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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3년 4월 23일) 제목: "신앙의 깊이 측정" 부제: 지성소 신앙의 은혜 말씀: 에스겔47:1~5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1부) 대표기도: 남동우 부목사님(1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ㅡㅡㅡㅡㅡ *에스겔47:1~5, 1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리더라. 2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꺾여 동쪽을 향한 바깥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오른쪽에서 스며 나오더라. 3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쪽으로 나아가며 천 척을 측량한 후에 내게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4 다시 천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천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5 다시 천척을 측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가득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 ▶오늘 주일 예배에 은혜의 지성소가 되게 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이 자리가 얼마나 감사한지, 우리가 기도한 대로 오늘이 작은 부활절이다. 영광의 대관식이다. 영광의 잔치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일주일 가운데 이 시간이 가장 피크가 되어야 나머지 삶도 은혜의 지성소의 물이 흘러서 은혜의 축복이 되는 것이다. 오늘은 구한 찬송이다. 강단에 모란 작약이 피었다. 오늘은 장애인 주일인데 1년에 함께 축하의 자리이다. 축하의 꽃인 것 같다. 예배에 함께 하고 또한 수고하시는 교사들과 교역자님과 모두께 감사의 박수를 전하자. 예수 믿는다는 것은 감사하고 좋은 것이다. 지난주일 CAL세미나 너무 잘 마쳤다. 제가 특새 하고 CAL세미나 하고 목소리가 갔다. 그러니까 목이 갔지만 거룩한 목소리가 되었으면 좋겠다. 양해하기 바란다. 120기 제자훈련 37년 동안 CAL세미나를 했다. 얼마나 감사한가! 전 세계가 한결 같은 역동성을 가지고 유지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오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다. 그리고 CAL세미나 중에 하나가 우리가 교회 성장 방법론을 전달하는 노하우가 아니고, CAL세미나의 목회의 본질과 사역의 뿌리가 무엇이냐? 그리고 어떻게든 흔들릴 수 없는 토대, 근거와 신념과 뿌리가 무엇인지 우리가 다루고 싶다. 뿌리가 깊으니까 흔들림이 없다. 그래서 CAL세미나를 통해 목회자로, 중직 자가 살고, 지역교회가 살면 교회가 사는 줄로 확신한다. 교회가 살면 이 민족이 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은 신앙의 깊이 뿌리로 지성소의 신앙으로 부제로 붙여보았다. 19번째 부흥헌신 ‘신앙의 깊이를 측정’하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겠다. 흔히들 신앙의 나이가 있고 신앙의 경력, 신앙의 연수, 신앙의 역사를 묻는다. 엄격히 말하면 신앙은 나이나 길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닌, 신앙은 깊이에 의해서 결정된다. 묻겠다. 적당히 교회 10년 왔다가 가는 것과, 1년 제자훈련 제대로 하는 신앙과의 누가 더 깊이가 있겠는가? 누가 더 신앙의 깊이가 있는가? 1년 제자훈련이다.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고 제대로 제자훈련이 신앙이 깊은 것이다. 마태복음 20장을 보면 포도원 일꾼의 비유가 있다. *마태복음 20:16, 16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신앙도 길이도 중요하지만 깊이가 중요하다. 우리 교회도 신앙의 깊이와 뿌리가 내려지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은 자연법칙과도 이와 같다. 나무의 뿌리도, 건물의 높이는 기초공사에 의해서 결정이 된다. 얼마나 튼실하냐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상식으로는 다 안다. 다 알지만 그것이 깊이나 뿌리가 당장 눈에 보이지 않고 겉만 보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겉만 멀쩡하면 속을 수가 있다. 