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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기도회(주후 2022년 3월 19일)
제목: "함께 웃고 함께 우는"
말씀: 로마서 12:16
찬양인도: 목양 7팀
대표기도: 고윤복 안수집사님(목양7팀 대교구장)
말씀읽기: 안정호 형제(청년6국), 황정민 자매(대학3부)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김대규 부목사님(대각성전도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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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16,
16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요즘 우리가 가장 많이 관심을 가지고 사람들이 많이 언급하는 단어가 있다. 그 중에 하나가 소통이이라는 단어이다. 소통과 관련된 책들이 우리의 눈에 많이 띄는 것은 그만큼 소통이 중요하기도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 가운데 소통이 잘 되지 않아서 그렇다. 코로나 상황 가운데 수많은 것들이 우리의 삶을 힘들게 했다. 자영업을 하시는 분들은 코로나로 인한 거리두기로 너무나 큰 피해를 입었다. 학생들은 학교에 가지 못하여서 교우들과 만나지 못하여 친구 없이 졸업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의료현장에서는 더위와 추위 가운데서도 코로나 환자들을 치료하고 돌보면 수많은 의료인들이 고생하고 수고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코로나에 확진되어서 가정에서 온라인으로 토비새에 참여하는 분들이 참 많다. 이런 모든 분들께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수많은 어려움과 고통스러운 일들이 있지만 우리 모두가 느끼는 공통된 단어가 소통의 단절이다. 사람들은 함께 모여 나누고 소통하며 위로를 얻기도 하고, 에너지를 충전하기도 하는데 그렇지 못한 날들을 우리는 예상보다 오래 지내야만 했다. 모이는 것이 제한되기도 했지만 사람들이 모여 소통하는 것을 불편해 하고 때로는 사람들을 한 인격으로 대하기보다는 서로를 바이러스 보유자, 미보유자로 나누며 소통하지 않으려고 하는 날들을 우리는 지난 3년간 지속하였고, 이로 인해서 우리의 삶의 많은 부분들이 어그러지고 깨어졌다.
 
소통은 이토록 우리 인생 가운데서 중요한 것인데 그렇다면 소통이 잘 되는 관계와 상황은 어떤 것이며 잘 되지 않는 관계는 여러분은 어떤 것인가? 우리는 흔히 소통이 잘 되는 관계는 나와 가까운 관계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결코 가까운 관계라고 소통이 잘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여러분, 우리의 가족 간의 관계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살면서 가장 소통이 잘 안 되는 분이 누구인가? 이쪽에서는 아내, 저쪽에서는 남편이라고 하신다. 두 분이 부부가 아니시길 바란다. ㅎ배우자이다. 그렇다 수십 년을 함께 사는데도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분명히 같은 한국말을 사용하는데도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남편이 뭔가 내 마음에 불편하고 거스르는 일을 해서 ‘당신 맘대로 해’라고 했는데 진찌 마음대로 하는 남편을 보면서 아내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살면서 저 사람과는 이야기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기도 한다. 부모와 자녀 간에도 이러한 일이 벌어진다. 요즘 부모님들은 자녀들의 이야기를 알아듣는 것이 굉장히 쉽지가 않다. 여러분, 재곧내(제목이 곧 내용이다), 욤욤욤(무언가를 오물오물 씹어 먹는 소리), 관태기(인간관계에 흥미를 잃고 싫증을 느끼는 시기-인간관계를 맺는 것에 회적인 상태), 발음조차 하기 힘든 단어의 뜻을 알고 있는가? 모른다. 분명이 한국말이다. 요즘 젊은이들이 많이 쓰는 말이다. 저도 이 말들을 알아들을 수 없다. 아이들은 이런 말도 모른다고 부모님을 타박하고 부모님들은 이런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사용한다고 잔소리를 하니 부모와 자녀 간에 소통이 안 된다. 말이 안 통하니 공감할 수 없고 말이 안 통하지 소통이 되지 않는다. 부모와 자녀 간에 부부간에 가족 간에 소통이 벌어지지 않는다. 가까운 관계라고 소통이 되어 지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소통이 잘되어지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요즘 소통 전문가라고 하는 많은 분들이 공통되게 하는 말이 있다. 소통은 ‘공감’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어떤 공동체가 건강하게 세워지기 위해서는 서로 소통을 잘 해야 하고 서로 소통을 잘 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는 공감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지만 사람은 서로 공감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왜냐면 우리의 DNA자체가 이기적인 DNA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내가 타인을 이해하고 배려하기 보다는 타인이 나에게 맞추어지기를 바라고 타인이 나를 이해하기를 바라고 타인의 행복보다는 나의 행복이 도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소통이 쉽지가 않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의 로마서는 이렇게 말씀한다. 믿음의 공동체, 교회는...
 
