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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예배(주후 2021년 4월 7일)

제목: "하나님의 처방전"
말씀: 미가 6:6-8
찬양인도: 이원준 부목사님

설교자: 김대규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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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 6:6-8)
6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로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7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로 말미암아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은혜를 사모하며 안아주심 본당과 성도의 온전함 블레싱 수요저녁기도예배에 참여하신 분들을 환영하고 축복한다. 풍성한 기쁨을 나누기를 바란다. 큰 은혜 받고 돌아가기를 바란다. 우리는 몸의 이상이 생기면 병원에 간다. 거기에서 필요한 검사와 의사의 진단과 처방에 따라 치료하고 약을 먹는다. 의사의 정확한 진단과 처방에 따라 치료를 진행해야지만 몸의 건강을 되찾을 수 있다. 그런데 간혹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을 만나지만 자신의 병을 잘 안다고 말한다. 자신이 처방을 해달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럴 때 의사 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이다. 본인이 그렇게 잘 알면 병원에 뭐하려고 왔냐고 속으로 말할 것이다. 병원에 오지 말고 자신이 고치지 라고 할 것이다. 본인 생각대로 약을 먹고 치료를 한다면 운이 좋아서 그 병이 고쳐지기도 하겠지만, 대부분 자기 판단대로 처방내리고 약을 먹을 경우 도리어 병이 악화되고 건강을 해칠 가능성이 높다. 의사의 정확한 진단과 처방, 그의 맞는 치료가 이루어져야만 병을 고칠 수 있다.

 

미가 선지자가 살던 지금으로부터 약 2천 800년 전 남 유다는 굉장히 병들어 있었다. 미가 선지자는 요담 아하스, 히스기아 왕이 통치하던 시대에 활동하던 선지자이다. 기원전 8세기 북이스라엘과 남 유다는 경제적, 군사적, 사회적으로는 안정되고 풍요를 누리던 때였다. 다윗 이후 제2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앗수르 제국이 등장하면서 이스라엘을 끊임없이 괴롭히던 아람 군대가 일시적으로 물러가면서 이스라엘에게 평화의 시대가 온 듯 했다. 하지만 앗수르 제국의 팽창은 결국 기원전 722년 북이스라엘을 멸망시키게 되고 남 유다도 예루살렘을 제외한 거의 모든 성읍들이 초토화 되는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가운데에서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떠나 형식적인 신앙을 유지한 채 가나안 땅에서 들어온 우상을 늘 함께 섬기며 살아가고 있었다. 사회 지도자들은 약자를 괴롭히고 그들의 토지를 빼앗는 일이 빈번히 자행되었다. 상거래에서는 도덕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없고 사기 치는 것이 일상적이 되었다. 가족 간의 윤리도 없고 지도자들은 악한 음모를 꾸미고, 거짓 선지자들은 예언을 남발했다. 종교, 사회, 가정, 모든 곳이 총채 적으로 병들어 있었다. 이러한 시대에 미가 선지자는 남 유다에서 유다를 향하여서 여호와 심판을 선포하게 된다. 선포만이 아닌 하나님의 회복(回復)과 구원(救援)의 약속도 함께 선포한다. 하나님께서 유다를 향해 경고(警告)하는 것은 무엇인가?

 

북 이스라엘을 멸망시키시고, 남 유다가 멸망할 것을 경고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들이 하나님 앞에 죄(罪)를 범(犯)했기 때문이다. 남 유다의 지도자들은 공의(公義)를 멸시(蔑視)하고 정의를 무너뜨렸다. 인간의 존엄성(尊嚴性)은 사회의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도하고 하나님을 찾으며 종교적인 행사를 열심히 열지만 하나님은 그들에게 응답하지 않으신다. 왜냐하면 그들의 죄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啓示)하신 백성들이다.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 가운데 구속(救贖)하신 백성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향해서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이들이 이스라엘이다. 그런데 그들이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이 계신 듯 했으나 더 이상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 하나님 대신에 병거(兵車)와 성(城)을 의지 한다. 그들은 구름을 관찰하고 닭의 내장을 판독하면서 점(点)을 치기도 한다. 우상(偶像)을 좋아한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고 없애라고 하신 우상들이 남 유다 곳곳에 세워져 있다. 하나님이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어떤 마음이 드셨을까? 금이야 옥이야 모든 것을 희생(犧牲)해서 키운 자식이 기대와 바람과는 정 반대로 탈선(脫線)하고 자기 멋대로 살면 우리는 자녀에게 어떻게 말하는가? 내가 너 같은 자식을 낳고 미역국을 먹었다니... 하면서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도 그렇게 한탄(恨歎)하셨을 것이다. 아니 그보다 더 아프셨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죄를 떠나서 하나님에게 가야했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을 떠나 죄를 선택(選擇)했다. 그들이 죄를 선택했기에 그 선택의 대가(代價)를 치러야만 한다. 죄를 지을 때 우리는 반드시 그 결과를 생각해야 한다. 죄가 가지고 오는 결과, 그 엄청난 파괴력(破壞力)의 끝을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결과는 정해져있다. 분노(憤怒)의 결과는 무엇이며, 뇌물(賂物)을 주고받았을 때, 그 결과는 무엇인가? 누군가를 미워했을 때, 그 결과는 무엇인가?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을 사랑하며, 하나님이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무관심한 결과가 무엇인가? 모든 죄의 결과는 진노(震怒)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우리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죄에 대해서 반드시 진노하심으로 반응(反應)하신다. 하나님은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오늘 본문 6장 앞에 1-5절을 다음과 같이 변론(辯論)하신다.