그래서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시편 1:3,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그 핍박과 유혹에 뜨거운 이글거리면서 사람을 막 뜨겁고 힘들게 하더라고 변함이 없이 꾸준하게 열매를 맺는 이유는 그 뿌리의 근원이 샘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평생, 우리의 현장이 은혜의 깊은 강수를 마칠 수 있고 그것을 체험할 수 있는 우리의 뿌리가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자연스럽게 잎사귀가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내가 신앙의 깊이가 있는가, 없는가의 측정은 내가 열매가 있는가, 없는가이다. 여러분 3년 내로 여러분 때문에 예수 믿는 분이 있는가? 한다. 여러분 때문에 정말 신앙의 어떤 열매의 변화가 되어서 그런 분들이 주위에 있는가? 우리가 그런 면에서 감사한 면이 있겠지만 많은 분들이 내가 왜 이러는가? 나 때문에 귀한 영향을 받아서 예수를 믿는다든지 나 때문에 주님 길에 들어서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지, 내 신앙의 수준과 내 측정이 어느 정도인가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그것을 오늘 본문을 가지고 보면, 에스겔서의 47장을 보면, 에스겔의 환상을 보면, *시편 1:3, 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에스겔이 본 환상 가운데 에스겔서 전체가운데 노른자위 말씀이고, 마른 뼈가 살아나는 환상과 함께 오늘 성소에서 물이 흘러 나와서 온 천지가 사막과 적시고 척박한 땅이 적셔져서 죽어가는 것이 다 살아나는 이런 영광스런 일이 보는데, 이 환상을 갖게 된 배경은 에스겔이 25세에 포로로 바벨론에 잡혀간 이후에 이때가 에스겔이 50세가 된 것이다. 25년이 흐른 뒤이다. 45장에 보면 내가 포로로 잡혀가서 한 25년 쯤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오늘 이 환상을 보고 성전물이 흘러나와가지고 문지방에서 물이 흘러나와서 은혜가 이 영광스런 이런 것을 볼만한 그런 환경이 전혀 아니었다. 포로로 잡혀 와서 바벨론 척박한 환경이었다. 낙관론을 펼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늘의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듣는 가운데 수많은 인생 가운데 ‘큰 짐을 지고 나는 아니냐?, 나는 끝났다’는 그런 마음이 우리 가운데 자리 잡을 수가 있는데 여러분, 가장 척박한 시기가 가장 영광스런 환상을 볼 수 있는 시간이 되는 것이다. 그걸 믿음으로 우리가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깨닫게 해 주시고 음성이 있는 것이다. 아멘. 세밀한 음성이 들리게 되는 것이다. 오늘 성전으로부터 물이 나와서 큰 강을 이루어가지고 죽은 바다를 살리고 강물이 닿는 곳마다 생명이 살아나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완전한 회복과 우리 식으로 말하면 회복을 넘어 부흥이 되는 축복을 받는 것이다. 지성소 신앙의 회복이다. 1절에 보면, *에스겔 47:1-3, 1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 문에 이르시니 성전의 앞면이 동쪽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 동쪽으로 흐르다가 성전 오른쪽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리더라. -성전 문지방으로부터 물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여러분 아시는 분들은 알겠지만 오늘부터 우리 교회 계단 쪽에 물이 흐르게 건축되어 있다. 나중에 멋있게 보여드리겠다. 영상으로 보여 주겠다. 에스겔 47장2절에 보면 성전에서 나온 물이 어디로 가는가? 2 그가 또 나를 데리고 북문으로 나가서 바깥 길로 꺾여 동쪽을 향한 바깥문에 이르시기로 본즉 물이 그 오른쪽에서 스며 나오더라. -물이 나와서 3절부터 보면, 3 그 사람이 손에 줄을 잡고 동쪽으로 나아가며 천척을 측량한 후에 내게 그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발목에 오르더니. -줄자를 가지고 이제 측량을 한다. 한 척이 50센티 정도이다. 그러니까 1천척, 500미터 정도이다. 500미터 측량하는 것이니 그 물이 발목까지 차올랐다는 것이다. 어떤 상태를 진단하는 것이고 우리의 신앙을 진다하는 것이다. 500미터를 물을 건너 오라가 하셨다. 