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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1년 4월 24일) - (새벽 6시20분)
제목: “다시 웃다”
말씀: 창세기 18:10-15
기도: 박창준 안수집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권호 협동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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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송 확인: 오정현 담임 목사님.

 

창세기 18:10-15,
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11 아브라함과 사라는 나이가 많아 늙었고 사라에게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는지라.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14 여호와께 능하지 못한 일이 있겠느냐 기한이 이를 때에 내가 네게로 돌아오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15 사라가 두려워서 부인하여 이르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르시되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

 

▶토비새-권호 목사님.

-이 귀한 자리에 말씀을 전할 수 있음에 우리 오정현 목사님과 당회 그리고 성도님들께 감사드린다. 오늘 우리에게 크신 은혜 주시길 축복한다. 오늘 본문에 사라가 어떠한가요? 사라는 웃고 있다. 소리내서 대놓고 웃는 것이 아닌 속웃음이다. 그런데 아주 묘한 느낌을 준다. 왜 사라의 웃음이 좋지 않게 느껴지는가? 내년 이맘때, 아들이 있겠다고 천사가 와서 사라에게 1년 후에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한다. 무려 24년 동안 기다렸던 아들의 출생 소식이다. 사라는 이 놀라운 소식을 천사들과 아브라함의 뒤 즉 장막 문에서 듣고 있었다.

 

*창 18:9-10절에 보면,
9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네 아내 사라가 어디 있느냐 대답하되 장막에 있나이다.
10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
-문제는 사라가 이 축복의 소식을 차가운 웃음으로 반응한다.

12절에, 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약속의 말씀을 전하신다. 그런 사라는 속으로 웃고 있다. 이런 사라의 모습을 잘 안다. 그러나 우리는 사라의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여러분, 익숙한 모습이지만 사라를 너무 쉽게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사라가 이런 차가운 미소를 지었던 이유가 있었다. 먼저 사라는 오랜 기다림이 마음이 지쳐있다.

 

24년 동안 아들을 기다렸다. 약속을 믿고 24년이나 기다렸다. 이렇게 누가 좋은 것을 준다고 해서 오랜 세월을 기다려 본적이 있는가? 5년, 10년, 15년, 계속되는 기다림 우리는 경험적으로 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받을 수 있어도 그래도 너무 기다리다 보면 마음이 지친다. 한 때 지금도 쓰이고 있지만 아주 유용했던 말이 있다. '희망 고문'이라는 말이다. 취업할 수 있어, 결혼할 수 있어, 내집 마련할 수 있어, 언젠가는 좋은 날이 오겠지, 이렇게 믿고 한정없이 기다리다가 어떤 수간 지치고, 마음이 확 깨지고 만다. 그저 더 큰 절망을 맛본다. 사라가 어쩌면 사라가 이런 희망 고문을 받은 심정은 아닌가 생각한다. 여러분은 무엇을 그토록 오래 기다리고 계시는가? 또한 사라의 현재 몸 상태가 이 약속을 이룰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11절에 따르면, 아브라함과 사라의 나이가 많다. 75세 하란을 떠난 아브라함은 현재 99세이다. 사라는 아브라함보다 10세 아래인 89세이다. 사라는 출산이 가능하다는 신체적인 표시인 생리가 이미 다 끊어진 상태이다. 여인으로서 출산의 가능성이 완전히 차단된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사라는 12절에서 자신을 '노쇠했다'~라고 표현한다. 노쇠는 문자적으로 낡았다. 너덜너덜하게 옷이 해어졌다. 이런 뜻이다. wear out!~완전 낡아빠져서 해어진 것이다. 낡아서 해어 빠진 사라, 전혀 출산 가능성이 있어 보이지 않는다.

 

여러분의 몸 상태는 어떠한가?
아프고 나이가 드신 분들은 사라의 현 상태를 이해할 수 있다. 사라의 어려움이 오랜 기다림으로 인한 지친 마음, 늙어서 직면한 육체적 한계, 이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두 가지 외에 사라의 마음과 삶 속에 남아 있는 깊은 상처의 경험도 있다. 창세기 16장에서 아브라함이 86세까지 10여년을 기다려도 도대체 임신이 안 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라는 자기 여종 하갈을 아브라함에게 주었다. 여러분, 여러분이라면 어떠하겠는가? 아브라함은 덜컥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게 남자이다. 분위기 ㅎㅎㅎ~

