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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2년 2월 27일) 제목: ''천국과 지옥'' 말씀: 누가복음 16:19~31 대표기도: 장은진 부목사님 사회: 장광천 부목사님(1부) 찬양: 영광찬양대 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 *누가복음 16:19~31,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 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코로나 이 비대면 시대에 대면 예배를 드리게 하시는 하나님께서 환경과 믿음을 주심을 찬양한다. 찬양한다. 감사하며 제가 3주에 걸쳐서 재장에 대한 새 판짜기에 대한 말씀을 해드렸다. 매 시간마다 누가복음 16장 마지막 부분이며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의 모든 것이 영원을 위한 연결고리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우리의 삶의 부분들이 영원한 연결고리(eternally cartilage ring)가 되어야 한다. 그런 차원에서 예비적으로 말씀을 드렸고 또 부자와 나사로에 대해서 우리가 말씀을 들으면서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확고하게 우리가 확신하면서 감사하면서 이 말씀이 우리에게 웨마(선량한)의 말씀이 되길 바란다. 요즘 천국과 지옥에 대해서 강단에서 잘 안 전한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도 잊혀 진 교리나 가르침에 되기가 십상이다. 사실 맨날 지옥 설교하면 누가 교회를 나오겠나? 그러나 목회자로서 분명한 입장은 우리에게 죽음이 실재적인 것처럼 천국과 지옥도 실재적임을 확신한다. 그래서 오늘 간절한 목표는 여러분을 설득하기 위한 목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천국과 지옥을 말씀하신 것을 성경대로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저와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과 하나님과의 문제이다. 알다시피 어제 이어령 박사님이 소천하셨다. 십년 전에 사랑하는 딸을 먼저 하늘로 보냈고, 그분이 말씀하셨다. “죽음이 인생의 허무의 절대로 끝이 아니다.” 라고 하시고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해서 확고한 확신을 말씀하시면서 “천국의 실존을 믿는다.”라고 하셨다. 어제 빈소에 다녀오면서 한국의 지성 통령이나 다름없는데 그가 천국의 실존을 확실히 믿는다는 것이 한국교회의 은혜라고 느꼈다. 그 이박사님은 또 다른 이야기를 하셨는데 “과학을 적당히 알면 무실론 자가 되고, 과학을 깊이 만나면 하나님을 만날 수밖에 없다.”라고 하셨다. 그 말씀이 이해가 갈 것이다. 제 이야기가 아닌 오늘 성경 말씀의 누가복음 16장 19-31절의 말씀을 보면서 다 한 절 한 절 다 소상하게 말씀해 드리겠다. 오늘 성령이 스승 되셔서 진리가 되시고 그 말씀 한 절 한 절이 우리의 마음의 교훈이 되어야 한다. ▷오늘 나사로는 영생을 얻어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고 이름이 나타나지 않은 부자는 이름이 없다. 거지 나사로이다. 이름이 없는 부자는 지옥에 간 것을 보여준다. I. 지옥에 대해 성경은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누가복음 16:20, 20 그런데 나사로라 이름 하는 한 거지가 헌데 투성 이로 그의 대문 앞에 버려진 채. -19절 부자는 날마다 호의호식하지만 20절에 나사로는 그의 외모가 볼품이 없었고 거지였다. 헌데 투성 이로 부잣집의 대문 앞에 버려진 것이다. 온몸이 부스럼투성이로 헐었다. 그리고 부잣집 문 앞이 그의 생활터전이었다. 어떤 성경은 그가 부잣집 앞에 몸이 아파서 누워있었다고 말한다. *누가복음 16:21, 21 그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부자가 먹고 남은 찌꺼기가 그이 음식이었고 어떤 사람들은 부잣집에 드나들던 사람들이 준 동전 하나를 던져주기도 했을 것이다. 그리고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았다고 한다. 나사로의 친구가 개들이었다. 개와 교제권이다. 친구가 개밖에 없다. 거지 나사로의 삶은 인생의 조그만 한 꿈도 꾸지 못할 정도로 비참했다. 요즘으로 말하면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 멋진 곳에서 외식을 하는 것은 언감생심(焉敢生心)이었다. 밑바닥 인생이었고 인간적으로 자존감도 없고 미래에 대한 꿈도 품을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나사로가 어느 날 죽었다. 제가 보기에는 나사로의 장례가 제대로 치러졌을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 거지가 죽고 난 다음에 사람들이 아마 다 잊혀 졌을 것이며 아무도 애도하지 않았을 것이며 죽기 전 날 밤에 어떻게 보냈는지를 그의 임종이 어땠는지 아무도 몰랐다. *누가복음 16:22,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그러나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는 장사된다고 한다. 