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예배(주후 2023년 1월 29일)
제목: "영적 기백(氣魄)"
말씀: 열왕기상 18:20~29

찬양인도: 쉐키나(이다니엘 부목사님),영광찬양대
대표기도: 유이삭 부목사님(1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옥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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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8:20~29,
20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로 사람을 보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
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22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23 그런즉 송아지 둘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그들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며 나도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고. 
24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 

25 엘리야가 바알의 선지자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많으니 먼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잡고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그러나 불을 붙이지 말라. 
26 그들이 받은 송아지를 가져다가 잡고 아침부터 낮까지 바알의 이름을 불러 이르되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하나 아무 소리도 없고 아무 응답하는 자도 없으므로 그들이 그 쌓은 제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27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28 이에 그들이 큰 소리로 부르고 그들의 규례를 따라 피가 흐르기까지 칼과 창으로 그들의 몸을 상하게 하더라.
29 이같이 하여 정오가 지났고 그들이 미친 듯이 떠들어 저녁 소제 드릴 때까지 이르렀으나 아무 소리도 없고 응답하는 자나 돌아보는 자가 아무도 없더라.

▶추운 날씨에 이렇게 나올 수 있는 환경과 믿음 주시고 건강 주신 주님을 찬양한다. 축복이다.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시리즈 11번째이다. 지난주에 고향 교회를 가니까 제목이 거기도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였다. 반갑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사랑의 교회를 따라 하는 것은 아니냐고 하고, 좀 창의력이 없는 것이 아니냐고 그 담임 목사님이 기가 막힌 대답을 하셨다. “이것보다 더 좋은 표어가 어디 있습니까?” 하시며 그리고 “한국교회 모든 교회들이 가장 절실하게 기도해야 할 제목입니다.”라고 하셨다. 그래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시니 그 반을 듣고 제가 너무 감사했다. 오늘 이 회복을 넘어 이 시리즈는 우리 개인의 어떤 공동체 사고일 뿐만이 아니라, 우리 개인도 이 제목을 통해 많은 문제가 해결되기를 바란다. 오늘 제목은 영적기백(氣魄)이다. 찬송할 때, ‘믿는 사람들은 주의 권세이니’ 할 때 어떤 분들은 기운 있게 ‘앞서 가신 주를 따라갑시다.’ 라고 하는데 어떤 분들은 이게 무슨 찬송인지도 몰라 하신 분들도 있다. 하여튼 오늘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완전한 기백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회복으로 넘어 부흥’으로 가는 이 과정에 꼭 필요한 것은 바로 영적 기백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신앙의 엔진이라 말할 수 있다. 여러분, 20-30년 된 차라 할지라도, 오래된 차라 할지라도 엔진이 좋으면 그냥 끄떡 없이 잘 나간다 맞는가? 우리가 개인적으로 나이가 들어가고 또 환경도 바뀌고 시절도 변하지만 영적기백이라는 이 신앙의 과업은 변함이 없는 것이다. 영적기백을 소유하면 나이가 들어가도 환경이나 지역이나 시대나 상관이 없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적 기백이 왜 이 단어가 필요한가? 우리 입장에서 당장은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가는 엔진이기도 하지만 왜 필요하냐면 예수 믿는 사람들은 신앙인이 되는 그 순간부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영적기백이 필요한 이유는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 순간부터 그리스도인은 예외 없이 영적 전쟁터에 발을 들여놓기 때문인 것이다. 다 영적 전쟁터이다. 여러분들은 신앙생활을 잘하면 우리는 유람선을 타고 가는 것이 아니라, 전투함을 타고 전투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귀는 우리 믿는 사람들을 향하여 날마다 우는 사자와 같이 달려드는데, 우리는 만약에 패잔병(敗殘兵)처럼, 정말 당나라 군사들처럼 가만히 있다면 안 된다. 오합지졸(烏合之卒)처럼 있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영적 전쟁을 우리가 해야 되는데 우리가 막무가내로 아무런 준비가 없이 뛰어들면 안 되고, 그래서 영적기백을 가져야 한다. 이번 주와 다음 주에 걸쳐서 위해 너무 중요하다. 영적기백과 담력을 회복하고 우리 것으로 무장(武將)되는 영광스런 신앙이 되기를 바란다.
 
