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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3년 4월 30일)
제목: "하나님, 질문있습니다"
말씀: 룻기 1:16
찬양인도: 쉐기나(이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1부)
대표기도: 이현규 부목사님(1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설교자: 박신일 목사님(그레이스 한인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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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룻기 1:16,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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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에 한 가지 질문을 먼저 드리고 싶다. 여러분, 하나님이 사랑하신다. 머리를 때려하지 마시고 삶의 현실로 대답해 주시기 바란다.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라고 생각할 때, 우리 가정에는 고난이 오면 안 된다고 생각할 수 있다. 우리 가정에 고난을 주신다면 하나님은 선하시는 분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혹시라도 고난이 온다면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분이라며 내가 기도하는 대로 들어주어야 한다. 저는 요즘 젊은 청년들을 만나면서 이런 안타까운 질문들을 하는 젊은이들을 만나게 된다. 이런 안타까운 질문들을 하는 젊은이들을 만나게 된다. 자기 친구의 아버지가 너무 신실한 목회자였는데, 암에 걸려 젊은 아버지인데 그 목사님 아들이 기도했는데 결국 낫지 않고 떠났습니다. 그 목사님 아들의 친구였던 이 청년은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 내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았던 하나님이 아직도 원망스럽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과연 선하신가? 이 질문을 우리는 정직하게 해야 되고, 정직하게 대답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우리의 생각이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는 일들이 종종 있다. 하나님은 사랑하실 때 우리의 머리로는, 삶으로는 의문이 갈 때, 이런 상황들을 직면하고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인데, 어떻게 이런 상황 속에서 믿음의 길을 잘 걸어갈 수 있을까? 오늘 룻기 1장은 내 가정이 모압 땅으로 이스라엘에서 모압 땅으로 이사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엘리멜렉의 집안인데, 1장 1절과 2절을 우리 다 같이 한번 보시겠다.

*룻기1:1~2,
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엘리멜렉의 가문은 흉년이 들어 먹을 것을 찾아 모압 땅으로 이주 한 것이다. 아주 이들은 단순한 꿈 때문에 이사한 것이다. 먹고 살기를 원해서, 가정의 소박한 꿈을 따라 이동한 것이다. 혹자는 룻기를 이해할 때, 육의 양식을 따라 가나안 땅, 약속의 땅을 버리고 떠났다는 것으로, 영적 의미로 해석해서 이런 재앙의 왔다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해석을 저는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하지만 오늘 이 본문을 잘 읽어보면 지나치게 영적으로 해석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우리 역시 조금 어려움이 생기면 우리가 살 만한 곳을 찾아 이주하는 것은 우리의 당연한 소박한 행복을 찾아가는 결정이다. 여러분 행복해지는 걸 원하잖아요. 다 그런 소박한 것도 다 있다. 그것은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비극이 발생하고 3절부터 5절까지 보겠다.

*룻기 1:3~5,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먹을 것을 찾아 떠났던 이 가족은 남자들이 다 죽임을 당하는 비극을 맞게 된다. 이들의 꿈이 아주 철저하게 깨어져버린 사건이다. 남편도 잃고 두 아들도 잃는다. 외국 며느리 두 여인으로 남아 있다.

여러분의 인생을 솔직하게 돌아보실 때 여러분의 꿈은 잘 이루어져 가고 있는가? 진행형인가? 아니면 이미 깨어져 버렸는가? 진행형인가? 깨어졌는가? 제 생각에는 둘 다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꿈 깨어질 게 참 많다. 눈 큰 아내를 찾기 원했건만,,, 우리의 꿈 중에는 깨어진 것이 많이 있다. 우리의 삶으로 돌아오면 우리 가정에 한 가정의 어머니가 연결되어 있다. 중병에 걸렸을 때 어느 가정도 기도하지 않겠는가? 고통을 거두어달라고 우리는 간절해 기도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능력 있는 하나님이 안 고쳐 주실 때가 있다는 것이다. 맞다. 모두 주시지 않는다. 만약 우리 가족 중에 한 사람이 그 병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우리는 반드시 고칠 것이다. 근데 하나님은 전능하시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실 때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 가정이 행복하게 살고 싶은 것은 얼마나 소박한 꿈인가? 그런데 그 꿈이 깨어져 나갈 때도 하나님이 가만히 계시기 때문에 힘든 것이다. 우리 마음속에 주님을 사랑하는 믿음은 여전히 살아 있지만 ‘왜 그러실까?’ 라는 우리 마음속의 작은 질문이 지워지지 않은 채 살아갈 때가 우리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고쳐주시면서 우리가 원하는 기도를 응답하지 않으시면서 하나님은 여전히 이렇게 말씀하신다. 로마서 8장 32절을 우리 다 같이 한번 보겠다.

