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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르몬토프, 기형도, 그리고 우리 시대의 문학청년들

삶을 문학으로 만들기, 또는 문학이라는 열병에 감염된 삶에 대한 경고는 오랫동안 있어왔다. 막스 베버는 그나마 괴테가 문학적 삶을 사는 데 성공했지만 그런 시도가 작품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미하일 레르몬토프의 소설 《우리 시대의 영웅》은 베버의 입장에서 보면 전형적으로 삶-문학이 실패한 사례다. 주인공 페초린은 사교계의 이목을 끄는 스물다섯 살의 장교로 레르몬토프 자신의 초상이었다. 레르몬토프는 낭만주의의 세례를 입고 세계와 불화하는 존재로 본 자신에 대한 인식을 페초린에 투사했다. 페초린은 소설 속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나는 불행한 성격을 지녔어요. 교육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하느님이 나를 원래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나도 모르겠군요.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의 불행의 원인이라면, 나도 그들 못지않게 불행하다는 사실입니다.”

19세기 초 격동의 러시아에서 전쟁을 체험하고 문학을 사랑한 젊은이가 스스로를 불행한 존재로 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넘치는 열정에 이끌려 삶과 작품을 하나로 만들려는 시도는 실패하게 돼 있다. 모리스 블랑쇼는 진정한 작가는 일기를 쓰는 작가라고 말했다. 작품에서 작가는 자아를 잃어버리고 또한 잃어버려야 한다. 작가는 작품을 쓰면서 잃어버린 자아를 회복하기 위해 일기를 쓴다. 레르몬토프는 일기를 쓰듯 작품을 썼고 작품을 쓰듯 일기를 썼다. 그 결과 작품은 자의식의 과잉으로 장광설이 돼버렸고 그의 삶은 현실 감각을 잃고 미망으로 빠져들었다. 레르몬토프는 27세에 죽었다.

레르몬토프는 삶과 문학을 뒤섞는 것의 위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소설에서 한심한 인물로 그려낸 페초린의 라이벌 그루시니츠키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그의 목적은 소설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자기가 평화를 위해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어떤 비밀스러운 고뇌를 겪을 운명을 타고난 존재라는 사실을 남에게 너무 자주 확신시키려고 노력한 탓에, 그 자신도 거의 그렇게 확신하게 되었다.” 그루시니츠키는 페초린과의 결투에서 사망한다. 흥미롭게도 레르몬토프 자신 또한 그루시니츠키처럼 동료 장교와의 결투에서 사망한다.

그러나 나는 레르몬토프의 실패, 정확히 말하면 실패할 줄 알고 실패한 삶-문학이야말로 19세기 러시아와 현대의 한국을 연결시켜주는 사건이라 생각한다. 문학에 감염된 비극적 인간 레르몬토프에게 삶은 무엇이었는가? “늘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 시선 하나하나, 말 한 마디 한 마디의 의미를 포착하는 것, 그 의도를 알아맞히는 것, 음모를 와해시키는 것, 속은 척하는 것, 그러다가 갑자기 그들이 간계와 계략을 써서 힘들게 만든 거대한 건물을 일격에 무너뜨리는 것바로 이것을 나는 삶이라고 부른다.” 그에게 삶은 ‘말’들의 전투, “환영과의 전투”이다. “그로 인해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야밤에 환영과 전투를 벌인 이후에 찾아드는 피로감뿐, 동정으로 가득 찬 희뿌연 추억뿐이다. 이 부질없는 투쟁에서 나는 영혼의 열기를, 또 현실 생활을 위해 꼭 필요한 꾸준한 의지를 소진해버렸다. 그렇게 이 삶으로 들어섰을 때 나는 그것을 이미 생각 속에서 다 체험한 뒤였다. 그래서 나는 지루하고 또 기분이 더러워졌다. 이미 오래 전에 알고 있는 책의 질 나쁜 모방을 읽는 사람처럼.” 그런데 문학적 삶이라는 어리석은 꿈 때문에 환영과의 전투가 실제로 총을 겨누는 결투가 되었다. 우리는 레르몬토프를 닮은 한국의 시인 한 명을 알고 있다. 그 또한 비극적 ‘말’들의 세계에 빠져 자신의 삶을 이미 살아버린 것으로 체험했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기형도, ‘오래된 書籍’)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기형도, ‘물 속의 사막’) 기형도 또한 자기가 쓴 시를 모방하듯 20대의 나이에 극장에서 외롭게 죽음을 맞이했다.

레르몬토프와 기형도의 삶은 천재들의 예외적 삶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 21세기 청춘에게도 동일한 비극이 있다. 세계와 불화하며 삶을 고독한 여정으로 보는 개인들이 갖는 자기 환멸의 파토스가 있다. 이때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문학은 구원이자 저주다. 문학의 수다스러운 말은 세계와 자아의 비참을 표현하고 그것과 대결하게 한다. 그러다 그 말이 그저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재가 되어 삶을 파괴할 수도 있다. 레르몬토프와 기형도, 현대의 문학청년은 문학이라는 비밀의 언어를 통해 우정을 나누고 공동체를 이룬다.

