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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7월 6일)
제목: "우리는 하나님의 성전"
말씀: 고린도후서 6:11-18
찬양인도:쉐키나(이원준 부목사님)
사회:문진호 부목사님

설교자: 강대인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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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6:11-18,
11 고린도 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12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1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17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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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관계를 맺고 살아간다. 모태에서 나오면서부터 부모를 만나게 되고 가족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래서 아이도 엄마를 만나지만 엄마도 처음 아이를 만남으로 아이를 만나면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둘째를 낳게 되면 부모만이 아니라 언니 오빠를 같이 만나게 돼서 형제를 만나게 된다. 부모나 형제, 더 나아가 친지, 부모의 형제들, 그 외에 자녀들까지 우리는 좋든 싫든 관계라는 것을 맺고 살아가게 된다. 유년기를 보내면서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기도 하고 유치원, 학교, 학원 등등, 다니면서 다양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고 있고, 취업을 하고 나서도 일터에서도 사람들과 함께 관계를 맺게 된다. 그렇게 맺어진 관계를 우리는 더 키워가기도 하고 관계의 어려움이 생겨서 관계가 소원해기도 한다. 그러다가 다시 관계가 시작되기도 하고 또 어떤 관계는 끝나기도 한다. 이처럼 모든 인간은 관계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창조하실 때부터 이렇게 관계적인 존재로 독특하고 특별하게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관계하는 그러한 존재로 살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과도 이런 관계를 맺고 살아가지만 우리는 서로서로 간에 관계 속에서 이렇게 함께 서로 연합하여서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이다. 즉 하나님께서 삼위일체로 존재하시면서 성부성자성령이 영원한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계시는데 그런 것처럼 이 삼위일체 하나님만의 단일성과 차별성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투영되고 있다. 그래서 신학자 마이클 리브스는 그의 선하심의 하나님에서 이렇게 이야기 한다.
 
※성부성자성령 사이에는 사랑이 자리하고 있다. 사랑은 기본적으로 관계적, 인격적인 개념이라서 하나님의 그 사랑이 인격적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사랑의 하나님은 인격적인 존재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가운데도 흘러넘치고 우리는 그 사랑을 밖으로 드러내면서 하나님의 가족을 이루고 있다. -마이클 리브스-
 
라고 이야기 한다. 결국 사람은 하나님 사랑 안에서 관계를 맺도록 지어진 존재임과 동시에 그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흘려보내도록 그렇게 지음 받은 존재인 것이다. 이처럼 성경은 사람과 사람들 간에 관계에 대하여 아주 다양하게 기록하고 있다. 서로 함께 사랑하고 있는 사람도 있고 또 때론 미워하고 질투하고 증오하고 떠 싸우는 사람들, 또 어떤 것을 계획하면서 음로를 꾸미는 사람들도 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간절하게 부르짖고 기도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서로 함께 웃으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애도하고 슬퍼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그런 사람들의 이야기는 아무튼 좋든 싫든 많은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이 성경에 기록되고 있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말씀을 주실 때 토라의 말씀을 주듯이, 율법 안에도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 또 그의 백성 안에서 어떠한 관계를 맺으라는 내용으로 가득 담겨있다.
 
신약에서 새 계명을 주신다. 그럴 때도 이 율법 본체를 관계라는 것으로 그 관점으로 요약하고 있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마태복음 22: 37-40절에 나온다.
 
마태복음 22: 37-40,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사랑의 관계, 구약의 모든 계명은 관계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된다. 라고 하는 것으로 요약하고 있다. 이처럼 인간의 삶에서는 관계를 빼고서는 설명이 되지 않는다. 관계를 통해서 서로의 어떤 자리가 형성이 되어 지고 이 관계를 통해서 우리의 삶도 바뀌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좀 나쁜 사람을 만나게 되면 우리도 동일하게 타락하게 될 수 있고 또 좋은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을 통해서 위로도 받고, 도움도 받고 때로는 우리를 강하게 하기도 한다. 이처럼 관계를 한다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고 누구를 만나는 것도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그래서 제가 심방을 하다보면 많은 기도 제목 중의 하나가 만남의 복을 달라고 하는 기도를 많이 받게 된다. 일터에서도 좋은 만남을 허락해 달라고, 또 우리 자녀들이 학교에서나 학원에서나 선생님 혹은 좋은 친구들을 만나게 해달라고 많은 기도를 부탁받게 된다.
 
