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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

《안나 카레니나》를 처음 본 건 초등학교 4학년 어두운 다락방에서였다.

집안 식구들 중 아무도 들춰보지 않던 거실의 세계문학전집은 곧 다락방 차지가 되었다.

비가 쏟아지던 일요일, 밖에 나갈 수 없던 나는 어두운 다락방에서 금빛 글씨가 반짝거리던 《안나 카레니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곧 오래된 책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와 무슨무슨 스키와 같은 익숙지 않은 이름들, 발음하기 힘든 지명들과 세로줄 쓰기에 눈이 어지러워 책을 덮었다.

고전이 전화번호부만한 그 악랄한 두께로 보통 사람의 ‘기’를 짓누르는 건, 세계 공통이다.

도대체 짧게 쓴 ‘고전’이란 게 있긴 한가 싶을 정도로 ‘걸작’이라 부르는 책들은 엄청난 분량을 자랑한다.

게다가 행갈이 없이 이어지는 만연체를 감당할 만한 사람은 몇 명이나 되겠는가.

내가 《안나 카레니나》를 다시 정독하게 된 건 그러므로 10년이 훌쩍 지나서였다.

고해성사를 하자면, 고전은 작가들도 읽기 ‘되게’ 힘들다(그러므로 ‘고전’이란 몇 번의 실패와 포기 끝에 ‘마침내’ 읽게 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오죽하면 파울로 코엘료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작가들이 인정하는 유일한 책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뿐인데, 실상 그 내용을 물어보면 하나같이 횡설수설한다고 적어놓았을까.

고전에 대한 엄숙함을 잠시 접어두고, 다소 불량스럽게 얘길 하자면 《안나 카레니나》는 《사랑과 전쟁》의 19세기 러시아판이다.

남들이 보기에 부족할 것 없는 고관대작의 부인 ‘안나’가 젊은 장교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그녀가 기차에 몸을 날리는 기념비적인 저 마지막 장면을 ‘불륜의 말로’라고 정의해버리고 나면 ‘왜 우리는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안나 카레니나》는 톨스토이의 삶에 이정표를 세운 작품으로, 진실한 사랑과 결혼, 예술, 종교, 죽음 등 삶에 관한 모든 것을 쏟아 부은 톨스토이 문학의 집대성이다.

톨스토이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세계관이 크게 바뀌는데, 자신이 잘못 살았다는 통렬한 심정으로 참회록을 쓰기에 이른다.

참회록 집필 후, 그는 위대한 베스트셀러 작가에서 전 인류에게 훈계하는 계몽주의적 스승으로 극적인 변환점을 맞는다.

한 인간이 자신의 삶과 문학을 일치시키려 이토록 발버둥친 역사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런 안간힘과 상관없이 그토록 자신이 지향한 인물과 점점 멀어져간 사람도 드물다.

톨스토이는 자신이 소설에서 비판하고 경멸했던 것들, 가령 도시의 환락과 무위도식, 사랑 없는 결혼, 거짓과 허위의 예술을 버리고 인간을 사랑하며 삶과 죽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설파에 가까운 ‘설교’를 했다.

톨스토이가 안나를 비극적 죽음으로 내몬 까닭은 단순히 그녀의 사랑이 불륜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비극적인 죽음을 통해 당시 러시아 귀족사회의 연애와 결혼제도, 생활방식과 가치관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고민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질문했다.

좋은 소설이란 ‘답’이 아닌 그 시대를 산 인간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것으로,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밖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질문에 대한 답은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고, 변화할 수 있다.

고전이 매번 사람들에게 다르게 읽히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내가 기적처럼 《안나 카레니나》를 완독했다면 말할 것도 없이 나는 이 소설의 주제가 ‘인과응보’였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바람 난 여자가 기차에 치여 죽었으므로 슬프긴 해도 삶은 원래 그래야 하는 것, 이라고 실컷 잘난 척했을 것이다.

그것은 철저히 이솝우화적인 세계로 ‘교훈’을 찾는 것이 진정한 독서의 의미라고 생각했던 11살 내 가치관과도 들어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서른일곱에 읽는 《안나 카레니나》는 ‘이렇게 사는 게 나쁘다!’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가?’라는 선뜻 대답하기 힘든 질문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내가 실패를 거듭하며 이 소설의 첫 장과 마지막 장을 읽는 동안 내가 그은 밑줄은 상당 부분 바뀌어 있었다.

나는 읽을 때마다 예전에 그은 밑줄이 달라지면 달라질수록 좋은 소설이란 편견을 꽤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는데,《안나 카레니나》 역시 그런 소설 중 하나다.

이번의 독서에서 나는 ‘안나’가 아닌 그녀의 남편 ‘카레닌’의 마음에 훨씬 더 감정이입되었다.

