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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3년 2월 12일) 제목: "나그네는 길 위에 집을 짓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은 누구에게서 나타나는가?" 말씀: 히브리서 11:13~16(1부,2부), 고린도전서 1:18-25(3부,4부)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영광찬양대 대표기도: 장은진 부목사님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 설교자: 전광식 목사님(전 고신대학 총장, 독수리 중고등학교 이사장)-초빙-(1부,2부), 에프렘 버클목사님(런던시티미션대표)-초빙-3부,4부) ㅡㅡㅡㅡㅡㅡㅡ *히브리서 11:13~16(1부,2부)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사무엘상 22:1~2(3부,4부) 1 그러므로 다윗이 그 곳을 떠나 아둘람 굴로 도망하매 그의 형제와 아버지의 온 집이 듣고 그리로 내려가서 그에게 이르렀고. 2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모든 자와 마음이 원통한 자가 다 그에게로 모였고 그는 그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그와 함께 한 자가 사백 명 가량이었더라. ---------‐---- ▶전광식 목사님(전 고신대 총장, 독수리 중고등학교 이사장)-초빙-(1부,2부)- ▶"나그네는 길 위에 집을 짓지 않는다.“ -이 아침 영광스런 예배의 자리로 인도하시니 우리 하나님을 찬양한다. 돌이켜보면 지난 20세기는 정치적으로 혹은 이데올로기적으로 동서 양진영이 세계 일종에 지도그리기 하면서 열정과 냉전을 치러왔다. 20세기가 끝나면서 한 쪽 진영이 현실 정치에서 이렇게 무너지면서 그 영역에 속해 있던 동구권의 많은 나라를 비롯하여 이렇게 세상이 바뀌게 되니까, 우리가 맞이하는 21세기는 더 이상 갈등, 이데올리기라는 대립이 사라지고 이제 인류의 앞날에는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 경제적으로는 이렇게 자본주의 적인 물결이 확산을 하면서 영구 평화가 오지 않느냐의 막연한 기대감을 가졌다. 여려분이 다 아시는 바대로 마치 유토피아의 세상이 올 것이라고 몽롱한 착각에 빠져있던, 특별히 미국 사람들에게 정말 현실은 이게 아니구나! 하는 정신을 번쩍 들게 한 것이 911, 극단 이슬람에 의한 미국의 무역빌딩에 대한 공격이었고, 그것을 계기로 미국이 아프칸 전쟁을 벌여서 20년이라는 긴 세월을 전쟁에 인력과 물자를 투입했지만 결국 그 이전의 40년 전과 똑 같이 미국이 월남에서 철수했듯이 아프칸에서도 철수를 해서 다시금 극단 이슬람이 그 지역을 장악(掌握)했다. 미국이 아프칸을 철수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코로나라는 것이 발생했고, 코로나가 조금 주춤해지려고 할 때에, 소위 우크라이나 전쟁이 터졌고, 우크라이나의 전항을 시시각각으로 뉴스를 보던 우리들은 최근에 약간 전쟁이 소강상태로 생각했는데 얼마 전에 또 튀르키와 시리아에 지진이 일어났다. 여러분, 우리가 꿈꾸던 낙원과 같은 20세기는 결코 인간의 몽롱한 기대대로 전개되지 않음을 알 수 있고, 또 이러한 극변하는 세계와 이 자연의 현상에서 가장 희생을 당하는 것은 인간이며, 전쟁에서도 인간이다. 그리고 코로나에서도 인간, 지진의 이 무서운 사태에서도 희생을 당하는 것은 천하보다 귀한 인간의 생명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현상을 보면서 오늘 이 시간에 과연 그러면 인간이란 무엇이며, 지상에서 인간이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어쩌면 좀 철학적이고 성찰할 수 있는 이런 주제를 이아침에 설교의 화두로 던지고자 한다. 진화론과 같은 세속과학하고 성경이 인간을 보는 시각이 확연이 다르다. 그런데 이 대조적인 두 가지 입장이 하나에 동요한 적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이성이라는 게 있다. 진화론에서도 인간을 이성에 부인하지 않고 우리 기독교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는 지.정.의가 있어서 동물과 달리 지성이 있음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 이런 이성을 가진 인간이 동물과 같은 다른 피조물과 달리, 어떤 기능을 하는 것인가? 그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생각하는 것이다. 좀 더 고상한 표현을 쓰면 동물과 달리 인간은 사유하고 사고(思考)한다. 그러면 이 잘난 이성으로 도대체 무엇을 사고하고 무엇을 사유(思惟)하는 것인가? 좀 극단적으로 생각해 보면 우리의 사유의 대상은 두 가지이다 매우 경건한 성도님들은 그런 분들은 아마 주야로 히브리서 3장 1절의 말씀처럼 예수님, 하나님을 깊게 생각할 것이다. 이를테면 칼빈 같은 사람, 흔히 칼빈을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칭하는데, 그의 머리에는 하나님의 생각으로 가득 찼고, 그의 입에는 온갖 언어가 하나님의 관한 언어로 가득하고, 그의 가슴에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열정으로 충만하니까, 칼빈을 조금만 툭 건드리면 그냥 하나님이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것이다. 이렇게 정말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 예수님을 주야로 묵상(默想)한다. 일반인들은 어떨까? 우리 주변에 사는 대부분 일반인들은 이미 예수님이 산상보훈에서 지적하신바 대로 이런 하나님의 나라나 의와 같은 이런 고상한 주제를 고민하는 게 아니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이런 소유를 바라면 세상에서 살아가는 문제를 밤낮 고민하는 것이다. 이 두 생각의 큰 주제 사이에 하나가 놓치는 것이 있는데 하나님을 너무 생각하다가 내가 누군지를 때로는 생각을 해야 되는데 놓치고, 세상을 너무 고민하가 세상에 사는 내 존재가 무슨 의미인지, 이런 자기에 관한 물음을 다 놓칠 수가 있다. 이것을 놓치다 보니까 자신의 대한 성찰도 없고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이 없으니까, 플라톤의 말을 빌리면 반성하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는 것이니까 많은 사람들이 따지고 보면 무가치한 삶이 삶이라고 영위하고 있다고 해도 과장된 말이 아닐 것이다. 자 그러면 대체 인생이란 것이 무엇일까? 여러분 이런 질문을 던지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여러분이 아시는 바대로 쉽지 않을 것이다. 로마의 대표적인 지성인 중에 한 명인 세네카는 인생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데에는 평생이 걸린다고 했다. 평생을 살아보지 못한 우리들은 이것에 대한 정답을 발견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실제로 다 산다고 해도 하나님의 계시(啓示)의 서치라이트, 조명이 없이는 타락으로 인해서 우리의 어두워진 지성이 자기가 누구인지도 잘 모르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들쳐볼 수밖에 없다. 성경은 모든 인간이 던지는 질문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답변서(答辯書)이다. 