*로마서12:15
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언뜻 쉽고 너무나 당연한 말씀 같지만, 이 말씀은 교회 공동체 안에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나에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이것이 그냥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일깨워주신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 내 안에 은혜가 넘치고 내가 여유가 있을 때는 어느 정도 가능하지만 내 마음이 힘들고 내 마음이 울적하고 내가 여유가 없을 때는 우울한 사람들을 내 곁에 두려하지 않는다. 외면하고 싶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 내 주위 사람들에게 옆에 사람에게 정말 즐거운 일이 생기면 그 앞에서는 우리가 축하해야 하는데도 하지만 나보다 더 행복해 보이고 나보다 더 잘 나가는 것 같아 내 마음 깊은 곳에는 함께 즐거워하지 않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다. 그렇다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가장 먼저 되어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소통’을 올바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로마서 12장에 말씀하시는 교회 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지체 의식을 가질 수 있는 방법은 세상 가운데 그리스도인으로 말씀대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 이 모든 것의 출발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시작된다. 먼저 하나님과 소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올바로 분별할 때, 우리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삶으로 우리를 채움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소통하며 그분의 마음을 느낄 수 있다.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갈 때에 찬양과 기도와 말씀 가운데 죄인 된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하게 되고 그 이해와 공감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예배의 자리에 나오지 않고 세상 가운데 매몰되어 이 세상의 것들만을 사랑한다면 또는 나의 문제에 빠져서 그 문제와 어려움만 바라보고 있다면 하나님과 소통할 수 없다. 세상의 것들이 내 문제와 어려움들이 우리 시야를 모두 가려버려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의 마음을 조금도 이해하거나 알 수가 없다. 우리와 같이 삶의 어려움과 신음하던 시편 기자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우리는 시편 4편6절을 보자.
 
 
*시편 4:6,
6 여러 사람의 말이 우리에게 선을 보일 자 누구뇨 하오니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시편 4편에는 고난과 위기 가운데 있는 시인을 향하여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인자와 하나님의 사랑이 사라졌다고 수군거리고 그 수군거림의 소리가 이 시인에게 들려온다. 그런데 시인은 하나님께 “하나님, 하나님의 얼굴을 들어 나에게 비추어 주십시오.”라고 간구한다. 극심한 고난이 찾아올 때에 우리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기도해도 하나님이 없는 것 같다. 주의 얼굴을 들어 나에게 비추어 주시라고 요청하고 있다. 또한 시편 42편2절을 보자. 고난 중에 있는 시인을 말한다.
 
*시42:2,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하나님이 분명히 계시다고 했는데, 그 살아계신 하나님이 지금 내게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하나님을 자꾸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문제, 나의 연약함, 나의 고난에 더욱 집중하게 되고 하나님을 찾지 못하니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수 없고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으니 하나님과의 소통이 단절 되어서 죽을 것 같은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이다. 시편 기자들이 “하나님, 주의 얼굴이 도대체 어디를 보고 계십니까? 하나님 어디에 계십니까?” 로 절규하는데 하나님은 과연 다른 곳에 계시고 다른 곳을 어떠한 순간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해하고 계시며 하나님께서는 우리 편에 서 계심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를 향하지 않는 순간이 없다. 어떠한 순간에도 하나님의 얼굴이 우리를 향하지 않는 적은 결단코 없다. 다만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께 두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보이지 않으며 하나님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우리가 하나님의 눈을 바라보면 우리의 눈과 하나님의 눈은 마주치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온전히 묵상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신 선하신 뜻을 깨달아 알게 된다. 그 뜻을 헤아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의도를 알게 된다.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고 하나님과 진정한 소통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오늘 토비새에 나오신 많은 성도님들, 그리고 영상으로 예배하는 모든 성도님들, 우리가 예배하는 가장 첫 번째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감히 이해하려고 애쓰고 하나님과 공감하며 하나님과 소통하는 것임을 기억하길 바란다. 그러할 때 우리의 인생은 거룩한 소통으로 축복될 줄 믿는다. 이렇게 소통하고 하나님과 소통하며 살아갈 때 우리는 교회 공동체를 이루게 된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 할 수 있는 두 번째 방법은 우리가 믿음의 공동체와 함께 하는 것이다.
 
