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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4년 7월 21일)
제목: “임재, 항상 그곳에 계신 하나님”(1,2부), “은혜 속으로”(3,4부)
말씀: 에스겔 48:35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대표기도: 이선복 부목사님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
 
설교자:
-김학진 목사님(1,2부-“임재, 항상 그곳에 계신 하나님”),
-윤대혁 목사님(3,4부-“은혜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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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겔 48:35,
35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베드로후서 1:2-4,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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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학진 목사님(1,2부-“임재, 항상 그곳에 계신 하나님”),
할렐루야 반갑습니다.
저에게 사랑의 교회는 마음의 영적 고향 갈릴리와 같은 곳입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돌아오면 마음의 위로가 있고, 포근한 사랑과 격려가 있는 친정집과도 같습니다. 제가 200년부터 2009년까지 이곳 사랑의 교회에서 사역할 수 있었던 시간은 저게 가장 큰 영광의 시간이었습니다. 특별히 오늘 여러분과 함께 예배를 드리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나눌 수 있다. 라는 것이 저에게는 너무나 이는 너무나 큰 영광이고 기쁨입니다.
 
이 귀한 강단을 허락해 주신 사랑하고 존경하는 우리 오정현 담임 목사님과 당회, 그리고 교회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표합니다. 저는 제가 섬기고 있는 뉴욕 장르교회에서 벌써 7년차가 되었습니다. 교회에서 배려를 해주셔서 2개월 좀 넘는 시간을 안식월로 이렇게 허락해 주셔서 잠시 한국에 나오게 됐습니다.
 
하나님 이 기간 동안에 혹 하나님께서 말씀을 증거 할 수 있는 영광의 시간을 주신다면 무슨 말씀을 전할까요? 그런 마음으로 기도를 했는데요. 하나님께서 제 마음속에 주신 감동의 말씀이 오늘 저와 여러분이 함께 읽었던 이 에스겔서가 가장 마지막 절 말씀이었습니다. 특별히 저에게는 개인적으로 지난 2~3개월 동안 저에게 가장 큰 위로가 되었던 그 약속의 말씀이었거든요. 바라기는 오늘 전하는 저나, 듣는 우리 서울 사랑에게 모든 성도님들, 제가 받았던 하늘의 위로와 그 평안보다 더 큰 은혜를 받는 이 시간 그리고 돌아가신 시간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하고 소망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이 땅에서 신앙생활 하면서 언제가 가장 힘드세요? 언제가 가장 힘든 시간이십니까? 저는 하나님의 임재성에 대해서 의심이 생기는 그런 시간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무슨 말일까요? 하나님 분명히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믿는데 그런데 이런 질문이 생기는 것이죠. 과연 하나님이 정말 나와 함께 계시는가? 라고 하는 에 그 정도로 참 아린 가슴, 아픈 가슴, 긴 터널을 지나가는 듯한 그런 시간이 가장 힘든 시간이 아닐까 생각을 합니다.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힘들어하는 것은 믿음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서 별로 나와 힘든 것과 연결시키지 않죠. 그렇지만은 하나님을 정말로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이 부분이 정말 힘든 부분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 우리는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정말로 선하신 하나님이라는 것, 믿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라는 것을 우리가 믿죠. 그런데 왜? 그런데 내게 왜? 또 어떻게 나에게 이런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시간들이 주어지는 것일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어떻게 저런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기는 것일까? 등등, 이런 시간들이 실질적으로 믿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참으로 힘든 시간이 아닌가 생각을 합니다. 참 그런 차원에서 볼 때, 오늘 이 본문 말씀은 실은 에스겔서의 결론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 속에 이러한 아린 질문들에 대한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통찰(通察)력이 있고요. 그리고 무엇보다 귀한 믿음의 에스겔의 신앙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신앙의 결론이 될 때에, 우리의 모든 질문들이 주안에서 평안함으로 해결될 줄로 믿는 것입니다. 자, 오늘 이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 보면은 이런 말씀 아닙니까?
 
*에스겔 48:35,
35 그 사방의 합계는 만 팔천 척이라 그 날 후로는 그 성읍의 이름을 여호와삼마라 하리라.
-이 말씀을 조금 더 이해하기가 쉬운 우리 현대인 성경 버전으로 보게 되면 이렇게 번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의 전체 둘레는 약9.5킬로미터이다. 사람들은 그 성을 여호와께서 계시는, 여호와께서 계시는 성이라 부를 것이다. 말씀했습니다. 에스겔서는 전체 48장이나 되는 예언서(豫言書)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말씀 아까 말씀드린 거와 같이 가장 마지막 절 말씀이고 결론의 말씀입니다. 에스겔 선지자에 있어서 개인적으로 이 마지막 말씀은 긴 그의 눈물에 신앙의 여정(旅程)을 결론짓는 그리고 결론으로 신앙 고백, 귀한 말씀인 것입니다. 그는 ‘여호와 삼마’라고 하는 이 하나님의 귀하신 그 이름을 기록하면서 에스겔서를 마무리합니다. ‘여호와 삼마’ 성경에 처음으로 등장하는 하나님의 거룩한 약속의 이름이죠. 여러분 ‘삼마’라고 하는 이 뜻은 영어로 말하면 데얼(There), ‘그곳’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히브리어로 삼마는 그곳이라고 하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직역한다면, ‘그곳에 계시는 하나님’ 그래서 오늘 말씀 제목이 임재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것이죠. 그곳에 계시는 하나님, 이렇게 어 제목을 다룬 곳입니다. 여러분 이 에스겔 선지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에스겔서를 기록하고 특별히 마지막 부분에 있어서 그의 신앙의 고백 결론으로 이 말씀을 하는 것에 대한 무게라고 할까요?
 
그 무게를 우리가 좀 더 알려면은 이 에스겔 선지자라고 하는 개인에 대한 뒷배경, 그거 어떠한 역사 어떤 배경 가운데에 있었는가, 또 그런 부분들을 우리가 좀 알 때에 에 좀 더 우리가 아 이 말씀의 은혜의 무게를 알 수 있는 것인데, 자 성경은 실은 이 에스겔이라고 하는 개인에 대해서 많이 기록돼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에스겔서, 여러분 처음 등장하는 1장 첫 구절인 1절부터 3절까지를 보게 되면은, 어느 정도 아 이런 시기에 에스겔 선지자가 존재했고, 아 이런 일을 그가 당했고, 아 그는 이러한 개인적인 뒤 배경에서 자라났구나, 아 그래서 이러이러한 사명과 소명이 있었던 자였구나, 라는 것을 알 수가 있어요. 자 우리 그러면은 에스겔서 우리 1장으로 한번 돌아가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읽어드릴게요. 1절에 보니깐,
 
*에스겔 1:1,
1 서른째 해 넷째 달 초닷새에 내가 그발 강 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서른째 해, 넷째, 딸 초닷새해라고 시작을 합니다. 자 여기서 30째 해라고 하는 것은 에스겔 선지자의 나이를 말하는 것이에요. 나이, 에이즈 오브 더 리브(Age of the live) 그러니까는 그가 30세 되던 해에, 이렇게 여러분께서 이해하시면 쉽겠습니다. 그가 머물었던 곳입니다. 내가 ‘그 발 강가’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발 강가는 바벨론 어느 한 외지에 있는 강의 이름입니다.
 
사로잡힌 자 중에 있을 때에, 그러니까 너무나 쉽죠. 에스겔이 바벨론 포로가 되었어 그발 강가라고 하는 그곳에 이렇게 거하게 된 노예(奴隸)로 거하게 된 그때를 말하는 그의 나이가 그때 30세였다. 이렇게 우리는 볼 수가 있는 것이죠. 조금 더 역사적인 배경을 2절에 말씀합니다.
 
*에스겔 1:2,
2 여호야긴 왕이 사로잡힌 지 오 년 그 달 초닷새라.
유다 왕의 이름이죠. 여호와 긴 왕이 사로잡힌 지 5년 그달 처닷새라. 여호와긴 왕이 정확하게 BC 597년에 에스겔과 많은 유다 백성들이 바빌론에 의해 가지고 포로로 잡혀가서 그 발 강가로 끌려가는 것이죠. 그래서 여호와긴 왕이 잡혀서 함께 당신도 이 그발 강가로 노예로 끌려온 지 5년이 지난 해였다. 5년의 지난해였다. 그러니까 그가 25살 정도에 포로로 잡혀 와서, 5년 정도 그곳에 지내면서 30세가 되던 해에 어떤 일이 벌어졌다고 그러는 것이죠. 하늘이 열리며 하나님의 모습이 내게 보이니, 하나님의 놀라운 살아있는 말씀이 하늘이 열리면서, 그에게 소명과 사명과 비전과 예언의 말씀이 임한 것입니다. 자 3절을 보게 되면,
 
*에스겔 1:3,
3 갈대아 땅 그발 강 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그의 뒤 배경에 대해서 어떻게 자라난 패밀리 백 그라운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대아 땅 그 발 강가에서, 여호와의 말씀이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그러니까 제사장 가정 레위 지파 가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인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제사장 부시라고 하는 분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부시의 아들 제사장 나 에스겔에게 특별히 임하고 여호와의 권능이 내 위에 있으니라. 라고 말씀하고 이 당시 비슷한 연대였죠. 이 남유다 이스라엘 가운데 미래가 촉망이 되는 두 청년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다니엘’이라고 하는 청년이었어요. 다니엘은 에스겔과 받은 소명과 사명의 결이 좀 다릅니다. 둘 다 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정말 귀한 믿음의 청년들이었지만 다니엘은 제사상 쪽이 아니죠. 다니엘은 신앙이 정말 좋았지마는 다니엘은 정치가 쪽입니다.
 
요즘 말로 말하면, 아주 탁월한 평신도로서 이 정치 계열의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는 지혜로운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애하는 그러한 능력 있고 탁월한 자였었어요. 에 그래서 그는 느브갓네살 왕이 있는 왕궁 쪽으로 아 그가 인제 잡혀가게 되고 이 에스겔은 이제 제사장 결이에요. 그러니까는 미래의 촉망이 되는 청년이었는데, 이 사람은 우리말로 말하면, 미래의 좋은 목사 감이에요. 저 목사감, 그러니까 이 교회와 세상 얼마나 중요합니까? 하나님의 나라 차원에서 볼 때에 이렇게 참 촉망(囑望)이 되는 기대가 되는 그러한 청년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이 에스겔이에요.
 
우리는 다니엘 하면은 워낙 다니엘 12장을 통해서 주일학교 잘 다니신 분들이라면 얼마나 스펙티컬하고 자꾸 용어가 나옵니다. 죄송합니다. 스펙테컬하고, 이 표현이 이것밖에 안 돼요. 제가 예 얼마나 우리 에피컬한 그런 스토리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다니엘 하면은 아 이런, 이런 사건들을 통해서 다니엘이 어떤 인물인 것을 알지만은 에스겔에 대해서는 우리가 잘 알지 못하고, 적어도 우리가 이 정도만 보더라도 에스겔이 참 귀한 청년이었구나, 미래의 이스라엘의 영적인 모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얼마나 중요해요. 이런 모든 영적 일에 참 준비된 자였구나,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죠.
 
민수기 4장에 보게 되면, 레위지파에서 자라난 제사장 가정에 자라난 자녀들, 특별히 아들들은 어렸을 때부터 이제 어깨 너머로 아버지가 하는 이 성전에서 봉사한 모든 일들을 보고 배웁니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어떻게 섬겼는지에 대해서, 그런 어떤 영적인 그런 가문 가운데에 레기스가 있어요. 그 에스겔도 어렸을 때부터 솔로몬의 영광스러운 그 성전 가운데 언젠가는 나도 저렇게 아버지와 같이, 할아버지와 같이, 거룩한 의복을 입고 하나님을 섬기겠구나, 이것이 내가 받은 소명이고 사명이구나, 그런 떨리는 가슴, 두근거리는 가슴, 어떻게 보면 기대하는 마음으로 그 어렸을 때부터 잘 자랐을 거예요. 훌륭한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격려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래서 보면서 아 이런, 이런 부분들은 하나님 앞에 내가 더 정결하게 나아가야 되겠구나. 그리고 이 민수기 4장에 또 보게 되면은 25살이 될 때부터 우리말로 말하면 전도사가 될 수가 있어요. 거룩한 의복을 입고, 정으로서는 아니지만, 부로소 성전을 섬길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30세가 되면은 이제는 정식으로 정이 되어서 제사장 모든 역할들을 감당할 수 있는 준비된 자로 사역을 하기 시작한 것이죠. 목사가 되는 것이죠. 당연히 목사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이제 25살,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전을 위해서 내가 사역을 할 수 있겠구나. 라고 하는 그 기대감이 하루아침에 무너져 버립니다. 그의 순수하고 맑은 거룩한 그의 눈빛 눈에서 보여주는 사건들은 그렇게 영광스러웠던 솔로몬의 전이 불에 타고, 거룩한 괴물들이 짐승과 같은 저 바빌론의 고악스러운 손길에 의해서 다 빼앗기고, 허리 큰 하나님의 백성들이 죽어 나가고, 이런 비참한 일들을 에스겔 순수한 그 25살에 목도(目睹)하게 된 거예요. 현실은 여호와긴 왕과 함께 잡혀서 그 발 강가로 던져지게 됩니다.
 
