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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셰익스피어 '템페스트' -


"참, 찬란한 신세계"

아무도 모르는 것에 대해 말하기란 쉽지 않다. 아무도 모르니까. 그러나 한편 모두가 아는 것에 대해 말하기도 쉽지는 않다. 모두 아니까. 모두 아는 것에 대해 감히 어떤 말을 보탤 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나는 지금 고유명사이면서 보통명사이고 나아가 고전의 대명사인 셰익스피어에 대해 말하려 한다. 그의 마지막 작품 『템페스트』를 한 번 읽었더니 또 읽고 싶어졌고 하여 또 읽었더니 뭔가 말하고 싶어졌던 것이다. 좋은 노래를 듣고 또 듣다보면 저도 모르게 따라 부르고 싶어지는 것처럼.

템페스트는 폭풍이라는 뜻이다. 바다 한가운데서 폭풍을 만난 배가 난파당한 후 몇몇 사람이 구사일생으로 섬에 다다르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 폭풍은 사실 주인공 푸로스퍼로가 마술로 빚어낸 것이다. 그는 밀라노의 대공이었으나 마술 연마에만 힘쓰다가 동생 앤토니오와 나폴리 왕 알론조의 계략에 의해 쫓겨난 인물이다. 어린 딸 미랜더와 함께 망망대해에 버려진 그는 충신의 도움으로 죽지 않고 외딴 섬에 당도하여, 그곳에 살던 괴물 캘리밴과 공기의 정령 에어리얼을 하인으로 삼고 살았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앤토니오와 알론조 일행이 탄 배가 그곳 근해를 지나가는 것을 보고 복수를 위해 폭풍을 일으켜 그들을 섬으로 유인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알론조의 아들 퍼디넌드와 자신의 딸 미랜더가 사랑에 빠지자 모두를 용서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마술 책을 버린다.

푸로스퍼로는 아마도 셰익스피어의 분신일 것이다. 그가 전 생애를 통해 갈고닦았던 마술을 마지막 순간에 포기하는 것처럼 평생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해온 셰익스피어도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펜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주인공인 그보다 더 돋보이는 캐릭터는 캘리밴이다. 캘리밴은 시종 악마 같은 존재로 묘사되지만 독자는 그의 악함을 이해할 수 있다. 원래 자신의 것이던 섬을 빼앗기고 노예로 전락한 그가 푸로스퍼로에게 반발하는 대목을 보자.

“당신은 나에게 말을 가르쳐주었소. 그 덕으로, 내가 얻은 이득은 저주하는 법을 아는 것이 전부요.” 식민 치하 백성으로서 캘리밴은 식민 통치자의 언어를 사용하여 푸로스퍼로와 미랜더에게 저주를 퍼붓는다. 그런데 그 표현이 상당히 문학적이다. “나의 어머니가 오염된 늪에서 까마귀의 깃으로 쓸어모은 독로가 당신들 두 사람 위에 떨어지리라! 남서풍이 당신들에게 불어서 그 몸에 온통 물집이 생기게 하리라!”

물론 문학적이기로는 푸로스퍼로의 응수도 만만치 않다. “이 욕설에 대해서는 오늘밤 내가 널 쥐가 나도록 만들겠고, 옆구리가 쑤셔서 숨을 쉬기 힘들게 하겠다. 고슴도치들로 하여금 만물이 잠든 고요한 한밤중에 그들이 일할 수 있는 시간을 전부 너를 찌르는 일만을 하도록 하겠다. 네가 벌집같이 꼬집혀서, 벌집을 만드는 벌들이 쏘는 것보다 더 아프도록 만들겠다.”

비경제적이고 비과학적인 수사들의 향연. 요즘 세상에 이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혹 있다면 나는 그에게 매혹당할 것이다. 한 단어로 말할 수 있는 것을 두 단어로 표현하지 않는 것은 분명 재능이지만, 한 단어로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을 두 단어로 어렵고 새롭게 표현하는 것 또한 재능일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셰익스피어 작품의 감동은 그것의 내용뿐 아니라 표현에서도 나온다. 『템페스트』만 보아도 그렇다. 시적 운치가 서린 비유들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무대 언어 특유의 생동감이 넘치는 대사들은 지문 없이도 작품의 줄거리를 장악하고 인물의 캐릭터를 완성한다. 이상적인 문학 작품이 이야기의 집인 동시에 언어의 집이라면 이 작품은 그 이상적인 예라 할 것이다. 결국 셰익스피어는 만년에 마술 책을 폐기하기 직전 생애 최고의 마술을 선보였다. 그래서 독자들을 멋진 신세계로 이끌었다.

“참, 찬란한 신세계로다!”

