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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카로운 칼로 도려낸 소설가의 삶

가령 이런 칼이 있습니다.

누대를 이어온 장인이 만든 이 칼은 자르는 식재료의 본성을 거스르지 않습니다.

이 칼로 다듬은 생선은 비린내가 나지 않으며 다른 칼로 뜬 회와는 맛이 확연히 다릅니다.

세포의 변성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지요.

과일을 깎아두면 색과 맛이 변하지 않으며 양파를 다져도 눈물이 흘러나오지 않습니다.

이 칼로 살아있는 짐승을 단칼에 베면 처음엔 선명한 근육의 결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한동안 들여다보고 있으면 그제야 피의 냄새를 먼저 맡을 수 있을 것이며 이윽고 천천히 방울져 맺히는 피를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인간 혹은 세계를 한 개의 오렌지라고 가정해볼까요.

소설이란 어떤 형식으로든 이 오렌지를 잘라서 접시에 담아내는 요리라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가로로, 세로로, 대각선으로, 혹은 잘게 다져 즙을 낼 수도 있겠지요.

다만 칼 한 자루로.

일상과 영혼을 단 한 번의 휘두름으로 베어낼 수 있는 칼.

처음엔 선명한 단면을 보여주고 다음엔 그 독특하고 유일무이한 냄새를, 마침내 과즙 대신 방울져 나오는 피를 맛볼 수 있게 해주는 칼.

소설가라면, 영원한 젊음보다는 이런 칼과 자신의 영혼을 바꾸자는 유혹에 넘어갈지도 모릅니다.

 미시마 유키오는 어쩌면 누군가와 이런 거래를 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소설가입니다.

마침내 그 칼을 손에 쥔 그는 가장 먼저 저 자신의 삶을 요리해서 접시에 올려놓았습니다.

≪가면의 고백이지요.

≪가면의 고백은 미시마 유키오가 자신의 출생부터 이십대 중반의 예술가가 되기까지의 성장과정을 써내려간 자전 소설입니다.

하지만 가면과 고백이라니요.

참과 거짓이라는 명제처럼 그 둘은 나란히 연결될 수 없는 단어들이지요.

 생을 연기하는 그 가면에 신경과 실핏줄이 연결되고 살이 차오르기 전에는요.

사실 고백의 본질은 불가능입니다.

 누구도 자신의 진짜 얼굴을 차마 내놓지 못합니다.

 다만 살까지 파고든 가면만이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이지요.

타인의 시선에 진짜 나처럼 보이는 나, 혹은 가면을 쓴 연기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나.

둘 중 어느 것이 나일까요? ‘오래도록 나는 내가 태어났을 때의 광경을 보았노라고 우겼다’ 는 첫 문장은 이어지는 글이 자신의 생물학적 자서전이 아니라 영혼의 자서전임을 못박아둡니다.

그는 가면 속에서 징그럽도록 낱낱이 자신의 내면을 드러냅니다. 자신의 속옷을 내려 보이고 관념의 끝을 보여줍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다섯 살의 자신을 사로잡은 것이 추한 몰골의 분뇨 수거인이었음을.

화집 속 성 세바스티아누스의 벗은 몸을 보며 했던 수음을.

그리고 나쁜 남자 그 자체인 동급생 오미를 사랑한다고 선언합니다. 오미는 내면 따위 없는 야만 그 자체인 인간입니다.

 눈 위에 신발로 제 이름을 새기고 있는 모습에서 그의 고독과 슬픔을 온전하게 이해했다지요.

21세기에도 동성애 성향을 고백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 역시 소노코라는 예쁜 소녀를 사랑해보려고 무척 애를 씁니다.

그러나 그는 에로스적인 영감을 끝내 얻지 못합니다.

다만 자신을 ‘진짜 사랑’해주는 소노코에게 질투를 느끼지요.

양식진주가 천연진주에게 느끼는 것과 같은 견디기 어려운 질투를. 자신을 사랑하는 여자에게 그 사랑을 이유로 질투를 느끼는 남자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요.

결국 소노코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 후에야 그는 다시 그녀를 만납니다.

싸구려 무도장에서 감상적인 유행가를 들으며 탁자 위에 흘러내린 음료수가 내리쬐는 햇빛에 번쩍이는 걸 쳐다보면서 말입니다.

전쟁의 막바지, 방공호 구덩이 속에서 올려다보는 하늘이 벌겋게 불타오르고 폭격기 B29가 도쿄 하늘을 시도 때도 없이 가로지릅니다.

바로 옆에서 폭격을 당하는 사람들을 지켜보아야 한다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죽음이 너무 가까이 있는 그 지독한 순간엔 차라리 먼저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되지는 않을까요.

 그런 한편으로 극한의 공포 속에서 오히려 사소한 삶의 결을 탐미적으로 어루만지며 명랑한 얼굴로 거리를 활보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일종의 자포자기 속에서 화사한 색깔의 옷을 차려입고 꽃구경을 나서는 것이지요.

그것이 인간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두려움에 찬 비명소리보다는 생뚱맞게 환한 옷차림에서 불안의 정점에 이른 인간의 심정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전쟁의 불안을 그는 조각난 일상과 자신의 영혼에 투영시켜 보여줍니다.

