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욕망, 인간 이해의 첫걸음

어떤 작가들은 한번 만나면 혈육보다도 더 깊고 오래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나의 경우, 보들레르와 플로베르, 발자크 등이 그들이다. 발자크는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듯 소설 쓰기에 매달려 괴물처럼 살다 간 작가인 만큼, 독자로서 그의 전작(全作)을 읽어내기란 한평생으로 모자란다. 근래에 한국어로 초역된 《루이 랑베르》와 《나귀 가죽》은 인류사의 전무후무한 소설 프로젝트인 ‘인간극’의 서막을 차지한 의미심장한 작품들이다.

여기 한 소년이 있다. 루이 랑베르라는 이 소년은 다섯 살 때 우연히 구약성경을 접한 뒤 오직 책만을 끼고 살아온 유별난 존재. 발자크의 대표작 《외제니 그랑데》나 《고리오 영감》처럼 소설의 주인공 이름을 표제(表題)로 삼은 이 소설이 한층 흥미로운 것은 이 예사롭지 않은 소년의 신비로운 예지력과 광기가 발자크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점이다. 곧 《루이 랑베르》(1832)는 발자크의 자전적 성장소설인 셈. 로댕이 조각으로 재현한 괴팍하고 완고해 보이는 발자크의 모습을 깜박 잊어버릴 정도로 작가 자신이 그린 소년의 초상은 매우 신비롭고 비장하다. 지금까지 한국 독자들에게 발자크와 그의 소설에 대한 인상은 실체보다 훨씬 편협하고 고리타분한 편이다. 그런 의미에서 발자크 소설에 대한 신선한 시각을 제공하는 《루이 랑베르》와 《나귀 가죽》의 등장은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다.

발자크는 백 편에 이르는 총체소설 ‘인간극’을 집필하면서, 마치 과학자처럼 획기적인 작법을 창안해 적용하는데, 대표적인 예가 ‘인물재등장 수법’이다. 루이 랑베르가 18세에 방돔기숙학교를 나와 만난 여인 폴린은 《나귀 가죽》의 라파엘 발랑탱이 사랑하는 여인의 이름이기도 하다. 또한 《나귀 가죽》에서 라파엘에게 처음 페도라를 소개해주는 인물인 라스티냐크는 훗날 《고리오 영감》에 재등장한다.

『루이 랑베르』와 『나귀 가죽』은 발자크가 2500여명에 달하는 인간들을 소설에 등장시킨 인간극』의 세 가지 범주, 즉 ‘풍속 연구’ ‘철학 연구’ ‘분석 연구’ 중 ‘철학 연구’ 편에 속한다. 나폴레옹이 검으로 세계 제패를 이룩했듯이 발자크는 펜으로 세상을 평정하려고 했다. 《나귀 가죽》(1831)은 이러한 거대한 야망으로 변호사의 길을 버리고 작가의 길로 뛰어든 발자크가 10년 가까이 무수한 시도와 참패 끝에 대중의 환호를 받은 첫 ‘물건’이다. 여기에서 물건이라 지칭한 것은 이 소설이 당시 인쇄출판업과 독서매체의 활성화에 따른 베스트셀러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고, 나아가 소설이라는 장르가 ‘상품’으로서의 교환가치를 획득하면서 자본주의 산업의 총아로 급부상하는 길목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여기 한 청년이 있다. 그의 이름은 라파엘 발랑탱, 그는 지금 파리 센 강가를 걷고 있다. 때는 1830년 7월 혁명이 파리를 휩쓸고 지나간 어느 오후. 파리는 혼란 속에 새로운 체제를 모색 중이다. 센 강을 배회하고 있는 라파엘의 머릿속은 온통 자살 생각뿐이다. 정치 과잉의 시대, 자본 과욕의 시대, 파리 사교계의 꽃 페도라를 향한 과도한 열정이 무위로 끝나고, 그러는 사이 생의 에너지를 모두 소진해버린 결과다. 그의 가슴에는 환멸만이 가득하고, 그의 뇌리에는 오직 죽음의 욕망만이 들끓고 있다. 그런 그 앞에 골동품상 노인이 나타난다. 노인은 그가 원하는 것, 그러니까 그가 그토록 죽고 싶어 하는 이유를 듣고는 그의 손에 한 가지 희귀한 물건을 건네준다. 그것을 가지고 있으면 원하는 것은 모두 이루어지는 신비한 마법의 가죽이다. 일명 나귀 가죽. 단 명심해야 할 것은, 그것을 소유한 사람은 그것을 사용하는 만큼, 생명이 줄어든다는 것. 거래의 법칙은 공정하다. 젊음(생명)을 얻기 위해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와 거래한 파우스트의 그것처럼(괴테, 《파우스트》(1831).

《나귀 가죽》은 근래 내가 읽은 인류의 걸작 소설 중에서도 가장 매혹적인 작품에 속한다. 라파엘 발랑탱을 중심으로 소설이 전개되지만, 사실 이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은 ‘욕망’이다. 소설의 전언은 간단하다. 욕망하라, 그러나 대가를 치르라. 발자크 이후, 플로베르가 한갓 통속소설인 《마담 보바리》(1857)로 현대 소설의 선구자로 평가받은 이유는 주인공 엠마의 ‘욕망’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워 ‘욕망’에 사로잡힌 인간의 행로를 구체적으로 재현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이후 현대 소설의 주인공들에게 문제적으로 요구되는 것이 ‘욕망’의 허구화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들 소설의 주인공들, 곧 현대인들의 마음을 대상으로 하는 철학, 심리학, 사회학, 정신분석학의 화두 또한 ‘욕망’임은 이미 잘 아는 사실이다.

