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1월 26일)
제목: '내 삶의 이유, 부르심'
말씀: 고린도전서 7:22~24
찬양인도: 오준석 전도사님-쉐키나 찬양대
설교자: 김은규 부목사님
-------------------------------
 
*고린도전서 7:22~24,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4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어떤 사람이 집안에 아주 소중하게 여기던 고문서를 진품 명품이라는 티브이 프로그램에 가지고 나왔다. 비싼 감정을 기대하면서 소중히 다루었던 그 문서는 다름 아닌 조선 시대의 노비 문서였다고 한다. 물론 노비 문서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면 노비의 집안이 아니라 오히려 양반의 집안 가문이었을 것이라고 한다. 만약 제가 종이면서 그 노비의 문서를 가지고 있었다면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 얼른 찢어버리거나 불태워 버리거나 별별 짓을 다 하면서 자유를 쫓아갔을 것이다. 과연 우리 중에 누가 종으로 살려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런데 오늘 읽은 말씀 성경은 우리에게 ‘여러분은 종입니다.’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주께 속한 자유인입니다.’ 라고 말씀하고 있다. 아니 어떻게 종이면서 자유인이 될 수 있는가? 여러분은 노예가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주인이 그 사람에게 자유 증서를 써 주었을 때에 바로 자유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아니면 어떤 돈 많은 사람이 그 노예를 불쌍히 여기고, 그 값을 대신 지불하여주고 그를 풀어 다니게 놓아 줄 때에 바로 자유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이지만 주께 속한 자유인이 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생명을 바쳐 값을 지불하고, 그 사람을 샀기 때문에 바로 그가 종이지만 주께 속한 자유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된 노예는 세상 적 신분이 노예일지 모르지만 죄와 종 앞에서 해방된 자유 한 종인 줄 믿는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은혜이다. 반대로 자유인이 어떻게 종이 될 수 있는가? 그리스도께서 동일하게 그를 값 주고 사셨기 때문에 사회적 신분은 자유인이다. 하지만 영적으로는 예수님을 위해서 사는 그리스도의 종이 된 것이다. 결국 사회적 신분이 자유인이든 종이든 그리스도 안에서는 죄로부터 벗어난 자유인이 되는 것이고 둘 다 그리스도 안에서 붙잡힌바 된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진다는 사실이다. 이 영적 신비가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가?
 
복음이 조선에 처음 들어왔을 때였다. 양반과 머슴의 신분이 분명했던 그러한 계급사회였다. 또한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문화가 팽배했던 그 시절이었다. 교회는 양반과 백정이 함께 예배를 드릴 수 없었다. 남자와 여자가 함께 예배를 드릴 수도 없었다. 그래서 교회 모양이 어떠했냐면 기역자(ㄱ)였다.
 
목사님은 그 기역자의 꼭지 점 강대상을 세워두고 한 번에는 이쪽을 바라보면서 설교를 하고 또 한 번은 기역자의 이쪽을 바라보면서 설교를 했다. 그리고 그 중간에는 서로를 바라볼 수 없도록 칸막이도 설치가 되어 있었다. 그 시절에 김제의 큰 부자 조덕삼이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는 머슴 이자익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김제를 지나가던 케이트 선교사님께서 조덕삼의 집의 마방에 말을 맡기고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가난한 타지에서 애를 쓰면서 희생하고 우리민족, 우리 조선을 사랑해주는 이 선교사님의 모습에 감동을 받은 조덕삼은 사랑채를 내 주면서 예배를 드리게 하였고 그로부터 금산교회가 출발하게 되었다 이 주인 조덕삼은 머슴 이자익을 영특하게 보고 그리고 아들과 함께 공부도 하고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머슴임에도 배려를 해주었다. 그런데 몇 년 지나고 난 다음에 주인인 이 조덕삼과 머슴 이작익이 금산교회의 행정과 설교를 함께 맡아보는 영수가 되었고 그리고 금산교회의 장로후보에 함께 오르게 되었다. 신분 질서가 엄격했던 그 시절에 주인과 머슴이 장로 후보에 오른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다. 그런데 더 경탄할 일은 무엇이냐면 바로 머슴 이자익이 장로로 선출된 것이다. 지주였던 조덕삼은 장로가 된 이자익이 설교할 기회가 되어질 때에는 교회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그 설교를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집에서는 머슴 이자익이 조덕삼을 아주 깍듯하게 모시고 섬겼다. 그렇게 시간이 3년이 지난 후 주인 조덕삼은 그제서야 비록 금산교회의 장로가 되었다.
 
여러분, 사람들마다 신분이 있고 해야 할 역할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리스도 안에서는 양반도 종이 되는 것이고 머슴도 자유인이 된다라는 사실을 깨달았던 너무나도 멋지고 아름다운 신앙의 선배들의 모습인줄 믿는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한다. 사람들이 만들어 놓았고 세상에서 통용되고 있는 가치라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종이 되었다고 한다면 ‘사람에 뜻에 따르는 세상의 종이 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세상을 거스르는 삶을 살아라.’ 하는 말씀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첫 번째는 열등감(劣等感)을 없애라.
-우리는 열등감에 사로잡혀 스스로 비교하고 평가(平價)하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여러분 인사타그램을 하면서 올려놓은 그 장소, 가고 싶으 마음이 들지 않는가? 그걸로 그친다면 다행이다. 안 가게 되면 온 몸이 부스럼이 일어난다면 그건 분명이 열등감이 일어날 것이다. 남들이 먹었다고 자랑해 놓은 것을 나도 꼭 찾아가서 줄을 서서 먹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속이 불이난다. 남들이 간 대학에 내 자식도 가야하고, 남들이 취직한 회사에 나도 사원 증을 목에 걸고 있어야 하며 남들이 몰고 다니는 그 차를 나도 몰아야 열등감에서 해방된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 대한민국에 참 많이 있음을 참 많이 보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좋은 대학에 입학한 다음에 교회에 나가겠다고 한다. 이야기를 하면서 교회를 떠난다. 취준생들은 멋진 기업에 취업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 돌린다. 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멋진 기업 취직한 다음에 영광 돌리러 교회 다시 오겠다. 라고 이야기를 한다. 어른이 된 다음에는 경제적 형편이 나아질 때, 신앙생활을 하겠다며 미룬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상관하지 아니하고 그 자리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종으로 부르고 계신다. 라고 하는 사실이다.
 
요셉을 보라. 채색 옷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형들에게 버림받고 팔리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은 요셉을 부르고 계셨다. 사랑받는 아들의 신분이 이제는 보디발 가문의 집의 종의 신분으로 전락(轉落)하는 그곳에서 요셉을 부르셨고 보디발의 아내에게 숫한 유혹과 죄를 뒤집어쓰는 억울한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은 요셉을 부르셨다. 차디찬 감옥에서 멸시(蔑視)를 당하는 그 현장이 요셉을 부르는 장소였고 꿈을 해석해 주었던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잊어버리고 배신감을 안겨주었던 그곳이 바로 부름심의 장소였다. 동생이었던 자신을 모멸 차게 내다버렸던 형님들을 다시 만나는 그 현장, 얼굴도 제대로 들지 못하고 벌벌 떨고 있는 그 형들을 내려다보며 피가 거꾸로 치밀어오를 수밖에 없었던 바로 그 자리도 바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자리였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자리는 세상 적으로 보았을 때, 요셉과 같이 끊임없이 열등감 속에 갇힐 수밖에 없는 그러한 처지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실 때가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요셉은 그 신분이 종이었고 환경은 너무나도 비참했지만 그 상황에 그 종의 신분에 얽매이지 않았다. 오히려 자유 했다. 어떻게? 종으로 팔려온 요셉이지만 신뢰를 받아 보디발 집에서 모든 것을 위탁받는 가정 총무로서 삶을 살았다. 보디발 아내의 유혹의 앞에서도 정직과 순결을 지키며 하나님 앞에 자유함을 누렸고 억울하게 죄수가 된 그 감옥에서도 성실과 책임감으로 맡은 일에 충성하는 하나님이 일꾼이 되었다는 것이다. 술 맡은 관원장이 배신과 울화통이 터지는 형님들과의 다시 만난 그 자리에서도 요셉은 그들의 멱살을 잡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모두를 감싸 안으며 용서와 화해로 치유했던 것이 바로 요셉이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열등감은, 우리가 처해있는 그 열등감은, 우리가 소속되어져 있는 그 열등감은, 우리의 신분이 상승한다고 하여도 해결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학생들이 열등감이 제일 낮다. 라고 하는 통계를 읽어본 적이 있는가? 좋은 대학을 가고, 부러운 직장에 취직하며, 높은 지위와 명예, 좋은 집과 비싼 차를 소유했다고 해서 우리의 열등감이 해결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어떠한 형편에 있는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실 그 때에 그 시간, 그 자리, 그 상황이 바로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종이라고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고, 자유인이라 할지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종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부름 받은 각자의 자리에서 하나님과 함께 살아갈 때에 우리의 열등감은 해결될 줄 믿는다.
 
암, 사고, 이혼이라는 생각지도 못하는 일이 나에게도 일어나거나 계획하고 추진했던 일들이 도루묵이 되어 지거나 신분과 내 지위가 추락(墜落)하고 명성이 곤두박질하는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내 인생이 망가지고 너무나도 초라한 그러한 인생인 것처럼 보여 진다고 할지라도 그 상황에 세상의 종으로 얽매이지 아니하고, 요셉이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예배 자가 되었던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동행하므로 어떤 상황에서도 예배하는 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종으로 걸 맞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두 번째는 사람의 종이 되지 말라.
-의미는 두려움의 종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에 두려워하는지 한 번 스스로 질문을 해보라. 우리는 실패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참 크다. 낙오하고 뒤쳐질 것에 대한 두려움, 내 앞에 좋은 기회가 나타났는데 그것을 잡지 못할 것에 대한 두려움, 내가 올라갈 수 있는 여건이 주워졌는데 미끄러져서 곤두발질 칠 것에 대한 두려움, 그러한 것이 우리 앞에 늘 도사리고 있고 그것을 피해가려고 한다. 이러한 인생의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반대로 나에게 좋은 기회를 제공해주고 성공과 행복을 가져다 줄 것 같은 것을 우리의 주인으로 삼으며 살아가는 내 모습을 많이 보게 된다.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성경은 이것을 경계하면서 사람이 만들어내는 문화, 권력, 불의한 일들에 대하여 종이 되지 말라. 라고 말씀하고 있다. 여러분은 다니엘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는 바벨론의 문화에 맞섰던 사람이다. 바벨론은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를 가지고서 다니엘을 기르도록 하였지만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음식과 포도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노라 다짐하고 결단하면서 그것을 거절했다.
 
이는 단순히 바벨론의 음식 문화를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왕궁에 설 만한 자들을 이 바벨론에서 선별하고 구별하여 특별 관리를 하는 이 거대 바벨론이 가지고 있는 규례와 법도를 거절한 것이다. 다리오가 왕이 되었을 때, 총리들과 이 고관들이 이 다니엘의 허물을 찾아서 고발을 하려고 했다. 고발할 근거를 찾지 못하자 누구든지 왕 외에 어떤 신에게 그리고 사람에게 머리를 숙이게 되어 진다면 사자 굴에 집어넣게 하는 금령을 만들고 왕의 조서에 도장을 찍도록 했다.
 
하지만 다니엘은 조서에 왕이 도장 찍은 알고서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에 세 번씩 기도를 했다. 다니엘은 신이 아닌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이 아닌 것에 무릎을 꿇지 않았던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회사마다 회사에 회식 문화가 있다. 학과마다 술 문화가 있다. 사회마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그러한 문화가 있다. 마치 법률처럼 지키고 있고 그것을 거스르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일 때가 많다. 그리고 나를 끌어주고 밀어주며 세워줄 내가 잘 보여야 할 라인들이 있다. 내가 성공하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리고 더 큰 부와 명예와 권력이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내 앞에 찾아올 때는 권모술수를 써야 할 때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 잠깐만 한 번 눈을 지그시 감아주시면 안 되겠냐’라고 바랄 때도 있다.
 