이 소설을 읽고 나면 앙금처럼 남는 것이 있습니다.

기이하고 예민한 고백을 관통하고 있는 독특한 자기애입니다. 이 자기애는 이후의 삶 속에서 지독한 국수주의자의 모습으로 변형되지요.

미시마 유키오는 이십년 후 우파의 각성을 촉구하며 잘 벼린 칼을 들어 자신의 배를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어 생을 마감합니다. 가면의 고백은 이 장면에서 비로소 끝나는 것인지도 모르겠네요.

어쩌면 세상의 모든 소설은 가면의 고백이 아닐까요?

그나저나 이 남자가 쓴 칼은 어떤 칼일까요? 6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잘린 부위의 결은 선명합니다. 달큰하고 비린 피냄새조차 납니다.

그렇지만 고통이 아니라 음악과도 같은 나른한 쾌락의 술렁거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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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망의 본질이 무엇인지 깨닫는 '나'

▶ '가면의 고백' 줄거리

‘가면의 고백’은 미시마 유키오가 1949년 발표한 첫번째 장편소설이다.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추천을 받아 문단에 등단한 그는, 24세 나이에 발표한 이 장편 데뷔작으로 평론가들로부터 ‘여우에게 홀린 듯한 기분’, ‘이 작품을 통해 비로소 20세기가 시작되었다’와 같은 극찬을 들으며 재능을 인정받았다.

‘가면의 고백’은 화자인 ‘나’가 태어난 순간부터 성인이 되기까지의 성장 과정을 그린 자전소설로서, 삶 그 자체를 최고의 예술로 생각한 미시마 유키오의 심미주의적 세계관이 잘 드러난 고백문학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식민지 장관으로 재직하던 중 부하 직원의 잘못으로 관직에서 은퇴한 할아버지, 뇌신경질환으로 발작증을 앓으면서도 명문가 출신의 긍지를 잃지 않는 할머니, 급속도로 쇠락해가는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나는 몇 차례나 죽음의 위기를 겪는 병약한 아이였기에 할머니의 과잉보호를 받으며 성장하게 된다.

 기묘한 공상을 즐기는 나는 다섯 살 무렵부터는 그 공상에 어떤 명확한 경향이 나타났고, 주로 육체적 활력이 넘치는 젊은이들이나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는 동화 속 왕자에 대한 동경심을 품게 된다.

그리고 열세 살 때 이탈리아 화가 구이도 레니의 그림 ‘성 세바스티아누스 순교도’를 보고 자신이 갈구하던 욕망의 본질이 무엇이었는지 깨닫게 된다.

 중학교에 진학한 나는 생명력 넘치는 연상의 동급생 오미를 만나고 그에게 은밀한 열정을 느낀다.

그러던 중 친구의 여동생 소노코와 연인 사이가 되지만 육체적 불안감은 차츰 그 본성을 드러내고 결국 자신의 정체성을 확신하기에 이른다……

원제: 面の告白

저자: 미시마 유키오(1925~1970)

발표: 1949

분야: 일본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가면의 고백

옮긴이: 양윤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11(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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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으면 또 훗날



이봐, 얼른 이쪽으로 들어오게.

자네가 그런 데서 어정거리면 놈들이 도망쳐버리거든. 도깨비들 말이야.

여기 산벚나무 뿌리 구멍 안에 숨어 있으면 그들이 오는 게 보인다네.

 아, 그건 총알자국이 아니야. 전쟁도 여긴 비켜갔거든.

가까이서 보니 자넨 좀 멍청하게 생겼구먼. 아니, 그냥 이야기를 좋아하게 생겼단 말이네.

자네처럼 얼굴이 홀쭉하고 귀가 큰 사람은 옛날이야기를 좋아하거든. 맞지? 자, 내게 마침 책 한 권이 있네.

 달도 무겁고 바람도 쓸쓸하니 책 읽기 딱 좋은 때가 아닌가 말이야.

자네 혹시 다자이라고 알고 있나? 다자이 오사무, 그래 그런 이름이네.

 다자이는 분명 연인과 자살이니 약물중독이니 허무주의에 자기혐오로 유명하네.

그러나 어떤가, 그의 생이 오로지 비극과 고통으로만 점철되었을 것 같은가? 다자이라고 왜 호쾌하고 천진하던 시절이 없었겠는가.

바로 맞혔네, 내가 가진 책이 바로 그렇다네. 놀라지 말게, 여기서 다자이는 무려 “독자여 안녕! 살아 있으면 또 훗날. 힘차게 살아가자. 절망하지 마라”고 외친단 말일세.

≪쓰가루≫란 말이지. 그래, 좋은 곳을 펴는군.

 여기서 다자이는 쓰가루 반도의 온갖 곳을 쑤시고 다니며 그곳에 대해 떠들어댄다네.

왜냐고? “괴로우니까.”

자네, 뿌리를 부정한다는 게 어떤 건 줄 아나?

혈육과 절연한 채 그들을 삿대질하다 그조차 괴로워 비난을 자신에게 돌려버리는 고통의 순환에 대해 알고 있나?

 그건 말일세, 모래폭풍이 이는 사막 한가운데를 걷는 것과 같다네. 희망이나 신기루 같은 낭만적인 것은 없네. 죽음. 그래, 바닥 없는 절망과 죽음만이 가까이 있지.