나귀 가죽은 그것을 소유했던 라파엘 발랑탱의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 사실 루이 랑베르와 라파엘 발랑탱은 한 영혼, 한 몸이다. 둘 다 나귀 가죽을 뒤집어 쓴 채 생의 저편으로 사라진 욕망의 화신들이다. 비상한 독서욕에 사로잡힌 신동(神童) 랑베르는 나귀 가죽을 소유한 발랑탱처럼 총량이 정해진 생의 에너지(욕망)를 과도하게 쓴 탓에 스물여덟 살의 젊은 나이에 눈을 감고 만다. 그들은 사라졌지만, 돌아보면 도처에 나귀 가죽이 눈에 띈다. 그것은 쥘리앙 소렐(스탕달, 《적과 흑》, 1830)의 이름으로, 또 엠마 보바리의 이름과 동거하며 소설 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발자크라는 초개인적인 작가의 이름 속에.

함정임(소설가)
--------------------------------------------------------------
소원 이뤄주는 마법의 나귀 가죽을 얻는데…

♣'나귀 가죽' 줄거리


『나귀 가죽』은 프랑스의 대문호 발자크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1831년 ‘철학 소설’이라는 부제를 달고 출간되어 발자크에게 명성을 안겨준 작품이다. 발자크가 자신의 소설 작품 전체에 이름 붙인 『인간극』은 그가 현실의 세계에 대응할 수 있도록 만든 또 하나의 우주라 할 수 있는데 『나귀 가죽』은 『인간극』의 목록에서 ‘철학 연구’의 맨 앞자리에 배치되어 있는 중요한 작품이다. 『나귀 가죽』의 주인공 라파엘은 수상한 골동품상 노인에게서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이루어주는 마법의 나귀 가죽을 손에 얻게 된다. 가죽은 목숨을 담보로 라파엘을 부자로 만들어 주고 사랑하는 여인인 폴린과 재회하게 하지만 바람이 이루어질 때마다 가죽의 크기는 점점 줄어들고 만다. 이렇게 『나귀 가죽』은 한 편의 ‘철학 소설’ 혹은 ‘테제 소설’로서 생의 에너지의 총량을 의미하는 가죽을 통해 ‘욕망을 위해 존재의 파멸을 부를 것인가, 아니면 존재의 지속을 위해 욕망을 억제할 것인가’라는 선택이 불가능한 모순된 문제를 제기한다.

1833년 출간된 『루이 랑베르』는 『나귀 가죽』 이후 발자크가 두 번째로 발표한 ‘철학 연구’에 해당하는 작품이다. 여덟 살 나이에 부모에게 버림받다시피 기숙학교로 보내졌던 발자크 유년의 모습을 그린 자전적 소설인 『루이 랑베르』는 깊은 명상으로 몸과 정신을 분리해 절대적 사유의 경지에 도달해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한 소년의 욕망과 그에 따른 비극적 결말을 그렸다.



서지 정보

원제: La Peau de chagrin

저자: Honor de Balzac(17993~1850)

발표: 1831년

분야: 프랑스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나귀 가죽

옮긴이: 이철의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13(2009년)


728x90

 

 

지리멸렬의 미학

원고 청탁과 함께 도서목록을 받은 나는 단번에 시마자키 도손의 《파계》를 선택했다. 순 제목 때문이다. 파계(破戒). 경계를 무너뜨리다, 금기를 거부하다, 뭐 그런 뜻인데, 이런 거 일단 매력적이다. 케케묵은 질서를 깨뜨리는 통쾌함 같은 게 기대된다. 갈등과 파란이 생겨나겠지만 그것을 거쳐야 새로운 질서가 만들어지지 않던가.

아무튼 정보가 없는 데다 일본소설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미모의 공주님을 꿰차고 야반도주하는 심복무사나 무리한 압박을 가하는 아버지를 업어치기하는 아들 이야기인줄 알았다. 아니면 (작가 약력에 잠깐 나오는) 조카와의 불륜을 떳떳한 사랑으로 선언한다거나.

그런데 읽어 보니 신분 문제를 다뤘다. 백정 집안 출신의 한 남자가 사범학교를 마치고 교사가 되었는데 천한 계급 출신이라는 것을 들킬까봐 전전긍긍한다는 내용이다. 상당 부분 지리멸렬하다. 그럴 수밖에. 석회처럼 굳어진 봉건시대의 위계를 단번에 뛰어넘는 사람은 없으니까. 정신의 DNA에 박혀 있는 유전인자 같은 것이니까. 그래서 끙끙 앓는 심정이 매번 위태롭고 절절하다. 지리멸렬도 이 정도면 호소력 있다. 풍경과 심리묘사의 연결도 뛰어나다. 그만큼 주인공 우시마쓰의 불안이 깊다는 소리이면서 전근대의 유물이 얼마나 끈질긴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그 시절 신분은 대략 네 가지였다. 가장 위는 왕족. 그들은 세상이 자기들 거여서 자기들끼리 싸웠다. 그 아래가 귀족계급인데 한두 명한테만 잘 보이면 떵떵거리고 살 수 있지만 간혹 줄을 잘못 서서 망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대다수인 평민계급. 농사도 지어야 하고 세금도 내야 하고 군대도 가야 하는 이들은 천민을 공격적으로 천시하면서 삶의 고단함을 풀었다. 지금도 누군가를 괴롭히는 아이들은 십중팔구 누군가에게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이다. 지배계급에게 찍소리 못 하는 자신의 신세를 이런 것으로 위안을 삼았으니 맨 아래 천민계급은 더 이상 갈 데가 없는, 멸시의 도착점이었다.

