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놈의 학교가 다 있네?
좋은 소설이란 무엇일까?
나는 이 질문의 답은 알 수 없지만 나만의 행동 양식 하나는 갖고 있다. 말하자면 이런 것이다. 한 번만 읽어도 그만인 소설은 습기 찬 방구석에 멀찍이 놔두고, 한 번 더 읽어야만 할 것 같은 소설은 내 손이 가장 잘 닿는 곳인, 노트북 뒤에 탑처럼 쌓아두는 것이다. ‘한 번 더 읽어야만 하는’ 소설책은 공통점들을 갖고 있다. 밑줄이 쫙쫙 그어져 있거나, 그걸로도 모자라면 큼지막한 별이 밑줄 옆에 꼬리처럼 달려 있거나, 그것으로도 부족하다 싶으면 제법 중요한 페이지의 귀퉁이가 야무지게 접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개 그런 책들은 피둥피둥 살이 쪄 있고, 연필심이 번져 엉망진창이다. ‘엉망진창’은 내가 그 책을 흠모하는 방식이자 좋아한다는 우회적 표현이다. 나는 글을 쓰다 문장이 막히거나 막연히 뭔가가 읽고 싶어질 때면 몰래 그중 한 권을 빼들고서 아무 페이지나 펼쳐 염탐하듯 문장과 이야기를 읽고 또 만져본다. 그러면 어김없이 이런 생각이 찾아든다. 이야기와 문장은 어떻게 탄생하는가. 그것은 내가 몇 권의 책을 냈음에도 아직 풀지 못한 문제이고, 앞으로 몇 권의 책을 더 낸다 해도 풀지 못할 것만 같은 탄생의 비밀이다. 내겐 불길한 예감이다. 이 책은 내 노트북 뒤에 놓여 있는 몇 권 되지 않은 책 중의 하나다.『벤야멘타 하인학교』, 다소 비현실적인 느낌이 나는 제목의 소설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우리는 여기서 배우는 것이 거의 없다. 가르치는 교사들도 없다. 우리들, 벤야멘타 학원의 생도들에게 배움 따위는 어차피 아무 쓸모도 없을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 모두는 훗날 아주 미미한 존재, 누군가에게 예속된 존재로 살아갈 거라는 뜻이다. 우리가 받는 수업은 우리에게 인내와 복종을 각인시키는 데 가장 큰 의의를 둔다.
흥미롭고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나는 첫 문장부터 밑줄을 긋는 수고를 해야 했고, 그 문장은 제목에 대한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는 한편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에 대한 믿음과 흥분을 주었다. 물론 그 믿음과 흥분은 마지막 페이지를 읽을 때까지 한 번도 꺾이지 않았음을 말해둔다. 괜히 고전이 아닌 것이다. 다른 고전들에 비해 얇은 책임에도 두 권 분량의 책을 읽을 때만큼의 시간이 필요한 책. 이런 책을 나는 사랑하기도 하고, 시기하기도 하며, 두려워하기도 한다. 물론 그런 소설을 쓰는 건 나의 사사로운 로망이기도 하다.
나는 가끔 고질병인 귀차니즘이 찾아들 때면 몸종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조선시대에 살아 양반의 신분으로 태어났다면 내게도 몸종이 있겠지. 그 몸종은 내게 세끼 밥을 대령하고 머리를 감겨주고 무거운 짐을 들어주겠지. 그리고 무조건 내 명령에 복종하겠지. 하지만 그 상상에서 역할이 뒤바뀌어 내가 몸종으로 태어난다면 편안한 상상은 순식간에 악몽이 되고 만다. 누구도 하인의 삶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 이상해 보이는 하인학교가 있고, 하인이 되고 싶어 제 발로 그 학교로 찾아들어간 그보다 더 이상해 보이는 야콥이란 귀족 태생의 소년이 있다. 바닥까지 알고자 하는 별난 에너지, 평범한 사람이 되는 것, 작게 존재하고 작게 머무는 것. 이런 야콥의 이야기를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인간이란 본능적으로 성난 황소처럼 욕망이란 빨간색 천을 향해 돌진하고,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욕망이란 진흙으로 빚어진 애처로운 동물이 아닌가. 그러나 책을 읽어가면서 알게 되었다. 하찮고 미미한 존재가 되고자 하는 야콥의 이야기는 결코 하찮지 않은 문장과 상상력으로 버무려져 있었다는 것과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하찮고 미미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는 하인과 노예의 습성인 인내, 복종, 규율이 아닌, 그리고 주인의 습성인 권력과 지배도 아닌 ‘자유’를 말하고 싶었으리라. 그 또한 인간의 거대한 욕망일 테니까.