만약 문학의 행복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일반적인 행복과 다를 것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한껏 충족된 오만함이다. 만약 내가 스스로를 세상에서 제일 훌륭하고 강력한 자로 여길 수 있다면, 나는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문학의 행복은 가장 나약한 자들이 벌이는 가장 치열하고 위험한 싸움에서 비롯되는 행복이다. 그 싸움이 오로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됐을 때 느끼는 행복이다.

문학은 《우리 시대의 영웅》이 슈퍼스타가 아니라 동시대의 소수자들, 고독한 패잔병들, 같은 운명을 나누는 먼 곳의 친구들임을 알려준다. 문학 작품은 성공적이어서가 아니라, 먼 곳에서 온 친구의 편지일 때에만, 내게 가없는 행복을 준다.

심보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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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멸과 냉소에 물든 낭만적 영웅의 초상

'우리 시대의 영웅'줄거리

《우리 시대의 영웅》은 스물일곱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19세기 러시아의 천재 작가 미하일 레르몬토프가 남긴 유일한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으로 레르몬토프는 ‘러시아 문학이 시에서 산문으로 이행하는 것을 성취해낸 작가’라는 평을 얻었다. 또한 니콜라이 고골은 “러시아에서 그 누구도 이처럼 아름답고 정교한 글을 쓴 사람은 없었다”고 말했다.

작품의 주인공이자 ‘우리 시대의 영웅’을 표상하는 젊은 귀족 장교 페초린은 삶에 큰 의욕도 애정도 없이 염세와 냉소에 빠진 인물이다. ‘웃을 때도 웃지 않는 눈’을 하고는 자신이 속한 귀족 사회의 위선과 속물적 모습에 경멸과 조롱 섞인 시선을 보낸다. 또한 순진한 처녀에게 반해 그녀를 납치했다가도 금세 시들해져 그녀의 죽음조차 무덤덤하게 지나치고, 오랜만에 그를 보고 눈물까지 글썽이며 반기는 지인 막심 막시미치에게는 싸늘한 태도로 돌아서버리기까지 한다.

레르몬토프는 작품의 서문에서 ‘우리 시대의 영웅’을 “우리 세대 전체의 악덕들로 구성되고 그것이 완전히 발현된 초상”이라고 말했다. 작가는 연작소설이자 액자소설의 형식을 빌려 여행길에 우연히 페초린을 만나게 된 ‘나’와 막심 막시미치 그리고 마지막으로 ‘페초린의 일지’ 등 세 명의 화자를 통해 주인공 페초린을 다각도로 그려냈다. 이 작품 속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전형적인 ‘영웅’은 없다. 오히려 환멸과 냉소에 물든 낭만적 영웅의 초상이 있을 뿐이다.

 

원제: Герой нашего времени

저자: Михаил Лермонтов(1814~1841)

발표: 1840년

분야: 러시아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우리 시대의 영웅

옮긴이: 김연경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32(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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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는 울고, 이야기는 흐른다

어릴 적 할머니는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해진다”는 말을 들려주었다. 이야기는 재밌는 건데, 좋아하면 왜 가난해지지? 예닐곱 살 꼬마로서는 알 수 없는 얘기였다.

할머니는 알쏭달쏭한 소리를 하면서도 손녀가 잠을 못 이루는 밤마다 이야기를 해주었다. 어떤 밤은 황금광인 줄 알고 재산을 털어 넣었다가 패가망신한 사내 얘기를, 또 어떤 밤은 미쓰꼬시 백화점 양식당에서 몰래 데이트를 하다가 시아버지 될 사람을 발견하고 줄행랑친 경성의 ‘모단걸’ 얘기를. 전등을 끈 캄캄한 방에 누워 할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궁금하고 이상한 일이 많아 잠이 더 달아났다. 겨울밤, 마루에 둘러앉은 노인들이 화로에 알밤과 쇠고기를 굽고 담배를 태우며 나누던 이웃 나라 이야기 또한 부엌에서 빈대떡을 부치던 며느리의 밝은 귀를 거쳐 밤잠 없는 아이에게로 왔다.

그래, 그런 경로로 이야기는 내게 소설보다 먼저 왔고, 역사보다 앞서 도착했다. 몇 해 전 전봉관 선생의 『황금광시대』를 읽고 나서야 할머니가 들려준 이야기가 거짓이 아니었음을 확인하게 되었지만, 이는 거짓이든 참이든 상관없는 하나의 이야기가 자립한 뒤였다. 나는 역사 이전에 이야기로 한 사내의 불가해한 삶을 미루어 짐작하고 있었다. 사내는 이야기를 좋아한 만큼 세상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을 테고, 그러니 모험을 좋아했겠지. 모험을 좋아했다면 분명 황금광을 발견했다는 친구의 말을 흘려들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내가 땅을 날리고 월급을 차압당하다 요절하게 된 사연은 옛날이야기가 흘러가듯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 모른다. 내가 태어나기 오래전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할아버지의 삶을 상상하고 이해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이야기 덕분이다.