*로마서 8:32,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침묵하시면서도 주님은 이런 말씀 이게 그렇게 하고 있다. 아들까지 내어주시니 그분이 모든 것을 주신다는 것이다. 혼돈스러울 때가 있다. 어떨 때는 답답하기까지 하다. 왜 하나님은 선하시고 전능하시기까지 하는데, 우리가 고통당할 때, 때로 해결해 주지 않고 왜 비극을 그냥 통과하게 하시는 것인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룻과 나오미, 나오미라는 시어머니는 꿈이 산산 조각난 상태이다. 남편도 잃고 두 아들도 잃었다. 그리고 그 한 며느리만 따라오겠다고 해서 몸만 데리고 고향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그때 룻이라는 이 며느리에게 이방인 여인이었던 며느리에게 뜻밖의 고백이다. 자기는 끝까지 쫓아가겠다는 것이다. “너는 젊으니까 모압 땅에서 새로운 남편으로 만 잘 살 거라.” 아무리 이해시켜도 끝까지 따라온다는 말을 한다. 그렇게 한 말은 “어머니 백성 내 백성들 어머니 하나님 내 아들 됩니다.” 라는 이 믿음으로 쫓아온다. 그래서 이 책은 나오미 서가 아니라 룻기라고 책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의 관심은 룻에게 있지 않다. 이 나오미에 관한 고난에 대한 이 질문을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 것일까? 그 답을 좀 찾아보고 싶다는 것이다. 이런 재미있는 질문을 해볼까요? 룻이라는 여자가 신앙을 가졌는데 어머니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있다고 했는데, 이 믿음은 누구에게 배운 것인가? 누구에게 배웠다는 것인가? 시어머니,,, 어느 어머니? 분명히 시어머니의 혜택이었을 것이다. 재밌는 질문은 뭐냐면 시어머니의 믿음이 더 좋은 것인가? 며느리의 믿음이 더 좋은가? 시어머니일 것이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정정을 해드리고 싶은데, 여러분 며느리라고 할 것이다. 시어머니가 룻에게 믿음을 줬고, 믿음이 룻은 아무리 오래 되었어도 10년도 안 됐을 텐데, 여러분 룻이 아무리 믿음이 좋아도 나오미 믿음을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한다. 이분은 산전수전을 다 겪은 사람이다. 나오미를 여러분 낮게 여기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그렇게 믿음으로 말하는 그 며느리한테 여러분 고향으로 돌아오는 나오미는 사람들이 저 여인이 누구냐 라고 물어볼 때, 뭐라고 대답하는지, 한번 어떤 말이 시어머니 나오미에게 오는지 19절과 21절에 보도록 하겠다. 제가 읽어드릴게요