당시 고대 관습이었지만, 여인으로서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을까를 생각하게 한다. 더구나 하갈이 덜컥 임신하자 사라를 멸시(蔑視)하기 시작한다. 사라는 당시의 상황을 창세기 16장 5절에서 ‘모욕(侮辱)을 받았다.’라고 표현했다. 쉽게 말하면 잊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받은 것이다. 지난 24년 동안 마음은 지쳐있고, 육체는 너덜너덜 시들어 있고, 상처는 깊은데, 이제 와서 1년 후에 아들을 갖게 될 것이라는 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사라에게는 이상하게만 들기는 것이다. 마치 딱딱한 검은 아스팔트 위에 바짝 마른 씨를 쫙 뿌리고, 일년 뒤에 싹이 난다, 열매가 열린다, 라는 격이다. 그래서 사라는 믿을 수 없었다. 그래서 웃었다. 대놓고 웃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자포자기의 웃음, 불신의 웃음을 지었다. 지친 마음, 육체의 한계, 과거의 상처 때문에,,,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지금 무엇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불신의 웃음을 짓고 계시는가? 이 시간 정직하게 그 모습을 살펴보아야 한다. 사라의 불신의 웃음, 그 얼굴이 우리의 웃음, 우리의 얼굴이 아닌가를 바라보기 바란다. ‘하나님!!, 안되거든요?? 제가요? 우리 가정이요? 아이구 우리 다락방이요? 안 되거든요?’ 여러분, 사라의 처지를 보면, 사라의 불신의 웃음이 이해가 된다. 큰 문제가 되는 것 같지 않다. 그러나 사라가 결정적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 이것이 진짜 사라의 문제이다. 사라가 지금 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자신을 찾아오신 하나님, 약속을 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있다. 사라는 하나님을 잊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라를 잊지 않으셨다.

 

*창세기 15장 17절을 보면,
17 해가 져서 어두울 때에 연기 나는 화로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만 찾아오셔서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약속을 했다. 그러기 때문에 남편을 통해 사라는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은 천사의 모습으로 사라를 직접 찾아 오셨다. 본문 9절에서 천사는 아브라함이 아내 이름을 말하지 않았는데 이미 그녀의 이름이 사라라는 것을 알고 있다. 천사는 그 이름을 이미 알고 사라가 어디에 있냐고 묻는다. 이름까지 알았던 천사가 몰라서 물었을 것은 아니다. 방문의 목적이 사라에게 약속을 주려는 것임을 알려 주는 것이다. 여자라는 신분 때문에 장막 뒤에 서서 이야기를 듣고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 대화를 통해서 말하고 있지만 사라가 분명하게 깨닫고 들을 수 있도록 직접 축복의 약속을 전해 주러 온 것을 알려 주는 것이다. ‘사라야, 이제 내가 너를 찾아 왔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라는 찾아오시고 약속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왜? 자신의 한계, 깨진 마음, 시든 육체, 과거의 상처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가운 웃음을 쏟아낸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라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사라에게 찾아오신다. 찾아오셔서 이루어주시는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것을 요구하신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13절에서 지금까지 이 천사의 모습으로 등장했던 자신의 존재가 여호와임을 드러내신다. 드디어 천사의 모습에서 여호와의 모습으로 드러내시는 것이다.

 

*창 18:13, 13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사라가 왜 웃으며 이르기를 내가 늙었거늘 어떻게 아들을 낳으리요 하느냐.

-천사의 모습으로 오셨지만, 그분은 여호와이셨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사라가 잊고 있는 사실,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질문을 통해 강조하신다. 여호와께 능치 못할 일이 있겠느냐? 사랑하는 여러분, 또한 하나님의 약속 앞에 내 깨진 마음 때문에, 이 육체적 한계 때문에, 과거의 상처 때문에,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고 잘못된 웃음을 지었을 때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이런 하나님의 약속 앞에서 불신의 모습을 보이는 것을 사실 목회자들도 많이 한다.

 