 

*미가 6:1-5절,
1 너희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너는 일어나서 산을 향하여 변론하여 작은 산들이 네 목소리를 듣게 하라 하셨나니.
2너희 산들과 땅의 견고한 지대들아 너희는 여호와의 변론을 들으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과 변론하시며 이스라엘과 변론하실 것이라.

-하나님은 변론을 하시면서 하나님의 의를 기억케 하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복을 기억케 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의를 향하셨고, 그들이 그 의와 하나님께서 베푸신 그 복을 기억하기를 원하신다. 그런데 3절에 보면

 

3 이르시기를 내 백성아 내가 무엇을 네게 행하였으며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느냐 너는 내게 증언하라

- 과거를 되돌아 볼 때,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복을 주시고 은혜를 내려 주시고 그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신 적은 있어도, 한 번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무리한 부탁이나 강요로 그들에게 짐을 주신 적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의 노예(奴隸) 생활에서 해방시키신 분이시다. 그들이 노예가 되어서 이집트 땅에서 고통당하던 곳에서 그들을 데리고 나오시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갈 때까지 보호하시고 인도하셨다. 그것은 이스라엘에게 베푸신 은혜의 서곡이었다. 4절에 보면,

 

4 내가 너를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종 노릇 하는 집에서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보내어 율법을 주시고, 아론을 그들의 제사장으로 삼으심으로 은혜의 복을 구하게 하셨다. 여선지자 미리암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그들에게 주셨고, 그분께 부를 노래를 주셨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구원의 표본이며 하나님의 은혜의 절정이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 출범하는 것, 나라 자체가, 하나님에게서 온 것이다. 이스라엘은 출발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지속되어 온 국가이다. 5절에 보면,

 

5 내 백성아 너는 모압 왕 발락이 꾀한 것과 브올의 아들 발람이 그에게 대답한 것을 기억하며 싯딤에서부터 길갈까지의 일을 기억하라 그리하면 나 여호와가 공의롭게 행한 일을 알리라 하실 것이니라.

