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르몬토프, 기형도, 그리고 우리 시대의 문학청년들
삶을 문학으로 만들기, 또는 문학이라는 열병에 감염된 삶에 대한 경고는 오랫동안 있어왔다. 막스 베버는 그나마 괴테가 문학적 삶을 사는 데 성공했지만 그런 시도가 작품에 부정적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미하일 레르몬토프의 소설 《우리 시대의 영웅》은 베버의 입장에서 보면 전형적으로 삶-문학이 실패한 사례다. 주인공 페초린은 사교계의 이목을 끄는 스물다섯 살의 장교로 레르몬토프 자신의 초상이었다. 레르몬토프는 낭만주의의 세례를 입고 세계와 불화하는 존재로 본 자신에 대한 인식을 페초린에 투사했다. 페초린은 소설 속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나는 불행한 성격을 지녔어요. 교육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는지, 하느님이 나를 원래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나도 모르겠군요. 다만 내가 아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의 불행의 원인이라면, 나도 그들 못지않게 불행하다는 사실입니다.”
19세기 초 격동의 러시아에서 전쟁을 체험하고 문학을 사랑한 젊은이가 스스로를 불행한 존재로 보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넘치는 열정에 이끌려 삶과 작품을 하나로 만들려는 시도는 실패하게 돼 있다. 모리스 블랑쇼는 진정한 작가는 일기를 쓰는 작가라고 말했다. 작품에서 작가는 자아를 잃어버리고 또한 잃어버려야 한다. 작가는 작품을 쓰면서 잃어버린 자아를 회복하기 위해 일기를 쓴다. 레르몬토프는 일기를 쓰듯 작품을 썼고 작품을 쓰듯 일기를 썼다. 그 결과 작품은 자의식의 과잉으로 장광설이 돼버렸고 그의 삶은 현실 감각을 잃고 미망으로 빠져들었다. 레르몬토프는 27세에 죽었다.
레르몬토프는 삶과 문학을 뒤섞는 것의 위험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소설에서 한심한 인물로 그려낸 페초린의 라이벌 그루시니츠키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그의 목적은 소설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자기가 평화를 위해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 어떤 비밀스러운 고뇌를 겪을 운명을 타고난 존재라는 사실을 남에게 너무 자주 확신시키려고 노력한 탓에, 그 자신도 거의 그렇게 확신하게 되었다.” 그루시니츠키는 페초린과의 결투에서 사망한다. 흥미롭게도 레르몬토프 자신 또한 그루시니츠키처럼 동료 장교와의 결투에서 사망한다.
그러나 나는 레르몬토프의 실패, 정확히 말하면 실패할 줄 알고 실패한 삶-문학이야말로 19세기 러시아와 현대의 한국을 연결시켜주는 사건이라 생각한다. 문학에 감염된 비극적 인간 레르몬토프에게 삶은 무엇이었는가? “늘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 시선 하나하나, 말 한 마디 한 마디의 의미를 포착하는 것, 그 의도를 알아맞히는 것, 음모를 와해시키는 것, 속은 척하는 것, 그러다가 갑자기 그들이 간계와 계략을 써서 힘들게 만든 거대한 건물을 일격에 무너뜨리는 것바로 이것을 나는 삶이라고 부른다.” 그에게 삶은 ‘말’들의 전투, “환영과의 전투”이다. “그로 인해 나에게 남은 것은 무엇인가? 야밤에 환영과 전투를 벌인 이후에 찾아드는 피로감뿐, 동정으로 가득 찬 희뿌연 추억뿐이다. 이 부질없는 투쟁에서 나는 영혼의 열기를, 또 현실 생활을 위해 꼭 필요한 꾸준한 의지를 소진해버렸다. 그렇게 이 삶으로 들어섰을 때 나는 그것을 이미 생각 속에서 다 체험한 뒤였다. 그래서 나는 지루하고 또 기분이 더러워졌다. 이미 오래 전에 알고 있는 책의 질 나쁜 모방을 읽는 사람처럼.” 그런데 문학적 삶이라는 어리석은 꿈 때문에 환영과의 전투가 실제로 총을 겨누는 결투가 되었다. 우리는 레르몬토프를 닮은 한국의 시인 한 명을 알고 있다. 그 또한 비극적 ‘말’들의 세계에 빠져 자신의 삶을 이미 살아버린 것으로 체험했다. “나의 영혼은 검은 페이지가 대부분이다.”(기형도, ‘오래된 書籍’) “나는 헛것을 살았다, 살아서 헛것이었다.”(기형도, ‘물 속의 사막’) 기형도 또한 자기가 쓴 시를 모방하듯 20대의 나이에 극장에서 외롭게 죽음을 맞이했다.