이러한 우리들을 향하여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두려움의 종이 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다니엘이 뜻을 정하여 자신이 더럽히지 않겠다고 거절했던 것처럼, 우리도 세상적인 성공에 끌려 다니며 신앙 양심을 저버리지 않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갈 것을 알고도 전에 하던 대로 기도한 것 같이 돈과 권력 명예를 쥔 것처럼 마치 나를 좌지우지 하고 높여줄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세상의 거대 신상 앞에 두려워 무릎 꿇지 않고 우리 앞길에 영원한 웨이 메이커(Way Maker)가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 한 분 밖에 신이 없음을 담대하게 선포하는 2022년도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오래 전에 어떤 목사님께서 들은 이야기이다. 음악을 하시는 집사님이 계셨다. 한국에서도 좋은 대학을 나와 그리고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한국에 들어왔다고 한다. 한국에서 강사자리는 여기 저기 들어와서 열심히 일을 하는 중에 교수 자리가 나왔다. 그 당시에 그 자리에는 돈을 요구했다고 한다. 20년 이상을 교수직을 생각한다면 2년 정도의 월급과 본인이 레슨을 하면서 모아둔 것으로 충분히 갚을 수 있는 금액이었지만 신앙 양심상 사양을 하고 교수가 되지 못했다고 한다. 얼마나 지난 뒤에 또 다시 좋은 자리에 부름이 있었는데 그곳에서도 동일하게 돈을 요구했다고 한다. 얼마나 고민이 되었을까? 첫 번째는 그냥 지나갔는데 두 번째는 어떻게 하겠는가? 여러분이라면,,, 부부가 다시 한 번 손을 맞잡고 기도했다. 그리고 나서 신앙을 지키자며 거절을 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기적과도 같은 일을 펼쳐주시면서 어떤 대학의 교수의 자리에 앉혀 주지시는 않았다. 그렇지 않은 가운데 20여년이 지나고나니 일할 곳도 줄어들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지는 쓸쓸한 결말이었다는 말이다. 참 씁쓸하고 쓸쓸하다. 그러나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런 분이 계시구나!’ 했다. 하나님은 얼마나 사랑하셨겠나! 하나님은 얼마나 좋아하샸겠는가? 저는 생각했다. 훗날 저도 이런 삶을 살았다는 믿음을 주시길 기도했다. 이 시대 앞에 그렇게 살기는 너무도 힘든 시기이다. 하나님 아버지 뜻을 정하고 거룩하게 지키게 하시고 떨어질 것을 두려워하는 그 앞에서도 전에 하던 대로 신앙양심으로 그 담대함을 저에게도 허락해 주시라고 기도하게 되었다.
 
다니엘에 기도할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얻었을까? 바벨론으로 끌려온 이스라엘 사람으로 보여 질 수 있지만 다니엘은 포로로 끌려온 종이 아니라 주님께 부름 받은 자로서 세상의 종이 아닌 하나님 앞에서 담대한 자유인이었기 때문에 그 두려움과 맞 설수 있었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새로운 결단과 다짐으로 한 해를 시작했지만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은 여전히 너무나도 힘겹고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는 것 같고, 나를 삼키려는 파도가 늘 우리 앞에 엄습(掩襲)해 오고 있는 그러한 현장 속에서 우리는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때마다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게 되실 것을 믿으며, 이 세상이 짓누르는 두려움과 맞서 싸워 담대하게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의 자녀가 되기를 간절히 축복한다.
 
비록 신앙 양심을 지킨 결과가 이 땅에서 씁쓸할 때가 있다고 할지라도 나중에 주님 앞에 설 때에 주님, 내 모습 아시지요? 이 세상은 살아주지 않았다 할지라도 ‘주님은 내 삶을 알고 계시지요?’ 라고 담대하게 당당하게 주님 앞에 고백할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한다.
 
세상의 종이 되지 말라는 말을 전하다 보니 거절을 강요하는 목사처럼 보이는 것 같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요셉과 다니엘을 보면 거절한 것도 맞지만 그들은 누가 시켜서 거절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한다. 참 자유자답게 스스로가 선택하고 결정해서 하나님을 섬겼던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자원해서 일하고 자원해서 봉사하는 사람을 우리는 종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다. 자원해서 하는데 어떻게 종이겠는가? 성도들은 그렇기 때문에 종이지만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자들이다. 종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제가 토비새를 오면서 주차를 하려는데 빈자리가 있었다. 그런데 그 옆에 아주 비싼 스포츠카가 한 대 있었다. 다른 자리를 찾아야 되나 하다가 작년 연말에 보험을 들면서 외제차 특약보험료를 아주 세게 넣었기에 주차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조금 멀찌감치 주차를 했다. 그리고 뒤를 돌아 나오는데 별로 안 어울리는 스티커가 그 스포츠카 뒤에 붙여 있었다. ‘당신이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With Jesus!’라고 붙여있었다. 요리저리 봐도 그 멋진 스포츠카에 너무나도 안 어울렸다. 하지만 그 성도님은 값비싼 스포츠카를 타서 행복한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예수님 있는 예수님 때문에 행복하고 그 예수님을 전하고 싶어서 붙여놓았다는 그 마음이 느껴질 수 있었다. 작년 말 수요예배 집회에 많은 성도님들이 올 수는 있었다. 하지만 그 집회 이후에 복음을 전함 스티커를 붙이려고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은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때 받은 은혜가 있고 지금까지 나에게 베풀어주신 그 하나님 아버지 은혜가 있기 때문에 내가 선택하여서 그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누어 주어야겠다는 것을 자원하여 붙인 것인 줄 믿는다. 어느 날 집을 가는데 좋아하는 국민 경차가 가는 것도 보았다. 가만히 보니 이천 년도의 초반 모델이었던 것 같다. 거기에도 스티커가 붙어있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먼저 드는 생각은 “당신은 행복합니까?”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까? 그 스티커로 말미암아 전도가 될까라고 하는 두려움이 먼저 엄습했다. 목사라도 세상적인 풍요와 인본 적 가치관으로 가득 차 있는 이 머리 속에 그냥 굴러 나왔던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부끄러웠다. 그 순간 튀어나오는 대답이 있다. “은규야, 내가 너를 사랑한다.” 라는 마음의 음성이었다. 경차의 차주의 역시 자신의 신분과 처지, 몰고 다니는 그 차종이 어떠하든지를 생각하지 않고 “내가 너를 사랑한다.” 그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에 감동되어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스스로 선택한 것이며 그분이 만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선포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것도 걸림돌도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하나님 아버지께서 저에게 깨닫게 해주셨다. 그리고 난 다음에 스티커를 다시 보니 너무나 멋지고 아름답게 보였다. 이것이야말로 참 자유함이고 세상 앞에서 당당한 그리스도의 종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바울은 24절에서 성도라면 자신의 상황을 바꾸려고 하지 말고 부르심 받은 그대로 하라고 하신다. 
 
내가 처한 신분과 상황 속에서도 어떠하든지 그리스도의 종으로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의 부르심이라는 사실을 믿고 2022년을 믿고 힘차게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소망한다.  사랑하는 여러분, 1등처럼 보이지만 삼류 같은 인생이 있다. 반대로 삼등처럼 보이지만 일류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1등이 되려고 아등바등 거리면서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 속에서 부르받은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삼등이어도 괜찮고, 십 등이어도 괜찮고 하지만 삼류의 삶이 아니라 일류의 인생을 살아갈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어지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한다. 


요약
-우리의 세상의 종 된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참 자유 자로 불러주심에 감사하며, 육체적 욕심에 따라 살던 우리의 모든 죄와 과거를 내려놓고, 이제 종이지만 자유인으로 그리스도의 종으로 두 번째 인생을 살아가며 모든 것을 주님께 의뢰하고 믿고 의지하여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열등감이 극복되고, 세상적 두려움을 이길 담대함을 가지고 세상의 논리와 환경에 갇힌 자 되지 않고,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참된 자유함을 누리며 온 전한 예배자로 세워지고 내 삶이 이유를 정확하게 인지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에 납작 엎드리는 삶으로 살아가야 한다. 

-참된 자유는 그리스도 안에 거할 때에만 가능하다. 복음 안에서는 종이나 자유자의 구별이 있을 수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만이 모든 사회적 차별이 극복되고 참된 평등이 회복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성도는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이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주일예배(주후 2022년 1월 23일)
제목: "왜 시련이 '하나님의 안아주심'인가?"
말씀: 마태복음 15:21-28
대표기도: 윤주은 부목사님
찬양인도: 영광찬양대, 쉐키나 찬양대
사회: 장광천 부목사님-1부예배

설교자: 김지찬 목사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초빙
---------------------------------------


마태복음 15:21-28,
21 예수께서 거기서 나가사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


▶▶오늘 본문은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이다. 다른 사람 스토리로 보면 당혹스럽기 그지없다. 계속해서 귀신 들린 딸의 병을 고쳐달라는 여인의 울부짖음에도 예수님은 한 말씀도 아니 하시고 그 여인의 문제를 어떻게든지 해결해 달라는 제자들의 요청에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하셨다. 여인이 간청하는데도 자녀들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져 줌이 마땅하지 않다며 개 취급을 하셨다.
개관적으로 보면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낯설다 못해 충격이다. 그러나 정직하게 우리의 삶을 주관적으로 들여다보면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그리 낯설지 않다. 말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지만 우리의 삶 역시 이해할 수 없는 고난과 역경으로 점철(點綴)되어 있다. 어떨 때는 아무리 부르짖어도 한 말씀도 하지 않으신다. 주변 사람들이 중보기도를 해주어도 상황은 호전되지 않는다. 우리의 기대와는 정 반대로 일이 진행될 때가 많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라 혹시 개 취급 하시는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든다. 스토리를 공감하다보면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는 바로 우리의 스토리이다. 도대체 우리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시련과 고난을 안겨주시는가? 간청하는데도 침묵하시는가? 때로는 우리를 모질게 대하며 모욕을 당하게 하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가나안 여인의 가장 큰 장애물이 예수님이셨던 것처럼, 우리 삶에 가장 큰 장애물 역시 하나님이시라는 느낌이 들게 만드는 까닭은 무엇인가? 이런 질문의 답이 쉽지 않기 때문에 이 본문은 여러 가지 해석이 나온다. 페니미즘 진영에 속한 해석자들은 예수님이 여인을 개라고 칭한 것은 인종적 편견을 가지고 있는 것인데 이 이방여인의 관대함과 지혜로 예수님의 편견을 깨트리고 이방인 선교에 눈을 뜨게 해주었다고 해석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판정패를 당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음으로 받아들이며 경외하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여야 하고 그동안 2천년의 교회의 교리를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한다.
 
첫째로 가나안 여인의 이야기를 믿음으로 믿으면 수로보니게 여인의 여인은 무슨 도덕적인 교훈이나 성경학적 위로를 담고 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왜 하나님 백성들에게도 고난과 시련이 그치지 않는 것인가? 왜 주님은 때로 한 말씀도 하지 않으신가? 에 고난의 이유를 물어도 왜 기대와는 정 반대로 모욕을 당하게 놔두시는 까닭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면 근원적 지혜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교회 해석 자료를 들여다보면 루터가 1523-1543년 사이에 수로보니게 여인에 대한 열세 번의 설교를 한다. 아주 흥미롭다. 루터가 고난과 시련을 ‘하나님의 안아주심’으로 해석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가나안 여인의 스토리는 어떤 점에서 루터를 매료를 시켰기 때문에 열세 번이나 설교를 했는가? 게다가 인간으로서는 누구나 피하고 싶은 고난과 시련을 왜 루터는 ‘하나님의 안아주심’으로 해석하고 있는가?
 
특별히 우리 메인 채플을 ‘안아주심의 본당’이라는 특별한 명칭으로 부르는 사랑의 교회 성도 여러분, 왜 그리스도인의 시련이 하나님의 안아주심인지를 우리가 수로보니게 여인의 스토리를 통해 함께 살펴보면서 시련과 고난으로 점철된 우리의 인생길에서 하나님의 안아주심을 경험하는 자가 다 되길 소망한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에서 설교를 마치시고 가나안으로 이동하시면서 그 중간 지점인 두로와 시돈 지점으로 들어가시게 되었는데 거기서 귀신들린 딸을 둔 여인을 만나게 된다. 마태복음은 가나안 여인이라고 되어있지만 마가복음에는 수로보니게 여인으로 되어있다. 마태복음은 가나안 여인은 딸을 묘사하면서 흉악하고 귀신들렸다고 표현하고, 마가복음은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고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이 귀신 들린 딸의 문제를 어떤 정신병적 문제나 귀신의 빙의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왜냐면 더러운 귀신에 사로잡혀 사는 인간들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이 가나안 여인의 딸이 보여주고 있다. 마가복음에는 더러운 귀신 들린 자라고 말한다. 왜냐면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은 수로보니게 여인 이야기 바로 앞에 도대체 무엇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지가 나오고 있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 라는 이야기가 마태복음이나 마가복음 둘 다 수로보니게 여인 앞에 나온다. 마가복음을 예를 들어보면 속에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음란과 도둑질과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수와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이 모든 것이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힌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오늘 날 수많은 사람들이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에서 사로잡혀 자기 몸을 더럽히고 있는데. 어찌 보면 돈 귀신 권력 귀신에 사로잡힌 자들이 사는 시대라고 볼 수 있다.
 
