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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의 부자연스러움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목로란 ‘주로 선술집에서 술잔을 놓기 위해서 쓰는, 널빤지로 좁고 기다랗게 만든 상’을 의미한다. 목로주점이란 ‘목로를 차려놓고 술을 파는 집’이란 뜻이다. 굳이 목로주점의 의미를 찾아본 이유는 목로주점이라는 단어가 잘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전의 의미를 읽어봐도 잘 와 닿지가 않는다. 포장마차라거나 막걸리집이라고 한다면 조금은 더 잘 알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왜 이렇게 제목에 대해서 주절주절 늘어놓는가 하면 이 한문으로 된 고풍스러운 네 글자 이름이 실제 소설을 읽었을 때의 느낌과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제목과 작가의 이름만 봤을 때 이 소설이 이런 내용일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어렴풋이 그저 술집에서 벌어지는 무슨 일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사실은 파리의 한 세탁부 여자의 불행한 삶에 대한 사실적이고 또 절망적인 이야기였다.

주인공인 제르베즈는 건달 같은 남자 랑티에와 함께 파리에 왔다. 하지만 랑티에는 곧 바람이 나 도망쳐버리고, 혼자서 세탁부 일을 해 힘들지만 열심히 랑티에의 아이를 키운다. 그러다 어느 날 쿠포라는 함석공이 다가온다. 그녀는 착하고 성실해 보이는 쿠포와 결혼하여 한동안 열심히 일하며 행복하게 지낸다. 하지만 지붕에서 떨어지는 큰 사고를 당한 쿠포는 사고 후 게으름에 빠져 술고래가 되고, 다시 제르베즈에게도 불행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제르베즈는 그를 좋아하는 또 다른 남자 구제의 도움으로 세탁소가 딸린 집을 마련하여 꿈꾸던 자기 세탁소를 갖게 된다. 그리고 비극은 천천히 다가왔다. 랑티에가 돌아오고, 쿠포는 완전히 술독에 빠지고, 자포자기 심정에 빠진 제르베즈는 자신의 집에 눌러살게 된 랑티에와 바람을 피우는 한편 쿠포와 마찬가지로 술에 손을 댄다. 결국 쿠포가 죽고, 랑티에는 다른 여자와 또다시 바람이 나고, 세탁소도 잃게 된 제르베즈는 비참함 속에서 초라하게 죽는다.

이렇게 적고 보니 특별할 것 없는 통속적인 이야기지만, 사실 바로 그 점이 이 소설을 위대하게 만들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가난한 여자의 전형적인 삶의 비극을 주제로 삼아 하층민의 언어와 그들의 삶을 날것 그대로 소설 속으로 가져온 것은 그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백 년이 넘게 지난 지금 읽어보아도 이 소설의 내용은 여전히 파격적으로 다가온다. 도입부의 빨래터에서의 말 그대로 두 여자의 개싸움과, 등장인물들의 거침없는 욕설들, 그리고 한 여자와 두 남자가 한집에 살면서 벌이는 불륜 행각 등, 사실적인 상황과 묘사 들은 보수적인 독자들이라면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여전히 큰 힘을 갖는다.

이 소설의 탁월한 점은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에 대해서 어떤 환상도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쓸데없는 미화도, 그렇다고 격하도 시키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 제르베즈는 성녀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런 삶을 살아 마땅한 인간쓰레기도 아니다. 그녀는 그저 불운한 삶을 타고난 나약한 인간일 뿐이다. 그런 그녀가 결국 그렇게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 그런데 그 과정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는 것, 그러니까 아주 잠깐을 제외하고 그녀의 삶이 고통으로 가득 찼고 끝까지 구원은 없었다는 것, 이렇게 이 소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삶의 광경은 사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서 더 뼈아프게 느껴진다.

