 뛰어넘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 나라의 부요함을 체험하게 된다. 사람 앞에 부자 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부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면서 바리새인들은 율법과 선지자, 자기들은 잘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엉터리였다. 다음에 주님은
16:16잘은 너무나 놀라운 열린 장이다. 열렸다. 열렸다. 16장 16자, 열여섯 장, 누가복음 16:16절을 평생 기억하는 축복이 있기를 소망한다. 다시 한 번 율법과 선지자는 이해가 되는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될 때, 천국이 선포되는 곳마다 사람이 침입한다고 했다. 우리는 천국을 침노하는 것이다. 천국의 유업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네버이다. 바리새인들은 자기 프레임에 갇혀서 안 된다. 재정에 관해서도 그렇다. 자기들이 생각하는 재정으로 끝나면 안 된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의 신비의 원칙인 재정이 세워지기를 바란다. 그래서 주님이 노파심을 갖고 구약의 율법의 말씀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고 하면서
 
*누가복음 16:17,
17 그러나 율법의 한 획이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한 말씀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차라리 천지가 없어짐이 쉽지 율법, 구약의 말씀들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형편없지만 이스라엘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 받아들이고 복음의 신비를 깨닫지 못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을 그래도 믿었다. 구약을 믿으면서 바리새 적으로 믿으니까 예수님의 신약의 선지자 인 것을 모른다. 엉터리이지만 그래도 믿으니 된다.
Do you understanding What I am saying? 그리고 구약을 예를 들어서 재물에 대해서 말한다.
 
*잠언 3:9-10,
9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10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일 점 일획도 이 구약의 무거운 말씀이 그대로 소중한 말씀이, 무게 있는 말씀이, 우주적 무게감을 가지고 들어가는데, 여러분,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한다고 해서 간혹 부자가 안 된 사람은 있다. 바울이나 베드로처럼 대단한 세상의 핍박 받고 오히려 세상의 핍절하게 사는 자도 있다. 그런 분들은 이 세상 물질이 그냥 대단한 것처럼 아니고 그냥 뛰어넘은 것이다. 혹 그런 분이 있더라도 대체적으로 우리는 다 신앙세계의 초중고 수준이기 때문에 이 말씀 그대로 믿고 그래도 순종하면 여러분들의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넘치게 되는 것이다. 눈을 확 열어야 한다.
 
*누가복음 16:18,
18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요 무릇 버림당한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이 구절이 뭐냐면, 신명기에 보면 이혼증서라고 있다. 구약의 이혼증서를 써준다는 것은 그 당시 여자의 인권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결혼을 파기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면 안 된다고 말씀한다. 이혼증서를 써 줄 정도로 결혼은 소중하고 한 남자의 아내로 소중한 가정제도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이혼증서를 남발하고 멋진 여자가 있으면 막 바꾸었다. 엉터리였다. 그러니까 겉은 경건한 척하고 속은 썩어빠진 것이다. 겉은 멋있는 것 같고 속은 썩은 것이다. 사실 재물관이 썩어 문드러진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이다. 예수님이 질타하시니까 눈치 빠른 바리새인들이 눈알만 굴리다가 입을 닫았다. 18절 뒤에 안 나온다. 다음 주에 다시 할 것이다. 천국과 지옥에 관한 말씀을 그 때 하겠다.
 
우리는 이런 것을 놓고 여기 재물 사용권과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 우리 안에 있는 바리새 적 속성과 자기 의와 자위적 말씀의 해석과 선택적 말씀을 적용하여 처리해야 한다. 그래서 내 안에 있는 바리새 적인 요소가 정리되어야 재물 사용권의 문제가 해결될 줄로 믿는다.
 
*누가복음 12:1,
1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바리새인들이 누룩 외식을 주의하라.
-전염성을 주의하라. 제자들에 대해서 바리새 적의 요소에 대한 경고 표지판을 세워주신 것이다. 재정문제에 관에서 내 안에 있는 바리새 적 견고한 프레임 때문에 영적인 큰 은혜의 생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저 작은 저수지에서 자신이 평생 붙잡고 있는 작은 누룩 나룻배를 지탱하느라고 큰 바다에서 항해하는 은혜의 함선에 승선하지 못한다. 은혜의 폭포를 경험하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 속에 있는 바리새 적인 속성을 척결하기 위하여 재물의 사용을 어떻게 할 것인가? 구체적으로 내용을 설명하겠다.
 