그런 삶을 살던 다자이가 자신의 고향이 있는 쓰가루 반도로 향하는 건 단순한 여행이 아니야. 자신의 기원에 눈을 돌렸다는 뜻이지. 발밑을 똑바로 보고 걸음을 옮기겠다는 기특한 마음가짐일세.

아아, ≪석별≫이라. 그것도 좋지. 자네는 이야기를 아주 잘 고르는구먼.

다자이의 상기된 뺨이 보이는 것만 같네. ≪석별≫에서 다자이는 다소 흥분해 있지.

 “일본에는 서양 과학 이상의 것이 있다”고, 일본은 “동양에서 가장 총명한 독립국”이며 “세상에서 으뜸가는 이상국가가 될 것”이라고 거침없이 떠들어대네.

어떤가, 천진할 정도의 신념 아닌가. 이것이 2차세계대전에서 일본 패망이 확실시되던 시기 쓰인 작품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되네.

 중국 대문호 루쉰을 내세워 다자이가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인 게야.

암울한 현실 따윈 과감히 떨쳐버리고 새롭게 일어서자고. 그러니 다자이도 이렇게 말하는 것 아니겠는가. “믿는 곳에 현실이 있는 것이고 현실은 결코 사람을 믿게 할 수 없다”고.

거기 마지막 부분도 펴보게.

 ≪옛날이야기≫ 이게 또 걸작이거든. 공습을 피해 아내, 딸과 함께 방공호에 들어간 다자이가 옛날이야기를 패러디해 들려주는 건데 입담이 보통이 아니야.

그 유명한 미시마 유키오도 이것만은, 이라며 꼬리를 내렸다니 말 다했지 뭔가.

우리가 잘 아는 혹부리영감 이야기도 나온다네.

 거북을 살려준 대가로 용궁에 놀러갔다 와보니 삼백년이 지났더라는 이야기, 토끼에게 반해 온갖 험한 꼴을 당한 뒤 결국 익사하고 마는 늙은 너구리 이야기, 나약하고 무기력한 남편이 귀애하던 참새의 혀를 뽑아버린 아내 이야기.

어떤가, 흥미가 당기지 않나?

재미나고 익살스러운, 다자이로서는 전무후무한 유머로 가득 찬 이야기일세.

그러나 재미나기만 해서야 되겠는가, 다자이는 웃음 사이사이 그럴듯한 독설을 날리지. 예를 들자면 이런 걸세.

우라시마는 아이들이 죽이려고 하는 거북을 5푼을 줘서 살려 보내네. 은혜를 갚으러 온 거북은 서슴없이 이렇게 말하지. “당신이 나를 구해준 것은 내가 거북이고 또 괴롭히는 상대가 아이들이었기 때문이겠죠.

 (중략) 그러나 그때의 상대가 거북과 어린이가 아니고, 예를 들어 난폭한 어부가 병든 거지를 괴롭히고 있었다면 당신은 5푼은커녕, 한 푼도 내지 않고, 아니 단지 얼굴을 찡그리고 틀림없이 서둘러 지나쳤을 거예요. 당신들은 인생의 절실한 모습을 보는 것을 아주 싫어하니까.

 (중략) 실생활의 비릿한 바람을 맞는 것을 아주, 아주 싫어하죠. 손을 더럽히는 것을 싫어하죠.”

재미있지 않은가?

난 다자이가 조금 더 오래, 전쟁 때가 아닌 평화로운 시절에 살았다면 어땠을까 상상하네.

여자와 함께 자살하는 나약한 다자이가 아닌, 포탄 떨어지는 방공호 속에서도 유쾌한 이야기들을 지어낼 수 있는 강인한 다자이를 떠올리네.

 이러니 어찌 그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있겠는가 말이야.

드디어 왔구먼. 자아, 나는 이제 춤을 추러 가야 하네.

무슨 소리냐고? 저기 “호랑이 가죽 옷을 입고 볼품없는 쇠방망이 같은 것을 든 빨간 얼굴”들이 보이지 않는가?

나는 저들이 감탄할 춤을 추고 내 혹을 떼어 가게끔 해야 한단 말이지. 우아하고 화려한 춤이 아닐세.

 “이제부터의 삶은 어쩌면 전혀 화려하지 않은 수수한 것이 될 것”이라고 다자이도 말했거든. 흥이 나는 대로 팔다리를 흔들면 충분하네.

구성진 노래를 한 가락 더한다면 금상첨화지.

무슨 소리냐고? 궁금하면 그 책을 열어보게. 그 안에 전부 다 쓰여 있으니 말일세.

안보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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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 쓰가루 반도에서 3주간의 여행

▶ '쓰가루-석별...' 줄거리

다자이 오사무는 일본 현대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작가로, 2차세계대전 당시 허무주의와 가치관의 혼란 속에서 방황하던 일본인들의 정서를 대변하며 대중적 인기를 누렸다.

다자이 문학이 자기혐오와 자의식 과잉으로 점철된 ‘패자의 문학’으로 잘 알려진 것과는 대조적으로 ≪쓰가루≫ ≪석별≫ ≪옛날이야기≫는 밝고 따뜻하며 유머러스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중기 대표작으로 꼽힌다.