바로 여기에서 나는 의문을 갖게 됐다. 현실이란, 그러니까 우리가 사는 삶이란, 우리가 삶을 견디기 위해서 갖는 환상을 걷어내면 끔찍할 뿐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냉소주의나 염세주의와 뭐가 다른가? 결국 사실주의란 염세주의의 다른 이름인가? 냉철하게 삶을 인식하는 것과, 삶에서 어떤 가능성도 보지 못하는 것의 차이는 얼마나 되는 걸까? 나이를 먹고, 삶을 이해하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냉소적으로, 혹은 염세적으로 변한다. 어떤 가능성도 믿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며, 그게 자신이 손에 얻은 단 하나의 진실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냉소주의 혹은 염세주의와, 사실 혹은 현실 사이에는 가느다란 선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소설의 비극적 결말에서 졸라가 추구했던 자연주의의 한계를 본다. 실제로 이 소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제르베즈의 성대한 생일잔치를 정점으로 플롯이 대칭적으로 상승하고 하강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대단히 인공적인 구성이다. 인간의 삶이 그렇게 대칭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은, 모든 것이 인과관계에 따라서 흘러간다는 것은, 사실 예외적인 상황이 아닐까? 그러니까 사실 이 책이 보여주는 자연주의란 진짜 현실을 보여준다기보다는 잘 구성된 현실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잘 구성된 면이 독자들을 빨아들이고, 소설이 완성도를 확보한다.

하지만 그런 작가의 선택은 최선이었는가? 리얼리즘, 사실주의, 자연주의 등으로 칭해지는 근대소설의 사조들은 사실 현실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기보다는 현실이 무엇인가에 대한 일련의 작가들의 관점과 의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실에 대한 나의 관점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는 현실은 뭐고, 어떻게 해야 그것을 소설이라는 형식 안에 담아낼 수 있는가? 현실을 담아내는 행위를 통해서, 동시에, 어떻게 현실 너머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언제나 계속되는 질문이고,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다.

김사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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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와 두 남자의 기묘한 동거

♣'목로주점'줄거리

19세기 자연주의 문학의 대표 걸작 『목로주점』은 파리 하층민의 비참한 삶을 적나라하게 묘사해 출간 당시 격렬한 찬반 양론에 휩싸인 문제작이다. 당시에는 문학적 금기에 속하는 ‘민중’을 주제로 삼은 최초의 소설로, 하층계급인 세탁부 여인을 진정한 의미의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문학의 민주화’를 이루어냈다고 평가받는다. 인물들의 대화뿐 아니라 서술 부분에까지 민중의 어휘와 말투를 도입하는 파격적인 시도로 현대적이면서 맛깔스러운 언어의 성찬을 제공해준다. 출간 3년 후에는 100쇄를 돌파해 19세기 프랑스 최초의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플로베르, 공쿠르, 투르게네프, 알퐁스 도데 등으로부터 격찬을 받은 걸작으로 1956년 르네 클레망 감독에 의해 영화화됐다.

세탁부인 제르베즈와 랑티에는 결혼도 하지 않은 처지에 두 아이를 낳아 도망치듯이 파리로 온다. 그러나 랑티에는 제르베즈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사라져버린다. 제르베즈는 다시는 남자를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아이들을 위해 부지런히 일한다. 그러나 함석공 쿠포의 끈질긴 구애에 못 이겨 결혼을 하고, 열심히 일한 덕분에 어느 정도 저축까지 하게 된다. 그러던 중 남편 쿠포가 사고로 큰 부상을 입고, 그를 치료하느라 가진 돈을 몽땅 날려버린다. 사고 후 게으름을 피우는 버릇까지 생긴 쿠포는 술독에 빠져 상황은 나날이 어려진다. 설상가상으로 제르베즈의 동네로 돌아온 옛 애인 랑티에가 쿠포를 감언이설로 꾀어 제르베즈와 쿠포의 집에 얹혀살게 되고, 이렇게 한 여자와 두 남자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는데…….

원제: L’Assommoir

저자: Emile Zola(1840~1908)

발표: 1877년

분야: 프랑스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목로주점

옮긴이: 박명숙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83, 084(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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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주의의 부자연스러움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목로란 ‘주로 선술집에서 술잔을 놓기 위해서 쓰는, 널빤지로 좁고 기다랗게 만든 상’을 의미한다. 목로주점이란 ‘목로를 차려놓고 술을 파는 집’이란 뜻이다. 굳이 목로주점의 의미를 찾아본 이유는 목로주점이라는 단어가 잘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전의 의미를 읽어봐도 잘 와 닿지가 않는다. 포장마차라거나 막걸리집이라고 한다면 조금은 더 잘 알 것 같기도 하다.