이 만남이 믿을만해서 서로 위로가 되고 돕고 강하게 해주는 그런 만남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우리 속담에도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있는데 “친구 따라 강남 간다.”라는 말이 있다. 친구와 같이 사랑의 교회에 와서 믿음 안에 살아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이처럼 관계 속에 살기 때문에 교회 전체가 성장하려면 다른 성도와의 관계를 긴밀하게 유지하면서 관계를 더욱 더 개선시키고 강화시켜야 한다. 동시에 전혀 다른 세계관과 정반대의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는 그런 불신자를 대할 때, 어떻게 해야 되는가? 친밀한 관계에 있어서는 조심스럽게 유지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관계를 맺도록 지음 받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우리가 하나님이 성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전 된 본분을 지켜 나가면서 세상에서 관계를 맺어야 한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좋은 관계도 있고 나쁜 관계도 있는데 오늘 본문은 이 두 가지의 모든 관계를 우리 가운데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세상에서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야 하는가?
 
오늘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향하여서 이야기 한다. 그들을 자신이 정말 아끼고 사랑하였다고... 그 사랑하는 마음을 향하여서 사랑하는 마음을 고린도교회에서 가득 담아서 이야기 하고 있는데, 고린도교회는 무언가 바울에게 있어서 좀 편하게 이야기 하지 않고 바울에게 있어서 어떤 편견과 오해를 가지고 마음을 대하고 있다. 왜냐면 예수님과 3년간 공생애를 같이 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울은 뭔가 사도성에 있어서 좀 부족할 것이다. 그가 사도가 맞을까?’ 고린도 교회를 개척한 것은 맞는데 그보다는 그 안에서 사역을 하였던 아볼로, 혹은 베드로를 더 신뢰하였던 그런 사람들도 있었다. 어떤 이는 바울에 대해서 말로만 우리 고린도 교회에 다시 방문할 것이다. 라고 생각했는데 아직도 방문하지 않아서 불만을 표했다. 그리고 계획했던 그 시간대로 오지 않아서 ‘혹여 라도 우리에 대한 마음이 변한 것은 아닐까?’라고도 생각을 했던 것이다. 유대교 이였던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었던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도 바울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다. 왜냐면 그들은 율법주의를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불구하고 율법주의를 계속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 발은 구약에 한 발은 신약에 담고 있었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그들은 회당을 다니면서 동시에 그들은 회당을 기독교와 유대교를 이렇게 양다리를 같이 함께 걸치면서 그들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보니까 혼합주의가 그들에게는 섞여있었고 그들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에는 바울이 주장했던 그 본질적인 요소, 믿음을 통해서 은혜로 받은 구원의 은혜에 대해서 그들은 그 본질을 훼손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은혜가 아니라 오히려 율법으로 인해서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이렇게 기독교의 본질적인 교리에 대해서 어떤 실천적인 것에 대해서 그들은 훼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오히려 그들을 사랑으로 권면하면서 사역이 무엇인가? 그들에게 정말 바른 관계 속에서 사랑의 관계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사역은 무엇인가?
 
