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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그타임은 말이 없지만…

1987년부터 유행한 래그타임은 훗날 재즈의 원류가 되기도 한다. 소설을 읽기 전에 음악 포털에서 래그타임을 검색해보았다. 내용이 없다. 지금이라는 시간과 인터넷이라는 공간에서 래그타임을 찾긴 쉽지 않았다. 검색창에 보이는 표면적 정보로는 그 음악의 구체적 성질은 물론이고, 단순한 감각조차 일깨우기 어려웠다. 동영상을 찾는다. 새하얀 소매에서 뻗어 나온 시커먼 두 손이 하얗고 검은 건반 위를 뛰어다닌다. 버퍼링이 일어나고, 음악이 멈춘다. 래그타임은 분명히 음악이라고 했지만, 나는 음악 없이 책장을 펼치기로 한다. 때는 니그로의 현란한 피아노 연주가 공기중에 흩뿌려지던, 1902년. 그곳은 미국, 뉴욕 주 뉴로셸, 브로드뷰 애비뉴.

1900년, 고집 센 청교도 노인처럼 미국은 자신의 속내를 금방 드러내지 않았다. 실제 인물이라고 믿기엔 너무나 터무니없는 인간들이 터무니없는 짓을 자연스럽게 해냈다. 그것을 우리는 ‘진보 시대’라고 부른다. 그 기간 동안 인류는 두 차례 세계대전을 겪었고, 특정 인종에 대한 대대적이고도 과학적인 학살이 벌어졌으며, 핵무기가 만들어졌다. 나는 책을 되도록 천천히 읽어야 했다. 그곳에 섞여 있는 인간의 냄새가 독서를 방해했기 때문이다. 진보하는 인간에게는 살 타는 냄새가 난다. 코를 벌렁거리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다. 연기가 내 쪽으로만 왔다. 환기되지 않는 독서의 시작.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아메리카 땅을 밟은 청교도 이민자들과, 그 후로 오랫동안 배에 개나 닭처럼 실려 아메리카 땅에 들어온 흑인들, 대기근을 피해서 대서양을 건넌 유럽 이민자들이 미국에서 몸을 섞고 부비고 있었다. 몸과 몸이 닿는 마찰에 살이 타는 냄새가 났다. 급기야 그들은 도시 한가운데서 총격전을 벌이거나, 탈옥을 감행하고, 폭탄 테러를 벌인다. 몸과 몸이 부딪히고 죽음과 탄생이 교차하는 순간, 뉴욕에는 지하철이 완공되었고 고층 빌딩은 제 높이를 하늘에 가깝게 했다. 진보의 시대에는 진보 시대의 방식이 있다. 그것은 누군가의 죽음과 죽음으로 인한 성공으로 완성된다.

1996년, 내 꿈은 미국인이 되는 것이었다. 미국에서 태어나기만 했다면 단어를 못 외운 죄로 영어선생에게 매를 맞거나 하진 않았을 것이다. 마이클 조던은 돌아왔고(I’m back) 마이클 잭슨은 세계 자체였다(We are the world).

시트콤 「LA아리랑」에 나오는 가족이 누구보다 부러웠다. 까까머리를 하고 팔목이 짧은 교복을 입고서 살 타는 냄새는커녕 모두 같은 표정과 피부색을 한 자그마한 반도를 저주했다. NBA 선수 카드를 그러모으고, R&B 흑인 창법을 흉내 냈다. 떠나고 싶을수록 시간과 공간은 교복 소매 끝에 바락바락 달라붙었다. 영어선생의 손은 매웠다. 그가 화를 낼 때는 내장이 타는 고소한 내가 났다.

1998년, 나는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박경리의 『토지』를 미친놈처럼 읽어댔다. 『래그타임』을 그 시기에 읽은 것만 같은 느낌은 엉뚱한 환각일 것이다. 콜하우스가 JP모건의 도서관 앞에서 장렬한 죽음을 택하는 모습에서 나는 길상이가 죽음으로 그려내는 관음탱화를 떠올렸다. 어리석은 연상이다. 이민자와 그들의 아이는 목조 셋방에 모여 살았고, 살인 직전의 노동 환경에 놓여 일을 했으며, 파업을 벌이기도 했다. 파업은 처참한 진압으로 끝이 났고 좋은 차를 끌고 다니는 흑인은 도둑으로 간주되었다. 고등학생이던 나는 무릎 사이에 책을 두고 몰래 책장을 넘기다가 걸리면 니그로가 되어 맞았다. 아일랜드 이민자가 된 듯 배고팠다. 100년이라는 시간이 책장과 매질 사이로 미친놈처럼 지나간다.

