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새벽부흥기도회(주후 2021년 4월 13일) 제목: "영원한 시각으로 보는 하나님의 영광(榮光)(고린도후서 4:16-18절), "온전케 하시는 왕이 치유(治癒)(마태복음 9:35-10:4). 말씀: 고린도후서 4:16-18절, 마태복음 9:35-10:4. 설교자: 존 파이퍼 목사님(베들레헴침례교회), (이동원 목사님-지구촌교회) 초빙. 사회자: 오정현 담임 목사님. ------------------------------------------------------------- ▷은혜의 폭포수가 되어 치유와 위로가 되며, 복음의 능력이 회복되고, 말씀이 깊이 체험되어, 이른 비와 단비의 은혜가 충만히 내리기를 소원한다. -담임 목사님- (고린도후서 4:16-18절) ▶바울은 고통 속에서 말하고 있다. 본문에 보면 ‘낡아진다’라고 말하는데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인간은 타락한 죄의 본성 때문에 낡아진다. 타락만 인간으로서 가진 ‘죄성’이 성도 된 자신을 낡아지게 한다. 비참하고 고통스럽게 말이다. 바울이 ‘바로 이거야’ 라고 강조하는 것이 있다. “우리의 겉 사람이 낡아지는 것은 ‘죄성’ 때문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낙심하지 않는다. 대신, 날로 새로워진다. 새로워지고, 또 새로워진다. 바울은 ‘낙심하지 않는 비밀’을 알고 있다. 세상의 모든 사람은 낙심하지 않고 날로 새로워질 수 있는 비밀을 알고 싶어 한다. 그 비밀을 파헤치기 전에, 마지막으로 16절을 함께 보자.
*고후 4:16절,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 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날로 새로워진다’는 것은 우리의 희망이 바래 가고 의욕이 시들어진다는 말이다. 이 사실이 제게는 큰 격려(激勵)가 된다. 바울은 ‘나에게 비밀이 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한 번 새로워지고 나면 더 이상 새로워질 필요가 없는’ 그런 것이 아니다. 실제로 바울의 말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현실적이다. 날로 새로워진다는 말은 여러분이 매일 새어 나가고 매일 시들어 가고, 매일 고갈되어 간다는 말이다. 여러분은 매일 새로워질 필요가 없다. 만약, 어제 주유한 기름으로 운전할 수 있다면 말이다. 만약, 어제 한 식사로 오늘 살아갈 수 있다면 말이다. 어제 새로워진 것으로 오늘 살아갈 수 없다. 바울은 비밀을 안다고 말하고 있다. 그 비밀은 본문에서 제가 찾고자 하는 비밀과 같다. 저는 단 하루도 낙심하고 싶지 않다. 매일 새로워질 수 있는 비밀을 알고 싶다. 매주, 매달이 아니라, 매일 그 비밀을 깨닫고 살기를 바라는 것이다. 쉬운 일은 아니다. 그게 새로워진다는 뜻이다. 여러분이 바울에게 “당신이 파헤친 비밀을 알고 싶어요”라고 묻는다면, 바울은 “새로워지는 것이 비밀입니다”라고 대답할 것이다. 본문 16절은 “우리는 낙심하지 아니한다 날마다 새로워진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이 영원한 영광을 위한 준비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고후 4:17절, 본문의 핵심이다. 여기에서 “ 때문에”라는 단어가 중요하다. *고후 4:18절이 말하는 것은 단순히 ‘이것을 보라!’는 것이다. ‘볼 수 없지만 바라보라’는 것이다. 타락한 인간이 여러분에게 총을 겨누는 것을 바라보거나, 타락한 세상이 쓰나미로 여러분에게 다가오는 것을 바라보면 여러분은 낙심할 수밖에 없다. 그것을 쳐다보지 말라!!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아야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사실,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볼 수 있는가? 모순이지 않는가??? 보이지 않는 것은 볼 수 없다. ‘볼 수 없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보라는 것이 말이 되나요?’ 바울이 한 말을 보면, 그리 어려운 말은 아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않을 수 있는 근거(根據)는 볼 수 없는 무언가에 있다. 그 이야기는 잠시 후에 하겠다. 이렇게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낙심하지 않고 매일 새로워질 수 있을까요?