그것은 결혼 10년차 주부라는 내 개인적인 삶의 조건과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마침내《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주인공 테레사가 왜 자신의 ‘충견’ 이름을 ‘카레닌’이라고 지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레닌은 테레사가 보기에 타고난 희생양이었고, 그녀는 스스로 자신을 이 19세기 러시아 남자와 동일시한 것이다.

‘고전이 재밌다’라는 말을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그건 마치 뜨거운 욕탕에 들어앉아 ‘어! 시원하다’라는 아빠의 거짓말과 일맥상통한다.

고전은 어렵고 읽기 힘들다.

고전 읽기엔 상당한 유혹의 기술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하버드에서 철학을 공부중인 첼리스트 장한나가 최고로 꼽는 소설은 《안나 카레니나》다(그녀는 몇 번씩 이 소설을 반복해서 읽는 중이란다).

톰 울프, 스티븐 킹 같은 최고의 영미권 작가 125명이 꼽은 최고의 소설 1위 역시 《안나 카레니나》다.

13년을 신춘문예에 낙방했던 내가 기적처럼 등단한 건 우연히도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난 후였다.

백영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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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장교와 사랑에 빠지는 유부녀 ‘안나’

★ ‘안나 카레니나’ 줄거리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대표작 《안나 카레니나》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사랑과 결혼, 가족문제라는 보편적인 소재로 전 러시아인을 사로잡은 《안나 카레니나》는 농노제 붕괴에서 러시아 혁명에 이르는 19세기 후반 과도기 러시아 사회와 등장인물들의 육체적 특징뿐 아니라 심리 변화까지 뛰어나게 묘사한 최고의 소설로 평가받는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완전무결한 예술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은 이 작품은 10여 차례나 영화로 만들어졌으며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인간 삶의 총체적인 모습을 완벽하게 구현해낸 인류 보편의 걸작으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러시아 고위 관리의 아내인 안나는 오빠 스티바의 불륜으로 부부가 파경에 이르자 모스크바의 오빠 집을 방문한다.안나의 도움으로 스티바 부부는 화해하지만, 오히려 안나는 그곳에서 젊은 장교 브론스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브론스키는 스티바의 처제인 키티와 가까운 사이였으나 안나에게 빠져든다.

젊은 시절 나이 많은 관리 카레닌과 결혼한 후 정숙한 아내로 평범하게 살던 안나는 결국 화려한 사교계와 사회적 지위, 아들까지 버리고 브론스키와 함께하는 길을 택한다.

그러나 이 결심으로 안나는 사회적으로 철저히 외면당한다.

반면 브론스키는 누구에게도 비난받지 않고 점점 사교의 폭을 넓혀간다.

고립된 안나와 자유로운 브론스키 사이에는 점점 불신이 싹트기 시작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사랑은 질투로, 열정은 분노로 서서히 변해간다……

원제: Анна Каренина
저자: Лев Толстой(1828~1910)
발표: 1878년
분야: 러시아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안나 카레니나
옮긴이: 박형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01~003(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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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톰이다, 나는 소년이다!

당신은 어떻게 작가가 되었소?

누군가 묻는다면 내 대답은 한 가지다. "엉망진창으로 십대를 보냈기 때문입니다" 하고 말이다.

에엣? 장기간의 습작이나… 뭐… 노력 같은 거… 그런 게 필요한 거 아닌가요?또 묻는다면 "다 필요 없어요.

그저 엉망진창으로 보낸 한 시절이 필요한 겁니다"라고 나는 다시 대답할 것이다. 그렇다.

망가진(혹은 망가져본) 인간만이 작가가 될 수 있다.

만약 망가진 적이 없는데도 작가가 된 인간이 있다면… 그 사람은 변태다. 지금 내가 뱉은 이 말을 백프로 믿어도 된다.

여기 한 소년이 있다.

공부는 지지리도 못해, 수업 시간엔 만날 졸아, 입만 열면 뻥이고, 머릿속엔 잡생각뿐 몰라 몰라 될 대로 되라지, 하지 말라는 짓은 골라 하고, 하라는 짓은 너나 하세요, 어른 알기를 개코로 알지, 어딜 가나 문제만 일으키는 이 소년의 이름은 톰 소여다(참, 그는 좀처럼 씻지도 않는다… 친구인 허크는 더하지).

19세기의 미국 남부, 작가 마크 트웨인이 가공해낸 세인트피터스버그라는 작은 마을의 이 악동은 그 후 140살이 되어가도록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게 된다.

긴 말 필요 없이 그는 역사상 가장 성공한 소년이요, 성공한 인간이다.

현대는 끝없이 근대의 모험을 모함해왔다.

다른 이유는 없다(물론 수천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정벌의 시대도 항해의 시대도, 전쟁과 혁명의 시대도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이 문장이 능동태인지 수동태인지에 대해선 또 많은 논쟁이 필요할 것이다).

