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05월 22일)
제목: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말씀: 에베소서 4:13-15
찬양인도: 쉐키나(이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강건우 부목사님
설교자: 권진우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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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4:13-15,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4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수와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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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수요져녁기도회에 참여하신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4장 13절에서 15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예 오늘 말씀에서 사두바울은 성도가 온전함에 이르는 비결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오늘 13절에서,
 
*에베소서 4:13,
13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의 하나가 될 때, 그리스도의 충만한 데까지 이를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알아야지만 예수님을 닮은 온전함에 이를 수 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 절 뒤인 15절에서는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의 그에게까지 자라가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사랑 안에서 여길 보면 여기 성경에 3이라는 숫자가 붙어있는 것을 보실 수가 있을 것인데요. 이걸 따라서 아래 난 해주를 보면, 사랑 안에서 자라자. 라고 나와 있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잘하고 성장해 갈 수 있는 핵심 비결을 바울은 사랑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정리해보면 사도바울은 우리가 온전함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 13절에서는 ⓵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의 하나가 되라. 고 말하고 있고 15절에서는 ⓶사랑 안에서 자라가라.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15,
15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런데 이 둘은 지금 바울이라는 한 사람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온전함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 바울이 전혀 다른 두 가지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고 우리가 그렇게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무언가 이 둘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옳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온전하게 우리가 성장하게 하는 비결(秘決)이라고 지금 바울이 말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그리고 15절에 나오는 사랑으로 자라가는 것 사이에는 이 둘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이 있는 것일까요? 먼저 우리는 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다고 할 때, 우리가 믿어야 할 믿음의 내용이 무엇인가를 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할 때, 우리가 믿는 믿음의 내용이 뭡니까?
 
-먼저는
1) 예수 그리스도에 살아계실 존재하심, 그리고
2) 그분이 인간의 육신을 잊고 이 땅에 오셨고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라는 사실을 믿습니다. 그리고 또한
3) 장차 세상을 심판하시고 택한 자들을 불러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재림하실 곳 다시 오실 것을 우리가 믿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믿음의 내용 안에 담겨있는 예수님의 심정은 무엇일까요?
심정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완전한 사랑이 이 안에 담겨 있다. 라는 것이죠. 하나님께서 아들의 생명을 주셨다. 라는 것은 더 이상 보탬 것이 없는 완전하고도 무한(無限)대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심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주면서까지 사랑하는데 거기에 무슨 다른 의도가 끼어 들 수가 있겠습니까?
 