그가 숨이 멎는 그 순간 천사를 보았다. 부잣집의 문과는 비교가 안 되는 참으로 아름답고 고귀하고 멋진 진주 문을 보았다. 부잣집 문과는 비교가 안 되는 백배 천배 멋진 그 아름다운 문을 보았다. 천사들이 사람들처럼 동전을 던지는 사람들 대신에 오히려 두 팔을 벌려서 나사로를 환영했다. 이 땅에서는 환영과 대접을 받지 못했지만 놀랍게도 천사들은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으로 인도했다. 자 여기서 아브라함의 품은 예수님이 계시는 곳이고 지금 우리가 말하는 오늘 천국이 되는 곳이다. 더 이상 고통과 고난과 슬픔과 비참함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다. 아니 모든 고통이 끝난 곳이다. 이렇게 말씀할 수 있다. 거지 나사로는 이 땅에서는 한마디로 패배자였지만 죽고 나서는 승리자가 된 것이다. 우리가 늘 이야기 하듯이 이 땅에서는 늘 우리가 순례자처럼 살지만 천국에서는 주인공처럼 산다는데 나사로가 그렇게 되었다. 자 거기에 비해서 부자는 뭐라고 되어있는가를 19절을 보면, *누가복음 16:19, 19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더라. -날마다 호화롭게 물질과 시간을 향락과 쾌락을 위하여 허비한 사람이었다. 그 갖고 있는 물질들을 영원을 준비하는 연결고리로 사용하질 않았다. 한 마디로 자신의 욕심을 채우는 사람이었다. 예전에 개역 판에서는 날마다 호화롭게 연락하는데 날마다. 파티하고 쾌락을 추구한다고 되어 있다. 그 집 문 앞에 있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가고 있고, 헌데로 부스럼으로 온통 병에 걸려 있고, 그 나사로를 어떻게 케어 할 마음이 전혀 없었던 사람이었다. 자, 이 부자도 이제 죽었다. 아마도 부자의 장례식은 어마아마하게 성대했을 것이다. 수많은 조문객들이 왔을 것이다. 유명 인사의 고별사를 들으면서 그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었는지를 사람들이 말을 했을 것이다. 그의 시체를 담은 관은 화려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의 장례식에 온 사람들이 몰랐던 것이 있다. 장례식에 조문 와서 그 사람들이 몰랐던 것이 있었다. 그 사람들이 모른 것이 23절에 있다. *누가복음 16:23, 23 그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여러분, 부자의 장례식에 조문객들이 부자의 추모사를 들으면서 부자가 지옥에 가 있을 거라고 누가 생각을 했겠는가? 똑 같다. 우리가 안타깝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피에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 생명의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 피에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은 죽는 사람은 지옥에 가 있을 터인데 그걸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는가? 자 오늘 저는 제 이야기가 아니라 말씀대로 그대로 선포되길 원한다. 오늘 이 말씀이 왜 중요한지를 이 비유가 왜 중요한가? 이유는 우리의 이생에 끝나고 난 다음에 두 가지 목적지가 있다. 두 가지 목적지를 명확하고 분명하게 설명하기 때문이다. 천국이라는 목적지와 지옥이라는 목적지를 설명해 준다. 천국과 지옥의 중간 지대는 없는 것이다. 캐톨릭에서는 연옥이 있다고들 이야기 하는데 아니 연옥이 있기를 바라지만 연옥을 없다. 성경 어디에도 66권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특별히 예수님 믿는 우리는, 예수님의 피의 복음, 거듭나고 믿음을 가진 저희들은 죽으면 연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천국에 가는 것이다. 저는 제가 설교자로서 여러분들에게 오늘 성령께서 역사하셔서 우린 죽으면 천국에 가는 것을 믿기를 원한다. 예수님이 없이 죽으면 연옥이 아니라 지옥에 가는 것이다. 오늘 이것은 영원한 삶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죽고 난 다음에는 영원한 삶이 이어지는데 끝없는 기쁨의 삶이 이어지든지, 아니면 끝없는 슬픔에 이어지든지 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래서 예배를 드리면서 결코 어리석으면 안 된다.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의 복음, 피의 복음을 믿기 때문에 사람이 죽으면 천국 아니면 지옥으로 바로 가는데 우리가 즉시 가게 되는 것을 믿는 것이다. 생명의 복음을 믿고 있으면 주님 품에 바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분들은 죽을 때 편안하게 죽는다. 고통과 병중에 있던 분들도 주님 앞에 갈 때는 편안하게 갈 것이다. 데이빗 브레이너는 29세에 인디안 선교의 아버지인데 장인어른이 조나단 에드워드이다. 신학대총장이셨다. 미국의 지성인 중에 지성인이었다. 자기 사위가 29세에 하나님께 부름 받는 그 광경을 써 놓았는데 “내 사위 데이빗이 죽는 순간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이 온 땅 안에 가득 찬 것을 보았다.”라고 했다. 그 말은 허툰 말이 아니다. 