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수요저녁기도회(2023년 6월 7일) 제목: "부흥(復興)의 중심에 서서 외치다" 말씀: 여호수아 14:6-12 사회: 문진호 부목사님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설교자: 금동훈 부목사님 ------------------- * 여호수아 14:6-12, 6 그 때에 유다 자손이 길갈에 있는 여호수아에게 나아오고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이 여호수아에게 말하되 여호와께서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와 당신에게 대하여 하나님의 사람 모세에게 이르신 일을 당신이 아시는 바라. 7 내 나이 사십 세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 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하였고. 8 나와 함께 올라갔던 내 형제들은 백성의 간담을 녹게 하였으나 나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으므로. 9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의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10 이제 보소서 여호와께서 이 말씀을 모세에게 이르신 때로부터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방황한 이 사십오 년 동안을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나를 생존하게 하셨나이다 오늘 내가 팔십오 세로되. 11 모세가 나를 보내던 날과 같이 오늘도 내가 여전히 강건하니 내 힘이 그 때나 지금이나 같아서 싸움에나 출입에 감당할 수 있으니. 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 ▶지난 6 3 상암 대회에서 부어주신 은혜와 성령의 선한 인도하심에 힘입어 오늘 부흥(復興) 보고 수요저녁기도회에 참여하신 모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오늘 수요일 저녁 기도회를 통해 회복을 넘어 부흥의 실체와 응답을 경험하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서 14장 6절로 12절 말씀입니다. *여호수아서 14장 6절-12절 말씀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성경책은 340면, 우리 한 절씩 한 절씩 교독하신 후에 12절은 합독하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봉독하겠습니다. 오늘 여호수아서 14장 6-12절 말씀을 통하여서 ‘부흥의 중심에 서서 외치다.’ 라는 말씀으로 함께 은혜 나누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인물은 갈렙입니다.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갈렙의 이 이름의 의미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첫째로 ‘개’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 당시 개는 종, 서번트의 의미를 가지고 있어서 ‘하나님의 종’이라는 의미를 말합니다. 또 수탉의 울음소리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의 약속을 백성들에게 외치는 갈렙의 모습을 연상하게 합니다. 또한 히브리어로 그의 이름은 갈, 전부라는 뜻과 렙, 하트 마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서 합하면 ‘마음의 전부를 드리다.’ 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은 하나님의 종이며, 언약을 외치는 자이며, 하나님을 향한 전심의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목사님, 저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 인생은 망한 것 같아요.” 한 50대 중년의 남자 집사님이 어느 날 저를 찾아와서 눈물을 흘리며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중년의 남자가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그리 흔한 경우는 아닙니다. 정말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내어놓는 것입니다. 그 집사님은 젊은 날부터 예수님을 믿었고 신앙생활을 잘했다고 합니다. 교회 오빠, 교회 누나, 이런 거죠. 신앙생활만 잘한 것이 아니라 공부도 열심히 잘해가지고, 좋은 성적을 거두어서 좋은 학교에 좋은 대학교에 갔고 또 그 당시에 쉽지 않았던 유학도 다녀와서 좋은 회사에 잘 취직해서 지금까지 승승장구하며 좋은 위치까지 올라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려운 시기를 맞이하여서 이제 회사에서 그를 명퇴의 대상으로 올렸다고 합니다. 참 버림받은 느낌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가정에서조차도 사춘기가 깊어가는 딸아이의 태도를 바라볼 때, 이 아빠의 마음이 무너져 내리더라는 겁니다. 