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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1년 5월 9일)
제목: ''온전한 가정 회복''
말씀: 창세기 27:5~45
찬양인도: 이원준 부목사님
사회: 윤하중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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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27:5~45)
5 이삭이 그의 아들 에서에게 말할 때에 리브가가 들었더니 에서가 사냥하여 오려고 들로 나가매.
6 리브가가 그의 아들 야곱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 아버지가 네 형 에서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내가 들으니 이르시기를.
7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 가져다가 별미를 만들어 내가 먹게 하여 죽기 전에 여호와 앞에서 네게 축복하게 하라 하셨으니.
8 그런즉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내가 네게 명하는 대로.
9 염소 떼에 가서 거기서 좋은 염소 새끼 두 마리를 내게로 가져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아버지를 위하여 그가 즐기시는 별미를 만들리니.
10 네가 그것을 네 아버지께 가져다 드려서 그가 죽기 전에 네게 축복하기 위하여 잡수시게 하라.

41 그의 아버지가 야곱에게 축복한 그 축복으로 말미암아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여 심중에 이르기를 아버지를 곡할 때가 가까웠은즉 내가 내 아우 야곱을 죽이리라 하였더니.
42 맏아들 에서의 이 말이 리브가에게 들리매 이에 사람을 보내어 작은 아들 야곱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네 형 에서가 너를 죽여 그 한을 풀려 하니.
43 내 아들아 내 말을 따라 일어나 하란으로 가서 내 오라버니 라반에게로 피신하여.
44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그와 함께 거주하라.
45 네 형의 분노가 풀려 네가 자기에게 행한 것을 잊어버리거든 내가 곧 사람을 보내어 너를 거기서 불러오리라 어찌 하루에 너희 둘을 잃으랴.



▷오늘은 온전한 가정회복에 대해서 말씀하겠다. 우리 성도들이 가정 가정마다 온전한 회복이 있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가정 주일이니 다 심방하고 싶은데, 상황이 안 되니 말씀으로 심방한다고 생각하고 조곤조곤하게 심방처럼 예배를 하고 싶다. 오늘 말씀 가운데 흔들림 없는 깃발~ 죽어도 불러야 할 노래, 어떤 경우에도 집중할 수 있는 사명을 가질 수 있기를 원한다.

◈온전한 가정을 이루기 위해...

I. 하나님은 온전한 가정을 설계.
왜냐면 하나님은 우주를 창조하시고, 지구를 창조하시고, 지구 안에 에덴을 창조하시고, 그 안에 동산을 창조하시고, 동산 가운데 가정을 주셨다. 어떻게 보면 매크로하게(우주의 대창조) 작게 보면 마이크로하게 님이 가정까지 창조하셨다. 그리고 가정을 창조하실 때에, 온전하고 완전하게 창조하여 주셨다. 오전한 가정을 위하여 하나님은

첫째 온전한 사명을 주셨다. -생육하고 번성하라고 하셨다.
*창 1:28절,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리라.

두 번째는 온전한 장소를 주셨다. -에덴동산이며, 가장 아름다운 정원을 주셨다.
*창세기 2:8,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 두시니라.

세 번째는 온전한 동반자를 주셨다.
*창세기 2:28절,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네 번째는 즐거움과 행복과 좋은 먹거리, 즐거움과 행복과 좋은 음식을 주셨다.
*창세기 2:9a,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
*창세기 2:9b, 동산 가운데 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있더라.



무엇보다도 온전한 가정이 되기 위하여 그 가정의 경계선을 주셨다. 질서를 주셨다. 이 경계선을 지키면 온전한 가정이되고, 안 지키면 가정이 아니다. 은혜의 경계선을 넘어서는 안 된다. 이걸 넘으면 안 되는 것 가정이 아니기에 가시 덤블 경계를 넘으면 엉겅퀴의 가정이 된다. 우리 성도들이 은혜의 경계선ㆍ테두리에서 살기를 빈다.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의 바운더리(boundery)이며, 우리 교회 성도님들은 오늘 은혜의 바운더리를 벗어나는 자가 없기를 기도한다. 이런 온전한 가정을 위해서 시편을 통해 성전에 올라 올 때마다 온전한 가정상을 보여주신다. 가정의 가장은 시편 128편을 암송하라.


*시편 128:2,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
이 땅의 수많은 일들은 내가 수고한대로 되지 않는 것이 너무 많다. 수고한대로 하나님께서 복되게 하신다.

*시편 128:3,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아내와 자녀의 복을 주신다는 것이다.


*시편 128:5,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시편 128:6,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믿음의 세대계승과 진정한 샬롬의 평강의 수준이다. 온전한 가정의 상이며 example이다. 시편 128편을 암송하면 자녀들과 가정을 불 성곽으로 보호하실 것이다. 영적으로 신기한 것이다. 하나님은 온전한 가정을 상을 보여 주셨는데, 온전한 가정을 마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정을 맹렬하게 공격하고 있다. 가정마다 자녀들마다 상처받는 가정이 너무 많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통계적으로 55퍼센트가 알콜중독,, 미국은 마약 36퍼센트, 스트레스 53, 30퍼센트가 우울증이 늘어나고, 정신건강에 이상이 생겼다고 한다. 가정마다 힘들다 아프리카 추장들은 아내들이 많다. 수많은 가정마다 문제들이 생기고 있다. 이슬람의 경우는 네 아내를 둘 수 있는데, 마귀는 가만두지 않는다. 젊을 때는 그렇지만 한 명도 모시기 힘들다. 갈등과 질투는 가정에 말로 다할 수 없다.
창세기를 왜 기록되었는가? - 모세가 성령의 감동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가나안은 사람이 모세가 창출레위신 –토라 5경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면 어떻게 교육을 하고, 영적인 매뉴얼이 필요했다. 왜 하나님께서 가나안 땅에서 살게 되면 이것을 주시냐면, 가나안은 텅 빈 공간이 아니었다. 가나안은 그 땅은 세상으로 타락하고 오염된 세상이었다. 그래서 오염된 것을 타파할 수 있는 온전한 영적 매뉴얼(manual-지침)인 모세 5경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시기 위함이었다. 하나님께서 오늘 이 시대에 꼭 필요한 매뉴얼을 주심을 믿는다. 반면교사를 삼아야 한다. 오늘 본문에, 창세기 46절까지 읽어보아야 한다.


II. 공략당한 가정.
그런데 역기능 가정이 되는 것은
아빠-에서를
엄마-야곱을
-
첫째 아들을 편애하니, 에서에게 별미를 부탁한다. 심각한 오류를 낳는다.



*창세기 27:4, 내가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와서 먹게 하여 내가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 이것 자체가 심각한 오류이다. 왜냐하면 창세기 25장에 보면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야곱이 장자 권을 갖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역기능 가정이 되고 마귀가 공략을 한다. 공략당한 가정이 되었다. 이삭은 순종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순간만은 이삭이 이제 눈이 흐려져서 영적의 판단도 흐려졌다. 동생을 섬기도록 하는 하나님의 원리였다. 이삭이 에서를 축복하는 것이 하나님을 불순종하는 것이다. 순종의 대명사인 이삭이 나이가 들어서 이삭의 물리적으로 눈이 침침했다. 동시에 영적인 분별력이 흐려졌다. 나이 들면 애가 된다는 것이다. 어른들은 큰 지혜를 얻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을 불순종했다. 비밀은 없다. 아내 리브가가 엿듣고, 불순종할수록 비밀이 많아진다. 그 이야기를 듣고 사이가 나누어졌다. 야곱에게 축복 받으라고 리브가가 별미를 만들고 야곱에게 축복받게 한다. 저주받는다고 야곱이 말하자 걱정 말라고 한다. 저주도 본인이 받겠다고 하는 것이다. 계락이 강하다. 이게 역기능이 되고 있다 아내 리브가가 남편을 이삭을 속인다. 이것은 이스라엘 아줌마랑 한국 엄마도 무섭다. 야곱은 마마보이 같지만 장자 권을 사모했기에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창세기 27:19, 야곱이 아버지에게 대답하되 나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서로소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명하신 대로 내가 하였사오니 원하건대 일어나 앉아서 내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아버지 마음껏 내게 축복하소서


*창 27:24, 이삭이 이르되 네가 참 내 아들 에서냐 그가 대답하되 그러하니이다.


*창 2727, 그가 가까이 가서 그에게 입맞추니 아버지가 그의 옷의 향취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내 아들의 향취는 여호와께서 복 주신 밭의 향취로다.


*창 27:28, 하나님은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이며 풍성한 곡식과 포도주를 네게 주시기를 원하노라.
-속임을 낳고 거짓은 거짓을 낳았다. 아버지 이삭은 의심스러웠지만 야곱을 축복하였다.


창 27:29,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리니 네가 형제들의 주가 되고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굴복하며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기를 원하노라.
아브라함에 약속하신 언약의 축복을 야곱에게 하고 있다. 이 속임수 가운데서도 결국은 하나님은 일하신다. 형에서가 별미를 가지고 와서,,,


*27:33 이삭이 심히 크게 떨며 이르되 그러면 사냥한 고기를 내게 가져온 자가 누구냐 네가 오기 전에 내가 다 먹고 그를 위하여 축복하였은즉 그가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니라.


창 27:34 에서가 그의 아버지의 말을 듣고 소리 내어 울며 아버지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하소서.
-맏아들 에서가 별미를 가지고 와서 이제 축복을 원한다. 이삭이 심히 떤다.
가인, 루우벤, 엘리얍, 암논, 등이 다 장자이다. 아들 에서라고 하면서. 야곱이 자신을 속인 것을 알게 된다. 둘째에게 축복이 다갔다고 에서가 소리 내어 울며, 방성대곡했다. 내게 축복하소서! 하고 있다.
장남들이 성경들에서 장난과 사고를 친다.
-이삭은 하나님의 계획을 불순종했다. 야곱은 하나님보다 더 앞장 서버렸고, 에서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살인을 저질렀다. 이 말씀을 듣고 무슨 생각이 드는가? 가정 주일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비포, 에프터를 알아야 한다. 초반에는 가정이 온전했지만 후반에는 가정이 찢어졌다. 사탄의 공격으로 파괴되었다. 순종의 영광이 파괴된 것이다. 야곱은 장자 권을 얻었지만 그 대가가 컸다. 경제적으로도 한 푼도 못 받았다. 이삭은 큰 부자였다. 가족을 잃어버렸다.


-우리가정을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이번에 빌게이츠 사건이 뉴스에 인구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안타깝다. 그의 사고를 좋아했는데 이혼했다. 성장하지 못해서 이혼한다고 말한다. 수십조를 가지면 뭐하는가? 그 멋진 정원은 침실은 열 평도 안 된다. 오늘도 우면 산을 보니, 베르사유 궁전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부는 함께 성장 하는 게 아니다. 부부는 함께 깨어져야 한다. 그것이 가정의 목표이다. 부부는 자기부인이 되어야 하는 게 목표이다. 자기 부인이 자기 성숙보다 중요하다. 자기를 부인하지 아니하면 갈수록 가정은 어려워지게 된다. 하나님을 섬기는데 깨어져야 한다. 서로 복음의 신비를 깨달아야 한다. 부부는 함께 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원하는 것을 얻고 가족을 잃어버리고 있다.
남편 아내가 있고 그 위에 하나님이 계셔야 한다. 영적인 가정상이 되고, 야곱은 올바른 가정상을 받지 못했기에 피 튀기는 전쟁이 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슨 교훈을 받는가?
리브가가 무엇을 잘못했는가? 야곱은 무엇을 잘못했는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못했다


III. 온전한 가정을 위하여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in his time)

*시편 37:7a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고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지 않기에 수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다윗은

*시편 101:2 내가 완전한 길을 주목하오리니 주께서 어느 때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 내가 완전한 마음으로 내 집 안에서 행하리이다.
ㅡ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함은 하나님을 신뢰하면 그 과정들이 아무리 힘들고 고통스러워도 결국은 실망하지 않는다. 주위에 잘 나가는 사람이 많고 멋진 일들이 많아도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면 그 대가는 크다. 대신 기다리지 않고 앞서면 그 얻는 과정에서 너무나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기다리면 하나님이 다 이루어주신다. 급하게 험산준령을 가지 말고, 둘레 길처럼 가라.