내가 왜 이렇게 제목에 대해서 주절주절 늘어놓는가 하면 이 한문으로 된 고풍스러운 네 글자 이름이 실제 소설을 읽었을 때의 느낌과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제목과 작가의 이름만 봤을 때 이 소설이 이런 내용일 거라고 상상하지 못했다. 어렴풋이 그저 술집에서 벌어지는 무슨 일이겠거니 했다. 하지만 사실은 파리의 한 세탁부 여자의 불행한 삶에 대한 사실적이고 또 절망적인 이야기였다.

주인공인 제르베즈는 건달 같은 남자 랑티에와 함께 파리에 왔다. 하지만 랑티에는 곧 바람이 나 도망쳐버리고, 혼자서 세탁부 일을 해 힘들지만 열심히 랑티에의 아이를 키운다. 그러다 어느 날 쿠포라는 함석공이 다가온다. 그녀는 착하고 성실해 보이는 쿠포와 결혼하여 한동안 열심히 일하며 행복하게 지낸다. 하지만 지붕에서 떨어지는 큰 사고를 당한 쿠포는 사고 후 게으름에 빠져 술고래가 되고, 다시 제르베즈에게도 불행이 다가오기 시작한다. 하지만 제르베즈는 그를 좋아하는 또 다른 남자 구제의 도움으로 세탁소가 딸린 집을 마련하여 꿈꾸던 자기 세탁소를 갖게 된다. 그리고 비극은 천천히 다가왔다. 랑티에가 돌아오고, 쿠포는 완전히 술독에 빠지고, 자포자기 심정에 빠진 제르베즈는 자신의 집에 눌러살게 된 랑티에와 바람을 피우는 한편 쿠포와 마찬가지로 술에 손을 댄다. 결국 쿠포가 죽고, 랑티에는 다른 여자와 또다시 바람이 나고, 세탁소도 잃게 된 제르베즈는 비참함 속에서 초라하게 죽는다.

이렇게 적고 보니 특별할 것 없는 통속적인 이야기지만, 사실 바로 그 점이 이 소설을 위대하게 만들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가난한 여자의 전형적인 삶의 비극을 주제로 삼아 하층민의 언어와 그들의 삶을 날것 그대로 소설 속으로 가져온 것은 그전에는 없었던 일이다. 백 년이 넘게 지난 지금 읽어보아도 이 소설의 내용은 여전히 파격적으로 다가온다. 도입부의 빨래터에서의 말 그대로 두 여자의 개싸움과, 등장인물들의 거침없는 욕설들, 그리고 한 여자와 두 남자가 한집에 살면서 벌이는 불륜 행각 등, 사실적인 상황과 묘사 들은 보수적인 독자들이라면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들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여전히 큰 힘을 갖는다.

이 소설의 탁월한 점은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에 대해서 어떤 환상도 갖지 않는다는 점이다. 쓸데없는 미화도, 그렇다고 격하도 시키지 않는다. 소설 속에서 제르베즈는 성녀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런 삶을 살아 마땅한 인간쓰레기도 아니다. 그녀는 그저 불운한 삶을 타고난 나약한 인간일 뿐이다. 그런 그녀가 결국 그렇게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 그런데 그 과정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웠다는 것, 그러니까 아주 잠깐을 제외하고 그녀의 삶이 고통으로 가득 찼고 끝까지 구원은 없었다는 것, 이렇게 이 소설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삶의 광경은 사실 우리가 다 알고 있는 것이긴 하지만 그래서 더 뼈아프게 느껴진다.

바로 여기에서 나는 의문을 갖게 됐다. 현실이란, 그러니까 우리가 사는 삶이란, 우리가 삶을 견디기 위해서 갖는 환상을 걷어내면 끔찍할 뿐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냉소주의나 염세주의와 뭐가 다른가? 결국 사실주의란 염세주의의 다른 이름인가? 냉철하게 삶을 인식하는 것과, 삶에서 어떤 가능성도 보지 못하는 것의 차이는 얼마나 되는 걸까? 나이를 먹고, 삶을 이해하게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냉소적으로, 혹은 염세적으로 변한다. 어떤 가능성도 믿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며, 그게 자신이 손에 얻은 단 하나의 진실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냉소주의 혹은 염세주의와, 사실 혹은 현실 사이에는 가느다란 선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소설의 비극적 결말에서 졸라가 추구했던 자연주의의 한계를 본다. 실제로 이 소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제르베즈의 성대한 생일잔치를 정점으로 플롯이 대칭적으로 상승하고 하강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대단히 인공적인 구성이다. 인간의 삶이 그렇게 대칭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은, 모든 것이 인과관계에 따라서 흘러간다는 것은, 사실 예외적인 상황이 아닐까? 그러니까 사실 이 책이 보여주는 자연주의란 진짜 현실을 보여준다기보다는 잘 구성된 현실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잘 구성된 면이 독자들을 빨아들이고, 소설이 완성도를 확보한다.

