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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2년 1월 16일)
제목: ''기도하는 자는 낙심하지 않는다''
말씀: 누가복음18:1~8
찬양인도: 쉐키나, 영광찬양대
대표기도: 유이삭 부목사님(1부)
사회: 장광천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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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8:1~8,
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2 이르시되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는데.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
4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6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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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께서 은혜 주셔서 오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을 활짝 열고 주목하고 경청하고 반응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란다. 11번째 전하는 비유가 참 좋다. 너무 실제적이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해석이 어려운 것도 많이 있지만 이 비유는 너무 쉽게 해석이 된다.

 
*누가복음 18:1~3,
1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비유로 말씀하셨지만 우리가 너무 쌩쌩하게 이해가 된다.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
-너무 인간적이다. 원한을 풀어주십시오. 여러분 살다보면 이런 일도 생길 수 있다. 마음에 짐을 지고
원한을 풀어달라고 그래서 우리에게 와 닿고 또 좋은 것은 끝이 좋아야 한다. 응답을 받는 것이다. 끝이 좋아야 좋은 것이다. 그리고 이 비유를 깨달으면 내 기도가 응답이 되지 않을까하는 낙심하는 분들에게 기도를 포기하지 아니하고 집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그리고 기도의 선순환, 응답의 선순환 은혜의 선순환이 되게 한다. 은혜를 받게 되니까 낙심하지 아니하고 기도하고 응답을 받게 되고 응답을 받게 되니까 낙심하지 하지 아니하고 기도하고 응답받고 낙심하지 아니하고 기도하고 응답 받고 낙심하지 아니하고 은혜의 선순환이 일어난다.
 
I. 치열한 삶의 현장, 치열한 목회 현장.
 
-제가 이 내용이 실제적이고 중요한 이유가 뭐냐면, 오늘 우리의 삶 자체가 치열하고 목회 현장도 너무 치열하다. 그래서 치열한 삶의 현장, 치열한 목회 현장을 생각하면, 이 기도가 그렇게 실제적인 것이다. 저는 목회자로서 자주 예민한 고통을 느낄 때가 많다. 지난주에도 절망적이고도 긴박한 상황 가운데 SOS를 치신 분들이 계셨다. 코로나 때문에 중환자실에서 생사의 기로에 선 분도 있고, 교회 중직 자들 가운데 말기 암으로 투병하고 계신 분도 계시고, 어떤 분은 마지막 음식 섭취가 안 되어 뼈만 남으신 분도 계신다. 정말 안타깝다. 치열한 현장이다. 그리고 또 힘든 것이 뭐냐면 요즘 국론분열이다. 서울 사역 지난 부임 이후 19년 가운데 계속 상황이 좋지 않다. 좌우 진영이 날카롭게 대립해서 극렬한 적대 감정이 있고, 그것을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안타깝고 어떤 이슈가 있으면 그 이슈만 가지고 이야기 하면 되는데 이 이슈를 가지고 인격살인을 한다. 꼬인 사람들이 많다. 제가 이번 신년에 국민일보에 신년 대담이 있었다. 그것이 네이버에 올라갔다. 그래서 안 하고 싶었지만 댓글을 보니 96%는 좋다. 그러나 안 보아야 하는데 마지막에 잘 보니 마음을 후다닥하는 게 있었다. 인간적인 마음이 있으려고 했지만 그래도 댓글 가운데 한 두 개만 어려우니까 감사한 일이라고 여겼다. 사람들이 꼬였다. 여러분 우리가 남인가요? 우리는 한 민족이고 한 반도에 살고, 북한하고 휴전선이 막혀 있기 때문에 우리는 한 섬에 한 배를 탄 공동운명체인 줄 믿는다. 이 안에서 좀 시각을 넓히면 좋은데 다들 빠꿈이가 되어가지고 전체를 못 보니까 그렇다. 어릴 때 4형제 이다보니 한 번씩 티격태격 할 때가 있다. 향제가 레슬링하면 부친께서 다 모이라고 하신다. 그런 후에 성경을 다 펴라고 하시며 갈라디아서 5:15절을 합창!!~~하신다.
 
