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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와 소설의 경계가 만들어내는 미학적 심연

 

 

1984년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에게 ‘엘리아스 카네티 문학상’ 수상의 영광을 안겨준 《빙하와 어둠의 공포》는 북극 탐험대를 소재로 한 소설이다. 내가 이 소설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라인홀트 메스너의 고비사막 횡단 체험기인 《내 안의 사막, 고비를 건너다》를 읽으면서였다. 메스너는 이 책에서 “북극지방에 대한 수많은 책들을 샅샅이 뒤졌지만 《빙하와 어둠의 공포》만큼 나를 전율케 한 책은 없었다”고 썼다.

메스너는 히말라야 14좌를 최초로 완등한 전설적 산악인이다. 그린란드, 티베트, 남극도 횡단했다. 그동안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그런 메스너를 전율시킨 소설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빙하와 어둠의 공포》는 란스마이어가 오스트리아-헝가리 북극 탐험대 생존자들이 1872년부터 1874년까지 2년에 걸친 체험을 기록하고 스케치한 것에 영감을 받아 쓴 소설이다. 소설의 화자(話者)는 ‘나’이다. 그러니까 1인칭 소설이다. 《빙하와 어둠의 공포》는 ‘나’를 주인공으로 하지 않고, ‘나’가 주인공을 관찰하는 이른바 1인칭 관찰자 시점을 택했다. 그런데 ‘나’가 관찰하는 이는 죽은 사람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죽은 사람이 남긴 기록이다. 죽은 사람의 이름은 요제프 마치니다.

1948년 이탈리아 북동부 도시 트리에스테에서 태어난 마치니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에게 옛날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다. 마치니에게 가장 매혹적인 이야기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북극 탐험대원 가운데 한 사람인 어머니의 증조부 안토니오 스카르파에 관한 이야기였다. 마치니의 북극에 대한 환상은 여기에서 피어났다.

청년으로 성장한 마치니는 이야기꾼이 되었다. 화자인 ‘나’가 이야기꾼 마치니를 만난 곳은 종족의 역사와 여행 관련 서적을 전문으로 하는 책방이었다. 마치니는 ‘나’에게 ‘과거를 새롭게 그려내는 존재’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내가 상상하는 것들은 언젠가는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나’의 눈에 비친 마치니는 자신의 머리에서 나온 이야기를 현실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다고 믿고 있으며, 그 믿음이 깊어질수록 이야기의 배경을 사람들이 살지 않는 황량한 자연과 북극의 오지로 옮겨가는 몽상적 존재였다.

당시 마치니가 열광적으로 몰두한 과거 이야기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북극 탐험대 생존자들의 탐험 기록이었다. 생존자들의 탐험 기록은 마치니에게는 꿈의 기록이었다. 문제는 꿈속의 사물과 배경들이 꿈에서 깨어나면 흐릿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분명해지고 손에 만져지는 데 있었다. 마치니는 탐험 기록에 빠져들면 들수록 과거의 이야기인 그 기록을 현실로 바꾸고 싶은 욕망에 시달린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치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북극 탐험대의 루트를 따라 항해하는 연구용 배에 오르지만 계획이 실패하자 홀로 북극의 심연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버린 것이다.

《빙하와 어둠의 공포》는 화자인 ‘나’가 사라져버린 마치니가 남긴 기록을 독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마치니가 남긴 기록은 오스트리아-헝가리 북극 탐험대 생존자들의 탐험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따라서 《빙하와 어둠의 공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북극 탐험대 생존자들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생존자들이 기록한 이야기를 그대로 쓰면 르포가 된다. 작가는 허구의 인물인 마치니를 창조하여 《빙하와 어둠의 공포》를 르포에서 소설로 변화시켰다. 이 소설의 형식이 미학적인 까닭은 마치니를 관찰하는 ‘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의 존재는 매일, 점점 더 눈에 띄지 않고 흔적이 없어져가는 듯이 보였다…… 정리된 삶의 따뜻한 편안함에서 정적, 추위, 얼음으로 내모는 그 유혹적인 힘에 대한 증거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동안 1인칭 소설을 많이 읽었지만 《빙하와 어둠의 공포》에 등장하는 ‘나’처럼 희귀한 존재는 처음 보았다. 아무리 1인칭 관찰자 시점이라 할지라도 ‘나’의 존재감은 독자에게 명료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나’는 존재감이 너무 희박해 유령처럼 느껴진다. 그에 비하면 몽상적 존재인 마치니의 존재감은 훨씬 명료하다. 마치니보다 더 명료한 존재가 100여 년 전에 사라져버린 오스트리아-헝가리 북극 탐험대원들이다. 이 소설의 미학적 바탕은 여기에 있다.

독자인 나의 시선으로 보면 소설의 화자인 ‘나’는 작가 란스마이어의 분신으로, 마치니는 란스마이어가 희구하는 ‘내 속의 나’로 비친다. 소설은 작가가 꾸며낸 이야기다. 소설가는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가 독자에게 ‘진짜’처럼 느껴지는 것을 꿈꾼다. ‘나’가 이야기를 꾸며내는 소설가라면, 마치니는 꾸며낸 이야기를 현실로 바꾸어버리는 존재다. 《빙하와 어둠의 공포》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소설가의 은밀한 욕망을 그려낸 미묘한 소설이다. 처음 읽으면 건조한 기록물처럼 느껴지나, 두 번째 읽으면 탐험의 대상인 북극이 자연(우주)의 심연 더 나아가 인간의 심연으로 의미가 확장되면서 작가의 은밀한 욕망을 치밀하게 녹여낸 ‘깊은 소설’임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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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로 떠난 탐험대를  뒤좇는 청년

