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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련한 통증 같은 불가해함

쓰레기를 태우다가 비닐농이 손가락 끝에 떨어져 물집이 잡혔다. 팥알보다도 작은 것이어서 대수롭지 않게

잡아 뜯었는데 의외로 피부 깊이 뜯겨 나왔다. 금방 피가 쏟아지지는 않았으나 정말로 팥알처럼 붉은 화상이 된 것이었다.

마침 그것이 오른손 집게손가락 끝이어서 여러 날 동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서랍 속의 이런저런 연고를 바르며

며칠이 지나자 점차 아픔은 간지러움 비슷한 느낌으로 변하고 이어서 뻐근한 느낌으로만 남게 되었다.

그것도 그것을 만질 때만이 그랬다.



그 작은 흉터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이 소설 「고야산 스님」의 감상이 이와 비슷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상처가 작고 보잘것없는 것 같으나 만지면 뻐근하게 전해오는 무엇이 있다.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나 그 초점에서는

아련히 타는 감정이 고인다.

이렇게 시작한다.

“참모본부가 편찬한 지도를 또다시 펼쳐볼 일은 없겠다 싶었는데, 워낙 길이 험난하다보니 손대기만 해도

후텁지근한 여행용 법의 소매를 걷어올리고 표지 달린 접책을 끄집어냈다네. 히다(飛)에서 신슈(信州)로

넘어오는 깊은 산속에 뚫린 샛길은 잠시 쉬어갈 만한 나무 한 그루도 없이 사방이 온통 산으로 둘러싸였지.”

‘저쪽’에 참모본부가 있는 시대다. 그러나 여기는 원시림 속이며 주인공은 ‘법의’를 입는 사람이다.

그리고 주인공은 길 위에 있다.

길 가는 자의 이름이 무엇인가? 도인(道人) 혹은 스님이다. 길을 내는 자라 해도 되겠고 길을 닦는 자라 해도 되겠다.

이 소설은 그 길 위에서 만난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한 암시적 이야기들로 꾸며져 있다.

당시 일본 전통 사회의 내면이 드러난 것이라고 할 만하다.

“출가한 중이 하는 말이라고 해서 항상 가르침이나 훈계나 설법만 있으라는 법은 없으니, ‘젊은 양반, 들어보시게’ 하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중에 들으니 그 종파에서는 꽤 고명한 설법가로, 리쿠민사(六明寺)의 슈초(宗朝)라는

덕망 높은 스님이라고 했다.”

젊은 시절 스님은 묵던 주막에서 약장수를 만난다. 사기꾼이나 다름없는 자다. 약장수는 술상을 앞에 두고

스님을 야유하기도 한다.

그러나 스님은 모른 체한다. 스님이 다시 길을 떠나 험한 산길에 이르렀을 때 약장수가 따라와 길을 앞지르더니

갈림길의 한쪽을 택하여 간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을 때 농부를 만나 약장수가 선택한 길은

아주 위험한 길이어서 얼마 전에는 동네 사람 여럿이 길을 잘못 든 이를 구출했었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스님은

제 길을 가려다가 주저한다.

결국 그 길 잘못 든 약장수를 찾겠다고 나섰다가 무시무시한 뱀들이 여러 차례 나타나고 심지어는 몸뚱이가

잘린 놈을 넘어야 할 때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다가 관절을 다쳐 계속 걷을 수 없을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이 길의 상황이야말로 그 길, 그러니까 약장수 삶의 내부 풍경을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닌가. 그 헤매는 도정에서

다시 참모본부의 그 지도를 꺼내보지만 상황을 벗어날 길은 없다. 최악의 상황이 계속될 뿐이다. 하긴 지도는

관념일 뿐 체험적 상황이 반영될 리 없으니까. 이 모두가 산의 영이니 어차피 당해낼 재간이 없다고 판단한

스님은 땅에 엎드려 빌기 시작한다.

“참으로 죄송합니다만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낮잠을 주무시는 데 방해되지 않도록 될 수 있는 대로

조용히 지나가겠습니다. 보시다시피 지팡이도 버렸습니다.”

이렇게 빌어 뱀을 지나자 이어 거대한 거머리들이 달려드는 길이 나타났다.