다자이가 약 3주간 고향 쓰가루 반도를 여행하고 쓴 ≪쓰가루≫는 기행문 형식의 소설이다.

‘나’는 고향에서 옛 친구들과 재회하여 밤새 술잔을 기울이고, 어릴 적 자신을 키워준 보모를 만나기 위해 부푼 마음을 안고 길을 떠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친다.

≪석별≫은 센다이 의학전문학교 학생이었던 주인공 ‘나’가 학창 시절 추억을 떠올리며 쓴 수기 형식의 소설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중국 민중의 무지를 깨닫고 의학을 배우러 일본에 왔지만, 조국에 필요한 것은 정신의 개혁임을 깨닫고 문예운동을 위해 귀국하는 중국 대문호 루쉰의 이야기를 그렸다.

≪옛날이야기≫에서는 공습을 피해 들어간 방공호에서 아버지가 딸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준다. 일본의 유명한 민담을 패러디한 다자이식 유머가 한층 빛을 발한다.





서지 정보



원제: 惜別 · お伽草紙

저자: 太宰治(1909~1948)

발표: 1944년,1945년,1945년

분야: 일본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쓰가루·석별·옛날이야기

옮긴이: 서재곤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75(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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겁쟁이들의 이야기



슈테판 츠바이크는 겁이 많았다.

정신적으로 늘 절망 직전의 상태였다고 전해진다. 문제는 그가 너무 유명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다.

주변의 기대가 컸고 그만큼 요구도 많았다.

하지만 그는 결코 참여적인 작가가 아니었다.

츠바이크의 삶을 소설로 쓴 로랑 세크직에 의하면 그는 문학을 통해 메시지를 전한 적이 없었다.

그 때문에 비난을 받을 만큼 받았다.

그는 인물들의 광기 어린 열정 외에는 세상에 달리 말하고자 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슈테판 츠바이크는 소설도 소설이지만 대단히 많은 인물들에 대해 쓴 전기 작가이기도 하다.

에라스무스, 메리 스튜어트, 발자크, 두루두루… 그건 타인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데 능하다는 사실을 의미할 것이다.

 사람은 실제로 타인의 마음 상태를 흉내 낼 수 있고, 자신 안에 있는 감정들을 통해 타인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

 마치 자기 자신의 행동인 양 뇌 속에서 체험하는 것이다.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 이입을 참 잘한 작가였다.

그는 그렇게 사람의 영혼을 깊게 파고들고 오래 붙들면서 쉬지 않고 글을 썼다.하지만 그는 센 사람이 아니었다.

전쟁에, 유명세에, 기대치에, 의무에 시달리면서 그는 자신이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

 더이상 목소리를 낼 만한 힘이 없었고, 그의 정신 어디에서도 중대한 진실이 솟아날 구석을 찾을 수 없었으며, 아직도 비밀로 남아 있는 출구를 짐작조차 할 수 없어했다.

사람의 뇌는 지속적으로 고통에 노출이 되면 손상된다.

술이 그렇게 만드는 것처럼. 처음부터 행복할 줄 몰랐던 그는 마지막까지도 행복해지는 데 실패했다.

결론은 자살이었다.영혼의 반려자였던 ‘강한’ 첫번째 아내가 아니라 늘 아프고 흔들렸던 ‘약한’ 두번째 아내와 함께.

약물 과다복용이었다.

책을 좋아해도 슈테판 츠바이크를 모르는 독자들은 많다.

나도 그랬다. 역사는 중재하고 화해하는 자들을, 인간적인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는 나름대로 조용히 봉사했지만 뛰어드는 대신 도망쳤기 때문에 경멸당하고 무시당했다. 혹시 그것이 이유일까?

체스 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에도 겁쟁이가 나온다.

물론 이 두 이야기를 화살로 꿰뚫는다면 촉에 묻어나올 단어는 ‘겁’이 아니라 ‘몰입’이다.

츠바이크에 의하면, 한 인간은 자신의 모든 힘을 작동시키는 순간에만 자기 자신에게나 다른 사람에게 참으로 살아 있는 존재가 된다.

내면에서 영혼이 불타오르는 순간에만 외면적으로도 형상이 되는 것이다. 그 순간이 바로 몰입의 때이리라.

체스 이야기에서 체스 챔피언은 본능적으로 몰입을 소유하고 있고, 그 몰입을 통해 살아나기 시작한다.

반면 B박사는 살아남기 위해 투쟁해서 몰입을 얻어내지만, 실제적으로는 죽어간다.

낯선 여인의 편지에서 여인은 상대방에게서 몰입의 대상이 되고자 희망하지만 수동성에서 벗어나지 못해 절망에 이르고 만다.

반면 소설가 R는 상대방에게서 처음부터 몰입의 기회를 박탈당해 자신의 능동성을 발휘해보지도 못한다.

하지만 인간의 역사는 외적인 사건들이나 우연에 따라서 의미와 형식을 만들어내지 않는다.

언제나 자기가 타고난 가장 근본적인 천성과 기질이 삶을 형성하고, 또 파괴하는 것이다.