더 이상 아빠를 존경하지 않는 말투로 내뱉는 아들을 바라볼 때, 가정에서조차, 내 존재의 가치를 발견하지 못하는 이 중년 남성 이 남자 집사님의 마음은 참 어땠을까요? 그거 아십니까? 특히 자녀 여러분 여기 자녀가 없네요. 안타깝다. 아빠들도 많이 옵니다. 다만 자녀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 숨기는 것뿐이에요. 얼마나 서럽고 억울하고 당황스러웠으면 그러셨을까요? 그거 아십니까? 남자도요 다치면 아파요. 남자는 무슨 우리도 아파요. 아내 분들 잘 들으세요. 남편도 마음이 상하고 삐져요. 남편도 아내 분들처럼 마음을 다칠 수 있고 상할 수 있습니다. “목사님 제 인생은 쓰레기장 같습니다. 남아 있는 것들은 쓰레기밖에 안 보이는 인생입니다. 누구도 저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누구도 저를 찾지 않아요. 저는 버려진 걸까요? 저는 낙오자일까요? 더 이상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오늘날의 많은 아버지들에게 이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과거 젊은 날, 우리들은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확신했었습니다. 하지만 30~40년이 지나고 어느 중년의 모습을 한 우리들의 아버지들은 마치 버림받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날의 아버지들은 묻습니다. 이제 어떻게 살아가야 잘 살아가는 것일까요? 특히 그리스도인이지만 잊혀져가는 세대로서 어떤 모습으로 우리의 가치와 품격을 지킬 수 있을까요? 그런데 이렇게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무가치하게 여겨지고 부정당하는 느낌을 받는 분들이 단지 이 시대의 중년의 남자 분들만의 문제일까요? 아닙니다. 자신의 존재가 잊혀져가는 것들을 두려워하는 이러한 현상은 여성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성분들, 남성분들, 중년의 문제이기만 할까요? 아니요 여전히 가정의 불화 가운데서 내가 이 가정의 불화의 원인 같이 여겨지는 우리 자녀 세대도 동일하게 나는 무가치하고 나 내 인생은 잊혀져가는 그런 느낌을 다 받는단 말이에요. 그래서 오늘 성경 본문은 이런 잊혀져가는 사람들, 이런 잊혀져가는 것들을 두려워하는 우리들의 이야기이며, 그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서 자신의 존재와 존재의 가치를 말씀으로 발견하며 다시금 열정과 힘을 다해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45년 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출애굽 하여 가데스 바네아에서 있었던 12명의 정탐꾼 이야기와 이어져 있습니다. 홍해를 건너고 이제 하나님의 땅으로 나아가기 전 그들은 언약의 땅 가나안으로 12명의 정탐꾼을 보내고 40일 후에 돌아와서 보고대회를 엽니다. 그런데 12명 가운데 10명이 부정적인 평가를 합니다. 그 가난한 땅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 거인 족들과 그들이 가져 가지고 있는 무기를 살펴볼 때 그들은 절대 이길 수 없다 말하며 패배주의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렇게 패배주의에 빠져버린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어떻게 구원하셨는지, 홍해 사건과 놀란 기적 사건들을 까맣게 잊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통곡하며 모든 책임을 모세에게 전가하고 모세에게 돌을 던지려고 할 때, 오늘 주인공 갈렙이 옷을 찢으며 등장하며 외칩니다. 민수기 14장 8절과 구절을 같이 한번 보겠습니다. *민수기 14:8-9, 8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드리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9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들려 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하심으로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라. -라고 갈렙이 지금 멋들어지게 외치고 있습니다. 절망과 분노에 휩싸여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던 이스라엘 군중 앞에서 갈래의 연설은 실로 대단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래에 이런 믿음 보고를 보고 해 손을 번쩍 들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분노하던 모든 동족들을 침묵해 했습니다. 갈렙은 여호수와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곳으로 그의 모습은 끝이 났습니다. 그는 그 이후 더 이상 성경에 등장하지 않습니다. 