현대가 필요로 하는 건 얌전한 인간이다. 겁먹고, 안주하고, 근면 성실하고, 일하고, 자네 이것밖에 안 되나?

낯을 붉히고, 광고 좀 때리면 기를 쓰고 물건을 사주고(복 받을 걸세 자네), 유행에 일조를 하고, 얘야 오늘도 학원 가야지?

사학의 운영에 도움을 주고, 찬송가를 열심히 부르고, 무엇보다 자신의 처지를 알고(알건 모르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르기는 개뿔, 눈치로 한평생을 살아갈 얌전한 인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 자넨 어떤 삶을 살았나?

혹시나 사후에 신이 묻는다면 우리는 답할 것이다(한참을 고민해야겠지만).

즉 그러니까… 안전한 삶을 살았습니다. 토익도 810점이었고… 대졸이었거덩요.

어디 가서 빠진다는 소린 안 들었고요, 뭐… 딱히 별일 없었다고 말할 수 있죠.신은 잠시 고민에 빠질 것이다.

안전한 삶이란… 실은 매우 이상한 삶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모험하는 존재이다. 아니, 모험을 위해 태어난 존재이며 실은 모험을 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하는 존재이다.

답답해, 우울해, 무의미해… 열심히 이런저런 업체(병원이니 뭐니)들의 경영에 도움을 주며(자넨 진짜 복 많이 받을 걸세)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는 실은 우리의 삶에서, 이 잘난 '현대인'이란 명찰을 단 유인원의 삶에서 모험이 거세된 지 오래기 때문이다.

불만은 없다. 안전한 게 어디야.불만은 없는데도 불안은 여전하다. 안전이… 다는 아닌가봐,우리 속에 앉아 등을 기댄 원숭이처럼 우리는 고개를 끄덕인다. 젠장, 그래도 나 대졸인데….

《톰 소여의 모험》이 고전의 반열에 오른 것은 모험 그 자체인 소년, 모험을 하지 않고선 견디지 못하는 인간의 원형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는 갈 곳이 많고, 만날 인간이 많으며, 미시시피강의 물결처럼 두근대며, 또 출렁이며 푸르게, 140년을 푸르게 흘러왔다.

그는 여전히 명랑하고, 그의 모험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어른이 된 톰 소여는(이야기가 이어졌다면) 분명 훌륭한 작가가 되었을 거라 나는 생각한다.

허클베리 핀은 뭐 말할 것도 없다.

죽어 신을 만났다 하더라도 할 말이 많은 삶이었을 것이며, 그들은 분명 위대한 작가 마크 트웨인의 오래전 모습이었을 것이다.

기억하자.우리는 누구나 소년이었고, 실은 이 지구의 종을 대표하는 모험가였다.

아이 엠 톰.아임 어 보이.아임 낫 어 스튜던트.어른이 되어 다시 펼쳐든 《톰 소여의 모험》에서 그렇게 톰은, 또 허크는 내 뒤통수를 때리며 낄낄거린다.



모험하라.

모험이야말로

삶을 삶이게 하는

가장 큰 보험이니!


박민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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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히고 설킨 살인 사건을 우연히 목격

>> '톰 소여의 모험' 줄거리

《톰 소여의 모험》은 '미국문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마크 트웨인의 대표작으로 1876년 출간된 이래 단 한번도 절판된 적이 없는 전 세계적인 스테디셀러이다.

책의 머리말에서 밝혔듯 자신이 실제로 겪거나 친구들에게서 들은 경험담을 바탕으로 톰 소여의 모험담을 생생하게 엮어냈다.

미시시피 강변의 작은 마을 세인트피터스버그에서 사는 톰은 폴리 이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모범생인 이복동생 시드나 신앙심 깊은 사촌누나 메리와는 달리 못 말리는 개구쟁이다.

학교에 가기 싫어 꾀병을 부리고, 미신을 좇아 숲을 휘젓고 다니며, 순진한 소녀 베키를 꾀어 약혼을 하는가 하면, 떠돌이 소년 허클베리 핀과는 단짝으로 지낸다.

그러던 어느 날 한밤중에 허클베리 핀과 함께 간 공동묘지에서 우연히 혼혈 인디언 조와 주정뱅이 영감 머프 포터, 마을의 젊은 의사 로빈슨이 얽히고 설킨 살인 사건을 목격하게 되고, 이 무시무시한 사건으로 모두가 부러워할 멋진 모험에 빠져들게 된다.

《톰 소여의 모험》은 작가로 이름을 알리기 전부터 특유의 입담과 현란한 유머로 인기 강연가로서 유명세를 떨쳤던 마크 트웨인의 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작품이다.