슈테판 츠바이크처럼, 또 나처럼 겁이 많은 것도 그 한 예다.

두 이야기에서 겁쟁이는 B박사와 여인이다.

체스 챔피언에게 한 방 먹였음에도 B박사는 남은 인생 동안 꾸준히 겁을 생산하며 불안하게 살아갈 것이고, 끝내 ‘낯선’으로 남기로 결정한 여인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겁을 모조리 소비하고 비참하게 죽는다는 차이가 있다면 있달까.

나는 자주 잘못한다. 잘못되고 있다는 것을,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러하다.

내게 ‘잘못’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털어버리고 닦아내도 자꾸 되앉는 먼지처럼 나는 자꾸만 잘못한다.

왜냐하면 겁이 나니까 변하지 못하는 것이다.그래서 참 자주 절망한다. 그리고 오래 좌절한다.

그렇다고 마음 놓고 그럴 수 있다는 건 아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징징거릴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다.

씩씩하게, 불평 없이 살라고 충고할 뿐이다. ‘모질다’를 ‘단호하다’로, ‘참견’을 ‘관심’으로 착각하고 닦달도 한다.

 하지만 난 여전히 징징거리는 하나의 겁쟁이로 살고 있다. 다만 황폐해지지는 않으리라, 한계를 긋는 것으로 위안한다.

그 또한 겁이 나서다. 징징거리다가 징징거리는 채로 죽을까봐.

이런 진짜배기 겁쟁이 같으니라고.

나는 모든 작가들을 좋아하고, 그중의 몇몇은 사랑한다.

한데 겁쟁이의 가장 큰 성질은 대놓고 잘 표현하지 못한다는 거다. 그래서 난 내가 사랑하는 작가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잘 봬주지 않는다.

사랑의 조건은 단순하다. 읽어도 또 읽고 싶어야 한다는 것, 다른 것도 더 읽고 싶어야 한다는 것.그런데 내가 지금 슈테판 츠바이크의 책들을 모으고 있다. 그런데, 그가 겁쟁이가 아닌 거면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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첸토비치와  B박사의 체스 대결

▶ '체스이야기···' 줄거리

세계 3대 전기 작가 중 한 사람이자 탁월한 이야기꾼으로 평가받는 슈테판 츠바이크는 1881년 오스트리아 빈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가정환경에서 자라며 일찍이 문학적 재능을 보였고 스무 살 되던 해 첫 시집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프로이트의 영향을 받아 인간 내면을 깊이 탐색하고 인간관계에서의 심리작용을 예리하게 포착해낸 소설을 다수 발표했다.

하지만 1, 2차 세계대전의 암울함을 견뎌내지 못하고 1942년 끝내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가 죽기 직전 완성한 ‘체스 이야기’는 비상한 능력으로 체스 챔피언의 자리에 오른 첸토비치와 B박사의 체스 대결을 그린 작품이다.

화자인 ‘나’는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는 배 안에서 첸토비치를 만나 그와의 체스 게임에 휘말리게 된다.

냉혹한 첸토비치의 공격에 밀리고 있을 때, B박사가 나타나 조언을 해주고 게임은 무승부로 끝나게 된다.

이후 B박사를 찾아간 ‘나’는 그가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극심한 고문과 극한의 고독 속에 있을 때 체스 교본을 손에 얻어 체스에 미치도록 빠져들게 된 사연을 듣게 된다.

츠바이크가 1922년에 발표한 ‘낯선 여인의 편지’ 또한 열세 살 때부터 평생 한 남자만을 사랑해온 여자의 내밀한 고백이 탁월한 작품이다.

유명 소설가 R는 발신인이 나와 있지 않은 낯선 필체의 두툼한 편지 한 통을 받고 호기심에 이끌려 편지를 읽기 시작한다.

 “제 아이가 어제 죽었습니다”라고 시작하는 편지는 R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느 여인이 쓴 것으로, 여인은 아이의 죽음과 더불어 자신도 죽음을 맞게 되는 순간 자신의 삶과 R를 향한 평생의 사랑을 편지에 담아낸 것이다.

 

원제: Schachnovelle Brief einer Unbekannten

저자: Stefan Zweig(1881~1942)

발표: 1941년, 1922년

분야: 오스트리아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체스 이야기·낯선 여인의 편지

옮긴이: 김연수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21(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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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 작은 할아버지 괴테와 연애하게 된 사연




괴테가 살았던 집에 간 적이 있습니다.

몇몇 작가와 독일문학 전공자, 그외 여럿이 함께였어요.

대문호 집을 구경하는 풋내기 소설가는, 그야말로 부잣집에 심부름 간 촌뜨기 하녀였습니다.

뭔가 압도당하는 기운에 입을 쩍 벌리고 섰다가, 괜히 심사가 뒤틀려 뭐 하나 주워갈 거 없나 두리번거리다가, 그러다 마침, 흠잡을 게 눈에 띄었습니다.

침대. 괴테의 침대라고 하는데, 크기가 너무 작아요, 작아도 너무 작아요, 신대륙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의기양양하게 말했지요.

괴테가 이렇게 작은 사람이었어?

아무리 그래도 기럭지가 어떻게 이렇게 짧을 수가 있어? 기럭지가? 말이 끝나기 무섭게 등짝을 맞았습니다.