성경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말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이 세상의 삼라만상(參羅萬像)에 대한 답도 다 나온다. 성경에는 구원에 관한 말씀만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러면 구원 받았다면 저와 여러분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삶에 대한 답변도 보는 것이다. 자 그리고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그럼 성경이 인간에 대해서 무어라고 말할까? 성경 안에도 숱한 정의들이 발견되지만 오늘 우리의 말씀의 화두처럼 ‘인생은 다 나그네’ 라고 말을 한다. 바로 앞에 선 족장 야곱이 자기의 120년 삶을 회상(回想)을 하면서 내 삶이 험악한 나그네의 세월이었다. 라고. 그렇게 고백을 하고 신약에 와서 제자 중에 수제자(首弟子)라고 하는 베드로가 흩어진 믿음의 형제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들에게 수신자들에게 지칭하는 말이 본도와 갈라디아와 갑바도기아와 아시아에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라고 믿음의 형제들을 부르고 있고, 이런 일반 성도들뿐만이 아니라, 히브리서 11장 우리의 본문을 보면,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 기라성 같은 믿음의 조상들에게 성경은 이 사람들은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증거 했다. 라고 말을 하고 있다. 이렇게 이 모든 말씀을 볼 때, 우리가 살아가나는 이 인생살이를 지상에서 천상으로 나아가는 지장의 나그네 들이라고 말한다. 성경만 그런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서양에서는 인생을 비유할 때, 연극에 비유해서 무대는 세상이고 배우는 인간이다. 라는 은유를 하기도 했고 우리 동양에서는 중국에 한시에 종종 나오듯이 여행에 비유해 가지고 세상은 여관이고 사람은 그대로 길 가던 나그네로 비유했다. 이렇게 저와 여러분의 인생살이는 길 가던 나그네, 호모 비아토르이다. 우리는 지금도 과거를 지나 현재를 거쳐 미래로 가는 이러한 길 가는 존재이고 그것만이 아니라,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는 우리 삶의 모든 과정이 사실은 길 가는 것과 같은 것이고, 뿐만 아니라 구원(救援)과 영생(永生), 진리(眞理)를 찾아서 방황(彷徨)하면서 세상을 떠도는 구도(求道)의 모습도 길 가는 것으로 은유(隱喩)할 수 있다. 자 그러면, 우리의 인생이 나그네 인생이라는 것이 무슨 뜻인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서 영적으로 바라보면, 우리가 정주자나 시민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라는 것이다. 신학적으로 인간을 이야기 할 적에 흔히 이중국적을 이야기 한다. 우리는 하늘을 국적으로 가지고 있고, 지상에 대한민국에 국적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말하지만 사실은 성경을 조금 더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따르면 명쾌하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빌립보서 3장 20절을 보면, I. 인생은 나그네이다. *빌립보서 3:20, 20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그럼 여러분 이것은 이중국적이 아니고 인간적으로 볼 때는 이중국적일지 몰라도 하나님의 시각 영적인 시각에서 바라볼 때는 우리는 하나의 국적만 지닌 것인데 그것은 천상의 국적이고 땅 위에서는 그것은 대한민국 국민이든지, 미국 국민이든지 상관없이 이건 나그네이고 외국인이라는 것이다. 여러분 그것은 우리가 부인할 수 없는 특히 신약에 나타난 그리스도인에 대한, 그리스오인의 정체에 대한 신약의 답변이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 있는가? 이 땅에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자기가 천국 시민권을 지녔다는 그 인식보다는 대한민국 국민이요, 미국의 시민이요, 이 의식이 사실 더 강하고 뿐만 아니라, 아예 자기가 나그네라는 이런 사실을 인정(認定)하지도 심지어 인지(認知)하지도 않는 경우가 많이 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나그네 의식이 없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의 믿음의 동료들, 우리가 우리를 돌아보면 그저 세상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가지고 기왕이면 모든 분야에서 탁월한 모습을 드러내면서 소위 성공적인 삶을 살고 싶고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의 도움도 필요하고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나그네’이구나! 이렇게 의식하는 경우가 많지 않다. 이 나그네 의식이 없다는 것, 나그네 의식의 결핍이 무엇인가? 그저 이 세상을 지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내가 살다가 이곳에 영원이 머무는 것이 아니라, 떠난다는 것을 별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말하자면 세샹에 대해서는 타향(他鄕)성(性)을 느껴야 되는데 여기에서 편안함과 본향(本鄕)성(性)을 느끼는 것이고, 세상에 대해서 이질(異質)성(性)을 느껴야 되는데 무한한 동질(同質)성(性)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여러분 믿음의 선대(先代)를 좀 보라. 아브라함이 살던 곳은 오늘의 뉴욕이나 파리와 같은 세계 최초의 도시인 우르이다. 세계 최초의 나라가 수메르이고 거기에 대표적인 도시가 우르와 우릎이다. 아브라함은 거기 출신이니까 우리가 누리는 오늘날 나라와는 비교할 수가 없어도 당대 사람들이 내릴 수 있는 최고의 문명, 그런 속에 살았고 그 시애의 아마 재미거리들을 향유(享有)할 수 있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실 때는 네 아비 본토라도 진정한 고향이 아니다. 라고 하신다. 거기에 동질성을 느끼면 안 되고 이질성을 느끼라며 떠나라고 하신다. 소돔과 고모라의 정말 죽치고 앉아 있는 살고 싶었던 그 롯의 아내와 그 식구들에게도 ‘너희도 거기서 왜 동질성을 느끼느냐’라고 하시며 떠나라고 하신다. 여러분, 개인뿐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처음에는 애굽에게 나중에는 바벨론에 아예 죽치고 앉아서 그 나라 시민으로 살고 싶은 그들에게 떠나라고 하신다. 이것은 그의 본향도 아니고 네가 머물 곳도 아니라고 하신다. 여러분, 이렇게 하시면서 지상에서 이스라엘만큼 하나님께서 민족적으로 세상에 살면서 본향의식을 못 느끼게 한 그런 민족이 없을 것이다. 왜 이스라엘 백성이 아브라함부터 떠돌이, 야곱부터 떠돌이 그리고 지나간 수천 년 시간 동안 디아스포라로 온 세상을 떠돌았고, 그리고 여러분 중동에 조그만 무슨 나라를 세웠다 하더라도 거기에 무슨 평안함이 있는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이 가난이고 어디고 다 떠나서 ‘너희들이 민족이요, 방랑민족이요, 로마드 민족이요, 너희는 유랑민이다.’ 