고후 4:17절에, 우리가 바라봐야 하는 가장 중요한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낙심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것을 바라보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 17절을 읽으면 무엇이 보이시나요? 바울이 평생 겪은 고난을 ‘잠시’라고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 여러분, 저는 67세이다. 은퇴할 나이다. 바울은 칼에 목이 베어 죽을 때까지 고난을 겪었다. 한 1. 2년 정도 낚시나 골프를 하며 즐길 수 있는 시간도 없었다. 바울에게 은퇴는 목 베임을 당한 다음에나 있을 법한 일이다. 만약 바울에게 이런 게 없었다면 그는 빈털터리가 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만약 부활이 없다면 나는 어리석은 자일 것’이라고 고백한다. 바울의 삶은 매 맞고, 파선하고, 잠도 이루지 못하고 교회를 위해 겪은 괴로움으로 가득 했다. 그런데 17절을 보면,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은 이런 고난 세월을 ‘경하다’고 ‘잠깐’이라고 말한다. 말도 안 되는 말이다. 물론, 실상은 그렇지 않다. 비밀은 약 50-60년을 살았을텐데, 그 중 20-30년은 감옥 생활하고 핍박 받았다. 그런데 그런 삶을 ‘잠시’라고 ‘걍하다’고 말한다. 여기에서 ‘잠시’와 ‘영원’이란 단어가 대조를 이루고, ‘경함’과 ‘중함’도 대조되고 있다. 그 구조를 신경 쓰며 본문을 보면, “(잠시) 받는 환난이(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영광의)(중한 것)을...” 잠시와 영원함이 비고 되듯이 중한 것이 경한 것과 비교된다. 바울은 볼 수 있었다. 정말 보이니까... ??실제로는 보이지 않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무덤 뒤 영광을 보았다. 그리고 장차 보일 하나님의 영광과 그에게 주어질 영광을 보았다. 그래서 평생의 고난을 ‘잠시’라고 느끼게 된 것이다. 무게를 가볍게 여기게 된 것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지금 장난하나요?? 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을 위해 죽으라면서 그것이 가볍다구요?? 네!! 왜 그런가??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무엇을 바라본다는 말인가? 영광이다!!! 짧은 인생 대신 무덤 너머의 영광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잠시’로 또한 ‘경한 것’으로 보이는 그것이 바로 우리가 바라봐야 할 ‘보이지 않는 것’이다. 한 가지 더 나누겠다. 현재 환난을 겪고 계신 많은 분들이 공감할 만한 내용이다. 제게는 너무나 소중한 내용이다.
17절을 보면, ‘이루게 함’이니 라는 표현이 나온다. 이 말은 환난이 잠시 지나갈 뿐만 아니라 가벼울 뿐만 아니라 천국에서 누릴 영원한 영광을 이루어 나간다는 말이다. 여기에 큰 의미가 있다. 이 말은 논란의 여지가 있는 말이다. 이 세상에는 말도 안될 정도로 많은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끔찍한 사건들이 터질 때마다 뉴스에서는 별로 의미 없는 듯이 기사를 다룬다. 원래 그래 보이는 것이라고,, 보라가,,, 이것 무의미해!!!라고 말한다. 인도에서 23명의 아이들이 죽었다. 그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그냥 점심 한 끼 먹으려 한 것 뿐인데... 모로코의 한 가정에도 그러했고, 보스턴에서도 그러했다. 세사 어디에나 끔찍한 사건이 일어난다. 이제는 인터넷이 있어서 모른 채 지나갈 수 없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어야 하지 않는가?? 우리는 이런 끔찍한 사건들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신학도 없다. 그냥 접할 수밖에 없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라고... 나중에 영원한 영광이 따라올 거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충분하겠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카케르가조마이‘-헬라오(성취하다, 행하다, 생산하다)라고 했다. 실례했다. 헬라어를 좋아해서... 가끔 던져지는데, 여러분은 모르셔도 된다. 이 단어는 준비하다, 생산하다, 유발하다이다. 조심스럽게 말씀드린다. 타락한 세상과 타락한 인간으로 인해 여러분이 겪는 고통이나, 순종하는 삶에서 여러분이 겪는 비극은, 장차 여러분만의 고유한 영광을 만들어 낼 것이다. 논란을 불러일으킬 만한 말이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믿는다. 따라서 누구라도 제게 “믿는 사람의 고통이 무의미하다”고 말한다면, 저는 일단 정숙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이 곧바로 제 말을 들으면 마음이 아플 테니 적절한 때를 기다릴 것이다. 그러다가 때가 되면, ’무의미하지 않다‘고 말해줄 것이다. 암에 걸렸든지, 비난을 받았든자. 질병에 걸렸든지, 험담을 들었든지... 그 어떤 것도 무의미하지 않다. 17절은 내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무엇인가를 이룬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이룬다는 것!! 무의미하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여러분은 그게 무엇인지 볼 수 없다. 그게 바로 18절에서 말하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어떤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봐야 하는가??