♣'빙하와 어둠의 공포'줄거리


오스트리아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는 1954년 벨스에서 태어났다. 기자로 일하며 각종 잡지의 자유기고가와 르포 작가로 활동한 경력은 작품에 현장성을 부여하는 란스마이어 특유의 문학 세계를 형성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첫 작품 《찬란한 종말》 발표 이후 1984년 《빙하와 어둠의 공포》를 발표하며 소설가로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를 소재로 한 《최후의 세계》를 통해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거대한 자연의 파괴력과 극한의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능을 파고드는 작품을 발표하며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하는 동시에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한 작가로 자리매김했고, 최근까지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빙하와 어둠의 공포》는 미지의 영역을 정복하기 위해 떠난 탐험대와 그 궤적을 뒤좇다 사라진 청년의 이야기, 그 청년의 노트 발견을 계기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화자의 내레이션이 다층적 구조를 이루는 작품이다. 1872년 지휘관 파이어와 바이프레히트를 주축으로 두 명의 장교, 의사, 빙하 전문가, 기관사, 사냥꾼 등 총 24명으로 구성된 북극 탐험대가 노르웨이의 트롬쇠항을 출발한다. 하지만 그들을 실은 테게트호프호는 출발한 지 14일 만에 얼어붙은 바다 한가운데 갇히고, 2년간 이어진 전대미문의 탐험이 시작된다. 이 작품은 허구와 현실을 절묘하게 넘나들며 ‘뛰어난 예술적 구성’을 이루어냈다는 평가를 받았고, 엘리아스 카네티 문학상을 수상했다.

원제: Die Schrecken des Eises und Finstereis

저자: Christoph Ransmayr

발표: 1984년

분야: 오스트리아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빙하와 어둠의 공포

옮긴이: 진일상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74(2011년)




1984년 오스트리아의 소설가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에게 ‘엘리아스 카네티 문학상’ 수상의 영광을 안겨준 《빙하와 어둠의 공포》는 북극 탐험대를 소재로 한 소설이다. 내가 이 소설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라인홀트 메스너의 고비사막 횡단 체험기인 《내 안의 사막, 고비를 건너다》를 읽으면서였다. 메스너는 이 책에서 “북극지방에 대한 수많은 책들을 샅샅이 뒤졌지만 《빙하와 어둠의 공포》만큼 나를 전율케 한 책은 없었다”고 썼다.

메스너는 히말라야 14좌를 최초로 완등한 전설적 산악인이다. 그린란드, 티베트, 남극도 횡단했다. 그동안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다. 그런 메스너를 전율시킨 소설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빙하와 어둠의 공포》는 란스마이어가 오스트리아-헝가리 북극 탐험대 생존자들이 1872년부터 1874년까지 2년에 걸친 체험을 기록하고 스케치한 것에 영감을 받아 쓴 소설이다. 소설의 화자(話者)는 ‘나’이다. 그러니까 1인칭 소설이다. 《빙하와 어둠의 공포》는 ‘나’를 주인공으로 하지 않고, ‘나’가 주인공을 관찰하는 이른바 1인칭 관찰자 시점을 택했다. 그런데 ‘나’가 관찰하는 이는 죽은 사람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죽은 사람이 남긴 기록이다. 죽은 사람의 이름은 요제프 마치니다.

1948년 이탈리아 북동부 도시 트리에스테에서 태어난 마치니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에게 옛날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랐다. 마치니에게 가장 매혹적인 이야기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북극 탐험대원 가운데 한 사람인 어머니의 증조부 안토니오 스카르파에 관한 이야기였다. 마치니의 북극에 대한 환상은 여기에서 피어났다.

청년으로 성장한 마치니는 이야기꾼이 되었다. 화자인 ‘나’가 이야기꾼 마치니를 만난 곳은 종족의 역사와 여행 관련 서적을 전문으로 하는 책방이었다. 마치니는 ‘나’에게 ‘과거를 새롭게 그려내는 존재’라고 자신을 소개하면서 “내가 상상하는 것들은 언젠가는 일어날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나’의 눈에 비친 마치니는 자신의 머리에서 나온 이야기를 현실에서 다시 발견할 수 있다고 믿고 있으며, 그 믿음이 깊어질수록 이야기의 배경을 사람들이 살지 않는 황량한 자연과 북극의 오지로 옮겨가는 몽상적 존재였다.

당시 마치니가 열광적으로 몰두한 과거 이야기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북극 탐험대 생존자들의 탐험 기록이었다. 생존자들의 탐험 기록은 마치니에게는 꿈의 기록이었다. 문제는 꿈속의 사물과 배경들이 꿈에서 깨어나면 흐릿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분명해지고 손에 만져지는 데 있었다. 마치니는 탐험 기록에 빠져들면 들수록 과거의 이야기인 그 기록을 현실로 바꾸고 싶은 욕망에 시달린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치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북극 탐험대의 루트를 따라 항해하는 연구용 배에 오르지만 계획이 실패하자 홀로 북극의 심연 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자신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버린 것이다.

《빙하와 어둠의 공포》는 화자인 ‘나’가 사라져버린 마치니가 남긴 기록을 독자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마치니가 남긴 기록은 오스트리아-헝가리 북극 탐험대 생존자들의 탐험기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따라서 《빙하와 어둠의 공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북극 탐험대 생존자들의 이야기라 할 수 있다. 생존자들이 기록한 이야기를 그대로 쓰면 르포가 된다. 작가는 허구의 인물인 마치니를 창조하여 《빙하와 어둠의 공포》를 르포에서 소설로 변화시켰다. 이 소설의 형식이 미학적인 까닭은 마치니를 관찰하는 ‘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의 존재는 매일, 점점 더 눈에 띄지 않고 흔적이 없어져가는 듯이 보였다…… 정리된 삶의 따뜻한 편안함에서 정적, 추위, 얼음으로 내모는 그 유혹적인 힘에 대한 증거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동안 1인칭 소설을 많이 읽었지만 《빙하와 어둠의 공포》에 등장하는 ‘나’처럼 희귀한 존재는 처음 보았다. 아무리 1인칭 관찰자 시점이라 할지라도 ‘나’의 존재감은 독자에게 명료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나’는 존재감이 너무 희박해 유령처럼 느껴진다. 그에 비하면 몽상적 존재인 마치니의 존재감은 훨씬 명료하다. 마치니보다 더 명료한 존재가 100여 년 전에 사라져버린 오스트리아-헝가리 북극 탐험대원들이다. 이 소설의 미학적 바탕은 여기에 있다.