자, 이제부터 나는 이 소설을 읽을 때 당신이 무심코 하게 될 행동과 생각 매뉴얼을 제시해보려고 한다.
1. 당신은 첫 문장을 읽자마자 자세를 고쳐 앉거나, 어디선가 슬그머니 연필을 집어들게 될 것이다.
2. 간혹 키득, 하고 웃기도 할 것이다.
3. 그러면서 하인을 양성하는 학교가 역사적으로 정말 있었을까 의심하게 될 것이다.
4. 조금 지나면 읽기를 멈추고 앞날개를 펼쳐 작가의 탄생연도를 확인하려 할 것이다.
5. 소설의 마지막 장을 읽고 나서는 ‘사막’을 걷는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며 미소 지을 것이다.
6. 그러고 책을 완전히 덮은 당신은 뒤표지에 적힌 ‘프란츠 카프카가 사랑한 작가’라는 큼지막한 문구에 고개를 두 번 정도 끄덕이게 될 것이다.
7. 끝으로 당신은 그의 다른 작품이 궁금해 인터넷 서점 검색창에 ‘로베르트 발저’라고 입력하게 될 것이다.
8. 만약 번역된 작품이 있다면 다행이라 여길 것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아쉬워하다 하루 속히 번역되어 나오길 간절히 바라게 될 것이다.
이로써 당신은 나의 최면에 걸려들었다. 그러니 이제 책을 펼쳐라. 그리고 천천히 읽기 시작하라. 레드 썬!
장은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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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학교 찾아가는 귀족 태생의 소년
♣'벤야멘타 하인학교…'줄거리
독일 문학사의 불가해한 신화로 평가받는 로베르트 발저의 대표작이다. 헤르만 헤세는 “로베르트 발저의 책을 수십만, 수백만의 사람이 읽었다면 세상은 보다 나은 곳이 되었을 것이다”고 평했고, 프란츠 카프카, 발터 벤야민 등의 작가들이 로베르트 발저를 격찬했으나, 1956년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칠 때까지 작가로서 명성을 누리지 못하고 일생을 철저히 아웃사이더로 살았다.
스위스의 가난한 집안 출신이었던 발저는 고등학교에도 진학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떠돌며 하인, 도서관 사서, 비서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글을 썼다. 종이를 살 수 없을 만큼 가난해 글을 쓸 수 있는 흰 종이만 발견하면 그 위에 아주 작은 글씨로 글을 썼다. 종이를 아끼기 위해 글씨를 최대한 작게 썼기 때문에 그의 글은 오랫동안 해독할 수 없는 비밀암호처럼 여겨졌다. 그러다가 1980년대에 이르러 미세하고 아름다웠던 그의 필체가 비로소 해독되고, 이에 그의 작품에 대해 새롭게 해석이 이루어지면서 스위스에서 국민작가 반열에 오르게 된다.
발저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작품인『벤야멘타 하인학교―야콥 폰 군텐 이야기』는 귀족 태생의 소년이 ‘가장 작은 존재, 가장 미미한 존재’가 되기 위해 하인 양성학교에 스스로 찾아간다는 ‘반(反) 영웅적’ 이야기이다. 인간의 의식과 생활을 지배하는 ‘돈’과 ‘권력’의 구속력, 개인을 집단사고의 노예로 훈련시키는 매스미디어의 횡포, 규격에 맞는 삶 이외의 대안에 인색한 획일주의적 발전 논리들에 대한 비판으로서, 성장과 발전으로 대변되는 서양 근대 담론에 근본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문제작이다.
원제: Jakob von Gunten
저자: Robert Walser(1878~1956)
발표: 1909년
분야: 스위스 문학 한글번역본
제목: 벤야멘타 하인학교-야콥 폰 군텐 이야기
옮긴이: 홍길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016(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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