라는 것을 일깨워 주고 오늘날 영적 유대인이요,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들에게도 하나님께서 우리의 개인의 삶의 어려움을 통해서, 아니면 시대적이고 역사적인 이런 많은 시련들을 통해서 거듭거듭 깨우쳐 주시는데 ‘그 세상이 너희가 정주할 곳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여러분 따라서 초대교회에 성경 다음으로 나오는 문헌이 소위 사도 적 교부들의 문헌인데 그 중에 하나인 디오게네투스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글에 보면, 이런 말이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고국에 거주하지만 그들은 마치 이방인(異邦人)처럼 지내고 있다. 그들은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 영어로, In the world, not of the world. 말이 어원이 이 디오게네트 문서 안에서 나온 것이다. 자 여러분 이렇게 이 시간 예배를 드리는 모두가 말씀 앞에서 ‘나그네 의식’이 중요하다. 그것이 무슨 말이냐면 우리가 길 가는 존재, 도상(途上)적(的) 존재이고 우리의 삶은 그저 지나가는 과정(過程)적(的) 삶이라는 것이다. 여러분 이것이 사실은 초대교회뿐만이 아니라, 일제의 암울(暗鬱)한 시절, 6.25의 그 참혹(慘酷)한 그 전항 가운데서 우리의 부모님들,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하늘가는 밝은 길’을 부르시면서 이러한 나그네 의식을 지녔다. 그러나 이 땅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의식이 과연 있느냐? 이다. 우리가 까마득하게 잊고 살아간다. 그러면서 우리는 시련(試鍊)과 박해(迫害)를 당해서 영적으로 이런 걸음을 교회도 나그네 교회요, 우리도 나그네 삶인데 우리는 깨달아야 되는데 우리는 여전히 깨닫지 못하면서 이 세상이 영원한 집인 양 그렇게 나그네 됨을 망각(妄覺)하고 타향(他鄕)을 본향(本鄕)화로 시도하고 있다. 여러분 그래서 우리가 길 위의 존재요, 천상으로 가는 지상으로 가는 나그네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분명히 인식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II. 나그네는 가는 길을 자지도 쉬지도 않는다. -나그네 인생을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저 뜬 구름처럼 살다가 왔다가 가는 것일까? 아니면 불자들처럼 세상에 모든 인연을 끊고 산으로 들어가라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다. 나그네는 길도 열심히 가고 길 위에서도 쉬지 않고 자기의 역할을 다 하는 것이다. 인생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문제를 두고 우리가 따르는 칼빈도 유명한 그의 저서 ‘기독교 강요 제3권’에서 지상에서 인간의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해서 적고 있고, 그리고 지난 세기의 대표적인 신학자인 클라스퍼 스킬드와 아브라함 카이퍼도 이 문제를 두고 서로 설전을 벌였다. 두 사람은 이렇다. ※클라스퍼 스킬드는 “우리가 나그네이니까 세상에서는 뜬 구름처럼 살다가 그저 복음 전파만 하고 그저 가는 것이다.” 라고 그렇게 주장했다. ※아브라함 카이퍼는 “이 세상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소명의 장소로 주신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 문화적인 사명을 완수를 해야 된다.” 라고 했다. -앞의 버전은 1버전인데, 나그네로서의 복음전파하자는 것이다. 두 번째 버전은 문화적 사명자로서의 삶이라고 한다. 사실 대조적인 입장이다. 그런데 여러분 이것을 보면 이 두 가지는 대조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상호되는 그런 주장이다. 스킬드 말처럼 우리는 나그네이다. 그러나 카이퍼 말처럼 우리가 나그네이지만은 뜬 구름처럼 속세를 떠나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 하나님이 주시는 일터, 하나님이 주시는 다양한 달란트를 가지고 또 인생의 소명을 이루면서, 열심히 살면서 그 방향은 천상을 향해서 나아가는 것이다. 특별히 카이퍼가 깨달은 것이 무엇인가? 저와 여러분을 구원사적 관점에서 이렇게 위치 설정을 하면 ※카이퍼: 창조-타락-구속 그 가운데서 우리는 타락한 이후에 태어난 사람이다. 그러면 그런 게 아니고 지상의 모든 사람이 타락한 이후에 태어난 사람이니까, 그들에게는 구원이 필요하고 우리가 그들에게 접근할 때도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복음을 전한다. 그리고 그 구원 받고 나서는 끝나는 것이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카이퍼가 볼 때는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를 왜 창조를 하셨냐는 것이다. 타락한 상태로 해서 그러면 구원받게만 하려고 한 것인가? 그러면 애당초 하나님이 우리를 보내시지 말지, 그 보내신 이유를 우리가 망각하고 있다. 타락한 상태에서 태어나다 보니까, 구원받고 구원시키는 데에만 급급하다보니까 정작 구원 받고 나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잘 모르고 그리고 왜 하나님이 나를 왜 창조했고 보냈는지에 대한 우리가 그간에 망각하고 있던 창조의 목적과 내 삶의 의미에 대해서 못 깨닫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타락한 상태에서는 창조된 목적을 망각하고 살았지만 이제는 구원 받았다면 이제 다시금 돌아가서 하나님이 나를 이 왜 보냈을까? 이 달란트는 왜 주셨을까? 하나님이 주신 사명이 무엇일까? 내 인생의 목적이 무엇일까? 이것을 수행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열심히 살고 열매 맺으면서도 우리의 지향점은 현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들이 지상에서 나그네로 살지만 하나님이 주신 생명, 생명의 길이, 건강, 각종 달란트를 가지고 정말 삶을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정말 학생들이 공부를 하면 공부를 할 때는 끝장을 내야지 하는 둥 마는 둥 하면 그게 무슨 공부이냐고 말한다. 예수를 믿으면 화끈하게 끝장을 내 봐야지, 인생이란 것을 좀 화끈하게 살아야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그네의 삶을 어쩌면 화끈하게 살기를 원하실 것이다. 그 대표적인 예가 사도 바울인데 여러분 사도 바울은 현재에서 천국을 선취하며 살고 거의 미쳤다. 그를 일반인이 볼 때는 정상적인 사람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복음을 위해서 인생을 얼마나 치열하게 사는지, 거의 미친 사람처럼 보인다. 우리가 바울처럼 그렇게까지는 되지는 못해도 우리가 바울처럼 “내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라고 고백할 정도로 정말 우리가 얼마동안 살지는 모르지만 정말 치열하게 살아가야 하며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소명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III. 나그네는 길 위에 집을 짓지 않는다. -우리가 나그네 길을 가다보면 여러 가지 유혹(誘惑)이 많이 있고 빠지기 쉬운 함정이 많이 있다. 그중에 하나가 길 가다가 한 눈 팔기이다. 