그것은 다른 사람을 돕고 섬기고 위로하고 권면하는 것, 또 그들 가운데 대면하여서 사랑의 마음을 함께 나누는 것, 이것이 바로 사역이다. 진정한 사역이라는 것은 바로 관계를 소중이 여기는 것에서부터 시작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서 진실 된 마음을 가지고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한다. 정말 당신들을 사랑한다. 그 고린도 교인들, 한 사람 한사람을 사랑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사역한다는 것은 다시금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분 이것은 바울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다락방에 가서 우리가 해야 될 것이 무엇인가? 바로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한 사람을 사랑하고 또한 돕고 격려하는 것, 이것이 다락방이다. 제자훈련도 마찬가지이다. 제자훈련을 그저 영상을 보고 내가 습득을 한다는 것은 교육에 지나지 않는다. 훈련이라는 것은 믿는 자들이 함께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함께 하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것이 바로 훈련인 것이다. 전도도 마찬가지이다. 사역은 관계인 것이다. 관계를 통하여서 사역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바울은 관계, 관계가 곧 사역이라고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야기 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6:11,
11 고린도 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었으니.
-바울은 숨김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편지를 쓰고 있는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 하고 있다. 그것은 무엇이냐면 그들을 향하여서 마음이 넓어졌다. 효과적으로 당신들을 양육하기 위해서 그들과 진실하게 관계를 맺고 싶다. 그래서 진심을 다해서 진솔하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마음이 넓어졌다는 것이 무엇인가? 마음이 넓어졌다는 것은 그들에게 사랑을 말로만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 되게 그 속 깊은 곳으로부터 행동으로 진심으로 애정 어린 표현으로 사랑한다는 것이다.
 
처음에 고린도인 들이여, 라고 시작하고 있다. 바울이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찾아보니 세 번 나타난다. 갈라디아서에 그 갈라디아 교인들이 탈선하고 있는 모습을 너무나 안타까이 여기면서 꾸짖으면서 ‘이 어리석은 갈라디안인 들이여,’ 라고 표현하고 있고 또 한 번은 빌립보에 나타나고 있는데 바울이 감옥에 있을 때까지 바울을 성실히 지원해 주었다는 것에 대하여서 너무 기쁘게 생각하면서 빌립보 교인들을 향하여서 빌립보교인들이여, 이렇게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고린도인 들이여, 진실 된 마음으로 그들을 향하여 부르면서 내가 당신들을 아낌없이 사랑했다고 화답해 주면 좋겠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고린도인 들이 그 사랑을 잘 받아서 화답하고 있는가? 문제는 그렇지 않았다는 데에 있다. 바울이 진심을 다하여서 사랑하고 있었지만 고린도인 들은 애정표현에 있어서 아주 인색했다. 심지어 전혀 표현하지 않았다.
 
*고린도후서 6:12,
12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이 심정이라는 것은 간, 심장, 폐부, 우리 안에 있는 장기 기관들을 표현하고 있는데 고대 근동사회에서는 장기들을 표현할 때, 장기들이 막 울렁거린다고 생각해서 인간의 감정은 장기로부터 나타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심정’이라고 표현한다. 정말 고린도인 들은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바울을 어떠하였냐면 바로 그 심정이 좁아졌다고 생각한다. 마치 고린도 교인들이 짝사랑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을 향하여서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표현을 하는데 ‘흥’, 하면서 그 사랑에 대해서 인색하게 표현하고 있다. 간 쓸개 다 내어 빼주면서 정‘말 사랑한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는데 그 사랑에 대해서 정말 마음을 열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오늘 본문 13절 말씀처럼 자녀에게 말씀하는 것처럼 자상하고 다정한 모습으로 그들을 향하여서 이렇게 표현한다.
 
13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양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내가 마음을 더 넓히라고 한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을 향하여서 마음을 넓히고 있는 것처럼 고린도 교인들도 동일하게 마음을 넓혀주기를 원했던 것이다. 여러분 자녀들을 향하여서 너무나 이뻐서 안아주고 뽀뽀도 있는데 이 아이가 뻣대고 도망하고 힘주어 피하고 있는 아이를 혹시 안아 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자녀를 생각하는 마음에 ’공부하느라 힘들었지?‘ 아이하고 대화하고 싶은데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는 아이, 이때 사춘기 자녀들을 대하여 본 적이 있는가? 그들에게는 아무리 내 마음을 다 내어 준다고 할지라도 동일하게 아마 대할 것이다. 그런 자들과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관계라는 것은 서로가 거리낌 없이 마음을 내어주고 그 감정을 진정성으로 대화가 오갈 때, 서로간의 관계가 형성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고린도교인들과 바울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적 아비와 같은 이 에 대해서 쌀쌀맞게 대하였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아주 아이러니하게도 고린도교인들은 믿지 아니하는 그런 자들과는 사적으로, 혹은 직업 적으로, 여러 가지로 아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 참 어리석은 모습이다. 그들은 자기들을 위해서 희생과 고난을 마다하지 아니하던 그러한 바울에게 오히려 그렇지 않은 오히려 해가 되는 자들과는 오히려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교인들을 향하여서 진심이었던 바울은 그들을 향하여서 솔직하게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있다. 뭐라고 지적하는가? 그 말씀이 14절에 나와 있다.
 