*룻기 1:19~21
19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 여호와께서 나를 징벌하셨고 전능자가 나를 괴롭게 하셨거늘 너희가 어찌 나를 나오미라 부르느냐 하니라.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베들레헴에 이를 때에 온 성읍이 그들로 말미암아 떠들며 이르기를 이이가 나오미냐 하는지라. 너무 오랜만에 나타난 거죠. “이 사람이 나오이냐?” 나오미는 다르다는 뜻이다.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라고 대답한다. ‘마라’는 쓰다는 뜻이다. 이름을 개명했다. 자기를 나오미 라고 부르지 말아 달라, 마라라고 부르라고 한다. 우리나라 말로 어떻게 번역이 되는가 하면 이거 내 이름을 그냥 ‘괴로움’이라고 부르라고 한다. 이 괴로움, 박괴로움, 김괴로움, 이렇게 불러달라는 것이다. 자기 인생이 쓰다고 본다. 그러면서 뭐라고 말하냐면 나는 나갈 때 풍족하게 나갔는데, 여호와께서 빈 손 되게 만드셨다고 한다. 질문하겠다. “누가 망하게 만들었는가?” 하나님께서,,, 저는 신앙생활의 굉장히 중요한 요소가 ‘정직함’이라고 본다. 여러분 안 믿어지는 걸 믿는 것처럼 표현한 것 같다. 힘든데 힘들지 않는 것처럼, 그럼 신앙이 성숙하지 않는다. 힘들 때, 어떻게 고백해하고 기도해도 ‘하나님 힘들어요!’ 라고 기도하라!~ 맞는가? 안 되는 걸 있는 것처럼 과장하지 말자는 것이다. 지금 나오미를, 자꾸 나오미의 믿음을 너무 우습게 여기는데, 믿음이 있는 분인데 근데 있는데 힘들어서 뭐라고 말하냐면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빈손으로 돌아오게 만들었다고 주님께 원망하고 있다. 주님께서 원망해도 괜찮다. 그래서 탄식 기도를 하게 된다. 사람한테 하지 마시고 주님께 하셔야 한다. 이 장면에서 우리의 질문이 있다. 나오미의 입장에서 하나님은 선하신가?

여러분 나오미는 지금 나오미를 생각한 하나님은 전능하신 건 맞는데 선하신가? 여기에는 의문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인생에도 그런 순간이 온다. 성경이 우리에게 경고하는 바가 있다. 내 꿈이 이루어지고, 나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내 목표라면 하나님을 따라가고 신뢰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나의 과정이 가장 이루어지고 모든 하나님 나라 만사형통하고 이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내 삶의 신앙생활의 목표가 되면, 주님 따라가면 어려워진다는 것이다. 왜? 아닌 경우가 많이 생기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믿음을 가지면 신앙이 우상숭배로 전락하게 된다. 왜 우리는 나를 그렇게 만드는 것을 따라서 가르칠 것이고 우리 신앙은 교회에 앉아있어도 우상순배가 될 수 있다. 주일 예배에 앉아 있어도 내가 원하는 것을 얻고자 여기 앉아 있다면 하나님을 내 말을 잘 듣는 착한 분으로 만들어 버린다면 여러분 우리는 주님을 우상으로 바꾸는 것이다. 신앙의 최종 목표는 나의 행복이 아니라, 주님께. 영광이다. 룻기 1장은 나오마 집안의 소박한 꿈이 다 깨어진 장이다. 이렇게 정리하면 좋을 것 같다. 한 번 저를 따라 해보시면 좋을 것 같다. 하나님은 내 꿈을 깨뜨리신다.!!~ 동의하시는가? 안 하셔도 된다. 사실 우리 분들 중에 깨어지는 것이 많지 않는가? 너무 큰 목소리 하시는 분, 교구 목사님의 상담을 좀 받으시기로... ㅋㅋㅋ 오히려 우리 꾼들이 깨어질 때 우리 아이는 질문이 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가 이런 1장을 피해갈 수는 없다. 혹시라도 우리에게는 우리 가정에는 이런 권한이 뭔지 모른다 그런 분들이 있다면 전혀 고민하실 필요 없다. 다른 질문을 던져 우리의 꿈이 다 깨어졌을 때에도 하나님을 여전히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내 꿈이 깨어지는 건 정말 아프고 고통스럽지만 심지어 가족 중에 누가 죽는 건 이것은 너무나 힘든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여전히 믿을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우리는 내 꿈이 깨어질 때, 내가 추구하는 행복이 깨어질 때, 이런 생각을 하고 싶을 것이다. 내 믿음이 흔들리고 믿음이 깨어질 수도 있구나! 의심이 찾아올 수도 있구나! 하나님이 선하시는가? 이런 질문을 내 마음속에 던질 수도 있구나! 이것이 우리가 경험하는 내 삶이에요. 그럴 수 있다.