독자인 나의 시선으로 보면 소설의 화자인 ‘나’는 작가 란스마이어의 분신으로, 마치니는 란스마이어가 희구하는 ‘내 속의 나’로 비친다. 소설은 작가가 꾸며낸 이야기다. 소설가는 자신이 꾸며낸 이야기가 독자에게 ‘진짜’처럼 느껴지는 것을 꿈꾼다. ‘나’가 이야기를 꾸며내는 소설가라면, 마치니는 꾸며낸 이야기를 현실로 바꾸어버리는 존재다. 《빙하와 어둠의 공포》는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소설가의 은밀한 욕망을 그려낸 미묘한 소설이다. 처음 읽으면 건조한 기록물처럼 느껴지나, 두 번째 읽으면 탐험의 대상인 북극이 자연(우주)의 심연 더 나아가 인간의 심연으로 의미가 확장되면서 작가의 은밀한 욕망을 치밀하게 녹여낸 ‘깊은 소설’임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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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로 떠난 탐험대를  뒤좇는 청년

♣'빙하와 어둠의 공포'줄거리


오스트리아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크리스토프 란스마이어는 1954년 벨스에서 태어났다. 기자로 일하며 각종 잡지의 자유기고가와 르포 작가로 활동한 경력은 작품에 현장성을 부여하는 란스마이어 특유의 문학 세계를 형성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첫 작품 《찬란한 종말》 발표 이후 1984년 《빙하와 어둠의 공포》를 발표하며 소설가로서 주목받기 시작했고,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를 소재로 한 《최후의 세계》를 통해 세계적인 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거대한 자연의 파괴력과 극한의 상황에서 드러나는 인간의 본능을 파고드는 작품을 발표하며 독자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하는 동시에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한 작가로 자리매김했고, 최근까지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빙하와 어둠의 공포》는 미지의 영역을 정복하기 위해 떠난 탐험대와 그 궤적을 뒤좇다 사라진 청년의 이야기, 그 청년의 노트 발견을 계기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화자의 내레이션이 다층적 구조를 이루는 작품이다. 1872년 지휘관 파이어와 바이프레히트를 주축으로 두 명의 장교, 의사, 빙하 전문가, 기관사, 사냥꾼 등 총 24명으로 구성된 북극 탐험대가 노르웨이의 트롬쇠항을 출발한다. 하지만 그들을 실은 테게트호프호는 출발한 지 14일 만에 얼어붙은 바다 한가운데 갇히고, 2년간 이어진 전대미문의 탐험이 시작된다. 이 작품은 허구와 현실을 절묘하게 넘나들며 ‘뛰어난 예술적 구성’을 이루어냈다는 평가를 받았고, 엘리아스 카네티 문학상을 수상했다.

원제: Die Schrecken des Eises und Finstereis

저자: Christoph Ransmayr

발표: 1984년

분야: 오스트리아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빙하와 어둠의 공포

옮긴이: 진일상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74(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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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을 수 없이 우스운, 웃지 못할 이야기들

요건 틀림없이 아주 재밌는 소설이다! 제목을 보자마자 구미가 당겼다. 《감상소설》. 과연 내 독서영감은 절륜해! 뭐, 이런 재밌는 소설 제목이 다 있단 말인가? 그런데 책을 마주한 순간부터 예상과 달리 장편이 아니어서, 그리고 책을 읽는 내내 작품 한 편 한 편이 어디 한 줄 흘려 읽을 만한 데가 없어서, 괜히 이 책을 골랐다는 후회가 독서의 즐거움을 묽혔다는 걸 고백해야겠다. 아, 아무 책무 없이 이 책을 읽을 독자들은 복되도다. 《감상소설》을 제대로 소개하려면 이 책 한 권을 고스란히 옮겨야 할 것 같은 공포가 필력의 허술함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내게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아, 내게 의무 지어진 분량이 딸랑 400자라면 작히 좋으랴. 얼렁뚱땅 위 문단으로 마칠 수 있었으련만. 이럴진대, 그럼 다른 책으로 바꾸는 게 어떨까 하는 유혹도 들었지만, 《감상소설》을 소개하는 영광의 한 구석을 포기하고 싶지도 않았다. 글감에 압도당하면 시시콜콜 장광설을 늘어놓거나 딴소리로 초를 치며 시종일관하게 된다. 아마 나는 이 짧은 글을 그렇게 채우게 되리라.

「아폴론과 타마라」「사람들」「무서운 밤」「꾀꼬리는 무엇을 노래할까」「즐거운 모험」「라일락 꽃이 핀다」「지혜」「암염소」 이렇게 여덟 단편소설로 이루어진 《감상소설》에는 총 네 개의 서문이 실렸는데 1927년 3월 초판 서문에는 콜렌코르프, 1928년 5월 2판 서문에는 ‘K. y.’로 보이는 키릴문자, 같은 해 7월 3판 서문에는 ‘C.’와 파이 기호 같은 모양의 키릴문자, 1929년 4월의 4판 서문에야 비로소 ‘미하일 조셴코’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이 책, 이 《감상소설》은 신경제정책과 혁명이 절정일 때 썼다’로 말문을 여는 1판 서문부터 4판 서문까지는 소심한 변명이 그득하고, 그러면서도 기어이 한구석에 할 말을 찔러 넣고 있는데 어찌나 많은 맛을 담고 있는지. 소설문학에 대한 재능과 열정이 끓어 넘치는 작가가 전체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으려고 얼마나 부단히 조심했는지 절절히 느껴진다. 그는 우리의 시인 김수영처럼 실생활의 안정도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작가였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도태됐다. 자신들의 모습을 울 수도 웃을 수도 없게 그려낸 ‘웃기는’ 소설로 많은 ‘인민’의 사랑을 받았건만 1943년에 작가동맹에서 제명됐던 것이다.