섬에서만 자라 아버지 외에는 인간을 본 적이 없는 미랜더는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육지 사람들을 보고 경이에 차 외친다. 올더스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의 제목을 바로 여기서 따왔다던가. 그러나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는 풍자지만 셰익스피어의 멋진 신세계는 감탄이다. 사랑과 용서와 화해의 기운으로 가득한 세상에 대한 희원이다. 서로 증오하고 잘잘못을 따지고 치고받기에 삶은 너무도 짧다. 짧고 덧없고 그래서 아름답다. 작품 말미에서 푸로스퍼로는 말한다. “우리는 꿈과 같은 존재이므로 우리의 자잘한 인생은 잠으로 둘러싸여 있다.”

폭풍이 지나간 후의 고요 속에서 얻은 깨달음일까. 그것이 노작가 셰익스피어가 돌아본 삶일까.

쓸데없이 말이 길었다. 상찬이 백 마디인들 무슨 소용이랴. 책은 읽어야 맛인 것을. 읽자. 읽으면 알게 될 것이다. 셰익스피어가 왜 셰익스피어인지. 고유명사였던 그의 이름이 어떻게 보통명사가 되고 대명사가 되었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가 왜 자꾸 『템페스트』에 대해 뭔가 말하고 싶어 했는지를 말이다.

김미월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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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적 솜씨로 빚어낸 선과 악의 투쟁

♣'템페스트'줄거리


이자 가장 사랑받는 작가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작품이다. 극작가로서의 삶을 정리하고 은퇴를 준비하던 셰익스피어는 이 작품에서 유한한 삶의 덧없음과 생의 아름다움을 예찬한다. 형식적으로 『템페스트』는 삼단일(three unities)을 준수한 희곡으로, ‘삼단일’이란 하루 시간 안에, 한 장소에서, 한 줄거리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는 규칙을 말한다. 셰익스피어는 단 하루 동안 복수와 관용, 용서, 화해는 물론 선과 악의 투쟁에 관한 이야기를 천재적인 솜씨로 빚어낸다.

밀라노의 대공 푸로스퍼로는 마술 연구에만 몰두하며 정사를 소홀히 한다. 동생 앤토니오는 나폴리의 왕 알론조의 힘을 빌려 형인 푸로스퍼로에게서 대공의 지위를 찬탈한다. 푸로스퍼로는 보트에 실려 세 살 난 딸 미랜더와 함께 망망대해로 쫓겨나는데, 인자한 노대신 곤잘로 덕분에 귀중한 마술서적을 가지고 떠날 수 있게 된다. 푸로스퍼로가 딸 미랜더와 함께 당도한 곳은 악의 마녀 시코랙스가 살던 무인도. 시코랙스는 생전에 짐승과 같은 괴물 캘리밴을 낳았고, 에어리얼이라는 정령을 소나무 속에 가두고 노예로 부렸다. 푸로스퍼로는 에어리얼을 구해주고, 에어리얼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푸로스퍼로를 주인으로 모신다. 괴물 캘러밴 역시 푸로스퍼로의 하인이 된다. 세월이 흘러 어느 날 알론조 왕과 앤토니오는 이웃나라 왕의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귀국하는 길에 폭풍우를 만난다. 이 폭풍우는 마법을 완성한 푸로스퍼로가 일으킨 것이었고, 푸로스퍼로는 복수를 위해 이들을 섬으로 유인하는데…….

원제: The Tempest

저자: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1616)

발표: 1611년

분야: 영미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템페스트

옮긴이: 이경식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06(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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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지는 사랑의 낙원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이브는 낙원의 원주민들이었다. 그곳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는 계명을 제외한 그 어떤 법이나 윤리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 가난도 없고 겨울도 없고 슬픔도 없고 눈물도 없는 완전한 땅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곧 낙원을 잃게 된다. 유일한 법을 어겼기 때문이다. 창조주는 그것을 용서하지 않았다. 형벌은 가혹했다. 낙원에서 쫓아냈고, 죽음을 예감하는 유한한 존재로 전락시켰으며 남자에게는 노동의 고통을, 여자에게는 해산의 고통을 내렸다. 그것은 그들이 범한 단 하나의 죄였지만 그 죄는 인류 모두가 유산으로 물려받아야만 하는 원죄가 되고 말았다.

나는 가끔 물끄러미 앉아 그들의 삶을 상상해보곤 한다. 낙원에서 그들의 삶은 완전했다. 알몸의 상태로 부끄러움 없이 서로를 사랑했고, 부드럽고 따뜻한 풀밭에 누워 불면 없이 잠들었으며, 한 점의 우울감도 없이 눈을 떴다. 그들은 악을 알지 못했기에 죄의식과 죄책감을 몰랐고 부끄러움을 알지 못했기에 치욕과 비참 같은 슬픈 감정도 느낄 줄 몰랐다. 하지만 낙원을 잃은 후부터 그들의 삶은 고통스러웠다. 비참했을 것이고 육체와 정신을 완전히 무너뜨린 박탈감은 그들로 하여금 ‘차라리 죽고 싶은’ 심정을 느끼게 했을지도 모른다. 