하지만 그런 작가의 선택은 최선이었는가? 리얼리즘, 사실주의, 자연주의 등으로 칭해지는 근대소설의 사조들은 사실 현실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기보다는 현실이 무엇인가에 대한 일련의 작가들의 관점과 의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실에 대한 나의 관점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는 현실은 뭐고, 어떻게 해야 그것을 소설이라는 형식 안에 담아낼 수 있는가? 현실을 담아내는 행위를 통해서, 동시에, 어떻게 현실 너머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은 언제나 계속되는 질문이고, 여전히 해결되지 못한 채로 남아 있다.

김사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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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자와 두 남자의 기묘한 동거

♣'목로주점'줄거리

19세기 자연주의 문학의 대표 걸작 『목로주점』은 파리 하층민의 비참한 삶을 적나라하게 묘사해 출간 당시 격렬한 찬반 양론에 휩싸인 문제작이다. 당시에는 문학적 금기에 속하는 ‘민중’을 주제로 삼은 최초의 소설로, 하층계급인 세탁부 여인을 진정한 의미의 주인공으로 내세움으로써 ‘문학의 민주화’를 이루어냈다고 평가받는다. 인물들의 대화뿐 아니라 서술 부분에까지 민중의 어휘와 말투를 도입하는 파격적인 시도로 현대적이면서 맛깔스러운 언어의 성찬을 제공해준다. 출간 3년 후에는 100쇄를 돌파해 19세기 프랑스 최초의 베스트셀러로 등극했다. 플로베르, 공쿠르, 투르게네프, 알퐁스 도데 등으로부터 격찬을 받은 걸작으로 1956년 르네 클레망 감독에 의해 영화화됐다.

세탁부인 제르베즈와 랑티에는 결혼도 하지 않은 처지에 두 아이를 낳아 도망치듯이 파리로 온다. 그러나 랑티에는 제르베즈를 버리고 다른 여자와 사라져버린다. 제르베즈는 다시는 남자를 만나지 않겠다고 다짐하고 아이들을 위해 부지런히 일한다. 그러나 함석공 쿠포의 끈질긴 구애에 못 이겨 결혼을 하고, 열심히 일한 덕분에 어느 정도 저축까지 하게 된다. 그러던 중 남편 쿠포가 사고로 큰 부상을 입고, 그를 치료하느라 가진 돈을 몽땅 날려버린다. 사고 후 게으름을 피우는 버릇까지 생긴 쿠포는 술독에 빠져 상황은 나날이 어려진다. 설상가상으로 제르베즈의 동네로 돌아온 옛 애인 랑티에가 쿠포를 감언이설로 꾀어 제르베즈와 쿠포의 집에 얹혀살게 되고, 이렇게 한 여자와 두 남자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는데…….

원제: L’Assommoir

저자: Emile Zola(1840~1908)

발표: 1877년

분야: 프랑스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목로주점

옮긴이: 박명숙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83, 084(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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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줍기》 - 장-프랑스와 밀레





《만종》 - 장-프랑스와 밀레



《마드모아젤 리비에르》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터키 목욕탕》 -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오달리스크》 -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1830년 7월 28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 외젠느 들라크르와



 


《알제리의 여인들》 - 외젠느 들라크르와




《사르다나팔르의 죽음》 - 외젠느 들라크르와





《파이톤을 물리치는 아폴로》 - 외젠느 들라크르와





《미친 여자》 - 테오도르 제리코




 
《메두사의 뗏목》 - 테오도르 제리코





《단테와 버질 앞에 나타난 파올로와 프란체스카의 혼백》 - 아리 셰페르

 