개성이 분명한 등장인물, 활기 넘치는 대화, 재치와 현란한 어휘력과 문장력은 그 어떤 작가도 따라가기 힘들 정도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의 작품이 '미국의 국민 문학'으로 평가받는 까닭은 영국문학 전통에서 여전히 독립하지 못했던 문단에 소재와 주제는 물론 미국인들이 실제로 사용하는 구어체로 미국문학의 새로운 전통을 확립하며 헤밍웨이를 포함한 후대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원제: The Adventures of Tom Sawyer

저자: Mark Twain(1835~1910)

발표: 1876년

분야: 미국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톰 소여의 모험

옮긴이: 강미경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56(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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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히 몸을 이끌고...

빈센트 반 고흐에 관한 책을 읽다가 "그는 어두운 들판에 나가 권총으로 가슴 한복판을 쏘았다.

간신히 몸을 이끌고 여관으로 돌아온 이틀 후 급히 달려온 동생의 품에 안겨 세상을 떠났다"라는 문장을 본 적이 있다. 나는 '간신히 몸을 이끌고'라는 구절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었다.

제 가슴을 겨누었지만 치명상을 입히는 데 실패한 고흐는 '간신히 몸을 이끌고' 《까마귀가 나는 밀밭》이라는 인상적인 그림의 배경으로 잘 알려진 어두운 들판을 걸어 여관으로 돌아간다.

힘겹게 숙소로 돌아가는 동안 밀밭이 바람에 일렁이고 총을 겨눌 때보다 어둡고 고요해진 밤공기가 땀을 식혔을지도 모른다.

누런 밀밭에 상처에서 흐른 피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흔들리는 밀밭 사이에 몸을 묻고 울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른다.

나는 간신히 생이 부지되던 고흐의 마지막 며칠을 종종 생각했다. 상처를 입은 채로 고요한 밤길을 되돌아가는 고통에 대해서, 여관 주인에게 자신이 심장을 겨누었음을 고백하고, 의사의 치료를 받고, 동생이 달려오기를 기다리던 이틀간에 대해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고 떠오른 것은 고흐에 대해 말한 그 구절, '간신히 몸을 이끌고'라는 것이었다.

고흐와 달리 베르테르는 방에서 권총을 쏘았으므로 상처 난 몸을 이끌고 어디론가 가지는 않았지만, 소설을 읽는 내내 베르테르가 오래 전부터 총상을 입은 몸으로 '간신히 몸을 이끌고' 살아가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말하자면 베르테르가 로테에게 시를 낭송해주던 중 '고결한 사람들의 운명에서 자신들의 불행'을 느끼고 둘이 부둥켜안고 하나가 되어 눈물을 흘리던 순간부터.

 로테가 베르테르를 달래기 위해 "여행이라도 하면 기분이 달라질" 것이며, '당신에게 어울리는 소중한 사람'을 찾아오고, 그렇게 해서 '진정한 우정의 행복'을 나누자고 충고하던 순간부터. 로테의 약혼자인 알베르트가 자신과 '마주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순간부터.

자신이 로테를 '이렇게 사랑하고 있는데 정작 다른 남자가 그녀를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어 고통스러워할 때부터, 그리고 "그녀 말고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다"고 탄식할 때부터.

그러니까 사랑 때문에 불화가 시작된 순간부터. 혹은 애초에 '더없이 영민한가 하면 순진하고, 강인하면서도 심성이 착하고, 생기 가득하고 활동적이면서도 영혼의 평온을 유지'하는 로테와 사랑에 빠진 순간부터.

베르테르가 '간신히 몸을 이끌고' 살아가게 된 것은, 그가 알베르트라는 약혼자가 있는 로테와 불행한 사랑에 빠져서가 아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애당초 그렇게 간신히 몸을 지탱하며 살아가야 할 만큼 고통스럽고 힘든 것이어서도 아니다.

그런 게 사랑일 리가. 베르테르가 로테를 사랑하게 된 후 '유쾌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눈부신 태양'을 쳐다보며 "오늘도 나는 그녀를 만날 거야!"라고 다짐할 때를 상상해보면, 사랑이라는 것은 간신히 몸을 이끌고 살아가던 사람을 거뜬히 일으켜 세우고, 무표정한 사람을 유쾌하고 가볍게 하고, 서로 끝도 없이 이야기를 나누게 하고, 바라보는 것만으로 더 바랄 게 없게 만드는 것일 텐데.

자살에 이른 베르테르의 상심은 누구에게도 자신(의 전부나 마찬가지인 사랑)을 이해받지 못할 것이라는 데에서 온다. 심지어 사랑하는 로테에게도.

그는 '대체 인간의 감정이란 무엇인지' 스스로에게 물어 궁리하고, 인간이 얼마나 복잡한 결을 가진 존재인지 헤아리려 애쓴다.