밀턴이 지은 『실낙원』은 천국과 지옥, 천사와 악마, 인간의 원죄와 구원의 가능성을 다룬 일종의 종교 서사시다. 표면적인 서사는 아담과 이브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 먹고 낙원에서 쫓겨나는 내용이다. 시간적으로 태초 이전과 종말 이후를, 공간적으로 천국과 지옥, 낙원과 실낙원까지 방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사실 이 책을 읽어내는 중요한 코드는 천상 세계에서의 싸움과 그 싸움에서 패배한 사탄이 품는 복수심에 있다. 하지만 나는 중심에서 빗겨난 부분이 마음에 걸린다. 어쩌면 서사의 구석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사소한 대목일 수도 있지만 자꾸 그쪽이 신경이 쓰인다. 뭐랄까, 작은 가시가 박힌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는 심정이랄까. 선악과를 따 먹은 직후 아담과 이브에게서 나타난 이상하고 쓸쓸한 행동이 그것이다.

그들이 받은 형벌 중 가장 끔찍하고 슬픈 벌은 부끄러움을 알게 된 어떤 인식에 있다. 그들이 낙원의 법을 어기자마자 경험한 최초의 감정은 수치심이었다. 그전에는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감정이었기에 두려웠고 이 감정의 정체를 알지 못해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어두운 그늘로 숨었고 크고 둥근 잎으로 자신의 몸을 가렸다. 그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그동안 내내 허물없이 지냈던 연인으로부터 ‘부끄럽다’는 감정을 느꼈다. 원망의 마음이 생겼고 의심의 싹이 움텄으며 미움과 분노의 열기에 휩싸였다. 한 몸을 나누어 가진(창조자는 아담의 갈비뼈를 취해 이브를 만들었다) 연인을 자신과 상관없는 낯선 사람 혹은 미워하는 원수로 느끼게 된 것이다. 

낙원에서의 삶이 어땠을지 궁금하다. 원죄를 물려받은 나는 영원히 알 수도 느낄 수도 없겠지만 그래도 너무 알고 싶다. 한 점의 죄의식도, 그 어떤 부끄러움도 없는 상태가 주는 만족감은 도대체 어떤 느낌일까? 우리들도 사랑의 문을 통과하면 낙원과 흡사한 상태로 들어갈 수 있다. 사랑의 대상을 발견하고 그와 함께 사랑에 빠질 때 우리는 원죄를 망각할 수 있고 낙원의 아담과 이브가 될 수 있다. 사랑은 인간이 갑옷처럼 두르고 있는 부끄러움을 녹이고 몸과 마음을 마비시키며 단번에 찾아온다. 나체의 상태를 서로에게 보여도 부끄럽지 않고 함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제외한 모든 세계가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사회적 제도나 윤리의식은 사랑의 세계에서는 전적으로 무의미하다. 그들은 부끄러움이 없는 자유로운 감각 속에 누워 원초적인 느낌과 말들을 주고받는다. 그러나 이 낙원은 불완전하다. 모래로 지은 성처럼 단 한 번의 파도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작은 바람에도 조금씩 마모된다. 우리는 곧 슬픔 속에서 깨닫게 된다. “실낙원 위에 세운 낙원은 결국 실낙원에 불과하구나.” 

하지만 『실낙원』의 연인들의 사랑이 완전히 망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사랑을 지키기 위해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냈다. ‘상대방이 변했음을 깨달았지만 열렬히 사랑하는 마음에서 상대방과 함께 멸망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나는 그대와 운명을 같이하고 형벌을 같이하련다. 만일 죽음이 그대와 짝짓는다면 죽음은 내게 생명이리라. 그대는 나의 것이기에, 우리 몸을 가를 수 없다. 우리는 하나, 한 살. 그대를 잃음은 나 자신을 잃는 것. 그대와 같이 죽으려는 것이 나의 확실한 결심이니.”

낙원을 잃은 아담과 이브 이후의 세계는 영원한 실낙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와 당신은 여전히 낙원을 꿈꾼다. 무너질 것을 알면서도 쌓고,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살며, 사랑으로 인해 자신의 삶이 멸망할 것을 알면서도 이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것은 어리석음이 아닌 어쩔 수 없음일 것이다. 나는 이런 문제에 대해 오랫동안 고민해왔다. 결론은 다음과 같다. 어쩔 수 없는 것은 정말 어쩔 수 없다.

생각해보라. ‘낙원’이라는 말보다 ‘실낙원’이라는 말이 더 그럴듯하게 느껴지지 않는가? 원래 희열과 고통은 쉽게 구분되지 않는 법이다. 그러니 당신, 낙원을 향한 꿈을 절대 포기하지 말라. 영원을 모르는 인생에게 순간보다 소중한 가치는 없으니.

