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주후 2022년 3월 27일) 제목: "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못 합니다" 말씀: 요한복음 15:4~5 대표기도: 하상범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 영광찬양대 사회: 장광천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
*요한복음 15:4~5, 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
▶어제 마이크 펜스 부통령 간증에 은혜를 받았으리라 본다. 사람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주님 드러나 감사하다. 하나님 영광 받으신 줄 믿는다. 특이한 것은 어제 집회 마치고 나갔는데 엘베 앞에서 어떤 스님이 한 분이 와서 무릎을 꿇고 “예수님 믿겠습니다.” 라고 하면서 토비새에 예수님 믿으러 오셨다고 했다. 전날 금요일 날 극동 방송에 참여한 젊은이들이 마치고 난 다음에 예수님을 믿겠다고 젊은이들이 40명 이상 결신을 했다. 그래서 부통령께서 결신한 분들인 그들을 위해 기도를 했는데 가만히 들어보니 내용이 이런 기도였다. 첫째- “예수님, 믿고 새 생명 얻어 감사합니다.” 둘째- 결신한 분들에게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게 해주십시오!” 셋째-“예수님 안에 있는 풍성한 새 생명을 주십시오!”-Abundant new life! 끝난 다음에 제가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은 넷째-“예수님의 제자로 잘 무장되게 하옵소서!” -그래서 이 분이 부통령인가 목사님인가 하고 생각하게 했다. 오늘 세례 받는 사람들은 오늘 말씀과 접목되어 오늘부터 예수님의 제자로 무장되길 바란다. 예수님의 제자로 무장되기 위해서는 귀한 말씀 하나를 드리겠다. I.예수님을 떠나서 우리가 무얼 할 수 있겠는가?
ㅡ예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How about me. 신앙의 본질은 나의 초점이 아닌 내가 아닌 주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내 중심을 깨고 주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이다. 늘 말씀 드리지만 신앙은 은혜를 받는 것인데, 은혜는 사건이나 관계나 사람에게서 은혜를 못 받고 주님께 우리의 시선이 흐려지지 않아야 은혜를 받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세례 받는 우리는 사건이나 환경을 가지고 상처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향한 우리의 시선이 평생 흐려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주권이양이며 주님께 향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떠나서 무얼 우리가 할 수 있는가?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요한복음 15:5,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여기서 떠난다는 용어인 헬라어는 ‘툭 끊어졌음’이다. 영적으로 툭 끊어진 존재가 되어서 영적으로 열매 맺지 못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요즘 우리들은 와이파이가 끊어지면 그렇다. 모든 것이 그렇다. 이것이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인데 이 말은 해석하면 세상 적으로 대단한 일을 하지 못한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 없이도 대제국도 건설하고, 예수님 없이도 만리장성도 만들고, 예수님 없이도 세상적 으로 위대한 것도 하긴 하지만, 예수님 없어도 리더 할 사람은 많다. 그런데 예수님 없어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은 진짜 영적으로 소중한 일을 그리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에 거부가 된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을 떠나면 죽음이 없는 것이다. 세상 적으로 대단한 일을 못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아랑드롱도 죽었다. 신실한 그리스도였다면 안락사를 선택하는 대신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께 예배하고 온 가족에게 유언하고 멋지게 갔을 것이다. 인생의 열차를 운행하는 사람이라고 할 때, 그 열차가 멋있다 하더라도 열차 궤도위에 있어야 의미가 있지, 철로 밖에 있다면 그 열차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탈되어 있으면 아무것도 아닌 고철 덩어리에 불과하다. 멋진 인생의 열차라도 주님과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여러분의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철로의 그 궤도에 올려놓아야 한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 내 인생의 철마가 달리고 싶다가 아니고 내 인생의 기차를 주님의 궤도에 올려놓고 달려가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절대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일은 못 한다.-정말 가치 있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정말 성공적인 일도 할 수 없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세상적인 일이 되는 것이다. -열차도 철로위에 있어야 의미가 있듯이 궤도를 벗어난 인생은 고철덩어리에 불과하다. II. 누가 이 말씀을 하셨는가?
이 땅에 섭리도 오셨다. 그렇게 겸손하고 온유하고 겸손하신 분이 이렇게 강한 말씀을 하실 수 있는가? 어떻게 보면 너무 강한 것 같지만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말씀, 영이 안통하고 성령으로 변화되지 않는 사람은 이 세상적인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아마 그런 사람들은 이 말씀이 강할지 모르지만 우리들은 주님과 관계가 분명한 사람들은 이 말씀이 하늘의 능력과 은혜가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이 거룩한 교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은 거룩한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과 영적으로 눈 떠 있는 사람은 이 세상 사람들은 강하다고 해도 과대망상으로 보이고 안 믿어질지 모르지만 예수를 믿으면 하늘의 선포를 들릴 것이다. 신령한 능력과 위상이 가득차 있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14:22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댜대오라는 자다. 이 말씀의 진위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말씀의 깊은 문을 열고 주님의 뜻을 깨달으라는 것이다. 주님이 말씀에 깊이 붙잡혀야 한다. 진실 되게 받아서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펜스의 간증에서 본인은 말씀에 대한 통찰력만 가지고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순종하기 위해서 말씀을 읽는다고 했다. 모두 이 말씀으로 깊이를 깨달아야 한다. 속뜻은 삶의 에너지원이 무엇이냐면 힘을 얻는 근원이 무엇인가이다. 중요한 사역을 위해서 수많은 어려움도 있다. 어디서 힘을 얻는가이다. 바로 우리의 삶의 영양과 공급은 바로 주님으로부터 비롯되었는 것이다. 우리의 삶의 영적 에너지가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건해졌다는 것이다. *고전 5:14, 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III. 예수님이 없으면 우리가 어떻게 살겠는가? -많은 사람들이 재물로 힘을 얻는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신념으로 힘을 얻는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열망으로 힘을 얻는다. 그러나 여러분과 저는 삶의 능력과 원천이 어디 있는가? 예수님 사랑 받고 예수님 사랑을 통해 힘을 얻는다. 그것이 주님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씀을 정리하면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은 무엇이라고 했는가? 가치 있는 삶은 주님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이다. 내 삶이 가장 큰 에너지원이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다. 예수님 없이는 여러분은 어떻게 장례를 하겠으며 어떻게 상상도 할 수 없다. 예수님 없는 장례식은 파멸과 죽음과 희망, 약속, 미래도 없고 눈물과 어둠과 절망만이 있을 것이다. 예수님 없는 결혼식, 장례식, 수많은 것들을 어찌 해결 할 것인가? 예수님 없는 세례식도 상상도 할 수 없다. 이어령 박사님은 이 시대의 지식인이셨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하셨으니 행복한 죽음이다. 민족의 흥망성쇠도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2차 세계대전 마무리도 독일침공 때에 연합군과 싸울 때에 텅키루 전투에서 히틀러의 부대가 압도했지만 영국군이랑 연합군이 왔을 때에 안개가 끼어서 영국군, 연합군 미군과 합세해서 승리하게 된 것이다. 무사히 탈출하게 되었다. 주님 앞에 죽을똥 기도하면 다 주님께서 개입해서 가능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우리 민족의 산업화도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가능했다. 주님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신다. 그것을 믿어야 한다. *빌립보서 4:13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이것이 한국 성도들에게 힘을 주신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까지 온 것이다. ♣요약 내 인생을 예수 그리스도의 철로 위에 올려놓고 영적으로 성공하는 풍성한 은혜가 되길 간구하며 포도나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의 원천이며 사랑과 힘의 원천임을 깨달아서 매 순간 우리는 능력 주심을 믿고 순종해야 한다.