그가 알베르트와의 논쟁 끝에 "다른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기가 이렇게 힘들다니"라고 말하는 것은 알베르트를 탓하기보다 인간의 마음이 수만 겹이라는 걸 깨달은 스스로에 대한 탄식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 베르테르는, 로테의 아버지 밑에서 일하던 서기가 남몰래 로테를 흠모하다 그 사실을 털어놓은 후 해고를 당하고 급기야 미쳐버렸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

또한, 여주인을 사랑하였으나 그녀가 다른 사람을 선택하자 그만 죽여버리고 만 하인에 대해 행정관이 "그자를 구원할 방도가 없다"고 단호히 말하는 것을 듣고 좌절에 빠진다.

이로써 베르테르는 확신한다.

 자신의 사랑은 구원받지 못하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비난받을 것이며 그 때문에 세상과 끝내 불화할 수밖에 없다는 걸.

슬픔은 필연적이다. 사랑을 차지하지 못한 상실감 때문이 아니라, 인간을 이해하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사랑)은 누구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는 좌절감과 그로 인한 불화가 계속될 테니까. 이해받지 못하는 고통은 그야말로 '간신히' 몸을 이끌어야만 삶을 살아가게 한다.

이 소설이 내게, 이룰 수 없는 사랑으로 슬픔에 빠진 청년의 이야기인 동시에 누구에게도 자신(의 전부나 마찬가지인 사랑)을 이해받지 못해 절망한 청년의 이야기로 읽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편혜영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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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없는 사랑에 좌절하며 자살을 결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줄거리

단테, 셰익스피어와 함께 세계 3대 시성으로 불리는 괴테의 첫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1774년 출간되자마자 젊은 세대에게 큰 공감을 불러일으키며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작품 속에서 베르테르가 즐겨 입던 노란색 조끼와 푸른색 연미복은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으며, 베르테르를 모방하는 자살 신드롬까지 생겨났다.

스물다섯 살의 청년 괴테가 7주라는 짧은 기간 동안 폭풍처럼 써내려간 이 작품은 친구의 약혼녀를 사랑한 괴테 자신의 실제 체험을 토대로 쓰여 더욱 강한 흡인력을 갖는다.

어느 봄날 청년 베르테르가 변호사로서 상속 사건을 처리하러 시골 마을에 나타난다. 그곳에서 베르테르는 법관의 딸 로테를 알게 되어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녀의 약혼자 알베르트가 여행에서 돌아오자 베르테르는 공사관 비서를 자청하여 마을을 떠난다. 그사이 로테는 베르테르에게 소식도 주지 않고 알베르트와 결혼한다.

공사관 비서로 일하던 베르테르는 당시의 관료적 인습에 반항하다가 파면되고 사교계에서도 웃음거리가 된다.

그는 다시 로테를 찾아가지만 새로운 가정을 꾸민 로테의 따뜻한 보살핌은 그를 더욱 고독하게 만든다. 그는 로테에 대한 희망 없는 사랑과 귀족 사회에 대한 울분에 휩싸여 자살을 결심한다.

 절친한 친구에게 심경을 고백하는 편지 형식을 통해 독자를 작품 속으로 강하게 몰입시키는 이 소설은 비록 개별적인 사건이지만 그 속에 보편적인 인간사를 이야기하며 오늘날까지 큰 사랑을 받고 있다.

 

 

원제: Die Leiden des jungen Werther

저자: Johann Wolfgang von Goethe

발표: 1774년

분야: 독일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옮긴이: 안장혁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42(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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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년이 지나도 여전히 유효한 질문

《제인 오스틴 북 클럽》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제인 오스틴 소설을 읽고 사랑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는 북 클럽 멤버들에 대한 이야기지요.

《오만과 편견》은 열 번 이상 영화로 만들어졌는데,아마도,앞으로도 계속 만들어질 것 같아요.

《오만과 편견》을 재해석한 《브리짓 존스의 일기》라는 소설도(그리고 영화도) 꽤 유명하지요.

작가 제인 오스틴에 대한 관심도 끊이지 않아서 《제인 오스틴의 후회》 《비커밍 제인》 같은 드라마나 영화가 만들어지기도 했고요.

제인 오스틴의 첫 소설 《이성과 감성》이 출간된 해는 1811년이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00년 전입니다.

그 후로 그녀는 여섯 권의 책을 출간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에 기대어 만들어진 작품은 훨씬 많습니다.

제인 오스틴 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이야기를 왜 자꾸 하느냐고요?

그러니까,제가 하고 싶은 말은 바로 이겁니다.

그녀의 소설들은,왜,어째서,이토록 사랑을 받을까요? 2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이십대,저는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읽지 않았습니다.

그래 봤자 뭐 그렇고 그런 사랑 이야기잖아,하고 그녀의 소설을 좀 무시했었지요.