*시편 106:15 그러므로 여호와께서는 그들이 요구한 것을 그들에게 주셨을지라도 그들의 영혼은 쇠약하게 하셨도다.
-인간적인 방법으로 이루었다고 하더라도 영혼이 쇠약한 것이다. 우리가 지나간 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아직 늦지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은 주실 준비가 되어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를 높여주시려고 하신다. 기적을 베푸시기에 하나님의 방법으로 이루어 주신다. 때를 기다리는 훈련을 해야 한다.
-주기도문처럼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하나님의 뜻이 우리 가정에도 이루어지게 기도하라. 그러나 우리가 마음먹고 주님의 방법, 시간, 주님의 계획대로 이루어지길 기도하라.
온전한 가정회복이 중요하고 교회의 회복이다. 정도 인생, 정도 신앙 정도 목표이다. 뼈를 치는 기다림이다. 모든 일에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런 신앙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방법을 기다려야 한다. 우리 가정에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져야 한다. 내 맘대로 말고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한다.
야곱은 이십년 동안 창세기 29장에 7년을 며칠같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게 되면, 하나님을 즐겁게 할 것이다. 야곱은 결국 자기부인의 시간이었다. 인격적으로 성숙해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가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서 이스라엘이 되었다. 오늘 우리 모든 성도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자. 이러한 모습을 우리 자녀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가정은 마음이 머물러야한다. 가정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자 되어야 한다.


*시편 144:12, 우리 아들들은 어리다가 장성한 나무들과 같으며 우리 딸들은 궁전의 양식대로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잇돌들과 같으며.
-우리 아들들'과 '우리 딸들'이란 표현을 사용하여 이스라엘의 후손을 그 조상들이 바라던 바 그대로 모든 면에서 훌륭하게 성장할 것이라고 서술해 놓았다. 우리 딸들은 궁전의 식양대로 아름답게 다듬은 모퉁이 돌과 같으며. 다윗의 말과 같이 궁전이나 여호와의 집을 장식하는 아름다운 돌과 같이 자라난 딸을 보는 것은 매우 흐뭇한 일이다


♣요약
온전한 가정의 회복을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설계하신 온전한 가정이 공략 당하는 시대에 인간의 계획과 방법을 내려놓고, 가정마다 영적 축복의 매뉴얼대로 순종하는 마음과 결단을 가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가정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로 거듭나서 온전한 가정이 회복이 되고 주님 주시는 은혜 가운데 주님의 가정을 살리는 삶의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 기금(2억원) 기부는 사랑과 기도가 담겨있어서 총신대학교를 다시 태어나게 격려의 뜻이라 여기고 기부금을 학교의 장학과 발전을 위해 사용하겠다. - 총신대학 이재서 총장님-





 
-in his time-
1.In His time, In His Time;
He makes all things beau-ti-ful in His time.
Lord, please show me ev-ery day
As You're teach-ing me Your way
That You do just what You say
In Your time.

2.In Your time, In Your Time;
You make all things beau-ti-ful in Your time.
Lord, my life to You I bring;
May each song I have to sing
Be to you a love-ly thing
In Your ti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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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1년 5월 8일)
제목: “세상을 이기는 믿음의 세대”
말씀: 요한일서 5:4-5
설교자: 이민형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예배 마무리 인도와 기도: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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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5:4-5)
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담임 목사님께서 늘 말씀하시는 것처럼 이 토비새에 나와 한 주간의 삶을 돌아보며 감사, 회개, 결단으로 주님 앞에 아름다운 믿음 보고, faith의 리포터를 올려드리는 시간이 되길 소망한다. 오늘은 어버이날이다. 지난 수요일까지 부모님들이 부담이 되었다. 오늘부터는 반대로 우리 자녀들이 조금은 부담을 가져야 한다. 주일하교 친구들이 평소에 잘 했으면, 카네이션 한 송이로도 충분하다. 지금 많은 자녀들이 토비새에 나왔다.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아름답고, 존재 자체가 큰 선물이다. 사랑의교회 주일하교에서는 정성을 담은 마음으로 아이들이 감사로 성장하고 있다. 온가족이 함께 밤 9시에 성경을 읽는 시간, 주일하교 유튜브 사랑 채널에는 정말 많은 가정들이 참여해주고 계신다. 구독과 좋아요!가 너무 많다. 다음세대 신앙의 플랫폼을 꿈꾸며 함께 하고 있다. 지금 하루에 성경 3장씩 읽고 있다.


우리 믿음 세대 자녀들이 이렇게 멋지게 쓰임받기 위해서는 생각으로 말로만은 안 된다. 담임 목사님이 늘 강조하심처럼, 실체가 있는 비전이 되고 이것이 모두가 체화되기 우해서는 반드시 구체적인 실천과 결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비포(before와 에프터(afer)가 명확히 차이가 있는 우리의 신앙생활을 말씀한다. 오늘 함께 읽은 요한일서 5장은 우리가 반드시 붙잡아야 할 그 실체가 무엇이며, 이 시대 가운데 우리 자녀들이 지켜내야 할 믿음이 무엇인지를 가르쳐 주고 있다.


*요한일서 1:1-2절,
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이시니라.

-이 말씀이 기록될 당시 소아시아 교회에 들어온 수많은 이단과 잘못된 사상, 즉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하며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모든 사역과 십자가의 모든 죽음 부활까지 이 모든 것이 거짓말이라는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 사도요한은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성경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눈으로 보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들었으며, 놀라운 변화를 경험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절대 속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강력하게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주 토비새때에 담임 목사님께서 자녀들과 부모님들을 위해 특별히 마련해 주신 귀한 시간에서 전해주신 말씀이다. 물론 성도님들께서 다 아시겠지만, 말씀에 화답하신 우렁찬 아멘 소리를 잊지 못한다. 기도하는 여러 학부모님들도 함께 마음을 모으시겠다고 한다. 더구나 대법원, 서울지방법원, 대검찰청이 코앞에 있는데, 제대로 반응하지 못한 모습이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 그리고 어떻게든지 지혜로운 방법을 표명하여 우리 자녀들을 말씀으로 지켜내고 세속화의 거센 물결에도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영적 강군으로 세우기 위해 몸부림쳐야 함을 해보게 되었다. 요한일서가 기록된 당시에 상황과 현재 2021년 우리가 만나고 있는 현실은 전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영적으로 더 정신 차리고 더욱 깨어있어야 할 때 인줄로 믿는다. 그러나 완전히 끝나지 않는 이 코로나라는 특수한 환경가운데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 부정적인 결과들이 하나 둘 나오는 것을 볼 수 있다. 지난 5월 6일자 국민일보에서 ‘한국교회 부모 자녀, 신앙생활 소홀해졌다.’ 거기 정확한 수치가 나왔는데, 우리 자녀들이 지난 코로나를 겪으면서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약해졌는지를, 실제로 조사해본 결과 절반이 넘는 약 53퍼센트 정도가 이런 대답을 했다. 이 짧은 뉴스 제목 안에 우리의 부끄러운 민낯이 그대로 담겨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기사 첫머리에 ‘코로나 19사태로 비 대면으로 예배를 드린 한국교회 크리스천 가정의 영적 상태가 이전 보다 약화된 것’으로 조사되었다고 한다. 영적 공백 상태가 있음에도 크리스쳔 가정에 신앙교육은 시간부족과 자녀의 학업 등으로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이 기사의 내용을 읽으며 이해가 되지 않는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로 영적공백 상태의 원인으로 꼽은 시간부족이다.
-구체적으로 설문항목에서 자녀 신앙교육의 걸림돌이 무엇인가를 질문하는 것에 각자 너무 바빠서, 시간이 없어서라고 대답을 했다는 것이다. 코로나 이후로 우리는 국내뿐 아니라 해외여행도 못하고 있다. 우리 사랑의교회에서 생각해보면 크게 공감이 되지 않았다. 지난 봄 글로벌특새 이후로 매 예배 시간마다 주시는 말씀으로 가득 차는데, 영적부족으로 시간부족이라는 것이다. 코로나 이후로 국내, 해외여행도 못하는데, 직장은 재택근무, 학교는 온라인 수업중인데 왜 바쁠까를 생각하게 한다. 무엇 때문에 바쁜가? 우리 손에 들려진 스마트폰이 바쁜 것은 아닌지를 봐야 한다. 손에서 놓지 못한 것은 혹시 네플렉스, 유튜브로 시간을 빼앗긴 것이 아닌가를 생각하게 한다. 요즘 학부모님들께서는 요즘 학력 격차가 심하다고 하는 이야기를 한다. 학원을 보내지 못하니 온라인 강의 등으로 강제적으로 등록을 시켜서 다른집 아이들도 더 열심히 공부한다고 하는데 매일 집에서 뒹구는 아이를 보며 한숨을 지으며 마음에도 없는 진심이 1도 안 남는 아이들에게 하고 있다. 저는 이 코로나 시대가 시간이 없어서 영적공백 상태가 생긴다는 것이 이해가 안됐다.


두 번째로 우리 사랑의교회 가정의 현실은 아니라는 판단에 크게 공감되지 않는다는 것.
지난 봄 글로벌 특새 이후로 매 예배 시간마다 공간마다 성도님들과 우리 아이들로 안아주심의 본당에 가득참의 모습을 보고 있다. 그만큼 예배에 대한 사모함과 간절한 마음이 이전보다 더욱 커졌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부족한 부분들도 있지만, 지금 사랑의교회 현재의 모습역시 한국교회 역사에 남을 모범이 되는 사례라고 생각하게 된다. 섬기는 고 3의 한 학생이 현장예배를 하고 있는데, 그 주간에 모의고사도 있던 주간인데 지나가다 우연히 만나서 붙잡고 물어보니 “시험기간인데 괜찮니?” 했더니 이 친구의 대답은 “목사님, 공부랑 믿음 생활이랑 비교하면 안 되죠”라고 대답했다. 순간 질문이 잘못되었다는 것과 이 친구의 대답이 백번이고 옳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잠시 후 보여드리겠지만, 요셉 브릿지에서 20퍼센트 방역 지침을 지키기 위해 교회로 달려온 아이들을 위해 예배드리게 하고 교사들은 예배 복도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는 모습으로 아이들을 섬겨주시는 모습이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광경이며 감동적 장면이었다. 아무튼 뉴스기사의 내용이 100퍼센트 우리의 모습은 아니라고 하더라고 지금 한국교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 절대 그냥 간과하고 넘어갈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금도 주님의 몸된 교회와 성도들을 공격하고 일어나고 있는 수많은 일들 가운데 마지막 때라고 이야기 한다. 그런데 사도요한은 교회 안 밖으로 일어나는 일을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다.


*요한일서 2:18,
18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그렇다면 이 마지막 때 인본주의와 무신론의 견고한 진을 파하며 성령님의 통치를 받는 세대가 되기 위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말씀으로 단순명료하게 이야기해 준다.


*요한1서 5:4~5절,
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5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온 우주 만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세상에 무릎 꿇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무릎 꿇게 하는 비결은 다름 아닌 믿음인 줄 믿는다. 구체적으로 그 믿음의 내용은 우리의 소망이요, 생명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 온전한 믿음의 고백을 올려 드릴 때,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요한복음에 사도요한은 기록 목적을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요한복음 20:31절에,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렇게 선포한다.
*요한복음 3:16절, 16 하나님이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를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계속해서 사도 요한은 흔들리는 세상 가운데 변함없는 굳건한 반석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제대로 된 신앙고백과 결단을 통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 다음세대를 설계하시고 승리하게 하시는 믿음의 고백의 내용은 단순명료하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내어 주시고, 부활하셨다. 그 주님을 믿기만 하면 영원한 천국을 선물로 받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지금 우리 아이들로 하여금 이것을 못하게 하고 이 믿음을 지키지 못하게 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사탄은 동원하고 있다. 그러나 절대 걱정하지 말고,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수많은 위협과 핍박 속에서도 목숨 걸고 지켜낸 이 위대한 신앙고백으로, 세상이 아무리 차별금지법이니, 잘못된 교육으로 우리 다음세대를 넘어뜨리려고 해도 생명의 말씀 위에 서면, 우리 사랑하는 자녀, 가족들이 그 말씀 붙잡고 일어서면 반드시 기필코 승리하게 될 것을 믿는다.
-믿음의 세대 계승을 이루는 주일학교 사역보고의 시간을 갖겠다. 화면을 함께 보면, 자손을 하늘의 별과 같이 번성케 하시겠다는 말씀은 아브라함에게 영원한 약속이 되었고, 많은 사람을 돌아오게 한다는 별과 같이 빛나리라는 다니엘의 이야기처럼, 빛나는 새벽별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우리의 궁극의 소망이 되었다. 태양 빛을 간직하여 밤하늘을 비추는 사랑의교회 다음세대가 언약의 말씀을 통해 약속을 가진 그리스도의 제자로 세워져 밤하늘의 무수한 별처럼 빛나며 세상을 아름답게 변화시키기 원하는 STAR에 비전을 담았다.