단지 존재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존재 자체를 사랑하기 때문에 기꺼이 생명까지 내놓을 수가 있는 것이죠.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다. 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신 더 이상 보틸 곳 없는 무한대의 완전한 사랑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인 것을 의미합니다. 이 예수님의 사랑을 나의 것으로 완전히 받아들인다. 이게 예수님을 믿는 것에 의미라고 볼 수 있죠. 그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일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해 가는 과정이라고 이야기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오늘 이제 본문에 예수님 하나님의 아들 되신 예수님을 믿는 것과 아는 일이 나오는 아는 일이 나오는데 예수님을 믿는 것이 예수님의 나를 향한 완전한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라면, 예수님을 아는 일은 이제 내가 예수님을 사랑해 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나를 향한 예수님의 완전한 사랑을 받아들이고 또한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해 갈 때, 온전함에 이룰 수 있다. 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믿는 것과 아는 일은 사랑과 결부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바울은 15절에서 ‘사랑 안에서 자라자 온전하여 지자’ 라고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서 이것과 좀 같은 의미를 담고 있는 에베소서의 좀 다른 말씀을 우리가 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에베소서 3장 17절에서 19절까지의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3:17-19,
17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
18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19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다 같이 합독(合櫝)하도록 하겠습니다. 같이 읽겠습니다. 여기 이제 19절을 보면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라고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걸 볼 수가 있습니다. 아까 우리가 본문의 4장 13절에 그리스도의 ‘장성(長成)한 분량(分量)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와’ 의미상 이게 연결되는 구절(句節)이라고 볼 수가 있는 것이죠. 그런데 그러한 충만(充滿)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3장 17절 한 번 더 띄워주시겠습니까?
*에베소서 3:17,
17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
-3장 17절을 보니까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계 하오시옵고. 라고 말씀하고 있고 그다음 18절에선 뭐라 그러냐면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18절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일아, 라고 말하고 있죠. 여기에서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시므로 충만해지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하다고 말해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이 여기서도 나오고 있는 걸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아까 우리 본문의 에베소서 4장 13절 말씀을 좀 더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에베소서 3장 17절부터 19절까지 말씀을 이걸 병행(竝行)해서 우리가 같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라는 것이죠. 먼저 바울은 하나님으로 충만해지고, 온전해지기 위한 조건으로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그럴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에 계시게 된다고 합니다. 이뿐 아니라 사람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진다고 합니다. 절대 흔들리거나 요동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죠. 믿음을 통해서 한 번 우리 안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떠한 일이 있어도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완전한 사랑으로 영 의원이 함께하심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온전해지는 데 있어서 이건 매우 중요한 전제조건이 됩니다. 우리가 온전해지고,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것은 한 번에 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서 하나님의 자녀 된 신분을 얻는 것은 믿는 순간에 단번에 되는 일이지만, 우리가 온전해지는 거, 그리고 예수의 수도에 장성한 분량까지 충만해지는 것은 어떻습니까? 이거는 단번에 되는 게 아니라 시간이 필요하죠. 과정이 필요하죠. 오랜 시간과 과정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이 온전해지는 과정에 있어서 우리는 여전히 모여 우리 안에는 남아있는 죄 성으로 인해서 다시 죄(罪)를 범(犯)할 수도 있고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고 죄로 인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면(外面)하신다면 우리는 결코 온전(穩全)함에 자리를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과정 중에 중도 탈락(脫落)할 수밖에 없겠죠. 우리 안에 계실 뿐만 아니라 어떠한 상황(狀況)에서도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단단히 우리와 연합(聯合)하여 계시겠다고 다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믿음은 우리가 예수님을 닮는 온전함에 이르기 위한 거룩한 토대이고 견고(堅固)한 반석(磐石)이 되는 것입니다. 밑바탕이 되는 것이죠. 이 토대(土臺) 위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해져야 되고, 그리고 머리 대신 예수 그리스도께 에게까지 자라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을 위해서 필요한 것을 사도 바로 뭐라고 말하고 있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는 것 바울은 특별히 아까 3장 18절에서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가라’ 라고 강조합니다. 그리고 이어서 19절에서는 ‘그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가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충만하게 된다. 라고 말합니다.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사랑을 예수님의 사랑을 알아가야 된다. 라는 것이죠. 근데 먼저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살펴봐야 되는 건 뭐냐 하면 이 ‘안다.’ 라는 단어 의미가 어떤 의미냐? 라는 것입니다. 여기 나오는 성경에 나오는 ‘안다’ 라는 것은 다만 지식으로만 아는 것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마치 부부가 서로를 알아가듯이, 지식을 넘어서는 경험(經驗)을 통해서 알아가는 걸 의미하는 것이죠.
 
