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溪堂雨後(계당우후) - 백광훈(白光勳)



昨夜山中雨(작야산중우)
前溪水政肥(전계수정비)
竹堂幽夢罷(죽당유몽파)
春色滿柴扉(춘색만시비)

어젯밤 산 속에 비가 내렸으니
앞 시내 지금 물이 불었으리라.
대 숲 집 그윽한 봄꿈 깨어나니
봄빛이 사립문에 가득하구나




백광훈(白光勳):1537년(중종 32)∼1582년(선조 15). 조선 중기의 시인. 개설 본관은 해미(海美). 자는 창경(彰卿), 호는 옥봉(玉峯). 아버지는 세인(世仁)이며, 어머니는 광산 신씨첨청광통(廣通)의 딸이다. 형인 광안(光顔)과 광홍(光弘) 및 종제 광성(光城) 등 한 집안 4형제가 모두 문장으로 칭송을 받았다.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한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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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尹銑)의 추담집(秋潭集)에 실린 나해봉의 한시 감상

 

 

아래 시는 秋潭先生文集卷之六, 詩 五言四律

輓(추담선생 죽음을 애도하는) 羅應瑞 海鳳의 二首이다.

윤선(尹銑)은 1559 (명종14)∼1637(인조15)대의 인물로 자(字)는 택원(澤遠), 호(號)는 추담(秋潭)이다.

관직(官職)은 선조(宣祖)·광해군(光海君) 양대(兩代)에 걸쳐 대사간(大司諫)·대사성(大司成)·도승지(都承旨)·의정부(議政府) 우참찬(右參贊) 등을 역임하였으며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 되었다.

 

丹穴金章備(단혈금장비)/ 단혈의 금장이 준비되면

秋天玉露滋(추천옥로자)/ 옥로가 커지는 가을 하늘이로다.

雄奇西漢賦(웅기서한부)/ 서한부의 웅대하고도 기이한 성루는

淸苦晩唐詩(청고만당시)/ 만당시의 청빈한 기상이다.

命薄身長病(명박신장병)/ 사람 키 때문에 병을 가진 기박한 운명

名高官獨卑(명고관독비)/ 가장 왜소하지만 이름난 고관이도다.

平生同臭味(평생동취미)/ 더불어 동고동락을 평생 하였으니

今日更何爲(금일경하위)/ 어찌 하리까 오늘은

 

 

 

短小能精悍(단소능정한)/키가 작은 것은 능히 날쌔고 용감하고

仍兼術業優(잉겸술업우)/겸하여 뛰어난 음양 업을 가졌구나.

居鄕惟直道(거향유직도)/시골에서의 삶은 도로서 오직 곧아야 하고

行世愼交遊(행세신교유)/사람을 사귀는데 신중하게 행세하니

命薄天何遠(명박천하원)/하늘이 멀다고 어찌 기박한 운명일까

官卑人可尤(관비인가우)/벼슬이 낮다고 사람을 허물하는 것은

同心同病久(동심동병구)/오랫동안 동심 동병이려니

臨挽涕交流(임만체교류)/그대 죽음에 애도하려니 눈물이 교류하네.

 

 

 

만시의 글로 보아 추담은 매우 키가 작았던 것 같다.

만시 2수 모두 작은 키이지만 훌륭한 정치가임을 시사하였다.

 

추담은 예조참의(禮曹參議), 호조참의(戶曹參議), 승정원우승지(承政院右承旨), 좌승지(左承旨), 도승지(都承旨),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 이조참의(吏曹參議)를 하다가 병으로 고향에 내려와 추담정사(秋潭精舍)를 짓고 자연을 즐기면 지냈다.

그 후 50세 때 1608년(선조 41년)에 예조참판(禮曹參判), 이조참판(吏曹參判), 병조참판(兵曹參判), 예조참판(禮曹參判)에 제수되었다.

 

남간공이 1632(인조10)에 수도 서울의 수성금화사 별제와 별좌로 승진한 2년의 벼슬을 하는 동안에 추담과의 인맥이 연결된 듯하다.

 

추담이 1637년에 돌아가시고 남간은 1638년 5월에 돌아가셨으니, 추담을 위한 輓詩 2수가 남간공의 마지막 시 작품인 것 같아 마음이 아련하다. 남간의 25년 선배인 추담에게 보낸 만시가 훗날 추담집에 편집되어 오늘날 다시 후손에게 전해 오니 후손으로서 기쁘기 한량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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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송(重送)-김시습(金時習)

다시 보내며-

昭陽春水漲(소양춘수창) : 소양강에는 봄 물리 불어나고

花岳暮雲濃(화악모운농) : 화악산에는 저문이 구름 짙어간다.

子去復幾許(자거부기허) : 자네 떠나면 또 얼마나 걸리나

碧山千萬重(벽산천만중) : 푸른 산은 천겹 만겹 가리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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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 몸 갈아서 세상 맛에 섞었으니.. 

