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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

《안나 카레니나》를 처음 본 건 초등학교 4학년 어두운 다락방에서였다.

집안 식구들 중 아무도 들춰보지 않던 거실의 세계문학전집은 곧 다락방 차지가 되었다.

비가 쏟아지던 일요일, 밖에 나갈 수 없던 나는 어두운 다락방에서 금빛 글씨가 반짝거리던 《안나 카레니나》를 집어 들었다.

그러나 곧 오래된 책에서 나는 퀴퀴한 냄새와 무슨무슨 스키와 같은 익숙지 않은 이름들, 발음하기 힘든 지명들과 세로줄 쓰기에 눈이 어지러워 책을 덮었다.

고전이 전화번호부만한 그 악랄한 두께로 보통 사람의 ‘기’를 짓누르는 건, 세계 공통이다.

도대체 짧게 쓴 ‘고전’이란 게 있긴 한가 싶을 정도로 ‘걸작’이라 부르는 책들은 엄청난 분량을 자랑한다.

게다가 행갈이 없이 이어지는 만연체를 감당할 만한 사람은 몇 명이나 되겠는가.

내가 《안나 카레니나》를 다시 정독하게 된 건 그러므로 10년이 훌쩍 지나서였다.

고해성사를 하자면, 고전은 작가들도 읽기 ‘되게’ 힘들다(그러므로 ‘고전’이란 몇 번의 실패와 포기 끝에 ‘마침내’ 읽게 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오죽하면 파울로 코엘료는 《흐르는 강물처럼》에서 작가들이 인정하는 유일한 책은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뿐인데, 실상 그 내용을 물어보면 하나같이 횡설수설한다고 적어놓았을까.

고전에 대한 엄숙함을 잠시 접어두고, 다소 불량스럽게 얘길 하자면 《안나 카레니나》는 《사랑과 전쟁》의 19세기 러시아판이다.

남들이 보기에 부족할 것 없는 고관대작의 부인 ‘안나’가 젊은 장교 ‘브론스키’와 사랑에 빠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그녀가 기차에 몸을 날리는 기념비적인 저 마지막 장면을 ‘불륜의 말로’라고 정의해버리고 나면 ‘왜 우리는 이 책을 읽어야 하는가’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안나 카레니나》는 톨스토이의 삶에 이정표를 세운 작품으로, 진실한 사랑과 결혼, 예술, 종교, 죽음 등 삶에 관한 모든 것을 쏟아 부은 톨스토이 문학의 집대성이다.

톨스토이는 이 시기를 기점으로 세계관이 크게 바뀌는데, 자신이 잘못 살았다는 통렬한 심정으로 참회록을 쓰기에 이른다.

참회록 집필 후, 그는 위대한 베스트셀러 작가에서 전 인류에게 훈계하는 계몽주의적 스승으로 극적인 변환점을 맞는다.

한 인간이 자신의 삶과 문학을 일치시키려 이토록 발버둥친 역사는 별로 없었다.

그러나 그런 안간힘과 상관없이 그토록 자신이 지향한 인물과 점점 멀어져간 사람도 드물다.

톨스토이는 자신이 소설에서 비판하고 경멸했던 것들, 가령 도시의 환락과 무위도식, 사랑 없는 결혼, 거짓과 허위의 예술을 버리고 인간을 사랑하며 삶과 죽음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설파에 가까운 ‘설교’를 했다.

톨스토이가 안나를 비극적 죽음으로 내몬 까닭은 단순히 그녀의 사랑이 불륜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비극적인 죽음을 통해 당시 러시아 귀족사회의 연애와 결혼제도, 생활방식과 가치관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가를 고민하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질문했다.

좋은 소설이란 ‘답’이 아닌 그 시대를 산 인간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것으로, ‘질문’을 던지는 방식으로밖엔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질문에 대한 답은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고, 변화할 수 있다.

고전이 매번 사람들에게 다르게 읽히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내가 기적처럼 《안나 카레니나》를 완독했다면 말할 것도 없이 나는 이 소설의 주제가 ‘인과응보’였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바람 난 여자가 기차에 치여 죽었으므로 슬프긴 해도 삶은 원래 그래야 하는 것, 이라고 실컷 잘난 척했을 것이다.