1917년 독일은 무제한 잠수함 작전으로 적들의 상선을 까부신다. 탈출의 명수 후디니가 만났던 동유럽의 왕세자가 젊은 사내의 총탄에 죽었다. 전쟁은 걷잡을 수 없이 덩치를 불렸다. 이민자는 우연한 기회에 부자가 되고, 독실한 공산주의자는 냉담한 신자처럼 신념을 버린다. 형편없이 처박힌 포드자동차의 직전 모습처럼 세계는 가속 페달을 밟았다. 발목의 주인은 미국이었을지도 모른다. 발목을 이루고 있는 세포는 삶과 죽음으로 분열하고 사랑과 증오로 번식을 거듭했다. 후에 미국의 역사는 세계의 역사가 되었다. 2001년 대학생이던 나는 반미를 외치는 선배를 따라 뙤약볕 아래를 잘도 뛰어다녔다. 훗날 내가 들었던 깃발이 역사가 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깃발은 선배가 좋아하던 여자 후배의 방석으로 쓰이고 며칠 뒤 사라졌다.

2012년 여름은 화가 난 사람의 입김이 되어 우리의 몸을 빙 둘렀다. 아버지는 마지막 탐험을 떠났다. U보트의 어뢰 공격을 받아 숨진 미국인처럼, 같은 시간 TV쇼와 래그타임과 뮤지컬을 보고 있던 사람처럼, 전철을 타고 지각을 하고 살이 찌는 당신처럼 아버지 또한 어디선가 역사가 되고 있을 것이다. 우리 살아온 시간은 생과 사라는 씨실과 날실로 엮인 털옷이며 믿을 수 없이 촘촘하고 놀랍도록 두텁다. 갑자기 거대한 손이 소매 바깥으로 뻗어 나온다. 피아노를 두드린다. 래그타임의 시대가 끝났다. 책장을 덮는다. 아이돌이 부르는 현란한 노래가 들린다. 지금은 무슨 시대인가. 세계와 음악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다. 그저 박자에 맞춰 영원히….

서효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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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를 제물로 성장했던  '걸레'같은 시대

♣‘래그타임’줄거리

E. L. 닥터로는 오늘날 미국 문단에서 비평가들의 찬사와 대중적인 인기를 동시에 누리고 있는 작가다. 사회와 정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전통적인 소설의 한계를 인식하여 다양한 스타일 실험을 추구해 노벨문학상 후보로 주목받고 있다. 『래그타임』은 ‘미국 역사의 냉철한 기록자’로 평가되는 닥터로의 대표작으로 1975년 출간 첫해 20만부 이상 판매되는 큰 성공을 거두고 이후 영화와 뮤지컬로 제작되어 지금까지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작품이다. 20세기의 여명부터 1차세계대전 직전까지를 다룬 새로운 형식의 역사소설로 해리 후디니, 옘마 골드만, 에벌린 네즈빗, 스탠퍼드 화이트, J. P. 모건과 헨리 포드, 프로이트와 융 등 실존인물을 허구적 인물과 사건에 엮어 20세기 초 미국 사회 전 분야에서 이루어진 변혁의 순간을 조명했다.

이 작품의 제목으로 쓰인 ‘래그타임’은 재즈의 전신이자 스콧 조플린이 완성한 피아노 음악을 뜻한다. 왼손으로는 규칙적인 리듬을, 오른손으로는 빠르고 힘찬 당김음을 연주하는 방식으로, 닥터로는 래그타임의 선율을 통해 누군가는 여전히 19세기적 가치관으로 관성적 삶을 살고 또 누군가는 20세기의 새로운 변혁의 흐름을 수용하거나 변혁을 이루는, 다양한 삶의 모습을 은유했다. 더불어 여성, 이민자, 흑인, 노동자 등의 약자를 성장의 동력으로 취했던 ‘걸레(rag)’ 같은 ‘시대(time)’의 어두운 이면을 고발하기도 한다. 이 작품은 ‘미국 소설 최고의 마지막 문장 100선’은 물론 타임 및 모던라이브러리가 선정한 ‘20세기 100대 영문학’에 꼽힌다.

원제:Ragtime

저자:E. L. Doctorow(1931~ )

발표:1975년

분야:영미문학 한글번역본

제목:래그타임

옮긴이:최용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95(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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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약한 당신

많은 괴물들이 있었다. 신이 타락했거나, 저주를 받아 잘못 태어났거나,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보니 괴물로 변한 자신을 발견하거나, 혹은 복수심에 불타 스스로 괴물이 되거나. 그러나 이 괴물은 여러모로 다르다. 그는 역사상 가장 서정적이고 섬약한 괴물이며, 탄생한 지 200년이 지나도록 이름 하나 얻지 못해, 무어라 불러야 할지 여전히 알 수 없는 비운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촉망받던 젊은 과학자 프랑켄슈타인은 스스로 조물주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그전까지 그의 인생은 정도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점잖은 귀족 집안의 자제인 프랑켄슈타인에게는 일찌감치 정해놓은 아름다운 약혼녀도 있었다. 그의 내면에 실금이 가기 시작한 것은, 어머니의 죽음 이후다. 죽고 사는 것이 신의 영역이었던 때, 만연한 죽음만큼 자연스러운 것도 없던 시절에, 젊은 천재는 생명체의 탄생에 비상한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의 작가, 메리 셸리가 이 이야기를 막 탄생시킬 무렵, 그녀의 나이는 열아홉에 불과했다. 조숙했던 그녀는 17세에 아버지의 제자와 사랑의 도피를 감행한다. 재능 있는 시인이었던 퍼시는 유부남이었다. 둘의 불장난 앞에 놓인 것은 8년간의 긴 유랑과 가난의 그림자였다. 도피 이듬해, 메리 셸리는 아이를 낳았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 그녀가 전 유럽 대륙을 지나며 긴 여행을 하는 동안,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뼈대에 살이 붙어갔을 것이다. 그사이 셋째 딸을 낳았으나 이듬해 잃었다. 메리 셸리는 십대 후반에 사로잡힌 불같은 감정 이후, 거의 모든 것을 차례로 잃었다. 그녀의 연보는 주인공 주변의 사람들이 하나씩 죽어나가는 공포영화와 크게 다르지 않다. 남은 것은 그녀의 소설뿐이다.