뭐, 세월이 하수상하면 우리의 전 문화부 장관 유인촌 같은 분들이 윗분 발치에 강림하시게 마련이다. 살던 집에서도 쫓겨난 작가는 그 뒤 살림살이를 팔거나 구둣방에서 일하거나 갚을 길 없는 돈을 꿔서 연명하는 팔자로 전락했다. ‘작가로서 조셴코(이런 덜 떨어진 컴퓨터라니…… 계속 ‘셴’을 치는 순간 ‘좃pszh’으로 바뀌네. 아, 시간 없어 죽겠는데…… 내가 찍는 대로 찍히란 말이다!)는 웃음과 풍자의 거장이었으나, 삶에서 그는 비극적 주인공이었다.’ 참, 미하엘 조셴코는 1895년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구소련 작가다. 1958년 7월 22일 졸(卒).

전체주의 사회와 독재자들은 풍자를 싫어한다. 뭐, 다른 거 다 관두더라도 매사 진지하고 근엄한 (그게 또 얼마나 웃기는지를 히틀러와 같은 디자인 콧수염을 한 채플린은 알고 있었다) 그들은 기강을 흩트리는 게 딱 질색인데 풍자는 웃음을 주고 웃음은 기강을 흩트리는 것, 발본색원해야겠지. 내가 ‘웃기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데, 휴, 대한민국이 전체주의 국가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아, 독자들이여! 하, 그대, 나의 소비자들이여!’ 하거나 ‘그러나 사건을 서술하기에 앞서 작가는 몇 가지 의심을 함께 나누고자 한다. 문제는 소설의 플롯이 진행되는 중에 공감이 잘 되지 않는 여자들 두세 명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하면서 의논성스러운 척 작가가 끼어드는 수작도 재밌고, ‘폭풍우 같은 혁명의 세월은 (아가씨들에게) 오랫동안 살펴본 다음 원하는 곳에 닻을 내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곤로 앞쪽 벽에는 바퀴벌레가 떼를 지어 몰려다니고 있었다. 창 옆에는 괘종시계가 걸려 있었다. 진자가 무서운 속도로 움직이며 쉭쉭 소리를 냈고, 삐걱거리며 바퀴벌레의 삶에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 그는 젊은 아내에게 특별히 다정한 애착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삶을 가치 있게 장식하고, 평범하기 짝이 없는 온갖 개 같은 일상사를 행복한 생활의 아름다운 정밀 사건으로 만드는 그런 애착 말이다’ 같은 씨줄에 깃털처럼 속속 날아와 얹혀 있는 ‘노파는 노파다. 어떤 노파인지는 개들이나 구별할 수 있겠지’ 같은 날줄. 그 절묘한 짜임에 감탄하면서 나는 내내 웃음을 터뜨렸다.

이 책을 헬스장에까지 갖고 가서 실내자전거 페달을 밟으면서도 키득거렸고, ‘거꾸리’에 매달려서는 ‘독자의 면전에서 고백하기는 쑥스럽지만, 작가는 인간 유기체의 나약함과 유기성에 대해, 그리고 예를 들어 인간은 주로 수분, 주로 체액으로 구성돼 있다는 사실에 대해 화를 내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미안하지만, 버섯이나 과일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왜 물이 그렇게 많아야 한단 말인가?”’ 같은 구절을 읽으며 허파가 납작하게 눌리는 푹! 소리를 몇 번이고 내지 않을 수 없었다.

조셴코, 최고! 그런데 그를 이제야 알다니. 제정러시아와 혁명과 내전을 거친 1920년대 소련 인민들의 일상에 대해 나는 궁금증조차 갖지 않았다. 『어머니』『고요한 돈강』『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가 다인 줄 알았다. 세계는 넓고 읽어야 할 책은 많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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內戰서 살아남은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

♣'감상소설'줄거리

‘러시아 풍자문학의 거장’ 미하일 조셴코는 1895년 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났다. 제1차 대전이 발발하자 자원병으로 입대했으나 심장병 악화로 곧 제대한 후 단편들을 쓰기 시작했다. 1920년대 소련에서는 문학이 사회주의 이념을 전파하는 도구로 쓰였으며, 영웅적 주인공이 온갖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사회주의 이념을 수행하는 이야기가 높이 평가받았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조셴코는 이념보다는 ‘작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이야기에 관심을 가지고 소시민근성이나 속물근성, 소련의 관료주의와 부패를 풍자하는 소설로 명성을 떨쳤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이 정치적으로 해롭고 인민의 이익에 반한다고 생각한 소련 비평계는 작가동맹에서 그를 제명하고 활동에 제약을 가했다. 조셴코는 질병과 의욕 상실로 고생하다 1958년 사망했다.

《감상소설》은 조셴코가 1927년 발표한 단편집으로 제정 러시아에서 태어나 혁명을 겪고, 내전에서 살아남은 평범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조셴코는 생계를 위해 우체국 직원, 전화 교환수, 토끼 사육원 등 수많은 직업을 전전했던 자신의 체험을 자양분 삼아 소시민들의 일상을 번득이는 유머와 풍자로 그려냈다. 이 책의 주인공은 교양도 없고 때로는 속물적이며, 삶의 권리를 쟁취하고 생존하기 위해 싸우는 ‘서민들’이다. 뭔가를 얻어내려고 고군분투하지만 웃지 못할 사정 때문에 물거품이 되고 자기 자신도 웃음거리가 되는 보잘것없는 인물들의 모습은 혁명 후 러시아 사회뿐 아니라 현실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을 풍자하고 있다.

원제: Сентиментальные повести

저자: Михаил Зощенко

발표: 1927년

분야: 러시아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감상소설

옮긴이: 백용식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73(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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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을 보라!