의사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스데반이 죽을 때 스데반이 돌을 맞아 죽으면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예수님의 서신 것을 보고 영광중에 죽음을 맞이한다고 했다.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주의 권속들은 예수님의 피의 복음을 믿고 영광중에 주님의 품에 안기기를 바라는 것이다. 정리하면 ※죽는 순간 우리를 두 팔 벌려 환영하시는 그리스도를 만나든지 아니면 이 세상에서 결코 알지 못했던 어둠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 어느 쪽이든 죽는 순간 우리의 미래는 돌이킬 수가 없다. 우리는 천사들과 구원받은 하나님의 신앙 선배들로 둘러싸인 찬란한 보좌에 앉으신 주님을 뵙거나, 아니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죄책감을 느끼며 버림받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이 두 극단 사이의 중간지대는 없다. 끝없는 기쁨이든지, 끝없는 슬픔이 있든지 둘 중에 하나인 것이다. 오늘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우리는 그 둘 중에 하나, 천국에 입성하기 위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시민권, 비자를 주신 것을 믿어야 한다. 천국에 들어갈 시민권을 갖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빌립보서 3:20, 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여러분과 나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대한민국의 패스포트는 세계 어느 나라나 다 가게 되는 것이 대한민국 여권이다. 그러나 여권이 없으면 어느 나라나 입국이 안 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천국에 입성은 어떤 방법으로 시민권이 없으면 입성할 수 없다. 옛날에 미국 비자를 받기가 힘들었다. 비자가 없으면 못 들어갔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 저 나라에서는 비자가 발급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왜 이렇게 중요한가? 누가 천국을 가고 누가 지옥을 가는지를 정확하게 알려주기 때문에 이 비유가 중요하다. 여기에 대해서는 사회적 지위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부자여도 천국갈 수 있고, 가난해도 지옥갈 수 있고, 반대가 될 수가 있다. 사회적 지위에는 관계가 없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의 상태, 믿음의 상태가 중요하다. 믿음이 무엇인가? 오늘 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한다. 자세히는 말해주지 않지만 오늘 여기에 대한 믿음이 무엇인가? 왜 부자는 천국가지 못했고 나사로는 지옥을 가지 아니하고 천국을 갔을까? 오늘 이 내용은 부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나사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나사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했고 부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지옥 간 것은 이해가 되지만 나사로가 왜 천국 갔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사람이 있는데 부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나사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이 없으면 못 산다고 했기에 나사로는 히브리 이름으로 ‘엘리에셀’이다. 나사로는 ‘하나님이 도우시는 자’라는 뜻이다. 히브리 식으로 말하면 그렇다. 죽었다가 살아난 마르다와 마리아의 오빠 나사로가 있다. 성경에는 거지 나사로, 오빠 나사로, 두 종류가 있다. 부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요즘 이 땅에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부자들이 많이 있다. 자유주의 신학교에도 부자들이 많이 있다. 그런데 철학 계 부자들,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부자들, 리차드 도킨스같은 사람들, 한국에 그런 사람도 있다. 이 사람 dowool 김 OOO씨 등이 있다. 이 사람들은 수많은 영혼들을 지옥으로 데리고 간다. 그럼 이 사람들은 뭐라 하냐면 하나님을 인간이 만들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천국과 지옥도 인간이 만들었다고 하면서 이들이 자꾸 그런 식으로 하는지 왜 이들이 철학 계 부자들인가? 철학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인가? 그 밑바닥을 보면 왜 그리 주장하는지를 한 마디로 본인들이 지옥가기 싫어서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사랑의 하나님이 어떻게 지옥을 만들겠는가! 라며 지옥이 없다라고 이야기 한다. 