물론 프랑켄슈타인의 호기심과 열정은 순수한 것이었다. 어떠한 의도도, 욕심도 없었다. 그는 키가 240센티미터에 이르는 거구의 괴 생명체를 성공리에 만들어낸다. 생명체가 고르게 숨 쉬는 것을 확인한 순간, 박사는 자신이 만든 것이 흉측한 괴물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프랑켄슈타인의 독특한 성향은 여기서 발현된다. 박사는 ‘그것’을 책임지지 않는다. 혼신의 힘을 다해 만들어낸 결과물을 방기한 채로, 실험실을 박차고 나가버리는 것이다. 프랑켄슈타인은 비탄에 젖은 채로 두려움에 떨며, 괴물을 외면한다. 아버지와 약혼녀가 있는 고향의 품으로 돌아간다. 일말의 애정도, 미련도 없다. 그는 실상, 보수적인 귀족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깨어난 괴물이 처음 본 광경은 텅 빈 실험실의 천장이다. 괴물은 태생적으로 고독하다.

이 소설의 뼈대는 공포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으나, 첫 장을 펼치는 순간 눈앞에 보이는 것은 아름다운 북극의 풍광이다. 기괴한 이야기의 진행과는 별개로, 작가는 아름다운 자연 경관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그녀가 기행을 통해 보았던 유럽의 울창한 숲과 여과 없이 떨어지는 태양, 달빛을 받으며 바스러지는 호수, 단단히 여문 열매들, 혹은 전혀 본 적 없는 상상 속의 풍경들이 이야기의 결을 따라다닌다. 죄책감에 몸서리를 치는 프랑켄슈타인도, 두려움과 고독에 몸을 웅크린 괴물도, 고요한 호숫가 앞에서 사색의 시간을 갖는다. 죽음의 그림자가 열린 창문으로 날벌레처럼 속속 들이치는 상황에서도, 풍경은 무심한 아름다움을 잃지 않는다. 서정적이고 고상한 말법이다.

순진무구한 괴물이 복수의 화신으로 거듭나는 결정적인 계기가 사랑의 부재라면 어떠할까. 태어나면서부터 아버지에게 버림받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노력을 기울였으나, 그마저 거부당한 운명이라면. 죽을 때까지 누구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자신을 향해 경멸과 분노의 눈초리로 무기를 들이미는 조물주를 맞닥뜨린다면. 누구도 자신에게 이름을 주지 않아, 영원토록 무명(無名)의 괴물로 남아야 할 운명이라면, 그에게는 복수 이외에 무엇이 남아 있을까.

메리 셸리는 꼭 자신의 운명과 닮은 두 개체를 탄생시켰다. 훗날 사람들은 종종 프랑켄슈타인이라는 박사의 이름을 괴물의 것과 혼동한다. 괴물은 진실한 과학의 힘을 빌려, 머리에 못이 박힌 녹색 괴물로 형상화되었다. 그사이 프랑켄슈타인이란 이름은 박사의 것이었다가, 누군가는 괴물의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오해를 푸는 것은 애초에 무의미한 일인지도 모른다.

김유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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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버림받은  괴물의 분노

♣‘프랑켄슈타인’줄거리

19세기 천재 여성 작가 메리 셸리가 열아홉의 나이에 놀라운 상상력으로 탄생시킨 과학소설의 고전. 과학기술이 야기하는 사회·윤리적 문제를 다룬 최초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은 아이작 아시모프의 『아이, 로봇』, 카렐 차페크의 『R. U. R.』 등의 과학소설은 물론 <블레이드 러너> <터미네이터> 등의 영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나사못이 관자놀이에 박힌 괴물의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는 20세기 대중문화사에서 무한히 재생산되며 『프랑켄슈타인』을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공포소설 중 하나로 만들었다.

빅토르 프랑켄슈타인은 생명의 원리에 대한 호기심으로 실험을 시작해 사람의 시체로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킨다.