저는 이것을 다른 각도로 좀 올려다보겠다. 이런 의심의 순간이 올 때, 고난이 계속 지속될 때, 진짜 내 믿음이 깨어지는 것일까? 아니면 껍데기 믿음이 되어지는 것인가? 내 믿음의 본질이 흔들리는 것인가? 아니면 형식적인 믿음, 나만이 잘 되길 원했던 잘못된 믿음이 깨어지는 것인가? 이런 고민을 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오미는 남편도 잃고 두 아들까지 잃었다 한 여인으로서는 절망이라고 이름을 붙여야 한다.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면 그 절망 속에서도 하나님은 뭔가를 말씀하시는 것 같다. 만약 아무 일도 없다면 그냥 절망만 준다면 그건 재앙이다. 여러분, 이 꿈이 다 깨져버린 나오미는 뭘 깨달은 것인가? 뭘 할 수 있는 걸까? 사람이 이런 고난으로 바닥을 치게 되면, 믿음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깨닫는 것이 있다. 그게 뭐냐 하면 아무런 조각도 없다. 남편도 없고 두 아들도 없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이 손가락질한다. 나오미를 마라라고 불러라. 이 고난에 바닥을 칠 때, 믿음의 사랑을 다시 깨닫게 하는 것이다. 여러분 주님만이 선하시다. 아멘. 이것을 얻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재앙이다. 절망이 올 때 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우리의 궁극적인 기쁨은 영원한 이름은 주님 한 분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얻는 것이다.

※미국의 기독교 대학 교수를 지낸 ‘제럴드시처’ 라는 사람 있는데 이 사람은 가족들과 자녀 넷과 아내와 장모님을 모시고 휴가를 간다. 휴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상대방의 자동차가 직진해서 정면충돌을 한다. 그리고 그 사고로 장모님이 돌아가시고, 아내가 세상을 떠나고, 막내의 딸이 세상을 떠났다. 남편 홀로 남고 자녀 셋을 기르고 이 사람은 끝까지 재혼을 하지 않고, 지금 미국에 있는 기독교 대학에 그 학교에서 역사와 영성을 가르치고 있다. 이분은 재혼하지 않는다. 혼자서 평생을 자녀를 키우며 산다. 이런 질문을 그런 던진다. 이 ‘제럴드시처’라는 사람의 책은 우리나라에서 이미 번역해서 몇 분이 그분이 질문한 것이 이것이다. 이런 사고를 겪고, 재앙을 받았다는 것을 주님은 미리 아셨던 것이라고 말한다. 여러분 어떻게 생각하는가? 주님은 아셨을까? 모르셨을까? - 아셨다는 것이 자기가 믿는 하나님은 아셨다는 것이다. 아셨을 거다. 그럼 이 사람의 질문이 이것이다. 이런 미래가 벌어질 줄 알았는데, 알았다면 내가 결혼하는 것이 맞는가? 이런 깊은 질문을 할 수 있다. 그리고 늘 이런 결론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미래를 알 수 없지 않은가? 그럼에도 정말 주님이 아셨다 할지라도 그래도 결혼 했던 것이 맞다. 잠깐이지만 그 아름다운 시간의 행복을 누렸고, 그걸 이렇게 한다. “혼자 자녀를 보면서 나는 이 길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 혼자 자녀를 키우는 동안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 슬픔을 돌봐주셨고, 매일 주님은 우리 가정의 위로 자가 되어 주셨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 삶 속에 비극 속에서도 하나님이 역사하고 계시다는 것을 내가 믿고 사는 것이다. 오늘도 우리 가족의 비극 속에서도 하나님은 하나님의 구속의 구원의 역사를 써 가시는 중이다. 나는 그분을 믿으며 내가 처한 곳에서 오늘도 그분의 뜻을 행하며 살아갈 수 있다. 어떤 상황에 처하든지 주님은 나를 붙들어 주신다 그분이 나를 향한 섭리와 다스림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자기가 이 기구를 통과하면서 깨달은 게 뭔지 아는가? 비극은 비극인데 자녀 셋으로 홀로 키우면서 하나님이 감정적으로, 인격적으로 나를 돌보시지 않았다면 나는 살아올 수 없었다는 고백이다.

나오미의 집안은 처절하게 꿈이 깨어진다. 주님은 그 비극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이야기가 써 가신다. 어떻게 가시냐면 룻과 보아스가 만나면서 그들의 후손으로 다윗을 거쳐 예수님이 오게 하시는,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이어가고 계시다는 것이다. 여러분 절망의 시간에 우리 안에 수없이 많은 질문이 올라오지만, 한 가지를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영원한 기쁨은 그 어떤 것도 아니다. 주님이셔야 한다. 우리가 구해야 될 참된 기쁨은 오직 주님이 되기길 바란다. 주 예수보다도 귀한 것은 없다. 이 믿음을 고난에서 퍼 올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그래서 첫 번째로 나누고 싶은 것이 있다. 한 번 따라해 보자. 내 꿈이 깨어질 때, 하나님의 꿈이 보인다. 주님이 내 꿈을 그렇게 깨뜨리신 이유가 뭔지 아는가? 저는 하나님의 꿈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시는 것이다.