-우리가 열매를 맺기 위해 그리스도 안에 거해야 할 필요성은 '너희가 내 안에 거하지 않으면 과실을 맺을 수 없으나 내 안에 거하면 많은 열매를 맺으리니 이는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가장 훌륭한 증거는 열매 맺는 생활이다. 이것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필요한 일이 아닐 수 없으며,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외에 다른 방법으로는 열매를 맺을 수가 없다.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것은 우리가 많은 선을 행하기 위해 필요하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그 안에 있는 믿음의 역사를 따라 항상 살아가는 자는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삶인 것이다. 그 삶은 선을 행하는 데에도 필요하다. 그것은 모든 선의 근원이며 원천이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즉 위대한 일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우리가 아무 것도 바르게 행할 수 없다. 즉 어떠한 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나 우리에게 유익이 될 만한 열매가 될 수 없다. 우리는 포도나무가 울타리로 지탱되고 나무 가지가 뿌리에서 수액을 공급받듯이 그리스도를 의지해야 한다.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3월 23일) 제목: "환경을 넘어오신 은혜의 하나님" 말씀: 열왕기상 17:8-16 찬양인도: 쉐키나 찬양대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 설교자: 양은규 부목사님 ------------------------------------------- *열왕기상 17:8-16, 8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10 그가 일어나 사르밧으로 가서 성문에 이를 때에 한 과부가 그 곳에서 나뭇가지를 줍는지라 이에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그릇에 물을 조금 가져다가 내가 마시게 하라. 11 그가 가지러 갈 때에 엘리야가 그를 불러 이르되 청하건대 네 손의 떡 한 조각을 내게로 가져오라. 12 그가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 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 13 엘리야가 그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말고 가서 네 말대로 하려니와 먼저 그것으로 나를 위하여 작은 떡 한 개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오고 그 후에 너와 네 아들을 위하여 만들라. 14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를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15 그가 가서 엘리야의 말대로 하였더니 그와 엘리야와 그의 식구가 여러 날 먹었으나. 16 여호와께서 엘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 같이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니라. ----------------------------------------------- ▶우리를 예배의 자리 기도의 자리로 초대하시고 하나님의 그 부유하심을 우리에게 보이시길 원하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오늘 예배에 나온 권속들을 축복하시길 원한다. 놀라운 응답이 있는 수요찬양기도회가 되며 온라인과 주님의 자녀들에게 주의 능력의 말씀으로 충만하고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원한다. 오늘 치유와 응답이 있는 수요찬양기도회에 참여한 모든 성도님들을 주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한다. 오늘 주님이 주시는 풍성한 은혜를 함께 누리고 돌아가길 바란다. 오늘 주신 말씀을 보자. -사람들은 풍요를 좋아한다. 그래서 사람이든 조직이든 제도든 나를 부유하게 할 거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사람들이 추앙하고 추구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돈이 된다는 정보가 있으면 그 정보가 마치 유행처럼 이 사회에 퍼지는 것을 볼 수 있다. 풍요는 본능이다. 그리고 풍요는 우리 안에 있는 욕망이다. 풍요를 추구하는 것이 죄는 아리라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지으시고 생육하고 번식하고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풍성히 얻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이나 일반 사람들이 풍요를 바라거나 풍요를 좋아하는 것이 무작정 죄는 아니다. 문제는 이 풍요를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방법이 아닌 오염된 방식으로 추구하고 그 욕망이 도를 넘으면 죄악이 되는 것이다. 오늘 말씀은 북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풍요로운 시대의 이야기이다. 바로 아합 왕이다. 일반 역사가들은 당시 국제사회에 유일하게 알려진 이스라엘 왕조가 있다면 오므리 왕조, 아합 왕이라고 이야기 한다. 상당히 잘 살았다. 그리고 군대도 아주 강력했다. 어느 정도 강했냐면 남유다를 마치 속국처럼 지배했다. 자신의 딸 아달이라를 시집보내서 결혼으로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이웃나라 시돈 왕 겟발의 딸 이세벨을 자신의 아내로 맞아서 국제적 동맹도 맺었다. 뿐만 아니라 수도를 옮긴다. 수도를 사마리아로 옮기면서 수도를 건축한다. 여러분 수도를 세운다는 것은 간단하지 않다. 국고를 완전히 바닥낼 만한 대단위의 토목 공사이고 건축이고 엄청난 사업이다. 그런데 이것을 아합이 이것을 다 일구어낸 사람이다. 쉽게 말해서 부국강병의 국제적 영향에까지 갖춘 자였다.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듯이 하나님은 이 아합왕에 대해서 좋은 평가를 내리지 않는다. 오늘 열왕기상 16장에 보면 마지막 30부터 몇 절을 읽어보면 하나님은 이렇게 평가하신다. 그는 모든 사람보다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여 이스라엘 하나님의 진노를 사겠다. 라고 말한다. 그는 풍요롭게 살기 위해서 그가 선택한 것은 바알이었다. 하나님을 버리고, 요한을 버리고 바알을 가지고 왔다. 오일 머니를 끌어오듯이 국가의 운영에 바알 시스템, 바알 종교를 가지고 온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아내를 바알의 제사장인 이세벨을 아내로 맞아들인다. 아예 바알 시스템을 수입한 것이다. 그리고 안으로는 나보스의 포도원을 빼앗는 것처럼 백성들의 것을 탐하고 압제하고 빼앗았다. 그래서 바알 정책을 시행하기 위해서 방해가 되어지는 여호와의 선지자들이나 하나님의 사람들을 핍박하고 죽이는 일을 도모하기도 했다. 왜곡된 풍요이다. 이 왜곡된 풍요의 시대에 나의 하나님은 여호와시다.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이시다. 라는 이름을 가진 선지자가 혜성같이 등장한다. 그 사람이 누구인가? 엘리야이다. 따라해 보라. “여호와의 말씀이 풍요입니다.” 이것을 뒤집어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없으면 풍요가 없다는 말이다. 엘리야가 이 아합에게 나아가서 이렇게 말한다. “나를 섬기는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년 동안 비를 그리고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선언하고 도망가 숨어버린다. 그래서 그가 숨은 곳이 그릿 시냇가이다. 학자들은 정확하게 그릿 시냇가를 규정하지 않는다. 거기가 어디쯤일까 추정하면서 와디 야비스라는 곳으로 추정한다. 제가 몇 년 전에 와디 야비스라는 곳에 가게 되었는데 첫인상은 “에게???”였다. 아 그냥 시냇가라고 말할 수 없었다. 여러분 와디라는 것은 평소에는 시내로 보이지 않고 조그만 계곡처럼 보인다. 가보니까 옆에 관목이 있고 풀이 무성하게 있었는데 물이 바짝 말라서 아무것도 없는 그런데 비가 오면 고기가 냇가처럼 흐르는 곳이 바로 와디이다. 그가 그곳에 숨었다. 아마 제가 갔을 때 건기였기 때문에 아주 그냥 습기하나 없는 그런 곳이었다. 만약에 당시에 그곳에 숨었다면 그곳에서 그리 오래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말라가는 시냇물로 겨우 목을 축이고 까마귀가 아침저녁으로 갖다 주는 조그만 빵조각이나 고기 조각 같은 것을 겨우 받아먹는 수준이었다. 이제 시간이 지나서 그곳이 말라서 더 이상 숨어 있을 수 없는 환경을 맞이했다. 오늘 9절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열왕기상 17:9, 9 너는 일어나 시돈에 속한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 머물라 내가 그 곳 과부에게 명령하여 네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과부, 여러분 이 과부에게 말 속에 이 과부라는 것은 사회적으로 약자이다. 그 시대에 가난한 사람들을 칭할 때 고아와 과부라고 했다. 그러니까 굉장한 사회적 약자이다. 유력한 여인이 아닌 사회적 약자이다. 여러분 이 말을 들었을 때 엘리야의 마음이 기뻤겠는가? 신났을까요? 어쨌든 까마귀를 통해서 자신의 먹을 것을 주셨기 때문에 140킬로 되는 거리를 단숨에 순종하여서 달려간다. 그리고 실재로 그 성문에 이를 때에 바로 한 과부가 나뭇가지를 줍는 것을 보고 이 과부를 만난다. 여러분, 엘리야가 도착하자 만났다. ‘성’이라는 것은 작은 곳을 성이라고 하지 않는다. 우리가 시골을 가보면 사람들이 많이 살고 마을이 있어도 거기는 성이 아니다. ‘성’ 그러면 수원성도 있고, 우리가 생각하는 북한산성이 있고, 하듯, 도시이고 많은 곳들이 구비된 곳을 성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엘리야가 그 먼 길을 달려가자마자 문 앞에서 바로 만나는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도착하자 만난 것이다. 뭘 의미하는가? 급하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바로 이 여인의 상황이 그랬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여인에게 명하여서 내게 음식을 주게 하였느니라. 말했지만 실재로 이런 것은 그 여인이 연락을 받은 적이 없는 여인이었다. 그리고 겨우 뗄 감 몇 개를 주워서 마지막 양식을 먹으려고 하는 여인이다. 엘리야는 먼 길을 달려왔고 그래서 너무 배가 고팠을 것이다. 그래서 여인에게 물 한 모금을 요청한다. 그리고 떡 한 조각을 요청한다. 이 떡 한 조각의 단어는 원래의 의미로 해석하면 부스러기 정도의 작은 조각이다. 엘리야가 너무 시장했던 것이다. 그 상황에서 요청하는데 이 여인의 대답이 가관이다. 뭐라고 대답하냐면, 당신의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맹세하는데 나는 떡이 없다. 