그리고 이 지옥의 교리를 어떤 신화적인 세계관으로 간주해서 완전히 배재하는 그런 경향이 있다. 그러나 그 배경을 살펴보면 지옥가기 싫은 것이다. 사탄에게 속은 것이다. 왜냐면 사탄은 한명이이라도 더 지옥에 데리고 가려고 한다. 그래서 알시스 목사님 같은 경우는 “지옥은 오히려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낸다고 하신다. 만일 하나님이 악한 자를 심판하지 않으신다면 하나님은 선한 분이 아니시다. 히나님이 정의와 공의를 완전히 포기 했다면 하나님은 선한 분이 아니시다.” -알시스 목사님- -그래서 지옥에 대한 말씀이 인기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성경은 실재로 지옥이 존재하는 것을 말씀한다. 우리가 정직하게 맞닥뜨릴 수 있도록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지옥에 대해서 자주 말씀하셨다. *마가복음 9:47-48, 47 ㆍㆍㆍ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나으니라. 48 거기에서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아니하느니라. -거기 지옥은 실체인데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끄지 않는다고 한다. 어떤 신화가 아니다. 어떤 전설이 아니다. 이것이 실체이다. 그리고 오늘 지옥에 대해서 실체인 것을 오늘 24절부터 뭐라고 이야기 하냐면, *누가복음 16:24,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부자가 부르는 것이다. 지옥은 신화나 전설이 아니라 지옥은 실체이며 지옥에서 오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지옥가는 사람은 오감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천국도 그렇다. 오감이 무엇인가 듣고 보고 느끼는 것 다이다. 불러, 물 한 방울로 혀를 축이게 해달라고, 하면서 불꽃이 너무 괴롭다는 것이 무엇이냐면, 느끼고 만질 수 있는 것이다. 지옥은 그냥 하나의 신화가 아니고, 지옥은 형벌을 의식할 수 있는 곳이다. 그리고 오감이 존재할 뿐 아니라 25절을 보면, 뭐라고 나오냐면, *누가복음 16:25절, 25 아브라함이 이르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기억하라고 한다. 기억도 존재하는 곳이다. 오감도 존재하고 기억도 존재한다. 이는 성경적인 배경을 가지고 생각할 때, 우리 모두는 이 지옥의 실체에 대해서, 성경은 천국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보다 더 많이 지옥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제가 오늘 이 내용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늘 또박또박 한 절 한 절 예수님이 직접 이야기 하신다. 우리를 위해 피흘려 주신 이렇게 지옥에 대해서 결연하게 생생하게 말씀하신다. 그이유가 무엇인가? 여러분이나 저나 한 명도 지옥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이 사랑의 주님이 우리를 위해 피 흘려주시고 모든 것을 다 해주신 그분이 이렇게도 생생하고 결연하게 처절하고 확고하게 말씀을 하신 이유는...오늘 이 자리에게 말씀을 듣는 여러분과 저, 한 명도 지옥 가는 것을 주님이 원하지 아니하신다. 주님의 목자의 심정을 깨달아야 한다. 이 세상 사람들은 걸핏하면 지옥 이야기를 한다. 입시지옥, 이 세상이 지옥이라며, 헬 조선, 은퇴지옥, 세금지옥, 솔로지옥, 그냥 표현이지 그건 지옥도 아니다. 지옥이란 삶이 아무리 힘들어도 이 땅은 지옥이 아니다. 우리가 아무리 고통을 겪어도 그 자체가 지옥이 아니다. 지옥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특별한 장소인 것이다. 그것은 말로 다할 수 없이 끔찍한 곳이다. 오늘 이 비유는 사랑의 주님이 재물을 어리석게 사용한 이 부자가 결과가 비참한 것임을 말씀하신다. 이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주님의 이 말씀의 키는 무어냐면, “너희들이 살아 있을 때 지옥을 대비하라.”고 하신다. 죽기 전에 늙기 전에, 후회하지 말고 지옥을 대비하라고 하신다. 이 비유의 핵심은 우리가 살아있을 때 우리는 지옥을 어떻게 대비하고 있는가? 부자는 지옥을 대비하지 못했다. 매일 매일 호화로운 잔치와 쾌락을 누리면서 즐기며 살았다. 아마 세상의 모든 사람들도 부자수준은 아니더라도 자기 나름대로 최소한 즐기며 사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즐기면 산다는 것을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니고 어떻든 간에 지옥을 대비하고 있는가? 이다. 그래서 기가 막힌 것은... ※많은 사람들이 지옥을 대비하지 않으므로 지옥을 대비한다. -오히려 천국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비웃고 무시한다. 그러든 말든 우리는 이 땅에서 지옥을 대비하는 하나님의 신실한 남녀종들이 되는 줄로 믿는다. 좀 깊이 들어가면 천국을 준비하지 않는 사람은 지옥을 예비하는 것과 같다. 이제 좀 깊이 들어가 보자. ▷ 지옥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누가복음 16:24,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Lord have mercy on me!!!