※한 번은 제가요. 식당에 밥을 먹으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리에 제가 이렇게 밥 먹는 식당 안에 여러 부부들이 뭐 동호회 같은 것 같아요. 부부(夫婦) 동호회(同好會) 같은 데 모여서 회식(會食) 모임을 이렇게 갖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모임 동호회 모임 여러 분 중에 한 분이 남자 한 분이 너무 아마 리더 격인가 봐요. 전체 모임을 재미있고 유쾌하게 이끌어가는 거예요. 옆에서 들어도 정말 웃음이 나올 정도로 이야기도 아주 재미있게 잘하시고, 또 거기에 모인 분들이 부족한 것은 없는지 하나하나 살피면서 아주 매너 있는 모습도 보여주더라고요. 그리고 남자 분 옆엔 누가 앉았겠어요? 부부 모임이니까. 아내 되시는 분이 앉아 있죠. 그리고 아내 되시는 분 옆에는 또 이렇게 좀 친한 또 이렇게 여자 분이 앉아 계셨는데 여자 분이 아내분 한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아유 자기는 좋겠어. 저렇게 재미있고 매너 좋은 남자하고 살고 얼마나 행복하고 좋아?” 이렇게 얘기했습니다. 제가 들었어요. 옆에서 그때 이야기를 들은 아내분이 시큰둥한 표정을 지으면서 짧게 한마디 했습니다. 뭐라고 그랬을까요? “살아봐!~” 다시 말해서 ‘너 안 살아봤으면 말을 말어!!’ 라는 뉘앙스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그때 유레카!!!~ 성경에서 말하는 ‘안다.’ 라는 것이 이런 거구나!~ 할렐루야~!
 
그때 저는 확 그게 마음에 와 닿더라고요. 경험해보지 않고 안 살아보면 알 수 없는 지식, 결코 머리로만 알 수 없는 이 지식, 그것이 바로 오늘 성경에 나오는 ‘안다’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너무 화가 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이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과 동시에 우리는 또 지식으로도 주님을 알아가는 것 모두 사실은 다 필요합니다. 경험으로만 주님 알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와 동시에 지식으로 아는 것도 같이 필요해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을 눈으로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성경에서 게시된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면, 우리의 여러 삶의 정황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의도를 우리는 잘못 오해(誤解)하거나 혹은 손길을 하나님의 손길을 뻗치시는데 손길을 놓쳐버릴 수가 있습니다. 잘못된 경험적 지식을 우리가 가질 수가 있다. 라는 것이죠. 예를 들어서 우리가 신앙생활(信仰生活)을 하다가 죄를 지으면 양심(良沁)의 가책(呵責)을 느끼거나 내적인 심적인 고통(苦痛)을 느낄 때가 있죠.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죄(罪) 지으면 어때요 불편하잖아요? 그죠 내면의 고통이 올 수도 있고 가책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증상(症狀)들이 의미하는 게 뭘까요? 하나님께서 우리를 외면하시거나 버리셨기 때문에 찾아오는 증상이 아니에요. 그것은 우리를 놓지 않으시기 때문에 찾아오는 증상이죠. 특히 너 지금 주님 앞에 나와서 내 앞에 나와서 회개(悔改)하고 관계(關係)를 다시 회복(回復)하라는 일종의 하나님의 사랑이 담긴 사인(Sign)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性稟)을 잘못 오해하면, 죄로 인한 양심의 가책이나 고통을 이게 뭐 힘들잖아요. 고통이 뭔가 이렇게 불편하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워하시고, 외면하셨기 때문에 찾아오는 증상으로 잘못 이해를 하게 된다. 라는 것이죠. 그래서 오랫동안 하지 않아도 될 신앙에 방황(彷徨)을 하거나 시간의 낭비(浪費)를 하게 되는 그런 상황이 발생(發生)할 수도 있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바로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우리의 인생 가운데 여러 정황(情況)들 속에 찾아오시고, 하나님을 경험해야 되고, 우리가 알고 있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 삶을 통해 찾아오시는 주님을 그런 경험한 주님을 잘 뜻과 성품을 잘 해석(解釋)할 필요가 있다. 라는 것이죠.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의 어떠한 성품(性稟)을 경험(經驗)하게 될까요?
 
오늘 사도 바울은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으라.’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택하신 자녀들을 향한 더 이상 보탤 것 없는 넘치는 완전한 사랑을 말씀을 통해서, 또한 삶의 경험을 통해서 알아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가야 되는데 특별히 알아가야 되는 게 뭐냐 하면, ‘지식에 넘치는 그분의 사랑을 알아가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변(變)하지 않는 그분의 사랑, 사랑의 너비, 그다음에 길이, 높이, 깊이를 알아가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랑을 알아가는 게 우리가 온전함에 이르는 비결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죠. 먼저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를 알라고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인간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범위(範圍) 그리고 사랑의 기한(期限)을 의미합니다.
 