II. 재물을 믿음의 모험에 투자하라.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재물을 미리 저축하라.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날이 제한되어 있다. 이 땅에서는 돈도 제한되어 있다. 불의한 청지기도 그렇다. 이런 제한적 시간 속에서 제한되어 있지 않다면 좋겠지만 제한된 시간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재정 사용을 할 것인가? 믿음의 모험을 가지고 투자를 해야 한다. 영육이 목마른 자를 위하여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을 위하여 사용하고 정말 소외되고 가난하고 약자인 자들을 위하여 사용하고 무엇보다도 선교와 복음을 위하여 사용해야 할 줄로 믿는다. 이 재물은 제한된 시간에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의 모험을 위해 투자를 해야 한다. 하늘에 쌓아두라.
 
*마태복음 6:20,
20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인플레이션도 없고, 주식 폭락도 없다. 경제 공항도 없고, 거기는 좀도둑도 없다. 그러니까 생명의 복음을 믿는 우리는 복음의 신비를 깨닫는 우리는 이 땅의 돈의 궤도를 따라 도는 것이 아니라 돈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복음의 궤도, 생명의 궤도를 따라 돌게 해야 하는 것이다. 믿음의 모험을 통해서 소중한 물질을 하늘에 축적하는 믿음의 궤도에 진입 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돈이라는 것을 이땅에 궤도를 위해 돌지 아니하고 복음의 궤도, 생명의 궤도, 믿음의 모험의 궤도로 돌게 되면 희한한 일들이 벌어진다. 하나님의 기적 같은 것이 나타난다. 지난 주 4부 예배에서 말씀드렸는데 큰 부자들이 있다. 대대로 이어오는 삼성이나 현대나 이런 부자들 말고 당대에 우리의 물질을 복음의 궤도 생명의 궤도 믿음의 궤도로 돌리면 당대에 그리스도의 은혜 가운데 큰 부자들이 나오게 되어있다. 아주 신비한 것이다. 우리가 주님 앞에 물질을 드릴 때에 두 가지 표현이 있다. 지금까지 인도해 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한 물질의 표현이고 그런 마음으로 주님 앞에 감사함을 돌린다. 또 하나는 미래에 주실 은혜를 기대하면서 모험을 투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과거에 대한 감사와 미래에 대한 기대로 드리는 것이다. 기복 신앙과 다르다. 기복 신앙은 그냥 아무것도 없이 하나님을 요술방망이처럼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믿음으로 눈을 열어서 내 속에 있는 바리새 적 속성을 처분하여 하나님께서 내 삶을 인도하실 것을 기대감을 가지고 주님 앞에 물질을 드릴 때 그것이 저축이다.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이다. 믿음으로 저축하는 것이야말로 성경적인 저축관이다. 미래에 대한 기대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성경적 저축관이다. 오늘 이 예배에 참여한 모든 분들은 성경적인 저축관의 은혜가 있기를 바란다. 미래를 위해 저축해야 한다. 우리의 자녀가 반드시 망하게 되는 원인은 부모가 자녀들에게 큰 재산을 물려주면 그 자녀는 반드시 망하게 되어있다. “목사님, 저는 망하게 되더라도 부모로부터 큰 재산을 받기를 원합니다.” 해봐라. 바리새 적 속성을 해결하는 것은 성경적 저축 관을 가지는 것이다.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저축을 하는데 우리는 벌거벗은 사람들이고 우리는 죽을 때 무얼 갖고 갈 수 없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으로 미래의 기대감을 갖고 가면 우리는 하늘에 쌓기에 우리는 주님 앞에 벌거벗고 가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의 이방종교는 엉터리로 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투자하고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이냐면,
 
*마태복음 6:20,
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믿음의 황금은 나를 위한 것이다. 우리가 믿음의 투자를 왜 하는가? 오직 나를 위하여 자신을 위해서 우리가 눈이 열려야 한다. 재정을 가지고 정말로 영적으로 눈을 뜨면 나를 위함을 깨달아야 한다. 액수가 아닌 마음의 삶의 원칙이 되어야 한다. 나를 위하여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자. 보물이 있는 곳에 내 마음도 있다고 했다. 여러분, 금고에 보물을 쌓아두면 그 금고에 마음이 자꾸 가는 것이다. 우리가 하늘에 보물을 쌓으면 본향을 향한 멋진 삶을 살 수 있다. 하나님 나라를 준비하고 천국을 사모하고 천국에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위한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되는 것이다. 하늘나라에 보물을 쌓는 일이 엄청난 보물을 쌓는 일이다. 하나님 나라야말로 옥토 중에 옥토이다. 하늘에 쌓으면 30배, 60배, 100배, 천 배를 걷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에 이 땅에서 거룩한 부레랑 현상이 일어난다. 물질이 다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아주 특별한 사명 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돌아온다.
 