-주변의 열강의 위협 속에서도 하나님은 늘 그들의 방패가 되어 주셨고, 악한 적들의 계략이 도리어 축복이 되도록 바꾸셨다. 이것이 6장을 시작하면서 1-5절까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향하여서 변론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이스라엘이 과거의 일들을 기억하면서, 현재 그들에게 하나님이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꼭 붙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잊은 채,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의를 자신들의 짐처럼 여기며, 하나님을 떠나 살아갔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향해 자신들의 억울함을 토로한다. 자신들에게 분노하시면서 징계하시겠다는 하나님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다. 자신들이 여전히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있으며,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서 하나님께 예배한다고, 섬긴다고 말한다. 하나님도 이스라엘도 함께 동의하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 예배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처방전(處方전)은 분명하게 다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예배하기 위해 들고 나온 것은 그들이 1년 된 송아지를 번제물(燔祭物)고 들고 나온다. 번제물은 모든 제사 중에서 가장 값비싼 대가의 제사를 치르는 제사이다. 다른 제사들은 남은 것을 가지고 집에 가서 먹을 수 있는데, 번제물은 완전하게 태우기 때문에 가장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된다. 그 대가를 치르는 것 역시, 송아지 중에서 가장 최상의 송아지 1년 된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그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원하시는가? 이스라엘은 천 천의 숫양과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을 가지고 나아간다. 하나님께 귀한 제물에 만족하지 못하시면 더 많은 제물을 들고 나가면 되냐고 하나님께 질문한다. 하나님의 대답은 아니라고 하신다. 세상 제물도, 엄청나게 많은 제물도 아니라고 하신다. 이제 그들이 하나님 앞에 들고 나아가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맞아들이다. 내 허물을 위하여 맞아들을 드릴까요? 한다. 엄청난 희생과도 같다. 자신의 인생 가운데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우리가 모든 것들을 포기(抛棄)하고 하나님 앞에 다 내려놓은 것 같지만, 인생의 끝 날까지 포기가 안 되는 것은 무엇인가? 자녀일 것이다. 훈련을 하면서 훈련생들에게 하나님께서 귀한 것을 바치라고 하면, 가장 먼저 기쁨으로 드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가장 기쁨으로 바치는 것은 배우자라고 한다. ㅋㅋㅋ 하나님, 배우자는 얼마든지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드린다고 말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끊임없이 요구하시며 내려놓으라고 하실 때, 마지막까지 안 되는 것이 자녀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 앞에 아들을 내려놓는 것은 참으로 귀한 헌신 같아 보인다. 자신의 기업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맏아들, 장자를 바치는 것은 가장 귀한 헌신, 가장 귀한 드림인 것 같다. 하지만, 당시 장자를 제물로 바치는 것은 이방 우상을 섬기는데 자행된 일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에 엄격히 금지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은 최성의 헌신으로 생각하면서 제물로 바치는 일이 빈번이 자행 되었기에 네 맏아들을 드릴까요? 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신의 허물 때문에 희생을 자신이 해야지 왜 죄 없는 맞 아들이 하여야 하는가요? 이런 일이 화가 나는 것은 이방의 우상을 섬기는 풍습이기도 하지만, 하필 맞 아들인지요? 이스라엘을 최상의 제물로 상상하기 힘들 많은 양의 제물도 혹은 자신들이 가장 최상의 헌신이라고 생각하는 맏아들로 경배하면 우리 하나님께서 만족하실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경배의 시작, 예배의 시작 자체가 잘못되었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예배를 기뻐하지 않으신다. 본문에서 내가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께 경배할까라고 물을 때, 경배하다는 비굴함이라는 뜻을 가진 카파프라는 단어로 사용된다. 진정한 복종과 경외심을 담은 서하흐라는 단어가 있는데,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굳이 비굴하다는 단어를 가지고 사용하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이 드리던 예배자체가 진정한 인격적 교제, 자발적 복종이 아닌, 하나님에 대한 단순한 두려움과 종교적 의무감으로 드렸던 형식적인 예배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진실 된 마음이 아닌 형식과 제물에 치중한 예배를 드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예배, 이스라엘이 그들의 죄를 용서받고 화복할 수 있는 예배, 제사는 무엇인가?

 

미가 선지자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하나님께서 선한 것을 보이셨다. 선한 것이 무엇인가? 마가복음 10:18절에 보면, 하나님보다 선한 이는 없다 라고 말씀하신다. 선한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그분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선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분명하게 보이셨다. 그 선의
*첫 번째는 정의를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정의는 이것을 뛰어넘는다. 하나님의 정의는 누군가의 잘못에 상응하는 것을 뛰어 넘어서 스스로 설 수 없는 사람들, 힘없고 상처입은 자, 영향력이 없고 존재감이 없는 이들을 돕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은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고 그들을 돕고 그들이 잘 살 수 있도록 도우라고 하신다. 누군가 넘어져있는데 그냥 가는 것은 불의이다. 그 넘어진 자에게 몸을 굽혀서 일으키는 것이 바로 정의이다. 강도 만난 자를 보고 그냥 가는 것이 불의이고, 자신의 것을 내어주고 그들 위해 희생하는 것이 정의라고 이야기 한다. 이스라엘은 왜 불의한가? 자신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가난한자들 스스로 일어설 수 없는 자들을 더 짓밟고 빼앗았기에 그들이 불의했던 것이다. 그렇게 빼앗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올 때, 하나님께서는 그 예배를 받지 않으시겠다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

 