고등학생 때도 하이틴 로맨스 소설을 읽는 친구들을 무시했었는데 그런 편견이 오랫동안 제인 오스틴 소설을 읽는 데 작용했던 것 같아요.

오해하고,헤어지고,갈등하고,그러다 다시 만나는 것.

저는 그런 것들이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습니다.

이 세상엔 남녀간의 갈등 말고도 더 멋진 이야기가 많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제인 오스틴의 마지막 소설인 《설득》도 줄거리만 놓고 보면 그저 그런 사랑 이야기 같습니다.

주인공 앤은 딸만 셋이 있는 엘리엇 가의 둘째 딸입니다.

얼굴도 예쁘고 생기발랄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스물일곱 살이나 된 노처녀일 뿐입니다.

한때 한 남자를 사랑한 적도 있었지만,어머니 대신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해주는 레이디 러셀의 설득에 못 이겨 이별을 했지요.

소설은 여기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팔 년 전 헤어진 남자가 멋진 대령이 되어 나타난 것입니다.

십 년 전쯤이었다면 저는 또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 둘은 다시 사랑을 이루겠지.그게 뭐.'

물론,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거기에 초점을 맞춘다면,그래서 신데렐라 이야기와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면,그건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읽었으나 읽지 않은 거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된 거지요.

연애소설을 읽는 묘미는 여러 갈래가 있습니다.

가장 흔한 방법으로 그 사랑에 공감을 하며 읽는 거겠지요.

만약 사랑이 실패하게 된다면,어떤 오해로 남녀가 헤어지게 된다면,그것이 마치 내 일인 양 슬퍼하면서 말이에요.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 연애소설의 묘미란 바로 엿보기에 있는 것 같습니다.

추리소설과 비교를 해보자면,추리소설은 독자들에게 많은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그 정보들을 숨겨두고 독자들은 퍼즐을 맞추듯이 그 정보를 찾아내지요.

하지만 그와 반면 연애소설들은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독자에게 전해줍니다.

주인공들이 여전히 서로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당사자들은 모르지요.

남녀 둘 다 모를 수도 있고 혹은 그 한 쪽만 모를 수도 있고요.

하지만 독자는 압니다.

주변 사람들이 다 알아차리도록 주인공 혼자 자기의 감정을 모를 때,그 간극에서 벌어지는 많은 일들은 다르게 해석됩니다.

이중으로 해석되는 것이지요.

주인공의 마음과 화자의 마음과 독자의 마음이 제각각이 됩니다.

어쩌면,많은 연애소설들이 3인칭 시점인 이유가 이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듭니다.

화자는 그 인물의 감정을 어느 정도까지 독자에게 알려줄까요?

독자는 또 그것을 어느 정도까지 알아차리고 재미있어할까요.

《설득》은 (물론,제인 오스틴의 다른 소설들도) 두 번 읽을 때 더 재미있습니다.

읽을 때마다 엿보는 재미가 달라지니까요.

두 번 읽다 보면 《설득》에서 두 남녀가 사랑을 이룬다는 결론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보다는 더 시시콜콜한 이야기에,이를테면 마차에 빈자리가 하나 밖에 없는데 거기에 누가 앉을 것인가를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는 이야기에,더 매력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 시시콜콜한 에피소드들 사이에 얼마나 많은 감정이,오해가,갈등이 숨겨져 있는지를 알게 되니까요.

저는 《설득》을 읽다 이런 장면들에 흥미를 느꼈습니다.

먼저,소설의 앞부분,앤이 팔 년 전 사랑했던 웬트워스 대령의 이야기를 엿듣는 장면입니다.

웬트워스 대령은 결단력과 굳은 심지를 지닌 사람들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말합니다.

"제가 아끼는 모든 분들이 굳은 마음을 가졌으면 하는 게 저의 가장 큰 소망입니다"라고 말할 때,이 이야기를 들은 앤은 복잡한 감정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타인의 설득에 넘어가 사랑을 포기했으니까요.

대령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그녀는 알게 된 것입니다.

이런 오해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가서 이런 장면과 만납니다.

이번에는 역으로 웬트워스 대령이 앤의 이야기를 엿듣게 되죠.

"희망이 사라져버린 뒤에도 여자는 남자보다 더 오래 사랑한다는 것입니다"고 앤은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웬트워스 대령은 확신을 하게 되죠.

저는 이 두 장면을 머릿속에 떠올려봅니다.

이야기를 엿듣는 앤의 표정과 웬트워스의 표정이 그려질 것만 같습니다.

《설득》을 읽는 동안 저는 내내 서로의 이야기를 엿듣던 앤과 웬트워스가 됩니다.

윤성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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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애인이 부와 명예를 거머쥐고 돌아오는데…

'설득' 줄거리

제인 오스틴은 목사인 아버지와 이야기 짓기를 좋아하는 어머니 사이에서 8남매 중 일곱째 딸로 태어났다.