*갈라디아서 5:15,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알면서도 안 되는 부분이 많다. 그리고 이것은 치열한 삶의 현장이고 그리고 지난 인생 자체가 문제의 연속이다. 이번 주도 풀어내야 할 많은 문제들이 있다.
 
*욥기 14:1,
1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생애가 짧고 걱정이 가득하며.
-삶의 치열한 현장 속에서 욥기에 보면 생애가 짧고 그 다음에 걱정이 가득하다. 수천 년 전의 욥의 때나 지금이나 똑 같다. 가까이는 지난 2년간 코로나로 인해서 자영업자들이 폐업을 하고 간호사들은 사직서를 손에 들고 근무하기도 하고 심지어 사정이 있어서 백신을 맞지 못한 사람들이 친구들과 식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현실이 되었다. 이것을 보면서 한 가지 더 각인되는 것이 뭐냐면 모든 인생은 여리고로 가는 삶의 도상에 있다. 무슨 말이냐면, 예루살렘은 해발 753미터이다. 그 여리고는 해저 258미터이다. 사해 옆에 있기 때문에 천 미터 차이가 난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는 길이
27킬로 정도 되는데, 그 두 도시를 잇는 그 길이 급경사를 이루고 있어서 산악지대 험한 바위와 동굴이 많아서 강도들이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행인들을 약탈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이것을 여행자들이 모를 리도 없었고 그 길을 가고 싶지 않았다. 여리고는 상업도시이고 일하는 사람들이 그것을 알면서도 생업이기에 가야만 했다. 그래서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여리고로 내려가는 사람이 불안 속에 지나가다가 강도를 만나서 가진 것 다 빼앗기고 그것도 모자라 강도에게 맞아서 거의 피투성이가 되어가지고 죽을 지경이 되었다. 이게 어떻게 보면 인생 순례자의 모습이다. 여리고로 가는 길이 쉽지 않은데, 좀 벗어나고 싶지만 어쩔 수 없이 살아내야 하기에 여리고로 내려가야 한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미국 최고의 대통령 보좌관 고위층에 있다가 감옥에 가게 된 찰스 코슨은
“내가 살아온 인생 산산조각이 났고 계속해서 살아갈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내 미래가 영원히 수감된 것 같았다.''

- 물론 그 안에서 하나님을 부르짖어서 완전하게 인생 새 판짜기가 되었지만 일단 감옥에 갇힐 때는 내 미래가 영원히 수감 되는 것 같았다고 말하고 있다. 찰스 코슨처럼 내 인생이 산산이 조각났다. 어디에서도 삶의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고 탄식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살아내야 하니까 지금 여리고 도상에 있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 여리고로 내려가는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살길이 없겠는가? 강도 만난 사람의 유일한 길은 선한 사마리아인을 만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강도 만난 사람이 사는 길은 치유할 목자를 만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치열한 현장에서 살아가는 우리 성도님들을 보면서 성도님들을 향한 간절한 기도가 있다. 비록 우리 인생이 여리고로 걸어가는 도상에서 산산조각이 나고 희망이 없는 상황을 만났다 할지라도 우리 모두가 다 목자의 심정을 가진 자를 만나기를 기도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을 만나기를 바란다.
 
오늘 이 말씀을 읽으면서 동일시가 된다. 우리 모두가 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사람이라면 우리도 과부와 같은 것이다. 오늘 우리가 과부와 같이 동일시가 된다. 우리는 코로나로 인해서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한 자들이 많다. 그리고 여리고로 가면 강도 만난다는 것을 알면서도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다. 직장도 가야 하고 그래서 우리 인생은 광야 길이라 하지만 요즘 같으면 광야길+여리고로 가는 길이다. 광야길+과부가 당한 원통한 일의 삶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인생의 주위에 강도들이 너무 많다. SNS 가운데도 강도들이 너무 많다. 이런 배경을 가지고 오늘 본문을 깊이 살펴보겠다.
 