천상을 향해 가다가 천로(天路)역정(驛程)의 기독교처럼 허영의 시장, 번영의 시장 같은 데에 가면, 눈이 현혹되어가지고 길 가는 것을 잠시 중단해 가지고 거기에 한 눈을 판다. 무엇 때문에 한 눈을 팔까? 신학자들이 정리한 것을 빌리면 대게 네 가지인데, 세상에서의 부요(富饒)함, 권력(權力), 향락(享樂), 명성(名聲), 뭐 이런 거라고 보고 있다. 특별히 우리가 사는 이 자본주의 시대에 가장 빠지기 쉬운 우리 한 눈 팔기는 돈에 대한 유혹일 것이다. 오늘 날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 사람들의 모습과 별 차이가 없이 이 땅의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이 재물(在物)과 부요에 대한 한 눈 팔기에 빠져 있는데 이 부요가 우리로 하여금 나태(懶怠)와 향락의 삶으로 연결되게 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권력과 명예(名譽)에 빠진 그런 일도 있다. 그러나 하여튼 우리의 눈에 이렇게 세상 것에 눈이 멀어가지고 탐욕(貪慾)의 비늘이 벗겨지지 않으면, 영원한 것을 바라보는 영안(永安)은 어두워지게 되고, 사실은 그런 지나가야 될 세상의 가치들을 절대화 하는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여러분 우리 예수님께서는 성경은 이런 문제를 아주 신랄(辛辣)하게 비판(批判)한다. ‘육신의 정욕이나 안목의 정욕이나 이생의 자랑’ 그것이 학벌, 지위, 겉으로 자랑하든지 속으로 자랑하든지 모든 것은 아버지께로 온 마음이 아니라,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고 야고보서 4장 4절은 더 과격하게 말씀한다. * 야고보서 4:4, 4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너 원수로 살아볼래?” 하신다. 성경은 훨씬 비판적이고 소위 레디컬하다. 과격하다. 하나님과 원수지는 것이다. 그런데 여러분이 질문하는 것은 그러면 우리는 세상 것을 다 포기하고 살고 수도자처럼 금욕주의로 살아야 한다는 말인가? 그리고 세상에서 기쁨과 문화를 배제하라는 것인가? 아니다. 여러분 성경은 때로는 모순되는 것처럼 많이 하고 진리 자체가 그렇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세 분이시다. 하나님이 예정은 했는데 전도를 해야 된다. 여러분, 모든 게 이성으로 볼 때는 이것이 이성적으로 이해가 잘 안 되는 소위 페라독시컬(paradoxicaltrus), 역설적인 같은 게 우리가 이성을 초월해서 많이 있다. 그 차원을 넘어가면 이것이 얼마나 조화가 되어가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이 예정은 했지만 전도를 하라는 것은 우리의 전도를 통해서 그 영혼도 구원을 받지만, 우리가 전도함으로써 열매 맺게 하시는 하나님의 배려이다. 우리 전도를 안 해도 구원을 하신다. 우리보도 전도를 하라는 것은 우리가 전도 안하면 그 사람이 구원을 못 얻어서 그런 게 아니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괜히 헛일에 집중하지 말고 복음 전함으로 영혼구원 하므로 네가 더 복되는 것이고, 하나님이 열매 맺게 하시는 것이니까 하나님이 복 주시게 하시는 말씀이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인생에 충돌이지 아니다. 여러분 넘어가보면, 이것이 영적으로 이 진리가 얼마나 깨달아지는지 모른다. 여러분, 성경은 우리를 나그네요, 지상의 길 위에 집을 짓지 못하지만, 그러나 우리에게 세상에 사는 동안 락(樂)을 누리고 분복(分福)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우리가 타락을 하고 나서 하나님은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었다. 인간이 타락(墮落)하고 나서 아담의 후예들을 하나님은 짐승이나 벌레로 만들지 않았다. 남성과 여성으로 똑 같이 봄 , 여름, 가을, 겨울,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이 얼마나 세상에 깔려 있지 않은가? 가을에는 낙엽 속에, 겨울에는 눈 속에, 봄에는 파릇파릇 솟아오르는 그런 꽃이나 풀 속에서 거기에서 생명의 아름다움이 발견되고 호수의 그 반짝임 속에서 어린아이의 볼에 촉감에서, 선에서, 소리에서, 색깔에서, 여러분 지상은 하나님의 창조의 아름다움으로 가득 차 있다. 타락으로 인해서 이 세상을 지옥으로 만드는 게 아니라, 왜 여전히 창조의 아름다움을 남겨 두셨을까? 피곤한 나그네의 삶을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위로(慰勞)이다. 하나님의 위로이니까 여러분들이 자연을 즐기고 문화를 즐기고 예술을 즐기고 또 하나님이 주시는 소명으로 열심히 살아가게 하시는 부요가 있으면 그 부요도 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명예와 복도 누릴 수 있다. 다만 문제는 그것을 누리다 보니까 그것이 명예라 여기고 여기에 더 절대화 하고 그리고 아예 천국 가는 나그네 인생을 모르고 지상의 정주(定住)자처럼 사니까 그거는 아니라고 하신다. 하나님이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상에 살다가 우리의 나그네의 길에 방해 되는 한 눈 팔기 하는 것을 조심해야 되고 그 다음에는 땅에 주저앉지를 않아야 한다. 어거스틴이 이런 이야기를 했다. ※어거스틴: “우리가 인생의 나그네 길을 가다보면 몇 개의 여관이 있다. 그 여관에서 휴식하고 쉬고 물도 마시고 차도 들이키고 과일도 먹고, 거기서 휴식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어디 있냐면 이 여관에 죽치고 앉아 있는 게 문제이고 이 여관이 내가 살 집이라고 착각을 하면서 천상으로 가는 나그네 길을 중단하는 것이 문제이다.”라고 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가 전한 이런 이야기가 있다. 저 노르웨이에 사는 들오리들이 있다. 겨울이 되면 추우니까 늦가을에 따뜻한 남쪽을 찾아서 지중해 남녘을 향해서 날라 갔다가 거기에서 겨울을 지나고 자기들이 머무르는 노르웨이로 돌아간다. 어느 해에 이 들오리들이 날아가는데, 한 마리의 들오리를 보니까 네덜란드 상공을 날아가는데 거기에 튤립, 아름다운 호수, 정말 네덜란드가 화해의 세계의 시장을 장악하고 있듯이 아름다운 꽃밭이 있고, 그 꽃밭 사이에 예쁜 오리들이 옹기종기 노는 것을 봤다. ‘저기에 잠시 내려갔다가 구경을 하고 우리 일행을 따라가면 되겠지’ 싶어서 일행에서 빠져나온 들오리 한 마리가 네덜란드에 풀밭에 내려앉았다. 거기에 있던 집오리들은 이렇게 자기와 닮은 노르웨이에서 친구가 왔다고 먹을 것을 주고 환영을 해주고 놀아주고, 조금 놀다가 가면 된다고 위로를 해주었다. 그런데 좀 어두워지니까 밤이 되었다. 그래서 유혹을 한다. ‘그만 좀 지내다가 나중에 봄이 되어서 다시금 너희 가족이나 친구들이 남쪽의 지중해에서 날아갈 때, 그 때에 따라가면 되지 않느냐?’ 했다. 그게 좋겠다 싶어서 꽃밭에서 놀고 좋은 융숭(隆崇)한 대접(待接)을 받고 맛있는 음식을 먹고 집오리들과 뒹굴면서 놀았다. 드디어 봄이 되자 남녘에 갔던 친구들, 가족들이 이제 날개 짓을 하면서 북쪽으로 날아간다. ‘이제 따라가야 되겠지’ 하면서 퍼덕퍼덕 날개 짓을 하는데 살이 너무 쪄서 아무리 날개 짓을 해도 1미터도 못 올라간다. ‘내년에 봄이 될 때 따라가면 되겠지’ 하면서 다음 해에 또 날아가는데 몸이 더 무거워져서 날 수가 없었다. 해마다 자기의 가족들, 자기의 친구들, 자기의 고향에서 남녘으로 높은 창공(蒼空)을 아름답게 수놓으면서 날아가는데, 그것을 부럽게 바라보면서 결국은 날지 못하는 영원한 집오리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무슨 말인가? 