물론 민수기에서 몇 번 그에 대해서 언급하기는 하지만, 그의 행적이나 업적에 대해서는 무안할 정도로 침묵하고 있는 것을 우리는 발견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을 읽기 전까지는 그는 잊혀 진 존재, 마치 낙오된 존재처럼 보입니다. 그는 잊혀 진 존재였습니다. 그렇게 45년이 흐른 겁니다. 45년 동안 수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주변에 출애굽 1세들은 다 죽었습니다. 광야 40년이 지나고 드디어 이스라엘에 약속한 땅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가나안 땅에서 5년의 전쟁의 시간이 더 지났습니다. 이렇게 45년이 지나고 이제 갈렙이 등장하지 않아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그의 존재감은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런데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우리가 잊고 있던 갈렙이 오늘 성경 본문 가운데 그 존재감을 드러냅니다. 나타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앞에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헤브론을 요청합니다. 헤브론은 어떤 땅입니까? 창세기 13장 8절 가운데 아브라함이 구했던 성음이었고, 창세기 15장 5절 가운데 아브라함이 자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 제단을 쌓았던 곳이었습니다.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왕정시대, 다윗이 왕으로 기름 부 받게 될 땅입니다. 그렇다면 갈렙은 어떻게 45년 동안 잊혀진 존재에서 헤브론 땅, 바로 앞에서 유다 족속의 대표로 가장 완벽한 타이밍에 다시금 등장하여 그의 인생의 최고의 시간, 최고의 전성기를 다시 경험할 수 있었을까요? 어떻게 하면 이제 한물 간 것처럼 여겨지는 우리 죄송해요. 한물 간 이런 다 마음이 너무 안타까워요. 저도 이걸 쓰면서 제 제가 떠오르는 거예요. 제가 내 모습이 산물 같다는 단어를 너무 쓰고 싶지 않아요. 격하게 쓰고 싶지 않아요. 근데 어떻게? 환물 간 것 같은데요... 최고의 전성기를 하나님 앞에서 다 들을 수 있을까? 오늘 말씀을 통하여서 우리가 좀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두 가지 정도를 우리가 함께 살펴볼 텐데요. I. 첫 번째로 하나님께 전심이어야 합니다. -오늘 갈렙의 외침처럼 하나님께 전심으로 외쳐야 우리의 최고의 전성기를 맞닥뜨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전심을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외칠 때 우리는 다시 영적 최고의 전성기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갈렙은 45년의 공백을 모두 깨고 오늘 본문에서 다시금 이풍당당하게 등장합니다. 잘 들어보면 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요? 그의 외침은 글자로 적혀 있는데 마치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그의 소리 가운데 힘과 자신감이 넘쳐나는 것을 특별히 까랑까랑한 그의 육성을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을 만큼 오늘 자세하게 확신 있게 적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의 인생은 하나님께 전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은 민수기 4장 24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전심이 뭐야?’ 라고 생각하는데요. 민수기 14장 24절 함께 볼까요? *민수기 14:24, 그러나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쓴 즉 그가 갖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드리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 -이 성경 구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갈렙이 다른 사람과 달랐다고 아주 단호하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 주님은 그를 포기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그를 기억하고, 아니 마치 세밀한 시나리오처럼 그를 등장시키고 계신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께서는 직접 말씀하시는데 갈렙을 내 종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마음이 그들과 달랐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갈렙을 기억하시고 그를 다시 오늘 헤브론 땅, 약속의 땅, 왕의 땅 앞에서 위대하게 등판시키시는 이유는 바로 그의 마음이 갈렙의 마음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서 마음은 히브리어로 ‘누아흐’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영(靈)을 의미하는데 그러니까 그의 영적 상태가 다른 사람들과 달랐다는 거예요. 