그렇게 1년, 2년, 3년, 4년, 5년 서러운 시간들을 보내는 것이죠. 그 당시 여러분 이 시편 137편 1절과 몇 구절을 보게 되면은 참 우리가 아 좀 이렇겠구나, 서럽겠구나. 라고 하는 그 마음을 느낄 수가 있죠. ‘우리가 바벨론의 여러 강변 거기에 앉아서 시온을 기억하며 울었도다.’ 그때 그 당시에 상황의 모습이며 이는 우리를 사로잡은 자가 거기서 우리에게 노래를 청하며 노래를 청하며, 우릴 황폐하게 한 자가 기쁨을 청하고, 자기들을 위하여 시온의 노래 중 하나를 노래하라 함이라. 여러분 상상이 됩니까? 야 너희들 히브리 찬송가 있잖아. 18번 불러봐 당신들의 기쁨을 위해서 술에 만취가 되어, 농락하는 그 어조로 자신들의 기쁨을 위하여 찬성을 부르래요.
 
저와 여러분이 그 상황 속에 누워 있었다면은 마음이 어땠을까요? 그래서 4절에 보니깐 우리가 이방 땅해서 어찌 여호와의 노래를 부를까? 좀 아르덴티파이(Identityify)가 되죠.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하늘의 문을 열어주시고 에스겔에게 귀한 말씀으로 함께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이 임하기 전까지는 에스겔의 마음 깊은 곳에 아린 마음속에 한 가지 질문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호와 삼마 하나님은 과연 살아 계시는가? 5년 전 트라우마와 같은, 도저히 믿기지 않는 모든 눈을 감을 때마다 나임 미호와 같이 계속 나타나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그 일들 가운데에, 여호와 삼마, 하나님은 과연 그곳에 계셨는가? 내가 믿는 하나님, 내가 포기할 수 없는 하나님, 분명히 나를 사랑하사 집합 가운데 태어나게 해주시고 비전을 주시고 소명을 주시고 사명을 주셔서 정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겠다고 하는 나에게, 단 한 번도 성전을 제대로 섬길 수 있는 기회를 다 앗아 가버린 그 사건을 놓고 과연 하나님은 그때 그곳에 계셨는가? 질문 있지 않겠어요.
 
그리고 그 하나님은 지금 나와 함께 계시는가? 도대체 나에게는 어떠한 영적 존재 가치가 한 가닥이라도 남아있는가? 나는 뭐 하면서 사는 것이지, 뭘 위해서 살아야 되는 것이지. 여러분 좀 느껴지나요? 저는 이 말씀 북상하면서 너무나 너무나 너무나 은혜를 많이 받았어요. 바로 그때에, 하나님이 하늘의 문을 열어주시고 권능의 말씀으로 ‘나 살아있다.’ 약속에 미래에 영광스러운 회복의 비전에 계시의 말씀을 그래서 에스겔 선지자가 보았던 여러 환상들 예언의 말씀들이 있지만 때로는 왜 심판을 받아야 되는지, 다 사랑의 음성이죠.
 
특별히 그가 보았던 이 환상 중에 분명한 귀한 환상은 여러분 잘 아시는 대로 하나님의 백성들이 회복되는 것이죠. 그리고 성전 이 무너진 성전이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전으로 회복이 되는 그 놀라운 비전을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주신 것입니다. 마른 뼈와 같은, 하나님의 백성들, 두 손을 다 늘어뜨리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누워 있고 자빠져 있고 아무 힘도 발휘 못하는 과연 저들이 살겠는가, 인자야 저들이 살아날 수 있겠는가, 하늘의 생기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심령 속에 불어 들어가죠. 힘을 얻고 강력한 하나님의 군대로, 일어서는 환상을 보았어요.
 
그리고 그 성전 가운데에 성소로부터 흘러나오는 생수와 같은 그 물들이 범람(汎濫)하고 범람해서 47장에 나오죠. 발목에 찼다가 무릎에 찼다가 허리에 찼다가 도저히 헤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성전에만 머무는 것이 이것이 성전 밖으로 흘러가서 가는 흘러가는 곳곳마다, 모든 생물이 살아나고 흘러가는 곳곳마다 열매를 맺고 흘러가는 곳곳마다, 가는 곳곳마다 물이 바다 덮음과 같이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살아나는 놀라운 이 회복의 영광을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주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이 일이 이루어졌을까요? 안 이루어졌을까요? 이루어졌죠. 누가 오시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므로 이루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우리가 갈 천국을 가지고 오신 것이 아니라, 물론 구원을 통해서 죽음은 천국까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구약에서 말쿠트라고 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이 바슐레라고 하는 신약에서의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으로, 예수님 자체가 하나님의 나라의 왕으로서 오신 것입니다. 죽어서 가는 천국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의 삶에 왕이 되어 주시고 주인이 되시므로 말미암아 내 삶 자체가 어떤 상황이든지 간에 상관없이 이미 천국이 되는 놀라운 은혜를 가지고 오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하나님의 모든 약속의 성취로 예수님이 오신 것이죠.
 
그래서 이 구약에서 예수님의 탄생을 놓고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인데 이름을 뭐라구요?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왜 임마누엘이라고 할까요? 여호와 삼마, 하나님의 약속에 성취, 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실체고, 보고 만지고 듣고 우리의 모든 아픔, 고난, 배고픔, 육신의 질병, 이 땅에서 겪는 모든 억울함, 거절감 이 모든 것이 예수님이 홀로 다 담당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그래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주신 것이죠. 파라클라이토스 파라 곁에 내재하셨어요. 예수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절대로, 절대로 떠나지 아니하시는 그 성령님이 위로자가 되어 주시고, 그 성령님이 우리에게 상담가가 되어 주시고, 흔들릴 때마다 능력이 되어 주셔서, 내가 너와 함께한다. 함께한다. 함께함을 증거 해주고 함께함이 실체가 되도록 성령 우리에게 보내주신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모든 자들에게, 내 교회를 세워오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길 수가 없는 물론 우리의 육신의 생명은 순교를 통해서도 죽을 수가 있고, 암에 걸려서 우리가 일찍 세상을 떠날 수 있지만, 우리의 영혼은 절대로, 절대로 뺏어갈 수가 없는 그러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신앙이 저와 여러분의 어떤 상황 가운데서 결론이 되는 믿음의 고백 신앙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때, 그때도 계셨습니다. 지금도 계시고 영원토록 함께 계십니다. 믿으시면 안면해주십시오. 현실은 어때요? 절대로 쉽지가 않죠. 예 우리 다 믿지만 현실은 쉽지가 않습니다. 제가 1984년도에 전도사가 됐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캠퍼스 사역하고 열심히 달려와서 달려와서 달려와서 올해가 몇 년도죠 2024년인가 몇 년 됐습니까? 40년이 됐어요.
 
저도 나름 주의 종으로 헌신해서 40년 됐어요. 살기 점점 갈수록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어떻게 이렇게 잘하세요. 왜냐하면, 그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더 크기 때문에 감당하라고, 감당하라고 감당을 주시는 십자가 더 무겁구나, 무겁구나 하는 것을 많이 깨닫습니다. 아무튼 40년 동안 달려오면서 깨달은 진리가 하나 있는데, 많은 사람들을 만났거든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났죠. 더군다나 서울 사랑의 교회의 10년 정도 사역하면서 얼마나 많은 분들을 만났고, 저의 전도사 사역부터 우리 학생들 지금은 다 어른들이 되고, 예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야 뒷문으로 들어가면 기가 막힌 기도 제목이 없는 가정에 단 한 가정도 없구나!!! 라고 하는 것이에요. 뭐 저를 포함해서 모두가 다 그렇습니다. 저도 오늘 예배 바로 오기 전에 너무나 들으면 안 되는 소식을 또 가정 가운데 들어서 걱정하더라고. 설교하는 데 지장이 될까 봐, 바로 오늘 아침까지도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거예요. 개인적으로 현실이 그렇습니다. 여러분 그래서 현실은 쉽지 않겠지만, 이 신앙이 절대로 저와 여러분의 결론이 되는 여호와 삼마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하는 것입니다.
 
1956년이요. 미국 전역, 특별히 시카고가 가장 핫 이슈가 되었죠. 미국 전역에 큰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짐 엘리엇이라고 하는 아주 신실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준비된 청년이었죠. 그와 그의 베스트 프렌즈, 하나님의 나라에 100프로 헌신을 하고 이 4명이 전체 5명이 에콰도르라고 하는 여러분 잘 아시죠? 이 내용 아오카 족속에게 미전도 족속에게 이 부족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너무나 많은 시간 동안 준비를 하고, 기도로 그리고 그들에게 나아갔던 자들이었어요. 이미 잘 하시는 대로 그들의 경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그들에 의해 가지고 비참하게 창에 찔려 단 한 마디도, 단 한 번도, 한순간도, 복음을 전하지 못한 채, 비참하게 창에 찔려 여기저기 5명의 전체 다 죽게 된, 이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언네세서리 웨이스트다. 얼마나 불필요한 낭비인가? 비아냥 하고, 시카고 이 뉴스 페이퍼 헤드라인에는 그렇게 저희들의 무모한 선교를 비판하는 기사의 내용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에 하나님 의심하게 된 것이죠.
 
그럴 만한 것이 다른 친구들도 너무나 탁월한 친구들이었지만, 특별히 짐 엘리엇이라고 하는 이 친구는 재능도 많고, 은사도 많고, 탁월한 친구들이었어요. 아 짐 앨리엇 친구는 위튼 명문대학에서 수석으로 공부를 했었고, 또 수석으로 졸업한 친구였어요. 탁월한 연설가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정말로 사랑하고 경외하는 그런 청년이었어요. 그가 연설을 하면은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고 그가 살아 있었더라면 빌리그레함을 능가하는 최고의 전도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말할 정도로,, 그러니까 정신적으로도 육신적으로 강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레슬링 스포츠가 굉장히 어렵거든요. 레슬링, 강인한 사람이어야지만 감당하는데 이 디비전 챔피언까지 갔던 친구였어요. 레슬링으로서, 얼마나 참 감동 있게 글을 잘 썼는지, 지금도 그가 쓴 글들이 이 파블릿 시대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야 도대체 젊은 이 친구가 어떻게 이렇게 깊은 영성을 가지고 이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쓸 수 있을까? 그의 저널을 보고 다들 놀래요. 이랬던 짐 엘리엇, 미래가 촉망이 되는 짐 앨리엇, 그리고 그의 4명의 친구들 단 한 번도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저희들이 비참하게 죽어난 것이고. 그러니깐 언 내세서리 웨이스트다 그 5명의 얼굴을 한번 보시겠어요. 제가 사진 카톡을 준비했는데 나오죠? 예 라지얼 유 더 리온 페이트 플레이미 가운데 짐 엘리엇, 네이트 세인트 또 네이트 세인트 간증했어요. 나중에 애드 맥컬리 다 훌륭한 친구들 인상들 좋죠? 예 저 5명이었습니다. 내려주시죠. 그들은 총들이 있었어요. 죽는 순간에까지도 단 한 명도 총을 잡고 있는 사람이 없었어요. 반항하지도 않고 죽어나간 것이에요. 근데 가장 좀 힘들었던 부분은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이 사건을 해석하느냐에 있었어요. 문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의문을 품었으며, 어떤 의문이요. 네, ‘여호와 삼마,’ 하나님에 대한 의문이었습니다.
 
과연 하나님이 그 자리에 계셨는가? 계셨더라면 또 살아계신 하나님이라면, 전능하신 하나님이시고 선하신 하나님이라면, 분명히 저희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이라면, 어떻게 저렇게 비참하게 단 한순간도 복음을 전하지 못한 채 죽어가도록 무능하게 내버려 둘 수가 있는가? 이 여호와 삼마, 하나님에 대한 의문이었어요. 그리고 회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믿어봤자 소용없어. 저런 무능한 하나님이라면 믿어 봤자 소용없어. 나가 내가 힘들어하는 거와 상관없는 하나님이야. 이러한 회의적인 분위기가 있었습니다.
 
이 모든 정황을 놓고 남편이 창에 찔려서 고통 가운데에 죽어갔던 그 아픔보다 더 가슴을 도려내듯 아파하는 한 여인이 있었는데, 그분이 바로 이 짐 엘리엇의 아내인 엘리자베스 엘리엇이라고 하는 신앙이 좋은 아내였어요. 그에게는 한 살 난 딸이 있었어요. 원어 웨이스트, 네세서리 웨이스트, 여호와 삼마 하나님, 이 부분에 대해서 이 여인이 이렇게 그대로 기사화합니다. 통역 번역한다면은 얼마나 불필요한 낭비라며 말씀을 삼가십시오. 낭비라니요. 내 남편의 죽음은 낭비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전 생애를 이것을 위해 준비했던 사람입니다. 바로 이 시간을 위해 살아왔던 사람입니다. 그 다음엔 너무나 귀한 신학적이고도 성경적인 하나님 나라 차원에서 이 말을 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주신 자신의 사명 그 책임을 수행하고 생애 목표를 달성하고 죽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너무나 귀한 말씀이에요.
 