17절에 기록된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봐야 한다. 우리가 겪는 고난이 우리를 무언가를 이룬다는 약속 말이다. 볼 수 없고, 느낄 수 없다.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하고, 성경이 말하니까 믿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낙심하게 될 것이기에...
▶이제 세례 요한 이야기를 하고 말씀을 마치려고 한다. ---------------------------------------- ◆ 이동원 목사님(지구촌교회) ▷얼마 전에 이 펜데믹 시대를 지나가고 있는데 이 시대를 풍자하는 기도문을 보고 마음의 공감이 되었다. 카톡으로도 여러분들도 보았을 것이다.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하는 기도문이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그동안 거짓의 막막들을 얼마나 많이했으면 주둥이를 마스크로 다 틀어막고 살라고 하신가요? 우리가 얼마나 다투고 시기하고 미워했으면, 거리를 두고 살라고 하십니까? 우리는 죄를 짓고 손으로 나쁜짓을 많이 했으면, 어디를 가나 손을 씻고 소독하라고 하십니까? 우리가 얼마나 열을 올리고 살았기에 가는 곳마다 체온을 체크하고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비밀스럽게 다녔으면, 가는 곳마다 연락처를 적어야 합니까? 이대로 살다가 돌겠습니다. 부디 여기서 멈추고 긍휼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성경을 보면 인간 실존에 대한 비유는 양에 대한 비유이다. 우리시대의 인간은 적절한 비유라고 말한 사람이 있다. 고슴도치에 대한 비유이다. 모든 동물은 이동할 때 떼를 지어서 이동한다. 그러나 고슴도치는 혼자 다닌다. 고독을 엔조이해서도 아니다. 고슴도치에게도 외로움과 고통이 되는 순간이 있다. 다른 고슴도치에게 그래서 접근한다. 또 다른 고슴도치를 만나는 순간 사고가 난다. 자기 등에 가지고 다니는 수많은 바늘로 그 상대방을 찌르고 자신도 찔림을 받는다.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는다. 우리는 다 고슴도치와 같아서 그렇다. 그렇다면, 인생은 상처를 주고 상처를 받다가 끝나는 인생인가요? ‘성처입은 치유자’(운디드 힐러)라는 책이 있다. 예수님도 상처를 많이 받으셨다. 십자가는 그분의 상처의 크라이막스이다. 자신의 상처를 통해서 인류의 상처를 바라보시고 그 상처를 대신 짊어지고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시고 구원하시는 구원자가 되셨다. 인생의 길에서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면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마땅하는가? 마태복음 9:35, 35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왕으로 묘사한다. 마태복음에 2장에 왕으로 표현한다. 왕을 찾는다. 그리고 마지막장에는 모든 민족들의 왕이라고 한다. 모든 민족들의 왕이며, 만왕의 왕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Kig of Kings. 만주의 주, 그런데, 그분도 상처를 받으셨다. 받고 끝난 것이 아니라, 치유자가 되셨다. 우리도 인생을 살면서 상처를 많이 받는다. 시간만큼 받는지 모른다. 왕 되신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을 따르는 자들이라면, 우리도 다른 이의 상처를 치유해 주는 자가 되어 나보다 더 상처받고 더 아파하는 인생을 치유하는 삶을 살아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상처 입은 자들의 사람의 마음을 읽는 눈이 열려야 한다. 