갈렙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세상의 꽃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세속의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상황의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언약의 하나님,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영,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는 사람 갈랩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하나님 나에게 전심을 드리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이런 그의 전심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오늘 성경 본문을 다시 한 번 잘 살펴보겠습니다. 여호수아서 14장 7절입니다. *여호수아서 14:7, 내 나이 40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가데스바네아에서 나를 보내어 이 땅을 정탐하게 하였으므로 내가 성실한 마음으로 그에게 보고 하였고. -라고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여기서 성실한 마음은 나의 마음 가운데 있는 것과 같은 말로 직격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쉽게 말하면 믿음의 인테그리티(Integrity)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다른 10명의 정탐꾼의 부정적인 복음에도 불구하고 갈렙은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반드시 주실 것이라는 언약을 온전히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결국 하나님에게 진심이며 전심인 사람이 바로 갈렙 이였습니다. 그러한 모습은 그가 하나님의 언약에 사로잡힌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럼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에 사로잡힌 하나님께 전심인 사람들이 특징이 있습니다. 무엇일까요? 우리 성경을 다시 한 번 좀 살펴볼 텐데요. 로마서 10장 17절입니다. *로마서 10:17, 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 앉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신명기 6장을 한 절 더 보겠습니다. *신명기 6:4,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여기서 두 구절에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들으리라는, 들으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듣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구약에서 말씀에 대해서 들으라는 것과 신약에서 복음을 들으라는 것은 단순히 히어링 또한 리스닝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이 들으라. 라는 듣고 반응하는 걸 말합니다. 신약 성경 가운데 쉐마는 쉐마에서 들으라는 것은 단순히 듣고 멈추라는 게 아니에요. 확장되어져서 듣고 반응하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듣고 반응하는 것을 성경에서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네, 여러분들이 지금 상상한 단어 바로 그것 순종입니다. 아니에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을 듣고 반응함 행함으로 순종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전심을 인정해 주세요. 바로 갈렙이 이런 하나님의 언약에 사로잡혀 순종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순종하는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헌신이 있습니다. 바로 이 순종의 헌신의 사람을 우리 하나님께서 기억하십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다 잊어도 모든 가족들이 나를 다 잊어도 우리 하나님은 이 순종하는 사람을 절대 잊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가장 완벽한 인생의 사명의 타이밍에 그를 부르시고, 그를 통해 갈랩처럼 하나님의 언약을 외치게 하십니다. 그래서 갈레의 이름은 ‘하나님의 종으로 전심을 다하여 하나님의 약속을 외치는 것입니다. II. 