정용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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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따먹고  쫓겨나는 아담과 하와

'실낙원'줄거

세계문학사에 길이 남을 종교 서사시 『실낙원』은 구약성서의 ‘낙원상실 모티프’를 토대로 한 대서사시로 1만565행에 달한다. 고전 언어와 고전 문학, 기독교 정전에 박학다식했던 밀턴은 서사시라는 일정한 형식에 격조 높은 문장과 아름다운 시적 언어로 17세기 정신세계와 인문적 교양을 작품 속에 훌륭히 담아냈다. 고전 서사시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도, 그것을 초월하여 인문주의적이고 기독교적인 가치와 미덕을 내세우는 새로운 서사시를 완성한 것이다. 이 작품으로 밀턴은 셰익스피어 다음가는 대시인이라는 지위를 얻었고, 『실낙원』은 종교적 통찰을 보여주는 최고 고전의 반열에 올랐다. 

실낙원』은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에서 쫓겨나는 이야기이다. 시간적으로는 아담 이전의 영원한 과거부터 아담 이후 그리스도의 재림까지, 공간적으로는 에덴을 사이에 둔 천국과 지옥까지, 시공간적으로 방대한 이야기가 장중한 문체로 화려하게 노래되고 있다. 사탄군과 천사군이 하늘에서 벌이는 전쟁 장면, 하나님의 천지창조 장면, 지구를 겹겹이 둘러싼 프톨레마이오스식 우주관에 입각한 천체의 화려한 운동 장면, 천국과 지옥 사이의 심연의 공간 ‘혼돈’의 모습, 에덴 낙원의 환상적인 묘사 등을 담은 『실낙원』은 성서에 대한 청교도적 명상의 결실이자 그리스 로마 신화를 비롯한 온갖 이교 신화에 준거한 탁월한 문학적 상상력의 소산으로 평가받고 있다.

원제: Paradise Lost

저자: John Milton(1608~1774)

발표: 1667년

분야: 영미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실낙원

옮긴이: 조신권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34(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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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리 브론테 '폭풍의 언덕'-


슬프고…그래서 더 장엄한…

어렸을 때 큰집에는 어린이 세계명작동화 전집이 있었다. 큰집보다 형편이 좋지 못했던 우리 집에서는 전집을 살 수가 없어서 나는 돈이 생길 때마다 한 권 한 권씩 사 모아야 했는데, 큰집에 갈 때마다 내 전의가 불타올랐다. 계림문고판 어린이 세계명작전집. 그 책들을 전부 다 갖고 싶어 애가 닳았다. 실제로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욕망도 전의도 충족되지는 못했으나, 책 한 권을 새로 갖게 될 때마다 그 책들을 순서대로 배열하는 즐거움이 짜릿했다. 가나다 순서로도 배열해보고, 전집 번호대로 배열해보기도 하고, 내가 정한 명작 순위로도 배열해보았다. 『폭풍의 언덕』은 언제나 내가 정한 명작 순위의 1위에 있었다.

어렸을 때 내가 읽었던 계림문고판 『폭풍의 언덕』은 어린이들이 읽기 쉽게 원작을 재구성해놓은 책이었다. 소설은 캐서린의 아버지가 히스클리프를 데리고 오던 날로부터 시작되어 히스클리프의 죽음으로 끝이 난다. 내 기억이 맞는다면, 그러니까 이 광대한 이야기의 전달자인 록우드나 엘렌 딘은 나오지도 않았거나 나와도 아주 슬쩍 나왔다는 것이다. 나중에 이 책의 완역본을 읽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도대체 내가 뭘 읽었던 거야?

당혹감과 노여움과 부끄러움이 마구잡이로 뒤섞인 감정이었다. 나는 그 계림문고판 『폭풍의 언덕』을 잊고 싶었다. 그러나 고백하건대, 나는 지금도 『폭풍의 언덕』의 한 장면을 떠올리라고 하면 계림문고의 삽화들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히스클리프가 창가에 서서 이미 죽은 캐서린에게 제발 들어와달라고 울부짖는 장면의 기억은 아직도 나를 고통스럽게 한다. 열두 살 무렵이었을 것이다. 『폭풍의 언덕』은 그 어린아이의 무엇을 건드렸던 것일까.

기억은 나이와 함께 자라고, 인생의 슬픔과 고독과 더불어 변형된다. 열두 살 무렵에 처음 읽었던 폭풍의 언덕을 나는 이십대에도 다시 읽었고, 삼십대에도 다시 읽었다. 그리고 엊그제에도 다시 읽었다. 번역이 나쁘기만 해봐, 당장 물어뜯어줄 테니. 그런 심정으로 책장을 펼쳤던 것은 『폭풍의 언덕』에 대한 내 첫 경험과 큰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문학동네 판 『폭풍의 언덕』을 읽었다. ‘티티새 지나는 농원’, 에드거의 집이고 나중에는 캐서린의 집이 되며, 또 나중에는 헤어턴과 어린 캐서린의 집이 되는 그 저택의 이름에서 눈길이 멎었다. 그렇구나. 『폭풍의 언덕』에는 ‘폭풍의 언덕’만 있던 것은 아니었구나.