“잡아서 떼어내니 툭 하는 소리를 내며 겨우 떨어지는”

거머리들이 공중의 나뭇가지에서 떨어져 몸에 달라붙는 끔찍한 도정이다.

한편 화사한 꽃 속 같은 도정도 있다.

“자, 그렇게 해서 어느 틈엔가 비몽사몽 간에 그렇게, 그 이상하고 좋은 향기가 나는 따스한 꽃 속에

살포시 감싸여 있었는데, 점점 발, 허리, 손, 어깨, 목덜미를 거쳐 머리까지 죄다 덮어오는지라 깜짝 놀랐다네.

나는 돌에 엉덩방아를 찧고 다리를 물속에 내던졌지. 빠졌구나, 하고 생각한 순간, 뒤에서

여자의 손이 어깨 너머로 가슴을 붙잡았어. 그래, 그 손을 꼭 잡고 매달렸지.”

이리하여 ‘어느 틈엔가 기모노를 벗고 보드라운 명주 같은 전신을 다 드러낸’ 성숙한 여성의 유혹이 이어지나

그 유혹 속으로 완전히 침몰하지는 않고 그 인연의 실타래 끝으로 마음의 길을 잡아가는 스님은 그 모든 것이

유기적인 관계망 속에서 삶과 자연, 통에 관계하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고야산 스님’, 즉 고야성(高野聖)이란 와카야마 현 동북부에 위치한 진언종의

영지 고야산(高野山)에서 승려가 되어 각 지방을 떠돌며 행각을 하던 자들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작가 이즈미 교카는 이 행각 스님들의 체험을 빌려 근대 이전의 일본 전통 세계의 신화와

전설의 아름다움, 풍경과 그 속에 녹아든 인간들의 불가사의를 문학으로 기록한,

가장 일본적인 소설 세계를 창조했다.

나는 그의 짧은 소설 속에서 내가 어린 시절 듣던 이야기들을 상기하게 된다.

그 불가해함은 내 문학적 삶에서 어떤 통증과 같은 것이다.

이 소설의 환기력은 그 통증을 불러오는 것이다.

장석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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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이 산속에서 겪은 기괴한 이야기

♣'고야산 스님'줄거리

「고야산 스님」은 일본을 대표하는 환상문학의 대가 이즈미 교카의 걸작 단편 중 하나이다.

자연주의 문학이 주류를 이루던 메이지 시대의 일본 문학계에서 이즈미 교카는 요괴나 민담 등

잊혀가던 일본의 전통 문화를 추구하며 후대에 가와바타 야스나리,

미시마 유키오 등 유명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1973년에는 이즈미 교카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이즈미 교카상’이 제정됐고 요시모토 바나나, 유미리 등 많은 유명 작가에게 수여됐다.

1900년에 발표한 「고야산 스님」은 19세기 말 근대화의 물결 속에서 요괴나 마녀 등의 환상세계와

일본 문화의 원풍경을 그리고자 했던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나’는 기차에서 우연히 만난 고승과 여관에서 함께 묵으면서, 고승이 행각승 시절에 산속에서

겪었던 일을 듣게 된다. 젊은 시절 스님은 어느 약장수를 구하려다가 뱀과 거머리가 우글거리는

숲을 헤치고 가까스로 닿은 외딴 오두막집에서 미모의 여인을 만난다.

이 여인은 온화한 모습 뒤로 욕정을 품고 접근하는 남자들을 짐승으로 바꿔버리는 마력을 숨기고 있었다.

미모의 여인으로 그려지는 마녀의 모습에는 작가가 어릴 때 여읜 어머니에 대한 향수가 반영되어 있다.

또한 고승이 옛길로 들어서는 행위나 깊은 산속에서 펼쳐지는 백귀야행(百鬼夜行)의 세계,

외딴 오두막집과 그곳에 사는 마녀의 존재 등은 근대화의 물결 속에

터전을 빼앗긴 전 근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고야산 스님초롱불 노래》에는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되는 「초롱불 노래」도 함께 실려 있다.

 


원제: 高野聖歌行燈

저자: 泉鏡花(1873~1939)

발표: 1900년

분야: 일본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고야산 스님초롱불 노래

옮긴이: 임태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53(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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