그러니 이런 말이 생겼을 것이다. 129쪽에 나오는 문구이다. ‘손님들에게는 차를 대접하지 않는 것이 백정 집안의 예의였다. 담뱃불을 나누는 것조차 꺼렸다.’ 보통 백정하면 소나 돼지를 도축하는 사람으로 아는데 그 업을 포함하여 유기제조업(柳器製造業), 육류판매업 등으로 생활하던 천민층을 싸잡아 일컬었던 말이다. 유(柳)는 버드나무다. 예전에는 버드나무 가지로 생활도구를 만들었다. 물건을 구하려면 그들의 처소를 방문하게 되는데 차를 내온들 마시겠는가. 뭔가를 같이 먹는다는 것은 서로 교류를 한다는 뜻인데 말이다.

소설은 주인공의 하숙집에 잠시 머물던 오히나타라는 사람이 쫓겨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오히나타는 돈이 많은 사람인데 백정 출신이라는 게 알려져버린 것이다. 그 장면을 보고 주인공은 곧바로 하숙을 옮겨버린다.

‘어떤 경우를 당하더라도, 어떤 사람을 만나더라도 결코 백정이라고 고백하지 마라. 한때의 분노나 비애로 이 훈계를 잊으면 그때는 사회에서 버려지는 거라 생각해라.’ 16쪽에는 이렇게 아버지의 사무친 가르침이 나온다.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 동족집단에서 멀리 빠져나와 나름의 신분 세척을 거치기까지 했다.

여담 하나. 나는 태어나 보니 남자였다. 아무런 선택권 없이 남자가 된 것이다. 내 밑의 동생은 여자다. 그 애도 자신이 여자를 선택한 기억이 없단다. 어른 여자가 담배를 피우면 흥분해서 야단치는 남자들이 아직도 있다. 그들도 나처럼, 무슨 시험에 합격하거나 어렵고 힘든 코스를 수료해서 남자 자격증을 받은 기억이 없을 것이다. 똑같은 사람인데 왜 담배 가지고 그러냐고 따지면 궁색하게 답변한다. 그야 건강에 안 좋아서. 참, 언제부터 그렇게 남의 집 딸 건강을 걱정하고 살았는지는 모를 일이나, 대부분 이런 부류들, 담배 꼬나물고 침 찍찍 뱉고 있는 고3 남학생들에게는 아무 말 못 한다.

이 소설에도 주인공이 천민 출신이라는 것을 눈치채고 교활하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부류들이 등장한다. 우시마쓰는 천민 출신의 철학자이며 행동가인 이노코 렌타로를 존경하지만 스승처럼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말 그대로 지리멸렬하다가 결국 사람들 앞에서 무릎을 꿇고 실토하기에 이른다. 학교에 사직서도 낸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우리나라 대하소설 《임꺽정》이 내내 떠올랐다. 답답해서 그랬을 것이다. 읽어본 사람은 아시겠지만 임꺽정은 백정 출신이다. 계급사회에 대한 분기와 불만이 하늘을 찌른다. 그의 스승인 양주팔, 별명하여 갖바치도 백정 출신이다.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은 등장인물들이 계급사회의 불합리에 대해 전투적으로 달려드는 활극이다. 그에 비해 ‘파계’는 계급에 짓눌린 개인의 고뇌를 깊이 있게 다뤘다. ‘임꺽정’의 백정이 부조리한 세상을 향해 칼끝을 겨눴다면 ‘파계’의 백정은 칼끝을 자신에게 겨눈 셈이다. 그래서 더 아프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그럼으로써 자신을 옥죄고 있던 사슬에서 마침내 벗어난 우시마쓰에게 미국으로 건너갈 수 있는 행운이 찾아온다. 짝사랑하던 오시호와 장밋빛 미래의 뉘앙스도 깔린다. 이런 결말 부분이 좀 촌스럽기는 하지만 1906년에 발표되었던 소설이라서 이해하고 넘어간다.

---------------------------------------------------------

백정 출신임을 밝히기로  결심하는데…

《파계》는 시마자키 도손의 첫 장편소설이자 대표작이다. 도손은 1897년 시집 《약채집》을 발표하며 작가 활동을 시작했고, 연이어 세 권의 시집을 출간하며 메이지 시대 낭만주의 문학의 선두자로 평가받았다. 이후 시 창작 활동을 접고 나가노현에서 6년간 교사로 근무한 그는 1906년 공백기를 깨고 《파계》를 발표하며 낭만주의 시인에서 자연주의 소설가로 변신에 성공한다. 《파계》는 일생의 계율을 깨뜨리려는 청년 교사의 고뇌를 그린 소설로 천민 차별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며 출간 당시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나쓰메 소세키로부터 “후세에 남겨야 할 명작”이라는 극찬을 받았으며, 현실을 직시하는 적나라한 묘사와 건조하고 기교 없는 문체로 일본 자연주의 문학의 막을 연 기념비적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도손은 이외에도 《봄》《집》 등을 통해 소설가로서의 입지를 굳혔고, 말년에는 일본 근대문학의 걸작 중 하나로 꼽히는 역사소설 《동트기 전》을 발표했다.