‘폭풍의 언덕’과 ‘티티새 지나는 농원’을 오가는 광기의 기록들이 다시 펼쳐졌다. 내 생의 기억들도 마찬가지다. 이런 사랑을 하고야 말겠다는, 혹은 받고야 말겠다는 어린 나이의 순진한 갈망은 불에 델 것 같은 광기에 대한 환멸이나 두려움으로 변한 것이 사실이다. 뜨거운 것이 좋은 나이일 때도 있고, 그런 것이 다 속절없게 여겨지는 나이일 때도 있었다. 아마도 내 삶의 고비마다 이 책이 다르게 읽혔을 것이다. 엊그제 읽을 때는 자신의 목숨이 다했음을 느끼는 히스클리프가 엘렌 딘에게 “시시한 결말이야, 그치?”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잠시 시간이 멎는 듯했다.

하나의 사랑에 자신의 인생 전부를 바치고 그로 인해 복수 이외의 것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았던 한 남자가 결국 도달한 곳은 ‘시시한 결말’이다. 이 대사가 내게는 참회나 회환으로 읽히지 않는다. 다 태워버린 곳의 빈자리인 것이다. 다 태웠으니 이제 남은 게 없다는 것인데, 그래도 이야기는 계속된다. 남은 게 아무것도 없을 줄 알았더니 거기에 있는 것이 또 하나의 사랑인 것이다. 그래서 엘렌 딘은 이야기를 멈출 수 없고, 그 이야기를 듣는 록우드도 이야기 듣기를 멈출 수 없다. 사실 이 소설에서는 이야기의 위대함도 빼놓을 수가 없다. 이야기를 하는 엘렌 딘이 없고 그 이야기를 듣는 록우드가 없다면, 폭풍의 언덕은 어떻게 존재했을 것인가. 그 처연함과 그 황량함은 어떻게 우리에게 올 수 있었을 것인가. 시시하다고 말하는 히스클리프의 목소리는 어떻게 들을 수 있었을 것인가.

다시 시시하다는 말에 주목한다. 대를 이어 계속되는 사랑의 이야기. 생의 바닥을 다 뒤집어놓은 듯한, 그래서 어느 한 군데에도 온순한 구석이 없는 이 남자의 삶조차도 시시하다. 그래서 인생이다. 그곳이 폭풍의 언덕이든, 서울의 어느 한구석이든, 다 그렇다. 그래서 슬프고, 그래서 장엄하다.

사랑과 복수라는 극히 통속적인 서사를 갖고 있음에도 이 소설이 견딜 수 없게 매력적인 것은, 인물들의 개성에 있다. 이토록 독특하고 이토록 튀는 인물들이 서로의 빈구석에 자신의 빈구석을 끼워 맞추면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있는 것을 보면 놀랍기가 그지없다.

캐서린은 그냥 캐서린이 아니라 히스클리프의 캐서린이다. 히스클리프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광기로 똘똘 뭉쳐진 극히 독립적인 개인이면서도 서로에게 등 대지 않고서는 존재할 수 없는 인물들이다. 이 튀는 개성들이 살아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이고, 그것이 감동인 것은 내게 역시 빈구석이 있기 때문이다.

책을 덮으며 나는 다시 열두 살 때 계림문고판을 읽던 때로 돌아간다. 폭풍의 언덕에서 불행한 캐서린이 되고 싶어서 잠을 설쳤던 그 어린아이는 지금 무엇이 되어 있나. 고전이 괜히 고전이 아니다. 이 한 권의 책이 내 인생 전체를 돌아보게 하니. 읽을 때마다 매번 새롭게 한숨을 내쉬게 하니.

김인숙 소설가·손홍주 카피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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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정적 사랑을 그린 영문학 3대 비극

♣'폭풍의 언덕'줄거리

에밀리 브론테는 영국 요크셔 벽촌의 목사 딸로 태어나 평생을 시골집에서 살다가 서른 살에 미혼으로 세상을 떠났다. 거칠고 삭막한 황야에서 정신적인 고독의 한계를 경험한 에밀리 브론테가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발표한 장편소설이 『폭풍의 언덕』이다.

영국 신사 록우드가 ‘티티새 지나는 농원’을 빌려 세 들어 살기로 한 첫날, 어린 캐서린의 유령과 그것을 향해 울부짖는 히스클리프를 목격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록우드는 그 일로 저택 주인 히스클리프에 대해 호기심을 갖게 되고, 하녀장 엘렌 딘에게 이야기를 청한다. 엘렌 딘은 히스클리프와 캐서린, 그리고 린턴의 2대에 걸친 사랑과 증오, 복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폭풍의 언덕’이라는 저택을 배경으로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격정적인 사랑을 그린 이 작품은 서머싯 몸이 선정한 ‘세계 10대 소설’ 중 하나이며, 셰익스피어의『리어 왕』 멜빌의『모비 딕』과 더불어 영문학 3대 비극으로 꼽힌다. 전 시대를 통틀어 가장 아름다운 문학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고 영화와 연극, 드라마, 오페라 등으로 끊임없이 재생산되며 작가가 죽은 지 150년이 훨씬 지난 현재까지도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

원제: wuthering Heights

저자: Emily Bront (1818~1848)