*두 번째는 인자를 사랑하는 것이다.
-인자는 히브리어로 ‘해쎄드’이다. 이 말은 자비를 일컫는 말이며 신약에서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해쎄드는 아가페적인 사랑이다. 무조건적, 무제한적, 끊임없는 사랑이다. 이 해쎄드는 하나님의 언약에서 나온 사랑이다. 이스라엘에서 나온 어떤 조건도 어떤 의무도 없지만, 하나님께서 압제당한 이들을 사랑하시고, 애굽에서 그들을 구출하시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까지 사랑하시며, 그들과 언약을 맺으시고 그들 평생에 보호자가 되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해쎄드이다. 이것이 인자를 사랑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너를 포기해도 나는 너를 포기할 수 없다 라고 하신 것이 해쎄드이며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원하시는 예배가 이것이다. 너희와 언약을 맺으며, 나의 마음을 보았다면, 나의 자녀 된 너희가 서로를 이렇게 서로 사랑해야 된다고 말씀하신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달랐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사랑을 사랑했다. 손해가 되거나 내게 이로움을 주지 못하는 사람은 돌아볼 가치가 없는 사회였다. 비참하게 우는 자가 넘쳐나도 국가를 위해서 인권과 아픔을 철저하게 짓밟히는 것이 이스라엘의 사회였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향해서 하나님은 인자를 사랑하라고 하신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이 예배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세 번째는 겸손이 네 하나님과 함께 하라고 요구하신다.
-겸손한 사람의 특징이 무엇인가? 자신의 생각대로 행동하지 않는다. 겸손한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절대 앞서가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조심스럽게 살피고 그 뜻대로 행하기 위해서 애쓴다. 그렇다면 반대로 겸손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 생각이 하나님보다 앞선다. 내가 너무 잘났기에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 없는 것이다. 자기 판단이 중요하다. 때문에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다. 하나님이 아예 필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내가 아쉽거나 내가 부족한 것을 하나님이 채워주시면 된다 라고 생각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능력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인맥으로, 내가 가지고 있는 재물로, 내 삶을 결정하고 채워가고, 그것이 부족할 때, 하나님이 그 부족한 부분만 채워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교만한 사람이다. 이스라엘이 꼭 그랬다. 하나님이 필요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필요할 때, 우리를 도우면 된다 라고 행동했다. 교만한 사람들은 하나님과 동행할 필요가 없고 자신들이 필요할 때만 하나님을 찾는다.

그러나 겸손한 자들은 하나님을 앞에 두고 그분의 발자국만 따라간다. 왜냐하면 그것이 삶에 있어서 가장 안전하고 가장 확실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내리신 처방은 일 년 된 송아지도, 천 천의 숫양도, 만만의 강물 같은 기름도 맏아들도 아니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스스로 내린 처방이었다. 오늘 우리의 삶 가운데 하나님께서 내린 처방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의 삶의 정의를 행해야 한다. 시시비비(是是非非) 잘잘못을 가리는 것에 집중한 나머지 우리는 서로 미워하고 분노하며 내가 정한 기준을 정의라고 생각하고 상대방을 정죄하는 것이 우리의 사회이다. 힘없고 연약하고 우는 자들,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예배 시간에 그들을 위해 잠시 기도할지는 모르지만, 교회에 와서 그들을 위하여 가끔씩 헌금하는 일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누가 힘들어 하는지, 누가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지, 우리의 몸을 숙여 찾는 모습은 찾기가 힘들다. 우리는 정의를 회복해야 한다. 몸을 숙여서 강도만난 그들이 누구인지 찾아내야 하고 그들의 상처를 싸매 주는 것이 우리가 회복해야 하는 것이 정의이다. 우리는 인자를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살았던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가 육신을 입고 오신 성탄절을 우리는 기뻐하고, 우리를 위해서 우리를 위해서 살아나신 예수님을 기뻐하고 감격한다. 가장 기쁘고 가장 감격스러운 날임은 분명하다. 하지만,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 사이에 그가 사셨던 삶이 없었다면 그의 탄생도 그의 부활로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을 온몸으로 바라보면서 우리가 그 사랑을 따라가야 한다. 예수님은 우는 자들과 함께 오셨다. 사람들에게 외면 받고, 죄인 취급 받고, 어울리지 못한 자들과 친구가 되셨고, 그들의 병을 고치셨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셨다. 그것이 인자를 사랑하는 것이다. 나와 상관없지만 그들의 아픔에 함께 울고 함께 아파하는 것이다.