대선을 앞두고 상당수의 정치인들은 인권, 무한책임, 민생, 소수자의 권리를 외치면서 온갖 선량한 말을 외치지만 속에는 악한 생각들이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그렇게 성 소수자 인권의 강조하는 사람들이 왜 북한의 인권에 대해서는 왜 한 마디도 말하지 않는지 저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정치뿐이 아니다. 음란 도둑질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수와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 모두 12개이다. 이 목록을 하나씩 따져보면서 자신은 정직하게 볼 줄 안다면 남을 깨끗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돈을 벌 수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하려는 사람들,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도 많다. 갭 투자도 그렇다. 그러다 보니까 그리스도인들조차도 돈 귀신에 눌려 있다. 이렇게 귀신에 눌리거나 귀신에 사로잡히면 무슨 일이 생기는가? 귀신 들린 사람은 무덤에 산다. 다른 사람의 삶까지도 망가지게 하는 죽음의 영, 무덤의 영이 된다. 오늘 우리 사회는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에 사로잡힌 자들로 인해서 주변 사람을 망가뜨리고 우리나라를 무덤처럼 황폐화 시키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죽음의 더러움에 사로잡혀 황폐한 자의 해결이 무엇이겠는가?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나아가서 “나를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내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습니다.” 이렇게 주님께 나와 귀신으로부터 우리를 구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유일한 비결(秘決)이다. 물론 주님께 나온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당장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주님께 나와서 제자가 된 후에 고난과 시련의 설교 중에 하나를 나중에 살펴보겠다.
 
수로보니게 여인의 간청에 예수님은 어떠하신지 보자.
 
*마태복음 15:23,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 그렇다. 오늘 가나안 백성이 고난을 당할 때 가장 큰 시련은 하나님의 침묵이다. 오늘 날 하나님의 백성이 고난 당할 때에 가장 큰 시련은 하나님의 침묵이다. 고 박완서 소설가는 하나님이 침묵을 지키실 때 인간이 어떤 고통을 느끼는지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사람이다. 박완서씨의 아들이 명문대 의대생이었는데 1988년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박완서는 주님께 이 사실을 내 아들이 왜 죽어야 하는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말씀만 해달라고 처음에는 애걸했다고 한다. 그러나 1년이 넘도록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벽에 걸려 있던 십자가를 떼어내서 발로 밟고 원망하고 저주까지 했다고 한다. 이때에 박완서씨는 ‘한 말씀만 하십시오’라는 그의 수필집에서 이렇게 토로하고 있다.

 
※ ‘신의 권위가 장난질 칠 권리가 아닐 바에야 의당 그 극형이 무슨 잘못에서 연유했지를 밝혀주어야 한다. 신, 당신의 존재에 가장 참을 수 없음은 그 대답 없음이다. 한번도 목소리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도 인간으로 하여금 당신을 부르고 매달리게 하는 그 이상하고 그 음흉한 힘이다.” -박완서-
 
-무슨 이야기 인지를 아주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니까 왜 하나님이 왜 침묵할까도 나중에 살펴보겠다. 예수님은 한 마디도 대답하지 않으셨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큰 소리를 지르며 예수님의 뒤를 따라 가자 제자들이 귀찮았던 것 같다. 그래서 제자들이 조치를 취해주시라고 어떻게든 해결해 달라고 한다. 그동안 침묵을 지키던 예수님이 제자들의 요청을 받고 드디어 대답하시기를,,,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외에는 아무데도 보내심을 받지 아니했다.’라고 고 하신다. 공개적으로 거부하신다. 이 말씀을 충분히 들었을 텐데 수로보니게 여인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예수님께 나아와 엎드려 절하며 “주여 저를 도우소서.”라고 간청했다. 예수님은 전에 그 앞에 데려오기만 해도 고쳐 주셨지 않는가? 예수님은 원격치료의 원조이시기에 백부장의 종의 병도 그냥 고쳐 주셨다. 원격치료 하신 것이다. “네 믿음대로 되라, 네 소원대로 되라.” 그대로 다 나았다. 예수님은 굳이 도우실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냥 원격치료 하시면 되신다. 그런데 이렇게 엎드려 절하는 여인의 간청을 들어주시지 않을리 없다. 예수님은 아예 그 여인의 간청을 들어주지 않는 것처럼 들린다. 예수님은 분명히 이 여인의 간청을 들었을 것이고 그러나 이 여인은 물러서지 않았다. 적극적으로 나아와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주여 나를 도우소서.’라고 간청한다. 마태복음의 앞에 부분을 읽어보면 귀신 들린 자를 아무소리 안하시고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신다. 그렇다면 절을 하며 도와 달라는 이 여인의 간청을 거절할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은 충격적이다. “자녀들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다.”라고 하신다. 일부 해석자들은 예수님이 이방인이기 때문에, 아니면 귀찮으시니까 모른척하시며 여인을 쫓아내신다는 것이기도 하다고 해석한다. 이런 해석을 하는 인간들을 보면 아무말이나 하는 것이며 아무 근거도 없이 해석하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함부로 예수님을 이념적으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왜 개라고 하시느냐를 중요시하여 그것을 알아내려 난리를 한다. 대체로 사람들은 반려견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작은 개라고 말한다고 해석하고 있지만 이상한 소리를 한다.
 
예수님은 개라고 하시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 왜 고난이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가 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개라고 할 때, 수로보니게 여인이 어떤 반응을 보였냐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중요한 말씀이다. 주여 옳소이다. 라고 대답하는데 그녀의 대답은 헬라어로 ‘나이 퀴리(예스 로드)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맞습니다.’이다. 직역하면 Yes, Lord이다. 예수님의 말씀에는 예스라고 할 만한 구석이 단 하나도 없다. 그런데 이 여인은 ‘예스 로드!’라고 말한다.
 
헬라어로 열두 개 단어이지만 중요한 단어는 여섯 개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않다. 이 여섯 개의 핵심 가운데 예스라는 단어가 보이지 않는다. 자녀의 떡이고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는 좋은 대답이 없다. ‘던져주다.’ 의 단어가 희망이 있지만 그러나 이 세상의 어떤 부모가 자녀의 떡을 개들에게 주겠는가? 요새는 좀 달라지긴 했다. 천오백 여만이 사람들이 반려 견을 키우고 있으니 개에게도 그렇게 주기도 할 만하다.
 
사실은 수로보니게 여인에게는 예수님의 대답은 그냥 NO가 아닌 절대적인 NO이시다. 그런데 이 여인은 절대적인 NO 속에서 YES LORD!를 찾아낸 것이다. 맞습니다. 주님, 도대체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YES라는 단어가 단 하나도 없는데 주님께 YES라고 하지 않는가? 놀랍게도 개라는 모욕 속에서 예스를 찾은 것이다. 자신을 개라고 부른 저주 가운에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축복과 희망이 있음을 본 것이다. 수로보니게 말을 풀어보겠다. “주님이 저를 개라고 하셨는데 주님, YES, 맞습니다. 저 개입니다. 그러나 개들도 자기 주인이 있지 않습니까? 자녀들에게 준 떡을 개들이 먹지 못한다 하더라도 개들은 주인의 상아래 있을 수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이게 믿음이다. 기대와는 정 반대로 보이는 것, 심지어는 저주와 모욕 가운데 하나님의 축복을 발견하며 ‘YES LORD’라고 말하는 것이 이것이 믿음인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 기자가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다.”라고 한 것이다. ‘개들에게 던져줄 떡은 없다.’라는 모욕에도 이 여인은 희망을 발견한다.
주님 맞습니다. ‘저는 자녀가 아닙니다. 아버지가 주는 떡을 먹을 수는 없지만 최소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는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까?’라고 한다. 누가 먹을 만한 것을 다 골라내고 남은 부스러기를 먹고 싶은 사람이 있겠는가? 저는 충청도 양반이라서 남이 남겨놓은 것은 절대 먹지 않는다. 수로보니게 여인은 아버지가 주시는 떡을 자녀들이 먹다가 흘리는 부스러기라도 좋으니까 저를 받아달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우리가 처한 상황이 수로보니게 여인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주변 사람들이 돈 귀신에 사로잡혀 있다. 가족가운데도 돈 벌겠다고 이것저것 하고 망하고 정신까지 탈탈 털리는 분도 있지 않습니까? 주변에 주식하고 이렇게 아파트해서 돈 벌었다는 사람을 많이 못 보았다. 몇 사람은 있겠지요. 하루 종일 비트코인은 24시간 돌아가서 알람을 설정해두고 한다고 하지만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고 산다. 댜선 주자들이 5천만 원까지는 비과세라고 하니까 귀신에게 눌려 사는 것이다. 하나님께 나아와 기도해도 한 말씀도 하시지 않는다. 주변에 중보기도 한다는데 상황은 호전되지 않는다. 하나님이 자녀 같은 느낌보다는 그저 길거리를 헤매고 있는 개 같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가? 그럴 때는 수로보니게 이야기를 읽고 묵상하고 우리는 붙잡고 기도해야 한다. 왜 루터가 20년 동안 13번이나 수로보니게 여인을 설교했겠는가? 시련을 당할 때마다 루터는 수로보니게 여인에게서 위로와 힘과 용기를 얻은 것이다. 루터의 말을 인용하겠다.
 
※“이 여인의 신앙의 시련들은 YES보다 NO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시련 안에는 NO보다 YES가 더 많다. 아니 그 안에는 오직 YES만 있는 것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NO처럼 보이지만 이 YES는 매우 깊은 곳에 감추어져 있다. 따라서 감정에서 벗어나 영적으로 깊은 예수를 부여잡고 NO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신뢰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말씀은 옳다고 말해야 된다.”라고 했다.
 
그런데 루터는 저주하고 모욕하는 것처럼 보이는 주님의 말씀에도 YES라고 동의하면서 그 안에 숨겨진 축복과 은혜를 찾아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너는 개다.”라고 말씀하시면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의 자녀인데요.” 라고 하면서 삐치지 말라는 것이다. 네 주님, 개 맞습니다. 라고 인정하고 그리고 나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개도 먹습니다. 라고 해야 한다는 것이다.
 
루터는 인간이 하나님을 가장 필요로 할 때에 하나님이 자기를 숨기신다는 사실을 가장 심각하게 받아들인 중요한 신학자이다. 하나님이 숨으시는 것이 우리를 놀래 키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로하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다시 말해 지혜로운 자와 강한 자에게서 자신을 숨기시므로 이들은 바보로 만들고 오히려 약한 자들과 아이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시기 위해 자신을 숨기시는 분이시다. 여기서 놀라운 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숨기실 때 우리로부터 우리의 기대와는 정 반대되는 모습으로 자기를 숨기신다는 것이 루터의 통찰이다.
 
루터 같은 가장 중요한 예가 십자가이다. 우리가 다 아는 대로 축복과 생명과는 정 반대인 저주와 죽음과 모욕이 십자가 아닌가? 그 죽음과 모욕의 상징인 십자가 안에 생명과 부활을 숨겨놓으셨다는 것이다. 루터의 말을 하나 더 들어보자.
 
※ “우리에게 유익한 것은 숨겨져 있다. 그것도 너무 깊이 숨겨져서 정 반대 모습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생명은 죽음 안에 숨겨져 있고, 사랑은 미움 안에 숨겨져 있고, 영광은 수치 안에 숨겨져 있고, 구원은 정죄 안에 숨겨져 있다. 우리의 왕권은 포로됨 안에 숨겨져 있고, 천국은 지옥아래 숨겨져 있다. 지혜는 어리석음 안에 숨겨져 있고, 의로움은 죄 안에 숨겨져 있으며 강함은 약함 아래 숨겨져 있다. 무엇이든지 좋은 것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고 부인 할 때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으로만 시련은 우리에게 좋은 것이라고 가르쳤다.”