하루가 멀다 하고 좁아지는 혈관, 뇌 주름 사이마다 쌓이는 먼지, 순환을 포기하고 몸속 어딘가에 응고되는 노폐물들, 우편함을 가득 채운 각종 세금 고지서들(게다가 납기일이 서로 다르기까지!)에다 엄습해오는 모든 사물과 갈등을 어떻게든 조율하여 아이는 무사히 키워야겠고, 친근하지는 않으나 밀착되다 못해 거기 매몰되고 마는 일상-이것들이 오늘 두개골까지 굳어버린 생활인으로서의 나를 이루는 결정(結晶)들이다. 써놓고 보니 한심하나 맘속 어딘가에서는 이렇게 변명한다-십년 전만 해도 나는 이렇게까지 최저는 아니었으며 나아가야 할 길과 뛰어들어야 할 거리가 어디인지, 뻗어야 할 손길과 그것이 닿아야 할 곳을 고민할 줄 알았다고. 지금처럼 슬며시 소액 입금이나 구매 후원 같은 행위로써 죄의식을 ‘땜빵’하며 숨어드는 소심인이 아니었다고. 소시민을 자청하다 정말 소심인이 되어버린 지 너무 오랜 세월이 흘렀으며, 과거에 알고 지내던 거의 대부분의 이들과 차마 연락하지 못하고 지내는 건 이 때문이기도 하다.

살다 보면 으레 그런 거라고 자조하다가 이 남자를 보았다. 그의 행동과 결론은 현실의 나로선 엄두를 낼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처음 보았을 때 그가 놓인 처지는 이랬다.

그러니까 가쁜 호흡과 삭아가는 심장에다 아내와 사별한 뒤 극심한 영양 불균형으로 몸이 비대해지기도 했고 문학인의 사망 기사에 촉각을 곤두세움으로써 얻어지는 직업병의 일종이겠으나 삶보다는 죽음에 더 관심 있는 남자, 지금처럼 사람의 육체와 정신에 스펙을 들이대는 세속의 기준으로 말하자면 전후좌우 잘나가는 남자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어쨌든 ‘박사’라고 불리며 신문 문화면 기사를 통으로 담당하는 이가 있다. 이 사람이 소설 전편을 통해 끊임없이 뭔가를 주장하는데, 어째 난감하다.

제목부터 단호하게 주장한다고 해서 처음에는 뭐 대단한 구호나 강령을 외치는 줄 알았지. 소설을 이룬 전체 문장의 상당량이 ‘……라고 페레이라는 주장한다’로 끝나건만 그 ‘……’ 안에 들어가는 내용이 대략 이런 것들이다. “아주 피곤했다고 페레이라는 주장한다” “정신 나간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고 페레이라는 주장한다”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고 페레이라는 주장한다”. 아니 세상에 주장해야 할 현안들과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사건들이 지금도 얼마나 무수히 널려 있으며 날마다 기록을 갱신하는데 고작 이런 사소하고 내밀한 문제들을, 그나마 문제라고 부르기도 무엇한 것들을 힘주어 주장하는지. 이런 주장이라면 나도 백 마디쯤 할 수 있겠다……가 아니라.

집요하고 일관되게 반복 제시되는 그의 주장들은 이를테면 정말로 중요한 일들, 가리지 말아야 할 진실들을 주장할 수 없는 사회 환경에서의 역설적인 모습이었다. 그 환경이란 한 사회주의자 짐마차꾼이 자신이 파는 멜론에 피를 뿌리며 죽어갔다는 기사를 실을 수 없으며 모두가 침묵하는 것 말고는 사회에 대응하는 방법을 모르는 현실이었는데 가만, 이거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소설 속 배경은 분명 1930년대인데, 2012년을 살아가는 우리가 놓인 처지와 어쩌면 이토록 닮았는지, 권력과 그것을 휘두르는 사람들의 행태는 어째서 매번 짙은 기시감을 제공하는지.

개인적인 느낌과 인상 및 기억과 같은 것들을 끊임없이 중얼거리듯 주장하는 이 신문기자는 적당한 학력과 아내와의 추억과 현재 위치나 하는 일 등에 안주하며 그 자체로 살아 있되 무덤에 들어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나날을 보내다가 수습기자로 쓰고 싶은 청년을 만나지만 이때부터 인생이 꼬이기 시작하니, 청년은 작금의 사회에서 도저히 실을 수 없는 날선 비판을 첨부한 문인 부고 기사만 써서 들이밀고, 이 인간을 내쳐 말아, 고민하면서도 선임기자 페레이라는 일종의 중력에 끌리듯 그의 기사를 버리지 못하고 사비를 털어 원고료를 지급한다. 게다가 이 청년은 약간의 진상과 민폐 신공을 발휘하여, 페레이라와는 생면부지인 자신의 동지에게 은신처를 마련해주기 위해 도움을 요청하기까지. 이러한 과정을 거쳐 문화면 담당 기자였던 페레이라는 지금까지 자신을 이루고 있던 안온하고 순조(順潮)한 결정(結晶)들이 조각조각 떨어져 나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선택지는.

자아의 움직임에 굳이 ‘왜’를 설명하는 것은 철학자와 심리학자들이 하게 놔두자. 우리는 어떤 계기가 없어도 마음이, 손끝이 움직이기도 한다. 일상적으로 거쳐온 순간과 만남들이 모두 계기의 일부를 이루었으니까. 그러다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면 길을 멀리 떠나와 돌아갈 데가 보이지 않을 수도 있으며, 지금까지 어른들 말 잘 듣고 착하게 살아온 나란 인간이 대체 무엇이었는지 한동안 회의에 사로잡히며 떠오르는 갈등도 필수 옵션이다. 그때는 망설이지 말고 ‘지금부터의 나’를 받아들이라고, 페레이라를 둘러싼 사람들은 주장하고 있다. 그러니 페레이라가 정말로 주장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 소설이 끝나는 지점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훗날 나의 부고에는 모든 약력이 생략된 채 다만 ‘소심인’ 세 글자가 인쇄될 것으로 예상되나 내가 써온, 그리고 앞으로 쓸 소설들은 그와 같은 운명에 저항할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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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적 현실에 눈 떠나가는 페레이라

♣‘페레이라가 … ’줄거리

《페레이라가 주장하다》는 이탈리아 현대문학의 행동하는 지성으로 불리는 작가 안토니오 타부키의 대표작이다. 타부키는 1975년 《이탈리아 광장》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인도 야상곡》으로 메디치상을 수상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후 발표한 《페레이라가 주장하다》로 캄피엘로상을 비롯해 유럽의 권위 있는 주요 문학상을 휩쓸었고, 《레퀴엠》《몬테이루 다마세누의 잃어버린 머리》 등을 잇달아 발표하며 정치적 목소리를 내는 이탈리아의 대표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꾸준히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그는 매년 유력한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거론되고 있다.