두 번째로 갈렙처럼 믿음의 중심에 설 때 가능합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는 잊혀져가는 우리의 인생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최고의 시간을 다시 경험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갈레처럼 믿음의 중심에 설 때 가능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중심에 서야 합니다. 우리 오늘 성경 본문 12절 말씀을 같이 볼까요? *여호수아 14:12, 12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 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 내리이다 하니. -우리가 믿음으로 온전히 설 때 바로 하나님의 위대한 그때를 다시 경험하게 됩니다. 오늘 갈렙은 너무 오래 기다렸어요. 45년을 버텼습니다. 갈렙은 45년을 기다리면서 단 한 번도 실망한 적이 없었을까요? 인생의 절반이 넘는 시간을 기다리면서 한 번도 마음에 의심이 없었을까요? 오늘 성경 본문에서 갈래에 그런 실망하거나 의심하는 모습은 안타깝게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감사하게 시편의 기자가 이렇게 말합니다. 시편 44편 23절, 24절 가운데 : *시편 44편 23-24, 23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 일어나시고 우리를 영원히 버리지 마소서. 24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가리시고 우리의 고난과 악재를 잊으시나이까. -혹시 우리 마음이 이 시편의 내용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참 다행입니다. 저는 이 시편의 기자의 마음에 100% 동의합니다. 저와 같은 마음이라서 말입니다. 분명 젊은 날 하나님 앞에서 나의 인생을 우리의 전 생애를 드리며. “주여 제발 나를 저를 우리를 사용해 달라.”고 부르짖었고 우리 주님께서 원하시는 것으로 그곳이 ‘아골 골짝 빈들일지라도 주여 저를 보내소서.’ 하며 우리가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안 했습니다. 저는 젊은 날부터 신학을 했습니다. 신학교에 다녔어요. 1학년 때부터 1학기 때부터 채플 시간을 채플을 매일매일 하거든요. 근데 이 찬송가를 맨날 부르는 거예요. 아골 골짝 빈들에도 어떻게 간다고요? 왜요? 자신이 없어서요. 저는 못 가겠습니다. 저는 안 가겠습니다. 저는 빼시고 옆에 있는 이분을 보내주옵소서. 저는 사실 지금도 이 찬송가를 부를 때마다 심장이 벌렁벌렁 거려요. 내가 갈 곳이 아골 골짝 빈들 일까봐서요... 이거 말하지 않으려고 그랬는데 해버렸네. 그렇게 우리가 강력하게 외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불러주시고 맡겨주셨던 소명과 사명에 의하여서 온 힘과 마음을 다하여 쌓아온 우리의 인생 앞에서 잊혀지니라. 그 어떤 고난보다도 더 고통스러운 것인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런 고된 기다림을 잊고 계신 것은 아니신지요?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주님을 찾습니다. 나의 존재를 잊지 마시라고 다시 나를 불러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과수원집 손자입니다. 갑자기 네 저를 자꾸 불쌍하게 보시는 분들이 계신데 이래 뵈도 저희 할아버지 땅을 밟지 않고서는 우리 동네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저는 단 한 번도 과일을 사 먹어본 적이 없어요. 왜요? 과수원이 우리 할아버지 건데, 복숭아도 먹고, 포도도 먹고, 수박도 먹고 저는 왜 과일을 사 먹는지 이해를 못했어요. 그럼 과수원만 우리 할아버지 땅일까요? 아니요. 지금 정확한 제가 명칭은 말할 수 없습니다만 충북 충주시 앙성면 능암리 445번지 그 일대가 저희 본적인데요. 다 우리 할아버지 땅이 논도 우리 할아버지 땅, 밭도 우리 할아버지 땅 모두 모두 우리 땅 근데 망했어요. 망하는데 너무너무 억울해요. 왜 억울한지 아세요?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할아버지 땅에서 온천이 터진 거예요. 그때 그 시세로 하면 여러분이 강남의 빌딩을 살 수 있었어요. 제가 그런 사람이었었습니다. 근데 망했어요. 왜 망했습니까? 모르죠. 제가 어떻게 압니까? 근데 제가 예상키로는 제가 삼형제인데요. 제가 차남입니다. 저와 제 동생이 목회자예요. 그래서 망했어요. 하나님께서는 목회자를 부르실 때 그냥 부르지 않고 물질을 받습니다. 신학교 시절 돈이 없어서 매끼마다 굶었던 이야기가 그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제 이야기입니다. 저는 한 번도 등록금을 제때 내본 적이 없어요. 지금은 잘 모르시겠지만, 제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대자보가 활성 되었는데요. 등록금을 안 내면요. 대자보에 그 이름이 붙습니다. 저는 항상 한 학기 가운데 한 한두 달이 지나면 대자보의 자리에 붙어요. 등록금 안 낸 사람 신학과 금동훈, 제 이름이 메뉴에 있어요. 왜요? 금씨라서요. 왜 1번부터 8번까지는 다 그렇게 등록금을 냈을까요? 그렇게 제가 네 학기를 등록금을 제대로 못 냈어요. 