*STAR
‘성경중심’을 통한 영적 성장과 제자훈련을 통한 예수님의 제자양성, 교회와 가정의 연계를 통한 믿음의 세대 계승을 새로 세대의 부흥을 주도할 인재양성이다. 코로나 엄중한 상황 가운데 폭포수와 같은 은혜를 누렸던 주일학교 사역의 현장을 함께 나누겠다.
-다음 세대를 살리는 예배이다. 작은 부활절, 영적 대관식, 기쁨의 혼인잔치에 우리 다음세대는 기쁨으로 올려드리는 예배이다. 마스크를 착용이 익숙해져서 율동과 찬양하는 모습이다. 주일학교 교사들이 성극을 하는 장면이다. 학생들과 은혜를 나누고 있다. 왕년에 한 교회 오빠! 하셨을 것이다.


♣ 요약
이 마지막 때, 인본주의와 무신론의 견고한 진을 파하기 위해서는 성령님의 통치를 받는 세대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말씀으로 단순명료한 말씀을 가지고, 온 우주 만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세상에 무릎 꿇지 않고 오히려 세상을 무릎 꿇게 하는 비결은 다름 아닌 믿음이니, 우리의 소망이요, 생명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이 온전한 믿음의 고백을 올려 드릴 때, 우리로 하여금 승리하게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분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내어 주시고, 부활하셨다. 그 주님을 믿기만 하면 영원한 천국을 선물로 받는 것임을 믿고,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수많은 위협과 핍박 속에서도 목숨 걸고 지켜낸 이 위대한 신앙고백처럼, 우리도 세상이 아무리 차별금지법이니, 잘못된 교육으로 우리 다음세대를 넘어뜨리려고 해도 생명의 말씀 위에 제대로 서면, 우리 사랑하는 자녀, 가족들이 그 말씀 붙잡고 일어서면 반드시 기필코 승리하게 될 것을 믿는다.

▶주일학교 STAR는
성경중심’을 통한 영적 성장,
제자훈련을 통한 예수님의 제자양성,
교회와 가정의 연계를 통한 믿음의 세대 계승,
새로 세대의 부흥을 주도할 인재양성이다.
코로나 엄중한 상황 가운데 폭포수와 같은 은혜를 누렸던 주일학교 사역의 현장을 이렇게 함께 나누겠다. 

-하나님께 속하여 태어난 자는 하나님을 위하여 난 자이며, 따라서 다른 세상을 위해 태어난 자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 세상을 물리치고 정복할 수 있다. 믿음은 승리의 근거가 된다. 믿음 안에서 또한 믿음에 의하여 우리는 세상에 대항하고 그리스도께 신실하게 나아가는 것이다. 믿음은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이 세상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는다. 진실한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참된 정복자이다.




-성경통독 최아름(청년F국, 우세현(대학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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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1년 5월 5일)

제목: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라"
말씀: 빌립보서 1:12-18절
설교자: 임병영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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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1:12-18)
12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그 밖의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으로 말미암아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전하게 되었느니라.
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증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17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 여러분들의 삶이 요즘 기쁨이 가득하다고 느껴지는가? 마음에 혹시 기쁨이 가득한 삶을 살고 있는가? 코로나가 장기화 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기쁨을 상실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원하는 경험을 했다고 해도 일시적인 만족을 느낄 뿐, 또다시 기쁨을 상실하는 일상이 반복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생각이 들고 너무나 아쉬운 시간들을 보내는 것이다. 작년 6월에 소프트웨어 정책 연구소에서 코로나 19로 인해 개인이 느끼는 감정을 분석하고 불안 치수를 측정하는 연구를 진행했는데 그 연구에 따르면, 코로나로 인한 감정이 분노 두려움, 슬픔, 혐오, 즐거움이라고 하는 5가지 유형으로 표출되었다고 한다. 특히 감정 중에 슬픔에 감정이 다른 감정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높고 지속 적을 유지된다라고 분석하고 있는데, 이것은 코로나 불루, 코로나 우울과 지결 되어 있고, 우리 국민의 48퍼센트가 이 우울을 경험하거나 또는 경험하고 있다라고 한다. 이 조사 후에 벌써 일 년여 시간이 흘러간 지금, 주변을 우리가 돌아보면, 이러한 감정이 더 좋아지지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이렇게 우울한 삶이 기쁨을 상실하고 있다. 코로나 이후에 여행을 온전히 다니지 못한 이유와 나의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운동이나 사람들과의 만남이 줄어서인지, 언제 어떻게 가늠이 될지 몰라 두려워하고 있는 그런 일상 때문에 자유롭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내 의지 상관없는 일상을 반복하여 마주하는 것 때문일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은 어떨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너무나 안타까운 것 중에 하나가 여행길이 막혀 있다는 것이다. 여행길이 막혀서 스트레스를 풀길을 갖지 못하는 것이어서 기쁨이 없을 수 있다 라고 여겨진다. 반복되는 일상과 환경을 좀 벗어나면 조금 은 낯선 곳에서 느낄 수 있는 그런 감정에 취하다보니 그러면 내가 가지고 있었던 그런 스트레스가 풀리곤 했는데 그것을 채우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런데 잠시 그러한 기회를 갖는다 해도 그 기쁨이 무한하지는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여행을 가기 전에는 그 여행만 갔다 오면 내마음이 가득해서 무엇이든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여행을 다녀오면 또다시 삶에서 다른 기쁨의 이유를 찾고 있는 모습을 발견한다. 여행만이 아니다. 운동이나 만남을 통해서 스트레스를 푸는 것도 반복적으로 하지 않으면 일시적 기쁨으로 끝날 때가 많이 있다. 또한 그것을 반복적으로 해도 기쁨이 무한하지 않을 것이다. 나의의지와 계획대로 삶을 산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방법과 시도가 우리에게 온전한 기쁨을 회복시켜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려운 상황이 해결되면 그것으로 기쁨이 회복 될 수 있는가? 그것 또한 새로운 문제에 휘둘려서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코로나 19가 완전히 종식되어서 그 상황이 끝난다면 어떠하겠는가? 오랫동안 우리를 괴롭혔던 그것으로 우리가 잃어 버렸던 그 기쁨을 완전하게 회복시킬 수 있다 라는 말에 얼마나 동의를 하겠는가? 우리는 우리가 그동안 상실한 기쁨을 찾기란 쉽지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코로나 이전에도 환경이 달라졌다 해도 그 기쁨을 완전하게 회복시키지 못했다는 것이 우리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우리의 삶에서 상실한 기쁨을 찾고 우리의 마음에 무한한 기쁨을 소유하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코로나19의 시기만 아니면 또 포스트 코로나 시기에도 우리가 한결 같은 기쁨을 어떻게 하면 누릴 수 있는가? 오늘 말씀을 기록한 바울처럼 이 빌립보서에 기쁨을 강조한 사람은 성경에 별로 없다. 바울서신에서 약 40퍼센트 비율로 기쁨을 언급하고 있다고 한다. 과연 기쁨의 사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타난 바울의 인생은 기쁨과는 별로 상관이 없어 보인다. 다메섹을 걸어가고 있는 그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던 그 바울, 그리고 그 예수님으로 인해서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후에 그의 인생을 생각해 보자. 그의 인생에는 매를 맞고, 사람들의 조롱과 대적들의 공격의 삶이었다. 여러 번 죽을 뻔했다. 그를 죽이기 위해서 금식하여 그가 죽을 때까지 한모금의 물도 먹지 않겠다고 외친 사람들도 수두룩했다. 우리들이 지난달까지 날샘큐티를 통해서 바울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잘 알 것이다. 읽은 본문도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에 빌립보 교회에 기록한 편지다. 감옥에 갇혀있으면서 기쁨과 상관이 없을 것 같은 그 바울이 어떻게 이야기 하는가? 기쁨을 지금 강조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어떻게 누구보다도 기쁨이 없을 것 같은 그 사람이 누구보다도 기쁨이 상실한 삶을 살 것 같은 그 사람이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라고 강조하여 그 기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오늘 본문에서 그 말씀을 함께 나누자.
12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자신이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되었다라고 말한다. 여기서 진전이란,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의 위협을 받게 되었고, 가이사에게 상소해서 로마로 와서 감옥에 갇혀 있는 미결수 상태로 있는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감옥에서 언제 풀릴지 알 수 없는 시간을 계속 보내고 있는 중이었다. 바울은 이러한 상황이 복음 전파의 진전이라고 표현한다. 진전이란 진군이 원활하도록 새로운 길을 개척한다는 뜻이다. 로마에서 전쟁을 나갈 때에 그 전쟁을 하기 위해서 길을 만들 때에 사용하는 단어이다. 바울이 복음을 위해서 로마 감옥에 갇혀있는 도리어 복음을 전함에 있어서 새로운 길을 만들게 되었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바울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사명을 따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감옥에 있으면 안 될 상황이지만, 만들어 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방인의 골목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성을 지나쳐야 한다. 가지 못했던 성을 가봐야 그곳에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복음 전파를 위한 새 길이 만들어졌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바울이 복음 전파에 진전이 있었다고 표현하는 것은 무엇인가?

 

13-17절에 바울은 설명하고 있다.

먼저 바울은 자신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시위대 안과 밖에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고 이야기 한다. 이때 시위대 안이란 표현은 시위대를 관장하는 사람들을 의미하는데, 당시 로마의 시위대란 로마를 지키는 수도 방위군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곳이다. 통상 그렇게 중요한 자리에는 황제 친척이나 최 측근이 맡게 되는 곳이다. 그러니 그곳에는 귀족들과 관리들의 친척들의 만남이 있을 가능이 너무나 많은 곳이었다. 바울이 아무리 일개 시민이 쉽게 만나볼 수 없는 왕족들과 귀족들과 그들의 가족, 형제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그 시위대 안에서는 무궁무진 하게 펼쳐져 있었다는 곳이다. 심지어 그곳을 드나들었던 그 사람들은 이 바울에 대한 소문을 알고 있고, 죄도 없는데 가이사에게 상소문을 올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죽음과 부활의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기회가 너무나 많았던 것이다. 그 바울이 복음을 위해서 그 시위대 안에서 갇혀 있다는 것은 시위대 밖에 있는 여러 그리스도인에도 도전이 되었다. 바울은 자신의 매임으로 인해서 주 안에서 신뢰함으로 겁 없이 더욱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울이 복음을 위해서 그 상황과 복음을 증거 한다는 것을 보고 시위대 밖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더 진지하게 복음을 전하게 되었다고 한다. 모두가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바울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자는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접한 자들은 하나님의 인정함을 알고 바울을 긍휼함으로 바라보면서 돕는 자들이었다. 바울이 갇혀 있음을 알고 갇혀있음을 돕고자 했다. 진지하게 더 풍성하게 복음을 전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은 시기하고 질투했던 사람들이었다. 자신들이 복음 전파의 주도권을 잡으려 한 자들도 있었다. 또한 투기와 분쟁으로 한 사람들은 순수하지 못한 사람들이기도 했다. 바울의 위기를 자신의 기회로 삼고 싶었던 자들이었다. 자신을 위한 욕구와 그 술책을 마다하지 않는 당파적 근성이 있었다. 바울은 그들이 이러한 목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고자 한 사람들이라고 평가한다. 바울은 복음을 증거 한 자들이니 그래도 고마움을 느꼈다. 바울은 분쟁과 투기를 했던 사람들과는 좀 어려웠을 것이다. 때로는 가슴 치며 안타까워했을 것이지만 그래도 그런 상황을 그들로 인해 기뻐하고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다.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그 비전과 그 꿈을 이루는 것이 나의 삶에 가장 커다란 일이라고 여겼기에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이 기쁘다는 것이다. 자신이 감옥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기쁨의 이유가 감옥에 갇혀있는 상황에도 복음 전파에 대한 하나님의 갈망이 제대로 성취되었기 때문이다. 비록 감옥이지만 밖에서나 대적 자들이나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진지하게 전하는 것이 감사하고 기쁘다는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뜻으로 쓰임 받을 때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에 헌신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쁨을 채워주심을 경험할 수 있다. 우리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을 통해 우리의 영혼이 만족하게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시에스 루이스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한다. “내 안에 이 세상 어느 것으로도 만족할 수 없는 갈망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내가 또다른 세상을 위해 창조되었을 나타내는 가장 확실한 설명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이룰 때 만족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잘되거나 성공을 이루는 삶은 육신의 작은 만족을 줄 뿐이지만, 하나님의 일이 잘되는 것을 보면 우리의 영혼이 최고의 으로 만족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진정한 기쁨은 내 육신이 잘 될 때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룰 때 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추구하게 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도 고난 가운데서 기뻐하고 또한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도 이땅에서 코로나 시기에 이후에 시기에도 무한한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갈 수 있는가?