얼마나 많은 것을 이루느냐, 이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사명을 가지고 썩어 없어지는 긴 인생이 아니라, 짧더라도 닳아 없어지는 그 인생을 담아요. 행복한 사람이라고,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지죠. 성령의 감동으로 이 엘리자베스 엘리엇은 간호사 훈련을 받습니다. 그 이유는 바로 아오카 부족에게 가기 위한 것이었어요. 네이트 세인트, 아내와 친척들 누이 뭐 이렇게 다 갈 수 있는 사람들 모아서 그 아오카 부족으로 이 여인들이 들어갑니다. 2년 후에 들어갑니다. 다행히 아오카 부족은 남자를 죽이지, 여자는 건드리지 않는 부족이었습니다. 정성껏, 정성껏, 남편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주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그런 사랑 복음 십자가의 희생과 정신을 가지고 저희들을 정성껏 돌보고 섬깁니다. 그렇게 5년을 섬기죠. 그리고 이제 일단 미국으로 나오게 되는 그 순간 추장이 묻습니다. 도대체 당신들은 누구십니까 당신들은 누구시길래, 이렇게 와서 지난 5년 동안 이렇게 희생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줘서 그때 엘리자베스 엘리엇이 말을 합니다. ‘저희는 5년 전에 이 강가에서 비참하게 죽은 5명의 미국 사람들의 아내, 남편이 전하기 원했던 바로 그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섬김으로 한 것뿐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추장의 마음에 감동이 옵니다. 저도 그 미전도 종족에서 추장 이런 비슷한 복음을 전하고 그랬었는데요. 성령의 감동 준비된 추장은 하나님의 때, 마음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세례를 받습니다. 추장이 예수님 영접 세례 받으면 모든 부족 사람들이 받아야 돼요. 오인가 뭔가 안 받으면 죽어 그러면 죽어요. 예, 그러면 다들 겁나서 다 예수 믿고 세례를 받아 할렐루야!!~ 그다음에 역사들이 일어났는데 비슷한 케이스가 일어난 것이죠.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께서 놀라운 복음의 역사를 그때부터 하기 시작하는데, 잘 알죠?짐 엘리엇과 친구들을 죽였던 5명의 아오카 부족 사람들, 4명이 목사가 되고, 한 명의 전도자가 되죠. 그래서 교회를 세우고, 특별히 네이트 세인트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샘이죠. 샘 세인트 한번 사진을 보여주시죠. 지금 저기에 나오는 이 민카이라고 하는 아오카 목사예요. 저분은 누구냐 바로 이 네이트 세인트의 아들이거든요. 저분이 샘 사무엘 세인트인데 그 스티브죠 스티브 세인트의 아버지인 네이트 세인트를 죽인 사람이에요. 죽인 사람이 저렇게 목사가 돼서 나중에 아들도 그곳에 자랄 때의 세례를 베풀고, 그리고 동생인 이 캣디도 강가에서 세례를 베푸는 너무나 훌륭한 목사가 된 것입니다. 내려주시죠.
 
엘리자벳 엘리엇도 책을 잘 썼죠 ‘고통은 헛되지 않아요.’라고 하는 이 책자가 있습니다. 식스 체프트로 돼있는 책잔데, 제 아내가 지난 4개월 전부터 이 책을 붙들고 너무나 큰 은혜를 받았어요. 저도 함께 읽었어요. 그리고 저희들은 인제 북클럽 그래 가지고 신앙 서적 읽기, 나이 드신 권사님도 상관없이 인생이 힘드신 분들 같이 함께 이 책부터 매주 읽으면서 울음바다가 되고, 큰 은혜가 임했어요. 이 엘리자베스 엘리엇이 고통에 대해서 너무나 잘 썼고, 이 여인의 삶은 계속해서 어려운 일이 있었거든요. 거기에 보게 되면은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이렇게 기록을 했어요. 라틴어를 공부한 사람이라면은 라틴어에서 CRUX, 라고 하는 이 단어가 핵심이라는 단어이고, 이것이 곧 플러스 CROSS, 십자가라는 것을 알 것이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든 고통에 대한 질문의 십자가 위에서만 우리는 고통과 사랑의 모순을 녹여낼 수 있다. 하나님의 이 사랑을 이해하기 전까지는 우리는 절대 고통을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계속 파도와 같이 밀려올 때에 이 여인은 또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내 삶이 영원하신 팔에 안겨 있다고 믿든가, 우연에 달려 있다고 믿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 중간 지점은 없다.’ 이것은 팀 켈론 목사님의 고통에 대해서 얘기할 때 말씀하는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거죠. 그분도 고통은 하나님과 가까워지거나, 고통은 또 멀어지게 하거나 둘 중에 하나이다. 라고 하는 말씀과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에스겔 이름의 뜻은 여호와께서 강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기가 막힌 이 에스겔의 삶 가운데 무엇이 그로 하여금 강하게 하고, 결국 끝에 모든 트라우마, 모든 아픈 고통을 위해서 결국은 의심치 않는 여호와 하나님으로 결론을 낼 수가 있을까요? 오직 하나님의 약속에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이 여러분의 믿음이 되고, 미래의 영광이 이미 이 땅 가운데 하나님의 나를 가지고 오신 예수 안에서 그분이 나의 마음과 생각을 다스리시고, 통치할 때에 우리는 비로소 여호와 삼마 하나님, 나와 항상 함께하신 하나님을 의심치 않고, 힘을 얻고 미래의 영광이 지금의 나에게 힘과 평안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저는 말씀을 이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실은 한 3~4개월 동안 많이 힘들었어요. 개인적으로도 많이 힘들었어요. 목회 적으로 힘든 것은 얘기를 안 하고 정말 힘들었어요. 근데 제가 개인적으로 힘든 이야기를 뉴욕 장로교에서 여러분 나 너무 이렇게 말하는 목사는 미성숙한 목사죠. 절대로 제 자존심이 목사라고는 자존심 허락 주지 않습니다. 어떻게 그래요. 힘든 성도들 이런저런 어려움 있는 성도를 위해서 기도해 줘야죠. 목사는 힘든 척 해서도 안 되고, 힘들어서도 안 되지만 힘들면 어떡해, 참 힘들었어요. 그런데 제가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친정집이잖아요. 여기가 예 친정이니까. 에 말을 좀 할 수가 있는 것이죠. 그치만 뭐 개인적인 왜 힘들었고, 정말 힘들었어요. 구체적인 말씀을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네 정말 힘들었어요. 쉽게 말씀드린다면 프라우드 그 스캠 당해 가지고 보이스피싱을 좀 아니 은행에 다 털렸어요. 예 놀라지 마세요. 얼마 없어요. 예 그렇지만 다 털렸어요. 얼마 없는 사람이 털린 거 되게 아픕니다.
 

♣요약

그것은 그것과 같이 평화의 터라는 의미의 예루살렘이라고 불리 우지 않고 원래의 의미인 `여호와삼마` 즉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라는 의미로 불리 우고 있다. 이것은 다음을 암시하는 것이다. 포로들은 돌아온 후 하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시고, 자기들 중에 거하신다는 확실한 증표를 갖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복음 교회도 이와 같이 그 안에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데, 이전에 임재 하시던 것처럼 쉐키나로서가 아니라, 그의 성령으로 임하신다는 것이다.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 때까지 너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어떤 영혼이라도 그 안에 살아 역사하시는 은혜의 원칙을 갖고 있기만 하면 "여호와께서 거기 계시다"고 하시니, 어떠한 상황 가운데서도 우리는 하늘의 영광과 축복이 거기 계시다는 것을 확신하며, 이는 곧 과거 범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버리신 하나님께서 다시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돌아 오셔서 함께 교제하시며 거룩한 친교를 나누심에 감사하며,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이런 아름다운 교제가 이루어지도록 우리는 항상 자신을 돌아보며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한다.









 



♣주일예배(주후 2024년 7월 21일)
제목: “은혜 속으로”(3,4부)
말씀:*베드로후서 1:2-4,
사회: 유선비 부목사님

설교자: 윤대혁 목사님(3,4부-“은혜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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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 1:2-4,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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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함이 우리에게 넘치게 되시길 믿습니다. 우리가 쓰는 물건들 가운데 우리가 100%를 제대로 활용하는 사람이 있을까, 라는 질문을 한다면, 아마 우리는 한 결 같이 없다. 라고 이야기를 하게 될 겁니다. 99년도에 처음 노트북을 구입을 했는데 그때 노트북의 하드 용량이 4GB였습니다. 지금은 2테라바이트(Tera byte), 그때 얘기하면 200배가 더 넘는 2테라바이트(Tera byte)의 용량을 갖고 있는데, 특별히 영상이나 이런 걸 작업을 하지 않는다면 순수한 작업이라면 그 노트북의 역량을 채울 사람도 없는 게 일반적인 거죠. 그래서 노트북 처음 샀을 때 4기가를 채우지 못하고 새로운 노트북을 샀던 경험이 있는데요. 우리가 갖고 다니는 태블릿이나 또 전화기 역시도 우리가 만든 사람 역시도 그 기능을 다 알지 못해서 나오는 소프트웨어에 의해 내가 만든 이 기계가 이런 능력과 기술이 있다. 하더라도 만든 일마저도 역량과 한계를 측정하지 못한 애들을 경험하게 되는데요. 이런 일을 겪으면서 이런 질문을 한번 해봅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내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이와 같이 잘 활용하고 누리고 있는가, 그리고 이 질문 앞에 여러분 어떻게 답을 하시겠습니까? 우리가 만약에 그 은혜를 누려야 되는 것이 당연한데 그 은혜가 마치 우리의 삶의 과거가 되어서 그래 옛날에 예전에 좋았었지, 그때는 참 운해가 넘쳤었어. 라는 과거를 추억하고 회상하고 사는 사람이라면, 여러분 그 신앙은 언제 위험에 빠질지 모르는 위기의 신앙에 빠졌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은혜는 날마다 순만하게 날마다 풍성하게 누려야 되는 은혜가 돼야 될 줄 믿습니다. 왜 그러하냐면 그것은 그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에베소서 2전 8절에는 이런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에베소서 2:8,
8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뭐라고 말하고 있죠. 우리가 받은 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라고 말합니다. 아니 선물을 주고 나서 그 선물을 뭐 잘 썼니, 안 썼니. 이렇게 따져 묻는 건 너무나 속이 좁은 거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겠지만, 만약에 그 선물이 어떤 사람이 나에게 선물을 줄 때 가장 소중한 것을 바꿔서 준 거라면 그의 생명과 바꾸어서 나에게 준 선물이라면 그 선물을 쓰지도 않고 저 구석에 처박아 놓는다 반면, 그 준 사람의 마음은 결코 기쁘지 않을 겁니다. 아마 많이 속상할 거예요.

제가 중학교 중등부 사학을 처음 시작을 할 때, 그때 중등부 선생님들이 제가 생일이라고 넥타이 선물을 하나 해 주었습니다. 그 선물을 담당했던 총무 집사님은 패션이 남다른 분이셨습니다. 옷을 입어도 대체 저 옷은 어디서 구입해서 입으신 거야. 나눌 정도로 화려한 옷이었고, 화장과 헤어스타일 역시도 80년대 미스코리아를 연상하는 그런 화장법과 그런 헤어스타일을 가진 정말 패션의 선두주자 같은 분이었는데요. 그분이 고른 넥타이다. 보니 24살 된 청각 또 학생 전도사에게는 그 넥타이가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칼라였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단벌의 양복 가지고는 도저히 소화할 수 없는 넥타이였고, 그 넥타이에 맞춘다고 해서 양복을 새로 살 수도 없고, 제가 그때 용기를 내서도 했었어야 되는데 도저히 용기가 나지 못해서 그 넥타이를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요.

시간이 흐름과 동시에 선생님들과 그 총무지사님이 저를 보는 눈빛이 좀 이상한 겁니다. 저를 볼 때마다 계속 이렇게 말씀하는 것 같았어요. 넥타이, 넥타이, 이런 느낌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용기를 내서 했었어야 되는데 차마 하지 못해서 그때 아마 했었다면 아마 새로운 패션을 이끌어 가는 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했는데 도저히 할 수가 없었습니다. 여러분, 선물은 이와 같은 거죠. 우리가 선물을 받을 때 여러분 감사합니다. 라는 말도 좋지만 그와 함께 그 선물을 잘 쓰고 잘 활용한다면, 준 사람이 기쁘고 즐거울 수밖에 없어요. 근데 그 선물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쓰지도 않고 저 구석에 처박아 놓고 받았는지 안 맞는지 모르고 산다면 그 준 사람의 마음이 약간 속상할 수밖에 없는 거죠. 하나님께서 우리 계신 선물도 이와 같은 겁니다. 이와 같은 거 그 은혜를 받아서 그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거고, 그 은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은혜가 과거의 기억이 되어서 언제 그네가 있었어. 라고 말하고 있다면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힘들게 하는 우리들의 신앙의 모습일 수 있다는 것이죠. 요즘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위에 계신 은혜의 선물은 어떤 은혜이고 어떤 선물일까요? 고린도전서 15장 10절은 우리 이렇게 말합니다. 이 말씀 함께 읽어볼까요?