여러분 사랑의 교회의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가장 큰 유익은 무엇인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말 못하는 일들을 우리는 신앙의 공동체에 나아가서 서로 나누며 공감할 수 있다. 인간적인 방법이 아닌 말씀을 통하여서 서로의 아픔에 이해하고 공감하고 소통하는 일들이 우리 공동체 가운데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이 우리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아름답게 일어난다. 오늘 목양 7팀이 토비새에 참석하였다. 우리는 왜 다락방에 왜 나가는가? 우선적으로 최종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통해서 내 삶의 문제를 해석하고 답을 얻기 위해서 다락방에 나아간다. 그런데 그 과정이 무엇인가? 서로의 아픔을 내어놓고 공감하고 이해할 때, 거룩한 소통이 이루어지고 그 과정의 끝에서 말씀을 통해서 삶의 내 인생의 문제의 해답을 얻는 곳이 다락방이다. 이것이 영적 공동체에서 누리는 기쁨이고 영적 소통의 은혜이다. 제자반 사역반도 마찬가지이다. 단순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곳이 제자반 사역반이 아니다. 같은 훈련생끼리 말씀 앞에서 내 삶의 문제를 놓고 서로의 아픔을 놓고 함께 아파하고 즐거워하기도 하며 함께 고민하고 함께 기도할 때에 영적인 공감과 소통 속에서 우리의 믿음의 용량을 키우는 곳이 제자반이고 사역반이다. 그런데 만일 다락방과 훈련 반에서 어떤 공감도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영적인 기쁨과 성장을 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함께 하며 품는 곳이며 공동체를 이루어 나갈 수 있다.
 
▷ 다락방, 제자, 사역 반 : 내 삶의 문제의 답을 얻는 곳, 모두 함께 고민하고 즐거워하고 울어주고 기도해 주는 곳이다.
▷ 영적 기쁨과 공감할 수 있는 공동체를 이루어 나간다.
 
요즘 코로나 확진들이 참 많다. 주변에 정말 많다. 지체된 우리는 힘들어하는 성도님들을 위해서 함께 기도하고 사랑의 교회 코로나 키트를 준비하여 마음을 위로하고 나누고 있다. 교역자들이 대면해서 직접 만날 수는 없지만 이 키트를 문 앞에 두고 성도님들의 온전한 회복과 치료를 위해서 함께 기도하고 돌아온다. 저희 교구에도 많은 분들이 코로나에 확진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또 함께 아픔을 나누고 있다. 코로나 확진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전화하여 이런 저런 기도제목들을 나누고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게 된다. 그런데 기도제목을 나눌 때에 전화를 받는 분들이 가장 큰 위로를 받는 이야기가 있다. “성도님, 저도 코로나에 걸렸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할 때, 그렇게 위로를 받고 큰 기쁨을 얻는 것을 느낀다. 더 큰 위로가 있다. “성도님, 사실은 저희 네 명의 가족 모두가 걸렸었습니다.”라고 왜 이 이야기의 성도님들은 은혜를 받고 위로를 받는가? 나만 아픈 게 아니었다는 것에 위로를 받는다.
 
내가 지금 이렇게 힘든 것을 다 이해하고 있음에 위로를 받는 것이다. 나만 겪는 고난이 아니라 여기기 때문이다. 제가 겪는 코로나의 아픔과 힘겨움을 함께 공감하니 코로나 확진된 성도님들과 진정한 소통이 일어나는 놀라운 은혜가 제게 있었다. 다락방에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자매의 아픔을 가지고 골방에서 신음하는데 다락방에서 이것들을 나누니 우리 순장님이 같은 아픔이 있었기에 또한 종류는 다르지만 우리 모두가 고난을 겪고 있기에 우리 함께 공감하며 위로할 수가 있다. 다락방에서 나의 기쁨을 나누니 오히려 다락방 식구들이 더 기뻐하며 마음껏 축하해 준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지체된 우리가 하나님과 소통하며 그 소통을 통하여 거룩한 하나의 몸, 하나님의 지체가 되었기에 이것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거룩한 소통이 일어나는 곳, 온전한 소통과 온전한 삶이 세워지는 곳이 바로 교회 공동체이며, 우리 다락방이다. 사랑의 교회는 3,000여 개의 다락방을 통해서 이와 같은 소통이 일어나고 있다. 이러한 소통을 통해서 우리는 다락방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세상으로 나아간다. 아픔을 겪고 있는 아픔을 함께 아파하며 함께 위로할 수 있게 된다. 이것들을 위해서는 우리는 더욱 복음으로 무장을 해야 한다. 말씀 가운데 십자가 가운데에 우리는 나아가야 한다.
 