 

▶우리의 삶에서 상실한 기쁨을 회복하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는 우리의 비전을 세상에서 잘되는 것에 두지 않고 살아가는 것.

-우리의 삶에서 잃어버린 기쁨을 회복하고 그 기쁨을 다시 누리고자 한다면 무엇보다 우리는 세상에서 잘되는 것이 아닌 기쁨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비전으로 삼아야 한다. 그런데 우리 비전을 살펴보면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채워져 있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자신의 꿈을 이

바울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사명을 이루는 것이었다. 바울의 사명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바울은 감옥에서도 자기 매임으로 그리스도가 전파됨을 기뻐하고 또한 기뻐한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비전이 있다. ‘서로 사랑하라, 하나님의 마음으로 섬겨라. 무엇보다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라’고 명령하셨다. 특별히 코로나로 인해 우리가 복음 전파에 많은 어려움을 주고 있다. 하지만 어렵고 곤고한 상황에도 바울을 통해 복음의 진전을 이루셨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복음을 전하는 그 영광스러운 사명을 우리의 비전으로 삼아서 코로나의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그것들을 이루어가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의 기쁨이 아닌 하나님의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다.

 

두 번째는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을 찾고 그 일을 위해 삶을 바치는 자 되어야 한다.

-살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을 비전으로 삼게 된다면, 이제는 그것이 삶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드러나야 할지를 찾아야 한다. 또한 그것을 위해 전 인생을 바칠 수 있는 결단을 해야 한다.

조금은 무겁지만, 바울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일을 맡고난 후에 그의 일을 위해 전 인생을 바쳤다.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빌립보서 1:20절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

그래서 바울은 복음전파의 사명을 위해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는 법을 위해 힘썼다. 세상에서는 도무지 찾을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된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채울 수 없는 그 기쁨을 주시고자 하시는 그 기회를 얻는 축복의 통로이다. 그러한 삶을 통해서 세상에서 끊임없이 채워도 채울 수 없는 그 기쁨을 하나님으로부터 단번에 채울 수 있는 은혜를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각자의 삶에서 구체적으로 찾아야 한다. 가정, 교회, 직장,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을 찾아야 한다. 그렇게 한다면 삶을 바칠 수 있는 결단도 하여야 한다. 기쁨이 상실한 일상에서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 있음을 확신한다. 이 말씀을 의지해서 어떤 상황에도 기쁨이 충만한 삶을 살기를 바란다.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에서 바울이 감옥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유는 바울이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는 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비전으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인한 그 기쁨을 소유할 수 있었다. 우리도 그런 기쁨을 소유할 수 있다 그 비전을 위해 우리도 그 삶을 바치면 세상에서 줄 수 없는 것을 받게 될 것이다.

 

-코로나의 어려운 상황이 반복되어도 하나님이 보호하셔서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찾게 하시고 비전을 여겨서 세상이 주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것을 믿고 주님이 마음의 온전한 기쁨을 회복하게 하여 주시고 소망으로 인도하여 주시길 소망한다. 기쁨을 얻을 기회,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찬스가 되어야 한다.

 

♣요약
어렵고 곤고한 상황에도 바울을 통해 복음의 진전을 이루셨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복음을 전하는 그 영광스러운 사명을 우리의 비전으로 삼아서 코로나의 어려운 상황일지라도 그것들을 이루어가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의 기쁨이 아닌 하나님의 기쁨으로 살아갈 수 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께서 주시는지 다시 기회를 붙잡고 결단하고 헌신을 통해 주님이 온전히 주실 것을 바라며 실천해야 한다. 그래서 바울처럼 기뻐하고 또한 기뻐할 기회를 지속적으로 주실 것이다.


-그는 복음을 대적하기로 서원한 자들에 의해서 고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복음을 맞지 못했다. 왜냐하면 이 사실은 선을 낳았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고난은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 사도가 구속이라고 하는 아주 큰 악에서부터 복음의 진보라고 하는 아주 큰 선을 끌어낸 이 사실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섭리라고 하겠다. 그것은 복음 밖에 있던 자들에게 복음을 알게 해 주었다.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13절). 바울의 고난은 그를 궁정에까지 알려지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 일이 궁정에 있는 사람들 중 몇 사람으로 하여금, 바울에게 고난을 가져다 준 그 복음이 무엇인가를 묻게 했을 것이다. 그 사람들은 바로 이러한 방법이 아니고서는 결코 복음에 대해서 들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의 매임이 시위대 안에 나타나게 되었을 때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도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복음 안에 있던 자들을 담대하게 해주었다. 그의 대적들은 그의 고난으로 놀랐으나 그의 친구들은 그의 고난으로 인해 용기를 얻었다.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이하여 주안에서 신뢰하므로(14절). 그들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바울이 투옥된 것을 보았을 때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그의 이름을 찬양하는 일에 기가 꺽이기는 커녕 그 일로 인해 더욱 더 담대하게 되었다. 말일 강단에서 감옥으로 끌려가게 된다 할지라도 그들은 기꺼이 그 고난을 감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그들은 아주 좋은 동역자와 함께 있게 될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바울이 고난 중에 가졌던 위로는 그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들이란 자신들을 견디게 해줄 뿐 아니라 지지해주는 훌륭한 주인을 섬기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나의 매임을 인하여 신뢰하므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을 낙담케 하고자 했던 적들의 의도는 오히려 전도되었고 그들은 담대함으로 나아갔다.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그들은 최악의 사태에 직면해 있었다. 그러기에 오히려 모험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바울은 대적들로부터 뿐만 아니라 거짓 친구들로부터도 고난을 받았다(15,17절). 어떤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15절). 교회들 가운데 바울의 명성을 시기하여 그를 모함으로 축출코자 했던 자들이 있었다.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줄로 생각하여(17절). 그러나 바울의 고난으로 인해서 더욱더 활기있게 그리스도를 전파한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15,16절). 이와 같이 고난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해주었다. 모든 고난 가운데서도 바울은 매우 평안하게 되었다.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시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8절). 인간들의 행동 원리들을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이다. 그것은 우리의 영역 밖이다. 바울은 자유롭게 복음을 전파한 자들을 시기하기는커녕 참으로가 아니라 외모로라도 복음을 전파한 자들의 그 복음 전파를 기뻐하였다.  - 목양 5교구 -  기록(이향애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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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1년 5월1일)
제목: ''역리의 세상에서 순리대로 사는 법''
말씀: 로마서 1:24~27
설교자: 조준일 목사님(울산 대영교회 청소년부 회장 초빙)

기도회 인도 : 오정현 담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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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 1:24-27)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 오늘은 주일학교 자녀들이 많이 왔다 사람이 바뀌려면 의식개혁이 되어야 한다. 그다음은 생각의 센스가 있어야 한다.-마음이 젊어져야 한다는 것이며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능력이 중요하다. -담임 목사님-

 

▶조준일 목사님(울산 대영교회 초빙)
-이렇게 귀한 교회에서 말씀을 전하게 되어 기쁘다. 담임 목사님과 사랑의교회 성도님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며, 이 말씀 가운데 하나님의 진리가 선포되고 그 진리 가운데 변화와 결단의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1999년에서 2000년으로 넘어올 때에 사람들은 밀레니엄이라고 해서 많은 변화가 이루어졌다. 그 변화를 뒤로하고 입대를 했다가 오니 세상이 그 순간 짧은 순간에 많이도 변화가 되었다. 제일 먼저 충격은 오락실이었다. 오락게임 등이었는데 새로 출시된 것들은 발판을 뛰는 것도 나오고 춤을 추는 것이 스텝대로 하는 것 등이 놀라게 했다. 또한 복학을 하려고 보니 수강신청을 하게 되는데 학교에 가서 해야 하는 시스템이 변화하여 인터넷을 통해야 하는 PC방이나 집에서 수강신청을 3분 만에 신청을 해야 하는 시스템이 되어 있었다. 쉽게 적응하기 어려웠다.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기계적인 것이어서 열심히 하면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문제는 인식과 사상의 변화이다. 아직도 사람들의 생각이 이렇게 변하게 한 것을 잊지 못한다. 충격을 받은 한 수업을 잊지 못한다. 형법강론이라는 수업에서 여자 교수님은 마치 연예인 중에 한사람을 언급했다. 트렌스젠더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남자가 여자가 된다는 트랜스젠더라는 말도 익숙하지 않았다. 받아들여지지도 않았다 그 교수님은 젠더들의 신분이 변경신청을 하여 수강을 신청하는 것에 대해 질문했다. 이 사람은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질문하기도 했다. 당시 예비역들은 놀랄 수 없었고, 밀레니엄의 인식의 변화가 이렇게 빠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여자가 아닌 남자인데 대법원은 본인의 성을 자신이 결정하는 것이 법적으로 바뀌게 됨이 인정했다. 밀레니엄의 시대의 인식의 변화가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 그 후 우리 사회가 문화적으로 극심한 갈등을 일으키게 될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하나님은 남자와 여자를 분명히 창조하셨다.

이 사회는 마치 콘센트처럼 인공적으로 법과 사회적 합의라는 젠더를 끼우면 얼마든지 성별이 바뀌게 하는 것처럼 변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문화는 창조질서를 역행하는 역리이다. 반드시 심각한 문제를 야기 할 수밖에 없다. 20년 전 청년의 때의 불길한 예감이 시간이 갈수록 맞아떨어졌다. 지금은 어떤 것이 진짜 성경적인가에 대해 그리스도인들조차도 혼란스러워하는 문화적 변화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저 연예인의 문제가 학교, 정치, 사회, 공공기관, 문화, 심지어 교계에까지 들어오게 되고 거기에 대한 성경적 기준을 갖추지 못한 교회나 성도들은 자신도 모르게 비 성경적인 내용을 문화라는 이름으로 수긍하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는 이것을 역리의 시대라고 말한다. 역리라는 것은 순리의 반대이다. 조금 더 성경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진리에 어긋나는 모든 것을 역리라고 한다. 그리고 역리의 시대란 하나님의 진리에 어긋나는 것이 자연스러운 시대를 이야기 한다. 순리를 바꾸어 역리가 상식이 되면 역리가 순리가 되는 것이다. 이 말이 익숙하지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밀레니엄에 변화가 급속히 빨라지는 세상과 사회가 문화적으로 극심하게 변화하고 있었다. 창조질서를 무시하는 역리였다. 중요한 것은 학교 정치 공공기관 등에 비성경적인 것이 문화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하나님은 그런 시대를 보시며 기뻐하신 적이 한 번도 없으시다.