여러분도 그렇게 한두 달 동안 대자보에 제 이름이 떡 하니 붙어 있어요. 그럴 때에 제가 부끄러워했을까? 아니요 저는 자랑스러웠습니다. 제가 언제 대자보에 제 이름이 저렇게 떡하니 붙어 있었겠어요. 얼마나 자랑스럽게 여겼는지 몰라요. 그리고 하나님 기도했어요. 하나님 저는 사실은 신학하고 싶지 않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등록금 안 주시면 그만두면 되지요. 근데 하나님께서는 참 신기하게 대자보 그러니까 잘리기 바로 직전에 등록금을 주세요. 그렇게 네 학기를 지냈어요. 그럼 여러분 등록금 대자부가 떨어지면 뭐 붙일까요? 학생회비 안 낸 사람 또 재학이 그렇게 새 학기를 정말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습니다. 그러니까 밥을 먹었겠습니까? 목사님 지금 풍채가 좋으신데요? 아니에요. 굶어서 부은 거예요. 이렇게 망했는데, 무슨 소망이 있었겠어요. 신학교를 다니면서 무슨 무슨 뭐가 있었겠어요. 근데 우리 어머니는 어땠을까요? 예수님 믿고 집안은 망하고 남편은 술로 그냥 술로 사는데, 무슨 소망이 있었을까요? 근데 그 우리 어머니는 그때부터 맨날 밤만 되면 저녁만 되면 저녁 껏 드시고 교회 가서 기도하시는 거예요. 1년 2년 저는요. 그 2년의 시간 동안 정말 고통스러웠어요. 근데 우리 어머니 저 볼 때마다 기도하고 갔다 오셔서 저 학교 갈 때 항상 하시는 말씀 있으세요. 동훈아, 걱정하지 마 걱정하지 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 주셔서 우리 집을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용하실 거야 우리 집안을 사용하실 거야 할렐루야, 아멘! 뭘 아멘이에요. 그때 이제 서울에 살다가 돈이 없어서 쫓겨나가지고 의정부에 살았는데 의정부에서 학교 가려면 차비가 600원, 1200원이 들어요. 그 돈이 없는데요. 학교 갈 돈이 어떻게 어떻게 1300원을 구해요. 그럼 가는 데 600원 쓰고 오는 데 600원 쓰고 100원이나 남네요. 그럼 이거 어떻게 쓸 것 같아요? 돈 모아서 밥 사 먹었을까요? 아니요. 그래도 죄송합니다. 꼴에 신학생이라고 그때 신문이 300원이었던 거 기억해요 그거 돈 모아서 신문 사봤어요.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런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고통스럽고 힘든 때 어떻게 우리 어머니는 견딜 수 있었을까요? 한 달도 아니고 두 달 동안이고, 1년도 아니고, 2년도 아니고 그 길어진 시간을 어떻게 견딜 수 있었을까요? 이게 저희 어머니만의 이야기입니까? 이 자리에 계신 우리 믿음의 선배님들 그 기나긴 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견디신 겁니까? 찬양으로요? 기도로요? 말씀으로요? 말은 좋죠. 한번 해보세요. 지금 이 자리에 계신 우리 귀한 믿음의 선배님들 그 견딤의 시간이 쉽던가요? 그 견딤의 시간이 짧던가요? 그 견딤의 시간이 즐겁던가요? 여유가 넘치던가요? 제가 확신해요. 절대 잡지 않고 절대 즐겁지 않고 절대 여유롭지 않았어요.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견딜 수 있었던 걸까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하며 소망합니다. 내가 쓸데없는 존재가 아니라고 말이지요. 내가 쓰레기장이 아니라고요. 내가 정말 필요한 존재라고요. 지금 이런 오랜 기다림에서 지쳐 잊혀져가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고요. 우리가 한 소절 한 소절 버티며 살아온 이 인생에 대반전이 준비되어져 있다고요. 이 말만 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얼마나 마음이 그동안 나 자신도 나를 의심했던 그 고통스러운 나날들이, 마음의 한으로 서러워지는 그 나날들이 봄날 햇볕에 눈이 녹듯 다 누가 없어질 것 같습니다. 알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기다리는 겁니다. 이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습니다. 자녀의 희귀한 질병 앞에서 무기력하게 기다릴 수밖에 없는 부모님의 마음을 압니다. 부모와 사랑하는 가족들의 셀 수 없는 항암 치료와 수술, 끝이 날 수 없는 치료의 질식대로 지쳐버린 아픈 가족을 바라보는 그 마음을 조금은 다 다 이해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래도 조금은 압니다. 소망 없는 상태로 좌절과 패배감에 휩싸여 있는 귀한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는 너무나도 더디게 여겨질 것입니다. 하지만 견뎌야 합니다. 우리의 재 등판의 최고의 시기는 무기력하고 절망적으로, 비관으로 점철(點綴)되어져만 합니다. 그리고 참을 수 없는 거룩한 인내의 몸을 삶을 내어 맡겨야 합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자랑스러워하신답니다. 