백정 출신의 교사 우시마쓰는 천한 신분 때문에 사회에 나가지 못하고 산속 부락에 숨어 사는 아버지가 ‘절대 신분을 밝히지 마라’고 한 말을 줄곧 가슴에 품고 살아왔다. 그러나 같은 백정 출신의 사상가 이노코 렌타로가 당당히 신분을 밝히고 차별에 맞서는 모습을 보며 동경을 품게 된다. 그러던 중 갑작스럽게 아버지의 죽음을 겪으며 여태껏 계율처럼 여겨온 말을 어기고 싶은 파계의 욕구와 두려움 사이를 오가며 번뇌한다. 결국 우시마쓰는 모든 것을 밝히기로 결심하는데….

원제: 破戒

저자: 시마자키 도손(1872~1943)

발표: 1906

분야: 일본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파계

옮긴이: 노영희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25(2010년)


728x90

 

 

부조리한 삶에 갇힌 자의 고독

글만 써서 먹고 사는 전업작가 생활 25년에 딱 한 번 직장생활을 한 적이 있다. 길지도 않은 6개월에 불과한 그 직장생활 덕분에 나는 어쩌면 거의 모험에 가까운 ‘위험하고 고독한’ 전업작가의 길을 여전히 고수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작가가 되고 3년쯤 지난, 결혼을 앞둔 때였다. 어느 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느지막이 일어나 브런치를 만들고 있었는데 불현듯 ‘가장’이라는 단어가 뒤통수를 가격했다. 느닷없는 습격에 나는 계란 프라이가 바짝 타들어가는 것도 잊은 채 멍하니 자취집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혼자 사는 동안 단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체증과도 같은 무거운 압박감에 1주일을 내리 시달렸다. 취직은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았다.

첫 직장이자 ‘내 생애 마지막이 될 가능성이 농후한 직장생활’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두어 달쯤 지났을 때 결혼을 했고, 미어터지는 출근버스를 피하기 위해 일찍 집을 나서는 데도 익숙해져가고 있었다. 그렇게 몇 달이 더 지났을 때, 뭔지 모르게 이상했다. 가장이라는 압박감과는 또 다른 종류의 체증이 가슴 한켠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청탁받은 원고의 마감 기한은 맹렬한 속도로 다가왔고, 속절없이 지나갔다. 몇 번 기한을 연장했지만 끝내 원고를 넘기지 못한 채 펑크를 내는 일이 되풀이되었고, 나는 6개월 동안 단 한 줄의 ‘내 글’도 쓰지 못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제 사직서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다. 서른두 살 때의 일이다.