에스겔 강물을 건너니까 물이 어디까지 찼는가? *에스겔 47:4~5, 4 다시 천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무릎에 오르고 다시 천척을 측량하고 내게 물을 건너게 하시니 물이 허리에 오르고. 5 다시 천척을 측량하시니 물이 내가 건너지 못할 강이 된지라 그 물이 가득하여 헤엄칠 만한 물이요 사람이 능히 건너지 못할 강이더라. -500미터 가니까 발목, 그 다음에는 1000미터 가니까 무릎, 그 다음에 1500미터 가니까 허리쯤 차고, 2천미터 가니까, 온 몸이 건널 수 없을 만큼 큰 강이 된 것이다. 가면 갈수록 퍼져 가면 갈수록 더 깊어지는 것이다 여기는 물론 성경적으로 구원사적으로 보면 강 전체가 영향을 받을 정도로 복음의 온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줄로 믿는다. 그런 복음의 확장설로 되어 있지만 신앙을 우리가 볼 때에 옛날 어른들은 조금은 우리식으로 표현하지만 신앙은 발목신앙이 있고, 발목으로 왔다 갔다 한다. 또 무릎 신앙은 좀 은혜 받아가지고 무릎으로 기도하는 신앙이 있고, 허리 신앙은 봉사를 좀 열심히 섬기고 잘하고 있고, 그다음은 온몸에 은혜를 받아가지고 지성소 신앙이 있다. 그냥 깊은 신상의 깊은 경지에 닿았다는 것이며 옛날 어른들에 의하면 나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분의 신앙의 생수의 강이 어느 정도 흐르고 있는지를 되짚어 보아야 한다. 우리 신앙의 측정 도는 어디인가? 측량할 때 어느 정도인가? 발목신앙은 아닌가? 그 다음에 기도는 하는가? 봉사는 하는가? 온몸으로 지성소의 은혜를 받아야 한다. 그래서 이것을 성전 뜰 신앙, 성소신앙, 지성소 신앙, 이렇게 말씀하는 어른들도 있었다. 오늘 이 말씀을 앞에 놓고 선대의 어른들이 성전 뜰을 이야기 할 때, 성전 뜰은 모든 사람들이 성전에 볼 수 있는 외곽 지대이다. 여기는 누구나 들어갈 수 있었고, 외적 종교 예배의식이 여기서 이루어졌다. 그래서 성전 뜰 신앙이라는 것은 종교인들, 무늬만 그리스도인들이며, 찬송처럼 찰싹거리는 그 얕은 물가에서 이렇게 보는 것이며 껍데기만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중심, 유아기적인 신앙으로 볼 수 있고, 성소신앙은 제사장들만 들어가서 밖에서 피와 향과 기름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었다. 성소신앙은 번제물과 물두멍을 지나서 성전 뜰에나 믿음으로 전진해서 성소에 들어가는 신앙이다. 예수님을 위해 봉사도 하고 남을 위해 기도도 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성소 신앙이 있다할지라도 성소에 들어가 제사장들도 절대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지성소에 들어가지 못한다. 그 누구도 대제사장외에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 없는데 하나님이 정해주시는 그 시간외에는 제사장도 감히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단 대세사장만 1년에 한 번씩 일시적으로 몇 시간동안 거의 소복수준으로 입고 목숨을 걸고 들어가는 것이다. 잘못하면 그냥 죽어나왔다. 그래서 지성소는 두려움의 자리였고, 자기 죽음의 자리였다. 그런데 이 구약의 대제사장이 거의 죽음을 통과한 자리가 지성소인데 여기의 신양은 뭐냐면 지성소는 대 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그 순간 성소와 지성소를 가로 막는 휘장이 밑에서 부터가 아니라, 위에서부터 찢어지는 것이다. 새로운 은혜의 자리, 강력한 임재의 자리, 두려움의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은혜의 장소가 된 줄로 믿는다. 다시 말하면, 성전 뜰은 그냥 들어가면서 밟으면 되는 것이고, 성소에는 그냥 마음이 낮아지고 무릎을 꿇고 기어서 들어가는 것이고, 지성소에는 대제장이 완전히 죽어서 들어가는 것이다. 완전히 납작 엎드려서 죽은 것처럼 되는 것이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신앙의 단계를 이야기 하면서 우리가 성전 뜰, 발목신앙을 성소, 지성소를 이야기 하는 것처럼 발목신앙을 이야기 한 것처럼. 바울 사도는 예수를 믿어도 육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것이다. The carnal Christian, 예수를 믿어도 세상의 사고방식과 영향을 너무 받아가지고 믿기는 믿는데, 안 믿으려고 하니까 지금까지 믿은 게 너무 억울해서 그냥 포기할 수는 없고 그냥 그 단계만 지나면 젖을 먹는 시기가 있다고 했다. 육적인 그리스도는 젖을 먹는 시기가 있다고 했다. 이유식, 단단한 것을 못 먹는 것이다. “주님 사랑해요, 예수님의 신실한 제자 되기 원합니다.” 라고 이런 찬송도 한다. 그런데 누가 옆에 와서 그냥 프라이들 건드리고 누가 뭐라고 하면 자존심이 상하면 팩한다.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해도 자기의 죽음의 선이 없다. 그런데 히브리서 5장에 보니까, *히브리서 5:14, 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이제는 젖뗄 때가 되었다. 