*전도서 11:1,
너는 네 떡을 물 위에 던져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우리가 물질을 후하게 쓰면 여러 날 후에 다시 찾게 되는 것이다.
-잠언에 보면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자기도 윤택함이라고 말씀한다. 풍족하게 되고 윤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6:38,
38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흔들어 넘치도록 안겨준다고 하신다. 윤택하고 기적의 대답을 하신다. 우리 가운데 큰 부자도 허락하실 줄 믿는다. 정리를 하면, 결국은 우리가 신앙의 원칙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다. 물질을 가지고 하나님의 사랑을 테스트하는 것이다. 물질의 문제가 아니라 바리새인의 속에 있는 껍데기만 그러지 실제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돈만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을 주님을 질타하시며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섬기라고 하신다. 땀흘린 결정체를 주님 앞에 드리는 것이 주님 사랑의 테스트이다. 네 마음이 어디 가 있는지를 보신다. 이 테스트에 합격하여야 한다. 우리 속에 있는 바리새 적인 속성을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테스트를 위해서 전부 뺏어 가시기도 한다. 주여 이런 말을 안 하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안목을 주시길 기도한다. 우리 앞에 엘림의 축복이 기다리고 있다. 엘림의 축복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넜다. 대단한 축복이다. 홍해를 건넜는데 사흘 길을 갔는데 마라의 쓴물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험에 들었다. 난리가 났다. 원망과 불평이 많다. 하나님은 마라의 쓴 물에 엘림이라는 곳에 하나님이 예비해 두셨다. 엘림을 예비해서 열 두 샘을 준비해 놓으셨다. 엘림의 축복을 다 준비하고 있는데 항상 마음속에 바리새 적 이여서 엘림의 축복을 체험하지 못한다. 늘 얕은 물가에서 방방거리고 있는 것이다. 엘림의 축복의 영상이 있어서 그림을 보여 주겠다. 그 그림은 독특한 성화이다. 보면은 이것이 엘림의 축복이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깨닫도록 이 말씀의 문을 통과하여야 한다. 마라의 ‘쓴물에 머물지 말고 성령님이 도우심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 우리의 마음을 소원하여서 바리새 적 마음을 버리고 살기를 소망한다. 사용권을 위한 매뉴얼.
 
▷텔레이오스 재정 제자도(Teleidos Financial Discipleship)
1. 소유권자는 주님이시고, 나는 사용자이다.
2. 물질을, 영원을 준비하는 연결 고리로 사용한다.
3. 작은 것에 충성할 때, 큰 것 즉 권능의 문을 열어 주신다.
4. 내 안에 있는 물질에 대한 바리새 적 요소(자기 의, 외식)을 처리한다.
5. 재정 사용을 통하여, 하나님을 깊이 만나야 한다.
6. 믿음의 모험을 위해 투자한다.
7. 하나님 나라를 위한 물질의 헌신은 사실은 ‘나 자신’을 위한 것이다(마 6:20).
 
▷-사용권을 위한 창조 매뉴얼-
*엘림의 축복을 누리기 위한 일곱 가지 기도
1. 재정의 소유권이 주님께 있음을 인정하며, 아침마다 “저는 주님의 청지기입니다”라고 고백하겠습니다.
2. 영혼 구원을 위해 재정을 사용하기로 결단하고 영 가족과 나누겠습니다.
3. 탁월한 업무 능력과 겸손을 겸비한 숙련된 일꾼이 되기 위해 영성과 은사를 계발하겠습니다.
4.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않고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위해 물질을 드리겠습니다.
5. 이웃 사랑과 하나님 나라가 선포되어야 할 영역을 위해 기도와 함께 물질로 후원하겠습니다.
6. 자녀들에게 단순히 재테크가 아니라, 재정의 높은 영적 가치, ‘성경적인 저축관’을 가르겠습니다.
7. 주님 앞에 올려드리는 헌금을 정성스럽게 미리 준비하겠습니다.
- 2022년 2월 20일 O O O-
 
♣요약
내 속의 바리새 적 위선과 완고함을 회개하고 내게 맡겨주신 재정 사용권을 주님 앞에 드리며 하늘에 쌓아서 은혜와 축복으로 부메랑을 경험하는 자 되고 은혜와 생명의 궤도를 따라 순종하여 우리가 엘림의 축복을 누리는 삶이 되어야 한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다. 아무리 신앙이 좋다고 해도 결국 하나님은 그들의 정체를 아신다. 그들은 하나님께 인정받기보다 사람에게 인정받으려 하였고, 무엇보다도 재물 욕이 강했다. 또한 이들은 하나님 나라와 율법에 대하여 그릇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사역과 충돌하는 경우가 많았다. 율법과 선지자 및 하나님 나라와의 관계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한다. 즉, 율법과 선지자는 예수님이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가리킨다. 따라서 전자는 수단이고 후자는 궁극적 목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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