*고린도전서 15:10,
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네 사도바울은 하나님께 받은 그 은혜를 2가지를 설명합니다. 첫 번째는 내가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가뒀던 사람이고 그를 죽였던 사람입니다. 그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제면시키기 위해서 나의 모든 젊음을 내 모든 면적을 다 쏟아 부었던 사람인데, 이런 나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나를 하나님의 자녀 삼아주시고, 하나님의 백성 삼아주시고, 구원해 주신 것은 이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말하고 있는 은혜는 그런데 내가 사도를 부름 받아 삶을 할 때 많은 죽음의 위기가 있었고, 어려움이 있었고, 많은 유대인들이 ‘너는 예수님을 핍박한 사람이잖아!’ 누가 무슨 하나의 말씀을 가르쳐! 온갖 모함과 온갖 많은 어려움인데도 불구하고, 지금 이 자리에 와서 사도로써 교회를 세우고, 교회의 성도들에게 하나의 말씀을 가르칠 수 있는 이 자리에 서게 된 것은, 내 노력과 내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이거 역시도 하나님의 은혜가 된 것이다. 라는 그 2가지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은혜는 사돈마을만의 은혜일까요? 그렇지 않을 겁니다. 저와 여러분이 지금 누리고 있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그것도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죠. 내 힘과 내 노력이 아니라, 십자가의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줄 믿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오게 된 그 모든 가정도, 내가 지금 두 발로 서 있고, 오늘 이 시간까지 온 것도 내 힘과 내 노력으로 도저히 오지 않았고. 설명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님이 나의 힘이 되어 주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나의 능력이 되었었기 때문에, 하나님 나의 모든 것 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설 수 있었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 우리들의 고백일 줄 믿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은혜는 단번에 1번의 사건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죠. 여러분께서 베드로 오늘 본문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1장 2절의 말씀에,

*베드로전서 1:2,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라고 말하고 있고, 우리에게 더욱 많을 것이다. 라고 하며,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서 4장6절에서,

*야보고서 4:6,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더 큰 은혜를 주시나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더 많은 은혜, 더 큰 은혜를 이야기하니까 마치 내가 받은 은혜가 부족하고 완전하지 않고 뭔가 더 필요한 것처럼 우리가 표현되기도 하는데요. 여러분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는 단번에, 한 번의 사건이 아니라 내게 주신 그 은혜는 하나님 날마다 부어주신 은혜고 그 은혜가 끝이 없으며 완전하고 날마다 우리에게 넘치는 은혜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혜임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자녀 된 저와 여러분은 그 은혜를 누리며 그 은혜를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야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누려야 되는 더 많은 은혜 더 풍성한 은혜는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지금보다 나은 경제적인 삶, 지금보다 더 나은 삶, 보다 풍성한 삶을 말하는 것만은 여러분 아닐 겁니다. 왜냐면, 우리가 과거보다 더 좋은 삶을 누리고 있었더니, 그때 신앙을 잃어버렸던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게 되고, 지금보다 더 어려운 현실에 건강의 위험에 빠졌을 때, 그제서야 더 하나님의 애들을 붙들고 사는 분들이 있는 걸 본다면 환경적인 거나 상황적인 거에 의해서 더 좋아졌다고 해서 그것을 꼭 더 많은 은혜가 더 풍성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이제 목회를 하면서 이제 심방을 잡는다. 비즈니스라고 있는 우리 권사님의 댁에 심방을 가게 되죠. 심방을 다 하고 나서 권사님께 묻죠 권사님 무슨 기도를 하면 좋겠습니까? 기도 제목을 알려주십시오. 말하면 어떨 땐 좀 충격적인 기도 제목을 나누시는 권사님들이 계십니다. 목사님, 우리 남편 이 사업을 하고 있는데, 이 사업 망해야 됩니다. 망하기 위해서 제대를 달라는 거예요. 그 남자 짓을 한 남편은 옆에 둘이 많습니다. 망하게 가라고? 아니 무슨 기둥을 세우고 그러겠습니까? 이상해 우리 남편이요. 사업이 힘들고 어렸을 때는요 예배 한 번 빠진 적 없습니다. 얼마나 하나님 매달리고 얼마나 하나님 찬양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이제 사업이 좀 될 만하고 조금 나올 만한 하니깐 교회도 안 가구요. 놀기 바쁘구요. 우리 사업 남편 망해야 되는데 안 가고 그래요. 기도해 달라는 겁니다. 제가 너무나 난감했습니다. 어떻게 기도를 해야죠 그분의 심정은 아니에요. 어렵고 힘들었을 때는 하나님 은행 가운데 있었는데, 뭔가 조금 나아졌더니, 하나님과 벌어진 그 남편의 신앙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서 나는 그런 기도 제목이었는데, 이건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구해야 되는 정말 더 많은 은행 더 넘치는 은혜는 어떤 은혜일까요?

오늘 베드로후서에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설명하고 이별을 말씀해 보면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삶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에게 더욱 많은지, 3절 4절이면 이렇게 말합니다.

*베드로후서 1:3-4,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지금 우리가 예수를 믿은 이후에 우리가 누려야 되는 더 많은 더 넘치는 은혜는 무엇이냐면 예수를 아는 은혜요. 조님을 닮아 가는 은혜임을 믿습니다. 그래도 우리 성령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셔서 우리를 계속해서 변화시키시죠. 주님을 알아가게 하시고, 주님을 닮아가게 하시고, 그때마다 더 하나님의 은혜가 넘쳐서 우리에게 넘쳐난 은혜의 삶을 살게 되고, 또 그 은혜로 말미암아 예술을 알게 되고 예술을 닮아간 은혜를 얻게 되고, 그러면 더 많은 은혜가 넘치고 계속 피해서 은혜의 선순환들이 우리의 삶에 이루어질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를 닮아감으로 얻게 되는 큰 은혜는 대체 우리 삶에 어떤 은혜의 역사로 나타나게 된 것일까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크게 2가지를 우리가 함께 나누길 원하는데요. 우리가 은혜 속으로 들어감으로 얻게 되는 영적인 역사와 은혜는 첫 번째는 우리 모두가 죄를 이기며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닮아감으로 누리게 되는 은혜는?
I. 첫 번째는, 우리 모두가 죄를 이긴다.
-사단 마귀는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하기 위해서 온 힘을 다합니다. 우리의 삶에 은혜가 멈추도록 하기 위하여 죄를 유혹해 만들고, 유혹이 빠져 넘어가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생을 살게 할려고 하죠. 하지만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안에 들어오기 시작하면, 그때부턴 죄가 우리 가운데 역사하지 못하기 시작한 거죠. 그래서 로마서5장 21절의 말씀을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서 5:21,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이는 제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하는 것 같이 계속해서 죄는 우리를 지배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여러분 은혜에는 그 죄의 길을 다 끊어버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시에스 루이스 기독교 작가인 시스루이스는 ‘스크루테이프’라는 편지에서 이제 각 사단의 일을 시작하는 조카 워무두에게 사단의 전략을 그 편지로써 쓰게 되는데요. 그 삼촌인 스크루테이프가 조카 워무두에게 이런 말을 하나 했습니다. 믿는 성도를 환자라고 표현했는데요. “니가 지금 맡고 있는 환자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니 참으로 내 마음이 착잡하다. 그렇다고 실망하거나 낙심할 필요는 없다. 그 환자의 정신적인 신체적인 습관은 항상 우리 편에 있으니 말이다.” 이게 말 무슨 말이에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항상 육체의 본능과 유혹을 받으면 쉽게 넘어지고 쉽게 쓰러지는 그 습관들을 우리가 갖고 있다. 라는 것이죠. 우리의 본성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그 가는 길을 끊어버리기 시작하죠. 또 로마서 5장 21절의 말씀에, 우리 한번 다시 한 번 이 말씀 듣겠습니다.

*로마서 5:21,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아무리 제가 힘이 있다. 할지라도 아무리 제가 우리 가운데 왕 노릇하려고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들어가면 그 의외의 진리가 우리를 다스리기 시작하는 줄 믿습니다. 더 이상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는 거예요. 죄 영향력이 저와 여러분의 삶을 절대로 다스리지 못하게 되는 것을 믿습니다. 십자가의 은혜가 그마다 큰 겁니다. 그 죄의 뿌리와 죄 영향력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이지요. 로마서 6장 15절에 말씀에,

*로마서 6:15.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은 절대로 죄를 지을 수 없고, 은혜 안에 있는 자들은 절대로 죄 사막 가운데 있을 수 없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요 은혜 속으로 들어가면 되는 거예요. 많은 경우 이렇게 생각합니다. 죄와 싸워야 됩니다. 여러분이 죄와 싸우는 존재가 아닙니까? 우리가 은혜 가운데 들어가면 죄를 떠나가기 시작하는 겁니다. 빛과 어둠은 싸우지 않아요. 빛이 임하면 어두움은 떠나가게 되는 겁니다. 빛과 어둠은 절대로 싸움의 대상이 되지 않아요. 최근에 인터넷에 보면 하나님과 사단의 그림을 그려놓고, 그 중간에 VS 하나님과 사단이 마치 견주어 싸우는 것처럼 표현된 그림이 있는데, 정말 비성경적이에요. 여러분 하나님은 사단과 싸우지 않습니다. 사단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돼 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 우리도 마찬가지예요. 우린 죄와 싸우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임하면 우리 세상에 재와 역사가 떠나가게 되는지 믿습니다. 빛이 임하면 어둠은 떠나가기 시작합니다. 1700년 전에 여러분 다니엘 게이 루이라는 사람이 발견한 자연의 법칙이 있는데요.

이 법칙을 게이루이 법칙으로 얘기하는 건데, 한국말로 얘기하면 양력입니다. 양력은 뭐냐면 비행기가 뜰 때 기상을 쓰이는 힘이죠. 세상의 모든 자연 만물들은 여러분 지구의 중력의 지배를 받죠. 그래서 땅에 2발로 서 있게 됩니다. 근데 비행기를 날 때, 그 양력에 의해서 중력을 이고 하늘을 날죠. 여러분 비행기가 하늘을 날 때 사람들은 중력이 없어졌다라고 말하지 않아요. 중력은 있으니까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 하지만 그 중력을 이기는 힘이 있는 거예요. 양력이 있으니깐 비상할 수 있는 거예요. 우리들의 삶에 죄 유혹과 죄 지배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거 앞에 우리가 지배를 당하지 않고, 우리가 그거 앞에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우리 안에 뭐가 있어요. 하나님의 은혜가 있기 때문에, 그 은혜 힘으로 우린 날마다 승리의 길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예심 있는 사람들을 믿었다고 해서 문제와 어려움이 없어지나요?

여전히 동일한 문제와 어려움과 고민과 환란을 겪게 되죠. 하지만 그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뭔데 뭐 문제없는 교회 없고, 문제없는 가정 없고, 문제없는 인생 있죠. 하지만 그 문제를 만날 때 문제를 넘어서는 인생이 있고 문제 앞에 넘어지는 인생이 있는데, 그 문제를 넘어서게 하는 게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다. 라는 것이죠. 그 은혜 속으로 날마다 들어갈려면,,, 자 어머님께서 지금 목사 이렇게 목회자 사모님이신데, 목회하는 아들에게 항상 목회 하면서 저한테 누누히 말씀하시는 몇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항상 이렇게 말씀하세요.
“대혁아, 사람은 말이다. 은혜를 받으면 순한 양이 되지만, 은혜가 마르면 사나운 늑대가 된다. ”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목회자인 저는 항상 교회 안에 성도들에게 은혜가 넘치도록 교회의 은혜가 가득하도록 항상 말씀을 준비해야 되고, 항상 그렇게 살아야 됩니다. 은혜가 넘치면 순한 양이 되지만 은혜가 메마르면 사나운 늑대가 되는 길입니다. 우리 삶도 마찬가지예요.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면 문제가 문제로 보이잖아요. 하지만 하나님 은혜가 메마르면 모든 것이 다 거친 광야처럼 느껴지는 게 우리들의 인생이라는 거죠.

남가주 사랑의 교회 20년 전에, 이제 선교부 사역자로 사역을 시작했을 때, 그때 오정현의 사랑의 교회 담임 목사님이 담임 목사님이셨습니다. 그때 한 8개월 정도 목사님을 모시고, 배우는 시간이 있었는데, 그때 이민자의 삶을 옆에서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저 역시도 유학생으로 이민자의 삶을 살면서 왜 이렇게 모르는 게 많고, 왜 이렇게 막막하고 왜 이렇게 힘든지 하루하루 사는 것이 참 벅차고 힘겨웠던 때가 있었어요. 근데 그때 이 주일 예배 때마다 그리고 토요예배 때마다, 그때 담임 목사님이셨던 오정현 목사님께서 기도할 때, 이런 기도를 늘 외치게 하셨어요. 늘 이렇게 외치셨어요. 주여, 은혜를 주옵소서. 주여, 은혜를 주옵소서. 저는 그 외침의 지도가 저한테 그때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 주여, 은혜를 주옵소서. 할 때 하나님의 은혜가 나의 산에 확 불어오는 겁니다. 그 은혜의 힘을 입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과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갖게 되죠. 그래서 주여, 은혜를 주옵소서! 정말 그거 외치고 싶어서 그거 부르짖고 싶어서, 왜요 그러며 살거든요.

지금도 목회를 하면서 저희 교육을 하고 준비한 레벨 레이트 드릴 때 항상 선생님들에게 찬양하고 기도하면서 능력해 당부하면서 말씀드리는 게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 은혜 없이는 하루도 살지 못하는 사람인데 주님 앞에 기도하고, 예배할 때, 주님, 주님 내게 오늘 은혜주지 아니하시면 내가 이 자리 떠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불어주십시오. 오늘 주님 내게 은혜주지 아니하시면 내가 주님 붙잡은 손 절대로 놓지 않겠습니다. 라는 마음으로 주님, 은혜를 주옵소서! 라고 기도하십시오. 그래야 힘든 삶 가운데 우리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게 답입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일까요? 사람의 지혜요? 사람의 능력이요? 많은 것을 가진 거?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기 시작하면 우리가 은혜 가운데 들어가기 시작하면 그 문제를 뛰어넘는 하나님의 행하심을 우리 모두가 보게 되죠. 사랑의 교회가 내일 주일 그리고 토요 비전 새벽 예배 때, 또 서요 성경 집회를 통해서 하나님의 군대 7천 용사들이 모여서 주여, 은혜를 주시라고 외칠 때, 교회 안에 하나님의 풍성이 넘쳐서 한국교회를 섬기는 역사가 넘치게 임하게 될 줄 믿고 그곳에 부르짖는 성도들마다 가정들마다, 자녀들마다 사업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시는 놀라운 역사가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빛이 임하면 어둠이 떠나듯이, 하나님 은혜 가운데 돌아가면 모든 문제와 모든 어려움은 떠나가게 됩니다.