우리가 날아가는 나그네 인생이다. 그런데 우리가 땅위에서 주저앉아 가지고 그냥 거기에서 전부라고 살아가니까 우리가 결국에는 영적으로 비상하지 못하고 신앙의 아름다운 대로에서 낙오될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 가운데는 이런 낙오된 오리들이 없기를 바라고 공중을 비상해서 살아가는 자가 되기를 축복한다. Ⅴ. 돌아갈 곳이 있다. 이제 마지막으로 우리 나그네들은 돌아갈 곳이 있다. 여러분 우리는 그저 이 세상을 왔다가 이렇게 뜻 없이 이렇게 살다가 주저앉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한 성을 예비하셨다고 하신다. 히브리서를 보면, *히브리서 11:16,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땅위의 집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의 한 성을 예비 하셨다고 하신다. 여러분 도마행전이라고 가경인데 성경은 아니라서 읽지는 않는데 초대교회에서는 개인의 경건을 위해서 위경은 읽지 못했는데 가경은 허락했다. 거기에 보면, 도마가 열두 제자들이 예수님 승천하실 때에 제비를 뽑아서 세 개의 지역을 담당을 하는데 도마는 인도를 뽑았다. 가기 싫어하는 도마를 예수님께서 집을 완공을 짓고자 군다프로스라는 인도의 왕의 그 상인에게 목수 도마를 팔았다. 그래서 예수님이 파니까 팔려가지고 이제 인도로 가기 싫은 것을 억지로 갔는데, 거기에 가니까 군다프로스라는 왕이 자기의 궁전을 지으라고 은과 금을 주면서 자기는 순시를 다녀올 테니까 지으라고 했다. 그래서 도마가 그것을 짓지 않고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다 나누어 주었다. 임금이 돌아와서 보니까 집은 짓지 않고 다 재산을 낭비(浪費)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기를 속인 그 상인하고 도마를 감금(監禁)시켰다. 그리고 며칠 뒤에 그들의 가죽을 벗겨서 죽이려고 했다. 그런데 그 밤에 그 임금의 동생 갓이 세상을 떠났는데, 천국에 가니까 천사들이 그를 안내했다. 그래서 어느 집에 살 것인지를 성을 보여주는데, 물어보니까 가장 못한 집, 자기는 지상에서 올바로 살지 못했으니 좀 못한 집을 지적을 했는데 이 천사가 하는 말이 “이 집은 너를 위한 집이 아니라, 너의 형님, 군다프로스 왕을 위해서 지은 집이다.”라고 하고 이 집은 안 된다고 했다. 그리고 잠을 깨서 이야기를 했다. “형님 보니까 저 도마라는 사람이 지상에 집을 짓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집을 지었는데, 지상에 집을 지은 형님의 왕궁과는 비교가 안 되고 너무 찬란하고 화려한 왕궁을 저 도마라고 사람이 형님이 영원히 살 수 있는 천상에 지은 것을 제 눈으로 똑똑히 보고 왔습니다.”라고 하면서 저 사람을 풀어 놓으라고 했다. 이래서 도마가 인도의 복음을 전했다는 그런 전설이 있는 것이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상을 떠나게 되면 영원한 하늘나라에 상급(賞給)으로 성(城)을 주셨다. 우리는 여러분 지상에 살면서 아무리 우리가 사는 것이 유복하고 행복해도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 영원한 나라를 사모하는 소망이 있어야 한다. 여러분 좀 보자, 우리가 성령님의 열매를 신앙의 등목으로 이야기 하고, 거기에다가 요즘 시대에는 뭐 정의(定義)라든지, 뭐 자선(慈善)이라든지, 이런 추가적인 등목도 많이 지녀야 된다고 이야기 한다. 개인이나 교회가, 특별히 성경은 믿음 소망 사랑은 가장 으뜸이 되는 신앙의 등목으로 말하는데 믿음의 등목이 있다. 사랑을 실천한다. 소망은 어디 갔는가? 여러분 모든 현대 교회에서 놓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성경의 신앙의 등목 가운데 잃어버린 것이 소망이다. 그 소망은 구약에서 말하는 땅을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신약에 모든 소망은 히브리서 본문에 나오듯이 내세(來世)에 대한 소망(所望)이다. 너무 유복(裕福)하게 살고 잘 살다보니까 지상의 모든 교회의 성도들은 다른 사랑이니, 정의니, 사회정의니 다 추구하면서 정작 소망은 놓치고 있다. 그러면 소망이 무엇일까? 핵심이 이것이다. 소망이 안 보이는데 뭐 중요하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서 11장 1절을 보면, *히브리서 11:1, 1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 눈에 안 보이는 그 실상이 그게 있다는 것인데 믿음이라는 것은 안 보이는 것을 있음으로 믿는 것이고 손에 안 잡히지만 있음을 깨닫고 그 실제를 받아들이는 것인데 믿음의 절정(絶頂)이 바로 소망이다. 믿음이 최고에 올라간 사람은 어떤 경지냐면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지닌 것이다. 여러분 그러니 우리가 정말 우리가 놓치고 있는 중요한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이다. 히브리서 11장을 저의 표현으로 정의를 하면 소망이란, 하나님 나라에 대한 향수병이다. 믿음의 절정도 천국에 대한 노스텔저, 하나의 향수병이다. 그것은 우리의 본향이다. 제가 여러 분야의 책을 썼지만 문학과 지성사에 나오는 우리 고등학교 문학 교과서에 실려 는 책이 있는데 그것이 ‘ 고향’ 이라는 글이다. 이 고향이라는 책은 왜 썼냐면 그 안에 하나님이라는 말은 별로 안 나온다. 문학책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인생에 깨우침을 주자는 뜻이다. 핵심은 하나님을 떠난 인류는 실향민(失鄕民)이고 하나님께 돌아가는 인류는 진정한 귀향(歸鄕)이다. 여러분들이 다 명절 때에 고향 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인생의 진정한 고향이 어디인지를 성찰(省察)해 보라는 것이다. 이런 화두(話頭)를 던질 거리이다.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신앙생활에 가장 큰 것은 본향에 대한 무감각이다. 돌아갈 것에 대해서 의식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키에르케고르의 들오리처럼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이 시간의 모두가 길 위에 집을 짓지 않고 영원한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을, 다시금 되새기고 가슴에 품고, 그 소망을 가지고 이 세상을 힘 있게 살아가는 자가 되기를 영원한 소망을 가진 자답게 평온을 찾고 이 세상의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그 소망을 붙들고 힘 있게 믿음으로 헤쳐가기를 소원한다. ♣요약 정치 경제와 다양한 영역에서 우리가 잊고 있던 소망을 다시 되새기고, 나그네 의식과, 가는 길을 자지도 쉬지 않아야 하며, 길 위해 집을 짓지 말고, 우리가 돌아갈 본향을 향해서 나아가야 한다. 세상이 감당치 못할 믿음을 확고히 가지고 이 소망을 붙들고 힘 있고 어려운 가운데서도 하늘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담대히 살아가며 열매 맺는 자 되고, 우리의 삶 가운데서 천국의 소망을 놓치지 않는 진정한 신앙인이 되어야 한다. (히브리서 11:13~16) -온전한 믿음, 최후 승리를 얻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를 증거하기 위해 수많은 믿음의 선진들의 모본을 제시하는 부분이다. ========================== ▶에프렘 버클 목사님(런던시티미션대표)-초빙-3부,4부)통역(정상익 부목사님)-“하나님의 영광은 누구에게서 나타나는가?” -(고린도 전서 1:18-25) -안녕하세요. 