발표: 1847년

분야: 영미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폭풍의 언덕

옮긴이: 김정아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86(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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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프리데 옐리네크 '피아노 치는 여자'-

 


어머니의 욕망에 갇힌…그래서 자아가 상실된

이십대의 어느 날, 이 책을 읽고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잃었다. 온몸에 힘이 다 빠지고, 입속에는 침묵이 가득 찼다.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고, 나 자신조차 무서워 들여다본 적 없는 스스로의 심연을 보아버린 느낌이었다. 어떤 작품은 그 자체로 하나의 시험이 된다. 감당할 힘 없이 진실을 마주했다가, 우리는 자멸해버릴 수도 있다. 나는 그런 식으로 미쳐버린 사람들도 알고 있다. 경고하건대 이 소설은 함부로 첫 장을 넘길 책이 아니다.

에리카. 그녀는 오스트리아 빈 음악원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는 여선생이다. 서른이 넘은 그녀는 친구도 애인도 없이, 노모와 함께 살고 있다. 노모는 일과표에 따라 딸의 일거수일투족을 규제하고, 통제한다. 어머니는 딸을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키우기 위해 세상으로부터 격리시켜왔다.

에리카는 이른 유년 시절부터 피아노의 악보체계에 묶여 있었다. “그 다섯 개의 선은 그녀가 생각이라는 걸 할 수 있을 때부터 그녀를 지배해왔다.” 에리카는 피아노 외의 어떤 충동에도 휘둘리지 않도록 훈육받았으며, 어머니의 우상으로 떠받들어져 살아왔다. 정신병을 앓던 아버지는 살아 있을 때도 시체와 다름없었고, 끝내 죽어버림으로써 모녀에게 가난과 공허를 남겼다. 어머니와 딸은 삶을 예술로써 보상받으려 했으나, 결국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단둘이 살아온 모녀 앞에 뒤늦게 젊은 남자가 나타난다.

젊은 미남자인 클레머는 자신만만하게 이 병적으로 왜곡되고, 이상에만 매달려 있고, 잘못 떠받들어진 정신에만 의지해 사는 괴상한 지성인 에리카를 변화시키려 한다. 그것은 오래된 연애의 방식이다. 그는 자신보다 높은 데 위치한 그녀를 소유함으로써 예술적 고양을 느끼고, 그녀는 자신을 통해 진짜 삶의 맛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그는 결코 그녀를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에리카는 육체 없이 떠도는 유령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에리카는 한 번도 어머니에게서 분리된 적이 없으며, 어떤 식으로든 자신의 몸을 느껴본 적이 없다. 그녀의 육체는 스스로에게 낯선 미지다. 에리카가 홀로 비밀스럽게 저지르는 자해나 관음증은 스스로의 몸을 가지지 못한 유령의 불안과 공포를 드러낸다. 오래전에 욕망을 거세당한 에리카는 타인의 욕망을 훔쳐보고, 그것을 억지로 가지려 하고, 여의치 않을 때는 망가뜨리는 쪽을 택한다. 예술적 성공을 꿈꾸며, 피아노 훈련을 하는 동안 모든 것을 차단하고 유보시킨 에리카의 삶은 이토록 기이하게 일그러져 있다.

에리카의 자의식은 성장에 실패한 어린아이의 것과 같다. 자신을 욕망하는 클레머의 시선 앞에서 에리카는 어찌할 바 모르고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그녀는 그저 “어머니의 몸 속으로 다시 기어 들어가 따뜻한 양수 속에서 부드럽게 흔들리고 싶다”. 따뜻하고 축축한 어머니의 감옥. 바로 그곳에 갇혀 자신이 이토록 망가져버린 것을 알면서도, 에리카는 언제나 그 감옥으로 돌아간다.

어머니가 주는 안식은 그만큼이나 매혹적이다. 그들은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거처하던 집이며, 모든 영양분의 공급자이자, 삶의 설계자이다. 딸은 어머니의 인생을 보고, 습득하며, 답습한다. 그 안에 치명적인 오류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머니의 삶을 벗어나지 못한다. 어떤 면에서 우리 안에는 영원히 자라지 않는 어린아이가 있다. 그 아이는 어머니 옆에 들러붙어 어머니의 관심과 사랑을 갈망하며, 어머니만을 바라본다. 이제 서른을 넘긴 에리카는 그녀의 삶을, 육체를, 침대를 점령한 어머니를 끌어안고, 물어뜯으며, 한탄하듯 사랑한다고 외친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악몽이다. 깨어날 때를 놓쳐버린, 악몽과 같은 삶.

에리카는 클레머에게 자신의 마음과 반대되는 내용의 편지를 쓴다. 그녀는 어째서 고통과 학대를 원한다고 하는가. 그녀는 오직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관계밖에 배운 것이 없으며, 스스로 느껴본 유일한 감각이라곤 고통뿐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피아노 치는 여자’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에리카에게 접근했던 클레머는 점차 그녀에 대한 흥미를 잃는다. 그 여자는 그의 생각대로 고상하지도 않고, 여성스럽지도 않으며, 애초부터 아름답지도 않았다. 에리카가 그에게 매달릴수록, 클레머는 잔인하게 그녀를 조롱한다. 그는 아무것도 건질 게 없는 그녀를 짓밟고 넘어간다.