※프랑스의 정말 믿음으로 살았던 잔느기용은 고난에 대해서 우리에게 깊은 이해를 열어준다. 오늘 두 번째로 나누려고 하는 것은 나오미의 이야기를 잔느기용의 눈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나오미 사건이라든지, 욥기 사건이라든지, 성경에는 우리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게 하는 고난들이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자랑하고 싶은 욥, 그 의롭고 경건한 자에게 하나님이 아무런 이유 없이 고난을 당하게 해보라는 것이다. 우리 생각을 이해할 수 일이다. 너무 경건한 자에게 사단이 그 가정을 치는 것을 허락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나오미 역시 마찬가지이다. 룻에게 믿음을 심어준 여인이었지만 절망의 고통을 지나고 있다. 만일 봄, 여름, 가을, 겨울 중에 만일 고난을 상징하는 계절이 있다면 어떤 계절이 고난에 가깝겠는가? 상식적으로 답하시면 된다. 겨울이다. 잔느기용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겨울나무를 상상해 보라는 것이다. 겨울나무에는 잎사귀가 있는가? 뭐만 있는가? 사랑의 교회는 늘 아기가 대답을 한다. 작년에 왔을 때, 특새에 예배 때에 3-4살짜리가 적기적소에 “아멘!!!”을 크게 했다.
그날 얼마나 감동을 받았던지요. ...ㅋㅋㅎㅎㅎ 겨울나무를 상상해 보라. 그리고 여름나무를 상상해보라.

잔느기용은 굉장히 중요한 메시지를 전해준다. 여름 나무는 가지가 거의 안 보인다. 뭐 때문에?
잎사귀가 다 가리고 있는 무성하다. 겨울이오면 모든 이파리가 다 떨어진다. 가지만이 남는다. 나뭇가지가 우리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잎사귀가 다 떨어지고 나면 가지만이 남는다. 삐뚤어진 모양이 다 보인다. 어쩌면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은 나무일 수 있다. 그런데 원래 나무는 그 모습이다. 다만 실제 모습을 가려줄 잎들이 지금 사라졌을 뿐이다. 이것이 고난을 당하는 신앙인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나오미처럼 룻기의 1장은, 욥기처럼 친구들이 와서 고소를 하며 정죄하던 그 욥기의 시간을 겨울이 찾아왔던 책이라는 것이다. 고난이 오면 우리의 실체가 나뭇가지가 다 떨어지고 드러난다는 것이다. 나를 가리고 있던 모든 잎사귀들 다 떨어진다는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모습을 지닌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결함투성이의 본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날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이다. 언제 고난의 날이라는 것이다. 내 내면의 실상이 그대로 노출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그때 보게 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욥기를 통해서, 룻기를 통해서, 수많은 하박국이나 이런 책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은 뭐냐면 고난은 내가 외우고 있던 교리, 내가 알고 있는 신앙의 이론으로는 고난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한 번은 대답할 수 있다. ‘고난이 오면 나 그래도 주님 붙들 거야!’ 대답 한 번 할 수 있다. 그러나 고난이 지속될 때는 그 이론으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 진심이 나와야 된다는 것이다. 욥은 친구들의 정죄와 수많은 손가락질을 받으면서 23장 10절에 이러한 고백이 터진다. 이거는 갑자기 한 말이 아니라 가슴 속에서 고통 속에서 하는 말이다.