*고린도후서 6:14,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멍에는 소나 말이 어떤 것을 밭을 갈기 위해서 지고 있는 어떤 나무인데 이것을 한 마리에 한 마리에 지고 가는 것이 아니라, 같이 지고 가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 이 둘은 같이 함께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신명기 22장 10절에도 보면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 하여 갈지 말라.”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둘이 같이 지고 가게 되면 소와 나귀가 보폭이 다르고 힘이 다르기 때문에 가고 싶은 그 길로 밭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신명기 22:10,
10 너는 소와 나귀를 겨리하여 갈지 말며.
-이 둘이 같이 가게 되면 소와 나귀가 보폭이 다르고 또 힘이 다르기 때문에 가고 싶은 그 길로 갈 수 없다는 라는 것이다. 한 멍에를 메면 똑바로 쟁기를 끌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을 이 신명기의 말씀처럼 비유적인 표현을 가지고 어떻게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이 관계할 수 있느냐는 것이며 함께 관계할 수 없다고 우리에게 이야기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와 불신자가 같이 결혼을 한다거나 혹은 사업을 한다거나 공식적이고 지속적인 계약 관계를 맺어 나간다면 이렇게 한 방향을 바라보면서 그 길을 걸어가야 한다면 이 길은 쉬운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러분 이 안에서 친밀한 관계를 맺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왜 그럴까? 세계관이 다르고 목표관이 다르기에 가치가 다르고 방법이 다르다. 그들 간의 규칙이 다 다르기 때문에 한 방향으로 가기가 힘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런데 이 말씀을 좀 오해하고 있다. 우리가 세속적인 어떤 학교에 가지 아니하고, 기독교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그런 대안 학교에 가면 된다. 혹은 기독교 중심으로 운영하는 사업체, 그곳을 운영해야 하고 그것을 운영할 때도 믿는 자들만 함께 그들을 고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혹은 그리스도인이 소유하고 운영하는 음식점에 들어간다거나 혹은 그리스도인 친구들과만 교류해야 한다. 라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가 실수인 것이다. 우리가 늘 믿는 자들과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그것은 아니다.
 
*고린도전서 5:1-10,
9내가 너희에게 쓴 것에 음행하는 자들을 사귀지 말라 하였거니와.
10이 말은 이 세상의 음행하는 자들이나 탐하는 자들과 토색하는 자들이나 우상 숭배하는 자들을 도무지 사귀지 말라 하는 것이 아니니 만일 그리 하려면 세상 밖으로 나가야 할 것이라.
-무슨 말인가?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도 사귀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고백하고 있는 사랑의 교회 공동체 고백에서도 이렇게 이야기 한다.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부름 받은 하나님의 백셩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보냄 받은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세상으로 보냄 받은 제자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야 할 그러한 일들이 있다는 것이다. 보냄 받은 소명자로서 여전히 주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소명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사귀어야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멍에를 멘다는 것은 의미가 좀 다르다. 같이 함께 동행 관계로서 지속적으로 함께 그 길을 나아가는 그러한 관계를 이야기 하는 것이다. 동행자, 동반자, 혹은 깜부, 이야기를 한다. 이렇게 동행관계, 동행관계에 있어서는 함께 멍에를 메어서는 안 된다. 라고 우리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믿지 않는 자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야 하는가? 참 어렵다. 오늘 말씀
 
*고린도후서 6:14-16,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리스도인과 정 반대되는 그들은 속성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그들과 어떤 조건 속에서 살아가야 되는지를 이야기 한다. 그러면서 비교하는 것이 의와 불법에 대해서 빛과 어둠에 대해서 그리스도와 벨리와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 하나님의 성정과 우상을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함께 하고 싶어도 함께 할 수 없다. 함께 하고 싶어도 일치할 수 없다. 양립할 수 없다. 우리의 관계는 친밀하고 상호의존적이며 마음을 공유하고 한결 같은 그런 관계로 나아가야 하는데 이들과 그렇게 함께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동행 관계로서 멍에를 같이 메는 관계로는 같이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이다.
 