오늘 본문에서 I. 상처 입은 자들을 주목하는 눈이 열려야 한다. *마태복음 9:36절.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he had compassion on them) -그들을 보시고 주목하셨다. 봐야 섬기고 돌볼 수 있다. 우리는 보인다고 할 수 있지만 우리는 보지 못하고 지나가고 있을지 모른다. 한 인생은 쫓겨 다니는 인생, 한 인생은 이것을 소명을 위한 인생, 이것은(Called life), 이 인생이 지극히 작다한다. 모두가 쫓기다보니 보이지 않는다. 다른 사람들의 치유자(治癒者)가 되겠는가?- 인생수업이라는 책이 있다. 유명한 사람이다. 치유자로 살려면 가만히 바라봐라. ▶당신의 고통을 보고 불쌍히 여겼다는 말씀이다. 기진했다. 모든 것을 포기한 상태이다.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다. 미국의 특이한 목사님이 한 분이 불쌍히 여겨달라고 하시는 말씀을 많이 하신다. 전도를 많이 하시는 분이시다. 교회가 불신자들을 전도하고 무슬렘을 복음을 전한다. 주님을 영접하는 것, 불쌍히 여겨달라고 늘 기도하신다. 우리의 모든 인생들을 주님이 불쌍히 여기시기 때문이다.
II. 상처입은 자들과의 공감의 가슴이 있어야 한다. -공감이 되어야 한다. 불쌍히 여기신다고 한다. *마태복음 9:36절.36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he had compassion on them)
▷복음의 3가지 케이스 ※식당에서 점원이 불친절하다. 화가 나더란다. 잠시 기도를 했다고 한다. 주님께서 사정이 있다고 말씀하셔서 그녀를 위해서 기도했다고 했다. 요금 지불을 하다가 팁을 얼마를 줄까하다가 3불을 놓으려고 하니 적다는 생각이 들어서 기도했더니 10불을 놓고 가라는 생각을 주셨다. 손님이 달려와서 돈을 돌려드린다고 했다. 자매를 격려하고 싶다면서 서비스가 엉망이었다는 것을 말하며 남편이 어젯밤에 떠났다고 했다. 그래서 목사님은 기도하겠다고 하신 후 계속 자매를 위해 기도했다고 한다. 예수님을 전하고 왔다고 한다. 기뻐했다고 한다. 나보다 더 힘들어하고 고통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를 바라보라. 이런 상처 입은 이웃을 공감하기를 기도하고 상처 입은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III. 상처입은 자들을 제자 삼는 헌신이 있어야 한다. *마태복음 9:37-38절, *마태복음 10:1절,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 것이다. 여기 주님은 열두 명을 제자라고 부르지 않으신다. 열두 사도-보냄받은 자, 제자-배운다. 선교자(미션너리)-보낸다. 이다. 우리가 복음을 필요한 자에게 보내신다면 우리는 다 선교사이다. 그들을 온전케 하는 사역이다. 디자어링 텔레이오스- 성숙과 같은 말이다. 우리의 과제이다. 제자의 사명, 열두 사도의 사명이 된다. 열두 사도 어떤 제자로 열두 제자를 묵상했다. 격리하면서 책을 썼다. 본문에 사도를 열거하시면서 3명의 제자를 수식어를 붙인다. --------------------‘열두 사도 이야기’ 책을 보라.
1)베드로라 하는 시몬(반선이 되어간 사도) 2) 세리 마태 가나안인(셀롯인, 열심당원) 시몬 3) 유다 가롯유다,(예수를 판자/하나님의 뜻)
♣요약 ☆포루투칼 바아나 셔프 교회 (누오 몰리에나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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