통에 한 웅 쿰의 가루와 기름조금 있는데, 내가 나뭇가지 두 개들 주워서 이것을 가지고 떡을 만들어서 나와 내 아들이 먹고 죽으리라. 라고 한다. 오늘 이 말씀 안에 여인의 형편도 기록되어 있지만 이 여인이 정중하게 이 엘리야의 요구를 거절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가 자신의 양식을 내놓겠는가? 여호와의 사심을 맹세하노니, 우리는 죽을 것이다. 정말 충격적이지 않는가? 이에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명사로 바꾸면 ‘여호와의 생명,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존재를 두고 내가 맹세하노니 우리는 죽는다.’ 여러분, 이 여인의 생각나 마음이 얼마나 절망적인가? 하나님의 사심으로 맹세하노니 죽는다. 이것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고 내가 도달할 수 있는 마지막 결론이다. 여러분 이 여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능력이 없는 것이다. 이 여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은 한 줌의 한 웅 쿰의 가루보다 능력이 없고 몇 방울의 기름보다도 능력이 없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이렇게까지 상황이 이 여인에게 도달한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살다보면 IMF와 같은 그리고 코로나 상황과 같은 어려운 환경을 만나기도 한다. 그리고 경제적 공황이 올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의 건강이 바닥이 드러내고 우리의 경제적인 수준들이 정말 바닥을 드러내는 일들이 있다. 우리의 일터가 마치 몇 방을 남지 않은 기름 병 같을 수도 있다. 그럴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살아계심의 능력이 우리를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 두려움이 찾아온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으로 우리가 맹세하지 않지만, 우리의 결과에 대해서 이 여인과 같은 우리는 부정적인 말을 쏟아낼 수 있다. “목사님 방법이 없습니다. 길이 없습니다. 소망이 없습니다. 답이 없습니다. 끝내야 될 것 같습니다. 포기하고 싶습니다.” 이런 언어가 지배하는 세상은 여호와의 말씀이 없는 세상의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부정적인 언어, 부정적인 생각이 우리를 많이 찾아온다. 그렇다. 그렇지만 우리가 죽었나? 부정적인 상황이, 어려운 고난이, 우리에게 찾아와도 우리가 죽었는가? 아니다. 오늘 분명한 상황은 하나님의 심판(審判)의 상황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신다. 오늘 우리가 존재한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소중히 여기신다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하나님이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생명을 의지하는 것보다 한 웅 쿰의 가루와 몇 방울의 기름을 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사라진 시대의 표본이다. 이럴 때에 성도들이 똑 같은 고난을 겪게 되는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사라진 시대에 그 기근(饑饉)과 기갈(飢渴)과 그 목마름을 믿음으로 사는 성도들도 동일한 어려움을 맞이하고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적용... ▷말씀이 있으면 살아납니다. -환난의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여러분, 여호와의 말씀이 없어 기갈로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를 살아갈 때에 우리가 체념하거나 포기하거나 낙심하지 마시기 바란다. 하나님의 사람에게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생명과 영광을 보여주시는 하나님이시기에 그렇다. 우리가 현실적으로 영적 전쟁을 많이 겪는다. 그러면 우리가 영적 전쟁이라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생각의 전쟁이다.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들려졌고 또 이것에 대한 우리의 은근한 믿음이 있다. 그런데 하나은 우리의 좋지 못한 문제, 그리고 어려운 환경, 우리가 만난 이 고난이 우리에게 찾아온다. 이 둘 사이에 간극이 있다는 것이다. 이 사이에 개입이 있다. 이 개입을 우리가 어떻게 선택하며 살아야 하는가? 그것이 영적 전쟁이다. 우리가 오늘 엘리야를 잠깐 생각해보자. 엘리야는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그 약속, 그 예언을 선포했다. 내가 말하기 전에 더 이상 우로가 없고 이슬도 없을 것이라고 비도 없을 것이라고 말한 자신이 선포한 그 말에 동일하게 본인도 고통을 겪었다. 더 이상 어떠한 양식도 얻지 못하는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주어졌다. 그 말씀이 사르밧으로 가라, 그것에서 과부를 만날 것이네 내가 그 여인에게 너에게 그 먹을 것을 주라고 명령했다. 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 그 말씀을 듣고 그 120-140킬로 되는 거리를 달려갔는데 현실은 어떠한가? 그 명령을 들은 적도 없는 여인이 공궤할 것은 고사하고 자기 먹고 살 것도 없는 여인이다. 마지막 한 줌의 것을 가지고 아들과 함께 먹고 죽음을 결정한 여인, 하나님이 약속과 그리고 이 현실 사이에 이 큰 갭이 존재했다는 것이다. 이 갭이 존재할 때에 엘리야는 어떻게 간격을 좁혔는가? 성도님들, 우리의 삶도 그렇지 않은가? 우리의 삶도 하나님의 약속과 하나님의 신뢰함과 하나님의 의뢰함이 있는가 하면 이 의뢰함과 약속과 전혀 상관없이 우리의 기도와 전혀 상관없이 우리에게 도둑처럼 찾아오고 강도처럼 찾아오는 삶의 어려움들이 있지 않은가? 이 두 간격 사이에 우리는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가? 엘리야는 과부에게 명령한 하나님의 약속과 그리고 여호와의 살아계심을 맹세하노니 우리가 죽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이 여인의 현실, 이 사이에서 이 갭을 좁혀냈다. 여러분, 어떻게 좁혀냈는가? 저는 엘리야가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그 약속의 말씀을 다시 확인했다. 그리고 이 여인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준다. “두려워하지 말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말씀이 나 여호와가 비가 지면에 내리는 날까지 그 통의 가루가 떨어지지 아니하고 그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선포했다. 여러분, 엘리야는 깨달았다. 자기가 120킬로도 더 넘는 거리를 한 조각을 얻어먹고자 달려온 것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 마지막 한 끼도 안 되는 것을 이 여인에게 요청해야 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사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너의 그 통에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그 기름병에 기름이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통해서 이 여인을 살리려고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구나.’ 그 먼 길을 오게 하셨구나! 라고 깨닫게 된 것이다. 여러분, 본문 속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본문 속에 하나님을 잠시 묵상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시냇물도 마르고 까마귀 음식도 떨어진 환경, 양식이 없어 죽음을 당연한 길로 여기는 이 여인의 최악의 환경, 하나님이 이 먼 거리에 있는 최악의 환경을 만나게 하셨다. 이 최악이 만나면 답이 있는가? 답이 없다. 그런데 이 두 사람이 직면한 이 환경을 하나님은 환경이 문제가 아니다. 라고 말씀하신다. 문제를 통해서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을 경험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그 속에 있는 것이다. 엘리야는 이것을 깨달았다. 엘리야는 이것을 깨닫고 여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다. 나도 최악의 환경에 있고 너도 최악의 환경에 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이 약속과 이 현실사이에 우리가 담아 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다시 비가 내리기까지 그 통에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그 기름병에 기름이 마르지 않을 것이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준 것이다. 오늘 이 성경은 급속하게 이 여인이 순종했고 그리고 실재로 엘리야의 말씀대로 그렇게 되었다라고 매듭을 짓고 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매일 같이 하나님의 약속과 우리의 현실의 도전 앞에 마주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세상의 바알 같은 물결이 흘러와서 마치 우리의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려움 같이 느껴지는 현실을 맞이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어떤 환경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듣고, 또 확인하면서 그 말씀대로 순종하고 살아가고 결정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다. 환경은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 반대로 다르게 다가올 수 있다. 여러분 믿음은 환경이 아니다. 믿음은 조건이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환경 속에서 말씀하시는 것이다. 믿음은 어찌할 수 있는 한 웅 큼의 가루를 의지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이 주시는 작은 가루라도 내 일생에 삶을 능히 살아도 남는다. 라는 것, 그 사실을 믿고 의지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하나님은 이 여인을 살리시고자 먼 환경을 뛰어 넘어 찾아오셨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의 삶 가운데 우리를 살리고 우리를 부르시기 위해서 먼 환경을 뛰어 넘어 달려오셨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면서 몇 가지 정리하자. I. 하나님은 환경과 문제를 넘어 말씀으로 찾아오신다.