열두 살 때부터 글쓰기를 시작해 여러 작품을 습작했고 1811년 《이성과 감성》을 처음 정식 출간했다.

이후로 2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독자들의 열렬한 사랑을 받는 작품을 꾸준히 펴냈다.

《설득》은 그녀가 사망하기 1년 전 발표한 유작으로,남녀간의 현실적인 사랑과 결혼에 대해 탐구한 소설이다.

월터 엘리엇 경은 부인을 잃고 세 딸과 함께 살고 있다.

첫째와 막내는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지만 귀족 근성이 몸에 밴 안하무인의 성격이고,그에 반해 둘째 딸 앤은 현명하고 차분한 여인이다.

하지만 앤은 결혼한 두 자매와 달리 27살 노처녀다.

앤이 노처녀로 남은 이유는 8년 전 그녀의 신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주위의 '설득' 때문에 사랑했던 남자 웬트워스를 떠나보낸 까닭이다.

그 후로는 다른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홀로 지내왔다.

그러던 어느 날 해군 대령이 된 웬트워스가 명예와 부를 다 거머쥔 모습으로 앤 앞에 나타난다.

그러나 그는 앤에게서 받은 상처를 잊지 못해 그녀를 차갑게 대하고,심지어는 아무하고라도 '결단력 있는 여자'이기만 하면 결혼을 하겠다며 앤의 어린 사돈처녀인 루이자를 만나기까지 한다….

셰익스피어와 함께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인 제인 오스틴은 '제인주의자들','오스틴 현상'이라는 용어를 낳으며 문화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녀의 수많은 이야기들이 영화와 드라마로 재생산되었으며 '해리 포터'의 작가 조앤 K 롤링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작가로 그녀를 꼽기도 했다.

원제: Persuasion

저자: Jane Austen(1775~1817)

발표: 1816년

분야: 영국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설득

옮긴이: 원영선,전신화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44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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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지않고,하지만 더 없이 깊은 자비로…

독자 입장에서 문학은 유력한 인생의 동무가 될 수 있다.

한 작가를 집중해서 깊이 읽을 때 때로 가능해 보인다.

독서에도 어떤 경지가 있지 않을까 싶다.

일테면 문학에서 인생의 스승을 발견하는 일보다 동무를 찾는 일이 훨씬 어렵다.

소설에서 제 삶을 읽어내는 일도 썩 훌륭하다.

그러나 소설에서 타인의 삶을 온전히 겪어내는 독자라면 더 훌륭하다.

오에 겐자부로는 작가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는 문학이 없으면 호흡이 불가능한 사람처럼 보인다.

소설 쓰기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세상을 읽어낸다.

문학으로 삶의 형식을 이룬 사람이며, 그에게서 삶의 형식과 문학적 형식은 따로 구분되지 않는다.

 작품보다 작가를 얘기해야만 훨씬 명확해지는 문학세계를 지닌 작가다.

이런 세계는 작가들의 로망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는 오에가 등단 50년을 기념해 일흔둘에 내놓은 작품이다.

스스로 만년 3부작이라 일컬은 《체인지링》 《우울한 얼굴의 아이》 《책이여, 안녕!》에 잇대어 태어났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문학 인생 50년에 대한 자기 정리이자, 큰 기획인 만년작의 연장이기도 하다.

오에는 자신이 추구하는 만년의 문학에 대해 독특하고 원대한 견해를 밝힌 바 있다.

독자는 흔히 작가의 만년 작업에서 일정한 패턴을 기대한다. 일테면 원숙함과 조화로움을 지향한다.

노년의 작가들 역시 그 방향으로 작품을 창작하고자 한다. 자연으로 돌아가고 모성, 혹은 고향으로 회귀한다.

자신에게 관대해지고 사회와 화해한다.

그러나 오에는 만년은 한 인간이 개인으로서 끌어안은 모순과 파국을 초월하기도 어렵고 극복하기도 불가능하다고 여긴다.

오로지 심화시킬 뿐이다. 따라서 그는 노년의 문학적 에너지를 초월이나 극복에 두지 않고 개인의 모순과 파국의 예감을 그대로 노출하는 일에 쏟는다.

그 집요한 풍경이 사뭇 불편하다.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에 이르기까지 그의 만년작들은 공포와 절망이 주조음을 이룬다.

하지만 그의 태도가 오히려 삶을 냉정하게 바라보게 하며, 독자로 하여금 제 인생에 쉬 타협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오에는 열 살 때 일본의 패전을 경험하였고, 신체에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장남 히카리와 반평생을 함께 지내고 있다.

그는 평생 의문스러웠다.

인간은 파괴하고 파괴당하고 스스로 망가지는 존재인가?