~ 부자가 지옥 가서 하나님께 구원해 달라며 자기에게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부탁한다. 아주 늦기도 했지만 지옥에서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요청한다. 제가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깨달은 것이 있다. 전 세계에서 가장 열성적인 기도모임이 지옥에 있다. 가장 열심히 기도하는 자들은 바로 지옥이다. 지옥에서의 기도제목은 바로 자비를 구하고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한다. 자비란 협상력이 없을 때 구하는 것이 자비이다. 길이 없을 때 간구하는 것이다. 그런데 지옥에서는 이기도만 열심히 한다. 참으로 비극적인 것은 너무 늦었다. Too rait. 중요한 것은 이 땅에서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구하는 것이 더 현명하다. 어디서 자비와 긍휼을 구할 것인가? 우리는 주님 앞에 천국과 지옥에 하나님의 자비를 믿고 구하면 천국을 가는 것이며 찬스가 있다. 그렇다면 가혹하다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아무도 지옥 가는 것을 원치 않는다. 마지막 심판이 있다고 하셨는데 이 땅에서 자비를 구하면 천국에 간다. 아무도 지옥 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구원을 확실히 말씀하셨는데, *히브리서 2:3, 3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 이 구원은 처음에 주로 말씀하신 바요 들은 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한 바니.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큰 구원을 말씀하는 것이 영광으로 생각한다. 오늘 이 큰 구원의 말씀을 만약에 등한시 여겼다면 어찌 그 결과를 피하겠는가? 우리가 지옥의 형벌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큰 구원의 진리를 우리가 붙잡는 것이다. 가혹하다고 하지만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 큰 구원을 외면하는 이유를 잘 알 것이다. 바울이 그냥 직시하면서 말한다. *로마서 2:5,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하루아침에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라 찬스를 주고 주고 하신데도 불구하고 이 찬스를 자기가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 거부하면, 고집 부리고 회개하지 아니하면 진노를 쌓는다고 하신다. 이 말씀은 심판 날에 우리가 하나님의 진노를 쌓지 아니하고 지옥에 떨어지지 않기 위해 우리가 어떻게 대비해야 할지를 주님이 말씀해 주신다. 우리에게 찬스가 없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가혹한 것이 아니라, 진노를 우리가 쌓고 있고, 지옥은 세게 이야기 하면 주님이 지옥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진노를 쌓아서 우리가 지옥에 가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이고, 이것이 반전이며, 이것이 답이다. 주님이 가혹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진노를 쌓아서 그래서 우리가 자발적 지옥행 열차를 타고 내릴 생각을 안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나 많은 기회를 주신데도 불구하고 이 기회를 놓친다면 참으로 슬픈 일인 것이다. 그래서 지옥가지 않는 길은 이 큰 구원의 진리를 붙잡고 믿음으로 우리가 회개하고 예수님의 피로 덮고, 인간이 이 진노를 더 쌓지 아니하고 구원의 큰 길에 들어서야 할 줄로 믿는다. 그러면 어떻게 이 지옥을 피할 수 있는가? 구체적을 말하면, II. 거룩한 거지가 되라. -21세기의 거룩한 거지가 되어야 한다. 구걸하는 거지가 되어야 한다. 주님의 도우심을 바라는 거지, 하나님의 자비를 구걸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죽고 난 다음이 아니라 구걸하는 거지라는 말은 주님의 피의 복음이 아니고는 안 된다. 나는 예수님이 아니고서는 안 된다. 그런데 이 땅의 부자들, 이 땅의 철학계의 부자들, 이 땅의 어떤 부자들, 세상의 부자들, 나는 돈이 필요 없다. 그런 분들은 구걸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에게 천국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거지 나사로는 구걸하는 나사로라는 뜻이다. 베깅(begging)이다. 이 땅에서 우리는 물질의 거지는 아니더라도 나사로처럼 천국에 관한한 물질의 나사로가 아니더라도 나사로처럼 천국에 대한 소망에 관해서 우리가 영적이 거지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걸해야 한다. 주님의 은혜와 긍휼을 구걸해야 하는 것이다.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천국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거지들만 가는 곳이다. 