로마교회를 향해서 오늘 바울은 교회 공동체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씀한다. 한 지체로서 서로를 존귀하게 여기며 서로의 삶을 공감하며 서로 위로하고 그 위로를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 살아가라. 라고 바울은 로마교회를 향하여서 권면하고 있다. 로마교회 안에는 참으로 다양한 사람이 함께 있다. 어떤 사람이 유대인이었고 어떤 사람은 로마인이었고 어떤 사람은 시민권 자였고 어떤 이는 노예였고 서로의 출신이나 지위 때문에 부딪히기도 하고 진정한 교제를 막는 장벽들이 로마 교회 안에도 많이 있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 때문에 다른 이들의 아픔을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았다. 다른 이들의 즐거움에 함께 공감하며 즐거워하는 일들이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러한 일들을 바울은 십자가의 복음으로 완전히 무장하여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소통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로서 교회가 세워지고 서로 소통할 수 있게 된다. 라고 말한다. 우리가 지체로서 하나의 몸을 이루고 있기에 다른 이가 아프면 함께 아플 수 있는 것이고 다른 이가 즐거워할 때에 함께 즐거움에 동참할 수 있는 것이다. 진정한 공감과 소통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하나님 곁에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고 계신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큰 위로가 무엇인가? 주님이 나의 아픔을 아신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나와 똑 같은 옷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내가 겪는 희, 노, 애, 락을 모두 경험하셨다. 슬픔 감정이 무엇인지 함께 느끼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분노하시면서 우리의 감정의 분노가 무엇인지를 아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다. 가족과 어머니를 걱정하시면서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의 어머니를 부탁하셨던 분이 예수님이시다. 우리를 잘 아시고 공감하시고 잘 이해하시기에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하나님 곁에서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소망을 대변해 하시며 중보자로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고 계신다.
 
코로나로부터 수많은 분들이 고통당하고 있다. 누가 그들을 위해 울어줄 수 있겠는가? 우리가 울어주어야만 한다. 우리가 그대들의 손을 붙잡고 일으켜 주어야만 한다. 코로나로 인하여서 많은 이들이 관계의 단절을 경험하고 소통의 단절을 경험했다. 자신의 어려움과 자신의 힘겨움, 자신의 많은 것들을 나눌 수가 없어서 우울증에 빠지게 되었다. 우리는 이것을 코로나 불루라고 이야기 했다.
 
그러나 너무나 감사하게도 우리 사랑의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단 한 번의 현장예배를 멈춘 적이 없다. 현장 예배를 멈추지 않았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더 사모하며 그 은혜를 덧입게 되었다. 하나님과 소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인 힘을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공급 받았다.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다락방은 수많은 노력들을 통해서 서로 나누고 모이는 것에 멈추지 않고, 서로 끊임없이 소통하며 서로를 격려하여 왔다. 코로나 때문에 힘든 마음들, 힘든 삶을 나누고 서로를 끊임없이 격려하고 세워주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코로나를 넘어선 거룩한 영적 소통을 이루어내고 우리의 공동체를 아름답게 지켜낼 수가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과 소통하고 믿음 동지들과 함께 소통하며 우리의 삶의 걸음을 하나님 나라에 진격하는데 조금도 멈추지 않았다. 우리가 그렇게 열심히 모이고 함께 소통하며 공감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고 명령이기에 그렇다.
 
코로나 와중에도 웃는 자들은 우리 곁에 있다. 코로나 와중에도 우리는 함께 기뻐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 공동체에게,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명이다. 우리 사랑의 교회 모든 믿음의 식구들 가운데 즐겁게 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며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주는 은혜가 끊임없이 계속되기를 바란다. 시작점은 하나님과의 소통이다. 여러분 소통의 자리가 예배임을 기억해야 한다. 그럴 때 주님의 거룩 성으로 우리의 모든 삶이 거룩한 산제사로 하나님 앞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사명 앞에 온전히 되어 지길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한다.
 
♧요약
이 코로나 상황에서도 우리가 영 가족들과 서로 사랑과 은혜 속에서 오직 하나님과 소통할 수 있는 예배의 은혜로 감사하며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서로 소통하며 공감하고 지체들을 세워갈 때, 우리가 더욱 건강하여 믿음의 공동체로 쓰임 받아야 한다. 매 순간 드려지는 예배가 거룩한 소통의 현장이 되어 서로를 위해 웃고 우는 은혜가 넘치기를 소원하며  서로 위로하고 공감하고 소통하여 주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를 온전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동체로 세워주시는 우리 주님을 의지하여 한 영혼 한 영혼을 살려서 생명의 진동이 일어나 예배와 다락방 가운데서 은혜와 기쁨이 넘치기를 소망한다. 
 
-연합된 사랑이다. 서로 마음을 같이 하여. "애정을 같이 하라. 모두 하나가 되도록 노력하라. 네가 네 자신에게 행하는 대로 똑같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을 끼치기를 바라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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