호기심이 많아 모험을 택하고, 그래서 모진 운명을 겪는 사내는 이노우에 야스시의 『둔황』에도 있다. 송과 서하와 거란이 땅을 뺏고 뺏기던 옛날 옛적 조행덕이란 사내다. 해독할 수 없는 글자를 읽고 싶다는 욕망은 송나라 선비 조행덕을 머나먼 사막의 땅 둔황까지 이끌어간다.

옛날이야기가 늘 그렇듯 『둔황』에도 사랑에 목숨 거는 여자가 등장하고, 외인부대의 용감무쌍한 무사가 목숨을 초개처럼 버린다. 스스로 왕위에 오르는 남자와 왕위를 잃어버리는 남자 역시 빠질 수 없다. 너무 익숙한 나머지 태어날 때부터 내 핏줄 속에서 돌고 돈 뜨거운 피 같은 이야기. 누군가는 역사 로맨스나 서사시라 부른다지만, 나는 그저 담담하게 ‘이야기’라고 부르고 싶은 소설이 바로 『둔황』이다.

읽을 수 없는 글자로부터 시작한 긴 행로는 조행덕이 둔황 명사산 천불동에 5만여 점의 경전과 제 손으로 쓴 필사본을 파묻는 것으로 끝이 난다. 한 작가의 상상에 의해 펼쳐진 세계가 둔황 석굴이라는 실재의 공간, 공백으로 남은 역사와 맞닿는 지점이다. 『둔황』은 역사적 뼈대와 유적 위에 지은 소설이지만, 이원호를 제외한 인물들이 가상의 존재라는 사실이 문제되지는 않는다. 이야기 속에서 진실이란 언제나 사실과 거짓을 넘어서는 것 아니던가. 그러니 이야기는 역사에 충실히 복무하지 않아도 좋다.

글자로 인해 시작된 모험, 즉 이야기가 결국 글자로 돌아간 것은 사필귀정이겠다. 그러나 전쟁의 와중에도 목숨이 아닌 경전을 지키고자 하는 인물들의 욕망은 기이하다. 서쪽에선 회교도의 코끼리 떼가, 동쪽에선 서하군의 말발굽이 밀려오는 고립된 성 안에서 경전을 두고 피난갈 수 없다고 고집하는 승려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가 읽은 경전은 극히 미미한 숫자에 불과합니다. 아직 읽지 못한 것이 너무나 많단 말입니다. 읽기는커녕 펼쳐보지도 못한 경전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예요. 우린 경전을 읽고 싶습니다.”

읽고 싶다는 그들의 욕망은 지나치다. 그런데 그 어리석음이 익숙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것이 과연 그들만의 욕망이었던가. 고백하자면, 나 역시 이야기에 들려 있은 지 오래인데, 이 병에 약이 있다는 풍문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모래가 우는 산’이라는 뜻의 명사산(鳴沙山)에서 사라져간 인물들의 삶을 나는 단순히 허무로만 이해하고 싶지 않다. 거센 바람에 모래가 날아가듯 그들은 자취 없이 사라져갔지만, 생(生)을 걸고 묻어놓은 글자들과 이야기는 사막 속에서 온전히 살아남았으므로. 이런 식으로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한때 할아버지의 삶을 이해하려 애썼던 것과 같은 목적이다. 나에게 이야기는 과거에도 지금도 슬픔을 받아들이게 하는 유일한 방식인 것이다.

“재물과 목숨, 권력은 한결같이 그것을 소유하는 자의 것이었으나, 경전은 달랐다. 경전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불에 타지 않고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족했다. 아무도 경전을 빼앗아 갈 수 없으며, 그 누구의 소유물도 될 수 없었다.”

나는 소설 속 이 문장에서 ‘경전’을 ‘이야기’로 바꾸어 읽었다. 오독이어도 상관은 없었다. 사막의 밤에 수많은 별이 뜨고 지지만, 별들 사이로 흐르는 이야기는 결코 사라지지 않을 테니. 뜨겁게 달궈진 모래알이 바람결에 동쪽으로 동쪽으로 흘러 어느 밤잠 없는 아이의 베개 위에 내려앉으리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오현종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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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전이 둔황 석굴에 묻히게 된 사연은?