II. 말세에서 기도하는 믿음을 보겠는가?

 
치열한 삶의 현장 한 가운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말세에 기도하는 믿음을 보겠는가? 이다. 오늘 본문의 배경은 17장 제일 뒷부분이다. 우리가 이런 여리고로 가는 도상에서 그래도 한 결 같이 낙심하지 아니하고 기도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꾸준한 기도, 끝까지 기도, 쉬지 않고 기도할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깨닫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천국시민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종말의 대해서 확실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눈을 열어서 우리의 삶의 여정을 열어가는 그것이야말로 의미가 있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궁극적 종말, 하나님의 궁극적인 심판과 종말론적인 구원에 대해서 눈이 열려 있지 않으면 우리가 꾸준한 기도를 못한다. 낙심하지 아니하고 기도 못한다. 원통한 일을 당해서 메어 달릴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 나라의 궁극적인 심판의 눈이 열려있지 않으면 기도가 불가능하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17장에 보면
 
*누가복음 17:37,
37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어디오니이까 이르시되 주검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하시니라.
-한명을 데려감을 당하고 한 명은 버림을 당한다. 그런데 가능하냐고 하니, 갑자기 주님은 죽음이 있는 곳에는,,, 죽음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가 모이느니라. 죽은 시체와 독수리가 오는 것은 너무나 명확하다는 것이다. 지금도 티벳 같은 곳에 가면 시체를 확실히 쪼아 먹는다. 그렇게 하도록 시체를 놓아둔다. 포인트는 죽음과 시체가 있는 곳에 독수리가 분명히 모이는 것처럼 황량한 곳에는 확실하게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개인과 인생과 공동체의 종말은 반드시 온다는 것이며 그리고 오늘 과부와 같은 상태, 여리고 도상으로 내려가는 자들이 그 도상에서 한 결 같이 기도할 수 있는 이유는 종말론적인 신앙이 있어야 이것이 가능하다. 그리고 예수님의 재림을 믿고 종말론적인 구원을 믿는 성도라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일생을 통하여 꾸준한 기도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이 과부의 말쑴이 실제적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종말론적인 신앙, 주님이 다 아시고 역사의 포인트가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면 이러한 기도를 못한다. 우리 개인의 종말도 믿는다. 우리는 주님의 심판대에 서는 것은 확실하다. 그러기 때문에 기도를 하는 것이다. 주님이 확실히 재림하신다.
 
*누가복음 18:3,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
-너무 억울해서 궁여지책으로 재판장을 찾아갔다 불의한 재판장을 만남
 
*누가복음 18:4,
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과부는 원한이 있다. 과부는 혼자 살기에 벅찬 문제가 있고 그런 다음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자식도 없고 남편에게 물려받은 것도 없으니 아니면 과부로서 감당할 수 없는 인격적인 모독이나 차별이 있었을지 모른다. 궁여지책(窮餘之策)으로 재판장을 자주 찾아갔으나 원한을 풀어달라고 했다. 그러나 못된 재판장을 만난 것이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자가 강도 만난 것처럼 재판장에게 호소를 했는데 차가운 인간이었다. 사정을 해도 안 들어준 것이다. 안되니까 그러나 자주 갔다. 여리고 도상에서 강도만난 자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는가? 벌거벗겨지고 피투성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재판장이 이 과부가 번거롭게 하니
 
*누가복음 18:5,
5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하나는 번거롭게 또 하나는 괴롭게 한다는 것이 있다. 때리는 것 같고 멍들게 하는 것 같아서 원한을 들어준다. 그러니까 귀찮아서 재판장이 원한을 들어 준다
 
*누가복음 18:7,
7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이 말씀에 경청하고 주목하고 반응하기를 바란다. 하물며 원한을 풀어줄 것이라는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의 기도를 응답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있다.
 