너비와 길이는, 인간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의 이 범위, 즉 너비는 어떨까요? 제한이 없습니다. 어떤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을 주신 완전한 사랑의 대상에서 제외되지 않는 것이죠. 누구든지 믿고 받아들이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어떠함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자격(資格)과 조건(條件)을 따지지 않으십니다. 이전에 내가 어떤 삶을 살았을지라도, 내 주변(周邊)의 사람들 심지어 가족들조차도 나를 천덕꾸러기로 여길지라도, 예수님은 존재 자체를 사랑하십니다.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은 존귀한 자이기 때문인 것이죠. 또한 인간을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뭘 알라 그래요? 너비 다음에 길이 알랍니다. 길이는 즉 기한을 의미하는데 예수도의 우리를 향한 사랑의 기한 길이는 어느 정도 길이일까요? 영원합니다. 영원하죠. 한 번 사랑하면 영원한 유통기한 유혹의 유효기간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한번 택함을 받으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또한 우리의 어떠함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영원히 변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성경에서 뭐라고 표현 하냐? 신학적으로 언약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입니다. 언약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향한 영원히 변하지 않는 사랑에 대한 하나님의 의지의 표현이요. 약속’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犯罪)한 이후에 창세기 3장부터 아들 예수도의 생명을 통해 인류(人類)를 구원(救援)하시겠다고 이미 창세기 때부터 약속하셨어요. 그 약속은 아브라함, 이삭, 다윗에 이르기까지 계속 이어졌고 때마다, 이 약속을 지키겠다고 확인하고 또 확인(確認)하고 반복(反復)하셨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약속하신 대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신약에 와서, 이 땅에 보내셔서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게 하셨죠. 약속을 결코 지키셨습니다. 그런데요. 하나님께서 이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이시는 그 약속을 지키기까지, 이 약속을 받는 수혜(受惠) 대상(對象)자인 인간의 모습은 어땠을까요? 수천 년의 기간 동안 약속이 이루어지기까지 약속의 수혜를 받는 인간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아!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들의 생명까지 내어주신다고 약속하시니, 감사하다, 얼마나 감격적인가? 하면서 영적인 정조를 지키면서 하나님을 잘 섬겼습니까? 그렇지 않았다는 거,,, 우리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 오시기까지 우리가 구약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을 향한 범죄(犯罪) 역사이고, 배신(背信)의 역사라는 걸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정말 다급(多級)할 때 빼놓고는 하나님을 제대로 섬긴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人類)를 위해 아들의 생명(生命)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約束)은 변(變)하거나 취소(取消)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성경(聖經)의 곳곳에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고 범죄(犯罪)할수록 오히려 하나님은 이 약속을 더 굳건히 하시는 그런 모습을 보여주시고, 의지(依止)의 표현을 나타내는 걸 우리는 볼 수가 있습니다. 우리 호세아서 3장 1절부터 3절까지 말씀을 모시겠습니다. 호세아 3장 1절부터 3절까지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호세아 3:1-3,
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과자를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 하시기로.
2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
3 그에게 이르기를 너는 많은 날 동안 나와 함께 지내고 음행하지 말며 다른 남자를 따르지 말라 나도 네게 그리하리라 하였노라.
-아멘 이스라엘 자손이 또 하나님을 외면(外面)하고, 다른 신(神)을 섬깁니다. 호세아 선지자(先知者)가 활동할 당시만 해도 이미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겹도록 하나님을 배신(背信)하고 다른 신을 섬기기를 이미 수차례, 수십, 수백 차례, 반복(反復)할 때입니다. 어쩌면 이제는 놀랍지도 않을 정도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 뭐라고 말씀하시죠. 1절 중반에 아까 ‘여호와가 그들을 사랑하나니’ 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배신했는데도, 여전히 그들을 하나님은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랑을 눈에 보이도록 선명하게 나타내시기 위해서 호세아 선지자에게 그녀의 호세아의 아내 고멜을 다시 데려오고 사랑하라. 라고 명령하십니다. ‘고멜’ 이란 여인은 어떤 여인입니까? 남편인 호세아를 배신하고 여러 다른 남자들과 불륜(不倫)을 저지른 말 그대로 음란(淫亂)한 여인입니다. 심지어는 호세와의 사이에서 자녀를 셋이나 낳고도, 다시 집을 뛰쳐나가 창기(娼妓)가 된 여인입니다. 영적(靈的)으로 타락(墮落)한 이스라엘의 상태를 잘 나타내는 여인인 것이죠. 인간적으로 도저히 용서(容恕)하고 사랑할 수 없는 여인(女人)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그 여자를 데려오고 사랑하며 부부로서의 약속을 재차(再次) 다짐해라라고 하십니다.
 