오늘의 본문 로마서는 고린도에 있던 바울이 로마교회를 그 지역 전도를 위해 베이스캠프로 쓰기 위해 쓴 편지이다. 당시 로마교회는 여러 문제가 있었고 바울은 그것을 성경적으로 해결해 주면서 동시에 진짜 복음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설명해 주고 있다. 바울은 1장에서 복음에 존귀함에 대해서 설명하다가 18절부터 갑자기 이 시대의 더러운 문화를 고발한다.

 

*로마서 1장 18절을 보면,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하나님이 당시의 로마 사람들의 죄를 보시고 진노하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진노는 죄에 대한 불쾌함이다. 매우 불쾌해 하셨다. 당시 로마시대는 죄악이 절정에 달했던 시대였던 것 같다. 죄를 짓고 또 짓다 못해서 24절에 보면,

 

롬 1: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하나님이 내벼려 두셨다고 하신다. 그 결과는 26절이다.

26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하나님의 노하심의 절정이 죄의 버려두심이고 버려두심 결과 인간의 욕심이 극에 달한 현상이 동성애로 드러났음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순리를 바꾸어 역리로 쓰는 시대라고 표현하고 있다.

당시 로마시대 동성애는 상상을 초월한다. 심각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쓸 때에 로마황제였던 네로 황제는 자신의 임신한 부인의 배를 차서 죽여 버렸다. 그리고 난 후에 수포로스라는 한 남자청년에게 반해서 동성애를 즐긴다. 그것도 그 청년을 거세시켜서 결혼까지 한다. 그 뒤로도 황제는 사람들이 있던 없던 스포로스와 성적인 유희를 즐겼다고 한다. 역사에 처음 기록된 트랜스젠더인 것이다. 그 외에도 황제열전이라는 책을 읽어보면 그 기록에 열두 명의 황제 중에 열 한 명의 황제들이 동성애를 즐겼다고 나온다. 황제가 이정도이니까 귀족이하 모든 국민들은 쾌락의 끝에 동성애가 있음을 문화로 인지했던 것이다. 자연스러워진 것이다. 그 현상을 보며 바울은 역리가 진리를 대신하는 시대를 안타깝게 여기고 이 상황에 대한 성경적 입장을 우리에게 전하게 된 것이다. 역리가 순리가 되는 것이 비록 로마시대만이 아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역리가 순리가 되어 하나님이 진노하실 만한 일들이, 불쾌하실 일들이 대한민국 곳곳에서 제도화 되고 있고, 교육되고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실 오늘 굉장히 마음이 어렵다. 요즘 청년들은 축복과 격려로 원하는데 어쩌면 지적과 지탄과 회개를 강조하는 설교일 것이다. 그러나 로마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기 전에 그 땅에 죄를 먼저 말함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더 간절히 바라게 했던 것처럼 오늘 설교 이후에 하나님의 순리를 향한 불같은 마음이 일어나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이 땅은 지금 어떤 상황이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오늘 본문 26절에 나오는 역리는 파라피쉬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 질서에 대항하다는 것이며 대적하고 거스르다 라는 것이다. 26절에 보면, 여인들이 역리로 쓰고 남자들도 순리를 버리고 부끄러운 일을 했다고 나온다. 단수가 아닌 여자들 남자들이다. 사회의 다수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역리 문화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한 두 명이 그 사회에서 그 죄를 지으면 사회적 에피소드 일 수 있다. 그러나 문화가 된다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문화가 된다는 것은 역리가 정상으로 인식된다는 것이고 상식이 되는 것이며 제도화 된다는 것이다. 제도화 된다는 이야기는 법으로 만들어지고 그것이 교육되어 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 시대에 동일한 현상들이 엄청나게 많이 일어나고 있다. 바로 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포괄적 성교육이다. 그것이 울산에서 시작이 되고 있다. 가르치는 내용도 놀랍다. 이 작이 오래전부터 서울에서도 이미 착실하게도 준비되고 있는 것이다. 울산보다 20년보다 먼저 서울에서 포괄적 성교육이 많은 사람들에게 가르쳐지고 있다. 그리고 작년부터 공교육에 커리큘럼에 포괄적 성교육에 엄청나게 애를 쓰고 있다. 우리의 자녀가 학교에서 받는 성교육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포괄적 성교육이 무엇인가?

-교육청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포괄적 성교육은 여성과 남성의 성에 대해 신체 구조적 차이와 같은 생물학적 특징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를 중심으로 인간의 생애에서 성과 관련된 모든 경험을 포괄하는 교육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 대충 좋은 의미 같다. 남녀가 평등이라는 뜻으로 여겨지고 대충 넘어간다. 정의가 모호하면 강론을 열어보고 구체적으로 우리 아이들이 무엇을 배우는지를 살펴봐야 한다. 그래서 우리 자녀들의 성교육이 지금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유네스코의 제도인 성교육을 따른다고 한다. 그게 무엇인지 서울 성문화센터에서 찾아보니 크게 8가지 영역으로 나온다. 보니 젠더교육이 중간에 떡하니 있다. 젠더교육이 무엇인가? 젠더는 존 머니라는 학자가 처음 제시한 단어이다. 기존의 남성 여성을 해체하고 모든 성은 사회적 역할에 따라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 라고 말하고 있다. 여자가 될지, 남자가 될지, 혹은 양성이 될지를 자신의 성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회는 인정하는 것이라고 하며 인정하지 않으면 차별이고 억압이고 부당한 대우이라고 교육하는 것이 젠더 교육이다. 역리가 순리가 되는 교육인 것이다. 이제 성에 대한 아이들에게 성은 ‘네가 결정할 수 있는 거야’ 성이 선천적으로 정해지는 것이 젠더 차별이야라고 교육하는 것은 우리 자녀들이 하나님을 정면으로 대항하며 순리적으로 살지 못하게 하는 교육이다. 이것을 우리는 찬성할 수 없다. 우리 아이들이 이 교육을 받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부모님들이 반대를 많이 했다. 이것을 이름만 살짝 바꾸어서 ‘성 인지 교육’이라면서 교육한다. 워낙 유명한 단어이다.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성인지 감수성 부족이라는 단어라고 들어 보았을 것이다. 서울에서도 작년에 초등학교 대상의 부모를 교육했다. 성인지 감수성이란 단어 그래도 성에 대한 느낌이다.

이성을 대할 때 이것이 차별인지 폭력인지 성적인 부당한 대우에 대한 느낌인 것이다. 성 인지 감수성, 나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괜찮은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이 단어의 원래 명칭은 젠더 센서티버티(gender sensitivity이다. 젠더 민감성, 사회적 정치적으로 성별을 정할 수 있고 성경이 정한 것 외에 다수의 성이 인정받아야 하는 젠더 이데올로기에 대한 민감성, 젠더 민감성, 이것이 성 인지 감수성의 원래 뜻이다.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다르게 만드신 것은 하나님께서 계획한 거룩한 구별이 있기 때문이다.

젠더 이데올로기는 이것을 해체하는 것이다. 남성, 여성, 그 외에 다수의 여러 성들을 인정한다. 그리고 성별로 고정된 역할을 주는 것은 차별이고 폭력이며, 젠더 감수성이 떨어진다고 표현하고 있다. 동성애를 보고 이상하다. 정상이 아니다 라고 표현하면 성인지 감수성이 떨어지는 것이고, 폭력, 부당한 대우가 되는 것이다. 트랜스젠더는 비성경적이며, 죄인이며 죄라고 표현하는 것 자체가 폭력이 된다고 교육하는 것이 바로 역리를 순리인 것처럼 바꾸는 것이 성인지 교육이며 지금 우리 학생들에게 시행하고 있는 교육인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보면 원래 성인지 교육자료인 교재가 작년에 여성가족부에서 나다운 성교육이라고 수천 권을 전국에 다 뿌렸다가 하도 이 항의가 들어와서 전량 회수를 했다. 그런데 또 성 인지 교육 추천으로 또 들어왔다. 아빠인권 선언이라는 책이다. 아빠가 집에서 집행하는 권리이라는 책이다. 처음부터 보면 나쁘지 않게 보인다. 이해할 수 있고 용인 할 수 있고 때로는 추천하고 싶은 내용등도 있다. 마지막에 슬쩍 이 권리를 넣는다. 15조 원하는 대로 사랑할 수 있는 권리. ~원하는 대로 동성연애를 할 수 있다는 것의 그림을 넣어놓았다. 동성연애 그림을 넣고 아이는 입양하는 권리를 넣어놓았다. 정상적인 가족처럼 아이가 엄마에게 전화를 하는 그림도 있다. 그것의 내용은 “엄마, 아빠가 여자 친구와 함께 연못을 바라보고 있어요.”많은 내용을 생각하게 한다. 일단은 정상적인 가정에서 아이들이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로마서 1:27절에 보면,
27 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성경은 이것이 분명히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순리를 버리고 역리로 쓰는 것이라고 이야기 하는데,,, 정작 우리 아이들이 받게 되는 성인지 교육은 ‘우리 아빠는 역리대로 살아갈 권리가 있으며, 그것은 죄도 아니고,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인간의 권리이다.’라고 세뇌하고 있는 것이다. 아이 인권선이라는 책에서는 더 노골적이다. 15 남자든 여자든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권리, 이렇게 성경에 대하여 역리를 순리로 만드는 교육이 우리 아이들이 받게 될 포괄적 성교육이며, 성인지 교육이니, 너무 화가 난다. 이 내용에 그리스도인 부모로서 여러분은 동의가 되는가??? 이 뿐만이 아니다. 초등학교를 상대로 하는 성교육 가이드에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는 것을 추천도서라고 선정하고 있다. 아이들이 성에 대한 절제와 책임을 배우기보다는 다분히 쾌락적으로 접근하는 조기성애와 될 우려가 매우 높다. 상당히 비성경적이다. 성애화란 모든 것을 성적으로 인식하게 되는 것을 말한다. 사회적 구조, 인간의 목적을 성적 쾌락에 둔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거룩한 성전임을 고린도전서 3장에서 말씀하신다. 인간은 그 거룩 성을 대적하여 성적대상화 시키고 있다. 이 성인지 감수성이 이 사회에 얼마나 거세게 몰아치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 성인지 교육에 대한 교육에 지원이 얼마인지를 아는가?? 코로나로 모두가 허리띠를 졸라 맬 때, 무려 35조원이 책정되었다. 국방부 예산이 50-60조이다. 나라 지키는 것도 아닌 35조이면 서울시 1년 예산 수준인 것이다. 천 이백만 인구를 위해 쓸 예산만큼 성인지에 투자하고 있다. 그래서 무얼할까를 생각해본다. 역리를 순리로 바꾸는 무차별적인 시도를 하는 것이다. 강사를 교육시키고, 교재를 편찬하고, 학교에 수천 권 보급하고 읽히고 가르치고, 성문화센터를 전국 곳곳에 만들어서 역리를 보편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성교육 강사가 오천 명 정도이다. 문제는 지금도 성교육 강사를 양성하고 있고, 특히 영유아 교사들, 학부모까지 계속 성교육을 하고 있다. 그런데 말이 성교육이지 영유아, 초등학교 교사와 학부모들을 가르치는 강사들이 모두 젠더이데올로기를 가르치는 사람들이다. 그걸 배운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가르치게 한다는 것이다. 우리 유치원 다니는 아이들에게 남자애가 남자애를 사랑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럽다고 그 반 선생님이 가르친다면, 그 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아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런 곳에 35조 예산이 들어가고 있다. 더 무서운 것은 2019-20년에 서울에서 성 평등, 다시 말해서 젠더 이데올로기 사업을 하는 자, 단체들에게 10억 가까이 지원한다. 그 공모에 당첨된 사람 중 4-5명 중에 보면, ‘교회를 바꾸는 젠더스쿨’도 있다. 이것은 무엇인가? 교회에 들어가 있는 젠더에 대한 성경적 개념을 자기들이 바꾸믄 프로그램을 만들겠다고 시민 단체가 서울시에게 돈을 달라고 하고 서울시는 좋다라고 하면서 지원해 주는 것이다. 교회를 바꾸려고 하는 것이다. 결국은 이런 젠더사상과 교육이 추구하는 것은 성경에 말하는 가정의 모습, 성경적 성역할의 해체이다. 이런 것을 연구하기 위해 35조를 사용하고 있다.