그 은혜 가운데 들어갈 수 있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예수를 알아감으로 또 지금을 닮아감으로 누리게 된 은혜는 무엇일까요? 첫 번째는 죄를 이기는 것이라면, 문제를 뛰어넘게 하시는 승리라면 두 번째는 저와 여러분을 낙심치 않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고 닮아감으로 누리게 되는 은혜는?
II. 두 번째는, 낙심하지 않는다.

-어떤 일을 만나든, 어떤 일을 겪든, 우리가 낙심하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16절의 말씀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고린도후서 4:16,
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왜, 내 눈에 보이는 내 주변의 환경은 사람들이 볼 때 이전보다 안 좋은 것 같은 거예요. 막막하고 힘들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 될지 참 두렵고 걱정이 되는 건 많겠지만, 겉 사랑은 그렇지만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날로 새로워집니다. 어떻게 돼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역사가 시작된다. 라는 거죠.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는 저와 여러분의 삶을 반드시 가장 좋은 길로, 가장 선한 길로, 가장 완전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믿음으로 걸어가셨던 그 길이 십자가의 고난의 길이었지만, 그 길 끝에는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부활시켜 살리시고, 모든 이름이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영광이 있었습니다.

모세가 40년 동안 여러분 광야로 쫓겨나 살인자로서 이제 숨어 지낼 때, 다시 하나님께서 그 마지막에는 그 모세를 다시 세워서 애굽의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하나님이 지도자로 세웠던 일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다시스로 가고자 했지만, 풍랑을 만났습니다. 큰 물고기에 삼킴을 당하여 세상에 지옥이 있다면 이곳이 지옥으로 말했던 이 요나 인생이었지만 그를 다시 회복시키고 그를 다시 하나님의 사명자로 쓰였던 손길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기름부음을 받고 나서 장인인 사울의 손에 죽음의 위엄을 받아 광야로 쫓김을 당하고, 사람들에게 저 정신병자라는 얘기를 들었지만 그 광약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재건할 수 있는 많은 믿음의 동력 자를 만나게 하시고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 영광을 보게 하셨던 하나님의 마지막 결과가 있었습니다. 사도바울 역시도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그는 실종자로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의 시간을 보냈었습니다.

사울 봤어? 사울 봤어? 어디 있는지 몰라, 죽은 거 아냐? 실종된 거 아냐? 무명으로 끝날 수 있는 그 인생을, 한 해 3년의 걷는 시간 그를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 말씀을 기억하게 하시고, 그 말씀을 가지고 신학을 집대성할 수 있는 하나님이 귀한 믿음의 종으로 쓰였던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일은 우리의 삶에도 마찬가지에요. 어떤 이를 만나도, 어떤 어려움을 겪어도, 낙심하지 말 것은 하나님 우리 안에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의 삶에 새 일을 행하고 계시는 줄 믿습니다. 낙심하지 않아야 됩니다.

※저희 교회에 참 믿음이 귀한 한 형제가 있습니다. 너무나 귀한 형제인데요. 형제의 아버지는 선교사로서 또 인도에서, 중국에서 평생 선교사의 삶을 사셨습니다. 이 형제 역시 또 아버지를 따라서 한국에서 살지 못했고, 또 인도에서, 이제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졸업하고 아버지가 이제 안 10년째 미국에 와서 미국에서 유학 생활을 이제 시작할 계획이었습니다. 교회에서 이제 교회 조명 파트타임 간사를 뽑는다고 하니까, 이 형제가 지원을 했어요. 그 이유로 경제적으로 도와야 될 형편이었기 때문에 낮에는 학교에 가서 이제 2년제 대학교에 가서, 이제 4년제 대학 갈 수 있는 편입을 준비하고 있었고, 또 평일에는 일식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일하고 있었고, 또 주말에는 교회 와서 우리 조명 간사로 이 사약을 열면 귀환 환자였는데요.

조명 간사할 때, 이제 예배 때 키고 끄고 이런 정도의 아주 단순한 작업이었지만 이 형제가 유튜브를 통해서 그 기계법을 알고 교회 안에 예배를 정말 조명으로 편성하기 위해서 많이 원하는 것보다 더 좋은 일들을 감당해 줬던 대한 형제였습니다. 안타깝게도 부모님을 통해서 진행되던 영주권이 거절이 됐어요. 신분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미국에 있지만 유학생으로 공부하기에는 1억에 가까운 학비를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서 이제 한국으로 돌아가야 될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문제는 한국에 가자 이 고등학교까지 나온 기록이 없는 거예요. 제가 다녔던 인도와 중국에 다녔던 현지 학교에서 학적 끈을 띄울 수 없다 보니까, 불가피하게 검정고시를 가야 되는데 한국에서 공부를 안 했으면 이 검정고시 볼 수 있겠어요.

그리고 유일하게 검정고시를 보고 이제 직업군인을 하는 게 이 형제가 갈 수 있는 부모님께 이제 경제적 도움이 돼야 되니까. 그런 상황입니다. 그래서 그런 가운데서 한국에 가기로 결정하고 이제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교육, 조명, 간사를 열심히 열심히 수고하고 있습니다. 20살 이 젊은 청년이 감당하기에는 인생의 너무나 큰 위기 있고, 막막함이었습니다. 아버지 선교사를 따라 여기까지 왔는데 마치 자신의 인생이 안개처럼 사라져 버린 듯한 그 현실 가운데서 그래서 참 나름대로 열심히 수고하고 성실한 형제로 그러다가 형제가 이제 이곳저곳에 트랜스포 할려고 이제 어 이력서를 학교에서 입학 모집서를 넣는데, 이제 영주권이 안 되니깐 지원했던 뭐 리셑을 당한 겁니다. 그런데 신기하게 이 학생에게 한 학교가 너를 학생으로 받아주겠다고, 입학허가서를 준 거예요. 그 대학교가 유시버클리 대학입니다. 굉장히 좋은 대학입니다. 근데 대학생이 아니라 영주권자처럼 학비를 내걸어 다닐 수 있도록 그런 기회를 주는 거예요. 사실은 그럴 수 없거든요. 근데 저는 여기서 이런 어려움을 겪고 나서 그 대학에 갔다. 라는 것으로 간증이 마무리되는 게 아닙니다. 더 놀라운 사건이 뭐냐면, 그 형제가 UC 버클리에 무슨 과를 들어보느냐가 중요해요. UC 버클리 엔지니어링은 미국에서 전미 2등 상위 정도 하는 일을 하는데, 그 형제가 전공했던 지원했던 합격했던 과가 뭐냐면 음향, 조명 엔지니어 꿈이 없었어요. 그냥 아버지 따라왔던 인생 가운데 뭘 해야 되게 막막했어요.

근데 인생의 마지막과 같은 정말 막다른 그 현장에서 경제적인 도움이 필요해서 했던 조명을 하면서 이 여기서 꿈을 꿉니다. 하나님,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라고, 엔지니어인데 미국에서 전위 2등 3등 하는 그 학교에서 이렇게 학생으로 오라는 겁니다. 남의 교회 이야기를 그렇게 놀리지 않나요? 엄청난 사건이에요. 아하, 진짜 뭘 깨달았냐 그렇다 인생의 마지막 같지만 마지막 순간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마냥 기다려야 되는, 막다른 길 같지만 포기해야 될 것 같지만, 그곳에서 내가 낙심하지 말고 실망하지 말 것은 하나님 반드시 일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8월에 이제 샌프란시스코로 올라와요. 그럼 이런 일들이 이 형제만 있는 일일까요? 그렇지 않아요. 하나님 우리의 삶을 마치 벼랑 끝으로 막다른 길로 인정하시죠. 그 길은 우리들이 할 수 있는 모든 힘을 다 깨우는 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주님, 그래서 뭐가 필요해요. 나는 주님 은혜밖에 없습니다. 주님 내게 은혜주지 아니하시면 나는 길이 안 걸고 주님 내게 은혜 주지 않으시면 나는 하나도 살지 못해요. 이때 하나님의 그 은혜가 시작되는 거죠. 새 일을 향하시는 일, 길을 여시는 게 가장 좋은 길로 우리의 삶을 인도하십니다. 우리에게 가장 선한 길로 임하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영 가족 그리고 여러분, 우리가 날마다 넘치는 은혜 가운데 살아가게 될 줄 믿습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그 은혜가 먼 기억의 외계인가요? 가끔 권사님 장모님들 만나 이럴 때가 있습니다. 목사님 제가 이래 봬도요 젊을 때는요. 30년 전에는요. 20년 전에는요. 힘이 있었을 땐요. 그대로 달랐습니다. 그게 뭐가 중요합니까? 지금이 중요한 것 같아요. 지금도 나에게 있습니다. 마치 갈렙이 얘기했던 것처럼 그때나,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라는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충먼합니다. 그 은혜를 바라보며 사모하며 나아갈 때, 주님께서 죄를 이기게 하시고, 우리의 삶에 있는 모든 문제를 넘어서게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길로, 신실한 길로, 은혜의 길로 생명의 길로 열어주시는 그 은혜가 더욱은 삶 가운데 임하게 될 줄 믿습니다. 때마다 은혜 가운데 나아가는 주의 백성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약
우리에게 주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절실히 깨달아, 주님의 은혜 외에는 아무것도 아님을 날마다 고백하면서, 그 은혜를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 우리들의 연약함을 주님 앞에 엎드려서 내려놓고, 날마다 주의 은혜 가운데 돌아가기를 원해야 한다. 더 많은 은혜, 더 넘치는 은혜로 주님을 알아가고 주님을 닮아가 그 은혜를 통해서 죄를 이기고, 문제를 뛰어넘는 환경과 상황을 압도하는 승리하는 길을 걷는 자로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삶에 막다른 길과 같은 어려움과 벼랑 끝에 서는 시간이 있다할지라도 그때 내가 부른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 그 이름밖에 없음을 확신하여 주님의 그 은혜를 붙들고, 하나님이 행하시는 선한 뜻을 날마다 기대하고 소망하며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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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3년 2월 12일)
제목: "나그네는 길 위에 집을 짓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은 누구에게서 나타나는가?"
말씀: 히브리서 11:13~16(1부,2부),
고린도전서 1:18-25(3부,4부)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영광찬양대
대표기도: 장은진 부목사님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
 
설교자: 전광식 목사님(전 고신대학 총장, 독수리 중고등학교 이사장)-초빙-(1부,2부),
에프렘 버클목사님(런던시티미션대표)-초빙-3부,4부)
ㅡㅡㅡㅡㅡㅡㅡ
 
*히브리서 11:13~16(1부,2부)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사무엘상 22:1~2(3부,4부)
1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
 
▶전광식 목사님(전 고신대 총장, 독수리 중고등학교 이사장)-초빙-(1부,2부)-
▶"나그네는 길 위에 집을 짓지 않는다.“
 
-이 아침 영광스런 예배의 자리로 인도하시니 우리 하나님을 찬양한다. 돌이켜보면 지난 20세기는 정치적으로 혹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동서 양진영이 세계 일종에 지도그리기 하면서 열정과 냉전을 치러왔다. 20세기가 끝나면서 한 쪽 진영이 현실 정치에서 이렇게 무너지면서 그 영역에 속해 있던 동구권의 많은 나라를 비롯하여 이렇게 세상이 바뀌게 되니까, 우리가 맞이하는 21세기는 더 이상 갈등, 이데올리기라는 대립이 사라지고 이제 인류의 앞날에는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이렇게 자본주의 적인 물결이 확산을 하면서 영구 평화가 오지 않느냐의 막연한 기대감을 가졌다. 여려분이 다 아시는 바대로 마치 유토피아의 세상이 올 것이라고 몽롱한 착각에 빠져있던, 특별히 미국 사람들에게 정말 현실은 이게 아니구나! 하는 정신을 번쩍 들게 한 것이 911, 극단 이슬람에 의한 미국의 무역빌딩에 대한 공격이었고, 그것을 계기로 미국이 아프칸 전쟁을 벌여서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전쟁에 인력과 물자를 투입했지만 결국 그 이전의 40년 전과 똑 같이 미국이 월남에서 철수했듯이 아프칸에서도 철수를 해서 다시금 극단 이슬람이 그 지역을 장악(掌握)했다. 미국이 아프칸을 철수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코로나라는 것이 발생했고, 코로나가 조금 주춤해지려고 할 때에, 소위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졌고, 우크라이나의 전항을 시시각각으로 뉴스를 보던 우리들은 최근에 약간 전쟁이 소강상태로 생각했는데 얼마 전에 또 튀르키와 시리아에 지진이 일어났다.
 
여러분, 우리가 꿈꾸던 낙원과 같은 20세기는 결코 인간의 몽롱한 기대대로 전개되지 않음을 알 수 있고, 또 이러한 극변하는 세계와 이 자연의 현상에서 가장 희생을 당하는 것은 인간이며, 전쟁에서도 인간이다. 그리고 코로나에서도 인간, 지진의 이 무서운 사태에서도 희생을 당하는 것은 천하보다 귀한 인간의 생명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현상을 보면서 오늘 이 시간에 과연 그러면 인간이란 무엇이며, 지상에서 인간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쩌면 좀 철학적이고 성찰할 수 있는 이런 주제를 이아침에 설교의 화두로 던지고자 한다.
 