이를 통해서 하나님은 내가 이스라엘을 끝까지 사랑한다. 인류(人類)를 구원(救援)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반드시 내 아들을 보내겠다는 확고(確固)한 의지(意志)를 드러내고 있는 계시죠. 지금도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를 언약(言約)의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가 이제는 온전해지고, 예수도의 충만한 분량까지 가야 되는데 자리에 가기까지 우리를 향한 사랑을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세상이 좋아서 이리저리 도망 다니면, 지구(地球) 끝까지 쫓아오실 것이요, 10번 반복해서 죄를 지으면 11번 사랑의 매를 들어서라도 우리를 고쳐내고야 말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그 수준(水尊)과 깊이로 영원히 사랑하시는 이 한결같은 사랑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길이’ 인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높이와 깊이를 깨달으라.
이것은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의 수준(水尊)과 정도(程道)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의 수준은 한마디로 뭐 어느 정도일까요? 바로 십자가(十字架)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인간을 향한 예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에 수준은 십자가로 다 표현이 되는 것 같습니다. 자신의 생명을 아낌없이 되어 주신 사랑이죠. 사랑을 하는데,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생명을 내어준다. 라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사랑하는 대상 외에 다른 아무 바라는 것이 없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존재 자체가 전부이며 사랑 안에 다른 의도가 없다. 라는 걸 의미하는 것이죠. 주님께서 저와 우리 성도님들을 존재 우리 존재 자체로 사랑하신 줄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만나기를 기뻐하시고 늘 함께 하길 원하십니다. 우리가 어떤 말로 어떤 격식(格式)으로 주님 앞에 나오느냐 이건 아주 부차적(副次的)인 문제입니다. 일단 우리 존재(存在) 자체(自體)가 주님을 만나러 나오는 그것만으로도, 하나님 우릴 너무나 기뻐하시고 늘 우리를 하나님은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보고도 또 보고 싶어 하는 게 우리를 향한 사랑입니다. 그리고 무엇이든 우리 속에 있는 것을 하나님 너무나 알기 원하시고, 우리와 나누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시편 109편 5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 좀 보겠습니다. 10편 109편 5절에서 10절까지입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시편 109:5-10,
5 그들이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
6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7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8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9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10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성도님들 중에 이 말씀을 보고 이 시 편 내용을 보고 놀라신 분들이 있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10편에 저렇게 심한 저주(詛呪)의 말씀도 있었나? 이런 생각 들지 않으십니까? 자녀(子女)는 고아(孤兒)가 되고 아내는 과부(寡婦)가 되고 유리(流離) 구걸(求乞)하고 황폐(荒廢)하고 단명(短命)하고 그런데 이 시 편의 저자가 누구인지 들으시면 더 놀라실 겁니다. 누구일까요? 다윗입니다. 다윗이 아마도 선을 누군가한테 선(善)을 베풀었는데 그걸 배신(背信)으로 되갚은 자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얼마나 화가 치밀어 오르고 감정(憾情)을 주체할 수 없었던지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서 서게 해달라고 합니다. 그의 연수(年數)를 짧게 해달라는 건 단명(短命)하게 해달라는 의미이고, 자녀는 고아가 되고, 아내는 과부가 되게 해달라고 합니다. 아 듣기만 해도 끔찍한 저주를 쏟아 붓는데, 말하는 대상(對象)이 어떤 다른 사람한테 하소연하는 것도 아니고, 감(敢)히 하나님 앞에 나와서 이런 내용으로 좀 기도(祈禱)하고, 있다. 라는 것입니다. 성도님들은 이해가 되십니까? 과연 이 내용이 시편에 담겨 있다는 게 뭘 의미할까요?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니 어떻게 이렇게 끔찍하고 불경한 내용으로 하나 이렇게 기도할 수 있지? 예수님께서 ‘이웃을 사랑하라.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설령 마음은 안 그래도 좀 내용은 좀 정제(整齊)해서 기도해야 되는 거 아닌가? 라는 우리가 생각이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성품에서 어긋나는 것 같고, 불경(不敬)해 보이는 기도의 내용이 지금 이 기도가 성경에 담겨 있죠. 이게 뭘 의미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들으셨다. 라는 걸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기도에 어떻게 응답하셨는지, 우린 다 알 수 없지만, 일단 이 당황(唐惶)스러운 기도의 내용이 성경에 실렸다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기도를 귀담아 들으셨다. 라는 걸 의미하는 것입니다. 아멘이 안 나오시네요. 지금 다윗은요, ‘하나님 어떤 아무개가 있는데요. 제가 이러저러한 도움을 줬었거든요. 그런데 녀석이 제 뒤통수를 치고 배신(背信)을 때리지 뭐예요? 하나님 저는 솔직(率直)히 아무개가 용서(容恕)가 안 돼요. 천벌(天罰)을 받았으면 좋겠어요. 아주 단명(短命)해버리고 집이 망(亡)해버렸으면 좋겠어요.’라고 솔직한 자신의 속마음을 표현(表現)하고 있습니다. 성도님들, 이 말씀 보면서 어떤 장면(場面) 떠오르세요?
 