그러나 성공의 흥분이 가라앉기도 전에 자신이 만든 피조물의 괴기스러운 형상에 경악해 도피해버리고, 괴물은 무방비 상태로 세상에 나타난다. 흉물스러운 모습 때문에 인간들의 혐오와 폭력에 맞닥뜨리며 근근이 생명을 이어가던 괴물은 어느 허름한 집의 축사에 숨어 살며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관찰하고 언어를 익혀 사유 능력까지 습득한다. 지독한 외로움에서 벗어나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삶을 열망했던 괴물은 가족에게 다가가지만 돌아오는 것은 역시 엄청난 혐오감과 인간 사회에서의 추방뿐이었다. 괴물은 창조주 프랑켄슈타인에게 자신과 똑같은 이성(異性)의 존재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하지만, 프랑켄슈타인은 끝내 청을 들어주지 않는다. 극에 달한 괴물의 분노는 엄청난 비극을 불러일으킨다.

 

원제: Frankenstein

저자: Mary Shelley(1797~1851)

발표: 1818년

분야: 영국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프랑켄슈타인

옮긴이: 김선형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94(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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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쿠쇼가 쓰다

이시미네.

나는 오늘 굉장한 것을 썼다. 소설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것도 썩 괜찮은 소설이다. 처음 쓸 무렵에는 이런 굉장한 것이 될 줄은 몰랐다. 구상하게 된 계기도 하찮았다. 습기에 지쳐 창턱에 몸을 의지하고 마당을 내다보며 가려운 발가락 틈을 긁다가 말이다, 동과(冬瓜)가 열린 것을 보았다. 넓은 잎 틈으로 벌써 내 넓적다리만하게 열매가 자라 있었다.


이시미네.

우리가 군인의 신분으로 배고프고 목마른 채로 미군을 피해 구덩이에 누워 있을 때, 다른 것 말고 시원하게 얼린 동과 한 점을 씹고 싶다!라고 말했던 것을 나는 여태 기억하고 있었나 보다. 그렇다고는 해도 소금에 절인 반찬으로나 올라오는 동과를 보고, 나, 도쿠쇼가 소설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그것도 이렇게 굉장한 것을 말이다. 최근 요양 차 마을에 머물고 있는 소설가 선생에게 이것을 보여주고 평가를 받을 생각이다. 좋은 평가를 받고 선생에게 추천을 받으면 신문에 내 이름을 싣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되면 후련해질 것이다. 이시미네, 너나 나처럼 평범한 사람은 죽어서도 죽었다고 이름 석 자 실리지 못할 신문에, 살아서 이름이 실리는 꼴을 보게 된다면 말이다.

신문에 실릴 경우 원고료라는 것도 받게 되는 모양이다. 그 돈을 받아 여름 웃옷을 마련하고 싶다. 지금 입는 것은 소매가 너무 닳아 움직일 때마다 여기저기 걸린다. 전쟁 때 눈물 나는 이야기를 팔아 돈을 벌면 벌을 받는다고 마누라 우시는 핀잔을 주었지만 책도 읽지 않는 여편네가 알 일이냐. 조만간 원고를 가지고 선생을 찾아갈 생각이다.


이시미네.

어제 쓴 것을 다시 읽어 보았다. 이런 하찮은 것을 써두고 굉장한 것을 썼다고 말했다니 부끄러워 면목이 없다. 다른 부분은 그럭저럭 괜찮았다고 생각한다. 나도 미처 몰랐던 기지를 발휘해 모든 것을 생기 있고 재치 있게 다듬어 소설로 말해 두었다.

그런데 그 부분만은 지금 읽고 보니 밋밋하기가 짝이 없다. 밋밋하다기보다는, 아무래도 거짓말 같다. 기가 차고 모를 일이다. 거짓말을 동원한 다른 부분은 참말 같은데, 참말에 가까워지려고 노력한 부분만은 거짓 같다.

이시미네, 네가 죽은 대목 말이다.

그 부분을 쓸 적에 나는 정성을 다해 네가 정말 어떻게 죽었는지를 말해 보려고 노력했는데, 희한하게도 그 대목이, 가장 거짓 같은 대목이 되고 말았다. 부끄럽다. 이런 것을 신문에 싣겠다고 생각했다니 믿을 수 없다. 남에게 보일 것이 아니다. 오늘 밤에라도 찢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시미네.

어제의 일이다. 종이 풍선을 파는 네 누이가 마침 길을 지나는 나를 흘겨보았다.

안녕이고 뭐고 인사도 없이 말이다. 심하게 흘겨보았다. 착각이 아니다. 그녀가 그 이야기를 알아낸 것이다. 나를 책망하는 것이다. 내 소설을 찾아내 구석구석 읽어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온 즉시 나는 책상 서랍을 뒤졌으나 소설을 찾지 못했다. 온 집안을 다 뒤졌는데도 찾지 못했다. 마누라 우시를 불러 그것을 어떻게 했느냐고 따져 묻자, 우시는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당신이 직접 마당에서 태웠잖아요, 어제, 라고 대꾸했지만 뭔가 착각이 있었던 게 틀림없다. 내게는 그 소설을 태운 기억이 없으니 말이다. 태웠더라도, 다른 종이였을 것이다. 본래의 원고는 바람에 날려서, 결국 네 누이의 손에 들어갔는지도 모르겠다. 정말로 태웠다면, 그 재가 남김없이 그녀의 귀로 날려가 그 이야기를 기필코 다 속삭인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시미네.