여러분들 불신자와 관계를 지속적으로 관계를 맺으면 어떻게 되는가? 결국에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가치 기준들을 양보해야 한다. 그리고 기독교의 증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일관 모습이 때로는 위협을 받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 보십시오. 가나안 길을 가고 있었던 그 광야 길을 걸어갔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한다. 가나안 땅에 들어갈 때, 그들을 진멸하라고, 왜 그런가? 그들과 함께 하지 말라는 것이다. 결국에는 그들의 문화와 그들의 많은 가치관이 그들에게 잠입하여 들어올 것이다. 솔로몬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지혜를 구했던 그 솔로몬이 이방여인들과 결혼하고 나서 결국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이다. 여러분들, 이런 말씀을 들으면 그렇게 질문할 수도 있다. “목사님, 이미 불신자와 결혼을 했는데 어떡해야 합니까” 묵사님, 믿는 자인 줄 알고 결혼을 했는데 알고 보니 불신자였어요. 안 믿었더라구요.” 아니면 아예 성장할 마음이 없습니다. 미성숙한 그리스도인인 것 같다. “목사님 어떡해야 됩니까? 목사님, 저는요 이렇게 믿는자 믿지 아니하는 자가 멍에를 같이 메고 동행하면 안 된 다는 것을 잘 몰랐습니다. 어떡해야 하지요? 이혼해야 합니까?” 이 멍에를 풀어야 되는가? 아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그런 관계로 시작하지 말라고 권면하는 것이지 이미 맺고 있는 관계를 끊어야 하는 거라고 이야기 하지 않는다.
 
구원받지 못한 배우자가 같이 살자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우리가 그 관계를 끊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잘 유지 하면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산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가야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게 쉬운 소명은 아니다. 소와 나귀를 함께 멍에를 메고 가면 결국 한 쪽이 서로 끌고 나가다 보니 서로 힘든 것이다. 여러분 2인 3각을 해보았는가? 발이 안 맞면 한 사람만 발이 아픈 것이 아니라 두 사람 다 아프다. 둘 다 고생하는 것이다. 그만큼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불가능한 것은 아닌 것이다. 어떤 분은 이렇게 이야기 하신다.
 
“목사님,
불신자와 계약을 했는데요. 이 관계를 끊어야 합니까?“ 그것도 아니다. 갈라디아서 3:15절을 보면,
 
*갈라디아서 3:15,
15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즉 사람과 한 약속을 함부로 폐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합법적으로 좀 문제가 있다. 라고 할 때는 그 계약에서 빠져나올 수 있겠지만 여러분 작은 약속이라 할지라도 쉽게 사소하게 외면해서는 안 된다. 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불신자와 멍에를 메고 걸어가야 하는 것이 왜 안 되는가? 무엇이 근본적으로 문제인가?
 
*고린도후서 6:16-18,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17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그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바로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친 백성, 우리가 바로 그리스도의 성전이기 때문에 우리는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함께 멍에를 멜 수 없다. 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언약관계를 맺어 속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과 아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그런 관계이기 때문에 우리가 믿지 않는 자들과 있을 수 없다. 라고 이야기 한다. 16-18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와 이렇게 언약 관계를 맺어 주신 것이다. 아주 친밀한 관계로 있기 때문에 거룩하신 그 하나님의 속성을 부여받았다. 우리를 정결케 하시는 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부정한 것을 만지지 않아야 한다.
 