♣'둔황'줄거리

일본 역사소설의 거장 이노우에 야스시의 대표작. 이노우에 야스시는 『선데이 마이니치』에 역사소설 「유전」을 투고한 것이 인연이 되어 마이니치 신문사에 입사, 10여년간 종교, 미술, 출판 등 여러 분야에서 기자 생활을 했다. 1950년 「투우」로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했고, 이후 시와 소설을 넘나들며 왕성한 창작활동을 펼쳤다. 특히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역사에 대한 관심과 연구를 바탕으로 역사소설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76년 일본 문화훈장을 받았고 노벨문학상 후보에도 이름을 올리는 등 일본의 국보급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둔황은 중국 간쑤성 서쪽 끝자락에 위치한 실크로드의 요충지로, 둔황의 대표적인 유적인 막고굴은 현존하는 가장 완정한 불교 예술의 보고로 평가받으며 1987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되었다. 『둔황』은 20세기 초 둔황 막고굴에서 발견되어 전 세계를 놀라게 한 경전의 비밀에 착안하여, 경전이 둔황 석굴에 묻히게 된 과정을 상상을 통해 재구성한 소설이다. 작가는 허무맹랑한 공상에 의존하거나 사료에 의한 객관적 실증에만 집착하지 않고, 빛나는 상상력과 탁월한 스토리텔러로서의 재능을 역사적 사실에 접목시켜 둔황 경전의 배후에 묻힌 역사적 신비를 소설로 되살려냈다. 이 작품은 출간 당시 폭넓은 독자층의 지지를 얻으며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올랐다. 이듬해인 1960년에는 제1회 마이니치예술대상을 수상했고, 1988년에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원제: 敦煌

저자: 井上靖(1907~1991)

발표: 1959년

분야: 일본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둔황

옮긴이: 임용택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49(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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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하진 않는다

몇 달 동안 물고기를 잡지 못한 늙은 어부가 있다. 마을에서는 그를 따르는 어린 소년 하나만 그의 편이 되어 줄 뿐 아무도 ‘운이 다한’ 그를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다. 어느 날 홀로 배를 타고 망망대해로 나간 그의 낚싯바늘에 거대한 청새치가 걸려든다. 그의 배보다 더 큰 그 물고기와 이틀 밤낮에 걸쳐 드잡이를 한 끝에 그 물고기를 끌고 항구를 향해 돌아오게 된다. 하지만 해안에 도착했을 때엔 물고기는 이미 피냄새를 맡고 몰려든 상어들에 의해 다 뜯어먹히고 앙상한 뼈와 대가리만 남은 상태였다. 노인은 오두막집에 지친 몸을 누이고 아프리카 초원의 사자 꿈을 꾸며 잠든다.

누구나 다 아는 이 이야기의 작가는 어니스트 헤밍웨이다. 가없는 바다와 하늘이라는 자연의 원형극장을 무대로 펼쳐지는 이 드라마는 좌절을 모르는 불굴의 인간 정신에 대한 찬양이자 광활한 우주 속에서 고독한 단독자로 존재하는 인간의 운명에 대한 비감 어린 헌사이다. 상어와 사투를 벌이며 노인이 뱃전에서 되뇌는 “사람은 파멸당할 수는 있을지언정 패배하지는 않는다”(A man can be destroyed but not defeated)는 자신에게 주어진 고난을 정면에서 받아들이고 묵묵히 시련을 견디는 강인한 노인의 초상을 통해 고전적 휴머니즘의 정수를 보여준다. 눈부신 빛과 파도, 바람과 구름 같은 자연의 4원소가 진동하는 이 소설은, 비교하자면, 지중해의 태양과 소금기의 맛이 감도는 카뮈 같은 유럽 작가의 소설과는 다른 향일성의 감흥을 읽는 사람에게 제공한다. 거기엔 멕시코만 특유의 역사적 상흔과 생존을 위한 투쟁이 강렬한 피냄새와 뒤섞여 있다.

20세기에 행동주의 문학이란 것이 있다면 프랑스에서는 앙드레 말로를, 미국에서는 헤밍웨이를 손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자기 나라 일이 아닌데도 세계 어디선가 큰 사건이 터지면 바로 달려가서 몸으로 직접 참여하고 소설로 형상화하는 작업을 되풀이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전선에서 박격포탄에 맞아 수백 바늘을 꿰매는 대수술을 받고 은성무공훈장을 받은 전쟁 영웅, 스페인 내전에 의용군으로 참가, 2차 세계대전 동안엔 자신의 낚싯배를 개조해 독일 잠수함 U보트 수색, 노르망디 상륙작전 취재, 이 밖에도 여러 차례 아프리카 탐험대에 참가했다가 두 번이나 경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를 겪고도 불사조처럼 살아남…… 이런 작가 이력은 창백한 책상물림이 대다수인 문학판에서 이 작가가 차지하는 독특한 위상과 색깔을 잘 말해준다. 그가 즐겼다는 스포츠 역시 사냥, 바다낚시, 권투 등 거친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것들이다.