그녀가 알게 되었으니 여태 죽지 못하고 너를 그리는 너의 노모도 알게 될 것이다. 우시도 알게 될 것이고 온 마을 사람들이 다 알게 될 것이다. 나는 폐인이 될 것이다. 지금보다도 더 폐인이 될 것이다. 마을 아이들이 내게 돌을 던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억울하다.


이시미네.

죽은 척하고 있던 네가 나빴다. 이시미네, 하고 부르는 내 목소리에 제대로 대답만 했더라도 나는 너를 죽은 셈 치고 그 물을 다 마시지는 않았을 것이다. 너를 단념하고 혼자서 그 자리를 빠져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시미네, 네가 나빴다. 아니다. 조국이 잘못이었다. 전쟁이 잘못이었다. 나 도쿠쇼에게 조국이란 해변에 엎어진 조개껍데기를 물들이는 석양이고, 마누라 우시의 종아리에 밴 짠맛이고, 내 집 마당에 열리는 동과의 즙이었는데, 조국에게도 조국 자신이 그런 것이었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내가 아니다. 나는 살아남아 억울하게 되었다.

살아남아 나만 억울하게 되었다.


이시미네.

억울하게 십 년을 살고 이십 년을 살아도, 살아 있는 게 좋다.

똥밭에 굴러도 이승, 이승이고 보니 똥밭도 꽃밭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대로 이 세계라는 똥밭을 구르며 만끽할 것이다.


이시미네.

네가 그것을 심하게 원망하고 질투하여 매일 밤 이 도쿠쇼의 머리맡을 방문하는 것 아니겠냐.


황정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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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지발가락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져…

♣'물방울'줄거리

『물방울』은 현대 오키나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메도루마 ?의 작품집이다. 메도루마는 오키나와의 비극적인 역사, 일본 본토와 미국인에 대한 오키나와인의 의식을 해박한 지식과 독특한 상상력으로 풀어내는 작가로, 일본 문단에서도 주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제117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인 「물방울」은 그만의 기상천외한 상상력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아내 우시와 단 둘이 살아가던 도쿠쇼에게 어느날 갑자기 이상한 일이 생긴다. 그의 오른 다리가 큰 과일처럼 부풀어 오르더니 엄지발가락 끝에서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그날 밤부터 도쿠쇼와 함께 오키나와 전투에 참전했던 동료 이시미네를 비롯한 전우들의 유령이 그를 찾아와 그 물을 찾기 시작한다. 메도루마는 전쟁 후의 상처와 살아남은 자의 죄의식을 유머러스한 인물 묘사와 위트 넘치는 문체로 무겁지 않게 풀어 나간다. 색채감 풍부한 문체로 오키나와의 자연 풍광을 느낄 수 있는 「바람 소리」와 기존 소설 형식을 파괴하고 가상의 책에 대한 서평들로만 이야기를 완성시키는 기발한 단편 「오키나와 북 리뷰」를 함께 실었다.

원제:水滴

저자:目取眞俊(1960~ )

발표:1997년

분야:일본문학 한글 번역본

제목:물방울

옮긴이:유은경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92 (20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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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가 되기 전에 그는 …

소설가가 되기 전에 ‘그’는 코끼리를 총으로 쏘아 죽인 적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소설가들이란 소설가가 되기 전에 ‘이상한 짓’을 꽤나 많이 해본 치들로 알려져 있다. (물론 되고 나서도 마찬가지, 나만 해도 실은……) 범위와 양상이 하도 다양해서 그 이상한 짓을 한마디로 규정하기란 불가능하다. (결코 이상하지 않은 짓도 훗날 결과적으로 이상한 짓이 되는 경우가 허다하니까.) 아무튼 소설가들은 괴이하고 수상쩍고 유별나고 생뚱맞은 경력을 비밀스럽게 간직하고 있기 마련이다. 두말할 것도 없이 그것은 소설가의 밑천이다. 때문에 이상한 짓은 짐짓 장려되기도 한다. 자신이 경험한 이상한 짓을 곰곰이 되새기고 질서를 부여하고 의미를 찾는 과정 자체가 바로 창작이라 할 수 있다. (반추나 성찰 없이 이상한 짓의 장려를 자기합리화의 수단으로 삼아 많은 사람들이 소설가가 아닌 그냥 ‘이상한 사람’이 되고 마는 안타까운 현실!)