데살로니가 후서 1장 4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4, 4 그러므로 너희가 견디고 있는 모든 박해와 환난 중에서 너희 인내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우리가 친히 자랑하노라. -그리고 이런 우리에게 약속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히브리서 10장 3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0:3, 3 너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익숙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성경은 사랑하는 자들에게 인내와 연단을 요청합니다. 불 시험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전서 4장 12절, 13절 말씀은 이렇게 또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12-13,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연단하려고 오늘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한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히려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13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이것으로 알았습니다. 사랑받는 거룩한 성도도 고난과 시련을 견뎌야 된다는 것을 겪어야 된다는 것을 내가 받는 고난이 시련이 이 기다림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고난에는 반드시 이유가 존재합니다. 이 고난이 나와 우리 가정과 우리 교회를 이 나라를 살릴 것이라는 것을 말이죠. 하나님께서 죽음, 어둠 가운데 던져진 우리를 그냥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타이밍에 우리의 타이밍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이 기다림에 대하여 인내하고 마지막까지 약속의 성취가 이루어질 때까지 버티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 믿음의 중심에 서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의 말씀 우리 하박국 2장 4절입니다. *하박국 2:4, 4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마서 1장 17절 말씀입니다. *로마서 1:17,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의는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리라. -여기서 믿음은 바로 히브리어로 애 문화라는 단어입니다. 이 애 문화는 버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의의는 마지막까지 말씀 언약 약속으로 버티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갈렙이 그렇게 사실 45년을 버틴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언약만이 버틸 수 있는 힘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시는 믿음으로 45년을 버팀으로 드디어 하나님의 가장 최고의 타이밍에 도달했습니다. 마지막까지 버티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갈렙은 하나님의 언약의 성취를 외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도 마지막까지 버티는 믿음 안에 믿음의 중심에 서야 합니다. 마지막 이야기하고 마칠까 합니다. 한강에는 난지도라는 섬이 있습니다. 조선시대 기록에는 꽃이 피어 섬이라고 하여 중추도라고 기록하고 있는 난지도(蘭芝島)는 어느 날 갑자기 쓰레기 섬이 되어 버렸습니다. 1973년 서울의 모든 쓰레기를 이 섬에 버리기로 결정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쓰레기로 만들어진 작은 산 2개가 생기기 시작하여 8,090년대에는 이 섬에 쓰레기 섬이 쌓여졌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1973년부터 1993년까지 약 1만 톤으로 이루어진 높이 100mm, 8만 평의 거대한 쓰레기 더미로 성들이 만들어졌습니다. 1973년 5월 30일, 빌리그레함 목사가 서울 여의도 광장에 가득 메운 청준들 앞에서 설교하던 그 시절, 여의도에서 지척이었던 난지도에서는 꽃과 함께 사람들이 사라졌습니다. 그것은 죽음의 땅이 되었고, 우거진 갈대와 꽃들이 피어 산새와 들새가 지적이며 사람들로 북적이던 난지도는 잊혀져버렸습니다. 대신에 쓰여 쌓여진 쓰레기 성은 침전수와 악취, 그리고 파리 떼가 들끓는 아골 골짜기 되었어요. 모든 사람들이 가까이 가기조차 싫어하는 절망만이 드나드는 곳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누구도 그곳에서 꿈을 꾸거나 소망을 노래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거대한 쓰레기 섬에 누군가가 꽃을 심기로 결정한 겁니다. 그리고 거대한 경기장을 만들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그곳에는 공원과 경기장이 세워졌습니다. 