죄인이라고 하면 네!!~ 죄인입니다라고 인정하면 그 안에는 의롭다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며 말씀하시는 칭의가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의 간구에 하나님이 때로 침묵하시는 것도 좋은 것일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외아들을 잃은 다음에 한 말씀만 해달라고 애걸복걸 했지만 1년 내내 아무 말씀도 하시지 않은 것을 경험한 박완서씨는 하나님의 침묵이 어떤 유익이 있었는지를 이렇게 말한다.
“그 고통의 순간을 지나올 때 내가 그렇게도 원망한 하나님이 곁에 계셨다는 것이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고통의 순간의 수많은 원망 섞인 질문을 던질 때 그 많은 원망을 고스란히 들어주셨던 하나님 그 분의 침묵은 더 많은 원말을 듣고자 하셨던 하나님의 배려였던 것이다. 벽에 걸려있는 십자기 위에 그리스도의 표정을 읽은 것은 최근 일이다. 오냐, 실컷 욕하고 원망하고 죽이고 또 죽이려므나. 네가 그럴 수 있으리라고 나 여기 있지 않느냐?”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처럼 그분의 표정은 생생하게 슬프고 너그러워 보였다.
 
고난의 이유를 물을 때 하나님이 침묵하면 가장 고통스럽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유익을 위해 시련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믿음으로 견디면 나중에 고난의 이유를 안다. 왜 시련을 주시는지 처음부터 알려주시면 믿음이 왜 필요하겠는가? 그래서 주님이 침묵하시는 것이다. 왜 나를 개라고 부르신가? 수로보니게 여인이 그냥 '맞습니다' 한다. 하나님은 개라고 부르면서 그 모욕과 저주와 수치 안에 하나님의 축복과 위로를 숨겨놓으신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시련이 임할 때에 하나님이 그 시련도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주신 것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고 믿음으로 견뎌낼 때 비로소 전혀 예상치 않는 방법으로 이 세상이 전혀 알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에게 제일 좋은 것을 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도 나의 유익을 위한 것이라 믿고 시련을 견뎌내면 하나님의 침묵조차도 나를 위한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다 알다시피 예수님은 십자가의 모진 고통 속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울부짖었지만 하나님은 자갑게 침묵하셨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셔야 했기 때문에 성부는 침묵하신 것이다.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결국 하나님의 침묵 속에 거행된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은 하나님이 인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지의 상징이 된 것이다.
 
맥스 루케이도는 '예수께서 선택한 십자가'란 책에서 요한복음 3:16절을 이렇게 묵상하고 있다. 요한복음 16절은 단순하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 사랑의 반경은 얼마나 넓은가!~온 세상을 품을 만큼 넓다. 자신의 사랑의 넓이가 얼마나 되느냐는 질문 앞에 그분은 한 손을 오른쪽으로 펴고 또 한 손을 왼쪽으로 펴신 뒤에 피에 못을 박아버렸다. 당신을 사랑하면서 죽어가는 사실을 당신이 깨닫기 위해'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이 안아주심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주는 상징이 된 거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할 때 믿음으로 견뎌내자 끝내 죽음 아래 감추어진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도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 주어진 작은 십자가들을 짊어지고 시련을 믿음으로 이겨내면 그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축복과 위로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핍박아래 하나님의 축복과 위로가 숨겨져 있기에 루터는 시련을 '하나님 안아주심' 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단순히 하나님의 안에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시련 자체가 하나님의 안아주심이라는 것이다. 루터의 말을 또 들어보자.
 
'시련이 있는 것은 어떤 것은 나쁜 것이다. 배부르고 등 따슬 때는 우리는 기도하지 않고 말씀을 묵상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차갑게 대하고 치명적인 점잖 빼기 상태로 들어간다.' 그러니까 돈 버는 일에는 열심을 내면서 하나님의 일에는 냉랭하고 점잖 빼는 일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니까 시련이 없는 게 사실은 나쁜 거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이 잘 된다고 좋은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좋다고 생각하는 것이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쁘게 생각 되는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시련을 당하는 게 시련이 없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다. 시련이 없는 게 가장 큰 시련이라고 루터가 말 했는데 시련이 없는 거보다 시련이 있는 게 더 좋은 것이기 때문에 루터는 하나님이 고난을 우리에게 주실 때 쓰는 사탄을 도구로 쓰기 때문에 사탄을 위로의 박사라 부른다. 처음에는 이런 이야기 들을 때는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왜 루터가 사탄을 위로의 박사라 부르는가? 사탄이 다가오는 이유는 우리 안에 신앙의 냄새가 나거나 그리스도의 냄새가 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탄은 죄인들에게 관심 없고 다가가지 않기 때문에 이 사탄이 다가오면 내게 시련을 주면 '나는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이구나!' 라고 생각하면 되고 이게 위로가 되기 때문에 사탄이 위로의 박사라는 것이다. 받아 들이려니 좀 찝찝한 거 같고 안 받아들이자니 좀 그러지 않는가? 사실은 루터가 왜 탁월한 대가인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떠한가?
왜 우리는 시련과 고난을 당할 때 그 안에 숨겨진 하나님의 위로와 축복을 경험하지 못하는가? 그것은 내가 의롭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는 의롭다 생각하니까 고난과 시련을 당할 이유가 없다. 라고 생각하며 나는 이런 일을 당해서는 안 되고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시련과 고난을 당하면 어떠한가?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마귀한테 책임을 떠넘기고 심지어 하나님을 비방한다. 그러니까 자기의가 충만한 사람은 시련과 고난 가운데 어떤 유익도 얻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개라고 생각한다면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도 만족하면서 시련과 고난 가운데서 숨겨진 하나님의 축복과 위로를 갈망하는 것이다. 루터가 20년간 수로보니게 여인을 설교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실제적으로 루터는 어떤 때에는 자신을 개와 비교하기도 했다. 루터가 자기가 키우는 개가 있는데 토펠이라고 하는데 루터가 그 고기를 주려고 들고 있으니까 자기를 쳐다보는 그 눈빛에서 감동을 받은 것이다. 내가 만일 이 강아지가 고기를 바라보는 방식으로 기도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모든 생각이 오직 고기에게만 쏠려 있는 게 아닌가! 그 외엔 어떤 생각도 어떤 희망도 소원도 없어 보인다. 이렇게 루터가 강의 시간에 한 것이 아니고 탁상담화라고 한다. 루터가 오래된 수도원을 썼다. 생활이 잘 안 되니까 아내가 닭도 키우고 동물을 기르고 밭도 일구고 포도원 같은 것도 했다. 학생들을 하숙도 쳤다. 학생들이 식사를 하고 나서 탁상에서 그들이 무엇을 물으면 루터가 끊이없이 이야기 해준다. 그 학생들이 적은 게 탁상담화이다. 이 탁상 담화에 이 아내를 안 끼워준 것이다. 아내가 똘똘하며 수녀원에 있다가 수녀원을 탈출해서 그래서 루터와 결혼을 했다. 그래서 루터와 그 부인과 여섯 명을 낳았다. 부인이 난리를 치니 루터의 탁상담화에 끼어주었다. 탁상담화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 것이다. 루터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으로 견뎌낸 고난은 다른 모든 믿음의 형제들보다 더 크다. 시련을 당한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은 시련을 당하지 않은 백 사람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선행을 행한다. 이 고난과 시련이 하나님의 안아주심이라는 진리는 책을 읽거나 독서를 하거나 묵상을 하거나 해서 알아낼 수 있는 진리가 아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고난과 시련을 견뎌낸 사람만이 알수 있는 체험적 진리인 것이다. 그러니까 다 알다시피 루터는 교황이나 황제의 파문을 받아서 언제 살해될지 모르는 위험 가운데서 신체적인 많은 질병 가운데서 흑사병의 도시 피텐베르크 한 복판에서 끊임 없는 비난과 조롱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므로 하나님의 고난과 시련 가운데서 숨겨놓은 축복과 위로를 발견했고 따라서 루터는 고난과 시련이 하나님의 안아주심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저는 고난과 시련이 하나님이 안아 주심이라는 루터의 해석을 본 순간에 옥한흠 목사님의 '안아주심'의 설교와 '안아주심의 본당'이라는 단어가 생각이 났다.
 
옥한흠 목사님은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아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을 신명기 1:31절의 이 말씀을 가지고 안아주심 설교를 하셨는데 핵심적인 부분만 발췌하겠다. 모세는 광야의 여정을 고난의 통로로 보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는 은혜의 통로로 보았다는 것이다. 모세의 눈에는 광야의 생활은 어떤 삶이었느냐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품에 안고 걸으시면서 자상한 아버지처럼 보호해 주시고 공급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분이었다고 하는 것이다.
 
제가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을 믿고 고백은 하지만 이 무서운 세상에서 나를 안고 걸어가시는 하나님 아버지가 진짜 믿어지는지 스스로 한 번 물어보라. 누구에게 안긴다는 것은 머리로 아는 것은 메마른 행위가 아니다. 안긴다는 것은 온몸으로 느끼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 안겨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가? 하나님이 나를 안아주시는 아버지라는 강한 확신이 모세처럼 아무도 혼 낼 수 없을 만큼 내 마음을 확 지배하고 있으면 나는 하나님에게 안겨있는 사람이다. 이상하게 세상이 두렵지 않다. 문제가 내 앞에 버티고 있는데도 걱정이 안 된다. 그러면 나는 하나님에게 안겨 있는 사람이다.
 
옥한흠 목사님은 하나님의 안아주심을 많은 평범한 해석자들처럼 당신이 우리에게 주시는 달콤한 하나님의 감성적 위로로 설교하지 않으셨다. 고난과 시련 가운데서도 광야 한 복판에서도 물이 없고 간조한 땅, 전갈이 있는 위험한 땅에서 온 몸을 하나님께 던지는 신뢰의 할 때 경험되는 하나님의 신비로 해석을 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옥한흠 목사님의 설교는 루터의 설교와 맥을 같이하고 있다. 우리는 목사님이 안아주심의 본당을 사용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저는 이렇게 둥그렇게 생겨서 이게 안아주심 같고 어떤 장직적으로 표현으로 안아주심의 본당이라고 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고 처음에는 그런 생각을 했는데 아! 오목사님과 사랑의교회 교우들이 고난과 시련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축복과 위로를 오히려 경험하고 하나님의 안아주심이라는 사실로 고백하며 가슴에서 터져나오는 고백이었음을 생각하게 되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시련과 고난을 하나님의 안아주심의 경험하고 산다면 우리를 더럽게 만드는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악한 생각들과 공중에 권세 잡은 자들과 더러운 귀신들의 사로잡히거나 눌려 살지 않게 될 것이다. 권력의 귀신이나 돈 귀신에 사로잡혀 자신의 삶을 망가뜨리고 다른 사람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지 않게 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 고난과 시련 안에 끝내는 축복하시고 우리를 위로하심의 사실을 믿고 고난과 시련을 끌어안고 끝까지 믿음으로 견뎌내면 고난과 시련이 우리가 도망쳐야 될 악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아주심을 깨닫게 된다. 따라서 고난과 시련이 다가올 때 빨리 고난과 시련이 끝나기를 바라는 기도도 해야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 고난과 시련 안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축복과 위로를 경험하는 것이다. 아니 고난과 시련이 하나님의 축복과 위로임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고난과 시련이 하나님의 안아주심이라고 고백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어떤 시련도 이겨낼 수 있다. 인생길에 어떤 시련이 다가와도 고난과 시련이 우리를 축복하고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매순간 경험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주일마다 안아주심 본당에서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와 하나님의 안아주심에 감사하고 온 영혼이 엎드려 경배하는 복된 예배 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요약
하나님께서 주신 이 놀라운 비밀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어 이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옳소이다 저는 개입니다.‘ 라고 부르짖으며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좋으니 영적으로 가난자의 자세를 가지고 우리 안아주심 본당에서 주님이 베풀어주시는 그 놀라운 은혜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맛보는 축복을 경험해야 한다. 본문에서 그리스도께서 가나안 여자의 딸로부터 귀신을 내어 쫓는 유명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 속에는 그리스도께서 불쌍한 이방인을 호의적으로 바라보시는 매우 진기하고 놀라운 내용이 들어 있다. 그리고 또 그리스도께서 이방인을 위하여 예비해 주신 진기한 사랑이 이 이야기 속에 들어 있다. 여기서 이방인을 비추는 희미한 빛이 드러난다. 예수님의 선교 대상은 바로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자들이다. 예수님의 사역이 이스라엘에 국한된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자손들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이 이방의 선교를 소홀히 하신 것은 아니다. 이방인의 구원은 하나님이 주신 큰 특권이다. 본문에서 이방 여인이 구원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도 자기의 부족을 인정하고 예수님의 능력만 의지했기 때문이다. 참 믿음은 어떠한 고난과 굴욕 속에서도 꽃을 피우게 된다. 그러한 믿음은 성도에게 큰 기쁨과 축복을 가져다주며, 이러한 믿음이 있어야 선교의 사랑이 생긴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토요비전새벽예배(2022년 1월 22일)

제목: "약속, 그리고 믿음에서 소망까지"
말씀: 베드로후서 1:1-7
기도: 권명수 안수집사님(교통봉사부 총무)
말씀읽기: 이신영자매(청년2국),이승학 형제(대학5부)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김도훈 부목사님
-------------------------------------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


이 시간 "약속, 그리고 믿음에서 소망까지“ 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보겠다.