레르몬토프와 기형도의 삶은 천재들의 예외적 삶일 뿐인가? 그렇지 않다. 21세기 청춘에게도 동일한 비극이 있다. 세계와 불화하며 삶을 고독한 여정으로 보는 개인들이 갖는 자기 환멸의 파토스가 있다. 이때 작가와 독자 모두에게 문학은 구원이자 저주다. 문학의 수다스러운 말은 세계와 자아의 비참을 표현하고 그것과 대결하게 한다. 그러다 그 말이 그저 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실재가 되어 삶을 파괴할 수도 있다. 레르몬토프와 기형도, 현대의 문학청년은 문학이라는 비밀의 언어를 통해 우정을 나누고 공동체를 이룬다.
만약 문학의 행복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일반적인 행복과 다를 것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한껏 충족된 오만함이다. 만약 내가 스스로를 세상에서 제일 훌륭하고 강력한 자로 여길 수 있다면, 나는 행복할 것이다.”
그러나 문학의 행복은 가장 나약한 자들이 벌이는 가장 치열하고 위험한 싸움에서 비롯되는 행복이다. 그 싸움이 오로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됐을 때 느끼는 행복이다.
문학은 《우리 시대의 영웅》이 슈퍼스타가 아니라 동시대의 소수자들, 고독한 패잔병들, 같은 운명을 나누는 먼 곳의 친구들임을 알려준다. 문학 작품은 성공적이어서가 아니라, 먼 곳에서 온 친구의 편지일 때에만, 내게 가없는 행복을 준다.
심보선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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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멸과 냉소에 물든 낭만적 영웅의 초상
'우리 시대의 영웅'줄거리
《우리 시대의 영웅》은 스물일곱 살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19세기 러시아의 천재 작가 미하일 레르몬토프가 남긴 유일한 장편소설이다. 이 작품으로 레르몬토프는 ‘러시아 문학이 시에서 산문으로 이행하는 것을 성취해낸 작가’라는 평을 얻었다. 또한 니콜라이 고골은 “러시아에서 그 누구도 이처럼 아름답고 정교한 글을 쓴 사람은 없었다”고 말했다.
작품의 주인공이자 ‘우리 시대의 영웅’을 표상하는 젊은 귀족 장교 페초린은 삶에 큰 의욕도 애정도 없이 염세와 냉소에 빠진 인물이다. ‘웃을 때도 웃지 않는 눈’을 하고는 자신이 속한 귀족 사회의 위선과 속물적 모습에 경멸과 조롱 섞인 시선을 보낸다. 또한 순진한 처녀에게 반해 그녀를 납치했다가도 금세 시들해져 그녀의 죽음조차 무덤덤하게 지나치고, 오랜만에 그를 보고 눈물까지 글썽이며 반기는 지인 막심 막시미치에게는 싸늘한 태도로 돌아서버리기까지 한다.
레르몬토프는 작품의 서문에서 ‘우리 시대의 영웅’을 “우리 세대 전체의 악덕들로 구성되고 그것이 완전히 발현된 초상”이라고 말했다. 작가는 연작소설이자 액자소설의 형식을 빌려 여행길에 우연히 페초린을 만나게 된 ‘나’와 막심 막시미치 그리고 마지막으로 ‘페초린의 일지’ 등 세 명의 화자를 통해 주인공 페초린을 다각도로 그려냈다. 이 작품 속에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전형적인 ‘영웅’은 없다. 오히려 환멸과 냉소에 물든 낭만적 영웅의 초상이 있을 뿐이다.
원제: Герой нашего времени
저자: Михаил Лермонтов(1814~1841)
발표: 1840년
분야: 러시아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우리 시대의 영웅
옮긴이: 김연경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32(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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