엘프렘 목사이다. 여러분 환영해 주셔서 감사하다. 제가 한국에 처음 방문했다. 런던으로부터 이곳에 온 것이 큰 영광이다. 오정현 담임목사님의 친절함에도 감사를 드리고, 유니온 신학교와 함께 사역하는 고성삼 목사님과의 파트너십과도 굉장히 감사하게 생각한다. 런던시티미션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유니온 신학교화 협력하여 런던에서 사역을 펼쳐나가고 있다. 여러분 런던시티미션에 대해서 잘 모르실 것이다. 데이빗 나스미스란 사람에 의해서 1835년에 시작된 미션이다. 그의 마음과 열정은 가장 약하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서 가는 것이었다. 190여년이 계속 되면서 이 사역이 진행이 되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팀 켈러 목사님도 런던시티미션과 함께 하신 동역자 중에 한 사람이다. 우리 런던시티미션의 아주 중추적인 일을 했고, 그래서 저희 사역가운데 팀 켈러 목사님의 두 아들을 직접 훈련시키기도 했다. 우리 영국에는 안타깝게도 이제는 하나님을 알고 기독교를 따르는 숫자가 훨씬 적어졌다. 거의 50%의 인구가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 해 줄만한 친구나 가족이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이 대한민국에서 하나님이 일 하시는 것을 보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다. 여러분과 함께 파트너를 맺고 이렇게 복의 통로가 되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 이렇게 높여진 나라가 굉장히 작았던, 낮추어졌던 것을 제가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그 영광을 드러내신다. 오늘 여러분께 두 가지를 말씀을 드리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사용하신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약함을 선택하신다. 이렇게 높여진 대한민국에 대해서 제가 알게 되었을 때, 이 웨일스, 영국에 있는 웨일즈 지방에서 한국으로 보낸 선교사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여러분이 아시는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 선교사이다. 27세의 나이에 이 땅에 와서 그 목숨을 잃게 된 그런 선교사이다. 그가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 그를 처형했던 사람에게 그 성경책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자신을 막 처형을 하려고 한 사람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토마스 선교사를 처형했던 사람의 사촌이 목사님이 되는 기적을 맛보게 된다. 조카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약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선택을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고통과 우리의 연약함을 아름답게 만드는데 능력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가 읽었던 고린도전서 1장을 보면, 십자가의 도가 미련해 보이는 그것을 사용하셔서 사람들에게는 그 십자가의 도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그 놀라운 능력을 사용하심을 본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분을 통해서 인류를 구원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우리가 모두 아는 것처럼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얻을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미련하다고 한다. 그라니 하나님께서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여러분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생각해 보라. 여러분이 타고 있던 차량이 갑자기 멈추었다고 생각해보라. 제가 여러분을 도와준다고 갔다. 제가 자전거를 타고 여러분을 도와주러 갔는데 페달이 없는 자전거이다. “제가 당신을 도와줄게요. 함께 합시다.” 제가 그렇게 말한다면 여러분은 저를 신뢰하시겠는가? 여러분, 페달이 없는 제 자전거를 보고 “참 미련한 소리 하네.”라고 하지 않겠는가? 그럴 때 이렇게 말씀을 하고 싶다. 천성에 가는 길은 내리막길이라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볼 때 미련해 보이는 것을 사용하신다. 우리가 보기에 인류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고 불가능한 일로 보이더라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영광을 위해서 사용하신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볼 때, 이 십자가의 도가 다른 사람들에게는 미련해 보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시고 나타내신 것을 우리가 기뻐할 수 있는 것이다. 21절 말씀을 보면 *고린도전서 1:21, 21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하나님께서 마치 그 미련해 보이는 그 십자가를 통해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고 이야기 한다. 하나님의 그 구원의 역사는 인간의 지혜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힘으로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재물로 이룰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약점을 사용하셔서 스스로에게 영광 받을 수 있도록 일하신다. 우리가 구약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볼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열방의 아비로 삼으신 것을 볼 수 있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아브라함은 자녀를 가질 수 없었던 상황에 놓였다. 아브라함이 연약했지만 하나님은 강하신 것을 본다. 우리가 야고보를 볼 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그를 축복하셨을 때는 절름발이가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약점을 통해 일하셨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내셨다. 우리가 기드온을 볼 때에도 가장 작은 지파 중에 가장 작은 사람이었다. 그에게 군대가 주어졌는데,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군대를 더 작게 만들라고 하셨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그를 선택하셔서 약전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삼으셨지만 여전히 다윗은 가장 젊을 사람으로 보이고 있었다. 