※어렸을 때, 믿지 않는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머니는 보살이셨고, 아버님은 장손이시고, 저만 예수님을 믿었다. 중3에서 고1로 올라갈 때, 정말 뜨겁게 주님을 만났다. 그 때 하나님께서 꿈을 주셨다. 어떤 꿈이냐면, ‘내가 너의 모든 삶을 헌신해서 너처럼 방황하는 청소년, 젊은이, 말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의 말씀, 생명의 말씀을 전해라.’라는 말씀의 종이 되라는 꿈을 주셨다. 그래서 열심히 공부하는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집은 더 어려워졌다. 그래서 대학 다닐 때 학비가 없었다. 새벽기도회에 기도를 하면 알겠지만, 하나님은 처음에는 잘 주시는 것 같아도 잘 안주신다. 한 학기 때 마다 꼭 간절히 기도하면, 학기 시작하기 이주 전에 주시고, 정말 간절히 기도하면 한 주 전에 주신다. 그렇게 8번을 가야되는데, 그렇게 4학년 졸업을 앞두고 있는데, 한 번은 아무리 금식을 해도 안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일정 기간이 지나면 학교에서 경고장을 준다. 언제까지 마지막으로 내지 않으면 이번 학기는 무효라고 해서 마음이 슬펐다. 이제 가을 명절인데, 아버지를 도우려고 갔다. 아버지가 그때에 과일 장사를 하셨다. 공항동에서 과일 장사를 하시는데, 그때에 가판을 피고 사과를 팔려고 준 비했다. 공부가 너무 좋은데, 시간이 없으나 아버지를 도와야 했다. 그래서 그때부터 공부를 더해서 유학도 가고 정말 공부를 해서 필요한 하나님의 종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오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영어공부를 지속적으로 열심히 했다. 공항동이니까, 비행기가 확 높이 올라가는 것이 보인다. 한 번은 사과를 다 팔려면 사과를 잘 닦아야 한다. 그러면서 영어공부를 하고 있는데, 한 아가씨가 멋지게 와서 사과의 값을 묻는다. 만원에 8개라고 했더니 한 개 더 달라고 했다. 두 개 더 주었다. 사과 위에 영어책을 보더니 학생이냐고 묻더니 얼굴이 빨개져서 가버렸다. 그 때에 비행기가 또 확 올라가는 장면이었다. 그것을 보면서 하나님께 원망했다. 꿈이나 주시지 말지라고 비웃었다. 쓴웃음을 지었다. 지금 싸늘한 웃음으로 이 사라의 모습이 어쩌면, 믿음 없는 저의 모습,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이렇게 사라는 웃음을 짓는데, 하나님은 이런 사라를 잊지 않으시고 찾아오신다. 그리고 본문에서 약속을 이루어가라는 그 하나님을 바라볼 것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결국 사라는 현실과 부족한 자신을 쳐다보면서 그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래서 떨며 웃지 않았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아니다 네가 웃었느니라.”하신다. 이렇게 하나님과 사라의 대화의 이야기는 끝이 난다. 아쉽다.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갑작스럽게 마무리되는 것 같다. 본문에서 뭔가 냉한 기분까지 느껴진다. 이게 다 사라의 잘못된 웃음 때문인 것 같다. 이제 사라는 어떻게 되는가? 사라의 자포자기, 불신의 웃음으로 한 해가 지났다. 정확히 1년 ‘뒤에 사건이 창세기 1장에 나온다. 창세기 21장에서 신기하게 사라는 다시 웃고 있다. 제목이 ‘다시 웃다’이다. 사라가 다시 웃는다. 그런데 이번 웃음은 18장에 싸늘한 웃음과 다른 느낌을 준다. 사라는 이상하게 환하게 웃고 있다. 아이를 품에 안고 활짝 웃고 있다. 차가운 웃음이 아니다. 따뜻한 웃음이다. 더 이상 속웃음이 아닌 모두가 웃는 웃음이며, 함께 웃는 웃음이다. 계속되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그래서 아이의 이름도 ‘웃는다’는 뜻인 ‘이삭’이다. 이삭이라고 짓는다.

 

*창세기 21:1-2, 6절,
1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를 돌보셨고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사라에게 행하셨으므로.
2 사라가 임신하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기가 되어 노년의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낳으니.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아래 6절을 보라.
6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사실 사라가 환한 웃음, 단번에 웃음을 웃는 것은 단순이 아들을 25년을 기다려서 낳은 아들 때문이 아닌 큰 기쁨의 이유, 진짜 이루어주신 하나님 때문이다. 자신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대로 말씀을 이루어주셨다. 1,2절은 이것을 반복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렇다. 여호와께서 약속하신 것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사라가 웃고, 아브라함이 웃고, 듣는 사람이 다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이 웃음은 하나님께서 만들어내신 웃음이다. 생각해보면 창 18장에 나타난 사라의 첫 웃음은 사라가 스스로 웃었다. 사라가 웃었다이다. 그러나 창세기 21장 6절에 사라의 웃음은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웃음이다. 하나님이 나를 웃게 만드신 것이다. 진짜 기쁨의 웃음은, 진짜 축복의 웃음은, 내가 스스로 웃는게 아니다. 웃는 척 하는 것은 더 아니다. 진짜 축복의 웃음은 하나님께서 나를 찾아오시고, 약속을 이루어 주시므로 나를 웃게 하시는 하나님이 만드신 웃음임을 믿는다. 하나님이 만드시는 웃음이 진짜 웃음이다. 젊은이들이 많이 나왔다. 이들이 세상을 살면서 많이 무너지고, 눈물을 흘린다. 스스로 웃는 척을 하게 된다. 포기하고 싶을 때가 많다. 그래도 기도하면, 새벽기도를 하면, 그 모습대로 그 차가운 현실을 기도하면, 하나님은 찾아오신다. 그러면서 말씀을 영혼을 깨우려면 이 어려운 현실을 말씀으로 믿음으로 이겨야 한다고 하신다. 그것이 훈련이라고 말씀하신다. 우리 아이들이 함께 갈 길이다. 사라를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그때마다 하나님은 찾아오실 것이다. 그 약속을 주시기에 붙들고 아멘 하면서 기도해야 한다. 냉소했던 사라를 하나님은 버리지 않으셨다. 찾아오셨다. 약속을 이루어 주셨다. 사라가 진짜 웃게 하셨다. 그 하나님이 지금 우리에게 찾아오신다. 믿는다. 우리와 함께 계신다. 지금 힘들어도 그러나 인생은 결정적으로 마지막 웃는 자가 승리하는 자이다. 우리 인생을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는 환한 웃음을 바란다면, 지금 찾아오시는 하나님께 나아가야 한다. 내 생각을 내려놓고 내 마음의 찌꺼기를 내려놓고 그분이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들어야 한다. 뜨거운 감사와 믿음으로 살아가야 한다. 하나님이 만들어내시는 환한 웃음이 우리에게 필 것을 믿는다.