다니던 회사에 사표를 내고 다시 전업작가로 돌아온 봄날 오후, 서가로 무심히 뻗친 내 손에 얇은 책 한 권이 잡혔다. 한 해 전, 출판사 편집장으로 있던 친구가 신간을 냈다며 보내주었던 이오네스코의 소설 《외로운 남자》였다. 그냥 쓱 훑어보고 책꽂이에 꽂아놓았던 그 책이 그날 내 손길에 뽑혀져 나온 것이다. “나이 서른다섯이면 인생 경주에서 물러나야 한다. 인생이 경주라면 말이다. 직장 일이라면 나는 신물이 났다. 예기치 못했던 유산을 물려받지 않았더라면 난 권태와 우울증으로 죽고야 말았으리라”로 시작하는 ‘외로운 남자’는 단번에 나를 사로잡았다. 서가에 붙어 선 채로 나는 소설 속으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대머리 여가수> 등으로 부조리극을 대표하는 세계적 극작가 이오네스코에게 ‘외로운 남자’는 그의 유일한 소설이다. 연극 데뷔작인 《대머리 여가수》가 초연된 후 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의 일이다. 스스로 밝혔듯 ‘외로운 남자’는 희곡인 《진흙》과 《난장판!》과 함께 자전적 3부작을 이루는 작품이다. 자전적 작품이라는 사실은 ‘왜 갑자기 소설?’이라는 의문에 대한 답이기도 하다. 대화로만 이뤄지는 희곡과는 달리 소설은 지문을 통해 자신과 자신이 처한 현실, 시간과 공간, 온갖 인물들에 대한 생각, 역사와 사회에 대해 자유롭게 설명하고 묘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외로운 남자’ 속에 편재하는 도저한 허무, 폭발할 것 같은 분노, 정치하면서도 날아갈 듯 가벼운 인식들은 오직 배우의 대사에다 작가의 생각을 모두 담아내야 하는 희곡으로선 버거운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외로운 남자’는 만일을 대비해 침대 옆 탁자 위에 자명종을 놓았으나 항상, 거의 항상 자명종이 울리기 조금 전에 깨어서는 ‘매일 똑같은, 고통스러운 강제노동’에 시달리던 파리의 15년차 한 직장인이 미국에 사는 낯모르는 친척이 남긴 예기치 못한 유산 덕분에 아침에 호텔 방을 나올 때면 휘파람을 불며 계단을 경쾌하게 내려와 열시고 열한시고 그저 내키면 길로 나서는, ‘즐겁고 행복한 자유인’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다. 그는 허접한 싸구려 호텔에서 벗어나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가정부를 두며, 더 이상 지각하지 않아서 출근부에 서명할 수 있었을 때의 환희와 출근부를 걷어가고 삼십 초 후에 도착했을 때의 격분에 휩싸이지 않아도 되었지만, 동시에 과거란 항상 아름답고 다정하며 그리운 법인데 이를 너무 뒤늦게 깨닫기도 하고, 정확히 정해진 목표가 있는 양 앞을 향해 똑바로 달려나가는 ‘서로 닮은 수만 명의 사람들’로 가득 찬 거리를 바라보다가 ‘마치 개들로 가득 찬 거리 같다’고 생각하며 ‘어디로 가는지 아는 듯한 꼴로 그렇게 달리는 것은 개들뿐’이라는 회한에 휩싸인다. 결국 조직의 한 부품에서 자의식을 가진 독립적 존재로 바뀌었지만 암울과 허무의 대상이 조직에서 세계, 혹은 우주로 환치되었을 뿐 여전히 삶의 부조리, 혹은 부조리한 삶의 늪에 빠져 있음을 ‘고독’하게 인식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직장에 막 사표를 던진 30대 초반에 처음 읽었던 ‘외로운 남자’를 50줄에 들어서 다시 읽으며 문자 그대로 만감이 교차했다. 읽는 내내 미열이 오른 듯 이마가 뜨거웠다. ‘외로운 남자’의 주인공이, 혹은 이오네스코가 절감한 해명되지 않는, 해명될 수 없는 삶의 부조리는 오랜 기간 직장에 매이지 않은 채 자유인으로 살아온 나 역시 비껴갈 수 없는 운명이라는 사실은 결국 인간은 외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절감시킨다. 조직의 일원에서 벗어나 독존(獨存)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하기는 싫다. 그냥 그렇고 그럴 따름이다. 우주의 대감옥 내부에 그것보다는 작고 내게 맞춤한 감옥을 만들었다. 내가 살 만한 한 귀퉁이를 마련한 것”이라는 주인공의 독백이 허탈하게 읊조리는 허무의 송가가 아니라 놀라운 지혜의 시로 읽히는 이유를 오십이 되어서야 알게 되다니…….

---------------------------------------------------------
존재의 근원을 찾아가는 한 인간의 여정

♣‘외로운 남자’줄거리

베케트, 아다모프, 주네와 더불어 현대 부조리극의 대표 작가로 꼽히는 이오네스코의 유일한 소설이자 자전적 작품. 이오네스코는 1950년 첫 희곡 《대머리 여가수》를 발표해 프랑스 문학계와 연극계에 큰 충격과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의자》《코뿔소》 등 20여편의 희곡을 발표하며 원숙기에 이르렀고, 이어 《노트와 반노트》《과거의 현재, 현재의 과거》《발견》과 같은 산문을 통해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통찰하기 시작한다.

《외로운 남자》 역시 이런 통찰의 연장선상에 위치하는 작품으로 이오네스코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인간 사이의 소통의 어려움, 인간의 존재 조건인 고독과 죽음의 문제,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을 탁월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오네스코는 20세기 후반 50년간 파리에서 하루도 빠짐없이 작품을 올리며, 프랑스어로 쓰인 희곡 작품 가운데 가장 널리 공연된 보편적 작가로 현재까지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예기치 않았던 유산을 상속받은 주인공은 일상의 속박에서 벗어나 자신의 삶과 주변 여건, 더 나아가 인간이 처한 근원적 조건을 둘러볼 여유를 갖게 된다. 주인공은 이 우주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하는 근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질문에 봉착하지만 질문에 대한 답을 찾지 못해 좌절하면서 일상의 삶에 매몰돼간다. 존재의 근원을 찾아가는 한 인간의 여정을 그린 소설로 파스칼의 《팡세》, 사르트르의 《구토》의 계보를 잇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원제: Le Solitair

저자: Eugene Ionesco

발표: 1973년

분야: 프랑스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외로운 남자

옮긴이:이재룡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47(2010년)

728x90

 

두 종류의 우산


몇 년 전에 큰 사고를 당했다. 길고긴 입원 생활이 끝난 후, 어느 날부턴가 나는 거짓말처럼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슬금슬금 다가오다가 나를 덮치는 꿈이었다. 빛은 꺼질 줄을 몰랐다. 땀에 흥건히 젖은 채로 벌떡 일어나는 일이 잦아졌다. 어느 날 새벽, 여느 날처럼 악몽에서 깬 나는 한동안 미친 듯이 낄낄거렸다. 헛웃음은 그칠 줄을 몰랐다. 이 순간에 하필 시가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다니! 그야말로 기가 차다가 콱 막힐 노릇이었다. 그날 이후, 악몽은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어떤 진실은 거짓말보다 더 감쪽같다는 걸 알았다. 빛은 꺼졌고 헛웃음은 그쳤다. 나는 예전처럼 밝아졌다. 아주 가끔, 내가 빛이 되는 희미한 상상을 하기도 했다.