*누가복음 18:8b
8b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인자가 올 때 종말론적인 믿음을 가지고 마지막 때에, 인자가 올 때 기도하는 자를 보신다고 말씀하지 않으시고 믿음을 보신다는 것이며 꾸준하게 기도함은 믿음의 표현이다.
그래서
 
▷기도와 믿음은 같이 간다.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는 믿음이다. 진정한 기도는 응답을 안 한다고 떼를 쓰는 것이 아니다. 기도가 믿음이고 불평대신에 감사하는 것이다. 노력하는 대신에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우리는 치열한 목회 현장에서 대부분 고통 당하고 여리고로 내려가고 절망하고 좌절할 수밖에 없다. 부정적인 환경과 불신앙의 환경 가운데서 주님 앞에 계속 기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환경 가운데서 믿음이 없이는 안 된다. 꾸준히 기도하는 것은 제대로 믿음의 또 다른 표현이다. 그래서
 
*유다서 1:20,
20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성령으로 하는 지속적으로 하는 기도는 반드시 믿음의 터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믿음은 내적 표현이고 기도는 내적표현의 자연스런 결과이다. 미음이 없는데 제대로 기도할 수 있겠는가? 과부는 원한을 풀어주시는 하나님을 믿은 것이다. 그래서 꾸준히 기도한 것이다. 과부처럼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면 능력이 된다.
 
*히브리서 12:15,
15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정말 조심해야 할 것은 그것이 쓴 뿌리가 되어 우리가 오염시킨다. 원통함을 풀지 못하면 불의한 재판장이 된다. 제대로 풀지 않으니 재판관이 되어서 이러한 난리가 난다.
 
▷원통함을 믿음이 기도로 풀면 능력이 되지만, 기도로 풀지 않으면 쓴 뿌리가 된다.
- 이 사회가 이 쓴 뿌리를 풀지 않으면 독이 되어서 남을 정죄하고 남을 재판한다. 우리는 말씀의 은혜를 받아서 꾸준한 기도를 통해 이 원통함을 풀어서 능력을 가져서 다른 사람을 성공시키는 주님의 종이 되길 바란다. 믿음이 기도, 꾸준한 기도, 낙심하지 않는 기도는 그 기도를 통해 자신도 치유받고 자신도 능력이 되지만 그것을 통해 남도 성공시키고 남을 좌절 시키지 않고 남을 성공시킨다. 깊은 진리이다. 종말론적인 안목을 가지고 모든 성도가 수많은 원통함이 있지만 우리는 믿음의 기도로 꾸준한 믿음의 기도로 눈 녹듯 녹여야 한다. 풀지 않는 상처가 사탄의 놀이터이다. 이 시대의 원통함을 가진 사람들은 꾸준한 기도로 남들을 성공시키고 남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결단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않는 결단을 해야 한다.
-기도해도 낙심될 때도 있지만 꾸준히 기도하면 응답하신다.
 
*로마서 12:12,
12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이것 외에는 없다. 내 인생의 여리고 가는 길은 없다. 첫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 교회를 향해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곤경에 빠진 골로새 교회를 향하여 계속 기도하고 감사하라고 한다.
 
*시편 62:8,
8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셀라).
-기도가 우리의 마음을 통하는 줄 믿는다.
 
첫째-기도가 거룩한 습관
-라이프 스타일, 자연스럽게 삶 자체가 기도. 어느 정도 기도하면 자연스럽다 순항하듯 삶의 여리고 도상에서 돛을 올려서 자연스런 기도가 되어야 한다. 삶 자체가 기도가 되면 꾸준한 기도가 된다.
-어려우니까 기도 안하고 기도 안하니까 응답 없고, 응답 없으니 기도 안하게 되고, 안하니까 또 어렵고, 어려우니까 기도 안하고 기도안하니까 응답 못 받고 안하니까 기도 못하고 뭐 이렇게 변증법적 악순환이다. 은혜의 선순환은 기도하니까 응답 받고, 응답 받으니까 다시 기도하고 기도하니까 고통 중에 다시 주님을 깨닫게 된다. 라이프 스타일로 하라. 기도도 어느 정도 고도에 올라가면 자연스럽다. 비행기도 고도에 올라가면 순항하듯이 배가 돛을 올려서 바람에 순항하면 배가 간다. 삶의 여리고 도상에서 우리가 꾸준한 기도를 통해 돛을 올려서 거룩한 습관적인 기도가 되고 자연스런 기도가 되어야 한다. 기도의 도움이 되는 두 가지가 있다.
 