‘그’로 돌아가자. 그는 코끼리를 총으로 쏴 죽였다. 분명 넘치도록 이상한 짓을 한 것이다. 어디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독특하고 기묘한 경력이다. (다른 소설가들의 각종 일탈과 스캔들이 살짝 평범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그는 바로 조지 오웰(1903~1950), 자신이 코끼리를 쏴 죽인 전후 사정을 글로 남겼다(‘코끼리를 쏘다’-1936). 20대 초반의 5년간, 그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버마(현 미얀마)에서 경찰 간부로 근무한다. 어느 날 그는 사육장을 탈출한 코끼리가 마을에서 난동을 피우고 있다는 신고를 받는다. 코끼리는 이미 집과 기물을 파손하고 사람을 해쳤다. 사정을 살피러 현장으로 간 그는 끝내 코끼리를 사살하고 만다. 그는 이 사건을 ‘제국주의적 쇼’로 규정한다. 수많은 버마인들이 이 ‘백인 경찰’ 주위로 몰려든다. 그는 결코 코끼리를 죽일 마음이 없었다. 코끼리를 죽이지 않고도 소동은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러나 코끼리를 제압하지 못하면 그와 ‘위대한 대영제국’은 웃음거리가 되고 지배자의 권위를 잃게 되는 상황. 그는 마지못해 방아쇠를 당긴다. 그의 바람과는 달리 코끼리는 총알을 다섯 발이나 맞고도 즉사하지 않는다.

버마에서의 5년간, 그는 숱한 이상한 짓을 경험한다. 그는 교수형 집행을 참관한 일도 글로 남겼다(‘교수형’-1931). 버마인 죄수는 교수대로 끌려가면서도 반사적으로 바닥의 물웅덩이를 피해 걷는다. 교수대에 올라 모두의 귀를 괴롭히며 큰 소리를 기도를 올리던 죄수가 순조롭게(?) 죽자, 사형을 지켜본 이들은 죄책감과 안도감을 감춘 채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위스키를 나눠 마신다. 그는 의식이 있는 한 인간의 목숨을 강제로 빼앗는다는 것에 대해, 그 모든 권력의 부당함과 잔인함과 어리석음에 대해 서늘하게 각성한다.

스물네 살의 그는 결국 제국의 경찰 노릇을 때려치운다. 그리고 바로 소설가가 되어 자신의 경험을 미친 듯이 글로 써낸다? 아니다. 그는 그런 자신을 용납하지 않는다. 유럽으로 돌아온 그는 자기 자신을 사회의 제일 밑바닥으로 끌어내린다. 그는 더 이상 명문 사립학교 졸업생도 식민지의 경찰 간부도 아니다. 그는 수년간 파리와 런던의 빈민굴, 싸구려 여인숙, 부랑자 구호소 등을 전전하며 지낸다. 추위와 굶주림, 불편과 불결, 멸시와 천대가 그를 식민지처럼 장악한다.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1933)은 그가 에릭 블레어란 본명을 버리고, 조지 오웰이란 필명으로 작가가 되어 세상에 내놓은 첫 번째 책이다. 그는 자신의 자발적 밑바닥 체험을, 이 일종의 ‘속죄 의식’을 비장하게 미화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스스로가 ‘가난 그 자체’가 되어 가난을 정직하게 경험하고 관찰하고 진단한다.

이미 코끼리를 총으로 쏴 죽인 그의 이상한 짓은 가난 속에서 계속된다. 그는 푼돈으로 몇날 며칠을 버티고, 가진 모든 것을 전당포에 잡히고, 끝도 없이 허탕을 치고 낭패를 겪고, 이루 말할 수 없이 더러운 숙소에서 새우잠을 자고, 노예 취급을 받으며 식당 주방에서 하루 17시간씩 허드렛일을 하고, 사람들이 말조차 섞지 않으려는 부랑자들과 어울려 길에서 주운 꽁초를 나눠 피운다.

소설가가 되기 전의 그는 이 모두를 자처했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되는 이상한 짓을 했다. 그의 글은 구제불능의 따라지 인생들을 묘사했음에도 비참하거나 처절하지 않다. 오히려 생생한 활기와 따스한 연대와 유머러스한 에너지가 넘친다. 세상의 어두운 진실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겠다는 ‘이상한 다짐’과 그것을 자신만의 언어로 창조해내겠다는 ‘이상한 열정’이 그 모두를 가능하게 했다. 에릭 블레어는 그렇게 조지 오웰이 되었다.
“언젠가는 이 세계를 좀 더 철저하게 들여다볼 생각이다. 나는 마리오나 패디나 좀도둑 빌 같은 친구를, 우연한 만남이 아니라 가까운 친구로서 사귀고 싶다. 접시닦이라든가 떠돌이, 강둑 노숙자들의 영혼이 진정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고 싶다. 현재로는 빈곤의 외곽 이상을 본 것 같지는 않다. (……) 이것이 시작이다.” (p.409)

이것이 시작이다. 조지 오웰은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20세기 가장 중요한 소설들로 꼽히는 『동물농장』과 『1984』는 식민지의 코끼리와 교수형으로부터, 근대 문명의 온갖 모순이 들끓고 있던 1920년대 후반 파리의 빈민가와 런던의 부랑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신조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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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의 지독한 고통을 온 몸으로 느끼며…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줄거리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은 정치적 저술가로서 20세기 문학사에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 작가 조지 오웰의 처녀작이다. 젊은 날 접시닦이와 노숙 경험을 바탕으로 한 반자전적인 작품으로, 실제 자신이 파리와 런던에서 체험한 5년간의 빈민 생활을 통해 도시 빈민의 문제를 특유의 유머와 함께 예리한 통찰력으로 살펴내고 있다.