사도 베드로가 이 편지를 주님의 흩어져 있는 백성, 성도들에게 보낼 때, 그때에 상황은 여러모로 좋지 않았다. 그 이유는 베드로가 사용하는 그 말씀과 그 사용하는 단어, 그 내용들이 굉장히 그 당시 성도들이 핍박과 어려움에 처해 있음을 잘 드러내 주기 때문에 그러하다. 로마 황제와 유대인들로 말미암는 많은 핍박으로 성도들의 심령가운데 근심이 더해갔다. 안에서는 거짓 선생과 거짓 선지자들이 곳곳에서 일어나 말씀보다 본인의 생각을 더욱 높였고 그러다보니 영적으로 삶으로 특별히 도덕적으로 해학을 끼치고 있었다. 이에 당시 일부 성도들은 핍박을 피해서 비교를 하거나 거짓 교사들에게 넘어가 이전에 살던 방식대로 정욕과 탐심으로 살아갔었던 것이다. 참으로 놀랍게도 여러 부분 그 때와 다르지 않다. 이 땅 곳곳에서 물리적인 핍박이 여전하다. 지난 신문에서 가장 기독교를 물리적인 핍박이 심한 나라를 알아보니 아프가니스탄이라고 하는 기사를 보았다. 아프카니스탄 뿐이겠는가? 세계 곳곳에서는 가장 가까이 북한 땅에서는 여전히 물리적 핍박이 가해지고 있고 주님 보시고 이후 지금까지 그 핍박이 끊어진 적이 없다. 게다가 현대사회가 지닌 가치관으로 말미암아 더욱 교묘하게 이어지는 유혹과 핍박은 시에스 루이스(C.S. Lewis) 스쿠르 테이프에 나오는 것처럼 달콤하고 은밀하게, 하지만 더욱 강력하게 우리를 위협하고 있다. 게다가 우리 주위에도 거짓 선생과 거짓 선지자들의 활동에 많은 성도들이 신음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때에 이 새벽에 이 말씀을 주시는 이 말씀은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분명히 알려주신다. 본문 4절을 보면,
 
*베드로후서 1:4,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무슨 말씀이냐면 우리 주님께서 주신 큰 약속을 통해서 우리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우리가 더 잘 아는 표현으로 바꾼다면 신성한 성품에 참여 한다는 것은 더욱 주님을 닮아가는 것으로 이해를 해도 된다. 담임 목사님께서 늘 말씀하시고, 지난주에도 말씀하신 것처럼 거룩한 영적 습관으로 나아가는 것, 거룩한 영적 습관으로 무장하는 것이 바로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것일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당시 베드로 사도가 편지를 쓸 때에 그 시대나 지금 현대의 이 시대나 동일하게 우리 주님께서 이 절에 나온 것처럼 보배로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목적이고 은혜와 평강이 우리에게 더욱 많아져야 하는 근거가 되면서
 
*베드로후서 1:3,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토비새 참여하는 믿음의 4세대는 이렇게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기 위하여 거룩한 습관을 사모하기 때문에 더욱 주를 닮아가기 때문에 모두가 자고 있는 이때에 새벽을 깨우며 힘들고 어려운 섬김의 자리에서 묵묵히 계심을 확신한다. 얼마나 감사한 것인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사한 일이다. 세상에서 썩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가 하나님의 성품에 신성한 성품을 거룩한 인격을 받아 누리게 된다는 것이 놀랍지 않는가? 신기하지 않는가? 저만 신기한 것은 아닌 것 같다. 모두가 신기한 것을 느끼면 좋겠다. 만약 제가 이 자리에서 스파이더맨처럼 우리 높디높은 안아주심의 본당 천장을 기어 다니거나 3층에서 2층으로 줄을 타고 다닌다면 굉장히 신기하게 느낄 것이다. 사람들이 왜 히어로 물을 스파이더맨이다, 트르나, 어벤져스 주인공들, 왜 이렇게 좋아하는가? 영화에 나오는 캐릭터들을 왜 좋아할까?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내가 가질 수 있는 능력 말고 초월적인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할 것이다. 아무리 힘이 세도 우리가 헐크만큼 세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스파이더맨처럼 건물 사이를 끈끈이 줄로 멋지게 다닐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정말 초월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을뿐더러 비교할 수 없는 초월적인 외모도 가지고 있다. 얼마나 흠모할만한가? 그들이야말로 그리스신화나 로마신화에 나오는 것처럼 그런 신들이 가지고 있는 신적 능력을 받아 사용하는 것 같다. 영화에서 보면, 그런데 오늘 성경에서 나오는 이 신의 성품에 참여한다는 단어가 영어로는 네이쳐라고 번역이 되었는데 이 피쉬스라는 단어는 성품, 인격, 성질, 본질 일, 이러한 모든 본성에 관련된 부분들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 캐릭터들, 스파이더맨이나 헐크는 정말 그리스신화, 로마신화에 나오는 그런 신들의 성품 그들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 같다. 신이 다를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말하는 것이라면 지금 이 영화 캐릭터들은 그리스 로마신화의 그 놀라운 하늘을 다니고 산을 쪼개는 그러한 신의 능력이라고 생각되어지는 것들을 갖고 있는 것이다.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도 그렇다는 것이다. 외모도 좀 딸리고 그들처럼 그렇게 뛰어다닐 수도 없지만 우리는 주님의 약속으로 주님께서 이루신 모든 사역으로 나를 위해서 받으신 고난과 나를 위해 돌아가시고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지금도 떠나지 아니하시고 성령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다. 우리가 원조 어벤저스이다. 이제는 좀 신기해졌는가? 많이 놀라고 신기해지길 원한다. 우리가 그런 존재이다.
 
그래서 지극히 큰 약속이 여전히 우리에게 소망으로 살아서 숨 쉬고 있다. 이미 이루신 구원으로 말미암아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게 된 우리는 이제 이 땅에서 질고가 모두 끝나고 주님을 뵈올 때까지 이 큰 약속을 붙들고 날마다 더 거룩해지고 시마다 때마다 더 예수님 닮아가야 되는 것이다. 그것이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과 은혜를 우리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는가? 안 주셨는가? 주셨다. 그리고 지금 그렇게 주님은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원하신다. 그러면 더 거룩해지고 예수님을 닮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해야 된다는 이런 어려운 말이 성경에 나오면 그렇다면 이렇게 해보라고 항상 말씀해 주신다. 서신 서를 보면 실제로는 이렇게 생각하라. 교회서는 이렇게 하라 이웃 간에 이렇게 살아라, 말씀들이 나온다. 구체적으로 말씀을 해주신다.
오늘 본문에서도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그러므로 말씀으로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어떻게 해야 되는지 5-7절을 통해 말씀한다. 바로 그 유명한 말씀이다.
 
*베드로후서 1:5-7,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처럼 유명한 구절이다. 말씀한 대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한 번 외워보자.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렇게 잘 외우는가? 잘 외운다. 이 아홉 가지 열매를 외우려면 애가 많이 쓰인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은 처음에 3개라서 잘 외워진다. 뒤에가 쉽지 않다. 전에 한 번 말씀 드린 적이 있다. 오래 참음은 글자가 4개여서 4번째 위치한다. 그래서 오래 참음은 절대 안 잊는다. 사랑과 희락 화평 오래 참음 그 다음에는 자,양,충, 온,절, 이라고 외웠다. 벌레는 손절도 한다. 이렇게 혼자서 외웠다. 어떻게든 외워보면 좋다. 왜냐면 외우면 이것이 우리 안에서 되 뇌이고 살아 역사하시고 언제든 은혜 위에 은혜가 되는 것이다. 우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또 그렇게 외웠다. 저절인경형사라고 외웠는데 우리 성도님들께서도 어떤 방식으로도 좋다. 이렇게 주시는 말씀을 외워서 가슴에 담아보도록 하기를 바란다. 이 여덟 가지 요소를 우리는 잘 볼 필요가 있다.
 
사도 베드로가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로서 이렇게 하라고 하는 부분이니까 잘 보아야 한다. 이렇게 여덟 가지 요소로소 우리가 먼저 확실히 해야 할 될 것은 이 여덟 가지 요소가 우리 힘을 얻는데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 안에 절제가 하나도 없는데 다른 데서 절제를 가져와서 우리 안에 절제를 탁 붙이라는 말씀이 아니다. 오히려 이 본문은 이미 보배롭게 지극히 큰 약속을 주셨다 라고 말씀했다. 우리에게 소망이 있음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이 여덟 가지 요소의 시작이 무엇으로 되는가? 마지막으로 무엇으로 끝이 나는가? 사람으로 끝이 난다.
 
그런데 이 믿음은 이미 1절에서 보배롭고 귀한 믿음을 우리가 이미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동일하게 3절에서는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말씀하신다. 우리가 보면 믿음도 받았고 능력도 받았고 생명도 받았고 경건에 속한 모든 것도 다 받았다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이미 주셨다. 물론 받아서 우리가 완벽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을 때에 그 성장할 수 있는 그 씨앗과 그 근거를 주셨다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었을 때 한 번에 사도 바울처럼 하루 만에 바로 그렇게 될 수 있는가? 사도 바울도 시간을 두고 주님과 씨름하고 훈련받고 주님 앞에서 훈련받고 순종하고 그렇게 주님을 닮아간 것이다. 그래서 분명한 것은 너희가 7절에서 더해라 라고 했을 때 우리가 다른 곳에서 꾸어와 보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믿음, 소망, 사랑 안에서 걸어가면서 이미 우리 안에 주신 이런 요소들이 얼마나 제대로 얼마나 아름답게 드러나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라고 말씀해 주신다. 그리고 부족하면 주신 것을 기도하고 애씀으로 드러내어 보라고 말씀하신다. 확인하고 드러내어 봐!!~ 이미 우리 안에 주신 덕의 요소를, 믿음을 주실 때 우리 안에 함께 주신 지식의 요소들이 보이지 않더라도 그것이 있는지 없는지 보고 잘 드러내 보라고 애를 쓰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하나 붙잡아야 한다.
두 번째는 이 여덟 가지 요소들이 많은 신학자들과 종교 개혁자들과 믿음의 선조들이 보았을 때 이 시간적 대로 논리적 순서대로 하나씩 구비해야 될 그 어떤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령 예를 들어서 이번 1월 달에는 믿음을 제대로 내 심령 가운데 제대로 장착을 했으니까 2월 달에는 이제 덕을 완성하면 되고, 3월에는 이제 지식차례다. 이렇게 생각하면 굉장히 훌륭한 생각이 맞다. 그런데 지금 말씀과는 딱 맞지는 않다. 안하는 것 보다는 물론 낫다. 예를 들자면 인내를 이번 달에 완성해야 되는데, 실수로 경건을 먼저 해버렸네,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확실히 들지 않는가? 여기에는 나오는 시간적 순서라든가 논리적 이렇게 되어야 된다는 부분은 아니다.
 
그런데 여기서 확인해야 하는 큰 흐름은 있다. 여덟 가지 요소를 가만히 보면 무엇인가 점차 확장 된다는 느낌을 받을 수가 있다. 처음에 믿음 덕 지식 절제와 같은 부분들은 믿,덕,지,절, 절제와 같은 부분은 아무래도 개인의 내면에 일어나는 성품으로 볼 수 있다. 믿음도 그렇고 선에 대한 개념들, 그리스도에 대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지식들, 그리고 스스로 겸비하여 절제하는 것들은 개인적인 부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인내의 부분도 개인적이다. 그런데 인내는 주로 외부의 핍박이나 환경적으로 굉장히 어려울 때에 반응하는 성품이라고 볼 수 있다. 경건에 대한 것도 만찬가지다. 경건에 대한 다양한 정의가 있을 수 있지만 삶의 모든 부분에 대한 어떻게 보면 세계관적으로 파전을 하나 구워도 모든 것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주님 안에서 삶에 모든 환경과 부분에 대한 성경의 올바른 반응을 우리는 경건이라고 부를 수 있다. 인내와 경건에서는 개인에 대하지만 외부적으로 더욱 확장되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걸은 더 나아가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형제 우애이다. 지금 벌써 일곱 번째까지 왔다. 형제 우애는 이제는 나 개인에서부터 다른 부분에 확장된다. 형제와 자매들로 넘어가는 것이다. 내 안과 밖 뿐 만이 아니라 이제는 다른 존재로 넘어간다.
 