-하나님은 환경과 문제를 넘어서 말씀 그 자체로 우리에게 찾아오신다. 담임 목사님께서 온 전론을 이야기 하실 때, 그 온전 론 가운데 ‘생각의 온전함’, 영역이 있다. 생각의 온전함은 환경에 따라서 우리의 생각이 움직이는 것을 생각의 움직임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생각의 온전함’이란, 환경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우리의 생각을 움직이는 것을 ‘생각의 온전함’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생각을, 영의 생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환경을 따라 사는 생각은 육신의 생각이며 어려운 환경, 고통의 순간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생각, 그것을 선택하고 순종하는 것이 생강의 온전함이다. 하나님은 우리로 온전케 하고 우리를 하나님을 맛보고 경험하기 위해서 성령님을 보내주신다.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이 땅에 그리스도로 우리 가운데 오신 것이다. ▷따라해 보자. 내가 환경보다 소중하다. 내가 문제보다 소중하다. -여러분, 우리가 코로나나 여러 가지 일이나 경제적, 건강, 문제들이 생길 수 있다. 우리가 그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은 우리가 그 문제보다 소중하다고 말씀하신다. 그 어려운 그 환경보다 네가 훨씬 소중하다고 말씀하신다. 그렇게 주님은 말씀하시고 우리를 찾아오신다. II.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셔서 말씀하신다.
-때로는 우리의 환경이 녹녹하지 않고 또 우리의 환경이 어려움이 되는 것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그 때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해서 과부에게 말씀하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람을 보내셔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사람은 누구인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하고 그 말씀 속에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맛보아 확신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맛보았다면 우리는 이 시대의 환경 가운데에 반응하고 환경 가운데 낙심하고 환경 가운데 절망적인 언어를 쓰는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는 찾아가서 오늘의 엘리야로 우리는 일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시대의 엘리야처럼 하나님을 맛보고 알게 하는 사람으로 쓰게 하신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받기를 축복한다. III. 믿음의 사람은 믿음으로 말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믿음으로 말한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셔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시길 원하신다. 이번주 토비새에 특별 글로벌 새벽 부흥회 날로 선포했다. 이 날에 미국 48대 부통령인 마이크 펜스가 특별 간증을 한다. 우연한 것 같지만 결코 우연이가 아니다. 그는 캐톨릭 신자였다. 그런데 그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들렸고 그는 믿음을 선물로 받았다. 그가 미국 정치에서 신앙의 양심을 가지고 복음주의 가치를 현실 정치에 적용하고 실현하기 위해서 평생을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이다. 그분이 이번 주 토요새벽부흥회로 간증을 하게 되었다. 제 마음 속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일평생 믿음으로 살았던 사람, 현실적으로 노력했던 사람의 그 믿음의 고백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그 자리에 그분을 보내셨다면 아마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을 말씀하지 않을까를 생각한다. 믿음의 사람은 믿음으로 말한다. 이 자리에 나오신 성도 여러분, 영상을 듣고 있는 모든 성도여러분, 이번 토비새를 사모하여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말씀하시는 그 음성이 무엇인지를 들어보고 함께 도전을 할 수 있는 복된 시간이 되시길 바란다. ♣요약 -세상이 풍요와 풍조가 아닌 말씀으로 생명과 풍성함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하여 이 어려운 시대를 넘어 믿음의 사람들이 깨어지지 않고 살리시고 풍성케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풍성히 누리고, 우리가 기다리고 사모하여서 하나님이 자리에 오셔서 우리를 말씀으로 살려주시길 간구해야 한다. 사르밧 과부처럼 믿고 순종하여서 생명을 맛보는 삶이 되고 엘리야처럼 곤고함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심정을 깨닫고 가족과 이웃과 형제의 깨어진 사람들을 말씀으로 살려야 한다. 오늘의 엘리야로 살아서 환경을 넘어오신 은혜의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바라며 이번 특새는 소중한 나를 발견하는 시간이 되길 바라며 미국 부통령이 믿음으로 나라를 이끈 경험을 보고 우리도 믿음으로 하나님의 심정을 깨닫는 시간이 되어야 한다.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여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이방인의 믿음 있는 자세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교훈하시기 위함이다. 이와 같이 믿는 사람들도 때로는 세상 사람들에게서 배울 점이 있다. 예수님께서는 이방 지역에 선교하시면서 그들의 믿음을 보고 제자들의 믿음이 부족함을 충고하셨다. 따라서 우리들의 믿음의 행위란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상황 속에서도 그것이 이루어질 것을 믿으며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하는 행위와 그러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한다. 믿음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힘이다.
♧주일예배(주후 2022년 3월 20일) 제목: "왜 죽은 정통? 왜 예수 생명?" 말씀: 요한복음 10:10, 에베소서 3:8 대표기도: 임병영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 영광찬양대 설교자: 권성수 목사님(대구 동신교회) ----------------------------- *요한복음 10:10,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에베소서 3:8,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현장예배와 영상 예배에 동참하신 모든 분들께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이 풍성한 은혜를 체험하시길 주님의 은혜를 축원한다. 제가 예전에 총신대 교수로 있을 때에 사랑의 교회에서 일 년 정도 사역을 격주로 했다. 그렇게 사랑의 교회에서 지내는데 어떤 기자가 인터뷰를 하자고 했다. 그 내용 중에는 “교수님, 성경 구절 중에 교수님이 좋아하시는 성경구절이 있으면 소개를 해주세요.”라고 했다. 그래서 제가 질문을 받고 나서 한 구절인데 오늘 이 자리에서 함께 읽은 요한복음 10:10과 에베소서 3:8절이다. *요한복음 10:10,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에베소서 3:8, 8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이 두 구절을 제가 인터뷰에서 언급했다. 제가 목사가 되지 않겠다고 계속 도망을 치고 도망을 치고 도망을 쳤는데 아버님의 서원기도로 은혜를 받고 목사가 되었다. 너무 감격했다. 하나님이 이 쓸데 없는 자를 왜 구속하여 주시는지 알 수 없었다. 이 찬송을 애창곡으로 할 만큼 감격했다. 아버님이 목회하신 것을 힘들어 하심을 보고 저는 절대로 목사가 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은혜와 생명의 은혜로 인도하셨을 때 제 자신이 없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제가 이 두 구절을 좋아하는 성경구절이다. 그렇게 언급하고 나서도 제 마음 속에 약간의 갈등과 고민이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엄연히 영으로 생명을 얻는데 풍성히 얻게 하도록 오셨다고 약속하시는 것이다. ▷고백+갈등 ➔ 회복부흥 풍성한 은혜를 체험을 해야 하는데 내가 그 정도의 체험을 하고 있는지를 고민했다. 이런 고민스런 고백이 제 속에 있었다. 여러분은 어떠한가? 예수를 믿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은혜를 어느 정도 체험하고 있는가? 그 은혜가 너무 커서 삶의 현장에서 측량할 수 없는 풍성함에 고백을 할 수 있는가? 특별히 고난 중에도 고백을 할 수 있는가? 저는 신학대학 시절부터 계속해서 갈등이 있었다.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생명은 체험하고 있지만 예수님께서 약속하신만큼 체험하고 있는가이다. 바울이 감옥소에서 체험한 것만큼 감격스럽게 체험하고 있는가? 그런 갈등이었다. 보통 신학교에 들어가면 지금도 신학생들에게 들릴 것이다. 신학교에 들어가면 뜨거운 신앙이 식는다. 신학교는 뜨거운 신앙의 불을 끄는 곳이다. 신학교는 찬물을 끼얹는 소방차이다. 왜 이런 말이 나오는가? 성경을 비판하고 공격하는 자유주의 신학을 할 때 나올 수 있다. 그런데 분명히 성경을 그대로 믿고 그대로 연구하고 그대로 전파하고 가르치는 신학교에서 왜 이런 고민이 나오는가이다. 미국 유학을 갔을 때 다른 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친구는 학교에 가면 독주사를 맞고 집에 오면 해독주사를 맞는다고 말했다. 학교에 가면 성경을 비판하는 교수를 통해서 독주사를 맞고 집에 와서는 기도하면서 그 독을 다 빼는 해독주사를 맞는다고 말한다. 제가 그 말을 들으면서 한 편은 이해가 되면서 한편으로는 왜 독주사를 맞고 해독주사를 맞으려고 돈 들어서 유학을 하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 성경을 연구하고 성경을 가르치는데, 왜 이런 말이 나오고 갈등이 있는 걸까? 이것이 과연 신학교에서만이 아니라 교회에서도 놓고 보면 예배 시간에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를 어느 정도 체험하고 싶다. 찬송이 얼마나 살아서 위로가 되는가? 말씀이 생생하게 영혼의 양식으로 우리의 흡족하게 들어오고 있는가? 제자훈련과 훈련에서 얼마나 하나님이 풍성한 은혜를 체험하고 있는가? 이 문제가 교회 전체에서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 사실이다. 