 

예들 들어서 아빠 힘내세요! 등도 차별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니 힘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을 전통적인 성 연구를 고정되게 하는 것이고, 엄마는 밥만 해야 하는 사람으로 여기니 이런 생각들을 해체해야 한다는 것이다. 해체주의이다. 아빠 엄마에 대한 거룩한 희생을 해체하는 것이다. 백번 천 번 만 번 양보해서 아빠가 밖에서 일하는 것은 당연하다. 엄마가 아이들을 위해 최선을 집에서 양육하는 것이 밖에서 일하는 것보다 잘못하는 것인가? 밥이 중요하다. 극단적 페니미스트는 역사적으로 젠더 이데올로기와 그 뜻을 같이 한다. 정통적인 성 역할이 차별을 만들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이데올로기를 가진 사람은 이 사회에서 성과 가족의 개념을 해체하고 젠더 사상을 부지런히 교육한다. 그결과 상상을 초월하는 결과를 보게 된다. 공중파 TV에서 본인을 소개하는데 “호모로맨스 에이섹슈얼 안드로진”이다라고 –‘정서적으로는 동성애에 끌리고, 육체적으로는 아무에게도 안 끌리고, 내면에는 남자와 여자의 성이 모두 존재하는 자기가 결정한 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커피 시킬 때 섞어서 시키는 것처럼도 아니고, 도저히 적응이 안 된다. 자기 성은 자기가 결정한다며 자기를 소개하고 있다. 인권운동가라며 소개한다. 이것이 인권이라며 포장되고 교육되고 있는 상황이다. 두려운 것은 연예인 트렌스젠더가 공중파에서 처음 나와서 개념들이 판단 없이 등장하고 있고 소개되고 있었던 것처럼 이렇게 소개된다는 것이며, 성에 대한 관념을 바꾸고 일반화 시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남자다움, 여자다움을 왜곡시키고 고정되어 있는 질서를 부정적으로 인식시키는 것이다. 성경적으로 굉장히 위험한 교육이다. 성 정체성을 본인이 결정하는 교육이 현재 인권운동, 성인지 교육을 통해 우리 아이들에게 무차별적으로 들어오고 있다. 이것을 열심히 막고 항의해야 한다. 적어도 찾아보고 알아보고 반대하고 서명이라도 해야 한다. 사사기 시대에 자기 시대에 옳은 대로 행하니라의 하나님의 판단이 그 다음 세대에 내려지는 것을 볼 수 있겠는가? 그 결과에 무서움은 성경은 분명히 말하고 있다.

 

롬 1:27절 하반 절에 보면,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그 죄의 결과에 대해 받게 됨을 선언한다. 그것은 에이즈와 같은 고통일 수 있고, 사회적 고통일 수 있다. 영적인 어려움일 수 있다. 그것이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역리로 산 인생은 반드시 그 상당한 보응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역리의 인생-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신학자들이 이야기 한 것처럼, 인간이 자유의지가 있기에 하나님을 거절하고 역리대로 사는 것을 자유라고 말하지만, 그 거절의 결과에 대해서는 자유 할 수 없다. 인간이 하나님 뜻을 거절하는 것은 자유이나 그러나 그 결과에 대해선 결코 자유 할 수 없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다해 진정 하나님의 순리를 배우며 옳은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이들이 해체하고자 하는 것은 성적인 해체만이 아닌 더 큰 문제는 역리현상은 확정되지 않았지만, 성경은 우리들에게 너무나 심플하고 정확하고 물러섬 없이 이 죄된 모습의 원인을 이야기 한다.

 

*롬 1:25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순리를 역리로 바꾸어 살게 된 이유는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기 때문이다. 라고 성경은 분명히 이야기 한다. 바로 우상숭배이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 설 때에 역리의 인생을 사는 것이다. 우상숭배 중에 가장 핵심은 특별히 자기를 섬기는 것이다. 자신의 안락과 평안과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다. 자신을 위한 신앙행위, 자신을 우상화 하는 것이다.

나 자신이 경배의 대상이 되었을 때 인간이 가장 먼저 하는 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 질서를 우리는 권위라고 말한다. 그들은 모든 질서를 나를 억압하기 위한 장치로 인식하고 그것을 해체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와 나다움을 가르쳐 준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모든 순리적은 권위를 해체하는데, 가정에서는 부모의 권위를 해체하고, 학교에서는 교사의 권위를, 교회에서는 목사님의 권위를 해체한다. 나아가 하나님의 권위를 해체하며 오직 나의 즐거움과 편안함만 남게 하는 것, 그것이 우상숭배이며, 최악의 역리의 인생이다.

 

지난 2017년부터 지금까지 지속적 줄기차게 막아오고 있는 차별금지법은 젠더 교육과 해체주의의 그 맥을 같이 한다. 이대로 언제 어떤 모습으로 통해서든 우리에게 또 들어올 것이다. 그게 핵심인 것이다. 차별하면 안 된다는 말이 너무 포괄적이어서 학생들이 어떤 기분 나쁜 일을 당했다고 생각이 들면, 이 조항으로 문제를 들고 항의하게 된다. 교사들은 이 잘못을 지적할 수 없어진다. 뭔가 모자란 부분들을 지도 편달할 수 없다. 차별해선 안되니까 이다. 누구든지 차별 받는다면 못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동생애를 차별하거나 발언을 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 모든 권위를 해체하고 개인의 감정적 만족을 추구하는 이런 교육 환경들이 점점 제도화되고 있는 것이다. 성별 정체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바뀔 수 있다고 나오고 있다. 이들이 가르치는 개념 속에 하나님이 만드신 거룩한 성에 대한 개념은 한낮 미신의 것과 같이 취급되고 있다. 불평등하고 유해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성경적 진리를 전하는 목회자의 교육은 미신의 것과 같이 치부되고 불평등하고 이 사회의 유해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것은 가정과 교회, 특히 목회자들과 성경의 가치관과 권위를 해체하는데 교육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가장 놀라운 것은 성별을 바꾸는데 가장 큰 역할은 한 사람이 있다. 바로 성전환 수술을 하는 사람이다. 의사이다. 전 세계에서 성전환 수술을 하는 나라가 우리 대한민국이라고 한다. 그것도 부산에 있다. 엄청 많은 수술을 하고나서 인터뷰를 적나라하게 하는데 너무 놀라웠다. 이것은 하나님의 질서를 파괴하는 것임을 아주 끔찍한 장면들이었다. 더 끔찍한 것은 기자가 신이 만든 창조 질서에 어긋나는 것이 아닌가요? 물었더니 ‘신이 창조하는 것이니 교리에 어긋나는 것은 맞지만 신의 실수를 바로 잡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신의 실수를 바로잡는다고,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는데 남자의 영혼을 여자에 몸에 준다는 실수를 반대로 여자의 영혼을 여자의 몸에 준다는 실수를 우리 나라에게만 300명 넘게 실수하셨고, 자기가 바로 잡았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런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은 부모 교사의 권위를 넘어 하나님의 권위까지 해체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서고 있다. 나의 권위는 자신이 결정한다고 하고 역리 중에 역리의 세상이 된 것이다. 세상은 이렇게 바벨탑을 쌓아올리고 있다.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고, 그들의 목표를 하나씩 이루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을 보고 가만히 있어야 하는가? 이것은 정말 진리와의 싸움이다, 저를 목사님이 이렇게 나를 불러 강의하게 하신 것은 사랑의교회에 대한 사랑이며, 다음세대를 위한 애끓는 심정이 불같이 일어나시기 때문이다. 우리 울산 대영교회는 담임목사님이 허탄한데 시간을 쓰는 것을 싫어하셔서 어떤 정책이 일어나는 곳에는 무조건 보내신다. 때로는 하루 종일 걸리더라도 결정되기까지 힘을 싣게 하신다. 중요하게 생각하신다. 한겨울에도 피켓을 들고 함께 저항하고 우리의 의견을 외치는 것이다. 모든 교회가 왜 그렇게 하겠는가? 이게 진리의 문제이며 본질의 문제이자. 다음세대들의 영혼이 달린 문제이기 때문이다. 다음세대를 이런 교육이 우리 아이들을 망치면 안 되니까 절박한 심정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하는가? 원인이 있으면 방법도 있다.
▷먼저는 하나님의 형상을 먼저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질서를 회복하고 최선을 다해서 그 질서를 순복하여 다음세대에 보여주어야 한다.

첫째- 하나님이 주신 내 가정을 귀하게 여겨라.

남편을 존중하고 아내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고,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한다.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영어, 국어, 수학보다 더 중요하다고 가르침을 보여주어야 한다. 어떤 중요한 일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더 중요함을 아이들에게 몸소 보여주어야 한다. 말씀에 순종하는 부모님의 진심을 다한 그 거룩한 모습을 본다면, 그 어떤 세상의 가치관이 다가와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둘째는- 거룩한 믿음으로 끝까지 버텨야 한다.

요즘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잘못된 것을 지적할 수 없다는 것과 권위를 해체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해체주의란? 하나님 권위까지 해체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거룩한 성전인 거룩한 몸을 거룩한 믿음으로 끝까지 견디어야 한다.


*로마서1: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어떤 세상에서도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믿음을 이어갈 때 반드시 살게 될 줄 믿는다. 출애굽 앞에서 기도의 팔을 내리지 않고 모세의 모습에서 나온 ‘에무나’라고 하는 말이다. 도저히 이길 수 없던 상황에서 모세는 그 기도의 두 팔을 내리지 않고 끝까지 기도하여 아론과 훌은 그 팔을 잡고 버티며 기도한다. 이때 가만히 있다. 내리지 않다, 버티다가 ‘에무나’이며, 이것이 믿음이 된 것이다. 가만히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 내 눈을 고정하고, 하나님이 일하심을 버티어 기다린다는 것이다. 다리에 힘을 기도의 팔을 내리지 않고, 어떤 세파가 몰려와도 끝까지 저항하며 믿음의 자리를 지켜내는 것이 에무나 믿음이다. 세상이 아무리 우리를 고리타분하다고, 무식하다고 해도 우리는 진리를 지키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

 

칼빈주의 3대 신학자 중에 한 사람인 -아브라함 카이퍼는 1880년 10월 20일 자유주의 대학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영역주권을 위해 외친다.

인간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리스도께서 ‘나의 것이다.’ 라고 외치지 않은 것은 없다. -아브라함 카이퍼-

이 말의 진짜 뜻은 우리 그리스도인은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질서대로 사회를 변화시킬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뒤로 물러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유혹에서도 모든 영역은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그 질서를 세우기 위한 믿음이 에무나 믿음이다. 그것이 물러서지 않고 버티는 것이다. 그 기도의 팔을 내리지 않아야 한다. 오직 의인은 그렇게 버티는 힘으로 사는 것이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에 동참하고 서명하고 의사를 표출해야 한다. 적극적으로 의견을 게재해야 한다. 우리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 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 하나님의 기준이 나 혼자라도 버티는 자는 오직 의인으로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질서 넘어’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하버드 대학의 교수님이자 세계적인 심리학자, 철학자인 beyond order라는 사람이 낸 책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에는 보수주의, 사회주의 페미니즘을 비롯한 모든 종류의 인종 및 젠더사상, 포스트모더니즘, 환경주의 등의 각종 주의(ism)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일신 교도와 다를 바 없다. 이데올로기가 현실에 적용될 때 지금까지 쌓아올린 지식은 힘을 잃고 환상이 세상을 지배한다.

- 이 말은 무슨 말이냐면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의 교육이념과 싸우고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이념과 싸우는 것도 아니다. 어느 당을 지지하는 것의 하찮은 싸움이 아니다. 지금 주장되는 이데올로기가 이미 신이 되어있다. 그러니까 쉽게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지속적으로 우리 아이들을 젠더 이데올로기, 페미니즘, 해체주의, 성인식, 온갖 것으로 전도할 것이다. 우리가 목숨을 걸고 막아야 한다. 모든 것 중에 가장 뛰어난 복음이 가장 능력이 된다는 것임을 선포하고 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하나님의 능력이라.