그리고 혼쭐이 났습니다.

대문호 괴테에게, 기럭지가 뭐야, 키도 아니고 신장도 아니고.

어디 감히, 괴테에게, 건방지게.진짜 혼났습니다.

고전이라는 게 그렇습니다.농담이라고는 씨도 안 먹히게 생긴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죠, 덩치는 어찌나 큰지 함부로 덤벼들었다가 혼쭐날 것 같죠, 딱 심술 맞고 꼬장꼬장하고 냄새나는 노인네 같습니다.

고전을 읽는다는 건 그런 노인네와 한 방에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것.그러니 맛도 안 보고 등을 돌리지요.꼰대하고는 안 놀아.

신과 악마, 선과 악, 비극과 구원을 담은 내용이라면 더욱 그렇겠지요.

괴테의 《파우스트》는 고전 중의 고전입니다.

그런데 이 꼬장꼬장한 노인네, 조금만 친해지면 꽤 재밌어집니다.

귀여운 구석도 있고요.

파우스트와 메피스토펠레스는 한 쌍입니다.

파우스트를 놓고 신과 내기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파우스트는 모든 학문을 섭렵했지만 진리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우울증에 빠져 있던 참이구요.

이때 메피스토펠레스가 거래를 제안하고 파우스트가 받아들입니다.

파우스트의 충실한 삽살개가 될 테니, 만족을 하면 자기한테도 똑같이 되라는 것.

그래서 다음과 같이 피의 계약서를 쓰면서 한 쌍이 되는 겁니다.

내가 순간을 향하여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하고 말을 한다면 너는 나를 꽁꽁 묶어도 좋다.

그럼 나는 기꺼이 멸망하리라.그때엔 조종이 울려도 좋을 것이며, 그때 너는 종노릇에서 해방되리라.

메피스토펠레스는 일단 마녀의 물약으로 파우스트에게 젊음을 되찾게 해줍니다.

이십대 청춘이 된 파우스트, 사랑부터 해야겠죠. 순결한 그레첸과 만나 단박에 사랑에 빠집니다.하지만 사랑에는 운명의 장난이 빠질 수 없는 법.

메피스토펠레스의 농간으로 그녀의 오빠가 파우스트의 칼에 찔려 죽고, 그녀는 미쳐서 아이를 살해하고, 감옥에 갇혀 파우스트마저 알아보지 못하고, 결국 죽음을 택한다.

아, 그야말로 비극의 연속입니다.

이 비극은 언제 끝날까요.

메피스토펠레스는 파우스트의 영혼을 가져갈까요?

파우스트와 그레첸의 관계는 이걸로 끝인 건가요?

 아니죠, 이제야 본격적인 모험이 시작되는 걸요.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넘나들며, 전쟁에서 승리도 하고, 미의 화신 헬레나와 좋은 시간도 보내고, 간척사업도 일구어내지요.

하지만 그것은 모두 메피스토펠레스의 알량한 수작과 눈속임으로 얻은 것이니, 어느 순간 구름처럼 휙, 사라질 수밖에요.

그래서 파우스트는 악마의 도움 없이, 대담하고 부지런한 일꾼들과 함께 튼튼한 언덕을 만들기로 합니다.

마법의 외투를 입고 도착한 미지의 나라는 결국 허상이라는 걸 알아버린 거죠.

젊음도 사라지고 눈도 먼 채 늙은이로 되돌아온 파우스트.

 드디어 인간 지혜의 마지막 결론에 다다르게 됩니다.

자유도 생명도 날마다 싸워서 얻는 자만이 그것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

위험에 싸여 있어도 값진 세월을 보내는 바로 이곳이 가장 아름답다는 것.

사랑만이 사랑하는 자들을 구원할 수 있다는 것.

미래를 꿈꾸며 행복을 예감한 파우스트.

드디어 만족을 느끼며 외칩니다.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내가 이 세상에 이루어놓은 흔적은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쓰러집니다.

승리는 이렇게 메피스토펠레스에게 돌아가는 걸까요?

 신이 어디 그렇게 호락호락하던가요.

홀리는 기술이야 악마들보다 천사들이 한 수 위죠.

메피스토펠레스가 천사들에게 정신을 팔고 있는 사이, 천사들이 파우스트를 빼앗아갑니다.

나잇살이나 먹은 악마가 속아 넘어갔으니 누구 탓할 수도 없고 하소연할 데도 없고.

파우스트는 물론 천상으로 무사히 올라갔겠지요.

그곳에선 천사들의 합창 소리 들렸겠지요.

사랑하는 그레첸도 기다리고 있겠지요.

기럭지 흉을 보더니, 아예 침대로 폴짝 뛰어올라가 노인네 수염을 잡아당기고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파우스트》 책장을 덮고 있는 나는 꼬장꼬장한 노인네가 아니라 미소년과 함께 모험을 즐기다 온 것만 같습니다.

매끈한 청년과 절절한 연애를 한 것도 같구요.

그리고 이런 기분.

괴물들 나라에 가서 나쁜 짓 실컷 하며 재미나게 놀다 돌아오니 별 일 없이 조용하네?