게나치노의 《이날을 위한 우산》을 읽는 내내, 지난 몇 년간의 특정 장면들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애인을 잃고 사례금을 삭감당한 주인공의 모습이 자신감과 용기를 상실했던 당시의 내 모습과 자꾸만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알다시피 누군가나 무언가를 잃는다는 것은 불편하거나 마음 아프고, 종종 참을 수 없이 끔찍하다. 그러나 주인공은 결코 좌절하지 않는다. 그는 이때껏 하던 대로, 그것을 감정하고 평가하기 위해 새로 나온 구두를 신고 하염없이 걸을 뿐이다. 여기서 저기로 한 발짝 한 발짝 걸음을 뗄 뿐이다. 이것은 단순히 마음의 평정을 되찾기 위한 산책이 아니다. 그는 다분히 직업적으로 걸을 뿐이다. 그리고 최악의 상황에 마주했을 때, 하던 일을 평소와 다름없이 행하는 일은 그 무엇보다 어렵다. 울분을 삭이는 데 써야 할 힘까지, 일상에 통째로 바쳐야 하기 때문이다.

힘내어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일정 정도의 체념은 필요하다. 하지만 체념하는 시간이 너무 길어지면 삶은 급기야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주인공은 자기가 제일 잘하는 일을 한다. 별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시곗바늘만 망연히 바라보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어떻게든 견디긴 견뎌야 하니까. 난국을 타개하는 데 있어, 언제나 거창한 비책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럴 때일수록 심하게 요동하지 않고 원래의 자리에 서 있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이를 악물고 자신(自信)을 잃지 않으려고 애써야 가까스로 자신(自身)을 지켜낼 수 있다. 수많은 등장인물들 중 주인공만 유일하게 이름이 제시되지 않는 것도 다 이 때문이다. 그렇다. 게나치노는 주인공을 저 먼 3인칭이 아닌 우리 곁에 놔두고 싶은 것이다. 그가 바로 나이므로, 너이므로, 우리이므로. 우리는 그에게 우리 자신을 투영하고 혼잣말을 한다. 모두가 다 영웅이 될 필요는 없어. 우리는 묵묵히 우리 몫을 하면 돼.

그러므로 이 소설은 ‘그러고 나서’의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어떤 반짝이는 순간을 맞이하고 나서의 이야기. 으레 그 순간은 예고 없이 닥친다. 우리는 가만히 사색에 잠기고 기억 속에서 아득한 과거를 끄집어낸다. 이를테면, 차가운 빗방울 하나가 손등 위에 떨어졌을 때를 떠올려보라. 이물감으로 인해 살갗은 떨리기 시작하고 머릿속에서는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다. 바로 그때가, 그때의 거기가, 그 현장에 함께 있었던 당신이라는 사람이. 그러고 나서 그리움과 슬픔, 환희와 놀라움이 뒤섞인 이상한 감정이 고개를 든다. 참, 나에게도 예전에 이런 순간이 있었지!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인다. 틀에 박힌 일상은, 이제야 비로소 조금 눈부셔진다. 이것을 담아내는 게나치노의 문장은 그 순간들만큼이나 반짝반짝 빛난다.

슬프게도, 그 반짝이는 순간이 언제나 우리에게 희망만 물어다주는 것은 아니다. 제비가 물어온 씨앗이 어떻게 자라날지 우리는 전혀 알지 못한다. 거기에는 인생을 송두리째 변화시킬 시한폭탄이 들어 있을 수도 있고 생각지도 못한 무시무시한 절망이 도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저 그 씨앗을 땅에 묻은 뒤 물을 주고 거름을 뿌려 그것이 잘 자라나게 하는 수밖에 없다. 무식하게 보일지라도,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주인공 역시 어떻게든 삶은 계속된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소소한 것에 더욱더 신경을 기울인다. 그는 옆 테이블에 자리한 소년의 행동에 눈길을 주기도 하고, 길바닥 위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사탕 포장지를 관찰하기도 한다. 이처럼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작은 것에 마음을 주고 거기서 비록 보잘것없을지언정 빛 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 여유다. 그 빛 한 점을 덩어리로 키우는 데, 약간의 유머와 익살이 도움이 되는 것은 물론이다. 그러는 사이, 나도 모르게 인생의 다음 장이 펼쳐지고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을 끝까지 다 읽고 나면 아마 마지막 마침표 다음에 새로운 문장을 적고 싶어질 것이다. 남아 있는 게 거의 없는 공간에 홀로 남겨질지라도, 우리는 마지막까지 남은 것을 어떻게든 그러쥐고 싶어 하니 말이다. 필사적으로 살아남는 데 성공한 자기 자신을 말이다. 그리하여 이제 충분히 단단해진 우리는 온몸을 활짝 펼친다. 스스로 “이날을 위한 우산”이 되어 세차게 쏟아지는 이 세계의 비를 맞는다. 끄떡없지는 않지만, 그렁저렁 견딜 만하다. 내일은 오늘과 같거나 아주 조금 다를 것이다. 그걸 불행이라고 여기거나 다행이라고 긍정하는 것은 순전히 당신 몫이다. 그냥 우산이 되거나, 어떤 빗줄기도 막아낼 수 있는 튼튼한 우산이 되거나.