《페레이라가 주장하다》는 1938년 포르투갈 리스본을 배경으로 살라자르 독재 정권의 현실과 마주한 문화부 기자 페레이라의 심리 변화를 그린 소설이다. 아내를 잃고 무기력하게 살아가던 페레이라는 정치 성향이 뚜렷한 젊은이 몬테이루 로시를 만나면서 점차 폭력적인 현실에 눈떠간다. 파시스트에 대항하는 조직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는 몬테이루 로시를 돕던 페레이라는 어느 날, 비밀경찰에게 쫓기는 몬테이루 로시가 자신의 집을 찾아와 숨겨달라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데……페레이라의 잔잔한 일상과 그의 내적 변화를 ‘페레이라는 주장한다’라고 반복하는 독특한 서술로 보여주는 것이 특징인 이 소설은 정치와 역사에 대한 치열한 문제의식을 독창적인 구성으로 표현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원제: Sostiene Pereira

저자: Antonio Tabucchi(1943~)

발표: 1994년

분야: 이탈리아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페레이라가 주장하다

옮긴이: 이승수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2(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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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적 인간의 탄생

천장을 빼곡히 메우고 있던 크고 작은 활자들 속에서 ‘스땅달’과 ‘적과 흑’이라는 글자를 찾아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배를 깔고 누워 책을 읽던 습관이 있던 때였다. 그 자세가 힘들어지면 옆으로 누워 읽었다. 반대쪽 페이지를 읽으려면 몸을 반대로 돌렸다. 그러다 잠깐 고개를 들면 작은 창 너머로 저 멀리 빛나고 있는 불빛들이 보였다. 1980년 초였다. 밝다고 해봐야 30와트짜리 백열등이었을 것이다. 밤이 깊어도 몇 점 불빛은 꺼질 줄 몰랐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이들을 생각하다 읽던 책은 그대로 엎어두었다. 대신 나는 천장을 향해 몸을 바로 했다. 《적과 흑》이 소개된 그 팸플릿은 하필이면 내 코 바로 위에 붙어 있었다.

시간이 흘렀어도 그것만은 확실하다. 나는 《적과 흑》이라는 제목이 싫었다. 직감적으로 적과 흑으로 대변될 그 무언가에 대한 반감이 작동했을는지도 모른다. 대신 제목 아래 달린 줄거리 요약 속에 등장하는 줄리앙(쥘리앵이 아닌)이란 이름은 감미로웠다. 오, 나의 줄리앙. 줄거리 요약에서는 글의 결말을 감춘 채 여운을 남겨두었다. ‘그 사실을 안 줄리앙이 교회로 달려가는데……’ 이런 식이었을 것이다. 그 방 도처에 감미로운 글자들이 있었다. ‘사랑’이란 단어도 쉽게 눈에 띄었다. 뺨 왼쪽 위엔 ‘닥터 지바고’가 발치 아래쯤엔 ‘천일야화’가 있었다.

열네 살이었다. 팸플릿에 밀가루풀을 발라 도배를 하던 아버지의 심정은 안중에도 없었다. 왜 한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떠도는 것인지, 아버지의 속에도 쥘리앵과 같은 열정과 자존심이 살아 펄떡이던 시절이 있었으리라곤 생각해보지 않았다.

아버지는 젊은 시절 여러 출판사를 전전했다. 직장을 옮길 때마다 ‘찌라시’로 불리는 출판사의 팸플릿이 집 안에 널렸다. 딱지를 접어도 접어도 넘쳤다. 어느 날, 아버지는 반 장난삼아 외풍 심한 다락을 찌라시로 도배했다. 집장사들이 활개를 치던 시절에 뚝딱 지어올린 단층 양옥이었다. 바닥을 밟을 때마다 삐걱거렸지만 집에서 가장 전망이 좋던 다락방은 그 집을 떠날 때까지 내 방이 되었다. 소설의 첫 문장을 끼적인 것도 그곳에서였다.

곰곰 생각해 보니 소설을 쓰게 된 건 다분히 그런 문학적인 환경 때문이 아닌가 싶다. 과장을 좀 보탠다면 그곳은 수천 권의 장서들로 가득한 도서관이었다. 그러니 어떻게 딴 마음을 먹을 수 있었겠는가. 허리를 굽히고 다락방으로 들어서면 활자들이 별처럼 쏟아졌다, 라고 어느 글에 쓴 적이 있는데, 정말 어느 날은 창밖 가로등 불빛을 받아 아트지 위의 활자들이 희번덕하게 빛을 내기도 했다.

그래서였을까, 다시 《적과 흑》을 읽기 시작했을 때, 그가 처한 환경부터 보였다. 쥘리앵 소렐이 살다간 1830년의 프랑스 사회, 이 소설의 부제는 알려진 대로 ‘1830년의 연대기’이다. 쥘리앵은 비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손을 보탤 일꾼이 필요한 아버지에게 책이나 읽고 사색을 즐기는 아들은 무용지물일 뿐이다. 그는 야심으로 가득 차 있다. 방법은 둘, 군인과 성직자. 하지만 나폴레옹의 몰락으로 군인으로서의 출셋길은 막힌 상태이다. 귀족들은 로베스피에르와 같은 비천한 신분이지만 세상을 바꿀 인물이 나타날 것을 경계하고 있다. 그러니 똑똑하고 야심에 찬 젊은이의 출현이 반갑지만은 않다. 그런데도 정작 이 소설은 소설이 발표된 그 시대의 독자들의 공감을 사지는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은 그들 자신의 모습을 바로 알지 못했다.