저는 오늘 구약의 열왕기상 18장, 여러분이 잘 아는 말씀이지만, 여러분 저는 신구약, 특별히 구약 말씀도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확실히 믿는다. 이 21세기의 한국과 서울에 사는 우리들에게 인생의 나침반으로서 이 말씀을 주셨다고 확신한다. 그리고 이 말씀은 우리의 삶의 현장과 직결(直決)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본문을 보겠다. 오늘 본문은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 다스린 지 100년 정도 지난 구약 스토리이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듯이 솔로몬 이후로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졌는데 북이스라엘이 아합 왕이었고, 이런 하나님을 버리 바알 신을 섬겼다. 그리고 아합 왕은 악명 높은 이세벨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선지자는 엘리야 선지자였다. 아합 왕이 잘못된 것에 3년간의 기근(饑饉)이 들었다. 온 나라가 고통 했다. 고토이후에 갈멜 산의 영적 전투가 벌어진다. 만약에 이 갈멜 산의 전투를 누가 영상으로 촬영을 했다면 참으로 드라마틱한 장면이 나올 것이다. 소위 이 신들의 전투, 우리가 이렇게 설명하지만 이 신들의 전투를 보게 된다. 여호와냐? 바알이냐?를 보게 된다. 이것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떼를 지어 갈멜 산으로 다 올라갔다. 한쪽 편에는 바알 선지자들이 화려한 예복을 입고 서 있다. 바알과 이스라엘 선지자 850명이 서 있다. 그리고 그들은 태양신을 그들은 숭배했기 때문에 태양의 빛을 발하는 금송아지를 목에 걸고 있었다. 그 빛에 눈이 부셔서 눈을 뜨기 힘들었을 것이다. 폭군이 왕이 화려한 옷을 입고 왕실 침대에 서 있다. 그런데 맞은편에는 광야출신 엘리야가 초라한 옷을 입고 수염을 길게 하고 지팡이를 들고 서 있다. 지팡이... 우리는 무얼 하든지 제대로 한다. 객관적으로 볼 때, 한 쪽은 너무나 위세가 등등해 보이고, 한 쪽은 너무나 초라해 보인다. 한 쪽은 찬란해 보였고 한 쪽은 불쌍해 보였다. 오늘 본문 앞에를 보면 아합이 뭐라고 하냐면,
 
*열왕기상 17~18,
17 엘리야를 볼 때에 아합이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아합 왕이 그 권위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자가 너냐고 묻는다. 그러니까 엘리야가 기가 죽지 아니하고 18절에 보면,
18 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그러니까 이스라엘을 괴롭힌 자 너라고 한다. 내가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 집이 우리를 괴롭힌다고 눈동자도 하나 흔들리지 않고 자기가 기가 죽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소위 영적 기백이 있는 것이다. 그 엘리야가 아합 왕에게 바알선지자 450명과 아세라 선지자 400명을 갈멜 산으로 나오게 한 것이다.
 
I 영적 기백이 있는 교회.
 
*열왕기상 18:19,
19 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
-여러분 제가 이렇게 왕 앞에서 담대한 기백을 가지고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가? 엘리야는 광야의 고난을 경험했다. 그리 시냇가에서 배고픔도 체험했다. 엘리야의 기백은 왕실의 산해진미와 안락함을 통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다. 목마름도 경험하고 환경적 고통과 가난한 백성들과 가뭄과 기근을 경험하면서 소위 고난의 과정을 거친 영적 기백인 것이다. 광야를 거친 광야에서 체득된 기백인 것이다. 이런 영적 기백이 우리 교회와 개인도 있을 수 있지만 한국교회가 이런 광야의 경험을 거치고 한국교회가 영적기백이 있는 주님 주시는 교회가 되기를 소원한다. 구약의 말씀과 오늘 신앙생활의 우리가 연결이 되어야 한다. 영적 기백의 한국교회가 되어야 한다. 과거에 고난의 길을 경험했다. 저는 지금도 고난의 길에서 은혜 받았던 장소나 길을 선명하게 기억한다. 시골에 기도원이나 교회 마룻바닥에서 새벽에 아무도 오지 않은 시간에 혼자 무릎 꿇고 기도하는 시간들과 한 두 명의 성도들이 모여 통회하며 주님께 매어 달리고 기도하는 그 시간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안아주심의 본당도 겉으로는 귀하고 아름다운 그런 본당이지만 이런 고난의 정신이 차곡차곡 쌓여서 우리가 오늘 이와 같이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이라 믿는다. 본당에 들어올 때마다 한국교회의 기도원의 야성과 고난을 이겨낸 야성이 여기에 축적된 줄로 믿는다고 기도하며 오죽하면 토비새(토요비전새벽예배)마다 이곳이 하나님 아버지 갈멜 산의 전산이 되게 하여 주시옵고, 이곳이 모리아 산이 되게 하여 주시옵시며, 감람산이 되게 하여 주시옵시며, 시내 산이 되게 하여 주시라고 기도한다. 이 자리가 한국교회의 영적기백의 토대가 되게 하여 주시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가도록 공동체와 개인에게 허락하실 것이라 믿는다.
 