‘파파(Papa)’라는 닉네임이 말해주듯 그는 건강하고 거침없는 미국 남성상의 상징이었다. 20세기를 통틀어서 그보다 더 뛰어난 미국 작가는 여럿 꼽을 수 있겠지만 그보다 더 유명한 작가, 그보다 더 미국이라는 나라의 이미지와 부합하는 작가를 찾기란 어렵다(작가로서 그는 생전에 『타임』지에 두 번, 『라이프』지에 세 번 표지 모델로 등장함으로써 유명세를 과시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마릴린 먼로나 존 F 케네디, 엘비스 프레슬리가 그러하듯 미국을 대표하는 문화 아이콘 가운데 하나이다. 지금도 해마다 7월이 되면 미국 플로리다 반도에 위치한 키웨스트에서는 헤밍웨이를 닮은 사람을 뽑는 경연대회가 벌어진다. 전국 각지에서 허연 수염을 기른 건장한 마초들이 몰려와 그들의 영원한 우상인 헤밍웨이를 경배하는 시간을 갖는다. 노먼 메일러를 포함해서 많은 후배 작가들이 헤밍웨이의 이런 측면, 즉 문학이란 울타리를 뛰어넘어 한 시대 한 나라를 대표하는 상징성을 획득하는 과업에 도전했지만 성공하지는 못했다.

흔히 헤밍웨이의 문학세계를 말할 때 언급되는 것이 냉정하고 비인간적인 초연함을 보여주는 남자 주인공의 모습이다. 때로 스토아적 극기나 용기에 비견되기도 하는 이런 강인한 남성의 모습은 현실 공간에서든 문학 공간에서든 점차 만나기 힘든 자질이 되어가고 있다. 헤밍웨이에게 어떤 자세로 죽음을 맞느냐 하는 것은 평생 따라다닌 관심사이자 문학적 주제였다. 그는 자본주의나 공산주의 같은 이념 문제를 포함해서 모든 정치 사회적 현안을 배격한 채 비극적 세계에서 고독한 영웅주의를 추구하는 인물을 소설에 구현하고자 했다. 그에게 그 외의 것들은 다 협잡물에 다름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이 작가는 미국문학에서 아담적 전통(Adamic Tradition)을 가장 잘 계승한 작가라고 할 수 있다. 쿠바의 한적한 어촌의 오두막에 누워 아프리카 초원의 사자를 꿈꾸며 잠든 초라한 늙은 어부의 모습에서 우리가 오랜 시련에 단련된 인간만이 지닐 수 있는 위엄을 보게 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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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물고기와 사투 벌이는 늙은 어부

'노인과 바다' 줄거리

『노인과 바다』는 쿠바 연안을 배경으로 거대한 물고기에 맞서 사투를 벌이는 늙은 어부 산티아고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이다. 84일째 고기를 잡지 못하고 허탕만 치던 노인은 홀로 나간 바다에서 거대한 청새치를 잡는 데 성공한다. 이 물고기를 배에 묶어 집으로 돌아가려 하지만 피 냄새를 맡은 상어들의 공격을 받게 되고, 몇 차례의 치열한 싸움 끝에 간신히 상어들을 물리치지만 결국 머리와 뼈만 앙상하게 남은 잔해를 끌고 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노인과 바다』는 불운과 역경에 맞선 한 노인의 숭고하고 인간적인 내면을 강렬한 이미지와 간결한 문체로 그려낸 작품이다. 만년에 발표한 이 작품에서 헤밍웨이는 기존의 마초 캐릭터가 아닌, 실존적 인간이라는 새로운 인물상을 등장시켜 비극적이고 환멸뿐인 삶이지만 인간이 가져야 할 용기와 믿음, 인내에 대해 이야기했다. 거기에 더하여 ‘20세기 미국문학의 혁명’이라고 불리는 그만의 서사 기법과 문체가 성공적으로 더해지며 헤밍웨이 문학 인생이 응축된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헤밍웨이 자신도 『노인과 바다』를 가리켜 “평생을 바쳐 쓴 글” “지금 내 능력으로 쓸 수 있는 가장 훌륭한 글”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1952년 이 작품이 처음 발표된 『라이프』지 9월호는 불과 이틀 만에 500만부 이상이 팔릴 정도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에게 1953년 퓰리처상, 1954년 노벨문학상 수상의 영광을 안겨주었으며, 오늘날까지 세계문학사에 남을 불후의 명작으로 독자들에게 큰 감동을 안겨주고 있다.

 

 

 

원제: The Old Man and the Sea

저자: Ernest Hemingway(1899~1961)

발표: 1952년

분야: 미국 문학

한글 번역본

제목: 노인과 바다

옮긴이: 이인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91(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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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에 대한 사라진 열정

그런 책들이 있다. 책장을 열기 전 표지와 저자의 이름을 번갈아 쳐다보고 눈대중으로 두께를 가늠해보며 마라톤 출발선상에 선 선수처럼 긴장과 흥분, 기대와 각오로 자신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게 되는 그런 소설 말이다. 또 그런 작가들이 있다. 마지막 페이지를 다 읽고 책장을 덮었을 때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고 그저 영원히 가 닿을 수 없는 어떤 높이(깊이가 아니다)에 절망해 망연자실, 또 한숨을 내쉬게 되는 그런 작가 말이다. 살만 루슈디의 『한밤의 아이들』이 바로 그런 소설, 그런 작가다.