 

♣요약
믿지 않는 가정의 자녀가, 스스로 기도하는 청년이, 기도하는 것은 외롭다. 부모가 기도해 주시는 자는 행복한 것이다. 자녀가 방황하고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비웃음이 얼굴에 있더라도 기도하는 부모가 있다면 자녀는 절대 망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진짜 믿음이 있기를 이 자리에서 기도해야 한다. 우리 젊은이들이 우리의 부모가 새벽에 눈물로 기도했듯이 믿음의 4대가 함께 기도하여 돌아오는 기적이 있기를 원한다. 모든 기도가 폭포수와 같은 은혜가 되어 온 땅을 적시는 은혜의 시간이 되고 삶이 되고, 우리 민족, 우리 자녀가 주님을 깨닫기를 기도해야 한다. 사라의 웃음처럼 다시 웃는 자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에 웃는 자 되고, 주님으로 웃는 자 되고, 주시는 참 만족을 주시는 것을 기대하면서 기도해야 한다.

 

-그녀가 아들을 얻으리라는 약속이 반복되고 확증되었다. 여기서 다음 두 가지 점을 생각해 보자.
1)다른 사람들이 일반적인 섭리에 의해서 받는 그러한 축복도 믿는 자들은 약속에 의해서 받게 되며 이 약속이 그 축복을 매우 기쁜 것으로 만들고 확실하게 보증한다.
2)아브라함의 영적 자손들은 약속에 의해 그들의 생명과 기쁨과 소망과 모든 것을 소유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벧전 1:23).

-사라는 이 소식이 너무나 기쁜 것이었으므로 사실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아직까지 그것을 마음으로 믿지 못하였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12절). 이 웃음은 의심과 불신의 웃음이었고 사라가 극복할 수 없었던 중요한 반대 이유는 그녀의 나이였다. '나는 노쇠하였으므로 당연히 아이를 낳을 수 없다." 인간의 불가능성은 종종 하나님의 약속과 대치가 된다. 제2원인들, 곧 자연적인 순리로 불가능할 때 제1원인만을 의지하고 있기란 어려운 일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그녀의 무례한 불신의 표현을 책망하였다(13,14절). 하나님은 그녀의 남편 아브라함을 통해 사라에게 이 책망을 하셨다. 하나님은 그에게 '사라가 왜 웃느냐?' 고 말씀하셨다. 우리의 불신앙과 불신은 하늘의 하나님께 커다란 죄가 된다. 누가복음 1:18에서와 같이 지각을 내세워 하나님의 약속에 반대를 제기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악하게 여기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14절). 사라는 어리석게도 자신의 잘못을 감추려고 애썼다(15절). 사라가 두려워서 승인치 아니하여 가로되 내가 웃지 아니하였나이다. 그녀는 '두려워서'이렇게 거짓말을 하였다. 이때 사라는 자신의 불신을 철회하는 듯이 보인다. 이제 그녀는 모든 상황을 살펴볼 때 그 약속이 자신에 관하여 세워진 하나님의 약속인 것을 깨닫고서 그것을 의심하는 모든 불신의 생각들을 버렸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라는 자신의 죄를 거짓말로 감추려는 죄악적인 시도를 하였다. 잘못을 저지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부인하는 것은 더 큰 수치이다.


 

 

                                                             ★찬양- 이상은, 피아노-변혜린 자매 ★

 

 

                                                                ★ 말씀읽기-강다은, 한혜성 학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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