저는 한국교회사를 읽으면서 가슴이 뜨거워졌다. 한국교회의 혈관에는 고난의 영적기백의 DNA가 흐르고 있다. 한국에 전해지는 복음은 영적전투를 통해 처음 강하게 들어왔고, 강력한 유교에 대치해서 한국교회 선교사를 보니 이런 내용이 나와 있다. ‘보름을 기하여 한국교회의 외국인 가옥을 불태워 훼파하라.’ 외국인 가옥과 교회당을 다 불태우고 파괴하라고 하는 것을 보았다.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 인을 젊은이 늙은이 어린이 여인들을 할 것 없이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훼파하라고 탈취하라고 하만이 유대인을 죽이도록 전국에 내린 조서였다. 지금으로부터 123년 전에 1900년에 이용익이나 김영준 같은 수구파들이 전국에 선교사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일시에 박멸하는 계획을 비슷하게 세워가지고 선교사의 집과 교회당을 불태우고 파괴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마치 이 내용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 에스더서를 보면,
 
*에스더 3:13
13 이에 그 조서를 역졸에게 맡겨 왕의 각 지방에 보내니 열두째 달 곧 아달월 십삼일 하루 동안에 모든 유다인을 젊은이 늙은이 어린이 여인들을 막론하고 죽이고 도륙하고 진멸하고 또 그 재산을 탈취하라 하였고.
-지금부터 125년 전 1898년에 유교의 이름으로 부상들을 부추겨서 우리가 국사 공부할 때 배웠을 것이다. 황국협회라는 것을 내 세워서 반기독교 적 운동을 조직했다. 보부상들은 1898년에 10월에 기독교 학교와 교회당에 경고장을 보내면서 교회를 박멸하려고 협박했다.
1898년에 10월9일자 황성신문에는 보부상들이 교회당들을 훼파하고 교회 신도들을 도륙했다.
-이후 한국교회는 3.1운동에서 첫 3개월 동안 오만 명 이상이 처형되거나 죽거나 부상을 입었다. 그리고 재암리교회 학살 사건을 알 것이다. 교인들이 예배드리고 있는데 다 불태워 죽였다. 절대다수가 기독교인들이 3.1운동에 고생한 것이다. 6.25전쟁, 전쟁초기 6개월 동안 508명의 목사님들이 순교를 당했다. 2천 여개 교회들이 파괴가 되었다. 우리교회 가끔 오셔서 말씀하시는 박영규 목사님, 한국교회사 전문가이신 박영규 교수님은 한국교회 박해 사를 이렇게 정리했다.
*복음은 신분과 민족과 성을 초월하고 그 안에 있는 자들은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진실을 외칠 수 있는 용기를 가졌다. 그것 때문에 교회는 박해를 통해 더욱 성장해 왔던 것이다. -김용규 교수-
고난이 한국교회 영적기백을 가져온 것이다. 오늘 이러한 한국교회의 역사와 또 엘리야의 역사와 이것이 우리에게 연결되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럼 어떻게 영적기백을 회복할 것인가? 아니 영적기백을 놓친 우리가 어떤 식으로 이 영적기백을 회복할 것인가이다. 21절부터 두 세가지 정리를 해보겠다.
 
II. 어떻게 영적 기백을 회복할 것인가?
 
*열왕기상18:21,
21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진정한 영적 기백은 머뭇머뭇 하지 않는 것이다.
 