단, 구원은 ‘언제나 열망하며 노력하는 자’에게만 해당되니, 대문호 집에서 뭐 주워갈 생각이랑 접고, 죽을 때까지 열심히 쓸 것.

천운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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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와 영혼을 걸고 계약하는 파우스트

>>  ‘파우스트’ 줄거리

독일 문학의 거장 괴테가 60여 년에 걸쳐 완성한 희곡 《파우스트》는 전 인류의 역사를 포괄하는 깊이를 지닌 대작이다.

16세기께 독일에 실존했던 파우스트 박사의 전설에 영감을 얻어 수많은 예술작품이 탄생했지만, 그중 가장 큰 성공을 거둔 것은 괴테의 《파우스트》이다.

괴테가 일생 동안 생각하고 체험한 모든 것이 집약된 작품이자 인간정신의 보편적 지향을 제시하는 고전인 《파우스트》는 인간 파우스트 박사가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에게 영혼을 팔고, 시공간을 초월해 선과 악의 세계를 오가며 갖가지 인생을 경험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마술의 힘으로 향락을 추구하고, 젊음을 얻지만 사랑에 실패하는 ‘비극 제1부’와 종교, 철학, 과학, 예술, 국가, 정치 등 보다 심오하고 포괄적인 가치를 통해 인간 구원의 문제를 폭넓게 탐구한 ‘5막으로 구성된 비극 제2부’로 이루어진다.

작품은 노학자 파우스트가 세상과 고별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파우스트는 우주의 본질과 창조의 원리를 규명하기 위해 세상의 모든 학문을 섭렵하지만, 궁극적 진리를 파악하는 데 실패하고 절망하여 죽음을 선택한다.

그러나 독배를 마시려던 순간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나타나 영혼을 걸고 계약을 맺자고 유혹한다.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의 종이 되어 넓은 세계를 보여주고 온갖 환락을 맛보게 해주는 대신, 파우스트가 만족하여 “멈추어라, 너 정말 아름답구나!” 하고 외치는 순간, 그의 영혼을 가져간다는 조건이다……

 

원제: Faust

저자: Johann Wolfgang von Goethe(1749~1832)

발표: 1831년

분야: 독일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파우스트

옮긴이: 이인웅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09~010(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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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의 독서, 보상은 어디에?


우리는 우리가 잘 아는 세계의 이야기를 좋아한다.

오래 격조했던 친구보다는 날마다 통화하는 친구와 할 말이 더 많은 법이다.

잘 모르는 세계의 이야기를 읽기 위해선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다.

새로 발견한 피라미드에 들어가는 고고학자처럼 비좁은 미로를, 설계도 한 장 없이 손으로 더듬으며 따라 내려가야 한다.

그곳은 낯설고 어두우며 적대적이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염소의 축제》가 바로 그런 책이다.이 짧지 않은 소설에는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별명이나 애칭으로도 불린다.혼란이 가중된다.배경은 도미니카 공화국.

낯선 나라다.이 역시 장애물이다.주인공은 또 어떤가? 전설적인 독재자 트루히요다.

독재자와 그에 대한 암살 음모가 소설의 주요 동력이다.

정치는 한국 소설이 외면해온 영역이다.우리나라 작가들은 정치를 여간해서는 다루지 않으며 따라서 독자들도 익숙하지 않다.

게다가 시대적 배경이 1960년대다.

‘과거는 외국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시간의 갭은 그 자체로 장벽이다.

정리하자면, 이 소설은 지금으로부터 50년 전에 벌어진 도미니카 공화국의 독재자 트루히요의 암살을 중심으로 독재와 정치, 인간성의 문제를 천착한 소설이다.

출판사의 영업자라면 숨기고 싶을 요약이다(아마 ‘노벨문학상 수상작’ 같은 문구로 대신할 것이다).

이제 피라미드의 내부로 내려간다.우선 지도가 필요하다.은유가 아닌 진짜 지도 말이다.

무심히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된다.최소한 우리는 도미니카 공화국이 아이티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미국이라는 최강대국 근처에 자리 잡은 섬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지리는 소설 속 인물들에게 각인된 역사적 자아이며 운명의 얼굴이다.

백지 한 장도 준비하자.등장인물 정리용이다.

바르가스 요사는 대단한 이야기꾼으로 여간해서는 독자를 미궁에 빠뜨리지 않는 작가다.시점과 시간대가 교차하는 복잡한 플롯을 사용하면서도 독자들과 흥미로운 게임을 잘도 벌인다.그런데 이번 소설은 예외다.

정치와 정면 대결하기 때문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 정치다.인간세계의 다양한 욕망과 그로 인해 빚어지는 갈등을 조정하는 일이어서 필연적으로 여러 사람이 등장하게 마련이다.

연애소설은 극단적으로 단 두 명만 있어도 이야기가 성립한다.그러나 정치에는 최소한 세 명이 필요하다.

권력자, 반대자, 그리고 중간자.둘이 연합하여 나머지 한 사람을 움직이는 것,이게 정치의 시작이다.

이 소설에는 독재자와 그에 기생하는 권력층, 이들에 맞서는 반대 세력, 그리고 독재의 희생자들이 등장한다.

이렇게 다양한 입장을 가진 인물들이 각자의 철학과 사상을 가지고 충돌한다.