오늘 우리가 교통부 찬양대가 찬양하기 전에 본 영상은 아마 섬기는 성도님들로부터 형제우애를 확인하신 분들이 이렇게 고백해 주신 것이다. 이렇게 형제우애, 형제와 자매에 대한 우애와 사랑을 느낀 것이다. 여기 다음에 나오는 이 사랑이 마지막에 나온 사랑이 모든 것을 덮는 것이다. 오늘 날 이 험악한 시대에 가치관이 그리고 다른 것으로 이 현란한 상황에 우리 주님께서는 이러한 여덟 가지 요소를 가지고 신성한 성품에 우리 모두가 더욱 더 풍성하기를 원하신다.
 
그 여덟 가지 요소가 얼마나 드러나고 있는지 확인하기를 원하는가? 지식이 있는가? 그러면 절제하고 있는지를 우리 안에 물어보아야 한다. 덕과 지식과 절제와 인내로 무장되어 있는가? 그러면 나의 생각과 나의 눈이 오직 믿음으로 경건함 안에 있는지, 이 모든 세상을 자녀의 문제를 기업을 경영함까지도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감당하는지를 한 번 확인해야 한다. 나의 세계관과 나의 신앙인격이 원숙하다고 생각되고 다른 모든 사람들도 그렇게 이야기 한다고 생각해 보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심어주신 형제우애라는 요소도 확인해야 한다. 내가 얼마나 공동체 안에 형제와 자매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말이다. 저는 간절히 바라고 소원하기를 우리가 사랑으로 더 풍성하면 좋겠지만 그 사랑은 모든 것을 덮는 것이라면 우리 안에 많은 요소들을 다 확인하겠지만 가장 소원하는 것은 확장되고 확인되는 개념, 형제우애를 자매 사랑을 내가 잘 드러내고 있는지를 꼭 확인할 수 있기를 소원한다.
 
나를 위한 것은, 나의 가정을 위한 것은, 우리가 생명을 걸고 소원하지 않는가? 하지만 우리의 영 가족은 어떠한가? 이 귀한 교회, 천국 가서도 함께 나눌 이 공동체는 우리가 어떻게 섬기고 있는가? 형제우애는 이웃을 향한 기도, 섬대접, 공동체를 위한 섬김과 헌신으로 나온다. 저는 평신도 리더들, 우리 성도님들이 교회를 섬기며 성도들을 몸으로 섬기며 본인들과 친하지도 않고 관계도 없는 이를 위하여 기도하면서 때로는 가슴을 먹먹히 하고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심방 중에 자주 보게 된다. 급하게 듣게 된 지인의 암 소식, 방황하는 지체들을 위하여 밥을 먹이고 함께 울고 함께 웃는 동지들이 바로 안아주심의 본당에 있다. 예배 때마다, 새벽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섬기면서 애쓰고 땀을 흘리는 주의 제자들이 바로 우리 공동체 안에 있다. 때로는 알아주지 않는 사역을 주님께서 하명 받아 겸손히 섬기며 드러내지 않고 조용히 수십 년을 섬기고 있는 귀한 주님의 자녀들이 우리 사랑의교회 안에 너무나 많다. 바쁘고 힘든 세상 쉬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쉼과 능력이 있으면 좋은 것 많이 먹고 신나게 놀면 되는데 왜 같이 아파하고 왜 수고를 사서 해야 하는가? 실상 마음을 주고도 돌아오지 않을 수고이고 고생하고 애써도 대부분 칭찬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형재우애 자매 사랑은 이것이 풍성하면 더 확실히 알고 있는 것이 있다. 무엇인가? 첫 새벽 서늘한 공기에 감사와 상쾌함을 잘 알고 있다. 헌신하면서 생긴 근육통의 기쁨도 잘 알고 있다. 전력을 다하고 섬기면 후회함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얗게 불태운 곳에 그리스도의 눈물장만 남는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무엇보다 명확히 그 섬기는 분들이 잘 알고 있는 것은 우리 주님을 섬기면 알게 되는 것처럼 우리 귀한 형제와 자매들도 섬기면 섬길수록 더 귀하다는 것도 알게 된다. 나누면 나눌수록 더 풍성해진다는 것도 알게 되고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주님의 마음을 더욱 알게 되고 더욱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을 온몸으로 느끼게 된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이미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에게 주심은 이 여덟 가지 요소가 풍성하고 아름답게 드러나기를 지금 원하신다. 모든 요소에 풍성하시되 특별히 형제우애가 더욱 풍성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나중에 우리 모두가 주님을 뵈올 텐데 못 박히신 주님의 손과 발을 붙잡을 때에 우리의 손과 발이 지금보다 더 거칠어져 있기를 우리는 소망한다. 마지막 말 우리의 심장을 주님께 드릴 때 우리의 심장이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로 말미암아 아파함으로 더 많은 상처가 있기를 원한다. 너무나 귀하게 섬기시는 우리 봉사자 여러분, 주님께서 주시는 내밀한 은혜와 약속된 영광을 기대하고 소망하기를 바란다. 하지만 더욱 더 중요한 것은 이제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성경은 절대 대충 지나가지 않는다. 형제우애가 충만하다거나 사랑을 이루셨다고 생각한다면 성경을 펴서 고린도전서 13장을 보라.
거기에 사랑은 오래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다 이룬 것 같은데 다시 절제와 인내가 시작된다. 믿음 소망 사랑 안에서 우리의 신성한 성품을 형제자매 사랑으로 나타내며 주 안에서 함께 울고 웃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신성한 성품으로 드러나길 소원하면서 찬송가하기를 ‘내 맘과 정성을 다하여서’~를 찬송하자. ~~~
 
요약
한 결 같이 섬김의 도를 실천하는 모든 봉사자는 하나님의 따스한 위로의 옷을 덧입고 섬김의 그 자세를 끝까지 잊지 말고 주님의 약속을 믿고 기대하며 기도하고 헌신하여 가정과 일터와 모든 문제 앞에서 주님의 사랑으로 승리하길 소망한다. 공동체에서 서로 믿어주고 서로 사랑하고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여 모든 덕목을 실천해야 한다.
 
-하나님을 안다’라는 표현의 의미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본질과 성품에 대한 지속적이고 포괄적인 인식을 말한다. 이 인식을 통하여 천국에 관한 잘못된 사실을 구별할 수 있고 거짓 교사와 유혹자들에게 담대히 맞설 수 있는 힘을 얻을 수도 있다. 성도의 덕목은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사랑이다.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볼 것은이같은 덕목이 믿음으로 시작하여 사랑으로 끝나고 있다는 것인데 이는 믿음을 통해서 그 외의 덕목들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사랑으로 모든 것을 완성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주일예배(주후 2022년 1월 16일)
제목: ''기도하는 자는 낙심하지 않는다''
말씀: 누가복음18:1~8
찬양인도: 쉐키나, 영광찬양대
대표기도: 유이삭 부목사님(1부)
사회: 장광천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
 
*누가복음18:1~8,
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
 


▶성령께서 은혜 주셔서 오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을 활짝 열고 주목하고 경청하고 반응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란다. 11번째 전하는 비유가 참 좋다. 너무 실제적이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해석이 어려운 것도 많이 있지만 이 비유는 너무 쉽게 해석이 된다.

 
*누가복음 18:1~3,
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비유로 말씀하셨지만 우리가 너무 쌩쌩하게 이해가 된다.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
-너무 인간적이다. 원한을 풀어주십시오. 여러분 살다보면 이런 일도 생길 수 있다. 마음에 짐을 지고
원한을 풀어달라고 그래서 우리에게 와 닿고 또 좋은 것은 끝이 좋아야 한다. 응답을 받는 것이다. 끝이 좋아야 좋은 것이다. 그리고 이 비유를 깨달으면 내 기도가 응답이 되지 않을까하는 낙심하는 분들에게 기도를 포기하지 아니하고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그리고 기도의 선순환, 응답의 선순환 은혜의 선순환이 되게 한다. 은혜를 받게 되니까 낙심하지 아니하고 기도하고 응답을 받게 되고 응답을 받게 되니까 낙심하지 하지 아니하고 기도하고 응답받고 낙심하지 아니하고 기도하고 응답 받고 낙심하지 아니하고 은혜의 선순환이 일어난다.
 
I. 치열한 삶의 현장, 치열한 목회 현장.
 
-제가 이 내용이 실제적이고 중요한 이유가 뭐냐면, 오늘 우리의 삶 자체가 치열하고 목회 현장도 너무 치열하다. 그래서 치열한 삶의 현장, 치열한 목회 현장을 생각하면, 이 기도가 그렇게 실제적인 것이다. 저는 목회자로서 자주 예민한 고통을 느낄 때가 많다. 지난주에도 절망적이고도 긴박한 상황 가운데 SOS를 치신 분들이 계셨다. 코로나 때문에 중환자실에서 생사의 기로에 선 분도 있고, 교회 중직 자들 가운데 말기 암으로 투병하고 계신 분도 계시고, 어떤 분은 마지막 음식 섭취가 안 되어 뼈만 남으신 분도 계신다. 정말 안타깝다. 치열한 현장이다. 그리고 또 힘든 것이 뭐냐면 요즘 국론분열이다. 서울 사역 지난 부임 이후 19년 가운데 계속 상황이 좋지 않다. 좌우 진영이 날카롭게 대립해서 극렬한 적대 감정이 있고, 그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안타깝고 어떤 이슈가 있으면 그 이슈만 가지고 이야기 하면 되는데 이 이슈를 가지고 인격살인을 한다. 꼬인 사람들이 많다. 제가 이번 신년에 국민일보에 신년 대담이 있었다. 그것이 네이버에 올라갔다. 그래서 안 하고 싶었지만 댓글을 보니 96%는 좋다. 그러나 안 보아야 하는데 마지막에 잘 보니 마음을 후다닥하는 게 있었다. 인간적인 마음이 있으려고 했지만 그래도 댓글 가운데 한 두 개만 어려우니까 감사한 일이라고 여겼다. 사람들이 꼬였다. 여러분 우리가 남인가요? 우리는 한 민족이고 한 반도에 살고, 북한하고 휴전선이 막혀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한 섬에 한 배를 탄 공동운명체인 줄 믿는다. 이 안에서 좀 시각을 넓히면 좋은데 다들 빠꿈이가 되어가지고 전체를 못 보니까 그렇다. 어릴 때 4형제 이다보니 한 번씩 티격태격 할 때가 있다. 향제가 레슬링하면 부친께서 다 모이라고 하신다. 그런 후에 성경을 다 펴라고 하시며 갈라디아서 5:15절을 합창!!~~하신다.
 
*갈라디아서 5:15,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알면서도 안 되는 부분이 많다. 그리고 이것은 치열한 삶의 현장이고 그리고 지난 인생 자체가 문제의 연속이다. 이번 주도 풀어내야 할 많은 문제들이 있다.
 
*욥기 14:1,
1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삶의 치열한 현장 속에서 욥기에 보면 생애가 짧고 그 다음에 걱정이 가득하다. 수천 년 전의 욥의 때나 지금이나 똑 같다. 가까이는 지난 2년간 코로나로 인해서 자영업자들이 폐업을 하고 간호사들은 사직서를 손에 들고 근무하기도 하고 심지어 사정이 있어서 백신을 맞지 못한 사람들이 친구들과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현실이 되었다. 이것을 보면서 한 가지 더 각인되는 것이 뭐냐면 모든 인생은 여리고로 가는 삶의 도상에 있다. 무슨 말이냐면, 예루살렘은 해발 753미터이다. 그 여리고는 해저 258미터이다. 사해 옆에 있기 때문에 천 미터 차이가 난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이
27킬로 정도 되는데, 그 두 도시를 잇는 그 길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서 산악지대 험한 바위와 동굴이 많아서 강도들이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행인들을 약탈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것을 여행자들이 모를 리도 없었고 그 길을 가고 싶지 않았다. 여리고는 상업도시이고 일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알면서도 생업이기에 가야만 했다. 그래서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여리고로 내려가는 사람이 불안 속에 지나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가진 것 다 빼앗기고 그것도 모자라 강도에게 맞아서 거의 피투성이가 되어가지고 죽을 지경이 되었다. 이게 어떻게 보면 인생 순례자의 모습이다. 여리고로 가는 길이 쉽지 않은데, 좀 벗어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살아내야 하기에 여리고로 내려가야 한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미국 최고의 대통령 보좌관 고위층에 있다가 감옥에 가게 된 찰스 코슨은
“내가 살아온 인생 산산조각이 났고 계속해서 살아갈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내 미래가 영원히 수감된 것 같았다.''