이유식은 부드러운 음식을 먹지만 그런데 만약에 20세 정도의 청년이 대학교 1-2학년이 맨날 집에 가서 젖이나 먹고 집에서 이유식이나 달라고 하면 걸 맞는 자가 아니다. 맞지가 않다. 이제는 좀 장성한 사람의 분량이 되어가지고 좀 자기 죽음도 깨닫고 좀 성숙도 하여야 하는데, 저는 우리 교회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할 때마다 크게 보면 한국교회 대부분 다 비슷하다. 일반 성도들이 발목신앙을 이야기 한다면 은혜의 깊은 수준의 측량을 생각해본다면 교회만 왔다 갔다 예배를 빠지지 않고 착실히 나오는 사람을 ‘다’ 군이라고 한다. 나군은 우리 교회 같으면 영적 성숙을 위해 나름대로 이렇게 훈련에 참여하는 분들이 ‘나’군이다. 가군은 말씀으로 다른 이들을 섬기는 분들이다. 우리 교회를 말하자면 순장(구역장)들 같은 경우 제자반이나 사역반도 말씀으로 섬기고, 이것을 우리가 가군이라고 한다. 가나다라 군으로 나누어 보았다. 저는 소원이 6개월이면 6개월, 1년이면 1년, 그 시기가 지나면 라 군에 있는 자들이 제발 다 군으로 올라가기를 바란다. 주일에 잘 참석하는 성도는 다 군은 훈련을 받아서 영적 재생산에 참여하여 이런 신앙의 단계를 마치고 나서 종합해서 말씀을 드리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우리가 발목 신앙에서 온 몸에 은혜를 체험하는 그 수준으로 올라갈 수 있는 것이다. 제가 청년 때 선교 단체에서 훈련을 받는데 그 선교단체는 그 수준을 어떻게 이야기 하냐면 그 수준을 믿고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은 컴벌젼 하다고 한다. Commvolt라고도 한다. 예수님 믿고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 그다음은 예수님을 믿고 훈련된 사람을 Disciple이라고 한다. 그다음에 또 다른 사람은 예수님의 제자로 훈련 받고 나서 그 양육의 일을 담당하는 자에게 Disciple maker라고 한다. 그래서 Disciple maker로 오랫동안 살면서 영향을 미치고 더 큰 사명을 가지고 더 크게 쓰이는 사람을 Leader of the Disciple maker라고 한다. 그래서 컴벌트, 디사이플, 디사이플 메이커, 디러 오브 디사이플이다. 이것을 내 수준으로 만들고 어떻하든지 이 컴볼트가 디사이플 메이커가 되고 리더 애브 디사이플 메이커가 될 수 있도록 다시 마음을 모으고 집중을 했었다. 자 다시 말하자면 여러분과 제가 발목신앙이나, 성전 뜰 신앙이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초대교회도 마찬가지였다. 성도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교부시대에 기록으로 보면 세례와 성찬을 2-3년을 안 준적이 있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하더라도 이제 모든 이단으로부터 어떤 유혹으로부터 나름 자신을 추스릴 수 있게 되면 은혜를 주고 성만찬에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다. 그러니까 그 이단들이 설칠 수가 없었다. 사랑의 교회는 처음 오시면 새신 자 교육을 받으면 첫 번째는 ‘예수님이 누구신가?’ 두 번째는 ‘성경이 무엇인가?’ 세 번째는 ‘교회가 무엇인가?’ 네 번째는 ‘어떻게 믿음 생활 잘 할 수 있는가?’ 이 정도를 거치고 난 다음에 우리 교회 성경 대학이나 여러 프로그램 교육을 하면서 다락방에 들어가고 제자 훈련을 1년을 하고 나면 우리교회에서 이단을 판단하는 기준이 생긴다. 어느 정도 파악을 한다. 비교적 훈련을 제대로 마치고 나면 2단이나 3단이라든지 이런 이단을 차단하게 될 능력이 된다. 이것이 영적 성숙도가 측정이 된다. 그러면 이런 말씀을 놓고 우리는 무엇을 측정해야 되는가? 무얼 적용해야 할까? 첫째, 자기 십자가와 자기 죽음을 측정해야. -이것은 지성소에 들어가려면 오늘 성전에서 물이 흘러나오고 축복이 있는데, 대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려면 무슨 일이 벌어지냐면, 구약에서는 지성소가 열리기 위해서는 대제사장이 납작 엎드려야 한다. 그리고 수소와 염소와 양이라는 제물이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었고, 신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가 그 십자가의 어린 양 되시는 예수님의 희생을 통하여 그 휘장이 찢어지는 것이고 오늘 21세기 AI 쳇 GPT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뭐냐면 구약의 수소와 양이 필요한 것처럼 오늘 내가 제물이 되어가지고 내가 십자가가 되어서 내가 죽음을 선언하고 내가 대속 주님 앞에 제물이 되어야 되는 것이다. 저는 오를 설교를 하려고 하면서 그런데 컨디션이 아니었다. 하나님 앞에 내가 부족하기 짝이 없지만 오늘 말씀이 내 제물이 되는 말씀이 되게 해달라고, 주님 내가 제물되는 말씀이 되게 해달라고, 그러면서 구약의 이 지성소에 대제사장이 들어갈 때, 어떤 과정을 거쳤는가에 은혜를 받았다. 