루슈디는 말한다. 한 사람의 인생을 이해하기 위해선 세계를 통째로 삼켜야 한다고. 그리고 자신의 말마따나 마치 이 세계를 통째로 집어삼킨 듯 무시무시한 공력으로 뭔가를 엄청나게 쏟아낸다. 그것이 단지 이야기뿐일까? 무수한 사람의 이름과 사물의 이름, 수많은 지명과 풍경들…… 인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순간에 태어난 살림 시나이란 주인공을 설명하기 위해 그는 여자와 남자, 부자와 가난뱅이, 힌두와 이슬람, 인도와 파키스탄, 혁명가와 도망자, 영국인과 인도인 등 모든 것이 뒤섞인 가계의 역사를 장구하게 펼쳐 보인다. 그래서 주인공은 어지간한 소설 한 권 분량 정도가 지나가고 나서야 비로소 세상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빅뱅처럼 그순간 모든 것이 시작된다. 국가가 탄생하고 한 남자의 인생도 같이 시작된다. 그것도 태어나는 순간 조산사에 의해 다른 아이와 바꿔치기 당한 채 말이다. 그러지 않아도 복잡하게 시작된 그의 생은 그보다 앞서 일어났던 모든 일, 그가 겪고 보고 실천한 모든 일과 그가 당한 모든 일, 즉 혼돈에 빠진 인도 전체(근작 『광대 샬리마르』에서 루슈디는 ‘인도는 이해할 수 있는 혼돈’이라는 말을 했다), 나아가 세계 전체이므로 그의 소설을 읽다보면 도대체 이 안에 없는 게 뭘까? 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 굳이 찾아볼 필요는 없다. 어차피 모든 게 다 들어 있으니까.

소설 속에서 한 인물의 전 생애를 다루려는 야심은 사라졌다. 이제 그것은 무모하고 어리석은, 그래서 촌스럽고 낡은 꿈이 된 것일까? 서사는 사라졌고 소설은 점점 더 얇아졌다. 언제부턴가 날카롭고 반짝거리는 것에의 탐닉과 스틸 사진처럼 정지된 아름다움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앙상하고 얄팍한 소설에 질려버렸다(나는 그것을 ‘밴댕이 소갈딱지 같은 소설’이라고 부른다). 벼룩처럼 하찮은 소재로 어찌 위대한 불후의 명작을 쓰겠는가!(허먼 멜빌의 말이다.)

한낱 달콤하고 요사스러운 단어의 나열이 소설이었다면 나는 아마도 소설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쓸 수 없었을 것이다. 소설은 스틸 사진이 아니라 동영상이다. 소설은 움직이는 것이며 변화하는 것이다. 소설은 시가 아니며 에세이는 더더욱 아니다. 소설은 밑줄 긋는 문장의 나열이 아니다. 소설은 직접적인 언술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통해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작 말해져야 할 바는 이야기 속에 침잠되는 법이다.

나는 여전히 긴 이야기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한 손으로 들기에도 버거운 두툼한 책을 만질 때마다 말할 수 없는 충족감을 느낀다. (최근에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를 구입해 읽기 시작했다. 그것을 끝까지 읽을지는 모르겠으나 베개 대용으로 써도 좋을 만큼 두꺼운 그 책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나는 수많은 생각과 이야기들, 수많은 문자를 수집한 한 인간의 지난한 노동에 경외감을 느낀다.) 그 두께 안에는 수많은 인간군상과 다양한 풍속, 당대를 기록하려는 차가운 산문정신, 그리고 덧없이 스러져가는 시간을 담아내려는 꿈이 담겨 있다. 강물처럼 흘러가고 말처럼 달려가는, 그들의 이 ‘전체에 대한 열정’은 여전히 나를 흥분시킨다. 고백하자면 루슈디는 진심으로 내가 표절하고 싶은 작가다. 그것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만일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를 표절할 각오가 되어 있다.

후일담 하나. 루슈디는 스스로 자신이 인도의 구전문학 전통에 큰 빚을 지고 있다고 고백한 바 있다. 그래서일까? 그가 인도에서 강연을 할 때 한 독자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그 책은 제가 쓸 수도 있었어요. 저도 다 아는 이야기였거든요.”

나는 특별히 소설가만이 알고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해본 적이 한번도 없다. 그래서 언제나 그런 이야기가 좋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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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능력을 이용해 들려주는  옛날이야기

♣'한밤의 아이들'줄거리

『한밤의 아이들』은 신화와 현실을 넘나드는 환상적인 이야기꾼이자 『악마의 시』로 이슬람교로부터 살해 위협에 시달린 세계적인 작가 살만 루슈디의 대표작이다. 1947년 8월15일 인도가 독립하는 순간 태어난 1001명의 아이들 중 12시 정각에 태어나 신생 독립국 인도와 운명을 함께하게 된 살림 시나이의 서른 해를 그렸다. 주인공인 살림은 마치 셰에라자드가 ‘천일야화’를 들려주듯 밤마다 “옛날옛날 한 옛날에”로 시작되는 매혹적인 이야기를 자신의 연인인 파드마에게 풀어낸다.