- 물론 그 안에서 하나님을 부르짖어서 완전하게 인생 새 판짜기가 되었지만 일단 감옥에 갇힐 때는 내 미래가 영원히 수감 되는 것 같았다고 말하고 있다. 찰스 코슨처럼 내 인생이 산산이 조각났다. 어디에서도 삶의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고 탄식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살아내야 하니까 지금 여리고 도상에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 여리고로 내려가는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살길이 없겠는가? 강도 만난 사람의 유일한 길은 선한 사마리아인을 만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강도 만난 사람이 사는 길은 치유할 목자를 만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치열한 현장에서 살아가는 우리 성도님들을 보면서 성도님들을 향한 간절한 기도가 있다. 비록 우리 인생이 여리고로 걸어가는 도상에서 산산조각이 나고 희망이 없는 상황을 만났다 할지라도 우리 모두가 다 목자의 심정을 가진 자를 만나기를 기도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을 만나기를 바란다.
 
오늘 이 말씀을 읽으면서 동일시가 된다. 우리 모두가 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사람이라면 우리도 과부와 같은 것이다. 오늘 우리가 과부와 같이 동일시가 된다. 우리는 코로나로 인해서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한 자들이 많다. 그리고 여리고로 가면 강도 만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직장도 가야 하고 그래서 우리 인생은 광야 길이라 하지만 요즘 같으면 광야길+여리고로 가는 길이다. 광야길+과부가 당한 원통한 일의 삶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인생의 주위에 강도들이 너무 많다. SNS 가운데도 강도들이 너무 많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깊이 살펴보겠다.
 

II. 말세에서 기도하는 믿음을 보겠는가?

 
치열한 삶의 현장 한 가운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말세에 기도하는 믿음을 보겠는가? 이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17장 제일 뒷부분이다. 우리가 이런 여리고로 가는 도상에서 그래도 한 결 같이 낙심하지 아니하고 기도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꾸준한 기도, 끝까지 기도,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천국시민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종말의 대해서 확실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눈을 열어서 우리의 삶의 여정을 열어가는 그것이야말로 의미가 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궁극적 종말,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과 종말론적인 구원에 대해서 눈이 열려 있지 않으면 우리가 꾸준한 기도를 못한다. 낙심하지 아니하고 기도 못한다. 원통한 일을 당해서 메어 달릴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심판의 눈이 열려있지 않으면 기도가 불가능하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17장에 보면
 
*누가복음 17:37,
37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한명을 데려감을 당하고 한 명은 버림을 당한다. 그런데 가능하냐고 하니, 갑자기 주님은 죽음이 있는 곳에는,,, 죽음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죽은 시체와 독수리가 오는 것은 너무나 명확하다는 것이다. 지금도 티벳 같은 곳에 가면 시체를 확실히 쪼아 먹는다. 그렇게 하도록 시체를 놓아둔다. 포인트는 죽음과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분명히 모이는 것처럼 황량한 곳에는 확실하게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과 인생과 공동체의 종말은 반드시 온다는 것이며 그리고 오늘 과부와 같은 상태, 여리고 도상으로 내려가는 자들이 그 도상에서 한 결 같이 기도할 수 있는 이유는 종말론적인 신앙이 있어야 이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을 믿고 종말론적인 구원을 믿는 성도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일생을 통하여 꾸준한 기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이 과부의 말쑴이 실제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종말론적인 신앙, 주님이 다 아시고 역사의 포인트가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면 이러한 기도를 못한다. 우리 개인의 종말도 믿는다. 우리는 주님의 심판대에 서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를 하는 것이다. 주님이 확실히 재림하신다.
 
*누가복음 18:3,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너무 억울해서 궁여지책으로 재판장을 찾아갔다 불의한 재판장을 만남
 
*누가복음 18:4,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과부는 원한이 있다. 과부는 혼자 살기에 벅찬 문제가 있고 그런 다음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자식도 없고 남편에게 물려받은 것도 없으니 아니면 과부로서 감당할 수 없는 인격적인 모독이나 차별이 있었을지 모른다.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재판장을 자주 찾아갔으나 원한을 풀어달라고 했다. 그러나 못된 재판장을 만난 것이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자가 강도 만난 것처럼 재판장에게 호소를 했는데 차가운 인간이었다. 사정을 해도 안 들어준 것이다. 안되니까 그러나 자주 갔다. 여리고 도상에서 강도만난 자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벌거벗겨지고 피투성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재판장이 이 과부가 번거롭게 하니
 
*누가복음 18:5,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하나는 번거롭게 또 하나는 괴롭게 한다는 것이 있다. 때리는 것 같고 멍들게 하는 것 같아서 원한을 들어준다. 그러니까 귀찮아서 재판장이 원한을 들어 준다
 
*누가복음 18:7,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이 말씀에 경청하고 주목하고 반응하기를 바란다. 하물며 원한을 풀어줄 것이라는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를 응답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누가복음 18:8b
8b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인자가 올 때 종말론적인 믿음을 가지고 마지막 때에, 인자가 올 때 기도하는 자를 보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믿음을 보신다는 것이며 꾸준하게 기도함은 믿음의 표현이다.
그래서
 
▷기도와 믿음은 같이 간다.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는 믿음이다. 진정한 기도는 응답을 안 한다고 떼를 쓰는 것이 아니다. 기도가 믿음이고 불평대신에 감사하는 것이다. 노력하는 대신에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우리는 치열한 목회 현장에서 대부분 고통 당하고 여리고로 내려가고 절망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다. 부정적인 환경과 불신앙의 환경 가운데서 주님 앞에 계속 기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환경 가운데서 믿음이 없이는 안 된다. 꾸준히 기도하는 것은 제대로 믿음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래서
 
*유다서 1:20,
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성령으로 하는 지속적으로 하는 기도는 반드시 믿음의 터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믿음은 내적 표현이고 기도는 내적표현의 자연스런 결과이다. 미음이 없는데 제대로 기도할 수 있겠는가? 과부는 원한을 풀어주시는 하나님을 믿은 것이다. 그래서 꾸준히 기도한 것이다. 과부처럼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능력이 된다.
 
*히브리서 12:15,
15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은 그것이 쓴 뿌리가 되어 우리가 오염시킨다. 원통함을 풀지 못하면 불의한 재판장이 된다. 제대로 풀지 않으니 재판관이 되어서 이러한 난리가 난다.
 
▷원통함을 믿음이 기도로 풀면 능력이 되지만, 기도로 풀지 않으면 쓴 뿌리가 된다.
- 이 사회가 이 쓴 뿌리를 풀지 않으면 독이 되어서 남을 정죄하고 남을 재판한다. 우리는 말씀의 은혜를 받아서 꾸준한 기도를 통해 이 원통함을 풀어서 능력을 가져서 다른 사람을 성공시키는 주님의 종이 되길 바란다. 믿음이 기도, 꾸준한 기도, 낙심하지 않는 기도는 그 기도를 통해 자신도 치유받고 자신도 능력이 되지만 그것을 통해 남도 성공시키고 남을 좌절 시키지 않고 남을 성공시킨다. 깊은 진리이다. 종말론적인 안목을 가지고 모든 성도가 수많은 원통함이 있지만 우리는 믿음의 기도로 꾸준한 믿음의 기도로 눈 녹듯 녹여야 한다. 풀지 않는 상처가 사탄의 놀이터이다. 이 시대의 원통함을 가진 사람들은 꾸준한 기도로 남들을 성공시키고 남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결단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않는 결단을 해야 한다.
-기도해도 낙심될 때도 있지만 꾸준히 기도하면 응답하신다.
 
*로마서 12:12,
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이것 외에는 없다. 내 인생의 여리고 가는 길은 없다. 첫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를 향해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곤경에 빠진 골로새 교회를 향하여 계속 기도하고 감사하라고 한다.
 
*시편 62:8,
8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기도가 우리의 마음을 통하는 줄 믿는다.
 
첫째-기도가 거룩한 습관
-라이프 스타일, 자연스럽게 삶 자체가 기도. 어느 정도 기도하면 자연스럽다 순항하듯 삶의 여리고 도상에서 돛을 올려서 자연스런 기도가 되어야 한다. 삶 자체가 기도가 되면 꾸준한 기도가 된다.
-어려우니까 기도 안하고 기도 안하니까 응답 없고, 응답 없으니 기도 안하게 되고, 안하니까 또 어렵고, 어려우니까 기도 안하고 기도안하니까 응답 못 받고 안하니까 기도 못하고 뭐 이렇게 변증법적 악순환이다. 은혜의 선순환은 기도하니까 응답 받고, 응답 받으니까 다시 기도하고 기도하니까 고통 중에 다시 주님을 깨닫게 된다. 라이프 스타일로 하라. 기도도 어느 정도 고도에 올라가면 자연스럽다. 비행기도 고도에 올라가면 순항하듯이 배가 돛을 올려서 바람에 순항하면 배가 간다. 삶의 여리고 도상에서 우리가 꾸준한 기도를 통해 돛을 올려서 거룩한 습관적인 기도가 되고 자연스런 기도가 되어야 한다. 기도의 도움이 되는 두 가지가 있다.
 
▷슬로건 있는 단순 기도가 필요하다.
-세리는 아주 단순이 기도를 했다. 아주 단순하고도 슬로건이 있다. 밤낮 부르짖을 만한 슬로건 기도가 필요하다. 밤낮 기도하면 기도를 하나님은 들어주신다. 절박하고도 꾸준한 기도 예배를 살려주시길 거룩한 습관. 기적 같다. 내일 예배를 살려 주시옵소서. 표징을 주시옵소서. 등 등.절박하고도 슬로건이 있는 단순의 기도, 꾸준한 기도가 중요하다. 거룩한 습관이 되기 위해서 예배를 살려 달라고 기도하라.
 
찬송 마음속에 근심 있는 자는~ 단숨에 찬양이고 기도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능력이 된다. 찬양도 ...
 
▷일상의 삶 자체가 기도로 승화시킨다.
답답할 때 기적을 주시라고 단순의 기도를 삶 자체를 기도하라. 영적 에너지를 받기를 기도해야 한다. 짜증 부리고 그러면 안 된다. 모든 일상을 기도로 승화하라. 오르간을 오학년 때부터 내가 혼자서 터득하고 쳤다. 모두 다 찬송을 하니까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모두가 다 쉽다. 지금도 불을 다 꺼도 다 친다. 코드가 일상화가 되니까 치게 되었다. 우리 아버지가 대단하시다. 근로기준법을 어기셨다. ㅋㅋ
악보가 없어도 쳤다. 기도하는 시각이 넓어야 한다. 영적 자유함이다. 은행직원이 창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짜증을 부리지 말고 ,,,, 내 몸에서 영적 에너지가 나게 해 달라 기도하라.
 
 
▷주님의 계획과 목적, 원대한 그림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주님과 더 깊은 교제가 있어야 한다. 부부도 대화가 필요하다. 남편을 잘 모시고 서로 감정을 표현하고 영적 교제를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꾸준한 기도로 일상화해야 한다. 조용히 과부처럼 기도하라. 과부가 드리는 아버지께 드리는 울부짖는 자녀의 기도이다. 그렇게 될 때, 밤낮 부르짖는 기도가 있어야 한다. 주님과 더 깊은 교제로 나아가서 믿음의 사람, 기적을 체험하기를 바란다.
 