호주에 유명한 신학자인 ‘그레엄 골드워드’라는 분이 있는데 이 그레엄 골드워드가 있는데 그가 복음 중심의 책을 썼다. 지금 신학교 강의 시간이 아니라 설교시간이기에 깊이 들어가지 않지만, 신학자로서 교회 전체를 꿰뚫어 보면서 핵심적인 문제를 직시하고 지적하고 있다. 그레엄 골드워드는 교회 역사 전체를 놓고 봤을 때 초대교회, 중세교회 넘어서 계몽사조시대 교회, 근세교회, 현대교회로 넘어오면서 계속해서 교회역사에서 학자들과 교인들이 성경을 해석하고 연구했는데 다루면서도 그리스도 예수의 풍성한 생명을 체험하지 못한 현상이 나타났다고 한다. 분명히 성경을 성경대로 믿고 다루는 정통인데도 불구하고 약한 정통내지 죽은 정통의 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시했다. 그가 복음 중심의 해석인데 복음의 주인인 성경 전체에서 그리스도 예수의 풍성한 측량할 수 없는 풍성함을 체험할 수 있다고 그렇게 제시를 했다. 학자 중에서도 내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를 자기의 고민으로 삼아서 교회역사의 2천의 역사를 다 훑어낸 사람도 있어서 고맙기도 하고 공감되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제 마음에 질문이 던져졌다. 또한 신학교 박사하위 마칠 때 신학생들의 졸업식에서 그들의 가족들과 함께 할 때 그날 세계에서 유명하다고 하는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가가 설교를 했다. 저 자신부터 설교의 내용을 들어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그 설교는 그리스도의 중심의 설교를 하고 있었다. 듣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체험하고 은혜를 많이 받아야 할텐데 설교의 감동이 와 닿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저만 그러나 했다. 제가 얼굴을 돌려서 쭈욱 훑어보니 ⅔가 졸고 있었다. 깜짝 놀랐다. 그리스도의 풍성한 은혜에 가격해서 이렇게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떻게 그리스도 중심의 해석을 하는데 이렇게 약한 정통이 있을 수 있는가? 좀 심하게 이야기 하면 죽은 정통이 있는 것인가? 왜 예수의 생명을 체험하지 못할까? 특별히 18세기에 계몽사조시대에 이성을 만물의 기준으로 삼았다. 우리의 워리에 합리적으로 판단해서 맞는 것이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판단해 볼 때 옳지 않는 것은 맞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생활 속에서 실재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고 경험할 수 없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경험의 기준에서 성경을 비판하게 되는데 그런 성경을 읽고 나서 성경에 나오는 모든 기적들을 계몽사조시대에 성경의 200년간 교회 역사를 지배했다. *고린도전서 4:20, 20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하나님의 나라는 화려한 인간 지혜의 레토릭, 수사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을 문법적으로 역사적으로 문학적으로 담화 분석적으로 연구해서 가르친다고 해서 그게 생명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것도 필요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레토릭, 말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의 능력, 예수의 사랑이 약동하게 하고 예수의 생명이 흘러가게 만드신 성령의 능력에 있다. 그런데 교회 역사 전체에 체험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분들을 어떻게 체험하게 할 수 있느냐이다. 오늘 본문에 9장과 10장을 연결해 보면 상당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께서 내가 온 것은 생명을 얻기 위해서 더욱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한다. 여기 예수께서 말씀하신 ‘생명’, 이 생명이 어떤 생명이냐는 것이다. 우리가 고통과 세상을 겪으면서 한 백 여 년 사는 생명을 말하는 것인가? 그 생명이 좀 풍성한 것, 그것을 말씀하시는가? 아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생명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생명과 접속된 생명이다. 하나님의 생명, 영원한 주관자이신 하나님의 생명과 접속된 생명을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의 생명이 얼마나 대단함인가와 얼마나 위대하시냐를 깨달으면 감히 다가오게 된다.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냐고 깨닫고 싶으면 밤에 맑은 밤하늘을 쳐다보시면 어느 정도 감이 올 것이다. 측량할 수 없는 생명이다. 밤하늘을 인간의 눈으로 쳐다보면 별이 1600개 정도 보게 된다고 한다. 인간의 눈으로 확인이 안 되는 별이 너무나 엄청난 별이 있다. 별이 700해 정도가 된다니 감이 안 올 수 있다. 억조경해해~~ 지구도 하나의 별이듯이 지구의 있는 모든 모래 알 들, 사막에 있는 모든 모래알들을 전부 모아놓은 숫자보다 더 많은 숫자가 그게 700해 정도가 될 것이다. 이렇게 많은 별들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셔서 우주 공간에 띄어 놓으시고 운행하신 줄 믿는다. 하나님은 우주의 대통령, 우주의 통치자이시고 위대하시고 크신 분이시다. 이런 하나님이 얼마나 정교하시고 대단하신가? 지구촌에 있는 80억 가까이 되는 모든 사람의 생각과 표정과 행동이 교만하고 겸손한지를 정확하게 동시에 아시고 모든 교만한 자를 낮추시고 모든 겸손한자를 높이실 정도로 정확하시고 정교하신 하나님이시다. 얼마나 정교하신 분이시냐, 여러분의 몸 속에 인체 속에 세포가 백 조개 정도 있다. 100조개 중에 하나의 세포, 0.02mm, 굉장히 작다. 그 세포 속에 얼마나 많은 부품이 들어있냐면 보잉 747기가 그 안에 600만개가 들어있는 셈이다. 그런데 보잉 747기 15만 6천대 이상의 부품이 0.02mm 안에 들어있게 만드시고 그 세포 속에 있는 부품들이 정확하게 작용을 하면서 움직이게 하시는 정교하신 하나님이시다. 신음소리도 다 듣고 계시고 이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이심을 믿는다. 대단히 크신 하나님, 측량할 수 없이 정교하시고 크신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이 죄와 고통과 사망까지 이기는 생명, 이것을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예수께서 이 생명을 주시려고 바로 오셨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박효진 장로님의 간증을 여러 번 들어본 적이 있다. 한 번은 이런 간증을 하셨다. 자신의 친구가 고교친구인데 영안실에 있는데 예수님을 안 믿었다. 그러다가 그 친구를 예수 믿게 만드려고 친구에게 예수를 믿어야지 하면서 권면했다. 예수를 안 믿으면 벌을 받으니 한 번 믿어보라고 했더니 그 친구의 답변이 “지금은 안 믿어 언젠가는 반드시 예수님을 믿을 거야, 내가 예수를 안 믿지만 영안실에서 시신을 수도 없이 다루어 보았는데 시신을 보면 내가 예수를 안 믿어도 이분은 천당, 지옥을 구별한다.”고 했다. 정확하게 아는 것은 예수 믿는 시신은 불치병을 오랫동안 앓았어도 평온하다. 예수 안 믿는 시신은 평생 동안 건강하고 떵떵거리고 살았어도 오만상을 찌 뿌리고 있고 거품을 물고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도 천당 가고 싶지 지옥가고 싶지 않다고 했고 그러니 언젠가는 예수를 믿겠다고 했다고 한다. 여러분 누가복음에 16장에 분명히 나와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 보면, *누가 16:22 22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이 비유에서 여러분 육체 안에 영혼이 있으니까 지금 살아있다. 이 육체는 영혼이 떠나가는 순간에 그것이 바로 죽음인데 이 말씀을 보면 천사들에게 떠 받들렸다고 말씀한다. 한 번 생각해 보자. 700해 정도의 별들이 우주 공간에 떠 있는데 영혼이 육체를 떠나서 어떻게 해서 천당까지 스스로 갈 수 있는가? 절대로 못 간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의 영혼은 천사들이 떠받들린다. 천국 우주선에 천사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의 영혼을 탑승시켜서 그 영혼이 천국으로 정확하게 올라갈 수 있도록 에스코트하고 주님 앞에 가게 하시며 주님의 품에 안기게 하신 줄 믿는다. 이것이 예수님이 약속하신 생명이다. 하나님의 생명과 접속된 영원한 복된 생명, 죄와 사망과 죽음까지 이기는 생명이다. 엄청난 생명이다. 이 어마어마한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고 약속하셨고 바울은 체험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에 9장과 10장을 보면 9장에는 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 나온다. 생내적 시각장애인이 예수님을 만나서 침 바른 흙을 눈에 바르라고 해서 발라주시고 실로암 물에 가서 씻으라고 하신다. 씻었더니 눈이 환하게 되었다. 여러분이 그런 경험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앞을 못 보는 상태에서 실로암 연못까지 어떻게 갔는데 거기서 씻었더니 훤하게 보였으니 너무도 감격했을 것이다. 눈을 뜨는 개안의 기적을 체험한 것이다. 그날이 안식이다. 안식일이니까 태생적 시각장애인이 눈을 뜨는 기적을 체험했는데도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죄인이라고 정죄한다. 왜 안식일에 노동하면 안 되는데 노동을 했기 때문이라고 그런 것이다. 이러면서 예수님하고 이 시각장애인 사이에 지금은 눈을 떴지만 논쟁이 붙은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은 죄인이다. 그 시각장애인은 아니라고 한다. 나는 죄인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내가 분명히 아는 것은 내가 못 보다가 이제는 본다는 것이다. 그것이 분명하다고 말한다. 여러분 영어를 쓰지 않지만 쓰고 싶다. 양해하길 바란다. ※“One thing I do know, I was blind but now I see.”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9:38) -창세 이후에 없었던 초유의 기적을 나는 체험했다고 말한다.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르나 나는 분명히 이런 기적을 체험했다고 확실한 간증이 있는 것이다. 이후에 이 시각장애인은 출교 당했다. 회당에서 쫓겨나는 것인데 유대인 회당에서 쫓겨나면 인생에서 쫓겨나는 것이다. 살 수 없고 그렇게 힘들다. 그렇게 되었을 때 예수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는데 인자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인자, 하나님께서 보내신 천국 왕 메시아임을 밝히신다. 