《베르탱 씨의 초상》 -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





《가난한 어부》 - 피에르 퓌비 드 샤반느




《영국 엘리자베스 1세의 죽음》 - 폴 들라로슈





《모르트퐁텐느의 추억》 - 장-밥티스트 카미유 코로





《푸른 옷의 여인》 - 장-밥티스트 카미유 코로





《공화국》 - 오노레 도미에





《오르페우스》 - 귀스타브 모로



 



《폭풍이 지나간 뒤의 에트르타 벼랑》 - 귀스타브 쿠르베




《화실》 - 귀스타브 쿠르베



 
《부상자》 - 귀스타브 쿠르베


출처: 다음카페 한국 네티즌본부/ 원본글: http://cgfa.sunsite.dk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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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 슬픔의 식민지

이 소설의 원제목은 ‘아니말 트리스테(animal triste)’다. 독일 작가의 독일어 소설이지만 이 단어들은 독일어가 아니라 라틴어다. 나는 라틴어를 모르지만 이 두 단어가 들어 있는 오래된 관용구 하나를 알고 있다. ‘옴네 아니말 트리스테 포스트 코이툼(omne animal triste post coitum).’ 즉 ‘모든 짐승은 교미를 끝낸 후에는 슬프다.’ 혹은 더 리듬감을 살려 ‘post coitum, animal triste’라고 쓰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짐승의 보편적인 진실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짐승만의 특수한 진실이라는 듯이 ‘섹스가 끝나면 인간은 슬프다’로 번역하기도 한다. 모니카 마론이 저 관용구를 염두에 두고 제목을 정한 것인지 아닌지 나는 모른다. 다만 이 소설이, 중년의 나이에 짧은 기간 섬광 같은 사랑을 나눈 이후(post coitum), 수십 년의 세월을 그 사랑만을 추억하며 살다 육체와 정신의 모든 부분이 슬픔에 점령당해 식민지가 돼 버린 한 여자(animal triste)의 이야기라는 것은 안다.


그녀는 제 나이를 모른다. 아마 백 살쯤 된 것 같다고 스스로 짐작할 따름이다. 40~50년을 죽은 듯이 살아왔고 모든 기억이 희미해졌다. 정확하진 않지만, 결혼을 했고 남편과 20년을 살았으며 딸 하나를 키웠던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원인 모를 발작 증세를 경험했고 그날 이후로 질서정연하던 삶에 균열들이 생겨났다. 그때 그녀는 자문했다. 만일 그날의 발작으로 내가 죽었다면 나는 내 인생에서 무엇을 놓쳤다고 생각했을까 하고.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사랑밖에 없다. 그것이 대답이었고, 그 문장을 마침내 말로 꺼내 얘기하기 오래 전부터 이미 나는 그 대답을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그로부터 1년 뒤에 그녀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된다. 베를린 자연사박물관에서 일하던 그녀가, 여느 때처럼 거대한 공룡 브라키오사우루스의 뼈대 모형을 예배를 드리듯 쳐다보고 있을 때 한 남자가 말을 건다. “아름다운 동물이군요.” 그녀는 “마치 신탁을 받은 것처럼” 충격을 받는다. 이 남자는 내 존재의 결락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인 것 같다. “그렇죠, 아름다운 동물이죠.” 그녀가 대답한 순간 그녀의 삶에는 지금껏 들어본 적이 없는 아름다운 음악이 울려 퍼진다.

그날 이후로 두 남녀는 각자의 가족이 있었지만, 사랑에 빠진다. “나는 사랑이 안으로 침입하는 것인지 밖으로 터져나오는 것인지조차 아직 알지 못한다.” 사랑은 바이러스처럼 침입해서 나를 점령해버리는 것인가, 아니면 죄수처럼 갇혀 있다가 나라는 감옥을 뚫고 나오는 것인가. 그녀는 자신의 경우는 후자라고 생각한다. 그 남자, 프란츠(그녀는 그 남자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한다, 그냥 프란츠라고 부를 뿐이다)를 만나면서 그녀의 사랑은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프란츠는 어느 날 가족에게로 되돌아간다. 그날 이후로 그녀의 삶은 멈췄다. 사십년 혹은 오십년. 그를 기다리는 일 외에는 어떠한 일도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실천했다. 대신 그녀는 이런 일들을 했다. 그가 남기고 간 안경을 몇 년 동안 끼고 살아서 자신의 눈을 망가뜨리기. “그것이 그의 곁에 머물 수 있는 마지막 가능성이었다.” 혹은 마지막으로 함께 누운 침대 시트를 빨지 않고 보관해 두었다가 가끔 꺼내서 펼쳐 보기.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 있는 아름다운 내 연인의 정액 흔적”을 다시 보기 위해서.