살림의 이야기는 시간을 거슬러, 유학을 떠났다 이제 막 고향에 돌아온 젊은 의사인 외할아버지로부터 시작된다. 살림은 냄새로 케케묵은 옛일까지 알아내는 엄청난 능력을 지닌 코를 이용해 외할아버지의 연애와 첫날밤 이야기는 물론, 공간을 초월해 그가 태어나던 날 함께 세상에 나온 전국 각지의 ‘한밤의 아이들’까지 불러 모은다. 이 아이들은 저마다 텔레파시, 보는 이의 눈을 멀게 하는 미모, 말로 사람을 해치는 거친 입, 시간여행을 하거나 성별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능력 등을 타고났으나 불운한 시대의 희생양이 되고 만다. 그리고 그 운명은 주인공 살림마저도 예외로 두지 않았다.

자신의 유년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 작품으로 루슈디는 1981년 출간되어 그해 부커상과 테이트 블랙 메모리얼 상을 수상했으며, 이후 부커상 25주년 기념 ‘부커 오브 부커스’, 부커상 40주년을 기념해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수상작 중 가장 사랑하는 작품을 선정한 ‘베스트 오브 더 부커’를 수상, 한 작품으로 세 번의 부커상 수상이라는 문학 사상 유일무이한 기록을 세웠다.

원제: Midnight’s Children

저자: Salman Rushdie(1947~ )

발표: 1981년

분야: 영국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한밤의 아이들 1, 2

옮긴이: 김진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79, 080(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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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의 나와 마주한 오늘



제임스 웰든 존슨의 『한때 흑인이었던 남자의 자서전』은 그 제목만으로도 나를 확 끌어당겼다. 책을 주문해놓고 이 책이 도착할 때까지, 나는 몇 번인가, 난에 물을 주거나 아이들을 위한 간식을 만들다 말고 창밖을 내다보았으며 한때 흑인이었던 남자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한때 흑인이었던 남자는 지금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흑인으로서의 그 한때는 지금, 이 남자에게는 과연 어떤 의미일까? 흑인이었음을 철저히 부정하고, 혹은 위장한 채 사는 삶, 그 남자의 오늘의 삶은 아무래도 그러……하겠지.

창밖의 나무들은 저만치 떨어져서 잎이 없는 가지들을 여전히 하늘을 향해 뻗어 올린 채 힘겹게 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내 눈에는 그 모습이 한때 흑인이었던 남자의…… 그리고 지금 나의 내부의 풍경처럼 보였다.

“이 글을 씀으로써 나는 내 삶의 큰 비밀, 지난 몇 년 동안 내 어떤 재산이나 소유물보다도 더 마음 쓰며 지켜온 비밀을 스스로 폭로하고 있음을 잘 안다.”

『한때 흑인이었던 남자의 자서전』은 파멸할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범행 사실을 털어놓아야만 하는 자의 고백으로 그 첫줄을 시작하고 있었다. 일종의 고백록인 이 자서전의 ‘나’는 백인처럼 보였고, “참 예쁜 아드님을 두셨군요”라는 감탄을 어머니에게 선물하며 살았다. 그러나 운명의 그날, 교장 선생님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나’의 세계에 들어와 “백인 학생들은 잠시 모두 일어서주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다른 백인 학생들과 함께 일어섰다. 교장 선생님은 “넌 잠시 앉아 있다가 나중에 다른 아이들이랑 함께 일어나라”고 했다. 다른 아이들은 바로 흑인, 깜둥이들이었다. 몇몇 백인 아이들의 “그래, 너도 깜둥이였구나”라는 조롱과 함께 한때 백인이었던 ‘나’는 흑인이 되었다.

‘나’는 나 자신을 드러내어 나의 감정과 자존심에 상처를 입지나 않을까 점점 더 두려워졌으며, 의도되지 않은 것이 분명한데도 모욕당했다고 느끼거나 그렇게 상상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리하여 어린아이에게는 어울릴 법하지 않은 그런 강한 열정으로 음악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어머니가 죽고 고향 마을을 떠나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 나는 음악의 세계에서 살았다. 그러나 그 세계는 도피처였고, 도피처였기에 상상과 꿈과 공중누각의 세계였다. ‘나’는 재산의 전부인 대학 입학금과 생활비를 도둑맞고 처음으로 진짜 삶, 흑인으로서의 삶을 살기로 결심한다. 구태여 밝히지 않으면 아무도 흑인으로 생각하지 않는 백인의 외모를 한 ‘나’는 스스로 흑인임을 밝히고 이제 시가 제조공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다시 운명의 그날이 찾아온다. 공장이 문을 닫게 돼 동료들과 함께 일을 찾아 뉴욕항으로 온 ‘나’는 다시 피아노를 치게 되고, 흑인만이 느낄 수 있고, 흑인만이 전할 수 있는 진정한 흑인의 음악을 찾아다니다 다시 운명의 그날을 만나게 되었다. 엄숙하고 비교적 말이 없는 이들은 모두 무장을 하고 있었고 어떤 사람들은 부츠 차림에 채찍을 들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금발의 큰 키에 호리호리하고 콧수염과 턱수염을 거칠게 기르고 반짝이는 회색 눈을 가진 그런 타입임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태워라!” 하는 소리와 함께 침목이 땅에 박히고, 밧줄이 풀리고, 가져온 쇠사슬이 희생자와 말뚝 주위로 꽁꽁 묶이고, 힘을 모으는 듯 잠시 웅크렸던 불길이 희생자의 머리까지 높이 치솟아 올랐다. 한때 사람이었던 희생자는 쇠사슬에 죄인 채 꿈틀대며 몸부림치다 신음과 비명소리를 내질렀는데, 그가 바로 ‘나’와 같은 흑인이었다.