▷첫째 진정한 영적 기백은 머뭇머뭇 하지 않는 것이다.
-머뭇머뭇 하지 않는 것이다. 엘리야가 백성들을 질타했다. 기회주의 어정쩡한 자세를 취해가지고 양다리를 취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느냐고 묻고 있다. 여기서 히브리어로 머뭇머뭇거리다는 본래 원어에서는 절뚝거리는 것이다. 그리고 26절에 보면 단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 주위에서 뛰놀더라. 하고 한 말씀처럼 춤을 추며 뛰놀다의 동사와 똑 같은 뿌리에서 나온 것과 같은 단어이다. 백성들이 머뭇거리는 것과 우상에서 뛰 노는 것과 같은 단어로 사용된다. 왜 같은 단어라고 성경기자는 사용하고 있냐면 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완전히 바알을 섬기지는 않았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않는 소위 회색(灰色)지대(地代)에 서 있다는 것이다. 이러하니까 영적 담력과 기백이 안서는 것이고, 소위 종교다원주의 가운데서 담력이 안 생기는 것이다. 혼합주의 밑에서 신음하고 맥아리가 없다. 오늘 우리 마음속에 영적기백의 DNA가 흐르게 하려면 머뭇거리면 안 된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 마음속에 머뭇거리는 것이 무엇인가?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에 우리가 민감해져야 하는데, 다른 신들을 따르지 않고 주저하지 말고 하나님과 우상 사이를 왔다 갔다 하지 말고 오늘 결단할 것이 무엇인가? 회색지대는 없다.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을 바르게 선택하라. 둘 중에 하나를 결정하라고 한다. 지난 수천 역사에서 하나님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바알을 선택할 것인가? 이다. 태양신, 지금도 미국에도 ‘조르아스터교=배화교’를 섬기는 자들이 있다. 중동에도 있다. 태양이나 불을 섬기는 자들이다. 일본의 식민지 시대는 천조대 신이다. 그때도 태양신과 같다. 그 태양신을 섬기지 않는다고 해서 일제 강점기 우리도 순교를 당했다. 주기철 목사님이 감옥가기 전에 장로교 목사님들과 함께 금강산 수양 관에서 총회 수양회를 했는데 그 때 설교가 지금 남아있다. 그 제목이 뭐냐면, ‘예언자의 권위’였다. 한국교회가 엘리야처럼 영적권위를 회복할 것을 주 목사님이 설교하신 것이다. 주 목사님은
“여러분들도 엘리야의 신앙, 엘리야의 기도가 있으면 엘리야의 권능과 선지자의 권위와 담대함을 회복할 수 있다. 생사여탈의 대권을 잡은 임금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그 죄를 책망하는 엘리야는 일사각오의 기백을 가졌다.” -주기철 목사-
-오늘 이 예배를 드리면서 이런 설교가 쉽지는 않은데 여러분과 제가 이 시대를 향하여 영적기백을 가지고 일사각오를 가진다면 수많은 강들이 돌파가 될 것이다. 어정쩡한 상태에 있는 자들이 지금 이 자리에 계신다면,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겠는가? 여호와이냐? 바알이냐?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 부흥이고 영적 기백이고 일사각오가 되는 것이다. 엘리야의 기백이 있으니까 여유가 있는 것이다. 여유가 있으니까 유머가 있고 담력이 있는 여유가 있다. 바알의 응답이 없으니까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열왕기상 18:27,
27 정오에 이르러는 엘리야가 그들을 조롱하여 이르되 큰 소리로 부르라 그는 신인즉 묵상하고 있는지 혹은 그가 잠깐 나갔는지 혹은 그가 길을 행하는지 혹은 그가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지 하매.
-그런 식으로 조롱한다. 이런 것이 다 여유가 있는 것이다. 오늘 엘리야가 조롱이라는 말을 쓰지만 사실 신앙적으로 볼 때 우리가 하는 단어가 아니다. 그러나 영적기백이 있을 때는 장소에 따라서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거짓 신을 섬기고 자신을 망가뜨리는 사람들을 향하여 이러한 거룩한 조롱도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30절에 보면,
 
*열왕기상 18:30,
30 엘리야가 모든 백성을 향하여 이르되 내게로 가까이 오라 백성이 다 그에게 가까이 가매 그가 무너진 여호와의 제단을 수축하되
-증인이 되라고 요청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역사를 영적기백으로 확신했기 때문에 하늘의 불이 떨어지도록 해서 엘리야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시고 돌과 흙까지 태운 줄로 확신한다. 어느 시대에 돌과 흙까지 태우지는 시기가 어디 있는가? 자, 이런 내용을 가지고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않으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한 가지는 세상의 숫자보다도 하나님의 숫자에 더 민감하면 된다.
 