▷슬로건 있는 단순 기도가 필요하다.
-세리는 아주 단순이 기도를 했다. 아주 단순하고도 슬로건이 있다. 밤낮 부르짖을 만한 슬로건 기도가 필요하다. 밤낮 기도하면 기도를 하나님은 들어주신다. 절박하고도 꾸준한 기도 예배를 살려주시길 거룩한 습관. 기적 같다. 내일 예배를 살려 주시옵소서. 표징을 주시옵소서. 등 등.절박하고도 슬로건이 있는 단순의 기도, 꾸준한 기도가 중요하다. 거룩한 습관이 되기 위해서 예배를 살려 달라고 기도하라.
 
찬송 마음속에 근심 있는 자는~ 단숨에 찬양이고 기도이다. 이것이 우리에게 능력이 된다. 찬양도 ...
 
▷일상의 삶 자체가 기도로 승화시킨다.
답답할 때 기적을 주시라고 단순의 기도를 삶 자체를 기도하라. 영적 에너지를 받기를 기도해야 한다. 짜증 부리고 그러면 안 된다. 모든 일상을 기도로 승화하라. 오르간을 오학년 때부터 내가 혼자서 터득하고 쳤다. 모두 다 찬송을 하니까 처음에는 힘들었는데 모두가 다 쉽다. 지금도 불을 다 꺼도 다 친다. 코드가 일상화가 되니까 치게 되었다. 우리 아버지가 대단하시다. 근로기준법을 어기셨다. ㅋㅋ
악보가 없어도 쳤다. 기도하는 시각이 넓어야 한다. 영적 자유함이다. 은행직원이 창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짜증을 부리지 말고 ,,,, 내 몸에서 영적 에너지가 나게 해 달라 기도하라.
 
 
▷주님의 계획과 목적, 원대한 그림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서.
-주님과 더 깊은 교제가 있어야 한다. 부부도 대화가 필요하다. 남편을 잘 모시고 서로 감정을 표현하고 영적 교제를 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꾸준한 기도로 일상화해야 한다. 조용히 과부처럼 기도하라. 과부가 드리는 아버지께 드리는 울부짖는 자녀의 기도이다. 그렇게 될 때, 밤낮 부르짖는 기도가 있어야 한다. 주님과 더 깊은 교제로 나아가서 믿음의 사람, 기적을 체험하기를 바란다.
 
♣요약
우리가 여리고로 가는 험한 인생길에서 낙심하지 않고 꾸준히 기도하면 하나님은 응답하신다. 기도하면 낙심하지 않게 하심을 믿고 과부처럼 밤낮 기도를 하고 하나님은 원대한 계획과 목적을 이루게 하시는 응답을 믿어야 한다. 그 기도로 이웃을 살리고 여리고 도상의 고난과 상처를 주님의 능력으로 치유해 주심을 깨달아서 남을 성공시키고 사랑으로 실천하는 기도의 힘과 능력을 경험하기를 바란다.

-이러한 비유를 말씀하신 것은 성도로 하여금 낙망치 말고 기도하도록 권하기 위함이다. 흔히 우리들은 기도 응답이 없으면 낙심하여 기도를 포기하고 만다. 그러나 응답이 쉬 나타나지 않아도 참고 기다리면 반드시 응답을 받게 된다. 바른 기도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항상 기도하고, 쉬지 말고 간절하게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이기적인 욕심을 버리고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깨어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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