*욥기 23:10,
10 그러나 내가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순금 같이 되어 나오리라.
-여러분 우리의 믿음이 이론이 아니라 고통을 통과하면서, 눈물을 통과하면서 터져 나올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욥은 찬바람을 견뎌낸 나무와 같다고 말한다. 자신의 믿음이 실제가 되도록 토해내는 고백이다. 여름 나무와 겨울나무에 대해서 질문을 하나 하겠습니다. 여름에는 열매를 맺히고 무성한 잎사귀가 가득 덮는다. 겨울에는 가지만 남는다. 제가 질문하고 싶은 건, 가지만 남아 있는 겨울나무가 여러분 올 겨울을 잘 보시길 바란다. “겨울나무는 살아있는 것인가? 죽은 나무인가? 아무것도 없는데??살아있어요~~.아무것도 없는 아무것도 없는데 살아있어요. 죽어 있어요. 왜요?” 살아있다면 내년에는 봄이 오면 꽃이 피고, 잎사귀가 자라고 열매가 맺는 거 믿으세요? 여러분, 아멘,

잔느기요은 이렇게 이야기 한다. 겨울나무, 아무것도 없는 그 내부 깊숙한 곳에는 지난봄에, 여름에 아름다운 잎들을 피게 하고 열매를 맺게 했던 생명이 살아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고 한다. 이것이 욥기를 통해서 눈길을 통해서 룻기를 통해서 주신 주님 음성이라는 것이다. 아무리 초라해도 지금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 같은 나오미가 아무리 원망한 것처럼 할지라도, 그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앞에서 떠s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 믿음의 본질은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단지 그동안 칭찬받았던 거 그런 것들로 둘러싸여 있던 것들, 모든 잎사귀들이 다 떨어져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지금 나오미는 초라한 겨울나무 같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 치고 있는 중이다. 여러분, 초라해 보여도 믿음이 좋은 것이다. 여러분, 우리가 고난을 당할 때 무슨 나무가 되는 걸까요? 무슨 나무가 돼요? 그런데 겨울나무는 가장 강한 나무이다. 나무 안에 있는 생명이 겨울나무는 어떤 나무이냐면 생명을 맺는데 지금 에너지를 소모하지 않는다. 가장 생명에 깊숙한 줄기가 보이지 않는 뿌리 부분으로 모든 생명이 모여든다. 겉으로는 죽은 것처럼 나무가 보일지 모르지만 잎사귀가 떨어져 초라해 보이지만 가장 강력한 생명을 지금 지니고 있는 시간이 겨울나무이라는 것이다. 왜? 봄에 그 생명력을
발휘하기 위해서이다. 봄, 여름, 가을까지는 겉모습을 치장하는데 나무가 에너지를 쓴다. 봄, 여름, 가을에는 겉에 보이는 에너지를 쓴다. 하지만 겨울에는 내년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 생명의 힘을 뿌리 속에 계속 모으는 시간이 겨울나무라는 것이다. 겨울나무 나무를 죽이는 계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나무를 더 강하게 만드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잔느기용은 욥이나 나오미처럼 고난을 통과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에게 이러한 교훈을 남긴다. 따라 해보자. “한겨울에도 믿음은 죽지 않습니다.” 여러분 고난이 왔다고 질문이 아무리 있어도 죽을 것이 아니디. 여러분 우리 믿음은 더 강해지기를 믿는다. 우리 모두 고난이 올 때, 겨울나무가 되어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질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고통스러운 질문과 기도속에는 이 고난을 이겨 정말 믿음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여러분 생명력을 더 강하게 만드는 것을 잊지 말고, 여러분 고난 가운데 믿음이 더 강해지는 복이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마지막으로 나눌 것이 있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이 나오미를 보면서 저는 예수님 얘기로 결론을 맺으려고 한다. 이 예수님에게도 가슴 아픈 시간이 있었다. 그것은 감란 산에 올라가셔서 기도하실 때이다. 십자가를 지시기 전 우리는 겟세마네 동산으로 기록되기도 하고, 그것을 감람산이라고 기록하는데 주님은 기도하신다. 십자가에 죽기는 육신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 아시기에, 우리 주님은 이렇게 기도하신다. “할 수 있거든 이 잔을 옮겨 주시옵소서.” 어떻게 해달라고 하시는가? 옮겨달라고 하신다. 육신의 고통을 아시기 때문에 피하고 싶으셨다. 그러면서 예수님이 다시 기도하시는 것이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의 본심은 지나가게 해달라는 것이다. 우리가 고난을 당하면 우리는 이 기도를 많이 하죠. 지나가게, 빨리 사라지게, 이게 우리의 기도이다. 그런데 예수님도 거절당하신다. 감람산에서 예수님의 기도도 거절당하신다. 그 예수님은 감란 산에서 그 기도를 거절당하시고,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다. 감란산은 예수님의 소박한 꿈을 깨뜨리는 산이었다. 그 고난을 당하고 싶지 않아서 조금 피하고 싶으셔서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하신다. 이것은 우리가 해야 되는 기도가 뭔지 아시고 아시는 기도이다. 예수님은 감람산의 기도를 거절당하시고 죽으셨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감란산은 예수님의 꿈을 깨뜨려버리는 산산조각 내버린 산만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은 보여준다. 감란 산은요 소망의 산이 된다. 승리의 산이 된다. 왜 그런지 여러분과 마지막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이 잔을 옮겨달라고 기도하던 감람산이 절망의 장으로 끝나지 않는다. 감란 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는가? 감란 산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아시는가? 예수님은 부활하시고, 이 땅에서 함께 제자들을 만나시고, 그다음에 승천하셨고, 다시 오시게 될 것이다. 우리 교회는 이 믿음이 서 있어야 한다. 주님은 다시 오실 것이다. 그 주님이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기 직전에 사도행전 1장에 이런 말씀이 나오고 있다. 1장 11-12절이다.