진화론과 같은 세속과학하고 성경이 인간을 보는 시각이 확연이 다르다. 그런데 이 대조적인 두 가지 입장이 하나에 동요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이성이라는 게 있다. 진화론에서도 인간을 이성에 부인하지 않고 우리 기독교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는 지.정.의가 있어서 동물과 달리 지성이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 이런 이성을 가진 인간이 동물과 같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어떤 기능을 하는 것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생각하는 것이다. 좀 더 고상한 표현을 쓰면 동물과 달리 인간은 사유하고 사고(思考)한다. 그러면 이 잘난 이성으로 도대체 무엇을 사고하고 무엇을 사유(思惟)하는 것인가? 좀 극단적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사유의 대상은 두 가지이다 매우 경건한 성도님들은 그런 분들은 아마 주야로 히브리서 3장 1절의 말씀처럼 예수님, 하나님을 깊게 생각할 것이다. 이를테면 칼빈 같은 사람, 흔히 칼빈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칭하는데, 그의 머리에는 하나님의 생각으로 가득 찼고, 그의 입에는 온갖 언어가 하나님의 관한 언어로 가득하고, 그의 가슴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하니까, 칼빈을 조금만 툭 건드리면 그냥 하나님이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정말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 예수님을 주야로 묵상(默想)한다. 일반인들은 어떨까? 우리 주변에 사는 대부분 일반인들은 이미 예수님이 산상보훈에서 지적하신바 대로 이런 하나님의 나라나 의와 같은 이런 고상한 주제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런 소유를 바라면 세상에서 살아가는 문제를 밤낮 고민하는 것이다. 이 두 생각의 큰 주제 사이에 하나가 놓치는 것이 있는데 하나님을 너무 생각하다가 내가 누군지를 때로는 생각을 해야 되는데 놓치고, 세상을 너무 고민하가 세상에 사는 내 존재가 무슨 의미인지, 이런 자기에 관한 물음을 다 놓칠 수가 있다. 이것을 놓치다 보니까 자신의 대한 성찰도 없고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이 없으니까, 플라톤의 말을 빌리면 반성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는 것이니까 많은 사람들이 따지고 보면 무가치한 삶이 삶이라고 영위하고 있다고 해도 과장된 말이 아닐 것이다.
 
자 그러면 대체 인생이란 것이 무엇일까? 여러분 이런 질문을 던지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여러분이 아시는 바대로 쉽지 않을 것이다. 로마의 대표적인 지성인 중에 한 명인 세네카는 인생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데에는 평생이 걸린다고 했다. 평생을 살아보지 못한 우리들은 이것에 대한 정답을 발견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실제로 다 산다고 해도 하나님의 계시(啓示)의 서치라이트, 조명이 없이는 타락으로 인해서 우리의 어두워진 지성이 자기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들쳐볼 수밖에 없다. 성경은 모든 인간이 던지는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답변서(答辯書)이다. 성경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 세상의 삼라만상(參羅萬像)에 대한 답도 다 나온다. 성경에는 구원에 관한 말씀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구원 받았다면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삶에 대한 답변도 보는 것이다. 자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그럼 성경이 인간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할까? 성경 안에도 숱한 정의들이 발견되지만 오늘 우리의 말씀의 화두처럼 ‘인생은 다 나그네’ 라고 말을 한다. 바로 앞에 선 족장 야곱이 자기의 120년 삶을 회상(回想)을 하면서 내 삶이 험악한 나그네의 세월이었다. 라고. 그렇게 고백을 하고 신약에 와서 제자 중에 수제자(首弟子)라고 하는 베드로가 흩어진 믿음의 형제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들에게 수신자들에게 지칭하는 말이 본도와 갈라디아와 갑바도기아와 아시아에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라고 믿음의 형제들을 부르고 있고, 이런 일반 성도들뿐만이 아니라, 히브리서 11장 우리의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 기라성 같은 믿음의 조상들에게 성경은 이 사람들은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증거 했다. 라고 말을 하고 있다. 이렇게 이 모든 말씀을 볼 때, 우리가 살아가나는 이 인생살이를 지상에서 천상으로 나아가는 지장의 나그네 들이라고 말한다. 성경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서양에서는 인생을 비유할 때, 연극에 비유해서 무대는 세상이고 배우는 인간이다. 라는 은유를 하기도 했고 우리 동양에서는 중국에 한시에 종종 나오듯이 여행에 비유해 가지고 세상은 여관이고 사람은 그대로 길 가던 나그네로 비유했다. 이렇게 저와 여러분의 인생살이는 길 가던 나그네, 호모 비아토르이다. 우리는 지금도 과거를 지나 현재를 거쳐 미래로 가는 이러한 길 가는 존재이고 그것만이 아니라,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우리 삶의 모든 과정이 사실은 길 가는 것과 같은 것이고, 뿐만 아니라 구원(救援)과 영생(永生), 진리(眞理)를 찾아서 방황(彷徨)하면서 세상을 떠도는 구도(求道)의 모습도 길 가는 것으로 은유(隱喩)할 수 있다. 자 그러면, 우리의 인생이 나그네 인생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영적으로 바라보면, 우리가 정주자나 시민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라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인간을 이야기 할 적에 흔히 이중국적을 이야기 한다. 우리는 하늘을 국적으로 가지고 있고, 지상에 대한민국에 국적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말하지만 사실은 성경을 조금 더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따르면 명쾌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빌립보서 3장 20절을 보면,
 
I. 인생은 나그네이다.

*​빌립보서 3:20,
20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그럼 여러분 이것은 이중국적이 아니고 인간적으로 볼 때는 이중국적일지 몰라도 하나님의 시각 영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때는 우리는 하나의 국적만 지닌 것인데 그것은 천상의 국적이고 땅 위에서는 그것은 대한민국 국민이든지, 미국 국민이든지 상관없이 이건 나그네이고 외국인이라는 것이다. 여러분 그것은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특히 신약에 나타난 그리스도인에 대한, 그리스오인의 정체에 대한 신약의 답변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 있는가? 이 땅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자기가 천국 시민권을 지녔다는 그 인식보다는 대한민국 국민이요, 미국의 시민이요, 이 의식이 사실 더 강하고 뿐만 아니라, 아예 자기가 나그네라는 이런 사실을 인정(認定)하지도 심지어 인지(認知)하지도 않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나그네 의식이 없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믿음의 동료들, 우리가 우리를 돌아보면 그저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가지고 기왕이면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모습을 드러내면서 소위 성공적인 삶을 살고 싶고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도 필요하고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나그네’이구나! 이렇게 의식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이 나그네 의식이 없다는 것, 나그네 의식의 결핍이 무엇인가? 그저 이 세상을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내가 살다가 이곳에 영원이 머무는 것이 아니라, 떠난다는 것을 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말하자면 세샹에 대해서는 타향(他鄕)성(性)을 느껴야 되는데 여기에서 편안함과 본향(本鄕)성(性)을 느끼는 것이고, 세상에 대해서 이질(異質)성(性)을 느껴야 되는데 무한한 동질(同質)성(性)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여러분 믿음의 선대(先代)를 좀 보라. 아브라함이 살던 곳은 오늘의 뉴욕이나 파리와 같은 세계 최초의 도시인 우르이다. 세계 최초의 나라가 수메르이고 거기에 대표적인 도시가 우르와 우릎이다. 아브라함은 거기 출신이니까 우리가 누리는 오늘날 나라와는 비교할 수가 없어도 당대 사람들이 내릴 수 있는 최고의 문명, 그런 속에 살았고 그 시애의 아마 재미거리들을 향유(享有)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네 아비 본토라도 진정한 고향이 아니다. 라고 하신다. 거기에 동질성을 느끼면 안 되고 이질성을 느끼라며 떠나라고 하신다. 소돔과 고모라의 정말 죽치고 앉아 있는 살고 싶었던 그 롯의 아내와 그 식구들에게도 ‘너희도 거기서 왜 동질성을 느끼느냐’라고 하시며 떠나라고 하신다. 여러분, 개인뿐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처음에는 애굽에게 나중에는 바벨론에 아예 죽치고 앉아서 그 나라 시민으로 살고 싶은 그들에게 떠나라고 하신다. 이것은 그의 본향도 아니고 네가 머물 곳도 아니라고 하신다. 여러분, 이렇게 하시면서 지상에서 이스라엘만큼 하나님께서 민족적으로 세상에 살면서 본향의식을 못 느끼게 한 그런 민족이 없을 것이다. 왜 이스라엘 백성이 아브라함부터 떠돌이, 야곱부터 떠돌이 그리고 지나간 수천 년 시간 동안 디아스포라로 온 세상을 떠돌았고, 그리고 여러분 중동에 조그만 무슨 나라를 세웠다 하더라도 거기에 무슨 평안함이 있는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 가난이고 어디고 다 떠나서 ‘너희들이 민족이요, 방랑민족이요, 로마드 민족이요, 너희는 유랑민이다.’ 라는 것을 일깨워 주고 오늘날 영적 유대인이요,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개인의 삶의 어려움을 통해서, 아니면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이런 많은 시련들을 통해서 거듭거듭 깨우쳐 주시는데 ‘그 세상이 너희가 정주할 곳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여러분 따라서 초대교회에 성경 다음으로 나오는 문헌이 소위 사도 적 교부들의 문헌인데 그 중에 하나인 디오게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고국에 거주하지만 그들은 마치 이방인(異邦人)처럼 지내고 있다. 그들은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영어로, In the world, not of the world​. 말이 어원이 이 디오게네트 문서 안에서 나온 것이다.
 
자 여러분 이렇게 이 시간 예배를 드리는 모두가 말씀 앞에서 ‘나그네 의식’이 중요하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면 우리가 길 가는 존재, 도상(途上)적(的) 존재이고 우리의 삶은 그저 지나가는 과정(過程)적(的) 삶이라는 것이다. 여러분 이것이 사실은 초대교회뿐만이 아니라, 일제의 암울(暗鬱)한 시절, 6.25의 그 참혹(慘酷)한 그 전항 가운데서 우리의 부모님들,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하늘가는 밝은 길’을 부르시면서 이러한 나그네 의식을 지녔다. 그러나 이 땅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의식이 과연 있느냐? 이다. 우리가 까마득하게 잊고 살아간다. 그러면서 우리는 시련(試鍊)과 박해(迫害)를 당해서 영적으로 이런 걸음을 교회도 나그네 교회요, 우리도 나그네 삶인데 우리는 깨달아야 되는데 우리는 여전히 깨닫지 못하면서 이 세상이 영원한 집인 양 그렇게 나그네 됨을 망각(妄覺)하고 타향(他鄕)을 본향(本鄕)화로 시도하고 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길 위의 존재요, 천상으로 가는 지상으로 가는 나그네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분명히 인식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II. 나그네는 가는 길을 자지도 쉬지도 않는다.

-나그네 인생을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저 뜬 구름처럼 살다가 왔다가 가는 것일까? 아니면 불자들처럼 세상에 모든 인연을 끊고 산으로 들어가라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다. 나그네는 길도 열심히 가고 길 위에서도 쉬지 않고 자기의 역할을 다 하는 것이다. 인생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문제를 두고 우리가 따르는 칼빈도 유명한 그의 저서 ‘기독교 강요 제3권’에서 지상에서 인간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적고 있고, 그리고 지난 세기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클라스퍼 스킬드와 아브라함 카이퍼도 이 문제를 두고 서로 설전을 벌였다.
두 사람은 이렇다.

※클라스퍼 스킬드는
“우리가 나그네이니까 세상에서는 뜬 구름처럼 살다가 그저 복음 전파만 하고 그저 가는 것이다.” 라고 그렇게 주장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이 세상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명의 장소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문화적인 사명을 완수를 해야 된다.” 라고 했다.
 
-앞의 버전은 1버전인데, 나그네로서의 복음전파하자는 것이다. 두 번째 버전은 문화적 사명자로서의 삶이라고 한다. 사실 대조적인 입장이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을 보면 이 두 가지는 대조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호되는 그런 주장이다. 스킬드 말처럼 우리는 나그네이다. 그러나 카이퍼 말처럼 우리가 나그네이지만은 뜬 구름처럼 속세를 떠나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 하나님이 주시는 일터, 하나님이 주시는 다양한 달란트를 가지고 또 인생의 소명을 이루면서, 열심히 살면서 그 방향은 천상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특별히 카이퍼가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 저와 여러분을 구원사적 관점에서 이렇게 위치 설정을 하면
※카이퍼: 창조-타락-구속 그 가운데서 우리는 타락한 이후에 태어난 사람이다. 그러면 그런 게 아니고 지상의 모든 사람이 타락한 이후에 태어난 사람이니까, 그들에게는 구원이 필요하고 우리가 그들에게 접근할 때도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복음을 전한다. 그리고 그 구원 받고 나서는 끝나는 것이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카이퍼가 볼 때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왜 창조를 하셨냐는 것이다. 타락한 상태로 해서 그러면 구원받게만 하려고 한 것인가? 그러면 애당초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시지 말지, 그 보내신 이유를 우리가 망각하고 있다. 타락한 상태에서 태어나다 보니까, 구원받고 구원시키는 데에만 급급하다보니까 정작 구원 받고 나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잘 모르고 그리고 왜 하나님이 나를 왜 창조했고 보냈는지에 대한 우리가 그간에 망각하고 있던 창조의 목적과 내 삶의 의미에 대해서 못 깨닫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타락한 상태에서는 창조된 목적을 망각하고 살았지만 이제는 구원 받았다면 이제 다시금 돌아가서 하나님이 나를 이 왜 보냈을까? 이 달란트는 왜 주셨을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무엇일까? 내 인생의 목적이 무엇일까? 이것을 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살고 열매 맺으면서도 우리의 지향점은 현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들이 지상에서 나그네로 살지만 하나님이 주신 생명, 생명의 길이, 건강, 각종 달란트를 가지고 정말 삶을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정말 학생들이 공부를 하면 공부를 할 때는 끝장을 내야지 하는 둥 마는 둥 하면 그게 무슨 공부이냐고 말한다. 예수를 믿으면 화끈하게 끝장을 내 봐야지, 인생이란 것을 좀 화끈하게 살아야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그네의 삶을 어쩌면 화끈하게 살기를 원하실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 바울인데 여러분 사도 바울은 현재에서 천국을 선취하며 살고 거의 미쳤다. 그를 일반인이 볼 때는 정상적인 사람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복음을 위해서 인생을 얼마나 치열하게 사는지, 거의 미친 사람처럼 보인다. 우리가 바울처럼 그렇게까지는 되지는 못해도 우리가 바울처럼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라고 고백할 정도로 정말 우리가 얼마동안 살지는 모르지만 정말 치열하게 살아가야 하며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소명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III. 나그네는 길 위에 집을 짓지 않는다.