“‘나’는 나 자신이 그렇게 다루어질 수 있는 종족의 일원이라는 사실이 수치스러웠다.”

그렇게 한때 흑인이었던 남자는 멀리 도망쳐 어느 정도 경제적으로 성공한 백인 중산층이 되었다. 지금의 ‘나’에 만족하고 달리 되기를 원하지 않게 만든 것은 아이들에 대한 사랑이다, 라고 위안하면서도 한때 흑인이었던 남자는 때때로 ‘나’는 결국 하찮은 부분을 선택한 것이라는, 한 그릇의 죽을 위해 ‘나’의 출생권을 팔아버린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승진 축하를 위해 거래처의 직원들이 보내온 난 화분에 물을 주거나 대학 입학을 코앞에 둔 아이들을 위해 서둘러 화장을 하고 입시설명회장으로 뛰어가다 말고 문득, 한 그릇의 죽을 위해, 나를 부정하고 나의 출생권을 팔았으나 ‘결국 하찮은 부분을 선택한 것’이라는 후회를 때때로…… 혹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자주하고 있다면, 당신 역시 한때는 흑인이었던 남자가 아닐까?

문득 고개를 돌려, 잎이 없는 가지들을 여전히 하늘을 향해 뻗어 올리고 있는 나무들을 바라보는데, 그 나무들이 어쩐지 힘겹게 같은 자세를 유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당신도 역시 한때는 흑인이었던 남자가 아닐까?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봐요, 당신은 피로 보나 외모로 보나 교육이나 취향으로 보나 백인이오. 왜 이제 와서 미합중국 흑인들의 가난과 무지와 가망 없는 투쟁 속에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내던져버리고 싶어 하는 거요?”라는 외부의 물음과 당신의 내면에서 끊임없이 솟아 올라오는 물음에 대한 답을 때때로, 혹은 당신이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 찾아 헤매리라는 것은 당신도, 나도, 한때 흑인이었던 남자도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이명랑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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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 정체성 갈등 겪는  '검은 미국인'

'한때 흑인이었던… '줄거리


제임스 웰든 존슨은 미국 흑인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하나이다. 1871년 미국 플로리다주 잭슨빌에서 태어나 애틀랜타 대학 졸업 후 스탠턴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고, 이후 독학으로 플로리다주 최초의 흑인 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1906년 베네수엘라 영사, 1909년 니카라과 총영사직을 역임했으며, NAACP 사무총장을 지내면서 반(反)린치법을 미 하원에서 통과시켰다. 동시에 미국 흑인문학사의 기념비적인 시집 『미국 흑인 시 선집』 등을 출간하며 동시대 젊은 흑인 작가군을 이끌었다.

동생 로저먼드 존슨과 함께 만든 곡 <모두 소리 높여 노래하자>는 지금도 미국의 흑인애국가로 불리고 있으며, 1938년 할렘에서 치러진 장례식에는 2000여명의 조문객이 참례했다.

『한때 흑인이었던 남자의 자서전』은 그가 1912년 익명으로 발표한 작품이다. 당시 흑인의 인종 문제를 진지하게 다룬 소설들은 다수의 백인 독자들에게 외면당했던 이유로 가짜 자서전의 옷을 입고 출간되었다.

‘할렘 르네상스’의 개화를 이끈 선구적 작품이며, 프로파간다 문학의 한계를 벗어나 미국 흑인문학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린 최초의 현대 흑인소설로 평가받고 있다. 말을 하지 않으면 백인으로 보이는 외모를 가진 한 흑백혼혈인이 겪는 ‘검은 미국인’으로서의 소외감과 인종 정체성의 문제를 흑인 문화와 대중예술에 관한 생생한 묘사와 함께 진솔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원제: The Autobiography of an Ex-Colored Man

저자: James Weldon Johnson(1871~1938)

발표: 1912년

분야: 미국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한때 흑인이었던 남자의 자서전

옮긴이: 천승걸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28(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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