《적과 흑》의 첫 독후감은 기억나지 않는다. 열일곱, ‘적과 흑’이라는 활자 아래에서 《적과 흑》을 읽었다. 아버지가 사준 고전 시리즈는 고급 장정에 금박 제목이란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게 옆으로 누워 읽기에는 너무 무거웠다. 아마도 팸플릿에 적혀 있던 《적과 흑》의 요약본을 확인한 것에 불과한 독서였을 것이다. ‘교회로 달려가는데……’의 뒷부분을 확인한, 비상을 꿈꾸던 한 젊은이의 파멸을 확인하는 순간, 나는 이렇게 외쳤을지도 모른다. 오, 나의 줄리앙!

열일곱 초여름에 그 집을 떠났다. 주인이 서너 번 바뀐 그 집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 몇 년 전 그 집을 찾았을 때 이미 그곳은 아파트 개발로 파헤쳐져서 커다란 공동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오랫동안 그 구덩이를 내려다보았다. 그 다락방과 아슴푸레한 청년의 열정이 떠올랐다.

《적과 흑》을 다시 읽는 시간, 나는 이미 그 방에서 떠난 지 오래된 사람이다. 남은 열정과 자존심이 하루빨리 없어지기를 바라며 하루 종일 팸플릿에 풀을 발라 도배를 하던 아버지보다도 더 나이가 많은 사람이다.

사랑을 하면 왜 변덕쟁이가 되는지, 왜 마음과는 다른 행동들을 하게 되는 건지, 왜 때론 극단적인 생각으로 치달리는 건지, 파랗게 독이 오르도록 질투심에 사로잡히는 것은 무엇인지. 종잡을 수 없는 마음을 이렇듯 글로 표현해놓다니. 쥘리앵과 레날 부인, 마틸드로 시선이 옮겨가며 드러나는 심리 묘사는 압권이다. 다락방에서는 분명히 어려워 이해하지 못했던 부분이다. 사랑과 죄의식의 양극단에 동시에 설 수 있음을 그때 어떻게 알 수 있었을까. 내 내면을 들여다보는 데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무방비로 내 속을 들켜버린다. 줄리앙이던 시절에서 쥘리앵으로 제 이름을 되찾기까지 이 청년의 매력은 사그라질 줄을 모른다. 욕망으로 들끓다가도 정작 그 속됨 속에서 진저리를 치는, 자존심이 상하는 순간 아무런 쓸모도 없어지는. 오, 나의 줄리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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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세 위해 어쩔 수 없이 성직자의 길로…

♣‘적과 흑’ 줄거리

스탕달은 발자크와 함께 19세기 프랑스 문학의 양대 거장으로 꼽힌다. 낭만주의적 성향이 지배적인 문학 풍조에 맞서 ‘소설은 사회의 거울’이라는 생각으로 당대의 시대상을 구체적으로 증언하고 예리하게 비판함으로써 사실주의 문학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스탕달의 대표작으로 1830년에 출간된 《적과 흑》은 당시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한 두 건의 치정사건을 바탕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소설의 제목인 ‘적과 흑’은 당대 젊은이들이 신분 상승을 위해 바라던 군인과 성직자의 신분을 상징한다. 주인공 쥘리앵 소렐은 하층계급으로 태어났으나 훌륭한 외모에 재능이 출중한 야심찬 젊은이다. 군인으로 출세를 꿈꾸나, 무명 병사에서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비천한 신분을 타고난 자가 출세할 수 있는 길은 성직자뿐임을 깨닫고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택한다. 하지만 야망을 좇고, 신분 높은 여성들과 사랑에 빠지면서 쥘리앵은 나락으로 떨어져 결국 교수형에 처해지게 된다. 사회상의 반영은 물론 스탕달은 쥘리앵이 여인들과 사랑에 빠지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겪는 연애심리를 매우 섬세하고 예리하게 묘사하며 연애심리에 대한 탁월한 혜안을 보여주기도 했다.

스탕달은 이 책에 역사적 사실들의 모음집이라고 할 수 있는 ‘연대기’라는 부제를 쓰면서도 “내 소설은 백 년 후의 독자들이나 이해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그의 소설은 소설 발표 당시나 그가 죽은 후에도 특별한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19세기 후반에 가서야 본격적으로 재조명받기 시작했다.

원제:Le Rouge et le Noir

저자:Stendhal(1783~1842)

발표:1830년

분야:프랑스문학

한글번역본

제목:적과 흑 1, 2

옮긴이:이규식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17, 018(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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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이별을 사랑하지 않지만…

그랬네. 한트케의 소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속의 주인공처럼 곧 서른이 되는 즈음에 나는 떠나왔네. 나에게는 이런 편지를 보내왔던 아내는 없었지만. “나는 지금 뉴욕에 있어요. 더 이상 나를 찾지 마요. 만나봐야 그다지 좋은 일이 있을 성싶지 않으니까.”

서울을 떠나오던 1992년 늦가을, 나는 내 방에 있던 가구와 책과 편지와 사진들을 정리했다. 어수선한 방 안에서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오랫동안 짐 싸는 것을 멈추었다. 책을 읽다가 창가에 서서 밖을 내려다보면 구불구불한 오르막길이 보였다. 키가 큰 감나무도 한 그루 서 있었나? 모르겠다. 하지만 그 길을 지나 나를 방문하던 사람들은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들 모두와 이제 이별을 깊숙이 하며 나는 이 책을 읽었지.

결국 우리는 생애의 어떤 순간과 동일시할 수 있는 책 앞에서 오래 머물러 있지 않을까? 이 책이 그랬다. 비행기를 타고 독일에 처음 왔던 나에게는 이 책이 있었지. 받았던 짧은 편지는 없었으나 해야 할 긴 이별은 있었기에. 이 책 속의 주인공과 함께 마음속에서 로드무비를 찍다보면 한 시절과 이별을 할 수도 있겠다 싶었기에. 책 속의 편지는 짧지만 긴 이별 여행으로 주인공을 이끌었다.

그녀와의 결혼 생활뿐 아니라 서른이 될 때까지 자신에게 상처를 주었던 모든 시간들을 한꺼번에 환기시킨 저 짧은 문장. 그리고 그 시절과 이별을 하지 않으면 더이상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갈 수 없으리라는 불안. 나 역시 그랬다. 서른이 되기 전에 내 스스로를 바꿀 수 없을 거라는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지. 스스로를 바꿀 힘이 내 안에 없다면 떠나는 방식이라는 외부의 힘이라도 빌려야 할 것 같았다.