그 때 시각장애인이 보고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외쳤다. 예수를 믿을 뿐만 아니라 그 앞에 꿇어 엎드려서 경배했다고 한다. 놀라운 영적 개안까지 체험했다. 육적 개안에 영적개안까지 체험했으니 엄청난ㅁ 변화를 체험하고 엄청난 간증을 하게 된 거싱다. 여러분 똑 같은 사건이다. 예수가 나오고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이 나온다. 날 때부터 못 보던 사람이 보는 기적이 나온다. 똑 같은 사건을 놓고 예수님을 바리새인들은 죄인이라고 부른다. 이 눈뜬 사람은 나중에 분명히 발견한대로 예수님을 천국의 왕 메시아, 하나님이라고 부르며 고백한다. 핵심이 무엇인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 이다. 예수가 누구인가? 나를 믿지 못하면 내가 행한 기적을 보고 믿으라고 하신다. 창세 이후에 못 보던 사람이 없었으니 보았으니, 창조 이후의 초유의 기적이다. 그 정도라면 하나님이 보내신 인물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못 믿겠거든 나의 부활의 기적을 믿으라고 하신다. 10장에 보면 예수님은 양의 문, 선한 목자의 말씀을 하신다. 예수님은 내가 양의 문이며 나를 통해서 들어오지 않으면 구원의 문으로 들어오지 못한다고 하신다. 나의 양들은 내 음성을 듣는다. 내 음성을 듣고 들어오며 나가면서 꼴을 먹는다. 예수께서 선한 목자라고 하시면서 예수님은 생명을 내려놓을 권세도 있고 다시 찾을 권세도 있다고 하신다. 여러분 생명을 내려놓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절대로 하지 말라.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러나 내 목숨을 다시 도로 가져오는 것도 아무도 못한다. 하나님이 아니시면 절대로 못한다. 구원의 능력을 행하실 수 없다. 예수께서 나의 개안기적과 부활 기적을 믿고 내가 하나님이 보내신 자임을 믿으라고 하신다. 이렇게 10장에서 말씀하신다.
“나는 하나님과 하나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을 듣고 나서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했다.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말하니 인간인데 인간이 하나님과 하나라고 하면 신성모독이라며 유대인들은 돌을 던졌다. 예수를 죽이려고 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하나님과 하나이다. 라고 말씀하시고 그리고 그것을 증거 하는 것으로서 개인기적, 창조이후의 초유의 기적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리고 부활 기적까지 언급하신 것이다. 이런 예수님에 대해서 예수님을 여러분은 분명히 믿고 계신다. 성경대로 믿고 계신데 문제는 얼마나 풍성한 체험을 하는데 있다. 여러분이 얼마나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은혜를 체험하고 간증하고 전달하느냐가 문제이다. 이문제가 무엇으로 해결되는가? 이다.지금 이렇게 이야기 할 때 알고 있어야 한다. 해드 날리지(head knowledge)-머리지식은 다 가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하트 날리지(heart knowledge)가 되느냐이다. 하트 날리지는 가슴지식이다. 꿀이 달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머리지식이며 예수님이 풍성한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머리지식이다. 여러분 꿀이 달다는 말만이 아니라 꿀이 달다는 것을 달다는 것을 체험하는 것이다. 먹어보니 달더라. 꿀을 먹어보니 달더라. “One thing I do know, I was blind but now I see.” -예수를 믿고 나서 눈에 보이지 아니하고 들리지 아니하고 손으로 만질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계시면서 우주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인간세계를 창조하시고 다스리시고 나의 삶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신 줄 믿습니다. 체험이 있고 간증이 있느냐이다. 이것이 핵심이다. 그 영적인 진리가 가슴진리로 다가오는가? 머리지식으로 하면 교만해진다. 머리지식으로 머물면 정죄하고 손가락질 한다. 그러나 가슴지식은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를 여러분이 머리만이 아니라 가슴으로 체험하길 축원한다. 온유하고 정직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슴으로 체험해야 한다. 사람이 근본적으로 변화된다. 머리지식이 가슴지식이 되면 생활지식이 될 것이다. 이 말씀을 놓고 실재 점검해 보자. 여러분 핵심인 이 질문을 다시 한 번 던져보라. 예수님이 누구인가? 예수가 누구냐고 했을 때 기독교 사상가인 C.S 루이스 3자 택일이다. 라고 했다. 하나만 택하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유명한 성인군자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 거짓말쟁이, 미친 사람, -예수께서 나는 하나님이라고 했는데 자신이 하나님이 아닌데 하나님이 아니라고 했다면 거짓말쟁이다. 자신이 하나님인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그렇게 말을 했다면 정신 나간 사람이다. 그러니까 예수는 거짓말쟁이나 미치광이나 주님, 셋 중에 하나이다. 중간이 있을 수 없다. 예수님을 성인군자,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예수를 보고 체험한 사람들 중에 예수가 거짓말했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예수가 거짓말쟁이나 미친 사람도 아니시다. 예수님을 받들려고 자신들의 지혜를 모르려고 집중했다. 예수님은 한 번도 함정에 빠지지 않았다. 예수님은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지혜와 지식을 가지고 계시니 예수님을 미쳤다는 것은 더욱 말이 안 된다. 그럼 거짓말쟁이도 미친 사람도 아니면 예수님은 주인이시다. 우주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창조하시고 우주와 인간을 다스리시는 우리의 구원자이심을 믿는다. 아멘, 그런데 구체적으로 얼마나 풍성한 생명인가를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점점 더 체험해 가야 한다. 어떻게 하면 점점 더 깊이 체험을 할 수 있는가? 한 마디로 말하면 밀착이다. 포도나무 가지가 나무에 붙어있으면 포도나무로부터 생명의 수액을 받아서 힘이 된다. 바깥으로 그 힘을 분출하기에 그래서 꽃으로 된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와 매순간 밀착 접속되어 있으면 예수 생명의 수액이 우리 속에 들어와서 우리 속에 약동하게 된다. 여러분 속에 약동하면 그 힘으로 바깥으로 분출될 줄 믿는다. 여기에 사랑의열매가 된다. 예수의 생명이 분출하는 것이 사랑의 열매이다. 이웃과 친척에게 약동하는 생명이 분출하면 반드시 영향을 받게 된다. 그것이 예수님과 밀착 접속이다. 어떻게 밀착 접속하는가? 미국의 존 파이퍼 목사님이 하신 말씀이 있다. 다섯 가지이다 ◆존파이퍼 목사님-인기신행감(認祈信行感-A.P.T.A.T.) 1.인식하라(Admit)-(요한복음 15:5)-내가 예수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인식하라. 2.기도하라 (Pray)-(로마서 4:18)-그러니까 주님께 기도하라. 3.신뢰하라(Trust)-(로마서 4:18)-한 마디 말씀을 붙들고 신뢰하라. 4.행동하라(Act)-(마가복음 3:5)-그대로 행동해라. 5.감사하라Thank)-(에베소서 5:20)-과정과 결과는 주님께 맡기고 되던 못되던 맡기고 미리 감사하고 범사에도 감사하고 안 될 때로 감사하고 항상 감사하라. ※주님과 최고의 인기 신혼여행을 감. 인식하여서 기도하고 신뢰하고 행동하고 감사하라. 수십 년간 붙잡고 지내온 것이다. 그대로 믿고 행동하라. 삶의 현장에서 어떤 환경에서도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대로 믿고 행동하라. 손 마른 사람이 손을 내밀었더니 손이 치유된 것처럼, 반드시 해 주실 것이다. 예수님의 풍성함을 체험해야 하며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책이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한다. 묵상하고 기도하고 무릎을 칠 정도로 다가오니 성령의 감동으로 깨달아서 생명을 체험을 해서 동시에 삶이 변화가 된다.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지금도 일하시니 성령으로 변화시켜 주시니 생명의 역사가 나타나심을 믿는다. 예수님과 밀착 접속을 통해서 들어오고 나가면서 꼴을 먹어서 회복으로 부흥으로 뻗어나갈 것이다. 맛보니 정말 달기를 원한다. 모든 주변의 친척과 이웃에게 ♣요약 우리 모든 성도들 속에 깊이 새겨져서 예수님의 풍성한 은혜를 체험해서 많은 생명을 인도하며 죽은 정통이 아니라 놀라운 주님의 은혜를 풍성히 체험하는 길은 오직 예수님과 밀착된 접속이니 우리는 항상 주님 앞에 집중하고 예수님의 은혜를 풍성히 체험하여 은혜와 감격으로 믿지 않는 영혼들을 살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로마서 12:16, 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요즘 우리가 가장 많이 관심을 가지고 사람들이 많이 언급하는 단어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소통이이라는 단어이다. 소통과 관련된 책들이 우리의 눈에 많이 띄는 것은 그만큼 소통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가운데 소통이 잘 되지 않아서 그렇다. 코로나 상황 가운데 수많은 것들이 우리의 삶을 힘들게 했다. 자영업을 하시는 분들은 코로나로 인한 거리두기로 너무나 큰 피해를 입었다. 학생들은 학교에 가지 못하여서 교우들과 만나지 못하여 친구 없이 졸업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의료현장에서는 더위와 추위 가운데서도 코로나 환자들을 치료하고 돌보면 수많은 의료인들이 고생하고 수고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코로나에 확진되어서 가정에서 온라인으로 토비새에 참여하는 분들이 참 많다. 이런 모든 분들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스러운 일들이 있지만 우리 모두가 느끼는 공통된 단어가 소통의 단절이다. 사람들은 함께 모여 나누고 소통하며 위로를 얻기도 하고, 에너지를 충전하기도 하는데 그렇지 못한 날들을 우리는 예상보다 오래 지내야만 했다. 모이는 것이 제한되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모여 소통하는 것을 불편해 하고 때로는 사람들을 한 인격으로 대하기보다는 서로를 바이러스 보유자, 미보유자로 나누며 소통하지 않으려고 하는 날들을 우리는 지난 3년간 지속하였고, 이로 인해서 우리의 삶의 많은 부분들이 어그러지고 깨어졌다. 