    송기반(松皮飯) / 함허(涵虛)대사

    拏雲踞石老靑山  (나운거석로청산)
    物盡飄零獨耐寒  (물진표령독내한)
    知爾碎形和世味  (지이쇄형화세미)
    使人緣味學淸寒  (사인연미학청한)

    구름 잡고 돌에 앉아 청산에 늙어
    온갖 잎 다 져도 혼자 견디는 겨울
    네 몸 갈아서 세상 맛에 섞었으니
    그 맛 따라 이 맑은 추위 알게 하는 소나무

    함허(涵虛)대사가 지은 송기반(松皮飯)
    소나무의 속껍질을 말려 갈아 쌀에 섞은 밥이다.
    흉년의 끼니를 때우는 먹거리이지만
    이시는 오히려 이러한 먹이를 미화시키고 있다.
    그것은 먹거리의 소재가
    소나무이기에 이 소나무의 청청함이 먹는 이에게도
    청정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기구나 승구에 있어서의 늙은 소나무의 기상에서 배우는
    겨울철의 고고함은 일반적 시인에게 있어서도
    읊을 수 있는 상상이지만,
    전 결구에서의 문학적 재치는
    역시 선사로서의 사물관이라 할 수도 있겠다.

    서리 모르는 고고한 맛을 세속의 곡식 맛에다 섞었다 하였으니
    이쯤되면 선사의 자리에서 분연히 속인의 자리로 내려앉은
    큰 자비의 몸가짐이기도 하다.
    속인들에게 이 맑고 싸늘한 청빈을 맛보게 한다 하였으니,
    이 고고한 소나무의 향내음을 선미(禪味)로 대체한 것이다.

    여기서는 청한을 배우게 한다(學淸寒) 하였지만
    이는 세인들에게 가르치고자 하는 마음을
    자신에게로 돌려 배운다 하였으니
    역시 스님으로서 되비침이요 겸손이라 하겠다.

    이렇듯 이 시는 송기밥이라는 소재로야
    누구나 할 수 있는 표현인 듯 하지만
    스님으로서 대중교화가 몸에 매이지 않고서는
    쉽게 이루기 어려운 한 편이다.
    형체를 갈아부순다 함이 바로 자신을 부숴
    대중을 일깨울 수 있다는 큰 자비의 마음이다"
    그것을 세상 맛에 섞는다 하였으니,
    이 부숴진 몸이 세속의 몸이 아님이 분명하다.
    진리의 깨달음으로 세속의 모든 맛을
    깨달음의 맛으로 변화시키려 하는 것이다.

    대중구제를 자신의 몫으로 포옹하는 선사의 모습이 역력하다
    ▣ 함허 득통(涵虛得通)선사 1376~1433 ▣

    스님의 휘(諱)는 己和요 호는 득통(得通)이며 舊名은 守伊고 舊號는 無準이다.
    함허는 자모산(지금의 황해도 평산군 成佛山) 연봉사에 머물면서
    거실의 당호를 함허라 했기 때문에 생긴 별호이다.
    스님은 고려 禑王 2년(1376)에 중원(지금의 충주)에서 劉民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諱는 聰이고 벼슬은 典客寺事이며 어머니는 方氏이다.
    스님의 모친은 오랫동안 아들이 없어서 대성자모 관세음보살에게 기도를 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스님은 아이들과 함께 장난하고 놀 때에도 보통 아이들과 달랐으며
    泮宮(성균관)에 나아가 공부할 때에는 하루에 수천 어를 기억하고
    조금 자라서는 一實의 道를 깊이 통달하였다고 한다.
    守伊는 21세가 되었을 때 同館의 벗이 죽는 것을 보고
    세상의 무상함과 봄의 허망함을 알고 두가지 생사(범부의 생사와 성인의 생사)를 
    벗어나 부처님의 열반을 구하며 도를 넓혀 四恩을 갚고 덕을길러
    三有에 이익(資)을 주고자 출가를 결심하게 된다.

    그는 관악산 의상암에 가서 머리를 깎고 병자년(1396)에 승려가 되었다.
    이듬해 丁丑年 이른 봄에 처음으로
    회암사에 가서 왕사 무학 妙嚴尊者를 만나 친히 법요를 들었다.
    이 인연으로 스님은 임제종 계통으로 제21세손이며 나옹 밑으로 제2세가 된다.

    병술년(1406) 여름에
    스님은 공덕산  대승사에 들어가 을축년에 이르기까지
    4년동안 반야(금강경)의 강석을 세 번 베풀고,
    경인년 여름에는 천마산 관음굴에 들어가
    覺樹[보리수]의 현풍을 크게 떨쳐 인연 있는 사람들을 모두 교화시켰다.

    또 스님은 신묘년 가을에 불회사에 가서 3년동안 결제하며 절을 수리하고
    여러 불자들을 모아 조풍을 드날렸다.
    갑오년(1414) 3월에는 자모산 연봉사에 가서 조그마한 방 하나를 정하여
    함허당이라 이름하고 3년 동안 수행을 부지런히 했다. 그 후로
    스님은 정유년에서 무술년까지 한 겨울 두 여름동안 [금강경오가해]의 강석을 베풀었다.

    이때 [오가해설의]가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이후로 반야의 강석이 있었다는 기록이 없을 뿐만 아니라
    스님의 나이 40여세로 반야사상이 완숙되었을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 뒤로는 경계에 얽매이지 않고 언제나 수행하되 마음대로 자유자재했다고 한다.

    스님의 세수는 58세이며 법랍은 38년이다.
    문하에 文秀 · 學眉 · 達明 · 智生 · 海修 · 道然 · 允悟 · 允澄 등이 있다.
    스님의 저서는[涵虛得通和尙語錄]에 보면 [圓覺經疏] 3권,[般若五家解說誼] 1권,
    [永嘉集說誼][顯正論] 1권, [般若懺文] 2질,[綸貫] 1권,[涵虛序] 1권,
    [對靈小參下語][倫釋質疑論]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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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소사행/李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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