이상의 내용은 이 소설의 첫 번째 챕터가 들려준 것들을 정리한 것이다. 1년 전 일이니 분명히 기억난다. 고작 20쪽 남짓인 이 첫 챕터를 나는 몇 번에 걸쳐 쉬어가며 읽어야 했다. 심장이 세차게 뛰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쪽을 다 읽고 나서, 이것이야말로 내가 늘 기다리고 찾고 꿈꾸는, 바로 그런 종류의 소설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딘가에도 썼지만 ‘자신에게 전부인 하나를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나는 당해내질 못한다. 뿐인가. 이 소설에서 여자와 남자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그 해에 만난다. 여자는 동독 출신, 남자는 서독 출신이다. 두 사람의 짧은 사랑과 영원한 이별의 서사는 통일 이후 독일 사회에서 새로운 국면으로 다시 나타난 동서 갈등의 양상과 맞물려 있다. 동독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모니카 마론은 서독으로 이주한 지 1년 만에 통일을 맞았다. 그런 그녀여서 쓸 수 있었던 이야기다. 나는 우리 내면의 모든 것이 역사라는 변수에 완전히 종속돼 있다고 단언하는 난폭한 역사주의자가 될 생각은 전혀 없지만, 소설이 개인의 삶을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 더 위대해질 가능성이 높다는 현명한 생각에는 동의한다.

한편으로는 지독한 사랑과 참혹한 애도의 서사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통일 독일의 섬세한 스케치인 이 소설을 모니카 마론은 최상의 산문 문장으로 끌고 나간다. 그녀의 문장을 읽는 일을 꿈을 꾸는 일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 꿈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한없이 눈물을 흘리다가 탈진한 상태로 깨어나서는 한 참을 더 울게 되는, 그런 꿈이다.

모니카 마론의 문장을 읽는 일을 잠드는 일에 비유할 수 있다면 그 잠은, 탈진한 상태로 깨어나서 한 참을 더 울다가 사랑하는 사람의 품에 안겨 그 슬픔이 달콤한 안도감으로 서서히 바뀌는 것을 느끼는 순간 다시 찾아오는, 그런 잠이다.

신형철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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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독 출신 남녀의 격정적 사랑과 집착

♣'슬픈 짐승' 줄거리

현대 독일 문단을 대표하는 여성 작가 모니카 마론이 1996년에 쓴 『슬픈 짐승』은 독일 통일 직후의 베를린을 배경으로 서독, 동독 출신의 두 남녀가 겪는 격정적인 사랑과 집착을 그린 소설이다. 옛동독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뤘던 이전 작품들과 달리 사랑과 열정이라는 모티브를 전면에 내세워 작가의 문학 세계에서 새로운 전환점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1996년 독일국가상을 수상했다.

모니카 마론은 『슬픈 짐승』에서 개인의 삶과 사회 전체에 엄청난 충격과 변화를 가져왔던 ‘독일 통일’이라는 소재와 ‘사랑’이라는 주제를 짜임새 있게 결합시킨다. 주인공 ‘나’의 회상 속에서 개인, 주변 사람들, 독일의 역사는 교묘하게 짜이고 조화를 이룬다. 한 여인의 지독한 사랑을 그린 이 작품은 ‘기이한 시대’라고 지칭되었던 구동독이 사라진 후에도 그 시대와 결별하지 못한 사람들의 욕망과 슬픔을 성숙하고 강렬한 문체로 형상화한다.

주인공 ‘나’는 어느 날 길을 걷다 갑자기 발작을 일으키고 끔찍한 혼돈을 경험한다. 죽음 직전까지 갔던 이 사건으로 ‘나’는 인생을 돌아볼 계기를 갖게 되고, ‘만일 정말로 그때 죽었다면 내가 놓쳤던 것이 무엇이었을까?’라는 문제에 대해 깊이 고민해본 끝에 인생에서 놓쳐서 아쉬운 것은 사랑밖에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리고 1년쯤 뒤 우연히 ‘프란츠’를 만난 ‘나’는 그가 인생에서 놓쳐서는 안 될 사랑임을 깨닫는다. ‘나’는 모든 것을 버리고 프란츠와의 사랑에 미친 듯이 집착하기 시작한다…….