▷둘째 세상의 숫자보다 하나님의 숫자에 더 민감한 사람이 되어야.
-이제 중요하다. 우리가 생각할 것은 엘리야가 850대 숫자만 생각했으면, 아마 어떻게 담대함과 영적기백을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사람들은 850:1을 가지고 엘리야 850:1(엘리야) 하나 밖에 없는 엘리야를 불쌍하게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엘리야는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 없는 850명을 불쌍히 여긴 것이다. 850×하나님 없음(zero)=0, 이 원리는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세상은 100명이 천 명을 당하고 작은 자가 강국을 이루고 약한 자가 강국의 천을 이루는 것을 잘 모른다. 신명기에 보면
 
*신명기 32:30,
30 그들의 반석이 그들을 팔지 아니하였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주지 아니하셨더라면 어찌 하나가 천을 쫓으며 둘이 만을 도망하게 하였으리요.
-영적기백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세상 사람들은 모른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의 원리는 하나가 열이 둘이 만을 당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영적기백의 공식이다.

※850×하나님 없음(zero)=0, -바알신을 섬기는 자,
▷1명의 엘리야X성삼위 하나님(3)=3(만군의 하나님)-이스라엘 백성들. 영적 기백이 된다.
-그래서 저는 3을 좋아한다. 마음 맞는 세 명만 있으면 나라도 세운다고 했다. 이런 3위 은혜가 열두 명이 되고, 이 열두 명 문도가 70명이 되고, 120명이 되는 것이다. 300명의 기도의 용사가 되고, 500명이 예수님 승천의 형제가 되고, 그 다음에 3천 명의 변화가 된 사람이 되고, 7천명이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이게 영적 기백을 향한 독특한 공식이다. 변화 산상에서 예수님도 베드로, 야고보, 요한 3명을 데리고 변화 산상에 올라갔다. 세 명씩 열 두 제사를 나누게 하신 것이다. 850×하나님 없음(zero)=0가 된다. 꽝이다.
우리 자신X성삼위하나님(3)=3이 되면 세상의 어떤 숫자보다도 압도적인 능력을 가지고 영적 기백의 현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그저 그런 사람의 다수의 사람을 쓰신 것이 아니라 영적기백으로 무장된 몇 명의 사람들을 쓰신다. 자신X성삼위하나님(3)=3이 된다.
 
*사도행전 17:6,
6 발견하지 못하매 야손과 몇 형제들을 끌고 읍장들 앞에 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천하를 어지럽게 하던 이 사람들이 여기도 이르매.
-그 바울의 초대 교회 그 강력한 복음 앞에 대로마제국이 항복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일으켜서 히브리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히브리서 11:38,
38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그들이 광야와 산과 동굴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여러분, 영적기백을 가지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영적인 핵심 중에 하나이다. 이 한 해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많이 해도 그런데 우리는 영적기백으로 또 다른 차원의 삶을 살아야 한다. 다시 한 번 우리는 한 알의 사과 씨를 가지고 수백 개의 열매를 볼 줄 아는 하나님의 사람의 눈, 영적기백이 필요한 것이다. 수천 구루의 나무로 울창해진 숲도 한 톨의 도토리로 시작된다. 도토리 가운데서 수천 구루의 나무를 보고 한 통의 도토리에서 울창해진 숲을 보는 기백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한 알의 사과 씨를 가지고 수백 개를 볼 수 있는 기백을 가진 사람들을 주님은 지금도 찾고 계신다.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오늘 우리 가운데 남모르는 큰 고통을 가지고 계시면, 오늘 이 영적기백의 회복을 주시길 소원한다. 기백을 회복해야 한다. 영적기백의 독특한 공식,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지만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우리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제일 중요한 크라이막스가 있다.
 