전 뭐가 딱 떠올랐냐 하면 저는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자녀가 오늘 뭐 학교생활을 했던 직장생활을 했던 했으면서 어떤 좋지 못한 관계로 인해서 힘든 힘들었던 감정을 부모님에게 하소연하고 토로하는 장면이 떠올랐습니다. 그때 부모님들 얘기를 들으면 어떻게 반응(反應)하세요. 대뜸 ‘야 너 그런 말 하면 안 돼 좀 더 어른스럽게 굴지 못하겠니? 사회생활이 다 너 뜻대로 되는 줄 알아?’라고 하면 이제 앞으로 자녀의 속 깊은 대화는 이제 끝났다 기대하기 힘들다. 라고 봐야 합니다. ‘아 오늘 너 그런 일이 있었구나! 오늘 우리 딸 우리 아들 마음고생이 심했겠네. 아유 오늘 애 많이 썼어.’ 하면서 일단 안아주기도 하고 위로해 주는 것이 우선인 것이죠. 가르치는 것은 그다음 문제인 것입니다. 오늘 이 시 편이 다윗과 하나님 간의 그러한 대화가 이루어지는 장면인 것입니다.
 
마치 부모가 어떤 대화의 주제가 되었던 일단 자녀가 부모님과 마주 앉아 마음을 나누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부모에게 큰 즐거움 아니겠습니까? 부모님에게,,, 그러듯 하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그분과 마주하는 이 시간을 일단 내용은 어찌 되었든, 마주하는 이 시간을 우리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 하나님이 매우 기뻐하신다. 라는 거죠. 이것은요, 우리에게 영생(永生)이라는 의미도 다시 생각해 보겠습니다. 영생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救援)받으면 영생을 얻죠 이 영생이라는 것도 우리가 한번 다시 생각해 보게 돼요. 우리는 장차(將次)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永遠)히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눈물도 없고 고통도 없는 영광스러운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살아갈 기대(企待)와 소망(所望)이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영생,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가장 큰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 우리에게 영생(永生) 왜 주실까요? 바로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아들의 생명을 주시기까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와 영원히 사랑 안에서 함께 하기 위해서 영원한 생명 영생으로 내게 주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 영생이라는 말 안에는 관계성이라는 것이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고(苦)되고 험난(險難)한 세상을 떠나서 천국(天國)에서 고통과 슬픔 없이 영원히 살게 된다는 어떤 존재와 상태라는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영생을 생각하는 경우가 사실 많이 있죠.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생각할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저와 우리 성도님들과 영원히 함께 사랑을 나누고 교제하며 세상에 무엇도 우리를 갈라 놓을 수 없어! 