어떨 때는 이 땅의 삶이 너무 힘들어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내게 은혜를 베풀어주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울부짖고 간구하는 거지들만 가는 곳이 천국이다. 그런데 거만한 자세로 나는 하나님이 필요 없다. 나는 은혜가 필요 없다는 사람들은 반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간절히 사모했다. *마태복음 5:3, 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오늘 이 예배를 드리는 여러분과 저는 영적인 거지들, 심령이 가난한 자들인 줄 믿는다. 나사로가 물질적으로 거지가 되었기 때문에 천국 간 것이 아니라 나사로의 영혼이 가난하여 간 것이고 그 영혼이 가난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을 간구했기 때문에 천국에 간 것이다. 그래서 그 이후에 보면 누가복음 17,18,19장에 보면, 나병환자 열 명도 하나님께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며 18장에 맹인도 불쌍히 여겨 달라고 하고 베깅 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천국 문을 열어주셨는데 영적으로 구걸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자가 천국가고, 세상으로 거만한 자는 지옥에 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주위에는 지옥에 가겠다고 단호하게 결심하는 자가 왜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 앞에 천국이 열려있다. 영적인 거지들로 가득 차 있다. 지옥은 하나님이 필요 없다고 이 땅에서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지 않는 교만한 자들이다. 결과는 누가 진정한 부자인가? 하나님의 긍휼을 많이 쌓은 자가 진짜 부자가 되는 것이다. 진짜 부자는 이 땅에서 화력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을 많이 받은 사람이 진짜 부자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의사 누가는 거지나사로, 맹인들, 나병환자들, 죄인들이 영적으로 진짜 부자가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예수님만 잘 믿어도 이 땅에서 영적이 부자가 되는 줄로 믿는다. 거룩한 거지가 된다는 것은 낭만적인 구호가 아니라, 천국과 지옥을 가느냐 못가느냐에 아주 인생에 아주 치열한 영적 실재 문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전력투구해서 말씀한다. 우리 가운데 아무도 지옥 가는 자가 없기를 바란다. 그리고 부자는 지옥 가서 자비를 구하며 좀 어떻게 해달라고 하니까 *누가복음 16:26, 26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그러니까 지옥 간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고 하신다. 지옥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게 큰 구렁텅이가 놓여 있다고 예수님은 이 말씀을 분명하게 하셨다. 큰 구렁텅이와 꺼지지 않은 불이 있어서 안 된다. 이것은 미신이고 무슨 기복이 아니다.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예언하신 것이며 이것을 주님이 더 강조하신 것이다. 지옥의 확실성은 이 땅의 성도들에게 너무나 큰 도움과 격려가 될 것이다. 이 땅에서 고통 받는 성도들에게 감사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지옥의 교리는 우리 성도들을 영적으로 우리를 보호해 주시는 것이다. 마지막 결론은 제가 이렇게 말씀 드리는 것은 설교자의 권위를 갖고 설교하는 것이 아니다. 무슨 교회의 권위나 예배자의 권위를 뛰어 넘는 것이다. 그 이유는 성령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생한 권위를 가지고 말씀을 드리는 것이다. 제가 드리는 말씀은 성경의 토시하나 빼지 않고 그대로 믿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인 것이다. 세상이 말씀을 듣기 싫어한다고 해서 세상에 똑똑한 사람들이 말씀을 무시한다고 해서 이 진리를 선포하거나 부끄러워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 이 생생한 말씀을 믿지 못하고 듣지 않는 자는 지옥 불에 떨어져서 이제 지옥을 믿는다고 할 것이다. 그때는 이미 너무 늦는다. 감사한 것은 여러분 지옥 안 가도 도니다. 우리는 영적인 탈출구를 우리에게 주시고 기회를 주실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거절하면 방법이 없다. 이 땅에서 지옥에 가지 않고 필요한 것이라면 어떠한 희생을 치루더라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다. 여러분, 천국가기 위해서는 뭐든지 다 해야 한다. 살아 있을 때, 기회가 있을 때, 이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붙잡은 주의 권속들이 된 줄로 믿는다. 