소통은 이토록 우리 인생 가운데서 중요한 것인데 그렇다면 소통이 잘 되는 관계와 상황은 어떤 것이며 잘 되지 않는 관계는 여러분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흔히 소통이 잘 되는 관계는 나와 가까운 관계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결코 가까운 관계라고 소통이 잘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여러분, 우리의 가족 간의 관계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살면서 가장 소통이 잘 안 되는 분이 누구인가? 이쪽에서는 아내, 저쪽에서는 남편이라고 하신다. 두 분이 부부가 아니시길 바란다. ㅎ배우자이다. 그렇다 수십 년을 함께 사는데도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명히 같은 한국말을 사용하는데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남편이 뭔가 내 마음에 불편하고 거스르는 일을 해서 ‘당신 맘대로 해’라고 했는데 진찌 마음대로 하는 남편을 보면서 아내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살면서 저 사람과는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한다. 부모와 자녀 간에도 이러한 일이 벌어진다. 요즘 부모님들은 자녀들의 이야기를 알아듣는 것이 굉장히 쉽지가 않다. 여러분, 재곧내(제목이 곧 내용이다), 욤욤욤(무언가를 오물오물 씹어 먹는 소리), 관태기(인간관계에 흥미를 잃고 싫증을 느끼는 시기-인간관계를 맺는 것에 회적인 상태), 발음조차 하기 힘든 단어의 뜻을 알고 있는가? 모른다. 분명이 한국말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쓰는 말이다. 저도 이 말들을 알아들을 수 없다. 아이들은 이런 말도 모른다고 부모님을 타박하고 부모님들은 이런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사용한다고 잔소리를 하니 부모와 자녀 간에 소통이 안 된다. 말이 안 통하니 공감할 수 없고 말이 안 통하지 소통이 되지 않는다. 부모와 자녀 간에 부부간에 가족 간에 소통이 벌어지지 않는다. 가까운 관계라고 소통이 되어 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소통이 잘되어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요즘 소통 전문가라고 하는 많은 분들이 공통되게 하는 말이 있다. 소통은 ‘공감’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어떤 공동체가 건강하게 세워지기 위해서는 서로 소통을 잘 해야 하고 서로 소통을 잘 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는 공감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사람은 서로 공감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왜냐면 우리의 DNA자체가 이기적인 DNA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기 보다는 타인이 나에게 맞추어지기를 바라고 타인이 나를 이해하기를 바라고 타인의 행복보다는 나의 행복이 도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소통이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로마서는 이렇게 말씀한다. 믿음의 공동체, 교회는... *로마서12:15 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언뜻 쉽고 너무나 당연한 말씀 같지만, 이 말씀은 교회 공동체 안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이것이 그냥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깨워주신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 내 안에 은혜가 넘치고 내가 여유가 있을 때는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내 마음이 힘들고 내 마음이 울적하고 내가 여유가 없을 때는 우울한 사람들을 내 곁에 두려하지 않는다. 외면하고 싶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 내 주위 사람들에게 옆에 사람에게 정말 즐거운 일이 생기면 그 앞에서는 우리가 축하해야 하는데도 하지만 나보다 더 행복해 보이고 나보다 더 잘 나가는 것 같아 내 마음 깊은 곳에는 함께 즐거워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다. 그렇다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가장 먼저 되어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소통’을 올바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로마서 12장에 말씀하시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지체 의식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인으로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 이 모든 것의 출발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된다. 먼저 하나님과 소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할 때,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삶으로 우리를 채움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소통하며 그분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찬양과 기도와 말씀 가운데 죄인 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고 그 이해와 공감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 나오지 않고 세상 가운데 매몰되어 이 세상의 것들만을 사랑한다면 또는 나의 문제에 빠져서 그 문제와 어려움만 바라보고 있다면 하나님과 소통할 수 없다. 세상의 것들이 내 문제와 어려움들이 우리 시야를 모두 가려버려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마음을 조금도 이해하거나 알 수가 없다. 우리와 같이 삶의 어려움과 신음하던 시편 기자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우리는 시편 4편6절을 보자. *시편 4:6, 6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시편 4편에는 고난과 위기 가운데 있는 시인을 향하여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인자와 하나님의 사랑이 사라졌다고 수군거리고 그 수군거림의 소리가 이 시인에게 들려온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께 “하나님, 하나님의 얼굴을 들어 나에게 비추어 주십시오.”라고 간구한다. 극심한 고난이 찾아올 때에 우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기도해도 하나님이 없는 것 같다. 주의 얼굴을 들어 나에게 비추어 주시라고 요청하고 있다. 또한 시편 42편2절을 보자. 고난 중에 있는 시인을 말한다. *시42:2,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하나님이 분명히 계시다고 했는데, 그 살아계신 하나님이 지금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하나님을 자꾸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문제, 나의 연약함, 나의 고난에 더욱 집중하게 되고 하나님을 찾지 못하니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없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으니 하나님과의 소통이 단절 되어서 죽을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시편 기자들이 “하나님, 주의 얼굴이 도대체 어디를 보고 계십니까?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로 절규하는데 하나님은 과연 다른 곳에 계시고 다른 곳을 어떠한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해하고 계시며 하나님께서는 우리 편에 서 계심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를 향하지 않는 순간이 없다. 어떠한 순간에도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를 향하지 않는 적은 결단코 없다. 다만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께 두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며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우리가 하나님의 눈을 바라보면 우리의 눈과 하나님의 눈은 마주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묵상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신 선하신 뜻을 깨달아 알게 된다. 그 뜻을 헤아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게 된다.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고 하나님과 진정한 소통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오늘 토비새에 나오신 많은 성도님들, 그리고 영상으로 예배하는 모든 성도님들, 우리가 예배하는 가장 첫 번째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감히 이해하려고 애쓰고 하나님과 공감하며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임을 기억하길 바란다. 그러할 때 우리의 인생은 거룩한 소통으로 축복될 줄 믿는다. 이렇게 소통하고 하나님과 소통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교회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 할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은 우리가 믿음의 공동체와 함께 하는 것이다. 여러분 사랑의 교회의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유익은 무엇인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말 못하는 일들을 우리는 신앙의 공동체에 나아가서 서로 나누며 공감할 수 있다. 인간적인 방법이 아닌 말씀을 통하여서 서로의 아픔에 이해하고 공감하고 소통하는 일들이 우리 공동체 가운데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이 우리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아름답게 일어난다. 오늘 목양 7팀이 토비새에 참석하였다. 우리는 왜 다락방에 왜 나가는가? 우선적으로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통해서 내 삶의 문제를 해석하고 답을 얻기 위해서 다락방에 나아간다. 