라 하시면서 영원한 하나 됨을 누리시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우리 존재 자체를 아들의 생명을 내어주신 사랑으로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사랑은 영원히 변함이 없는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아들의 생명을 주신 사랑의 수준 정도의 수준으로 한 결 같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설령(設令) 우리가 죄를 범할지라도 사랑은 변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방식이 달라질 수는 있습니다. 때로는 매를 드실 수도 있고, 징계(懲戒)가 있을 수는 있지만 그것도 사랑의 매이고, 자녀답게 만들기 위한 사랑의 징계인 것이죠. 이렇게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서 우린 한 번쯤,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그럼 그러면 창조주 하나님, 능력의 하나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으로 많이 생각합니다. 물론 너무나 지극히 맞는 말이지만 그렇게만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면 나와의 개인적인 관계에 있어서는 좀 거리(距離)감을 느끼기가 싶습니다.
 
너무 크신 하나님, 이쪽으로만 우리가 생각하면
※예전에 제가 집사님 한 분한테 하나님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세요. 라고 물었더니, 그분이 뭐라고 대답했냐 하면 교장 선생님 같습니다. 라는 답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교장 선생님 아예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참 훌륭하시고 본인이 되시는 분이시죠. 우리 교장 선생님 하지만 학생들 입장에서는 사실 좀 가까이 다가가기가 어려운 느낌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런 느낌으로 말한 것 같아요. 참 하나님 되게 막 신이시고 완전한데, 좀 가까이 하기에는 조금 거리감이 있는, 교장 선생님이라는 표현을 쓰더라구요. 그런데 우리가 오늘 말씀을 보면 언제든 우리를 만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마음의 상태 가운데 있는지, 너무나 우리를 알기 원하시는 세밀(細密)하신 하나님 다정다감(多情多感)하신 하나님이심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우리가 어떠한 상태와 어떠한 처지에 있든지 간에, 우리를 존재 자체로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들의 생명을 주신 사랑의 깊이로 언제나 한 결 같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우리가 말씀을 통해 알게 됩니다.
 
제가 지난주 토요일에 지지난주 토요일에 사역을 마치고 집에 들어가서 제가 이제 티비(TV)를 켰습니다. 그때 무슨 방송이 나왔냐 하면요. 우리 개그맨 이용식씨 아시죠? 별명이 뽀식이 아닙니까? 뽀식이라고 하는 이제 별명으로 잘 알고 계실 텐데, 이분이 교회 집사님이세요. 근데 그분의 딸이 있죠. 요즘에 방송에 자주 나오는 걸로 알고 있는데, 이수민 자매라고 딸이 있는데, 딸도 믿음이 참 좋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근데 딸이 ‘원혁’이라는 가수하고 이렇게 결혼을 하게 되었더라구요. 근데 이 원혁이라는 가수는 목사님 또 아들이라고 해요. 그래서 전에 보니까 이용식 집사님하고 이 딸인 수민자매하고 원혁 형제와 함께 교회 간증(干證) 집회(集會)도 뭐 가고 그러더라고요.
 