눈부신 햇살 속, 수많은 사람들이 어울려 움직이는 거리 한가운데 선 에리카는 무엇 때문에 자신이 그 오랜 세월 동안 모든 것에 문을 걸어 잠그고 고립되어 살아왔는가 자문한다.

그녀의 어깨에서 피가 흐른다. 누구도 그녀의 어깨에 손을 얹거나, 그녀의 짐을 덜어가주지 않는다. 누가 그녀를 찔렀는가. 그녀를 구원할 자는 누구인가. 그녀는 어디로 갈 것인가.

정한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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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착하는 어머니…그리고 딸의 비뚤어진 욕망

♣'피아노 치는 여자'줄거리

엘프리데 옐리네크는 천재성과 작가적 실험정신으로 격찬을 받는 동시에 도전적인 문제 제기와 노골적인 성애 묘사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작가다. 1946년 독일에서 태어나 대학에서 연극학, 미술사, 음악을 공부하면서 발표한 작품들로 일찍부터 주목받기 시작했으며 빈, 뮌헨, 파리 등지에서 자유문필가로 활동하고 있다. 주제나 언어적인 측면에서 많은 논의거리를 내포하고 있는 그녀의 작품은 독일 대학의 문학강의에서 매우 빈번하게 다뤄지고 있다.

『피아노 치는 여자』는 2004년 옐리네크에게 노벨문학상의 영예를 안겨준 작품으로, 자전적 성격이 짙은 소설이다.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소설은 남편의 빈자리를 딸이 대신해줄 것을 기대하며 딸에게 지나치게 집착하고 간섭하는 어머니와 그에 억눌려 욕망을 비뚤어진 방식으로 표출하는 딸 에리카의 이야기를 그린다. 대학에서 피아노를 가르치는 에리카는 어머니의 지나친 집착과 간섭으로 인해,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들을 가혹하게 대하는 사디즘 성향과 함께 아버지가 쓰던 면도칼로 자기 몸을 자해하는 마조히즘 성향을 함께 지니게 된다. 어느 날 제자인 발터 클레머라는 청년이 에리카에게 다가오고, 그의 고백으로 인해 에리카의 일상에는 큰 변화가 일어나고 만다.

2002년에 미하일 하네케 감독이 이 소설을 <피아니스트>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하였으며,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 여우주연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원제: Die Klavierspielerin

저자: Elfriede Jelinek(1946~)

발표: 1983년

분야: 독일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피아노 치는 여자

옮긴이: 이병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14(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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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어떤 부분은 분명 다른 사람입니다

잘 모를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비차’이다. 작가 사샤 소콜로프의 친구이자 이웃인 지적장애아 ‘비차 플랴스킨’. 그 이름을 굳이 외울 필요는 없다. 딱히 중요하지도 않다.

1.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소. 바람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아닌 것들이 모든 게 되어버리는 세상 또는 모든 것들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버리는 세상. 이 문장에 대해선 누구도 명백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오랫동안 그걸 바랐다.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자유, 무엇이든 되지 않을 자유. 우선 자유라는 단어를 아주 정확하게 이해해야만 한다. 비차가 그 무엇보다 자유를 선택했다니까 하는 말이다.

2. 당신은 완전한 하나인가?

‘비차’가 내게 물었다. 당신은 완전한 하나인가? 이런 질문은 너무 불편한데. 나는 적잖이 바보노릇을 해보았지만 역시 통하지 않았다. 정색하며 ‘당연히 완전한 하나야’라고 대답해봤자 소용없다. 거짓말하지 마. 언제나 비차는 나를 들들 볶는다. 비차의 목소리를 빌려 헛기침까지 해가며 대답했다. 그래, 맞아. 완전한 하나가 아니지. 정말로 어색하고 부끄럽고 그럼에도 퍽 쉬운 대답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이니까.

“날짜는 누군가 생각나면 오는 거야. 때론 한번에 여러 날이 곧바로 오기도 하지. 혹은 오랫동안 하루도 오지 않는 때도 있어. 그때는 너는 공허 속에서 살아.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고 심하게 아프게 돼.”

문득 내가 지금 시간 밖에 있는지 시간 안에 있는지, 궁금했다. 그러다 날짜 없는 시간에 대해서 아주 진지한 자세로 골몰하기도 했다. 관자놀이를 쿡쿡 찔러가며 고민한 결과, 그게 바로 비차의 시간이라는 걸 깨달았다. ‘바보들을 위한 학교’에 다니는 미친 코흘리개, 특수학교의 형편없는 학생 비차가 이렇게 훌륭한 과학자였다니! 왜 아무도 몰랐을까? “내가 또 하고 싶은 말은, 각 사람에게는 누구와도 닮지 않은 자신만의 특별한 삶의 달력이 있다는 거야.”