---------------------------------------------------------
독일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빌헬름 게나치노는 1943년에 태어나 요한 볼프강 괴테대에서 독문학, 철학과 사회학을 전공했다. 1965년 작가로 등단했고, 1977년부터 2년간 소시민의 삶을 그린 삼부작 소설 《압샤펠》 《불안의 근절》 《거짓된 세월》을 발표해 명성을 얻었다. 1989년 소설 《얼룩, 재킷, 방, 고통》으로 브레멘 시 문학상을 수상했고, 이후 소외된 존재들에 시선을 돌려 작품 속에서 다양하게 형상화해 ‘하찮을 정도로 작은 사물들의 변호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2001년에 발표한 《이날을 위한 우산》으로 독일 최고의 문학상인 게오르크 뷔히너상을 수상했다.

“경이롭고 철학적인 책” “매혹적인 소설, 가볍고 명료하다”는 극찬을 받은 ‘이날을 위한 우산’에는 흔히 말하는 ‘성공한 인생’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등장한다. 소설의 주인공은 스스로를 “교육만 많이 받은 아웃사이더” “현대판 거지”라고 칭하며, 수제화의 편안함 정도를 시험하는 일로 먹고산다. 그의 친구들 역시 ‘루저’의 전형이다. 게나치노는 이처럼 특별할 것 없는 인물들의 평범하고 틀에 박힌 일상을 통해 ‘그래도 산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고 긍정할 수 있는 힘을 전한다. 그렇기에 ‘이날을 위한 우산’은 고통으로 가득 찬 먼지투성이의 삶을 묵묵히 몸으로 견뎌내는 사람들, “자신의 삶이 하염없이 비만 내리는 날일 뿐이고, 자신의 육체는 이런 날을 위한 우산일 뿐이라고 느끼는 그런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원제: Ein Regenschirm fur diesen Tag

저자: Wilhelm Genazino(1943~ )

발표: 2001년

분야: 독일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이날을 위한 우산

옮긴이: 박교진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55(2010년)

 

 

 

 

728x90

 

 

김민정 시인


엄마는 아무나 하나


내 나이 서른여섯에 엄마는 뭘 했나, 떠올려본 적이 있다. 지난 추석 때였고, 대낮부터 전 부치는 엄마 옆에서 그걸 안주 삼아 막걸리를 마시다가 살짝 취기가 돌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든 거다. 어쩌다 저 여자는 나를 갖고 나를 낳아 나를 버리지 못해 안달인 내 어미가 되었나. 세상하고많은 사람들 가운데 왜 하필 우리가 모녀라는 이름으로 묶였나. 엄마가 손으로 찢어 입에 넣어준 묵은 김치를 씹으며 나는 엄마의 장례를 치르고 와 가장 먼저 한 것이 울면서 엄마의 김치를 냉동실에 얼리는 일이었다고 고백한 한 사람을 떠올렸다. 가히 그는 천재다, 이런 고마운 힌트라니.

엄마 나이 서른여섯에 난 초등학교 6학년이었으니 엄마는 그야말로 진짜배기 엄마였던 셈. 회가 먹고 싶다고 하면 그때부터 회칼을 썩썩 갈아 생선살을 뜨기 시작하는 게 엄마였고, 마당을 부리나케 쏘다니던 쥐새끼를 장독대 뒤로 몰아서는 연탄집게로 찍, 여보란 듯 눌러 죽이는 것도 엄마였으며, 키우던 진돗개가 동네 개천에 빠졌을 때 동시에 첨벙, 그 더러운 시궁창에 뛰어들어 원더우먼처럼 한 팔에 개를 안고 나온 것도 엄마였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에 도둑이 자주 출몰한다는 소식이 나돌자 엄마가 꺼내 보인 것이 있었으니 다름 아닌 가스총이었다. 장난감이 아니라 진짜 총을 처음 만졌을 때의 그 소름 끼치는 차가움이라니, 엄마는 가스총을 장롱 선반 위에 올려놓으며 이렇게 말했다. 이제야 좀 안심이 되네.

여기 총을 가진 또 한 명의 엄마가 있다. “역경을 겪느라 아주 괴짜가 된 엄마는 이 권총을 언제나 가방에 넣고 다녔다”지. 우와, 장롱도 아니고 가방에 넣고 다닐 정도라면 이 엄마, 엄청 센 아줌마 맞다. 그러나 걱정 마시라, 물론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엄마니까. 앤절라 카터의 소설집 《피로 물든 방》 속 표제작 ‘피로 물든 방’에는 이렇게도 터미네이터 같은 캐릭터로 분한 엄마가 나오신다. “사랑을 위해 기꺼이, 욕먹으며, 반항적으로 가난을 택한” 이 엄마는 군인이었던 남편이 “전쟁에서 영영 돌아오지 않았고 부인과 자식에게 유산으로 아직도 마르지 않은 눈물과, 훈장으로 가득 찬 시가 상자와 낡은 연발 권총”밖에 남겨주지 않은 까닭에 이 총을 받아들게 된다. 총, 그러니까 엄마가 달라고 해서 뺏은 것도 아니고 쏠 일이 생겼을 때 쏠 수밖에 없음을 감안한 세상이 직접 내어준 것이 바로 이 총이었던 것이다.