우리 김재원 장님 하는 아침마당에도 나오고 그렇게 본 적도 있는데, 그런데 방송을 그날 토요일 날 키니까 이 원혁 형제와 이수민 자매가 결혼식을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결혼식 순서 중에 뭐가 있었냐 하면, 그 신랑이 신부를 위해서 이제 사랑의 세레나데를 불러주는 장면이 있었어요. 보통의 축가 부르잖아요. 다른 사람이 근데 원효형제가 가수니까 신부인, 이제 이수민 자매를 위해서 본인이 준비한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더라구요. 그래서 제가 가만히 노래를 듣고 있는데, 듣다 보니까 가사가 심상치가 않은 거예요. 왠지 CCM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거 이상하다, 이거 CCM 같은데, 아무래도 그래서 인터넷을 뒤져봤더니, 맞더라고요. 제목이 뭐냐면 ‘너를 선택한다.’ 라는 CCM 찬양이었습니다. 이 제목만 봐도 ‘너를 선택한다.’ 어떤 느낌인지 아시겠죠? 하나님의 택하신 자녀로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있는 노래입니다. CCM 찬양입니다. 제가 가사를 한번 불러드릴까요?
 
제가 노래라면 부르면 좋겠는데, 제가 들은 지 얼마 안 돼서 실수할 것 같아가지고, 제가 가사로 대신하겠습니다.
“귀하고 아름다운 나의 사랑아, 나의 모든 마음을 너에게 준다. 무엇보다 소중한 나의 사랑아, 나의 모든 정성을 너에게 준다. 나의 기쁨아, 나의 사랑아 나는 언제나 너를 선택한다. 어떤 이가 세상을 다 준다. 해도 나는 언제나 너를 선택한다. 내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대도 나는 너를 선택했다. 어디에 있던지 무엇을 하던지 상관하지 않고 너를 사랑하다.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상관하지 않고 너를 사랑한다. 나의 행복아, 나의 사랑아 나는 언제나 너를 선택한다. 네가 잘난 사람이 아니어도, 다른 사람들이 손가락질해도 난 항상 변함없이 널 사랑한다.”
 
-오늘 우리가 나눴던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사랑이 이 찬양의 가사 안에 집약적(集約的)으로 잘 녹아져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이 하나님은 우리가 말씀을 통해 또한 삶의 순간(瞬間)순간마다 경험하게 될 때 하나님을 더욱 친밀(親密)하게 느끼게 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과의 거리감은 좁혀지게 되고 높았던 마음의 벽은 낮아지고 허물어지게 됩니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세밀함과 따뜻함으로 우리를 대하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더 편하게 자주 만나게 될 것이고, 만남의 자리가 이젠 부담이 아니라 의무가 아니라 점점 기쁨이 되어갈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주님과의 사랑의 연합(聯合)이 깊어지면서 마침내는 주님을 닮아가는 자리에 우리가 이르게 될 줄 믿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온전(穩全)하게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攝理)를 깨달은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고, 사랑 안에서 자라가자. 고 권면(勸勉))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디 하나님의 넓고, 깊은 사랑, 그리고 높고 깊은 사랑을 알아가는 가운데, 주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해져가는 저와 모든 성도님들 되시기 바랍니다.
 
♣요약
인간의 지식으로 측량할 수 없고, 이 세상에서 찾을 수 없는 넘치는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하심을 감사해야 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우리의 인생은 언제나 감사할 수밖에 없고, 아들의 생명까지 내어주신 사랑의 수준으로, 한 결 같이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으로 인해 소망을 노래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를 하나님께서 예정하시고, 기뻐하시는 온전함의 수준까지 빚으시는 주님께 우리는 모든 영광 올려 드려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보텔 것 없는 예수님과 친밀한 연합을 이루어 성령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시므로, 충만해지는 역사를 경험해야 한다. 그 어떤 높은 산일지라도, 나를 향하신 예수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깨달아, 기쁘게 오르는 온전함과 영광을 드러내는 자로 살아가며, 주님의 몸 된 교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 되어 복음주의 쇠퇴를 막는 결정적 승부처럼 2033-50 비전에 사용되는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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