복음의 능력이 회복됨을 이야기 한다. 반드시 살리시는 복음의 능력을 이야기 한다.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오직 이렇게 살아낼 때에 역리의 세상에서 오직 믿음으로 순리를 고집해 나갈 때, 그렇게 버티고 대항할 때에 하나님께서 가정과 교회와 나라를 다시 복음의 능력으로 살리실 줄 믿는다.

 

♣요약

다음세대를 위한 애끓는 심정으로 가정을 귀하게 여기고, 거룩한 믿음으로 버텨서 주님의 산 소망을 이루어가야 한다. 다음세대가 역리를 순리가 되지 않도록 신앙교육을 제대로 시키는 부모가 되어야 하며, 우리 아이들을 젠더 이데올로기, 페미니즘, 해체주의, 성인식, 온갖 것으로 전도할 것이기에 우리가 목숨을 걸고 막아야 한다. 모든 것 중에 가장 뛰어난 복음이 가장 능력이 된다는 것을 믿고 믿음 안에서 우리는 거룩한 성전인 거룩한 몸을 거룩한 믿음으로 끝까지 견디어야 한다.


-하나님을 치욕스럽게 만든 자들이 자신들을 치욕스럽게 하는 일에 내버려졌다. 사람이 자신의 정욕대로 하도록 내버려지는 것보다 더 무서운 노예상태에 빠질 수는 없다. 그들의 더러움과 부끄러운 욕심에서 나오는 행위들은 비정상적인 정욕들이다. 그런데, 많은 이방인들은 물론 그들 가운데 지혜 있다고 하는 자들마저도 그런 일들에 악명이 높았다. 아마 사도는 여기서 특별히 그들의 우상숭배를 통해 저질러진 혐오스러운 일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은 추악한 신들에게 드려지는 추악한 예배이다. 인간의 본성에 어떠한 악이 있는가를 보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진정으로 우리의 약한 본성을 억제하는 은혜를 얼마나 베푼 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이 이런 악을 억제하지 않았다면 단지 천사보다 조금 낮게 지어진 인간이 자신을 마귀보다 더 형편없이 낮게 만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것을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게 받았다'고 말한다.

 

 

 

 

                                                                 (성경읽기- 홍균형 박예서 어린이)

 

 

 

*질서너머- beyond or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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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예배(주후 2021년 4월 28일)

제목: "빈 그물도 기적입니다"
말씀: 누가복음 5:1-11
설교자: 이한길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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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5:1-11
1 무리가 몰려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새 예수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서. 
2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9 이는 자기 및 자기와 함께 있는 모든 사람이 고기 잡힌 것으로 말미암아 놀라고.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11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시고 병든 자들과 약한 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을 고쳐주셨다. 예수님의 고향에서는 예수님을 배척하였지만,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전하시는 예수님에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날도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개네 사네 호숫가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본문에 나오는 개네 사네는 필요한 명칭은 갈릴리에 대한 또 다른 이름이다. 이름은 구약 시대의 호수가 마치 피파처럼 생겼다고 히브리어로 비파라는 단어 김 네레 라고 했다. 이것이 바벨론 포로 시대의 당시의 음력을 따서 개네 사례라고 불렀다. 그리고 신약시대에 외서 갈릴리라고 부른다. 마태 마가는 이 호수를 갈릴리 바다라고 했고, 요한은 디베랴 바다라고 했으며, 누가는 개네 사례 호수라고 불렀다. 오늘은 혼용해서 부르겠다. 예수님은 호숫가에 두 배 중 베드로의 배에 올라타면서 배를 해안에서 조금 띄우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지형적으로 배가 조금 떨어져 호수를 등지고 있으면 주님께서 말씀을 전할 때 많은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전할 수 있었기 때문디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를 강단삼아 앉으셔서 무리들을 가르쳤다. 예수님께서 이른 아침 갈릴리 바다에 오셔서 말씀을 가르치고 계시는데 베드로는 일부러 예수님을 피하고 있는 듯하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데, 베드로는 그물만 찢고 있다. 베드로는 4장을 보면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의 집에 찾아 오셔서 심한 열병을 앓고 있는 베드로의 장모님을 고쳐주셨다. 은혜를 베풀어 주신 예수님이 갈릴리에 오셨으니 가장 앞서 예수님의 자리를 마련하고 또 맨 앞자리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자기의 배를 타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함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빈 그물만 씻고 있다. 왜 그랬을까? 베드로의 지금 형편은 몸도 마음도 지쳐서 피곤하다. 낙심이다. 아무것도 없다. Nothing이다. 베드로의 상태는 빈 그물이다. 베드로는 어젯밤 어부들과 함께 게네 사례 호숫가에서 밤새 수고를 하여 고기를 잡았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그리고 이른 아침 씻어야 하는 빈 그물만 가득 채우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어부들은 상업이기에 고기를 많이 잡아야 한다. 베드로는 만선(滿船)으로 돌아와 가족들 친구들과 함께 기쁨을 만끽해야 하는데 빈 그물뿐이다. 강원도에 가보면, 주문진항 거진항 등 항구들이 많이 있다. 그 항구들을 보면 밤새 잡은 고기를 잡은 배들이 부두로 들어와 경매장에 고l를 내놓는 것을 볼 수 있다. 팔짝팔짝 뛰는 고기들을 보노라면 생동감이 있다. 많은 고기들을 내려놓는 어부들도 신이 나고 고기들을 사고파는 사람들도 흥에 겹다. 어부들은 고기를 많이 잡아야 신이 나고 좋다. 그런데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그물질을 했는데 고기는 잡히지 않고 해초류와 쓰레기만 가득하다. 얼마나 힘이 빠지고 낙심이 되겠는가? 지금 베드로의 상황이 이렇다. 밤새 수고한 베드로의 배는 고기로 채워져야 하는데 고기는 없고 피곤과 한숨과 실망과 짜증만 가득히 싣고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고 허탈한 심정으로 어부들과 빈 그물을 싣고 있다. 밤새 수고하여 노력했는데 빈 그물이다. 아무것도 없다. 그들이 너무 힘들어 보인다. 이런 베드로를 예수님이 주목하여 보고 계셨다. 그날 예수님의 관심은 많은 사람들이 아니고 바로 베드로였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배에 오르셔서 배를 무대로 삼아 무리를 가르치셨다. 그리고 말씀을 마치시자마자 고기 한 마리 잡지 못해 허탈하게 빈 그물을 싣고 있던 베드로에게 깊은 곳으로 가서 고기를 잡으라고 명령하신다. 여러분이 베드로라면 어떠하겠는가? 예수님은 목수 베드로는 어부이다. 베드로와 그의 친구들은 갈릴리 바다 게네 사례 호수에서 어부로 잔뼈가 굵은 사람들이다. 베드로는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 잡는 전문가이다. 어떤 시간 어느 지점에 고기가 있는지 잘 알고 있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고기를 어떻게 해야 잘 잡을 수 있는지 노하우와 기술이 있는 대단한 어부였다. 적어도 고기 잡는 일이라면 베드로는 예수님보다 전문 지식과 숙달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베드로 입장에서는 반영하기가 쉽지 않다. 예수님의 명령은 고기 잡는 기본 상식에도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물을 내리라고 하시려면 그물을 씻기 전에 내리라고 하시지 빈 그물을 다 씻어놓고 이제 좀 쉬려고 하는데 그물을 다시 내리라고 하신다. 그것도 말도 안 되는 명령을 하신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명령에 썩 내키지 않는 변명을 먼저 하기 시작한다.


5절을 메시지 성경으로 보면,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시몬이 말했다. 주님, 우리가 밤새도록 열심히 고기를 잡았지만 피라미 한 마리 잡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지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상황종료이며 게임 끝이라고 베드로는 이 말을 하면서 그 다음은 어떻게 해야 하나 곰곰이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 베드로의 답변이 참 멋있다. 베드로는 순종의 결단을 한다. 하지만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니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다고 한다. 훗날 베드로가 인생을 돌아볼 때 이 고백을 생각하면서 자신에게 어떻게 이렇게 멋진 고백을 할 수 있었는지를 아마 머리를 쓰다듬었을 것이다. 베드로가 이 고백을 한 후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띄웠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그물을 내렸더니 고기들이 너무 많이 잡혀 그물이 찢어지게 되었다. 베드로는 동료들에게 도와달라고 손짓한다. 고기를 잡아 두 개의 배에 가득 채웠고 너무 많아 두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었다. 두 배가 도착했을 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무릎아래 엎드려 “저는 죄인입니다. 제발 나를 떠나주십시오”라고 그렇게 간청한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사람 낚는 어부의 사명을 주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예수님의 그 부르심에 베드로는 그토록 바라던 고기도, 만선이 된 배도, 모든 경험도, 물질도, 가장 귀한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랐다. 오늘 본문에 예수님이 베드로를 보며 사명을 맡기시기 위해 기가 막힌 계획을 하셨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위해 어떻게 하시는가? 베드로에게 빈 그물을 주셨다. 갈릴리 바다는 많은 사람들이 생업을 두고 물고기를 잡아 살아가는 수자원이 풍부한 곳이다. 1986년 갈릴리 바다에서 예수님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기잡이배가 발견되었다. 길이는 8.1미터, 폭 2.3미터, 돛을 포함한 4.1미터에 크기로 어부들이 다섯 명이 승선하고 많은 사람들이 탈 때는 열다섯 명까지 탈 수 있는 그런 배였다. 베드로와 친구들은 이런 배를 타고 밤새도록 그물질을 했는데 고기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고기가 많은 갈릴리 바다, 최고의 배, 최고의 기술, 최고의 사람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으려고 최선을 다했는데, 피라미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고기를 잡는 것이 기적인가? 고기를 잡지 않는 것이 기적인가? 고기 잡히는 것인가? 그렇다. 고기가 잡히지 않는 것이 더 기적이다. 갈릴리 바다에서 평생 어부로 살아온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은 기적이다.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시고 세우시기 위하여 자연 만물을 움직이셔서 피라미 한 마리도 잡지 못하도록 하나님께서 먼저 일하셨다. 아마 정신 못 차린 물고기가 베드로의 그물 속에 들어가려고 하면 하나님이 호통치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베드로를 부르시고 맡기시기 위하여 빈 그물을 베드로에게 만들어 주셔야 했기 때문이다. 빈 그물을 베드로를 향한 하나님의 기적이었다.

애굽의 총리였던 요셉을 기억하고 있는가? 요셉은 라엘이 넣은 야곱이 낳은 열한 번째 아들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 했다. 그래서인지 형들은 요셉을 미워했고, 아버지의 심부름을 하던 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팔았다. 요셉은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왕자처럼 살았는데 약 17세 정도의 나이, 가장 민감할 때, 노예로 그의 삶이 바뀐다. 보디발의 집에서 종으로 십년 정도의 노예로 살면서 가정총리로까지 오른다. 그런데 미스에스 보디발의 유혹과 모함으로 감옥에 갇히게 된다. 감옥에서 바로왕의 술 맡은 자들과 떡 맡은 자들을 만나게 되고 그 일로 말미암아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하게 되어 하루 아침에 애굽의 총리가 된다. 열일곱 살에 형들의 미움을 받아 노예로 팔려와 십년의 종살이 3년의 감옥살이였다. 노예생활, 감옥 생활, 요셉에게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아무 소망이 없는 빈 그물 그 자체였다. 그러나 성경은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간 이후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형통한 자가 되고, 라고 말씀하신다. 노예인데 무슨 형통인가! 감옥 생활인데 무슨 형통인가! 요셉은 지금 빈 그물이다. 아니 더 이상 무엇을 잡을 수 없는 찢어진 빈 그물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부르시고 세우셔서 그의 가정과 민족을 살리시기 위하여 일하셨다. 종으로 있을 때는 몰랐다. 감옥에 있을 때도 몰랐다. 그러나 요셉의 빈 그물을 하나님께서 채우시고 하나님의 역사하심 가운데 그를 불러 내셨다. 요셉의 빈 그물은 요셉을 부르시고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이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이었다.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기적이었다.