♣요약
우리가 여리고로 가는 험한 인생길에서 낙심하지 않고 꾸준히 기도하면 하나님은 응답하신다. 기도하면 낙심하지 않게 하심을 믿고 과부처럼 밤낮 기도를 하고 하나님은 원대한 계획과 목적을 이루게 하시는 응답을 믿어야 한다. 그 기도로 이웃을 살리고 여리고 도상의 고난과 상처를 주님의 능력으로 치유해 주심을 깨달아서 남을 성공시키고 사랑으로 실천하는 기도의 힘과 능력을 경험하기를 바란다.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성도로 하여금 낙망치 말고 기도하도록 권하기 위함이다. 흔히 우리들은 기도 응답이 없으면 낙심하여 기도를 포기하고 만다. 그러나 응답이 쉬 나타나지 않아도 참고 기다리면 반드시 응답을 받게 된다. 바른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항상 기도하고, 쉬지 말고 간절하게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깨어 기도해야 한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2년 1월15일)
제목: ''부흥을 위한 사명의 팀웍''
말씀: 여호수아 1:10~18
말씀읽기: 홍윤지(소년부), 최민규(초등부)
찬양인도: 예배부 찬양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

*여호수아 1:10~18,
10 이에 여호수아가 그 백성의 관리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11 진중에 두루 다니며 그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양식을 준비하라 사흘 안에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사 차지하게 하시는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들어갈 것임이니라 하라.
12 여호수아가 또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와 므낫세 반 지파에게 말하여 이르되.
13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안식을 주시며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시리라 하였나니 너희는 그 말을 기억하라.
14 너희의 처자와 가축은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쪽 땅에 머무르려니와 너희 모든 용사들은 무장하고 너희의 형제보다 앞서 건너가서 그들을 돕되. 15 여호와께서 너희를 안식하게 하신 것 같이 너희의 형제도 안식하며 그들도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시는 그 땅을 차지하기까지 하라 그리고 너희는 너희 소유지 곧 여호와의 종 모세가 너희에게 준 요단 이쪽 해 돋는 곳으로 돌아와서 그것을 차지할지니라.
16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것은 우리가 다 행할 것이요 당신이 우리를 보내시는 곳에는 우리가 가리이다.
17 우리는 범사에 모세에게 순종한 것 같이 당신에게 순종하려니와 오직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모세와 함께 계시던 것 같이 당신과 함께 계시기를 원하나이다.
18 누구든지 당신의 명령을 거역하며 당신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는 죽임을 당하리니 오직 강하고 담대하소서.

▶우리는 주님 앞에서 주님을 섬기는 자세가 필요하다. 올바른 리더쉽, 지도력이 필요하다.
올바른 지도자는 여호수아의 지도력은 모세의 지도력을 계승했다.
이것이 나중에 십 수세기 이후에 예수님이 계승하신다. 히브리어로 여호수아가 신약에서는 예수스, 예수님이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새로운 여호수아가 되셔서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완벽한 지도력을 발휘하신 줄로 믿는다.

사랑의교회 44주년이고 이제 45주년이 되어가는 시점에서 우리가 그동안 계속 한 결 같이 제자훈련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온전하게 닮아가는 그 신앙인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해 영적 재생산을 대한 온전한 제자의 도와 이 지도력을 주신 주님을 찬양한다. 변함이 없는 것이다. 나는 중직자가 아니라고 하면서 오늘 이 4차 산업혁명 시대에, 메타버스 시대에, 우리의 지도력은 여호수아와 모세의 지도력도 아주 중요하지만 우리는 오늘날 21세기의 4차 산업혁명 이 시대에 지도력은 영향력이다.

▷이 시대의 지도력은 영향력이다.

아내들은 남편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이다. 아내가 잘 하면 남편들이 힘이 난다. 남편을 왕처럼 대해야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예외 없이 사랑의교회 속한 모든 성도들은 이 시대 앞에 영향력을 가진 주의 신실한 종들이 되리라 믿는다. 아멘!!~~우리가 영향력을 가지고 주님 앞에 서는 그날까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떤 사람도 영향력에 관해서는 제외 되는 사람이 되어선 안 된다.

에너지를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에너지를 주고 뺏어 가는 사람이 아니라 불을 밝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자녀들은 자녀들 나름대로 큰 긍정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다. 자녀가 잘하면 부모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끼치는가? 자녀들끼리 서로 사이좋게 지내고 서로 격려하면 부모가 얼마나 좋은가? 늘 이야기 하지만 돈이 없으면 가난이 원수이다. 또 돈이 많으면 혈육이 원수이다. 형제가 원수일 수 있다. 부모입장에서는 돈이 많아도 사이좋게 우애 있게 믿음으로 신뢰하고 섬기면 부모에게 큰 영향력을 끼친다. 오늘 이 새벽에 성경을 읽은 민규 윤지는 부모에게 큰 영향력을 끼쳤다. 우리는 이 시대 앞에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으로 살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영향력을 끼치려면 우리에게 두 가지가 필요하다.


I. 첫째는 값을 치룬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가 영향력을 가진 지도력을 가지려면 누구도 예외가 없다. 값을 치루는 삶을 살면 된다. 한 예로 전남의 어느 장로님이 목사님에게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 있다. 너무 집이 가난해서 살 수가 없었다. 항상 소원이 본인을 매출의 십일조를 하기로 결심한 것이다. 조그만 식당을 운영할 때, 매출액의 십분의 일을 내기로 했다. 울면서 그러기도 했는데 잘 안되면 안 된다고 매일 그 교회 목사님이 그 식당에 가셔서 기도를 해드렸다고 한다. 이 집 망하면 우리교회가 힘들다고 그 식당을 위해서 기도를 했더니 그 식당이 잘 되었고 교회 짓는데 70%를 그 장로님이 내셨다고 한다. 이렇게 아직도 소박한 사람이 있으니 대한민국 교회가 유지되는 줄 믿는다. 그분은 뭐 대단한 공부를 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냥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사람이었다. 그렇게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 되었다. 믿음의 수준이고 믿음의 영향력이다. 우리 모두가 다 스팩이 아니라 영적인 기백과 담력을 가진 영향력이다.


II.둘째는 균형(밸런스)이다.

-균형 잡힌 시각은 균형 잡힌 결단은 오늘 11절에 나와 있다.

*여호수아 1:11,
11 진중에 두루 다니며 그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기를 양식을 준비하라 사흘 안에 너희가 이 요단을 건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사 차지하게 하시는 땅을 차지하기 위하여 들어갈 것임이니라 하라.
-요단을 건너는데 양식을 준비하라 한다. 좀 이해가 안 가는가? 요단을 건너려면 배를 준비해야 하지 않은가?

수원성에 가면 그 사진이 있는데 정조 대왕은 한강을 건널 때, 배다리를 놓아서 건너게 되었다. 배다리....

요단강을 건너야 하는데 왜 양식을 준비하라고 하시는가? 어차피 요단강은 우리 힘으로 못 건넌다. 이것은 하나님의 기적만이 하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홍해를 건너게 하시는 것처럼, 홍해는 가만히 서서 건너게 하시지만, 요단강은 믿음의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이 먼저 리더들이 요단강에 건너게 하신다. 그 뒤에 백성들이 따라가게 된다. 그렇게 하나님이 물을 마르게 해서 건너게 하시는데 백성들의 할 일이 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고 반석에서 생수가 나오게 하시지만 이 가나안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는 너희들이 직접 양식을 스스로 공급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스스로 취해서 먹고 살라고 한다. 요단강을 건너고 나서는 스스로 가나안 땅의 좋은 과실이 있고 가나안 땅에 좋은 곡식들이 다 있으니 스스로 그것을 취해서 양식을 준비해서 먹고 살라고 하신다. 그러니까 한 마리도 말하면 하나님이 해주시는 일은 하나님의 기적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스스로 먹고 사는 것으로 하는 절묘한 균형 감각이다. 그러니까 여호수아는 완전히 균형 감각을 가지고 리더를 했다. 저는 이 교회를 섬기면서 균형 감각이 중요한지를 깨닫게 한다. 중직자들도 다 그렇다. 우리 교회는 다 균형을 갖고 살아가야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3월 9일에 우리나라의 아주 중요한 대선이 있는데 우리가 훌륭한 균형감각을 가지고 기도해야 하고 준비해야 한다. 우리 교회는 균형을 갖고 유지해 나간다. 대체로 강남의 보수파 목사님이라고들 한다. 북한 돕는다하니 위험하다고 했다. 과감한 복음주의자, 독선적이라고 하기도 하고 우유부단 하다고 하지만 저는 늘 균형감각을 가지고 섬기려 한다. 지금 시국에 대해서 관심은 없지만 어떻게 균형을 맞출지를 분별하려고 한다. 모두 다 올바른 리더쉽으로 잘 맞추어 설교하려고 한다. 어떻게 균형을 맞추느냐가 중요하다.

2004년 되는 듯한 국가보안법 폐지는 아직도 그대로인 듯하다. 지금으로서는 이른 감이 있다고들 한다. 남북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국가보안법은 안 되는 것이다. 모두가 시시비비가 있다. 저는 국가와 나라와 정치적인 이야기는 되도록 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보수 진보, 영호남, 우리 교회는 1대부터 4대까지 다 있기에 한 명이라도 패배의식이 있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 영향력, 밸런스가 중요하니 그래서 사랑의 교회는 주보가 많은 생각 끝에 나온 주보이다. 우리교회가 균형을 맞추어 나가길 원한다. 올바른 리더쉽이 필요해서 균형감각으로 말씀하려고 한다. 목회자는 시험 들지 않아야 하고 한 명이라도 패배의식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이런 값을 치르는 삶과 균형감각을 이루어 주시길 기도한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통한 균형감각 주시길 원한다.

내일 오후 4시 30분에 엘더스 선교회가 있다. 우리교회 장로님들 가운데 선교사로 된 분들이 총회이며 우리 교회 리더들이시며 영향력이다. 밸런스를 잡기 위해서 두 가지가 필요하다.

*역대상 12:32,
32 잇사갈 자손 중에서 시세를 알고 이스라엘이 마땅히 행할 것을 아는 우두머리가 이백 명이니 그들은 그 모든 형제를 통솔하는 자이며.
-잇사갈 지파의 이 선지자, 예언자적 시대를 이해한다. 그 시대를 이해를 한다는 것이다. 메타버스 ㆍ증강현실, 구글 글래스, 사람들이 지금 스마트폰이 매게 체가 되어 VR 가상현실, 이러한 것들이 압도한다. 지금이후에는 자금들이 코인들이 커진다고들 한다. 그런 가운데서도 우리는 오프라인으로 모여야 한다. 성령을 사모하여 우리가 모이고 지금도 성령의 역사는 모여야 역사하신다. 모이기가 쉽지가 않지만 그래서 주님께서 이것을 아시고 말씀하신다.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아시고

*히브리서 10:25,
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모이기를 패하는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그렇지만 다음 세대에 이 가상의 시대에 사는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막을 것인가이다. 그런 사람들이 200명이 앞서가야 한다. 시대를 앞서서 200명의 시대를 앞서가는 균형 잡힌 자가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일하신다. 그 민족과 그 시대가 복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들은 안목이 있었다. 다윗왕국을 펼칠 때, 역사의 새 판짜기가 시작되어야 하는데, 중요한 것은
잇사갈 지파처럼 시대를 앞서서 리더들이 영향력을 가지고 균형을 잡아야 한다. 동시에

*역대상 12:33,
33 스불론 중에서 모든 무기를 가지고 전열을 갖추고 두 마음을 품지 아니하고 능히 진영에 나아가서 싸움을 잘하는 자가 오만 명이요.
-여기는 스불론 지파가 놀랍다. 두 지파가 놀랍다. 강력한 전투를 갖추었다. 무장하여 전열을 갖추고 같은 마음으로 오만 명이 싸운다. 같은 기백과 같은 스피릿을 가진 자들이다. 밸런스를 갖춘다. 우리식으로 팔로우쉽, 리더쉽, 영향력, 발란스를 갖춘 것이다. 마음을 갖추고 오만 명이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 나라의 오만 명이 되기를 소원한다. 성경은 정말 진지하다. 그 마음을 가지고 우리가 시대 앞에 이렇게 서기를 바란다. 값을 치루고 영향력 있는 밸런스... 우리가 그러한 영적 지도력을 갖춘 자로 거듭나기를 소원한다.

♣요약
-믿음의 4세대가 마음을 같이하여 나라를 위한 구국기도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국민을 섬기는 선한 지도자가 세워지기를 간절히 기도하면 하나님의 개입하셔서 이루어 가실 줄 믿는다. 우리 모든 영 가족들이 가정과 일터에서도 이 어두운 시대에 소망의 불을 밝히는 영적 등대가 되어야 한다. 우리가 진정한 값을 치르고, 균형 잡힌 리더로 거듭나서 우리 교회와 나라를 가꾸어가는 진정한 신실한 믿음의 자녀로 살아서 부흥을 위한 사명의 길에 빛이 되고 소금이 되어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서로 모이기를 힘쓰고 팀웍을 이루어 가서 진정한 리더쉽으로 영향력이 끼쳐가며, 자녀와 형제, 이웃들에게 주님을 전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가기를 소원한다..

ㅡ이는 가나안의 모든 대적들을 물리친 평화의 상태를 의미한다. 유대인들은 안식일 제도를 통해 육체적인 안식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성도는 매일의 삶에서 주님의 임재를 통해 안식을 누리며 또한 그리스도가 임하시는 그 날에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원한 영적 안식을 누리게 된다. 성도는 지도자를 하나님이 세우신 자로 믿고 순종해야 한다.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더구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더욱 그 권세가 하나님께 기인하기에 지도자에 대한 순종은 곧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