그게 28.29절에 있다. *누가복음 16:28-29,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자기 집에 형제들을 지옥에 오지 말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으라고 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고 하신다. *누가복음 16:30,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나사로라든지 아니면 죽은 자가 살아나서 이야기 하면 잘 들을 것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성경을 안 믿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지막 31절에 *누가복음 16:31,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믿게 되면 다 믿게 되는 것이고 이 말씀을 안 믿으면 다 안된다는 것이다. 이게 결론이다. 그 말씀 한 절 한절이 내 마음에 교훈되시며 성령이 스승 되시고 진리를 가르치셔서 이 말씀 한절 한 절이 저와 여러분에게 살아있는 생명의 나침반이 된 것이다. 이 말씀을 믿으면 되는 것이고 이 말씀을 안 믿으면 죽은 자가 살아 나와도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눈물을 흘리면서 *빌립보 3:18,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다른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을 안 믿는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철학계의 부자들, 이 세상의 똑똑한 부자들이 다 지옥이 없다 말하더라도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이렇게 말씀하시니 그대로, 19-31절까지 이 말씀 그대로 믿어야 한다. 내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됨을 감사해야 한다. 이사야를 보면 *이사야 43:1b, 43b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누가복음 10:20, 20 그러나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하시니라. -항복하는 것을 기뻐했는데 하나님이 능력 받는 것보다 하늘에 너의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는 것에 기뻐해야 한다고 하신다. 족보, 후보, 명문학교 졸업 앨범 등에 나와 있는 이름보다도 생명책에 이름이 기록되는 일에 기뻐하자.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는 순간, 주님의 보혈이 나를 덮으시고 이걸 믿는 순간 우리의 이름이 주님의 생명책에 기록된다. 이 땅에 살아 있는 동안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으로 본향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재장에 문제가 뭐가 되는가? 그러한 것은 다 믿음으로 하면 된다. ♣요약 우리가 육신의 한계가 있지만 우리가 모두가 천국에 가야해서 모두가 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는 스데반처럼 믿음의 부자가 되고 거지 나사로처럼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을 받아서 맹인과 나병환자와 거지가 구원 받듯이 우리의 눈이 모든 헌데와 모든 질병이 낫는 역사가 있기를 소망하며 우리 교회가 생명의 복음이 되어야 한다. 이 땅에서 어떤 고통 중에 있을지라도 예수님의 피의 복음과 생명의 복음을 믿고 찬란한 영광중에 두 팔 벌려 환영하시는 주님의 품 안에 영원히 안기며 지옥에 가면 이미 늦사오니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구하고 21세기의 거지가 되지 않기를 소원해야 한다. 천국과 지옥의 실재를 확신하며 경외하고, 우리나라의 대선과 우크라이나를 하나님이 외면하지 않으시도록 기도해야 한다. -부자는 죽어서 음부에서 고통을 겪고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갔다.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이 겪는 일이, 그 사람이 겪는 일의 전부는 아니다. 이 세상에 있을 때 부자는 날마다 연락(宴樂)하였고 나사로는 극심한 고통을 당했으나, 저 하늘에서는 두 사람이 전혀 상반된 경우에 처해졌던 것이다. 부자의 두 가지 요구에서 처음에는 나사로를 통해 물을 찍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부자는 살았을 때 좋은 것을 받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제 나사로가 위로받는 것이 마땅하다며 부자의 간구를 거절한다. 또한 그는 나사로를 형제에게 보내어 경고하게 해 달라고 했으나, 이 요구에 대해서도 아브라함은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들으면 된다고 대답했다. 이는 심판의 불가피성과 불변성을 나타내 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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