우리가 그들에게 속하지 말아야 된다. 라고 분면하게 말씀하고 계신다. 그 하나님과 맺은 관계로 말미암아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친밀하고 융화된 관계로서 살아가야 하는데, 믿지 아니한 자들로서 우리가 그렇게 살지 못한 것을 염려하여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서두에 말씀드렸던 마이클 리브스의 말씀처럼 관계적이고 인격적인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흘러넘치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해야 된다. 우리가 그 하나님의 성전이기 때문에 그 쉐키나의 영광이 우리로부터 흘러넘쳐 나타나야 된다. 라고,, 우리를 통하여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거나 혹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서 경험해야 할 그 성도 안에 조화와 순결함, 성도 안에 친밀한, 그 어떤 것을 훼손하는 일이 단 하나도 나타나서는 안 된다고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다. 이 몸 된 성전을 지켜 나가기 위해 우리가 유지해야 할 것이 있다. 두 가지이다.
 
I. 정서적인 유대감으로 진실한 관계를 유지해야 한다.

-다른 영 가족들과 우리가 이러한 관계를 잘 쌓아나갔으면 좋겠다. 이번에 다락방 다시금 회복과 부흥을 위해서 사이좋은 다락방을 하는 사이다. 라고 하는데 바로 우리 간의 관계가 이러한 사이였음 좋겠다. 서로 진심으로 꾸밈없이 자신을 내 보내야 된다. 허심탄회하고 정직하고 자신의 마음을 나누어야 한다. 그리고 연약한 사람이 있다면 이 연약한 사람을 꾸짖는 것이 아니라 이 연약함을 서로 보완해 주는 관계가 되어 한다. 정말 진정성 있는 마음으로 이러한 사이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바울과 고린도교회는 문제인 것이다. 여러분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가? 가정예배를 통해서 회복하길 바란다. 말씀을 통해서 이 말씀으로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지 서도 기도의 제목을 가지고 나누고 이러한 관계가 회복 될 줄 믿는다.

 
II. 영적인 동행 관계를 맺어나가야 한다.

-영적으로 대등하지 않는 관계에 있어서는 좀 관계를 어느 정도 선을 그어야 한다. 영적으로 결국에는 넘어질 수 있기 때문에 우리도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러한 자들과 잘 동행 관계가 엮이지 않도록 우리는 잘 선을 그어야 된다. 이것이 결혼이든, 사업이든, 어떤 다른 것이든, 어떤 다른 관계 속에서든, 서로 영적으로 다르다가 혹은 가치관이나 그 방향성이 다르다고 생각된다면 영구적인 관계로 이어나가는 데 있어서 언젠가는 문제가 생길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우정이든 이성이든 어떤 관계속에서든 불신자 관계 속에서 지속적인 유지되는 그런 관계를 맺어나가는 것에 있어서는 늘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어떻게 만드셨는가? 늘 우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친밀하게 유지할 수 있도록 우리를 하나님이 지어주셨다. 그 관계가 아주 건강하고 건전하고 또 순수하고 보완할 수 있도록 도와가는 그렇게 균형 있는 관계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하셨다. 예수님을 영접하여 새로운 피조물, 새로운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만들어 주시면서 하나님의 성전으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잘 지켜나가길 간절히 원하고 계신다. 그런데 우리 관계가 건강하지 않다면 어떻게 되는가? 한쪽으로 치우쳐진 관계, 그런 관계 속에 있다면 우리는 지금 당장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여러분 왜 이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가? 무엇 때문에 이 관계를 계속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인가? 말씀에서 분명히 이야기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타협하고 있는가? 잘 한 번 들여다보면 좋겠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빛을 잘 밝힐 수 있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리스도의 몸 된 성전이 약화되지 않도록 이 건강함을 유지하는 그런 아름다운 관계를 잘 세워나가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소원한다.
 
요약
우리의 관계적 존재로 설계하신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건강하고 진실 된 영 가족 공동체를 이루어가 하며 끊지 못하는 세속적 관계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그리스도의 성전으로 거룩한 정체성을 지켜가야 한다. 우리의 삶이 자리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대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를 원해야 한다. 우리의 관계를 하나님의 아름다운 관계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 우리 삶에 실천이 되어서 건강한 관계, 진실한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세속적인 그 유혹가운데 그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만 타협하지 말고 우리의 거룩한 정체성을 잘 지켜서 하나님의 성전이 우리를 통하여서 예수님의 향기가 곳곳마다 드러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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