그는 인간 존재 내부는 물론 사회적으로 자행되는 폭력성에서 한시도 눈을 떼지 않았다. 만년에 이르러 그는 인간은 가까스로 회복하는 존재라는 답에 이른다.

 이 자애롭고 희망적인 전언은, 그러나 도저한 회의주의자가 평생 몸으로 겪어내며 도달한 진실로서 경청할 만하다.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는 오에의 작품들 중에서 비교적 짧고 이야기가 복잡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오에가 품은 만년작의 기대와 그가 평생 좇은 문학적 세계가 짙게 배어난다.

특히 많은 작가들이 테마로 삼은 '문학의 치유성'에 대한 탐색이 돋보이며, 여성에게 가해진 근대적 폭력과 고통을 이해하고자 하는 자세도 여전히 역력하다.

치유로써 문학에 대해 언급했지만 이 소설에서는 유년기에서 중년을 거쳐 노년에 이른 긴 시간이 놓여 있다. 시간이야말로 이 소설의 또 다른 테마가 아닐까 싶게 작가는 기억의 현재화에 매달린다.

소설 속에서 작가는 '새로운 형식'을 찾는 심경을 밝히고 있는데 시간성이야말로 이 소설의 독특한 형식이 된다.

시간은 치유의 환유이다. 유년의 기억이 노년의 시간으로 현연하고, 노년의 시간이 유년의 기억을 간섭한다.

이는 구성적인 측면에서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기계적인 방식과는 지평이 다르다.

'과연 인생은 어떤 모습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에 대응하고 있다.

포의 '애너벨 리'와 이미지가 겹치는 국제적 영화배우 사쿠라.

그녀에게는 점령국 미국인에게 성적(性的)으로 훼손당한 소녀의 초상이 있다.

제 삶을 이해하려는 순간에 진실의 폭력에 휘둘리는 게 인생의 법칙이듯 사쿠라 역시 나락으로 떨어진다.

그녀가 고통과 절망으로부터 가까스로 일어나 제 삶을 마주하게 되는 과정이 냉정하게 그려진다.

배우가 어떤 배역을 온전히 해내는 일은 배우 스스로 감당해온 이력, 개인적으로 치유하고 극복하는 시간을 전제한다는 전언을 오에는 작가 생활 50년에 대한 답으로 제시한다.

노년의 얼굴로 소년을 연기하는 게 가능해지는 세계를 보여준다.

오에가 던져주는 질문은 언제나 묵중하다. 나는 오에를 작가를 위한 작가라고 서슴없이 말해왔다.

적어도 글쓰기에 관한 한 그는 미답지로 멀리 걸어간 작가이다.

만년의 지혜를 들려주는 이 작품을 위시한 일련의 만년작들도 마찬가지다.

인생 선배로나 작가로나 큰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인생 마흔에 여전히 스승을 모시고 살 줄 몰랐다. 마흔쯤 되면 스스로 세상의 스승인 양 알고 살 줄 알았다.

전성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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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제작에 참여해 사쿠라의 상처를 알게 되는데...

'아름다운애너벨리..’줄거리


오에 겐자부로는 1935년 일본 에히메현에서 태어났다.

도쿄대에서 불문학을 공부했고 프랑스 실존주의 작가 사르트르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장남이 지적 장애를 갖고 태어나면서 지적 장애아와의 공존, 치유와 화해의 메시지가 작품의 주요 테마로 자리잡았다.

전후 일본의 불안한 상황과 정치 · 사회적 문제에 대한 비판의식을 드러내며 솔제니친과 김지하의 석방 운동에 적극 참여해 실천하는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199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되었고 지금까지도 국왕제와 국가주의,핵무기 문제에 꾸준히 목소리를 내며 작품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는 노인이 된 화자가 산책을 하던 중 친구 고모리를 만나 30년 전 일을 회상하며 시작한다.

대학 동기이자 영화제작자인 고모리와 왕년의 아역스타였던 사쿠라가 찾아와 '나'에게 영화 시나리오를 써달라고 부탁한다.

하인리히 폰 클라이스트의 《미하엘 콜하스의 운명》을 일본의 농민봉기로 각색해 영화로 만들려는 계획에 참여하게 된 세 사람은 본인조차 알지 못했던 사쿠라의 상처를 알게 되고 영화 시나리오의 공동 작업을 통해 치유의 과정을 겪는다.

《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는 소설의 모티프가 된 에드거 앨런 포의 시 《애너벨 리》와 클라이스트의 《미하엘 콜하스의 운명》을 비롯해 나보코프의 《롤리타》 등 오에 겐자부로의 문학적 자양분이 된 작품들을 통해 작가 인생 50년을 정리하며 '문학'에 바치는 작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저자:大江健三郞(1903~1950)

발표:2007년

분야:일본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아름다운 애너벨 리 싸늘하게 죽다

옮긴이:박유하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08(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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