그래서 그 경기장, 공원 이름이 하늘을 닮아서 하늘공원, 노을공원이라는 공원이 생겼고, 그리고 그 옆에선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기장 가운데 하나인 상암 월드컵 경기장이 생겨났습니다. 결국 2002년 한일 월드컵과 함께 모든 사람들과 산새와 들새, 이들에게 문이 활짝 열게 되었습니다. 쓰레기로 버려진 죽음의 땅에 꽃을 심고, 피어 생명의 공원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세계 10대 경기장을 지어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모이게 하는 월드컵 경기장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50년이 지난, 지난 6월 3일, 1973년 여의도에서 나타났던 부흥의 역사가 50년 만에 상암 경기장에서 다시 일어났습니다. 다시금 나타난 부흥의 빵바레와 복음의 선포의 생명력은 우리 담임 목사님의 개회사의 외침과 함께, 무릎 꿇고, 기도의 요청 앞에 비좁아서 앉을 수도 없는 그곳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기도의 자리, 부흥의 자리, 응답의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주여, 용서하여 주옵소서. 주여 이 부흥의 초대를 옮겨가지 마시옵소서.” 그렇게 외치고 젊은 날 하나님 앞에 결단하고 결정하고 하나님 나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하며 외쳤던 저의 젊은 날의 서원이 기억났습니다. 서 있지도 못하고 앉아있지도 못하고 어디, 꿇을 한 평의 공간조차 없는 곳에 무릎을 구겨놓고, 머리를 땅에 박고,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주여 나를 잊지 마시옵소서. 주여 우리가 여기 있사오니 우리를 잊지 마시옵소서. 주여 우리가 여기 있사오니 다시 한 번 부흥의 은혜를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여 다시 한 번 이 땅에 하나님의 부의 물결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주여 우리가 여기 있사오니 주여, 우리를 기억하시고 우리를 다시 한 번 사용하여 주옵소서.” -그 부흥에 중심에 저와 같은 이 시대와 갈렙들이 수없이 무릎을 꿇고 기도했던 그곳이 바로 부흥의 중심인 줄 믿습니다. 그리고 그 부흥의 능력이 이 자리까지 임한 줄 믿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의 갈렙처럼 마음의 옷을 찢고 하나님 앞에 부복하며, “주여 내가 여기 있사오니 기억하여 주옵시고, 주여 우리가 여기 있사오니 우리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고백함으로 다시 한 번 부흥의, 열정의, 하나님의 가장 아름다운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는 우리 귀한 사랑의 교회 성도님들 되기를 소망합니다. ♣요약 오늘 주님의 놀라운 말씀 말씀처럼, 우리가 이 시대에 갈렙이 되기를 소망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전심이 되어, 우리가 믿음의 중심에 서서, 부흥의 중심에 서서 다시 한 번 우리를 사용하여 주시라고 외쳐야 한다. 우리가 21세기의 갈렙이 되어 고난도 기쁨으로 인내하고, 믿음으로 견디어 내서 수많은 영혼들이 갈렙처럼 세워지는 은혜가 있기를 간구해야 한다. -갈렙이 45년 동안에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지만 오랜 기간 동안에 인내하고 하나님의 말씀만을 붙잡아야 하는 그 시간들 가운데 그의 영혼이 가난함과 그의 영혼이 메마름과 주의 의와 주의 응답의 역사를 사모하는 그 심령으로, 버티고 버텼던 시간이 45년이다. 이 쓰레기통 같은 우리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 약속의 말씀을 주셨다면 반드시 이루실 줄로 믿어야 한다. 갈렙은 끝까지 버티고 끝까지 남았기 때문에 승리했고, 땅을 얻은 것이다. |
728x90
반응형
'○수요저녁기도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6월 21일) "다른 신은 없다"(강경식 부목사님)-사랑의 교회 ☆ (0) | 2023.06.22 |
---|---|
☆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6월 14일)“구원에 사로잡히다”(김승진 부목사님)-사랑의 교회 ☆ (0) | 2023.06.15 |
☆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5월 31일) "싫음과의 싸움"(강건우 부모사님)-사랑의 교회 ☆ (0) | 2023.06.02 |
☆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5월 24일)"하나님의 본심"(전승현 부목사님)-사랑의 교회 ☆ (0) | 2023.05.24 |
☆ ♣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3년 5월 17일)"주님은 나의 피난처"(소문수 부목사님)-사랑의 교회 ☆ (0) | 2023.05.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