-우리가 나그네 길을 가다보면 여러 가지 유혹(誘惑)이 많이 있고 빠지기 쉬운 함정이 많이 있다. 그중에 하나가 길 가다가 한 눈 팔기이다. 천상을 향해 가다가 천로(天路)역정(驛程)의 기독교처럼 허영의 시장, 번영의 시장 같은 데에 가면, 눈이 현혹되어가지고 길 가는 것을 잠시 중단해 가지고 거기에 한 눈을 판다. 무엇 때문에 한 눈을 팔까? 신학자들이 정리한 것을 빌리면 대게 네 가지인데, 세상에서의 부요(富饒)함, 권력(權力), 향락(享樂), 명성(名聲), 뭐 이런 거라고 보고 있다. 특별히 우리가 사는 이 자본주의 시대에 가장 빠지기 쉬운 우리 한 눈 팔기는 돈에 대한 유혹일 것이다. 오늘 날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 사람들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이 이 땅의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이 재물(在物)과 부요에 대한 한 눈 팔기에 빠져 있는데 이 부요가 우리로 하여금 나태(懶怠)와 향락의 삶으로 연결되게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권력과 명예(名譽)에 빠진 그런 일도 있다. 그러나 하여튼 우리의 눈에 이렇게 세상 것에 눈이 멀어가지고 탐욕(貪慾)의 비늘이 벗겨지지 않으면, 영원한 것을 바라보는 영안(永安)은 어두워지게 되고, 사실은 그런 지나가야 될 세상의 가치들을 절대화 하는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는 성경은 이런 문제를 아주 신랄(辛辣)하게 비판(批判)한다.
‘육신의 정욕이나 안목의 정욕이나 이생의 자랑’ 그것이 학벌, 지위, 겉으로 자랑하든지 속으로 자랑하든지 모든 것은 아버지께로 온 마음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고 야고보서 4장 4절은 더 과격하게 말씀한다.

* 야고보서 4:4,
4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너 원수로 살아볼래?” 하신다. 성경은 훨씬 비판적이고 소위 레디컬하다. 과격하다. 하나님과 원수지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이 질문하는 것은 그러면 우리는 세상 것을 다 포기하고 살고 수도자처럼 금욕주의로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세상에서 기쁨과 문화를 배제하라는 것인가? 아니다. 여러분 성경은 때로는 모순되는 것처럼 많이 하고 진리 자체가 그렇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세 분이시다. 하나님이 예정은 했는데 전도를 해야 된다. 여러분, 모든 게 이성으로 볼 때는 이것이 이성적으로 이해가 잘 안 되는 소위 페라독시컬(paradoxicaltrus), 역설적인 같은 게 우리가 이성을 초월해서 많이 있다. 그 차원을 넘어가면 이것이 얼마나 조화가 되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예정은 했지만 전도를 하라는 것은 우리의 전도를 통해서 그 영혼도 구원을 받지만, 우리가 전도함으로써 열매 맺게 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이다. 우리 전도를 안 해도 구원을 하신다. 우리보도 전도를 하라는 것은 우리가 전도 안하면 그 사람이 구원을 못 얻어서 그런 게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괜히 헛일에 집중하지 말고 복음 전함으로 영혼구원 하므로 네가 더 복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열매 맺게 하시는 것이니까 하나님이 복 주시게 하시는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인생에 충돌이지 아니다. 여러분 넘어가보면, 이것이 영적으로 이 진리가 얼마나 깨달아지는지 모른다. 여러분, 성경은 우리를 나그네요, 지상의 길 위에 집을 짓지 못하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세상에 사는 동안 락(樂)을 누리고 분복(分福)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타락을 하고 나서 하나님은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인간이 타락(墮落)하고 나서 아담의 후예들을 하나님은 짐승이나 벌레로 만들지 않았다. 남성과 여성으로 똑 같이 봄
, 여름, 가을, 겨울,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세상에 깔려 있지 않은가? 가을에는 낙엽 속에, 겨울에는 눈 속에, 봄에는 파릇파릇 솟아오르는 그런 꽃이나 풀 속에서 거기에서 생명의 아름다움이 발견되고 호수의 그 반짝임 속에서 어린아이의 볼에 촉감에서, 선에서, 소리에서, 색깔에서, 여러분 지상은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타락으로 인해서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왜 여전히 창조의 아름다움을 남겨 두셨을까? 피곤한 나그네의 삶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慰勞)이다. 하나님의 위로이니까 여러분들이 자연을 즐기고 문화를 즐기고 예술을 즐기고 또 하나님이 주시는 소명으로 열심히 살아가게 하시는 부요가 있으면 그 부요도 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명예와 복도 누릴 수 있다. 다만 문제는 그것을 누리다 보니까 그것이 명예라 여기고 여기에 더 절대화 하고 그리고 아예 천국 가는 나그네 인생을 모르고 지상의 정주(定住)자처럼 사니까 그거는 아니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상에 살다가 우리의 나그네의 길에 방해 되는 한 눈 팔기 하는 것을 조심해야 되고 그 다음에는 땅에 주저앉지를 않아야 한다. 어거스틴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어거스틴: “우리가 인생의 나그네 길을 가다보면 몇 개의 여관이 있다. 그 여관에서 휴식하고 쉬고 물도 마시고 차도 들이키고 과일도 먹고, 거기서 휴식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 있냐면 이 여관에 죽치고 앉아 있는 게 문제이고 이 여관이 내가 살 집이라고 착각을 하면서 천상으로 가는 나그네 길을 중단하는 것이 문제이다.”라고 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전한 이런 이야기가 있다. 저 노르웨이에 사는 들오리들이 있다. 겨울이 되면 추우니까 늦가을에 따뜻한 남쪽을 찾아서 지중해 남녘을 향해서 날라 갔다가 거기에서 겨울을 지나고 자기들이 머무르는 노르웨이로 돌아간다. 어느 해에 이 들오리들이 날아가는데, 한 마리의 들오리를 보니까 네덜란드 상공을 날아가는데 거기에 튤립, 아름다운 호수, 정말 네덜란드가 화해의 세계의 시장을 장악하고 있듯이 아름다운 꽃밭이 있고, 그 꽃밭 사이에 예쁜 오리들이 옹기종기 노는 것을 봤다. ‘저기에 잠시 내려갔다가 구경을 하고 우리 일행을 따라가면 되겠지’ 싶어서 일행에서 빠져나온 들오리 한 마리가 네덜란드에 풀밭에 내려앉았다. 거기에 있던 집오리들은 이렇게 자기와 닮은 노르웨이에서 친구가 왔다고 먹을 것을 주고 환영을 해주고 놀아주고, 조금 놀다가 가면 된다고 위로를 해주었다. 그런데 좀 어두워지니까 밤이 되었다. 그래서 유혹을 한다. ‘그만 좀 지내다가 나중에 봄이 되어서 다시금 너희 가족이나 친구들이 남쪽의 지중해에서 날아갈 때, 그 때에 따라가면 되지 않느냐?’ 했다. 그게 좋겠다 싶어서 꽃밭에서 놀고 좋은 융숭(隆崇)한 대접(待接)을 받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집오리들과 뒹굴면서 놀았다. 드디어 봄이 되자 남녘에 갔던 친구들, 가족들이 이제 날개 짓을 하면서 북쪽으로 날아간다. ‘이제 따라가야 되겠지’ 하면서 퍼덕퍼덕 날개 짓을 하는데 살이 너무 쪄서 아무리 날개 짓을 해도 1미터도 못 올라간다. ‘내년에 봄이 될 때 따라가면 되겠지’ 하면서 다음 해에 또 날아가는데 몸이 더 무거워져서 날 수가 없었다. 해마다 자기의 가족들, 자기의 친구들, 자기의 고향에서 남녘으로 높은 창공(蒼空)을 아름답게 수놓으면서 날아가는데, 그것을 부럽게 바라보면서 결국은 날지 못하는 영원한 집오리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무슨 말인가?
우리가 날아가는 나그네 인생이다. 그런데 우리가 땅위에서 주저앉아 가지고 그냥 거기에서 전부라고 살아가니까 우리가 결국에는 영적으로 비상하지 못하고 신앙의 아름다운 대로에서 낙오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는 이런 낙오된 오리들이 없기를 바라고 공중을 비상해서 살아가는 자가 되기를 축복한다.
 
Ⅴ. 돌아갈 곳이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 나그네들은 돌아갈 곳이 있다. 여러분 우리는 그저 이 세상을 왔다가 이렇게 뜻 없이 이렇게 살다가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 성을 예비하셨다고 하신다. 히브리서를 보면,

*히브리서 11:16,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땅위의 집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의 한 성을 예비 하셨다고 하신다. 여러분 도마행전이라고 가경인데 성경은 아니라서 읽지는 않는데 초대교회에서는 개인의 경건을 위해서 위경은 읽지 못했는데 가경은 허락했다. 거기에 보면, 도마가 열두 제자들이 예수님 승천하실 때에 제비를 뽑아서 세 개의 지역을 담당을 하는데 도마는 인도를 뽑았다. 가기 싫어하는 도마를 예수님께서 집을 완공을 짓고자 군다프로스라는 인도의 왕의 그 상인에게 목수 도마를 팔았다. 그래서 예수님이 파니까 팔려가지고 이제 인도로 가기 싫은 것을 억지로 갔는데, 거기에 가니까 군다프로스라는 왕이 자기의 궁전을 지으라고 은과 금을 주면서 자기는 순시를 다녀올 테니까 지으라고 했다. 그래서 도마가 그것을 짓지 않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다 나누어 주었다. 임금이 돌아와서 보니까 집은 짓지 않고 다 재산을 낭비(浪費)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기를 속인 그 상인하고 도마를 감금(監禁)시켰다. 그리고 며칠 뒤에 그들의 가죽을 벗겨서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그 밤에 그 임금의 동생 갓이 세상을 떠났는데, 천국에 가니까 천사들이 그를 안내했다. 그래서 어느 집에 살 것인지를 성을 보여주는데, 물어보니까 가장 못한 집, 자기는 지상에서 올바로 살지 못했으니 좀 못한 집을 지적을 했는데 이 천사가 하는 말이 “이 집은 너를 위한 집이 아니라, 너의 형님, 군다프로스 왕을 위해서 지은 집이다.”라고 하고 이 집은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잠을 깨서 이야기를 했다. “형님 보니까 저 도마라는 사람이 지상에 집을 짓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집을 지었는데, 지상에 집을 지은 형님의 왕궁과는 비교가 안 되고 너무 찬란하고 화려한 왕궁을 저 도마라고 사람이 형님이 영원히 살 수 있는 천상에 지은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고 왔습니다.”라고 하면서 저 사람을 풀어 놓으라고 했다. 이래서 도마가 인도의 복음을 전했다는 그런 전설이 있는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상을 떠나게 되면 영원한 하늘나라에 상급(賞給)으로 성(城)을 주셨다. 우리는 여러분 지상에 살면서 아무리 우리가 사는 것이 유복하고 행복해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영원한 나라를 사모하는 소망이 있어야 한다.
 