엘리야가 만약에 “나만 홀로 남았네!” 바알에게 무릎 꿇는 자가 7천 명이 있다하더라도 이 시대는 지금 다 동굴에 숨어있었다. 아무도 보이지 않고 ‘나만 홀로 남았네.’ 라고 했으면, 그리고 내 힘으로는 아무 것도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그냥 그대로 쓰러져버렸으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 때 엘리야는 이 순간에 문제 지향이 아니라 가능성 지향의 사람이 되었다.
 
▷셋째 문제 지향이 아니라 가능성 지향의 사람이 되어야.
-그래야 영적기백을 가진 것이다. 나 혼자만이 아닌 엘리야는 문제보다도 가능성의 지팡이를 들었다.
환경이 물론 어렵다. 나 혼자만 갈멜 산에 왔다고 탄식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보다도 더 큰 은혜를 사모했다. 문제보다도 가능성에 눈을 뜬 것이다. 요즘 2023년에 들어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모든 환경들에 대해서 모두가 다 어렵다. 물론 상황이 어렵다. 진짜 문제는 우리들의 신앙이 어떤 가능성을 보지 못하고 문제만을 계속 집중하면 우리는 엎어진다. 우리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problem finder, ●problem magnifier, ●problem maker. 이 세 가지 중에 -기도제목을 빙자한 수(기빙수), 계속 문제를 확산시키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은 문제 증후군에 걸리고 문제 지향의 사람이다.
 
▷우리는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1) 문제 발견하는 자=problem finder,
2) 문제 확대하는 자=problem magnifier,
3)문제를 해결하는 자=problem maker.
문제를 가지고 해결하는 자는 가능성을 바라보는 자이다. 이 자리에 모두는 문제를 해결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 세상의 문제없는 교회, 문제없는 성도,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살아가고 이 땅을 영위하는 동안에는 모둔 사람들은 문제를 갖고 있다. 아무 일도 안하면 아무런 문제가 안 생긴다. 지난 3천 년 동안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도 있다. 누구인가? 이집트 미이라는 아무 문제가 없다. 다 아는 것 아닌가? 미이라는 누워있으니까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가야 하고 자식을 키워야 하고 매일 우리는 삶의 현장에 부딪혀야 하는데 왜 거기에 문제가 없겠는가? 교회도 이 귀한 공동체가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앞으로 수많은 우리에게 주신 어떤 사명을 가지고 감당을 하려고 하면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문제 앞에서 문제의 지향성이 될 것인가? 아니면 가능성 지향이 될 것인가?를 우리에게 달려 있고 거기에 영적기백이 왔다 갔다 하는 것이다. 잘 아시듯이 faith report, 믿음 보고를 한 여호수아, 갈렙은 무엇을 보았는가? 문제를 바라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실 수 있다. 한다.
 
*민수기 13:30,
30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 이것은 문제의 지향이 아니라 가능성 지향이다. 방향을 잡은 것이다. 그런데 열 정탐꾼은 환경과 아낙 자손을 바라본 것이다. 믿음 보고를 못하고 환경보고를 한 것이다. 우리는 다 메뚜기 같다고 한다. 우리가 다 그들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고 한다. 여호수아 갈렙도 환경도 보고, 거인들도 다 보았지만 문제가 아니라 가능성을 보았고, 먹구름 위에 은빛 광채를 본 것이다. 오늘 예배에 와서 예배와 찬송을 하면서 주님을 집중하면서 여러분 모두가 다 하나님이 열어놓으신 영적 가능성에 확 열리기를 바란다. 아멘!!~~ 지금 한국의 상황이나 인터넷 댓글들을 보라. 너무나 고통스럽고 문제 지향적이다. 이 문제 지향적인 것들이 사람들을 공격하고 화살을 쏘아 대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다짐하고 가야 될 것이 있다.
 