그것은 철저히 이솝우화적인 세계로 ‘교훈’을 찾는 것이 진정한 독서의 의미라고 생각했던 11살 내 가치관과도 들어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서른일곱에 읽는 《안나 카레니나》는 ‘이렇게 사는 게 나쁘다!’가 아니라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른가?’라는 선뜻 대답하기 힘든 질문으로 뒤바뀌어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내가 실패를 거듭하며 이 소설의 첫 장과 마지막 장을 읽는 동안 내가 그은 밑줄은 상당 부분 바뀌어 있었다.

나는 읽을 때마다 예전에 그은 밑줄이 달라지면 달라질수록 좋은 소설이란 편견을 꽤 오랫동안 가지고 있었는데,《안나 카레니나》 역시 그런 소설 중 하나다.

이번의 독서에서 나는 ‘안나’가 아닌 그녀의 남편 ‘카레닌’의 마음에 훨씬 더 감정이입되었다.

그것은 결혼 10년차 주부라는 내 개인적인 삶의 조건과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마침내《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주인공 테레사가 왜 자신의 ‘충견’ 이름을 ‘카레닌’이라고 지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카레닌은 테레사가 보기에 타고난 희생양이었고, 그녀는 스스로 자신을 이 19세기 러시아 남자와 동일시한 것이다.

‘고전이 재밌다’라는 말을 말 그대로 받아들이면 곤란하다.

그건 마치 뜨거운 욕탕에 들어앉아 ‘어! 시원하다’라는 아빠의 거짓말과 일맥상통한다.

고전은 어렵고 읽기 힘들다.

고전 읽기엔 상당한 유혹의 기술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말하겠다.

하버드에서 철학을 공부중인 첼리스트 장한나가 최고로 꼽는 소설은 《안나 카레니나》다(그녀는 몇 번씩 이 소설을 반복해서 읽는 중이란다).

톰 울프, 스티븐 킹 같은 최고의 영미권 작가 125명이 꼽은 최고의 소설 1위 역시 《안나 카레니나》다.

13년을 신춘문예에 낙방했던 내가 기적처럼 등단한 건 우연히도 《안나 카레니나》를 읽고 난 후였다.

백영옥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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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장교와 사랑에 빠지는 유부녀 ‘안나’

★ ‘안나 카레니나’ 줄거리


러시아의 대문호 톨스토이의 대표작 《안나 카레니나》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된다.

사랑과 결혼, 가족문제라는 보편적인 소재로 전 러시아인을 사로잡은 《안나 카레니나》는 농노제 붕괴에서 러시아 혁명에 이르는 19세기 후반 과도기 러시아 사회와 등장인물들의 육체적 특징뿐 아니라 심리 변화까지 뛰어나게 묘사한 최고의 소설로 평가받는다.

도스토옙스키에게 ‘완전무결한 예술작품’이라는 찬사를 받은 이 작품은 10여 차례나 영화로 만들어졌으며 1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인간 삶의 총체적인 모습을 완벽하게 구현해낸 인류 보편의 걸작으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러시아 고위 관리의 아내인 안나는 오빠 스티바의 불륜으로 부부가 파경에 이르자 모스크바의 오빠 집을 방문한다.안나의 도움으로 스티바 부부는 화해하지만, 오히려 안나는 그곳에서 젊은 장교 브론스키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브론스키는 스티바의 처제인 키티와 가까운 사이였으나 안나에게 빠져든다.

젊은 시절 나이 많은 관리 카레닌과 결혼한 후 정숙한 아내로 평범하게 살던 안나는 결국 화려한 사교계와 사회적 지위, 아들까지 버리고 브론스키와 함께하는 길을 택한다.

그러나 이 결심으로 안나는 사회적으로 철저히 외면당한다.

반면 브론스키는 누구에게도 비난받지 않고 점점 사교의 폭을 넓혀간다.

고립된 안나와 자유로운 브론스키 사이에는 점점 불신이 싹트기 시작한다.

 그리고 두 사람의 사랑은 질투로, 열정은 분노로 서서히 변해간다……

원제: Анна Каренина
저자: Лев Толстой(1828~1910)
발표: 1878년
분야: 러시아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안나 카레니나
옮긴이: 박형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01~003(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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