소설 속의 트루히요는 단순한 악마가 아니며 암살자들도 선의로 프로그램된 로봇이 아니다.

따라서 이 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등장인물들이 가진 생각들과 끈질긴 싸움을 벌인다는 것을 의미한다.

바르가스 요사는 복화술을 시도하지 않는다.

등장인물의 뒤에 숨어 자기 생각을 독자에게 은근히 강요하는 2급 작가가 아니다.

뛰어난 작가들이 그렇듯이 그는 소설 속의 모든 견해를 상대화한다.독재자 트루히요, 그는 전립선 문제로 툭하면 바지에 오줌을 지린다.그러면서도 소녀를 탐한다.

도덕적으로 악하고, 미적으로 추하다.그러나 그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있다.

피할 수 없는 인간적 한계에 직면한 그를 독자들은 마음 놓고 미워할 수 없게 된다.일종의 회색지대에서 윤리와 정치, 미학의 제 문제들과 마주치게 된다.

작가는 트루히요 암살 사건의 전모를 낱낱이 밝히는 데 주력하지 않는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소설 대신 르포를 써야 할 것이다.소설은 이미 벌어진 사건(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지상의 사막)에서 출발해 어둠의 미로(피라미드의 내부)로 독자를 데려간다.

그곳에서 새롭게 생명을 얻은 캐릭터(미라)들이 벌떡 일어나 횡설수설 떠들어대는 장면과 마주치게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토록 낯설고 이상한 세계로 내려가야 하는 것일까?

잘 아는 세계의 익숙한 얘기도 아직 다 읽지 못했는데 말이다.뭔가를 배우기 위해서는 아닐 것이다.

좋은 소설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는다.게다가 도미니카 공화국의 독재자의 내면을 알아서 어디다 쓴단 말인가? 대학입시나 입사면접에 나오지도 않을 텐데 말이다.

공항에서의 지루한 대기 시간을 견디게 해줄까? 아닐 것 같다.탑승자를 찾는 안내방송을 귓등으로 들으며 한가롭게 뒤적거려도 될 소설이 아니다.집중하지 않으면 바로 길을 잃는다.

이 모든 난관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과 분투해야 할 이유가 과연 있을까? 있다.다른 어떤 것으로도 이 책을 읽는 경험을 대체할 수 없다는 것, 이 경험의 대체 불가능성이야말로 고투에 대한 궁극의 보상이다.

《염소의 축제》와 같은 소설은 작가가 마지막 문장에 마침표를 찍는 바로 그 순간부터 피라미드 속의 미라처럼 영속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한다.

과거에 쓰인 어떤 작품과도 다르고, 개개의 인물들이 작품 속에 생생하게 살아 있으며, 주제는 잘 감춰져 있는데다가, 문체가 고유하다.이 세계에는 대체가 불가능한 경험을 향유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를 치르고라도 그것을 ‘겪으려는’ 이들이, 비록 소수라 할지라도 분명히 존재한다.

만약 어떤 소설이 그런 유일무이한 경험을 줄 수만 있다면, 그 작품은 사라지지 않는다.그런 경험을 찾는 독자들께 이 책을 권한다.

김영하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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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니카의 권력자 ‘트루히요’ 는 어떻게 암살됐나

◆ ‘염소의 축제’ 줄거리


1961년 5월 30일 도미니카 공화국의 한 고속도로에서 총성이 울려 퍼진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이래 ‘조국의 아버지’ ‘수령’이라 불리며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군림한 트루히요는 이렇게 죽음을 맞이한다.

실제 역사에 작가적 상상력을 더해 독재자의 마지막을 그려낸 <<염소의 축제>>는 32년간 도미니카 공화국을 지배했던 트루히요의 암살 과정을 재구성한 것으로 트루히요, 트루히요의 총애를 잃은 장관의 딸 우라니아, 트루히요를 죽이려는 암살자들 의 세 시점에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염소의 축제>>는 201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페루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대표작으로 <<백년의 고독>>을 뛰어넘어 20세기 라틴아메리카 문학의 위대한 상징이 된 작품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폭넓은 주제와 다양하고 실험적인 글쓰기 방식, 높은 예술성으로 ‘우리 시대 최고의 스토리텔러’라는 찬사를 받으며 라틴아메리카 문학에서 특별한 위상을 차지해온 바르가스 요사는 <<염소의 축제>>를 통해 다시 한 번 정교함과 세세한 장치, 불쾌함을 제거하는 훌륭한 언어 구사를 인정받았고,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재능’을 가졌다는 평가를 받았다.

출간 당시 트루히요를 추종하는 자들로부터 적지 않은 비판에 직면했지만 이에 맞서 바르가스 요사는 ‘그들을 분노하게 만든 것이 매우 만족스럽다’고 밝히기도 했다.

거장의 손끝에서 태어난 독재자의 마지막 나날을 통해 ‘권력 구조의 지도를 그려내고 개인의 저항, 반역, 좌절을 통렬한 이미지로 포착했다’는 노벨문학상 선정 이유 또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원제; La Fiesta del Chivo

저자; Mario Vargas Llosa(1936~)

발표; 2000년

분야; 라틴아메리카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염소의 축제 1, 2

옮긴이; 송병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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