*사도행전 1:11~12,
11 이르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12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 어디에서 돌아왔는가? 어느 산? 제자들이 지금 감란 에서 돌아왔다. 뭘 목격하고 온 것인가? 지금 승천을 목격하고 온 것이다. 예수님이 감란 산에서 절망만 하신 것이 아니다. 그 산에서 주님은 승천하신 그 장소 바로 그것이 감람산이다. 예수님의 소박한 꿈이 깨어진 자리가, 부활하신 후에 승천하시는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지는 그분이 누구신지 온 세상에 알리는 하늘이 흔들리고 땅이 진동할 만한 역사를 일으키는 산으로 주님은 계획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우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언제나 고통을 이길 능력이나, 행복이나, 우리의 쾌락을 약속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자신이 당한 고난과 절망의 순간에도 계속해서 하나님만이 나의 소망이심을 붙들고, 믿고 나아가게 하는 위로와 힘이 되어 주실 줄로 믿는다. 예수님은 어느 날 감란 산에서 울며 기도하셨다. 이 잔을 지나가게 해달라고,,, 그 꿈은 깨어졌다. 하지만 부활하시고 그 감란 산에서 승천하는 놀라운 하나님의 소망이 계획을 우리 주님은 준비해 두시고 예수님의 그것을 거절하신 것이다. 우리 꿈이 깨어지는 것들이 있다. 내 감란 산이다. 여러분, 그곳이 내 믿음이 살아나고, 부활하고, 다시 일어나는 승리의 감란 산으로 바뀌는 오늘 예배가 되기를 바란다. 내가 무너진 곳에서 내 믿음이 부활하는 것, 아멘!!! 내가 고난당하는 그곳에서 “하나님, 살아 계십니까?” 질문하는 그곳에서 두 손 들고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선포하는 믿음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한 번 따라하겠다. “나의 감란 산을 가지고 사십시오.” 여러분, 무너진 자리가 믿음이 부활하는 자리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요약
내 인생 가운데는 내 꿈이 산산 조각난 고난의 현장들이 있고, 눈물의 자리가 있다. 예수님도 그렇게 간절히 기도하셨듯이 예수님이 십자가에 매어 달려 죽으실 때, 이 잔을 지나가게 해달라고 기도했는데 그 소박한 꿈을 하나님은 거절하셨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감란 산에서 우리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놀라운 승천의 계획을 하나님은 가지고 계셨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한다. 내가 쓰러지는 곳에 주님께 소리치며, 기도하며 “주님 살아계십니까? 하나님 선하십니까? 하나님 내 인생에 왜 이런 아픔을 주십니까?” 이렇게 기도하게 하시는 뜻을 알아서 그 기도를 넘어 하나님은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니, 내 믿음이 부활하는 인생이 되고, 예배가 되어야 하며 고난 때문에 쓰러지는 것이 아니라, 겨울나무가 되어 내 믿음이 강해지는,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더 신뢰하고 하나님이 정말로 보이고, 하나님의 꿈이 보이는 믿음이 되고 예배가 되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질문을 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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