 

원제: Animal triste

저자: Monika Maron(1941~)

발표: 1996년

분야: 독일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슬픈 짐승

옮긴이: 김미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29(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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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놈의 학교가 다 있네?


좋은 소설이란 무엇일까?

나는 이 질문의 답은 알 수 없지만 나만의 행동 양식 하나는 갖고 있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한 번만 읽어도 그만인 소설은 습기 찬 방구석에 멀찍이 놔두고, 한 번 더 읽어야만 할 것 같은 소설은 내 손이 가장 잘 닿는 곳인, 노트북 뒤에 탑처럼 쌓아두는 것이다. ‘한 번 더 읽어야만 하는’ 소설책은 공통점들을 갖고 있다. 밑줄이 쫙쫙 그어져 있거나, 그걸로도 모자라면 큼지막한 별이 밑줄 옆에 꼬리처럼 달려 있거나,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싶으면 제법 중요한 페이지의 귀퉁이가 야무지게 접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개 그런 책들은 피둥피둥 살이 쪄 있고, 연필심이 번져 엉망진창이다. ‘엉망진창’은 내가 그 책을 흠모하는 방식이자 좋아한다는 우회적 표현이다. 나는 글을 쓰다 문장이 막히거나 막연히 뭔가가 읽고 싶어질 때면 몰래 그중 한 권을 빼들고서 아무 페이지나 펼쳐 염탐하듯 문장과 이야기를 읽고 또 만져본다. 그러면 어김없이 이런 생각이 찾아든다. 이야기와 문장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그것은 내가 몇 권의 책을 냈음에도 아직 풀지 못한 문제이고, 앞으로 몇 권의 책을 더 낸다 해도 풀지 못할 것만 같은 탄생의 비밀이다. 내겐 불길한 예감이다. 이 책은 내 노트북 뒤에 놓여 있는 몇 권 되지 않은 책 중의 하나다.『벤야멘타 하인학교』, 다소 비현실적인 느낌이 나는 제목의 소설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여기서 배우는 것이 거의 없다. 가르치는 교사들도 없다. 우리들, 벤야멘타 학원의 생도들에게 배움 따위는 어차피 아무 쓸모도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훗날 아주 미미한 존재, 누군가에게 예속된 존재로 살아갈 거라는 뜻이다. 우리가 받는 수업은 우리에게 인내와 복종을 각인시키는 데 가장 큰 의의를 둔다.

흥미롭고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나는 첫 문장부터 밑줄을 긋는 수고를 해야 했고, 그 문장은 제목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는 한편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에 대한 믿음과 흥분을 주었다. 물론 그 믿음과 흥분은 마지막 페이지를 읽을 때까지 한 번도 꺾이지 않았음을 말해둔다. 괜히 고전이 아닌 것이다. 다른 고전들에 비해 얇은 책임에도 두 권 분량의 책을 읽을 때만큼의 시간이 필요한 책. 이런 책을 나는 사랑하기도 하고, 시기하기도 하며, 두려워하기도 한다. 물론 그런 소설을 쓰는 건 나의 사사로운 로망이기도 하다.

나는 가끔 고질병인 귀차니즘이 찾아들 때면 몸종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조선시대에 살아 양반의 신분으로 태어났다면 내게도 몸종이 있겠지. 그 몸종은 내게 세끼 밥을 대령하고 머리를 감겨주고 무거운 짐을 들어주겠지. 그리고 무조건 내 명령에 복종하겠지. 하지만 그 상상에서 역할이 뒤바뀌어 내가 몸종으로 태어난다면 편안한 상상은 순식간에 악몽이 되고 만다. 누구도 하인의 삶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이상해 보이는 하인학교가 있고, 하인이 되고 싶어 제 발로 그 학교로 찾아들어간 그보다 더 이상해 보이는 야콥이란 귀족 태생의 소년이 있다. 바닥까지 알고자 하는 별난 에너지,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 작게 존재하고 작게 머무는 것. 이런 야콥의 이야기를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이란 본능적으로 성난 황소처럼 욕망이란 빨간색 천을 향해 돌진하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욕망이란 진흙으로 빚어진 애처로운 동물이 아닌가. 그러나 책을 읽어가면서 알게 되었다. 하찮고 미미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야콥의 이야기는 결코 하찮지 않은 문장과 상상력으로 버무려져 있었다는 것과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하찮고 미미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하인과 노예의 습성인 인내, 복종, 규율이 아닌, 그리고 주인의 습성인 권력과 지배도 아닌 ‘자유’를 말하고 싶었으리라. 그 또한 인간의 거대한 욕망일 테니까.