여러분 좀 보자, 우리가 성령님의 열매를 신앙의 등목으로 이야기 하고, 거기에다가 요즘 시대에는 뭐 정의(定義)라든지, 뭐 자선(慈善)이라든지, 이런 추가적인 등목도 많이 지녀야 된다고 이야기 한다. 개인이나 교회가, 특별히 성경은 믿음 소망 사랑은 가장 으뜸이 되는 신앙의 등목으로 말하는데 믿음의 등목이 있다. 사랑을 실천한다. 소망은 어디 갔는가? 여러분 모든 현대 교회에서 놓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성경의 신앙의 등목 가운데 잃어버린 것이 소망이다. 그 소망은 구약에서 말하는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에 모든 소망은 히브리서 본문에 나오듯이 내세(來世)에 대한 소망(所望)이다. 너무 유복(裕福)하게 살고 잘 살다보니까 지상의 모든 교회의 성도들은 다른 사랑이니, 정의니, 사회정의니 다 추구하면서 정작 소망은 놓치고 있다. 그러면 소망이 무엇일까? 핵심이 이것이다. 소망이 안 보이는데 뭐 중요하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서 11장 1절을 보면,
 
*히브리서 11:1,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 눈에 안 보이는 그 실상이 그게 있다는 것인데 믿음이라는 것은 안 보이는 것을 있음으로 믿는 것이고 손에 안 잡히지만 있음을 깨닫고 그 실제를 받아들이는 것인데 믿음의 절정(絶頂)이 바로 소망이다. 믿음이 최고에 올라간 사람은 어떤 경지냐면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지닌 것이다. 여러분 그러니 우리가 정말 우리가 놓치고 있는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다. 히브리서 11장을 저의 표현으로 정의를 하면 소망이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향수병이다. 믿음의 절정도 천국에 대한 노스텔저, 하나의 향수병이다. 그것은 우리의 본향이다. 제가 여러 분야의 책을 썼지만 문학과 지성사에 나오는 우리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실려 는 책이 있는데 그것이 ‘ 고향’ 이라는 글이다. 이 고향이라는 책은 왜 썼냐면 그 안에 하나님이라는 말은 별로 안 나온다. 문학책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인생에 깨우침을 주자는 뜻이다. 핵심은 하나님을 떠난 인류는 실향민(失鄕民)이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인류는 진정한 귀향(歸鄕)이다. 여러분들이 다 명절 때에 고향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인생의 진정한 고향이 어디인지를 성찰(省察)해 보라는 것이다. 이런 화두(話頭)를 던질 거리이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신앙생활에 가장 큰 것은 본향에 대한 무감각이다. 돌아갈 것에 대해서 의식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키에르케고르의 들오리처럼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이 시간의 모두가 길 위에 집을 짓지 않고 영원한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다시금 되새기고 가슴에 품고, 그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을 힘 있게 살아가는 자가 되기를 영원한 소망을 가진 자답게 평온을 찾고 이 세상의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그 소망을 붙들고 힘 있게 믿음으로 헤쳐가기를 소원한다.
 
♣요약
정치 경제와 다양한 영역에서 우리가 잊고 있던 소망을 다시 되새기고, 나그네 의식과, 가는 길을 자지도 쉬지 않아야 하며, 길 위해 집을 짓지 말고, 우리가 돌아갈 본향을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 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을 확고히 가지고 이 소망을 붙들고 힘 있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늘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담대히 살아가며 열매 맺는 자 되고, 우리의 삶 가운데서 천국의 소망을 놓치지 않는 진정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히브리서 11:13~16)
-온전한 믿음, 최후 승리를 얻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증거하기 위해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모본을 제시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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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프렘 버클 목사님(런던시티미션대표)-초빙-3부,4부)통역(정상익 부목사님)-“하나님의 영광은 누구에게서 나타나는가?” -(고린도 전서 1:18-25)

 
-안녕하세요. 엘프렘 목사이다. 여러분 환영해 주셔서 감사하다. 제가 한국에 처음 방문했다. 런던으로부터 이곳에 온 것이 큰 영광이다. 오정현 담임목사님의 친절함에도 감사를 드리고, 유니온 신학교와 함께 사역하는 고성삼 목사님과의 파트너십과도 굉장히 감사하게 생각한다. 런던시티미션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유니온 신학교화 협력하여 런던에서 사역을 펼쳐나가고 있다. 여러분 런던시티미션에 대해서 잘 모르실 것이다. 데이빗 나스미스란 사람에 의해서 1835년에 시작된 미션이다. 그의 마음과 열정은 가장 약하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서 가는 것이었다. 190여년이 계속 되면서 이 사역이 진행이 되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팀 켈러 목사님도 런던시티미션과 함께 하신 동역자 중에 한 사람이다. 우리 런던시티미션의 아주 중추적인 일을 했고, 그래서 저희 사역가운데 팀 켈러 목사님의 두 아들을 직접 훈련시키기도 했다. 우리 영국에는 안타깝게도 이제는 하나님을 알고 기독교를 따르는 숫자가 훨씬 적어졌다. 거의 50%의 인구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 해 줄만한 친구나 가족이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이 대한민국에서 하나님이 일 하시는 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여러분과 함께 파트너를 맺고 이렇게 복의 통로가 되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이렇게 높여진 나라가 굉장히 작았던, 낮추어졌던 것을 제가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그 영광을 드러내신다.
 
오늘 여러분께 두 가지를 말씀을 드리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사용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약함을 선택하신다. 이렇게 높여진 대한민국에 대해서 제가 알게 되었을 때, 이 웨일스, 영국에 있는 웨일즈 지방에서 한국으로 보낸 선교사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여러분이 아시는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 선교사이다. 27세의 나이에 이 땅에 와서 그 목숨을 잃게 된 그런 선교사이다. 그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그를 처형했던 사람에게 그 성경책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자신을 막 처형을 하려고 한 사람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토마스 선교사를 처형했던 사람의 사촌이 목사님이 되는 기적을 맛보게 된다. 조카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선택을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과 우리의 연약함을 아름답게 만드는데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가 읽었던 고린도전서 1장을 보면, 십자가의 도가 미련해 보이는 그것을 사용하셔서 사람들에게는 그 십자가의 도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그 놀라운 능력을 사용하심을 본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분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가 모두 아는 것처럼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미련하다고 한다. 그라니 하나님께서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여러분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여러분이 타고 있던 차량이 갑자기 멈추었다고 생각해보라. 제가 여러분을 도와준다고 갔다. 제가 자전거를 타고 여러분을 도와주러 갔는데 페달이 없는 자전거이다. “제가 당신을 도와줄게요. 함께 합시다.” 제가 그렇게 말한다면 여러분은 저를 신뢰하시겠는가? 여러분, 페달이 없는 제 자전거를 보고 “참 미련한 소리 하네.”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럴 때 이렇게 말씀을 하고 싶다. 천성에 가는 길은 내리막길이라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볼 때 미련해 보이는 것을 사용하신다. 우리가 보기에 인류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고 불가능한 일로 보이더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볼 때, 이 십자가의 도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미련해 보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고 나타내신 것을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21절 말씀을 보면
 
*고린도전서 1:21,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하나님께서 마치 그 미련해 보이는 그 십자가를 통해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이야기 한다. 하나님의 그 구원의 역사는 인간의 지혜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재물로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약점을 사용하셔서 스스로에게 영광 받을 수 있도록 일하신다. 우리가 구약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볼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열방의 아비로 삼으신 것을 볼 수 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아브라함은 자녀를 가질 수 없었던 상황에 놓였다. 아브라함이 연약했지만 하나님은 강하신 것을 본다. 우리가 야고보를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셨을 때는 절름발이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약점을 통해 일하셨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내셨다. 우리가 기드온을 볼 때에도 가장 작은 지파 중에 가장 작은 사람이었다. 그에게 군대가 주어졌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군대를 더 작게 만들라고 하셨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셔서 약전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삼으셨지만 여전히 다윗은 가장 젊을 사람으로 보이고 있었다. 너무 작았기 때문에 골리앗과 싸울 때 갑옷을 입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그저 물맷돌을 가지고 있다는 약함 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강함을 그에게 약함을 통해 드러내셨다. 이 다윗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난 후에 사울 왕으로부터 도망을 쳤다. 아둘람 굴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여러분이 다윗 왕과 아둘람 동굴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저도 잘 안다. 오정현 담임 목사님께서 말씀을 자주 이 말씀을 전해 주셨다고 들었다. 다윗이 그 동굴에 있을 때에 장정들이 그에게 다가온다.
 
사무엘상 22장에 보면, 다윗과 함께 했던 그 장정들이 은혜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고통을 겪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우울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장정들이 연약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장정들이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되었다. 이 다윗 왕과 함께 다윗 왕국을 세우는데 쓰임 받았다. 그리고 다윗 왕국이 세워졌을 때 그 장정들도 함께 세워지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연약하다고 사람들이 생각을 했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약함을 통해 일하셨다. 우리가 잘 알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데 다윗왕의 이야기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왕이시다. 우리는 그분의 왕국을 세우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올 때 필요한 상태이고 고통을 받고 있는 상태이고 그리고 우울한 상태라 할지라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는데 애를 쓴다면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세워질 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약함을 통해서 드러내신다. 우리에게 많은 예들이 있다. 여러분 이사야에 대해서도 이야기 할 수 있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을 했다. “나의 입술은 부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그의 입술을 정결하게 만드셨다. 그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우리 호세아 이야기도 살펴볼 수 있다. 호세아도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아내는 정조를 지키지 않는 아내였다. 그러나 이 호세아의 이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드러내신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약했다고 성경에 이야기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제자들을 보고 교육받지 못한 어부들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리고 제자들 중 한 명은 미움을 받고 있었던 세리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시고 그의 약함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셨다.
 
여러분이 아시는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이다. 사도바울도 약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갈라디아서를 썼을 때에 눈의 아픔에 대해서 이야기를 썼다. 그게 아마도 육체의 가시라고 표현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사도 바울이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하나님을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 말씀하셨다. 내 힘과 능력은 약함을 통해 완성된다고 하는 것이다.
 
여러분,
약하다고 느끼실 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약함을 사용하셔서 그 영광을 드러내신다. 단순히 하나님께서 그 약함을 사용하시는 것만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약함을 견디시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고 받아주시는 것만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약함을 오히려 선택해서 사용하신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1:26절을 보면,
 
고린도전서 1:26,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세상에 미련한 것을 택하셔서 이 세상에서 미련해 보이는 것을 택하셔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세상에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어떤 사람이든 주님 앞에 나아올 때, 우리가 연약(軟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가진 재물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우리를 구원(救援)할 수 없다. 우리의 지혜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우리의 가족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우리 교회조차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우리 영국에도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복지 정책(政策)들이 있는데 스스로를 돕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복지(福祉)를 통해서 건강과 또 재물을 전달하고 있다. 만약 그 복지정책을 사용하려면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한다. 조금이라도 무언가 가지고 있다면 그 정책대로 도움을 받을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 손을 열고, 그리고 우리 스스로를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아가야 한다. 네 맞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의 그 강함은 우리의 약함을 통해 완성된다. 여러분 여러분이 연약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다. 그리고 여러분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라고 딱히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완벽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의 유혹을 뿌리쳐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약함을 사용하시고, 그 약함을 선택(選擇)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약함을 찾고 계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의 지혜를 의지(依支)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 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의지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오류를 범(犯)하면 안 된다. 우리의 전통은 따르면서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財物), 그 재물에 의지하면서 하나님과 교제(交際) 하는 것을 거리 두어서는 안 된다. 부자에게나 말씀을 전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말씀을 전하지 않은 것도 안 된다. 하나님의 그 강함을 약함을 통해 완성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강함을 싫어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강함을 사용하시기를 원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강함을 모두 하나님께 내려놓고 항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강함을 싫어하지 않으신다. 하나님 대신에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내 마음을 싫어한다. 하나님께서는 약함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런던시티미션에서 저와 함께 하고 있는 제 바로 위에 있는 대표가 그러라 밀러라는 분인데, 굉장히 비극적인 일을 겪으셨다.
 
제가 여기 오기 전에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끔 허락해 주셨다. 제 아들이 5년 전에 열다섯 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번 주가 그가 아들이 죽었던 것을 추모하는 주간이 되었다. 제가 그와 함께 이야기 하면서 한국에 왔을 때 저를 축복해 주셨는데 그래서 그분께 이야기를 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마음을 주셔서 우리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강함이 드러난다고 말씀을 전하려고 한다. 그러자 대표님께서 동의하시면서 “맞습니다. 목사님, 가셔서 약점을 통해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난다고 하십시오.” 라고 하셨다. 제가 아들을 잃고 난 후에 지난 5년 동안 참 약하다고 느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그 지난 5년 동안 런던시티 미션을 통해 수많은 변화가 일어난 것을 보게 되었다. 오직 하나님의 강함을 통해서만 일어났던 일이었다. 하나님의 그 강함은 약함을 통해 드러난다. 제가 이 대한민국이 건립되고 세워진 것을 볼 때, 손양원 목사님의 이 이야기가 떠오르게 된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두 아들의 아버지였는데 둘 다 죽임을 당했다. 자신의 아들들을 죽였을 때에 그 범죄자를 찾았을 때에 그를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다. 단순히 그를 용서해 주었을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들을 죽였던 사람을 자신의 양 아들로 삼기로 했다. 정말 강력한 간증거리이다. 어떻게 내 아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내 아들을 죽인 그 사람을 사실 안아줄 수 있을까? 그렇게 희생하고 그렇게 안아주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이다. 아멘,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시도록 선택하고 계신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어떤 강함이라도 의존하고 있다면 회개(悔改)하기를 바란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큰 의지를 한 것들을 이제 하나님께 내어 놓아야 한다.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의지하기를 원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의 약점을 통해 드러내실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 라고 말한다. 내가 가지고 있었던 이 많은 것들을 다 해로 여긴다는 것이다. 내가 배웠던 것들도 다 해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힘과 능력으로 3일 만에 일어나셨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다. 우리 하나님을 더 신뢰합시다. 그리고 연약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갑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마을로 초대한다고 이야기 해 줍시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리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에 감사를 드리자. 아멘.
 
♣요약
십자가의 도는 불신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일지라도 생명을 구원하는 반면, 사람의 지혜는 아무리 고상하고 놀라운 것일지라도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하며 결국은 멸망을 자초하게 되니 우리는 인간이 소유한 지식의 한계성과 상대성을 인식하고 인간의 지혜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참된 구원 행위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 주시고, 우리의 약점을 통해서 드러내 주심에 감사하며, 우리의 약점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의지하여 하나님 이름만이 홀로 영광 받으시기를 소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오히려 선택해서 사용하시니 하나님의 영광은 어디에서 나타나는 것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헌금 찬양(3부)-김주은집사, 김진영집사, 홍혜천 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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