지성소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희생 제물이 있어야 한다. 희생제물의 죽음은 마치 한 세트럼 되어야 한다. 죽음과 지성소는 한 세트처럼 연결되어 있다. 희생제물이 없이는 제물을 드리는 죽음이 제사가 없이는 지성소가 열리지가 않는 것이다. 지성소는 1년에 대제사장이 대속죄인 날 한 번 들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날에 백성의 죄와 민족의 죄를 속하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가는데 그냥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삼중의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 했다. 성전에 문지방에 흐르는 물의 그 양광을 체험하기 위하여 지성소의 깊은 은혜가 있어야 하는데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 대 속죄로 들어갈 때 3중의 절차를 거쳐야 했다. 첫 번째는 첫 번째는 어린 수송아지를 취하여서 자신의 죄와 가족과 속죄 죄를 먼저 드려야 했다. 그 피의 일부분을 지성소로 가져가서 지성소 앞에 뿌렸다. 이런 과정 가운데 어떤 실수나, 어떤 생각을 하더라도 즉각적으로 죽는다. 그만큼 엄중했다. 희생제물의 피를 가지고 자기의 죄와 가족의 죄를 위해 속죄 죄를 드리고 그 피의 일부를 하나님 앞에 뿌렸다. 지성소에 뿌린 것이다. 두 번째는 염소 두 마리를 가지고 한 염소는 제비를 뽑아서, 한 마리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하기 위해서이고, 잡아서 그 피의 일부분을 지성소 안으로 가져가서 거룩한 제단 위에 염소의 피를 뿌렸다. 세 번째는 대제사장이 안수를 하고 머리에다가 모든 백성들의 죄를 전부다 실어서 광야로 쫓아버렸다. 레위기 16절을 보면, *레위기 16:10, 10 아사셀을 위하여 제비 뽑은 염소는 산 채로 여호와 앞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속죄하고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지니라. -제가 40여 년 전에 신학을 하면서 머리에 모든 민족의 죄를 얹어놓고 음미하고 쫓겨나는데 내가 막 눈물이 났다. 그리고 주로 절벽에다 쫓아 내놓고 떨어져 죽도록 만든다. 지성소를 들어가기 위한 자기 희생과 죽음과 그것이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신앙의 깊이에 의하여 내 신앙 깊이가 있냐면 자기 죽음과 십자가를 위하여 순종이 내게 어느 정도 수준인가를 봐야 한다. 내가 이제 십자가를 져야 한다. 내가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한다. 그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리라.’ 라고 했을 때에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보면, *갈라디아서 5:24,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그러니까 저와 여러분의 지성소 신앙의 수준은 수많은 유혹과 수많은 온갖 것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억지로 못 박을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내가 얼마나 이것이 될 런지, 그래서 모든 지성소 신앙의 깊이는 자기희생과 수준에 의하여 영적 깊이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것은 여유가 없다. 고린도후서 12장 1저에 보면, *고린도후서 12:1, 1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더이상 인생으로 태어나서 영적인 깊이와 수준으로 말하자면 더 이상 논할 수가 없는 최고의 3층전에 올라간 것이다. 그런데 알 수 있는 과정에서 보면, 바울사도가 어떤 자가 3층 전에 올라갔다고 말한다. 더 이상 인생으로 태어나서 최고의 삼층 천에 올라갔다고 말한다. 자기희생과 자기 욕심을 못 박는 것이 나오는데 바울은 인정을 하지 않았다. 바울이 굶고 태장 맞고 판선 당하고 너무 바울은 힘들고 했어도 그 이후에 인생이 경험할 수 있는 3층천을 경험한 것이다. 우리도 그리 경험해야 한다. 저와 여러분에게 맡기신 십자가를 얼마나 능동 적을 지고 가느냐에 여기에 달려 있다. 자지 죽음으로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우리의 심령에 지성소가 열리기를 확신한다. 대부분의 경우 경험하지 못한 이유는 그가 십자가에 못 박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오늘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 앞에 지성소의 깊은 신앙의 수준을 위하여 제물 되는 축복이 있기를 바란다. 