너무 작았기 때문에 골리앗과 싸울 때 갑옷을 입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에게는 그저 물맷돌을 가지고 있다는 약함 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강함을 그에게 약함을 통해 드러내셨다. 이 다윗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 난 후에 사울 왕으로부터 도망을 쳤다. 아둘람 굴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여러분이 다윗 왕과 아둘람 동굴에 대해서 잘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저도 잘 안다. 오정현 담임 목사님께서 말씀을 자주 이 말씀을 전해 주셨다고 들었다. 다윗이 그 동굴에 있을 때에 장정들이 그에게 다가온다. 사무엘상 22장에 보면, 다윗과 함께 했던 그 장정들이 은혜를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고, 고통을 겪고 있는 상황이었으며, 우울한 상황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 장정들이 연약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장정들이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되었다. 이 다윗 왕과 함께 다윗 왕국을 세우는데 쓰임 받았다. 그리고 다윗 왕국이 세워졌을 때 그 장정들도 함께 세워지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그들이 연약하다고 사람들이 생각을 했는데,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약함을 통해 일하셨다. 우리가 잘 알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데 다윗왕의 이야기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왕이시다. 우리는 그분의 왕국을 세우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올 때 필요한 상태이고 고통을 받고 있는 상태이고 그리고 우울한 상태라 할지라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을 세우는데 애를 쓴다면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세워질 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약함을 통해서 드러내신다. 우리에게 많은 예들이 있다. 여러분 이사야에 대해서도 이야기 할 수 있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을 했다. “나의 입술은 부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셔서 그의 입술을 정결하게 만드셨다. 그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우리 호세아 이야기도 살펴볼 수 있다. 호세아도 하나님의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아내는 정조를 지키지 않는 아내였다. 그러나 이 호세아의 이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드러내신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약했다고 성경에 이야기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제자들을 보고 교육받지 못한 어부들이라고 이야기 했다. 그리고 제자들 중 한 명은 미움을 받고 있었던 세리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선택하시고 그의 약함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이셨다. 여러분이 아시는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이다. 사도바울도 약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갈라디아서를 썼을 때에 눈의 아픔에 대해서 이야기를 썼다. 그게 아마도 육체의 가시라고 표현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사도 바울이 자신의 육체의 가시를 가지고 하나님을 부르짖을 때, 하나님께서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고 말씀하셨다. 내 힘과 능력은 약함을 통해 완성된다고 하는 것이다. 여러분, 약하다고 느끼실 때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충분하지 못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약함을 사용하셔서 그 영광을 드러내신다. 단순히 하나님께서 그 약함을 사용하시는 것만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 약함을 견디시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정하고 받아주시는 것만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약함을 오히려 선택해서 사용하신다. 오늘 우리가 읽은 고린도전서 1:26절을 보면, *고린도전서 1:26, 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세상에 미련한 것을 택하셔서 이 세상에서 미련해 보이는 것을 택하셔서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세상에 약한 것들을 택하셔서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신다. 어떤 사람이든 주님 앞에 나아올 때, 우리가 연약(軟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가진 재물이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이 우리를 구원(救援)할 수 없다. 우리의 지혜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우리의 가족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우리 교회조차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우리는 먼저 우리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우리 영국에도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복지 정책(政策)들이 있는데 스스로를 돕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복지(福祉)를 통해서 건강과 또 재물을 전달하고 있다. 만약 그 복지정책을 사용하려면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아야 한다. 조금이라도 무언가 가지고 있다면 그 정책대로 도움을 받을 수가 없다. 이것이 바로 주님 앞에 나아가는 예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우리 손을 열고, 그리고 우리 스스로를 도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아가야 한다. 네 맞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의 그 강함은 우리의 약함을 통해 완성된다. 