자, 이제부터 나는 이 소설을 읽을 때 당신이 무심코 하게 될 행동과 생각 매뉴얼을 제시해보려고 한다.

1. 당신은 첫 문장을 읽자마자 자세를 고쳐 앉거나, 어디선가 슬그머니 연필을 집어들게 될 것이다.

2. 간혹 키득, 하고 웃기도 할 것이다.

3. 그러면서 하인을 양성하는 학교가 역사적으로 정말 있었을까 의심하게 될 것이다.

4. 조금 지나면 읽기를 멈추고 앞날개를 펼쳐 작가의 탄생연도를 확인하려 할 것이다.

5. 소설의 마지막 장을 읽고 나서는 ‘사막’을 걷는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소 지을 것이다.

6. 그러고 책을 완전히 덮은 당신은 뒤표지에 적힌 ‘프란츠 카프카가 사랑한 작가’라는 큼지막한 문구에 고개를 두 번 정도 끄덕이게 될 것이다.

7. 끝으로 당신은 그의 다른 작품이 궁금해 인터넷 서점 검색창에 ‘로베르트 발저’라고 입력하게 될 것이다.

8. 만약 번역된 작품이 있다면 다행이라 여길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아쉬워하다 하루 속히 번역되어 나오길 간절히 바라게 될 것이다.

이로써 당신은 나의 최면에 걸려들었다. 그러니 이제 책을 펼쳐라. 그리고 천천히 읽기 시작하라. 레드 썬!

장은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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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학교 찾아가는 귀족 태생의 소년

♣'벤야멘타 하인학교…'줄거리

독일 문학사의 불가해한 신화로 평가받는 로베르트 발저의 대표작이다. 헤르만 헤세는 “로베르트 발저의 책을 수십만, 수백만의 사람이 읽었다면 세상은 보다 나은 곳이 되었을 것이다”고 평했고, 프란츠 카프카, 발터 벤야민 등의 작가들이 로베르트 발저를 격찬했으나, 1956년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작가로서 명성을 누리지 못하고 일생을 철저히 아웃사이더로 살았다.

스위스의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던 발저는 고등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떠돌며 하인, 도서관 사서, 비서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글을 썼다. 종이를 살 수 없을 만큼 가난해 글을 쓸 수 있는 흰 종이만 발견하면 그 위에 아주 작은 글씨로 글을 썼다. 종이를 아끼기 위해 글씨를 최대한 작게 썼기 때문에 그의 글은 오랫동안 해독할 수 없는 비밀암호처럼 여겨졌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이르러 미세하고 아름다웠던 그의 필체가 비로소 해독되고, 이에 그의 작품에 대해 새롭게 해석이 이루어지면서 스위스에서 국민작가 반열에 오르게 된다.

발저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작품인『벤야멘타 하인학교―야콥 폰 군텐 이야기』는 귀족 태생의 소년이 ‘가장 작은 존재, 가장 미미한 존재’가 되기 위해 하인 양성학교에 스스로 찾아간다는 ‘반(反) 영웅적’ 이야기이다. 인간의 의식과 생활을 지배하는 ‘돈’과 ‘권력’의 구속력, 개인을 집단사고의 노예로 훈련시키는 매스미디어의 횡포, 규격에 맞는 삶 이외의 대안에 인색한 획일주의적 발전 논리들에 대한 비판으로서, 성장과 발전으로 대변되는 서양 근대 담론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문제작이다.

 

원제: Jakob von Gunten

저자: Robert Walser(1878~1956)

발표: 1909년

분야: 스위스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벤야멘타 하인학교-야콥 폰 군텐 이야기

옮긴이: 홍길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16(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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