※얼마 전에 가나에서 선교하시다고 순교하신 류승렬 선교사님을 생각하면서, 우리는 함께 울었다. 평생에 동역자이며, 남편을 잃고서 자신도 코로나에 걸려서 어찌할 수 없는 김경옥 선교사님을 에어엠브란스를 띄워 모셔왔다. 그 장면을 교회가 함께 지켜보면서 함께 아파하며 함께 울었다. 올해 교회의 사역들 중에서 가장 귀하고 가장 아름다운 사역이었을 것이다.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는 함께 울었고, 사랑하기 때문에 온 교회가 힘을 다해 에어엠브란스를 띄워서 김경옥 선교사님을 모셔왔다. 이것이 진정으로 기뻐하는 임무이며, 그것이 예배인 것이다. 이러한 일은 삶의 현장에서도 계속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겸손이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
-겸손한 사람은 기도할 수밖에 없다. 겸손한 사람은 말씀을 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는 철저하게 무능력하고, 철저하게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모든 능력과 권세를 가지신 주님 앞에 묻고, 온전하신 주님의 말씀으로 서야 하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보다 앞서가지 않으며, 삶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이 계신 것을 잊지 않고 모든 순간에 코람데오의 마음으로 행해야 한다. 이 세가지를 기억하여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 앞에 설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정의를 바라볼 수가 있고, 하나님의 인자를 우리도 사랑할 수 있으며, 우리가 하나님과 겸손히 동행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우리의 죽으로 여기신 하나님의 정의 앞에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을 우리의 생명으로 여기신 하나님의 인자 앞에 반응해야 한다. 그 하나님의 정의와 인자하심에 겸손히 행동하는 인생, 하나님과 동행하는 인생이 되기를 소원한다.

 

요약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분명하게 보이셨다. 그 선의는, 
정의를 행하는 것이며, 인자를 사랑하는 것이며, 겸손이 네 하나님과 함께 하라고 요구하신다. 우리는 겸손이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받기 원하시는 예배는 우리의 삶 모두를 드리는 것임을 고백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정의로우심 앞에 인자를 사랑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며, 우리의 삶 가운데, 온전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으로 드리는 예배를 드리는 자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 원하시는 바로 이어져야 하는 이웃사랑을 겸손히 실천하여야 한다. 온전한 예배 자는 주님의 뜻대로 구하고, 주님의 뜻대로 돌아보는 자이니, 겸손히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과 동행하며, 우리의 이웃을 돌아보는 자 되어야 한다. 돌아보아야 하고 함께 살펴서 도와야 한다. 이 나라에 지도자의 복을 허락하시기를 기도하며, 코로나를 이길 힘을 주시고 보호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모세가 광야에서 오랜 기간 기도했던 것처럼 모두가 회복되기를 기도해야 한다.


-여기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화해를 위한 제안이 나타난다.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은 이제 기정 사실이 되었음으로 이스라엘은 자기의 뜻을 밝히고, 하나님 역시 뜻을 밝히신다.

(1) 이스라엘로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겠다는 뜻을 표현한다(6,7절). 모든 사람은 각자가 죄값을 감당해야 함을 인식하고, "이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하고 묻지않고 "내가 어떻게 하여야 할까? 여호와께서는 무엇을 기뻐하실꼬? 내 허물을 속하기 위하여 무엇을 드릴까?"라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2)그들은 비록 열심은 있었지만 무심코 자기들의 무지를 드러낸다.
1) 그들은 높은 것만을 생각한다. 그들은 '천천의 수양'을 드릴까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속되 제물로 한 마리의 수양을 요구하셨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전체 재산을 다 드려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기를 바란다. 그들은 만일 용납되기만 한다면 자기들의 허물을 위해서 맏아들을, 그 영혼의 죄를 위해서 자기 몸의 열매를 드려야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지로 생각이 허망하여진 자들에게는 자녀들이 자신들의 분이시기 때문에 죄값을 치를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다.

2)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바른 것이 아니다. 이러한 제물 중에 어떤 것들은 하나님께서 제사법으로 제정해 놓으신 것이 사실이지만 이러한 제물만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는 생각은 오산이 아닐 수 없다. 율법이 제정한 희생 제물은 중재자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역할을 하는 것으로 그 재물만으로는, 즉 염소와 수소의 피로는 죄를 없이 할 수 없다. 복음에 맞지 않는 화목 제물은 모두 불합리한 것이다. 더욱이 장자와 몸의 열매를 죽여 제물로써 드린다는 것은 대단히 사악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자식들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단 말인가? 자식들은 이미 태어난 자들이 아닌가? 어떻게 그들이 죄값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자식들을 바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의 조건을 만족시키지도 못하며, 마음의 성결이나 생활의 개혁을 위해 바쳐질 수도 없는 것이다.

(3)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요구하는 바를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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