여러분 여러분이 연약해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사용할 수 없다고 생각하실지 모르겠다. 그리고 여러분 수많은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이라고 딱히 의미가 없다고 생각하실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완벽한 사람 중에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그래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능력의 유혹을 뿌리쳐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약함을 사용하시고, 그 약함을 선택(選擇)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약함을 찾고 계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강함을 드러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의 지혜를 의지(依支)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 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을 의지하면서 기도하지 않는 오류를 범(犯)하면 안 된다. 우리의 전통은 따르면서 하나님 말씀의 진리를 따르지 않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물(財物), 그 재물에 의지하면서 하나님과 교제(交際) 하는 것을 거리 두어서는 안 된다. 부자에게나 말씀을 전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말씀을 전하지 않은 것도 안 된다. 하나님의 그 강함을 약함을 통해 완성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강함을 싫어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강함을 사용하시기를 원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강함을 모두 하나님께 내려놓고 항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강함을 싫어하지 않으신다. 하나님 대신에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내 마음을 싫어한다. 하나님께서는 약함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다. 런던시티미션에서 저와 함께 하고 있는 제 바로 위에 있는 대표가 그러라 밀러라는 분인데, 굉장히 비극적인 일을 겪으셨다. 제가 여기 오기 전에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끔 허락해 주셨다. 제 아들이 5년 전에 열다섯 살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번 주가 그가 아들이 죽었던 것을 추모하는 주간이 되었다. 제가 그와 함께 이야기 하면서 한국에 왔을 때 저를 축복해 주셨는데 그래서 그분께 이야기를 했다. 하나님께서 저에게 마음을 주셔서 우리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강함이 드러난다고 말씀을 전하려고 한다. 그러자 대표님께서 동의하시면서 “맞습니다. 목사님, 가셔서 약점을 통해 하나님의 강함이 드러난다고 하십시오.” 라고 하셨다. 제가 아들을 잃고 난 후에 지난 5년 동안 참 약하다고 느꼈다고 고백했다. 그런데 그 지난 5년 동안 런던시티 미션을 통해 수많은 변화가 일어난 것을 보게 되었다. 오직 하나님의 강함을 통해서만 일어났던 일이었다. 하나님의 그 강함은 약함을 통해 드러난다. 제가 이 대한민국이 건립되고 세워진 것을 볼 때, 손양원 목사님의 이 이야기가 떠오르게 된다. 여러분이 아시는 것처럼 두 아들의 아버지였는데 둘 다 죽임을 당했다. 자신의 아들들을 죽였을 때에 그 범죄자를 찾았을 때에 그를 용서해 주라고 말씀하셨다. 단순히 그를 용서해 주었을 뿐만이 아니라, 자신의 아들들을 죽였던 사람을 자신의 양 아들로 삼기로 했다. 정말 강력한 간증거리이다. 어떻게 내 아들을 죽인 사람을 용서할 수 있을까? 어떻게 내 아들을 죽인 그 사람을 사실 안아줄 수 있을까? 그렇게 희생하고 그렇게 안아주시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이다. 아멘, 하나님은 선하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시도록 선택하고 계신다. 우리가 가지고 있던 어떤 강함이라도 의존하고 있다면 회개(悔改)하기를 바란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큰 의지를 한 것들을 이제 하나님께 내어 놓아야 한다.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의지하기를 원한다. 그렇게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우리의 약점을 통해 드러내실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모든 것을 해로 여긴다. 라고 말한다. 내가 가지고 있었던 이 많은 것들을 다 해로 여긴다는 것이다. 내가 배웠던 것들도 다 해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음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힘과 능력으로 3일 만에 일어나셨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영광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났다. 우리 하나님을 더 신뢰합시다. 그리고 연약함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갑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 마을로 초대한다고 이야기 해 줍시다. 그리고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드리자. 하나님께서 우리의 약함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신 것에 감사를 드리자. 아멘. ♣요약 십자가의 도는 불신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으로 보일지라도 생명을 구원하는 반면, 사람의 지혜는 아무리 고상하고 놀라운 것일지라도 구원에 이르게 하지 못하며 결국은 멸망을 자초하게 되니 우리는 인간이 소유한 지식의 한계성과 상대성을 인식하고 인간의 지혜를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과 참된 구원 행위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 주시고, 우리의 약점을 통해서 드러내 주심에 감사하며, 우리의 약점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아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의지하여 하나님 이름만이 홀로 영광 받으시기를 소원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약함을 오히려 선택해서 사용하시니 하나님의 영광은 어디에서 나타나는 것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헌금 찬양(3부)-김주은집사, 김진영집사, 홍혜천 집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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