고린도후서 12장 둘째. 주님을 향한 신뢰와 사랑을 측정. -자기 죽음만 통과하면 되는가? 자기 십자가를 지는 자가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경향은 무엇인가? 주님을 향한 사랑이 더 깊어지는 것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신뢰와 사랑을 측정해야 한다. 이 예배를 드리고 나면 이전보다 더 주님을 사랑을 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더 신뢰하고 사랑할 수 있는가이다. 자기를 사랑한 것보다 주님을 더 사랑할 수 있느냐? 우리에게 큰 병이 걸리고 큰 우황이 있을 때, 그것은 너무 안타까운 일이다. 고통과 고난이 있을 때 그것은 고통과 고난을 낭비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쉽지 않지만 그것을 통하여 오히려 주님을 더 사랑하는 계기가 되면 그 고통과 사랑이 낭비되지 않는 것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제물 되어서 주니 앞에 내가 능동적으로 십자가에 못 박지만 이것을 통해 주님을 더 신뢰하고 사랑을 하여야 한다. 병 때문에 슬퍼하는 자도 있고 병 때문에 천국을 더 사모하는 사람이 있다. 큰 병이 있으면 평안과 불안을 반복하는 사람이 있고, 아니 내 생명을 하나님이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더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신앙의 깊이를 깨달으면 “네가 나를 이전보다 더 사랑하느냐?” 라고 하신다. 베드로 보고도 그러하셨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도 “네가 진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하셨다. 네가 정말 네 눈에 넣어도 아깝지 않은 아들ㅇ르 보고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신다. 그게 지성소 신앙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낭비되지 말고 주님을 더 신뢰하고 주님을 더 사랑하는 계기가 되기를 소망한다. 말씀을 정리하겠다. 오늘 날 지성소가 어디인가? 성전이다. 교회이다. 주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 지성소이다. 우리가 사모하는 이유는 주님의 임재가 있는 곳이다. 그러니까 여기에 은혜가 있는 것이다. 내 혼자 특새에 와서 어린양의 피로 내가 들어갑니다. 라고 주님을 사모합니다. 예배합니다. I enter the Holly!! 그런 찬송을 할 때에 함께 찬양을 할 때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지성소는 더 이상 물리적인 장소를 말하지 않는다. 직장, 가정에서도 하나님이 임재 하셨다면 그곳이 바로 지성소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적 예배와 다락방과 우리의 삶의 현장이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지성소가 되기를 바란다. 아침에 일어나면 먼저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그 침상이 거룩한 지성서이며 직장에서 전력투구하면서 하나님의 임재 있으면 못 산다고 영적으로 그냥 허리를 동이고 온 몸으로 주님 앞에 반응하면서 주님 나를 살려달라고 십자가에 못 박으면 그 순간 그 자리가 거룩한 지성소가 되는 것이다. 오늘 이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넘치기를 바란다. 우리 신앙이 성전 뜰인지, 성소인지, 지성소인지, 육신적인 그리스도인인지, 아니면 젖이나 먹는 신앙인지, 이제는 단단한 것을 먹는 신앙인지, 라군에 있는 자는 다 군으로, 다 군은 나군으로, 나군은 가군으로 들어 가야한다. 다 손을 펴고 ”그 어린양의 피로“ 찬양을 하자. ♧요약 어린 양의 피로 그 거룩한 지성소로 들어가는 은혜를 주심을 찬양한다. 주님의 보혈의 피로 지성소로가게 하신 주님을 경오하며 영광돌리며, 내가 성전 뜰 신앙이라면 성소에 올라가야 하며, 내가 지성소의 깊은 은혜를 깨달아서 나무의 높이가 뿌리에 의해서 결정되듯이 신앙의 성숙은 길이가 아니가 깊이에 있음을 믿고 얕은 물가에 있지 말고 깊이 있는 강수를 경험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나라는 망학 미래는 암울했던 에스겔에게 하나님께서 소망의 계시로 임재하신 것처럼 사방이 막혀서 낙심하는 나에게 주 보좌로부터, 성전으로부터, 임재의 물이 흘러나와서 참 회복과 치유가 경험되고 해결되기를 간절히 소원한다. 나의 육신적은 신앙과 고통으로 낭비되지 말고 깊은 지성소의 신앙이 되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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