앤절라 카터의 《피로 물든 방》을 읽어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열 편의 이야기 모두 어딘지 모르게 낯익은 그림자의 잔상을 풍긴다. 그 뼈대를 우리에게 널리 알려진 여러 동화에서 빌려왔기 때문이다. 예컨대 ‘푸른 수염’, ‘미녀와 야수’, ‘장화 신은 고양이’, ‘백설 공주’, ‘빨간 모자’ 등등에서 말이다. 보아하니 차용의 목적은 분명 깨는 데 있을 것이다. 파헤치는 데 있을 것이다. 우리를 구속하고 억압하고 강제해왔던 그 모든 허울 좋은 신화라는 길들여진 관습으로부터 종교도, 사회도, 문화도 다시금 바라보는 일. 따지고 보면 이는 문학의 특기 가운데 하나 아닐까. 모두가 예, 할 때 아니오, 하는 일인이 있다면 그가 바로 문학이어야 하듯 말이다.

감칠맛 나는 여러 이야기들 가운데 《피로 물든 방》은 참으로 묘한 매력을 두루 갖춘 소설이다. 줄거리를 더 줄이면 이렇다. 가난한 과부의 딸이자 예민한 손가락을 가진 열일곱 소녀가 돈 많은 후작에게 시집을 갔으나 알고 보니 그가 자신의 여자를 여러 방식으로 죽이는 취미를 갖고 있었고, 소녀 역시 그렇게 죽을 운명이었으나 딸의 전화 한 통에 ‘모성적 텔레파시’를 느낀 엄마가 바람같이 달려와 그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후작의 머리통에 총을 쏘았다더라, 정도.

‘모성적 텔레파시’라는 대목에서 나는 무릎을 쳤다. 믿기 어렵겠지만 모녀 지간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이 묘한 일체의 순간을 경험했을 것이다. 날치기를 당한 내가 경찰서에서 울고 있을 때 새벽 3시쯤 느닷없이 전화를 걸어온 엄마가 이러기도 했으니까. 꿈에서 네가 날 막 찾지 뭐야. 너 지금 어디야. 이렇게 도저히 설명할 길 없이 내 온몸에 끼쳐지는 어떤 전율 같은 거, 찰나의 침묵 같은 거, 그것이 바로 ‘모성적 텔레파시’ 아닐까.

탄력 있는 문장에 좀처럼 빈틈을 보이지 않는 치밀한 묘사와 더불어 어떤 현실 앞에 맞장을 떠버리는 인물들의 기개에 소설을 읽는 내내 시원하면서 칼칼한 목 넘김을 경험한 나는 앤절라 카터 앞에 붙는다는 여러 수식어들을 다시금 찾아봤다. ‘여성 에드거 앨런 포’라거나 ‘영문학의 마녀’라니, 그와 더불어 폭력과 성에 대한 노골적인 묘사로 유명하다고 하여 다시금 형광펜을 들고 책장을 넘겨가며 밑줄 그을 준비를 하였으나 내가 그은 유일한 문장은 이랬다. “도움이라면. 엄마.”

그리고 세상을 향해 시선을 돌려봤다. 피로 물든 방이 피로 물든 지구임을 사람들은 알기나 할까. 어쨌거나 엄마만이 이 피를 멈추게 할 수 있을 터, 이 피를 닦아줄 수 있을 터, 그러니 내게 엄마 언제 되느냐는 소리 좀 마시라. 왜냐, 엄마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니까.
--------------------------------------------------------

고전 동화의 남성 중심적 시각 비판

'피로 물든 방' 줄거리

앤절라 카터는 남성, 서구, 백인, 이성애자 우위의 담론에 맞서 저항적 글쓰기를 선보인 영국의 페미니스트 작가다. 대학에서 중세문학을 공부하면서 고딕소설과 민담, 동화 등에 흥미를 가졌고, 이후 민담과 구전동화는 그녀의 작품 세계에서 중심축을 이루게 된다. 동화, 포르노 문학, 고딕소설, 마술적 사실주의 등 다양한 장르와 형식을 차용해 종교, 자본주의, 가부장제를 거침없이 파헤쳤다.

《피로 물든 방》은 카터의 대표작으로 고전 동화의 남성 중심적 시각에 대한 비판과 특유의 전복적 상상력이 더해진 작품이다. 이 책의 표제작인 ‘피로 물든 방’은 샤를 페로의 동화 《푸른 수염》을 재구성했다. 원작이 남편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고 금지된 방에 들어간 여성의 호기심을 꾸짖는다면 카터의 이야기는 열일곱 살 소녀의 관점에서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정신적으로 성장해나가는 과정을 그렸다. 이 밖에도 늑대에게 묘한 미소를 던지는 ‘빨간 망토’나 유부녀를 유혹하는 주인을 돕는 ‘장화 신은 괭이’ 등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동화와는 완전히 다른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야기 아홉 편을 만나볼 수 있다.

카터는 이 작품들을 통해 고전 동화에서 보편적 가치라고 여겨지던 것들이 사실은 부당한 세상에 순응하도록 만들려는 기득권의 이데올로기임을 폭로한다. 출간 당시 감각적이고 유희적인 문체를 통해 낡은 이야기들을 세련된 신화로 재탄생시켰다는 평가와 함께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배경 묘사와 극적인 전개가 뛰어난 걸작’이라는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원제: The Bloody Chamber

저자: 앤절라 카터(1940~1992)

발표: 1979

분야: 영미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피로 물든 방

옮긴이: 이귀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30(2010년)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