성도여러분, 때로는 우리에게 다가오는 빈 그물이 하나님께서 부르시고 세우시기 위한 기적이다. 아멘, 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언제나 가득차고 언제나 잘되고 언제나 만사형통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과 하나님의 세우심의 역사 뒤편에는 빈 그물이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한다고 죽도록 노력하는데 그렇게 안 될 때가 있다. 안 되도 그렇게 안 된다. 최선을 다해 기도하고 노력하는데 기적같이 빈 그물만 남는다. 왜 그럴까? 빈 그물 뒤에 가득하게 채워주실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는 것이다. 주님이 주시고자 하시는 풍성한 은혜가 있다. 그러므로 빈 그물 뒤에 역사하시는 예수님이 어떤 기적을 베풀어 주실 지를 기대하기 바란다. 고기를 많이 잡은 것도 기적이지만, 밤새도록 그물질하여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한 더 큰 기적임을 믿어야 한다. 나를 향한 빈 그물이 있었기에 찢어질 정도로 가득 찬 그물이 더 큰 은혜로 다가온다.

 

둘째로 예수님이 베드로를 부르시고 세우시기 위하여 어떻게 하셨는가?
고기를 배에 가득 채우는 기적을 주셨다. 그런데 전제가 있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린 것이다. 베드로는 이른 새벽 피곤한 상실감, 낙심함으로 빈 그물을 싣고 있다. 베드로는 이미 장모님의 열병을 고쳐주신 예수님의 능력을 알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피하는 듯 하였지만 빈 그물을 씻고 있으면서 예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나를 들었을 것이다. 아무것도 없는 빈 그물이 오히려 그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게 됐을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마음이 더 열렸다. 그런데 갑자기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하신다. 아마 베드로가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깜짝 놀랐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부로서 경험과 자존심이 있었다. 그러나 베드로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과 자존심 그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베드로의 생각과 경험에 말도 안 되는 예수님의 명령이지만 “주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겠습니다.”라고 한다. 베드로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니 두 배에 가득차는 기적을 허락하여 주셨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것은 실제가 된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것을 믿음으로 승전할 때, 현실로 드러나게 된다.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시니 빛이 있었다.

 

6절에 보면,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할 때에 말씀이 현실이 되었다. 하나님이 갈릴리의 고기를 모아서 그 그물 안에 다 모아주셨다. 아마 갈릴리에 고기들이 정신없었을 것이다. 밤새도록 베드로의 그물을 피해 다녔는데 이른 아침에는 베드로의 그물에 모두 다 들어가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들의 한계에 갇혀있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의 가진 모든 경험은 무용지물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시면 내 생각과 내 마음과 내 방법에 맞지 않아도 순종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의 순종에 기적을 준비하신다. 우리의 순종에 이미 기적을 예비하고 계신다. 우리가 순종할 때 주님은 일하고 계신다.

 

열왕기하 4장에 보면 엘리사의 제자 중에 아내와 두 아들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난 그의 아내가 엘리사에게 찾아와서 안타까운 이야기를 한다. “선생님, 나의 남편이 죽었는데 채주가 와서 빚을 갚지 않으면 두 아들을 종으로 삼겠다”고 말한다고 한다. 이야기를 들은 엘리사 선지자는 마음이 안타까워 여인에게 묻는다. “집에 무엇이 있느냐”고 묻는다. 여인의 한 병의 기름만 있다고 한다. 모든 이웃들에게 가서 빈 그릇을 빌려오라고 한다. 여인은 할 수 있는 대로 빈 그릇을 빌려온다. 엘리사는 여인과 두 아들에게 방에 들어가 기름을 부어서 차는 대로 옮겨 놓으라고 한다. 여인과 두 아들은 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기름병에 기름을 붓기 시작한다. 끊임없이 기름이 흘러나왔다. 빈 그릇이 하나 둘 셋 넷 ... 계속해서 빈 그릇이 찼다. 모든 그릇에 기름이 차자 기름이 흘러나오는 것이 그쳤다. 엘리사 제자의 아내의 형편은 빈 그물이다. 종으로 팔려가야 하는 상황이다. 그런 상황 가운데 엘리사의 제안은 말도 안되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여인과 아들은 말씀에 순종하여 기름을 붓기 시작한다. 말씀에 순종하여 기름을 부으니 하나님이 가득가득 채워주시는 기적을 허락하여 주셨다.


성도 여러분,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뛰어넘어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물을 내리면 된다. 주의 말씀에 순종하여 빈 그릇을 빌려오면 된다. 그 다음은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하나님이 채워주신다. 빈 그릇에 기름이 넘치도록 하나님이 부어주실 것이다. 기적은 우리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시다. 자신의 한계에 매여 있으면 빈 그물이다. 그러나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기적을 허락하여 주신다. 빈 그릇에 채워질까 의심하면 계속 빈 그릇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빈 그릇을 채워 넘치게 하실 것이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내 생각, 내 지식, 내 경험, 내 자존심, 다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며 생명이기 때문이다. 말씀은 우리의 지식으로 다 이해하지 못한다. 성경은 이해하는 책이 아니다. 성경은 믿음의 책이다. 그래서 말씀이라면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을 때,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다. 그때에 하나님의 기적을 베드로는 현실 속에서 경험하게 되었다. 우리도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기적을 날마다 체험하는 은혜가 우리에게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한다. 말씀을 현실에서 경험하는 은혜가 우리의 삶 속에서 가득 채워지기를 원한다. 예수님을 베드로를 부르시고 세우시기 위하여 빈 그물의 기적을 주셨고, 말씀에 순종하는 채움의 기적을 허락하여 주셨다. 이에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던 베드로가 예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어떻게 되었는가? 옛 모습으로 돌아갔다. 다시 갈릴리로 돌아가 고기를 잡고 있다. 그런데 빈 그물이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도 베드로와 같이 부르시고 사명을 맡기셨다. 그런데 자기 생각, 자기 욕심,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력으로 옛 모습으로 돌아갈 때가 많다. 예수님을 잊은 채 살아간다. 그래서 깨지고 낮아지고 부서진다. 예수님 없으면 우리의 인생은 빈 그물이다. 그런데 빈 그물을 인생을 우리 주님이 다시 찾아오신다.

 

요한복음 21장을 보면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어느 날 갈릴리에 있는 베드로를 찾아오신다.
그날도 베드로와 제자들이 밤새도록 고기를 잡았는데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다. 빈 그물이다. 허탄하게 해안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오른편에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신다. 이번에는 그물을 씻기 전에 그물을 베드로는 내린다. 그때 어떻게 되었는가? 그물을 들 수 없을 만큼 고기를 많이 잡게 되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다시 찾아오셔서 따뜻하게 불을 피워주셨고 숯불고기를 해주셨다. 예수님을 다 만난 베드로가 어땠을까? 베드로는 예수님과 식사를 하면서 아마 가시방석에 앉아있는 것 같이 되었을 것이다. 절대 부인하지 않겠다고 장담해 놓고 베드로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저주하기도 했다. 이런 베드로를 앞에 두고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다. 저 같으면, “베드로야, 네가 인간이냐? 너 같은 것을 믿고 3년이나 훈련시켜 놓은 것이 후회스럽다. 이제 끝이다.”라고 아마 불같이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따뜻하게 식사를 준비해 주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하신다. 베드로가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이 어떤 질문을 하실까를 예상했을 것이다. 베드로가 생각한 전혀 다른 예상 질문을 하신다. 그런 질문을 생각도 못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또 질문하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의 트라우마가 있는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계속 질문하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랑하느냐고 물으신 것은 그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 이상 더 귀한 거시 있다. 상처 나고 깨어진 베드로, 빈 그물이었던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사랑한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뜨거은 사랑고백이시다. 베드로가 빵점이라는 것을 주님은 잘 알고 계신다. 예수님의 면전에서 예수님을 저주(咀呪)하고 부인한 것도 너무 잘 알고 계신다. 그러나 베드로의 연약함, 베드로와 실수와 허물, 베드로의 빈 그물을 모두 덮어버리는 것은 예수님의 사랑이었다. 상처투성이로 빈 그물이었던 베드로에게 치유(治癒)와 회복(回復)을 허락하여 주셨다. 그리고 다시 사명(使命)을 맡기셨다. 성도여러분,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 너의 모습이 어찌하다할지라도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하신다.

 

요한 일서 4장 19절을 보자.
19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우리가 주님을 먼저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우리를 먼저 사랑해 주셨다. 우리가 빵점이고 마이너스 백점이라는 것을 주님이 너무나 잘 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를 사랑하고 용납하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으로 부르시고 용납하시고 세우셔서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맡기셨다. 예수님의 사랑이면 회복이다. 예수님의 사랑이면 빈 그물도 감당할 수 있다. 예수님의 사랑이면 그 어떤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다. 예수님은 사랑이시기에 에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그 모든 어려움과 사명을 감당할 수 있다.

 

예수님은 베드로를 부르시고 세우시기 위하여 친히 찾아오셔서 기적을 베풀어주셨다. 베드로를 위해 이미 기적을 이루고 계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부르심에 순종하지 않고 옛 모습으로 돌아간 베드로를 다시 찾아오셔서 따뜻하게 손 내밀어 주셨다. 그리고 말씀에 순종하는 베드로에게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고 사랑으로 품어주셨다.


오늘도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세우시기 위하여 여전히 기적을 이루고 계신다. 우리도 낙심과 상처로 절망의 빈 그물을 싣고 있을 때가 있다.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으로 옛 사람의 모습으로 살아갈 때도 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다. 주님께서 절망과 실패의 빈 그물을 싣고 있는 우리에게도 친히 다시 찾아오셔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고백하시며 우리를 회복시켜 주신다. 그리고 우리를 품으셔서 주의 일들을 맡기신다. 그러므로 낙심과 절망이 아니라 말씀하시는 주님께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말씀으로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면 된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과 형편이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주신다. 예수님은 기적이 일상이시다. 말씀에 의지하는 믿음의 순종으로 하나님의 기적이 우리의 실제가 되어 지는 은혜가 넘치는 복된 삶이 되기를 소망한다.

 

♣요약
십자가의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고 사랑으로 부르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감을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연약하여 하나님의 영광보다는 나의 기쁨, 하나님의 말씀보다는 내가 주인이 되어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으로 살아간다. 그래서 밤새 수고 하지만 하나님의 참 사랑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빈 그물로 살아간다. 그럼에도 우리를 사랑하셔서 다시 부르시고 따스하게 안아주시는 주님을 이제 의지하여 어리석게 살아가지 말고, 창조주 하나님,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께 순종하여 말씀을 순종하여 말씀이 현실이 되고, 날마다 은혜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들의 한계에 갇혀있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 우리의 가진 모든 경험은 무용지물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시면 내 생각과 내 마음과 내 방법에 맞지 않아도 순종해야 한다. 주님은 우리의 순종에 기적을 준비하심을 믿고, 우리의 순종에 이미 기적을 예비하고 계시니, 우리가 순종할 때, 주님은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고,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기적을 허락하여 주심을 믿어야 한다. 빈 그릇에 채워질까 의심하면 계속 빈 그릇이다. 그러나 믿음으로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빈 그릇을 채워 넘치게 하실 것이다. 언제나 주님의 일에 헌신하는 삶이어야 한다.


        

-본문은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부르신 내용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것은 밤새도록 수고하였으나 허탕만 치고 피곤에 지친 상태로 그물을 씻고 있을 때였다. 인생은 이처럼 자신 있는 분야에서조차 실패와 좌절을 경험하곤 한다. 주님은 이럴 때 우리를 찾아오셔서 가장 귀하고 값진 일에 우리를 불러 주신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얄팍한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를 삶의 심오한 차원으로 초대하는 말씀이다. 우리는 삶의 깊은 곳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살아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를 모시고 사는 것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그 자체가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베드로의 반응은 물고기가 배에 가득히 차자 베드로는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다. 하나님을 만난 죄인은 자기 죄를 회개하고 주의 은총과 자비에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 이때 예수님께서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시자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님을 좇았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고 둘 중 하나를 택해야만 한다. 베드로의 반응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성경의 주인공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사건들은 초점을 예수의 구속에 맞추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언제 어디서나 복음을 전파하셨고, 절망의 인생에게 큰 용기를 주셨으며 믿고 순종하는 사람에게 소망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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