그런데 그 과정이 무엇인가? 서로의 아픔을 내어놓고 공감하고 이해할 때, 거룩한 소통이 이루어지고 그 과정의 끝에서 말씀을 통해서 삶의 내 인생의 문제의 해답을 얻는 곳이 다락방이다. 이것이 영적 공동체에서 누리는 기쁨이고 영적 소통의 은혜이다. 제자반 사역반도 마찬가지이다.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곳이 제자반 사역반이 아니다. 같은 훈련생끼리 말씀 앞에서 내 삶의 문제를 놓고 서로의 아픔을 놓고 함께 아파하고 즐거워하기도 하며 함께 고민하고 함께 기도할 때에 영적인 공감과 소통 속에서 우리의 믿음의 용량을 키우는 곳이 제자반이고 사역반이다. 그런데 만일 다락방과 훈련 반에서 어떤 공감도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영적인 기쁨과 성장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함께 하며 품는 곳이며 공동체를 이루어 나갈 수 있다. ▷ 다락방, 제자, 사역 반 : 내 삶의 문제의 답을 얻는 곳, 모두 함께 고민하고 즐거워하고 울어주고 기도해 주는 곳이다. ▷ 영적 기쁨과 공감할 수 있는 공동체를 이루어 나간다. 요즘 코로나 확진들이 참 많다. 주변에 정말 많다. 지체된 우리는 힘들어하는 성도님들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고 사랑의 교회 코로나 키트를 준비하여 마음을 위로하고 나누고 있다. 교역자들이 대면해서 직접 만날 수는 없지만 이 키트를 문 앞에 두고 성도님들의 온전한 회복과 치료를 위해서 함께 기도하고 돌아온다. 저희 교구에도 많은 분들이 코로나에 확진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또 함께 아픔을 나누고 있다. 코로나 확진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하여 이런 저런 기도제목들을 나누고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게 된다. 그런데 기도제목을 나눌 때에 전화를 받는 분들이 가장 큰 위로를 받는 이야기가 있다. “성도님, 저도 코로나에 걸렸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할 때, 그렇게 위로를 받고 큰 기쁨을 얻는 것을 느낀다. 더 큰 위로가 있다. “성도님, 사실은 저희 네 명의 가족 모두가 걸렸었습니다.”라고 왜 이 이야기의 성도님들은 은혜를 받고 위로를 받는가? 나만 아픈 게 아니었다는 것에 위로를 받는다. 내가 지금 이렇게 힘든 것을 다 이해하고 있음에 위로를 받는 것이다. 나만 겪는 고난이 아니라 여기기 때문이다. 제가 겪는 코로나의 아픔과 힘겨움을 함께 공감하니 코로나 확진된 성도님들과 진정한 소통이 일어나는 놀라운 은혜가 제게 있었다. 다락방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자매의 아픔을 가지고 골방에서 신음하는데 다락방에서 이것들을 나누니 우리 순장님이 같은 아픔이 있었기에 또한 종류는 다르지만 우리 모두가 고난을 겪고 있기에 우리 함께 공감하며 위로할 수가 있다. 다락방에서 나의 기쁨을 나누니 오히려 다락방 식구들이 더 기뻐하며 마음껏 축하해 준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지체된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하며 그 소통을 통하여 거룩한 하나의 몸, 하나님의 지체가 되었기에 이것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거룩한 소통이 일어나는 곳, 온전한 소통과 온전한 삶이 세워지는 곳이 바로 교회 공동체이며, 우리 다락방이다. 사랑의 교회는 3,000여 개의 다락방을 통해서 이와 같은 소통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소통을 통해서 우리는 다락방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세상으로 나아간다. 아픔을 겪고 있는 아픔을 함께 아파하며 함께 위로할 수 있게 된다. 이것들을 위해서는 우리는 더욱 복음으로 무장을 해야 한다. 말씀 가운데 십자가 가운데에 우리는 나아가야 한다. 로마교회를 향해서 오늘 바울은 교회 공동체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한다. 한 지체로서 서로를 존귀하게 여기며 서로의 삶을 공감하며 서로 위로하고 그 위로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 살아가라. 라고 바울은 로마교회를 향하여서 권면하고 있다. 로마교회 안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이 함께 있다. 어떤 사람이 유대인이었고 어떤 사람은 로마인이었고 어떤 사람은 시민권 자였고 어떤 이는 노예였고 서로의 출신이나 지위 때문에 부딪히기도 하고 진정한 교제를 막는 장벽들이 로마 교회 안에도 많이 있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때문에 다른 이들의 아픔을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다른 이들의 즐거움에 함께 공감하며 즐거워하는 일들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일들을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으로 완전히 무장하여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소통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 교회가 세워지고 서로 소통할 수 있게 된다. 라고 말한다. 우리가 지체로서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기에 다른 이가 아프면 함께 아플 수 있는 것이고 다른 이가 즐거워할 때에 함께 즐거움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공감과 소통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하나님 곁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고 계신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큰 위로가 무엇인가? 주님이 나의 아픔을 아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와 똑 같은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내가 겪는 희, 노, 애, 락을 모두 경험하셨다. 슬픔 감정이 무엇인지 함께 느끼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분노하시면서 우리의 감정의 분노가 무엇인지를 아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가족과 어머니를 걱정하시면서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의 어머니를 부탁하셨던 분이 예수님이시다. 우리를 잘 아시고 공감하시고 잘 이해하시기에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 곁에서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소망을 대변해 하시며 중보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신다. 코로나로부터 수많은 분들이 고통당하고 있다. 누가 그들을 위해 울어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울어주어야만 한다. 우리가 그대들의 손을 붙잡고 일으켜 주어야만 한다. 코로나로 인하여서 많은 이들이 관계의 단절을 경험하고 소통의 단절을 경험했다. 자신의 어려움과 자신의 힘겨움, 자신의 많은 것들을 나눌 수가 없어서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다. 우리는 이것을 코로나 불루라고 이야기 했다. 그러나 너무나 감사하게도 우리 사랑의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단 한 번의 현장예배를 멈춘 적이 없다. 현장 예배를 멈추지 않았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사모하며 그 은혜를 덧입게 되었다. 하나님과 소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힘을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공급 받았다.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다락방은 수많은 노력들을 통해서 서로 나누고 모이는 것에 멈추지 않고, 서로 끊임없이 소통하며 서로를 격려하여 왔다. 코로나 때문에 힘든 마음들, 힘든 삶을 나누고 서로를 끊임없이 격려하고 세워주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코로나를 넘어선 거룩한 영적 소통을 이루어내고 우리의 공동체를 아름답게 지켜낼 수가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과 소통하고 믿음 동지들과 함께 소통하며 우리의 삶의 걸음을 하나님 나라에 진격하는데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모이고 함께 소통하며 공감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고 명령이기에 그렇다. 코로나 와중에도 웃는 자들은 우리 곁에 있다. 코로나 와중에도 우리는 함께 기뻐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 공동체에게,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이다. 우리 사랑의 교회 모든 믿음의 식구들 가운데 즐겁게 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며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주는 은혜가 끊임없이 계속되기를 바란다. 시작점은 하나님과의 소통이다. 여러분 소통의 자리가 예배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럴 때 주님의 거룩 성으로 우리의 모든 삶이 거룩한 산제사로 하나님 앞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명 앞에 온전히 되어 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한다. ♧요약 이 코로나 상황에서도 우리가 영 가족들과 서로 사랑과 은혜 속에서 오직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예배의 은혜로 감사하며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서로 소통하며 공감하고 지체들을 세워갈 때, 우리가 더욱 건강하여 믿음의 공동체로 쓰임 받아야 한다. 매 순간 드려지는 예배가 거룩한 소통의 현장이 되어 서로를 위해 웃고 우는 은혜가 넘치기를 소원하며 서로 위로하고 공감하고 소통하여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세워주시는 우리 주님을 의지하여 한 영혼 한 영혼을 살려서 생명의 진동이 일어나 예배와 다락방 가운데서 은혜와 기쁨이 넘치기를 소망한다. -연합된 사랑이다. 서로 마음을 같이 하여. "애정을 같이 하라. 모두 하나가 되도록 노력하라. 네가 네 자신에게 행하는 대로 똑같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기를 바라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