우리 교회는 신학적 바탕인가? 정통보수주의인가? 정통보수주의이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 앞에서 수천 년 동안 우리의 신앙의 흐름이 있다. 이 자유주의 신학은 인간의 지식, 지혜, 인간의 판단, 인간의 능력을 더 인정하고 인간의 이성의 틀 안에서 이것을 판단하는 것이다. 성경이 그래서 안 믿어진다. 예수님의 부활도 안 믿어진다. 성경에 능력도 안 믿는다. 모든 가능성에 대해서 문을 닫아버린 것이다. 인간의 긍정적인 마인드와 적극적인 사고를 다른 차원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이다. 적극적 사고방식이나 긍정적인 것은 내가 중심이 되어서, 내가 힘을 내고, 내가 어떤 생각을 하고, 행운을 얻는 이 아니다. 우리는 그 가능성이 하나님이 하실 수 있는가?이다. 자유주의 신학은 영적기백을 갖는 것을 박탈한 것이다. 사랑의 교회 신앙적 바탕은 우리는 정통보수주이 신학의 바탕에 서 있다. 우리는 성경의 기적을 믿는다. 구약의 기적을 믿는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는 오늘도 이 자리에 임한다는 것을 믿는다. 우리는 너무나도 과학의 발달로 있지만 우리의 프레임은 안 된다는 것은 많지만 똑똑한 사람일수록 문제의 대해서 예민하다. 그러니까 똑똑한 사람에게는 기적이 안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문제의 지향이아니라 가능성을 열어 놓고 우리는 자유주의 신학이 아니라, 정통 보수 주의인 하나님의 가능성에 대한 귀의 문을 열고 영적기백을 회복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가능성 지향은 세상의 적극적 사고방식이나 긍정의 마인드가 아니라, 우리는 가능성 지향은 예수님께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마태복음을 보면 대표적인 인물은 예수님이시다.
 
*자유주의 신학 (인간의 이성의 틀 안에서..내가 좋으면 하는 것)=Liberal theology
*정통주의 신학 (나보다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믿는 것)=Orthodox theology
-
*마태복음 13:58,
58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하지 아니하시니라.
-나병환자, 어떻게 나았는가? 주님이 하시면 가능하다. 가능성을 주님께 두는 것이다. 마가복음을 보면,
 
*마가복음 5:28,
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일러라.
- 혈루병인 여인이 예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 그 자체가 어려웠지만 그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고 뭐라고 이야기 하는가?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라고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제자들이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어도 경호하는 사람들이 못 오게 해도, 그 여인은 예수님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라고 하듯이 그녀는 베스트 오브 베스트이다. 오늘 주님의 옷자락에게만 손을 대어도 낫는다는 것이 여러분에게도 주어지기를 바란다.
 
*마가복음 7:26~28,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28 여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상아래 개들도 아이들이 먹던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귀신 들린 딸의 귀신을 쫓아내기를 간구한다. 어떻게 보면 이런 모욕(侮辱) 중에 모욕이다. 그러나 가능성 지향의 극치이다. 오늘 우리 가운데 나병환자나 혈루증인 여인이나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자기 딸이 귀신 들었다. 이것 보다 더 형편이 어려운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오늘 영적기백을 가지고 놀라운 가능성 회복하자. 저희들은 원래 6월 3일에 한국교회가 상암 경기장에서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의 표어로 사람에게는 진심으로, 하나님께는 전심으로, 그렇게 해서 그날 참여해서 기도의 지팡이를 다 들고 10만 명이 모여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영적 가능성을 가지고 믿음의 눈으로, 이 민족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하고 외치는 이 민족의 홍해가 갈라지고 여리고 성은 무너지리라 믿는다. 오늘은 영적 기백이 필요하니까 마음의 지팡이를 들고 기도용사 된 나에게 주의 일을 맡기는 찬양을 하자. 지금 2023년을 앞에 놓고 정치, 경제, 문화, 사회, 과학, 우리 모든 분야에서 예측이 있지만 그러나 오늘 영적기백을 가지고 그들의 전망이 어떻든 환경이 어떠하든 우리 모두는 믿음의 기백을 가지고 담대함으로 기도의 지팡이를 들고 이 한 해 전문가가 무어라고 이야기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정통신학을 따라서 가능성 지향을 가지고 이 시대를 주의 삶으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요약
영적 전쟁터에서 패배의식에 사로잡혀 머뭇거리지 말고 영적 기백을 회복하여 강력한 부흥으로 나아가며 850:1의 심각한 위기 앞에서도 문제의 지향의 사람이 되지 말고 하늘의 불이 임하는 가능 지향의 사람이 다 되어야 한다. 6월 3일 상암 경기장 집회에 모두가 영적기백으로 충만하여 10만 기도의 지팡이를 높이 들고 우리 민족의 홍해가 갈라지는 시대의 여리고 성을 무너지는 기도를 올려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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