어쩐지. 어쩐지. 나는 무릎을 탁 쳤다. 어떤 실마리가 단숨에 풀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나는 시간이 흘러 쌓이는 생의 두께랄까 층위에 대해 제대로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어쩐지. 어쩐지. 늘 속으며 사는 기분이더라니. 결론이 나왔다. 이 모든 불행은 우리가 가진 저만의 특별한 삶의 달력이 세상의 그것과 아주 일치하지 않은 탓이다. 우습고도 싱거운 일이다. 어느 날 나의 하루가 제 맘대로 내게 오지 않을까, 걱정이다. 나를 오래전에 죽은 사람으로 오해할까, 심히 불안하다. 비차, 넌 순식간에 나를 늙은이로 만들어버렸어.

3. 제 이름은 아무개예요. 당신은요?

비차는 자신을 그렇게 소개한다. 아무 해(年)의 아무 월(月)에 아무 일(日), 아무 곳의 아무개. 아무도 비차에게 다시 소개해달라는 부탁을 하거나 이름을 되묻지 않았다. 사람들에겐 누군가의 이름 따윈 별로 궁금하지 않은 게다. 오랫동안 개명할까, 고민했었는데 모두 쓸데없는 생각이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순전히 재미 삼아 아무개라는 단어 위에 줄을 박박 그었다. 그 위에 내 이름을 덧씌웠다. 순전히 재미 삼아 벌인 짓이었다. 나는 행복해졌다. 별것 아닌 일로 행복했다. 이제 나는 내 이름을 비차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었다. 이름을 지우는 것만으로 그 모든 일들이 가능했다. 그것의 시작은 아주 사소한 놀이에 불과했는데 말이다. 비차가 선택한 자유가 무엇인지 슬슬 감이 오기 시작했다.

4. 우리 모두는 이전에 바보였지만, 바람을 나르는 자가 될 거예요.

바람을 나르는 자가 되기 위해선 자전거를 끌고 집 밖으로 나간 다음, 천천히 자전거의 페달을 밟으면 된다. 물론 이런 일쯤이야 누가 시키지 않아도 때가 되면 저절로 그리 될 일이다. 더 많은 모험을 원한다면 중절모와 지팡이를 준비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순식간에 어른이 될 수 있으니까. 비차가 이미 우리를 대신해서 그 많은 일들을 해치워버렸지만 누가 처음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우리는 바람을 나르는 자가 될 거예요.” 비차가 ‘우리’라고 말해줘서 고마웠다. 부분적으로, 우리는 ‘비차’임이 틀림없다. 그러니까 우리 중 누군가가 비차가 되어 슬그머니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

5. 우리는 사라짐의 한 단계에 있어요.

“이 음악이 어제는 무엇이었을까?”

“우리들 중 그 누군가였지.”

그렇다면 이 음악의 내일도 우리들 중 그 누군가이겠지. 이 바람의 내일도.


황현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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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과 이상… 두 세계를 살아가는 소년

♣'바보들을 위한 학교'줄거리

러시아 현대 문학의 대표 작가이자 망명 3세대 중 가장 뛰어난 소설가로 주목받고 있는 사샤 소콜로프는 1943년 캐나다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소련 스파이 활동이 발각돼 추방당한 후 소련에서 자랐으나, 몽상적이고 자유로운 기질 탓에 군사학교 등에서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결국 여러 번 탈출을 시도했으며 마침내 1975년 망명에 성공했다. 이러한 여정은 그의 작품에도 잘 드러나 있으며, 대표작인 『바보들을 위한 학교』는 러시아 포스트모더니즘 문학의 효시가 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바보들을 위한 학교』의 주인공 비차 플랴스킨은 지적장애아들을 위한 특수학교에 다니는 소년으로, 자신을 두 명이라고 생각한다. 비차는 두 세계를 동시에 살아가는데 첫 번째 세계는 평범하고 일상적인 현실의 세상이고, 두 번째 세계는 소년이 상상하고 꿈꾸는 동화 같은 세상이다. 이 두 번째 세상에서 비차는 특수학교의 학생으로 살기도 하고 이 소설의 ‘작가’가 되기도 하며 때로는 강에 핀 하얀 수련 님페야 알바로 변신한다. 성인으로 자라 비차가 짝사랑하는 선생님 베타 아카토바와 결혼을 앞두고 행복해하기도 한다. 소설 내내 두 세계를 오가며 펼쳐지는 비차의 상상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무너뜨린다.

정신분열증을 앓는 소년의 내면을 마술 같은 언어로 그려낸 『바보들을 위한 학교』는 전 세계 문단의 극찬을 받았으며 소콜로프를 세계적인 작가로 자리잡게 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이 소설을 읽고 “매력적이고 감동적이며 비극적인 작품”이라고 호평을 아끼지 않았다.

원제: Школа дла дураков

저자: Саша Соколов(1943~)

발표: 1975년

분야: 러시아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바보들을 위한 학교

옮긴이: 권정임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58(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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