주인공 ‘나’는 파리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생계를 유지했으나 일자리를 잃은 후 남은 돈마저 여관에서 도난당하고 무일푼 신세로 전락한다. 중산층이었던 그가 처음으로 겪은 가난은 예상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가난이란 지극히 단순한 것이리라 생각했지만 실은 굉장히 ‘복잡’했고, 무시무시하리라 생각했지만 ‘그저 궁상맞고 진절머리가 날 따름’이었다. 그는 호텔 식당에서 하루 15시간씩 접시닦이를 하며 배고픔을 겨우 면하지만 수면부족에 시달리며 하루하루를 아무 생각 없이 노예처럼 살아나간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한 어떠한 시도도 할 수 없다. 런던으로 돌아온 후의 생활도 그리 녹록지 않다. 값싼 간이숙소와 구빈원을 전전하는 동안 그는 부랑자를 양산할 수밖에 없는 사회제도의 모순을 온몸으로 느끼며, 가난한 이들에 대한 그동안의 편견을 버리고 그들의 영혼을 이해하는 여정을 새로이 시작한다.

이 작품은 훗날 조지 오웰의 대표작 『동물농장』과 『1984』에서 정치권력과 개인의 문제를 고찰할 수 있는 사회 비판적 통찰력과 감수성의 자양분이 되었다. 영국의 시인 겸 비평가 세실 데이루이스는 이 책을 가리켜 “오만한 20세기 문명의 폐부를 찌르는 작품”이라 평하기도 했다.

원제: Down and Out in Paris and London

저자: George Orwell(1903~1950)

발표: 1933년

분야: 영국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파리와 런던의 따라지 인생

옮긴이: 김기혁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37(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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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물론자들의 유쾌한 농담

여기 두 명의 콜럼버스가 있다. 신대륙 아메리카를 발견한 탐험가 크리스토포로 콜롬보(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한 사람이라면, 여자라는 미지의 땅에 발견의 깃발을 꽂은 해부학자 마테오 레알도 콜롬보가 다른 한 사람이다. 르네상스라는 ‘발견’의 시대에, 하나는 새 땅을 발견함으로써 지구의 크기를 두 배로 넓혔고 다른 하나는 여자를 발견함으로써 인간의 영역을 두 배로 넓혔다. 그로써 둘은 근대를 열어젖혔다.

『해부학자』는 실존인물인 16세기 해부학자 마테오 레알도 콜롬보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여자의 클리토리스(그는 여기에 ‘비너스의 사랑’이란 이름을 붙였다)를 발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콜롬보의 발견을 안팎에서 추동한 두 명의 여성이 있다. 하나는 제노바 제일의 창녀 모나 소피아. 그녀는 해부학자의 사랑을 거절한 미의 화신이었다. 콜롬보는 쓰디쓴 상처를 안고 그녀의 사랑을 얻기 위한 탐험을 시작한다. 또 하나는 피렌체 제일의 열녀로 알려진 미망인 이네스 데 토레몰리노스. 그녀의 병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그는 저 기관을 발견한다. 그곳을 문지르자 그녀의 병이 나았고 그녀는 사랑의 정념으로 불타올랐다.

이를 과장된 음란함이라 불러야 할까? 우스꽝스럽게도 바로 그 이유로 이 소설은 문학상 시상을 거부당했다. 터무니없는 얘기다. 이 발견을 전하는 소설의 어조는 우화적인 유쾌함으로 가득 차 있다. ‘비너스의 사랑’을 애무한다고 해서 여자를 정복할 수 있다는 해부학자의 결론은 유머지 과학이 아니다. 모든 여자를 악마의 자식, 유혹의 대리인이라 부른 중세의 세계관이야말로 터무니없는 것이다. 본래 유머는 권위, 맹신, 억압,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항하는 유일하고도 유력한 무기다. 여자를 사람으로 치지도 않던 시대에 이렇게 하면 여자를 접수할 수 있다고 건네는 농담은 최소한 여자를 남자인 당신과 동일한 자리에 올려놓는다.
 