그래서 중부 유럽의 아주 작은 도시, 마르부르크로 왔었지. 그 무렵의 나는 한트케의 말을 인용하면 이랬다. “이 두려움. 그리고 가능한 한 빨리 다른 존재로 변신해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싶은 욕망이 합쳐져서 나를 안절부절못하는 상황으로 몰아갔다.” 이런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닥치는 대로 쏘다니는 일. 한트케의 주인공이 미국을 쏘다니는 것처럼 나 역시 쏘다녔다. 라인 강변을 서성이다가 다시 기차를 타고 마인 강변으로 갔지. 값싼 기차표를 구해 독일이 아닌 다른 곳으로 가서 19세기 말의 건물과 발코니만 즐비한 도시의 골목을 걷기도 했지.

어떤 변화가 나에게 찾아올까? 기적처럼 다른 존재로 나는 서른을 맞이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이 책을 읽었지. “내가 받은 인상들이라는 게 이미 익히 알려져 있는 인상들의 반복일 뿐이라는 거야. 그 말은 내가 아직 세상을 많이 돌아다녀보지 못했다는 것뿐만 아니라 나와 다른 조건들 속에서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을 많이 보지 못했음을 의미해.” 변한다는 건 뭘까? 사물을, 세계를 다르게 본다는 걸까? 보는 것이 달라지면 인식도 달라지고 그 달라진 인식이 또다른 사유를 하게 만들까? 어쩌면 내가 변할 때 진정한 이별이라는 거, 찾아오는 건 아닐까? 주인공의 삶은 “많은 것을 허용받지 못한 삶”이었다.

그는 과거와 이별을 하고 싶지만 떠나와서도 옛날과 마주친다. “이미 오래전에 극복했다고 생각했던 온갖 불안과 동경이 다시 도지고 있어. 어릴 적에 경험했던 것처럼 갑자기 주변 세계가 두 조각이 나면서 전혀 다른 형태의 무엇인가로 정체를 드러낼 것만 같아.” 길 위에서 나도 자주 나의 과거와 마주쳤지. 그 과거 안에서 요동치고 있던 감각도, 누군가를 생각하던 혹은 미워하던 버릇도. 나만 그런 게 아니라 한트케도 그렇게 적어두었네.

떠나는 일은 쉽지만 길 위에서 한 시절과 진정한 이별을 하는 것은 어렵지. 한 인간에게 어떤 시절,이라는 것은 한 보따리의 시간만이 아니야. 어디 길 위에서 턱, 버리고 올 수 있는 무엇도 아니지. 다만 그 시절을 이야기처럼 할 수 있을 때, 그때 우리는 한 시절과 이별했어, 라는 말을 할 수 있을 거야. 소설의 말미에 존 포드의 물음이 나온다. “이젠 당신들의 이야기를 해주세요!” 유디트는 그들이 왜 이곳까지 왔으며 서로가 얼마나 서로를 할퀴었으며 심지어 죽이려고 했다는 것을 말하지. 그리고 이제는 평화로운 방식으로 헤어지기로 했다는 것도.

이 일이 진짜 일어난 사실이냐고 묻는 존 포드에게 그녀는 말하지, 실제로 일어난 일이라고. 그렇네. 이제 이야기로만 남아버린 한 시절.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버린 한 시절을 떠올리면 우린 깜짝 놀라지, 그런 때가 있었나, 라고. 그리고 생각해보면 그 시절은 아주 긴 시간 동안 우리 속을 서성이다가 마치 신발을 들고 조용히 사라져버린 손님처럼 우리 바깥으로 나가버린 거야. 그때 우리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중얼거리지. 그 시간이 나를 이만큼 살아오게 했고 또 절망하게 했고 그리고 이제 시절로만 남았네, 라고.

한 시절은 삶의 한 퍼즐 조각이 되어 미래에 올 다른 퍼즐을 위해 귀퉁이를 남겨두는 것. 한트케의 책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가르쳐주는 책은 아니야. 다만 이별을 하는 사람들을 위한 동반자야. 이별을 반복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는 우리 삶을 위하여, 건배! 라는 짧은 편지를 나도 써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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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적을 감춘 아내를 찾아서…

♣'긴 이별을 위한…'줄거리


찬사와 비판을 넘나드는 우리 시대 가장 전위적인 문제 작가 페터 한트케의 자전적 성장소설. 한트케는 1996년 소설 《말벌들》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문학계를 주도하던 ‘47 그룹’ 모임에서 파격적인 문학관으로 거침없는 독설을 내뱉으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연극계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킨 희곡 《관객 모독》과 현대인의 불안을 다룬 실험 소설 《페널티킥 앞에 선 골키퍼의 불안》 등으로 명성을 얻고,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고정관념에 도전하며 매번 새로운 형식을 고안해내는 작가 페터 한트케는 독일 유수의 문학상을 휩쓸며 오늘날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끊임없이 거론되고 있다.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는 “나는 지금 뉴욕에 있어요. 더 이상 나를 찾지 마요. 만나봐야 그다지 좋은 일이 있을 성싶지는 않으니까”라는 ‘짧은 편지’ 한 통과 함께 시작된다. 주인공은 편지의 경고를 무시한 채 아내가 머물던 뉴욕으로 찾아간다. 종적을 감춘 아내를 찾아 미국 전역을 횡단하는 한 편의 로드무비 같은 이 소설은 쫓고 쫓기는 두 남녀를 통해 마치 범죄소설 같은 긴장감마저 불러일으킨다. 주인공은 여행을 통해 ‘나’라는 고립된 자아를 버리고 ‘우리’라는 보편적 가치를 획득해간다. 한 인간의 내적 성장 과정을 아름답고 역동적으로 그린 이 소설은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성장소설로 평가받는다.

 

원제: Der kurze Brief zum langen Abschied

저자: Peter Handke

발표: 1972년

분야: 독일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긴 이별을 위한 짧은 편지

옮긴이:안장혁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68(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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