그의 발견과 실험을 악마의 소행이라 단정한 소속대학의 학장에 의해 그는 종교재판에 회부된다. 재판의 증언과 콜롬보가 제출한 변론 진술서는 이 소설의 백미다. 그의 변론에 따라 그가 소환했던 악마, 괴물, 환상이 근대적인 과학 실험의 산물임이 밝혀진다. 물론 그의 과학이 근대의 과학은 아니다. 그의 결론은 이렇다. 여자에게는 영혼이 존재하지 않는다. 남자에게 영혼이 있다면 여자에게는 ‘비너스의 사랑’이 있다. 남자가 영혼 곧 자유의지로 성욕을 조절한다면 여자는 저 기관에 종속된 살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조금 징그러운 농담이지만 우리는 이 농담의 진의를 이해할 수 있다. 중세는 육체가 죄악의 덩어리일 뿐이어서 영혼이 그것을 철저히 억누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 그런데 여기 육체의 열망만으로 움직이는 인간, 여자 사람이 있다! 영혼은 여자에게서 쫓겨나 유혹과 욕망에 겁먹은 불쌍한 남자에 빌붙어 사는 조그만 세입자가 되었다! 이 농담을 뒤집으면 우리는 육체의 복권을 주장하는 근대의 유물론적 믿음을 만날 수 있다. 해부학자는 이 과정을 설명하기 위해 현대과학의 시각으로 보면 엉터리인 복잡한 동역학 유체이론을 설명한다. 동역학 유체란 영혼=욕망=육체의 흥분을 말한다. 남자에게도 영혼의 고결함 따위는 처음부터 없었던 것.
 
장작불 위의 운명을 간신히 피한 해부학자는 마지막으로 첫사랑을 찾아 나선다. 소설의 끝에 이르러 두 여성의 운명은 극적으로 반전된다. 미의 화신이었던 창녀 소피아는 지독한 매독에 걸려 흉측한 괴물로 변해 있었다. 그녀는 끝내 그의 사랑을 거절하면서 숨을 거둔다. ‘비너스의 사랑’을 알지 못했던 아름다운 육체의 막장 반전극이다. 자신의 사랑이 그 조그만 기관의 소행임을 깨달은 이네스는 자기 손으로 자신과 세 딸의 기관을 잘라내 버렸다. 육체의 황홀에서 자유로워진 그녀는 성녀의 삶을 살았을까? 천만에. 그녀는 지중해를 주름잡은 창녀 조직의 우두머리가 되었으며 끝내 세 딸과 함께 화형대 위에서 숨을 거두었다. 성녀에서 창녀로. 또 다른 막장 반전극이다.

그러나 그녀의 죽음은 불행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조직한 조직 내에서 창녀들은 “각자 존재에 대한 진정한 자유의지를 손에 넣을 수 있었고, 마침내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주인이 되었다.” 이것이 소설의 진정한 결론이다. 육체에서 벗어나는 게 자유로운 게 아니라 자신의 모든 욕망이 육체에 기초를 두고 있음을 인정해야 진정한 자유의 길이 열린다.

마녀의 특징을 열거한 목록을 읽으면 중세의 마녀가 근대의 자유여성임을 알게 된다. 이네스는 ‘비너스의 사랑’을 잘라버림으로써 남자의 손길에 종속되지 않고 진정한 사랑과 해방의 가능성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것은 해부학자의 불행한 죽음과도 대비된다. 해부학자는 끝내 기르던 까마귀에게 자신을 마지막 식사거리로 내놓는다.

그는 세상 모든 ‘비너스의 사랑’을 발견하고 소유했으나 단 하나의 사랑을 갖지 못했다. 아메리카를 발견한 콜롬보도 자신이 인도를 찾았다고 믿으며 죽었다. 해부학자 역시 여자라는 신대륙을 찾았으나 진정한 여자라는 발견에는 이르지 못했다. 어쩌면 이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진정한 여자는 여자 자신에 의해서만 발견될 수 있었을 테니.

권혁웅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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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권력 조롱하고 인간의 무지 비판

♣'해부학자'줄거리
『해부학자』는 기발한 상상력과 실험정신으로 무장한 아르헨티나 작가 페데리코 안다아시의 대표작으로, 실존 인물인 16세기 최고의 해부학자 마테오 콜롬보의 독특하면서도 위험한 ‘발견’을 그린 소설이다.

마테오 콜롬보는 혈액의 폐순환의 원리를 최초로 밝혀낸 해부학자이자 여성의 사랑과 쾌락을 지배하는 신체기관인 클리토리스를 발견한 인물이다.

페데리코 안다아시는 마테오 콜롬보가 이탈리아의 탐험가 크리스토포로 콜롬보(콜럼버스)와 성(姓)이 같고, 두 사람 모두 인류 역사에 남을 만한 ‘발견’을 했다는 점에 착안하여, 향신료와 황금을 찾아 항해를 떠난 콜럼버스가 ‘아메리카’를 발견하는 과정과 흡사하게 마테오 콜롬보의 클리토리스 발견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또한 해부학, 종교, 인문학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통해 역사를 재해석, 재생산해내고, 해부학자의 발견을 ‘이단’으로 규정한 종교 권력을 조롱함으로써 중세의 음울하고 폐쇄적인 도덕관념과 종교적 금기, 인간의 무지를 비판한다. 이 작품은 1997년 스페인에서 출간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전 세계 30여 개 언어로 번역되며 큰 인기를 끌었다.


원제: El anatomista

저자: Federico Andahazi(1963~ )

발표: 1997년

분야: 아르헨티나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해부학자

옮긴이: 조구호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67(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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