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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2023년 6월 11일)
제목: "죽음의 신비(神祕)"
말씀: 고린도후서 5:1~10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대표기도: 김은석 부목사님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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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후서 5:1~10,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3 이렇게 입음은 우리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4 참으로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ㅡㅡㅡㅡㅡ

우리 찬양대와 함께 하나님의 위대하심, 하나님의 거룩하심, 사랑과 온유를 함께 찬양하기를 원합니다. 저희가 상암 집회를 한 지 한 주가 되었습니다. 제가 이번 상암 집회를 앞에 놓고 저희 교회는 영적으로는 2년 또 실제적으로 1년을 준비해 왔는데 우리가 준비하면서 마음에 확정한 것이 있어요. 그것이 뭐냐 하면, 이번 상암 집회가 남북통일과 특별히 한국교회의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재 부흥의 결정적인 시간이 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이제 집회 마치고 그냥 그걸로 끝나면 안 되고, 우리 교회부터 다시 한 번 재 부흥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겁니다.

재 부흥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예배의 부흥이 일어나야 되는 것이고, 또 하나 말씀에 부흥이 일어나면 되는 것이에요. 이제 지난주부터 성경 읽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꼭 이렇게 하죠. 기억나십니까? 금방 한 것도 잊어버렸어요. 그렇게 하는데 예배에 재 부흥이 일어나야 되는데 저는 지난 40여 년간 목회 생활을 통하여 내가 지금도 예배에 대한 감격과 은혜가 너무 크지만, 제가 정말 순전하고 순결하여 전력투구하며 예배드렸을 때, 나는 그때 어떤 자세였나, 그러면서 제가 한 10여 년 동안 예배를 시작하면서 항상 예배를 위해 드리는 말씀을 글을 따로 썼어요. 그래서 제가 글 쓴 처음 썼던 걸 제가 이번에 다시 한 번 보게 됐어요. 보면서 앞으로 1~2년 동안 우리 사랑의 교회가 온 성도들이 예배의 재 부흥을 위하여 좀 이렇게 정리를 해야 되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어떠세요? 좋습니다.!!! 설교하기 전에 한 1~2분간 꼭 말씀을 드리고 싶은데 핵심은 이것입니다. 첫 번째 여러분 예배는요 예배드리기 전에 결정되는 거예요. 아주 중요한 거예요. 성공적인 예배는 예배당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결정되는 것이에요.

그러면 예배당에 들어오기 전에 결정된다는 것은 어떤 뜻인가 하면 반드시 여러분 들어올 때마다 거룩한 기대감을 가지고 들어와야 됩니다. 반드시 매주 하나님 거룩한 기대감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 오늘 이 거룩한 기대감을 가지고 왔는 줄 주님은 아시는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요. 그러면 거룩한 기대감은 구약이나 신약이나 성도들을 쭉 보면요. 거룩한 기대감을 갖는 성도들에게 나타난 공통적인 현상에서 그것이 뭐냐 하면요 이것입니다. 하나님 거룩한 기대감을 가지고 왔다는 것은 모인다는 것은 오늘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모이는 것이에요. 오늘 하나님이 여러분들에게 개인적인 음성을 들려주시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오늘도 ‘잠시 세상에!~~ 내가 밑에서 보면 옆에서 보면서 기가 막혀요. 너무너무 찬송을 마칠 때, 또 찬송할 때, 찬송을 통하여도 들려주신 말씀이 있을 것이에요. 기도를 통하여, 들려 줄 말씀이 있을 것이고, 여러분의 헌신을 통하여,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 있을 것이고, 성도의 교제를 통하여, 주시는 말씀이 있을 거에요. 오늘 마치고 나가면서 우리 선교 컨퍼런스에다가 여러 가지 하시는 거, 글로벌 광장 나가시면서도 주님께서 내 개인적으로 주시는 음성이었을 것이에요. 정리합니다.

“예배는 예배 들어오기 전에 결정되는 것이다. 반드시 거룩한 기대감을 가지고 들어와야 한다. 거룩한 기대감의 핵심은 오늘도 주님이 나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려주실 것이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과 헌신과 교제를 통하여 오늘 이것이 이번 주 여러분들의 삶의 여정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저는 ‘죽음의 신비’에 대해서 오늘 좀 중요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31일 날 긴급 재난 경보 받으셨습니까? 아침 여섯시 몇 분쯤 됐는데 저는 그거 할 때 이렇게 상암 집회 종료 모임이 있어서 아침에 목사님들 모임이 있어서 아침에 차를 타고 나가는 길이었어요. 들고 왔더라고요. 그리고 경보사이렌도 들으셨어요? 어떤 생각이 드셨어요? 죽음과 같은 긴급함 저는 죽음과 같은 긴급함을 몇 번 맞이한 적이 있는데, 진짜 어려워지면요. 우리가 할 게 없어요. 사이렌은 울려도 갈 데도 없다니까 근데 마침 그날 우리가 일찍 출근한 우리 교회 직원들이 그 문자를 보고 우와!! ‘우리가 살려면 안아주심의 본당이 내려가야 되겠다.’ ‘여기를 내려와야 되겠다.’ 이제 이런 생각을 하고, 그렇게 막 그 마음을 가지고 했대요. 여러분 재난이 있고 위기를 당하면 사람에게 본당에 오면 사는 것입니다. 이 내용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것이에요. 그런 게 있었고 또 하나는 제가 빌리그레함 상암 집회 50주년 집회하면서, 이 집회가 우리가 애써서 수고하고 헌신하는데, ‘진리가 선포되는 집회’가 되게 해달라고 그래서 제가 개회사에서 할 때, “진리가 선포되는 이 50주년 기념대회를 허락하신 사랑하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랬잖아요. 그래서 진리가 뭐냐, 참 진리가 뭐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은 구원이 참 진리인 것이에요.

그러니까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그래서 이 죽음이라는 것에 관해서 먼저 우리가 갖고 있는 죽음의 문제를 해결해야 예수님께서 죽으신 그 은혜를 깨닫게 되는 것인데 이러한 오늘 이 참된 ‘죽음의 신비’에 대한 진리가 여러분들의 것으로 깨달아지기를 바랍니다.

첫 번째로는 죽으면 끝이다. 죽으면 다 끝난다, 죽음 이후에는 죽고 난 다음에 다 끝이다 아무것도 없다. 무다.
-그런 사람들은 죽으면 끝이니까 이 땅에 살면서 내 마음대로 사는 거예요.

두 번째로는 죽으면 수수깨끼다. 누구도 모른다.
죽어 그러니까 죽으면 수수깨끼이니까 염세주의자들처럼 살아가고 수수깨끼 같은 인생을 사는 거예요. 죽음에 대해서 세 가지 자세를 갖고 있어요. 사람들은 첫 번째 죽으면 끝이다. 죽으면 다 끝난다. 죽으면 모든 것 끝, 인생은 살아있는 동안이 전부 다 그러니까 뭐 살아있는 동안 내 마음대로 살고 내 하고 싶은 대로 살고 케스라 세라 왓 에버 윌비(What ever will be). 내 마음대로 사는 거야. 이래 살고 내가 하고 힘들어 살고 그냥 뭐 그냥 허상 하나 부르면서 죽으면 끝이 나니까 막 그냥 알코올이나 탐닉되고 이래 죽으면 끝이니까 그래서 사는 거예요.

세 번째로는 죽음 이후에 반드시 영원한 생명이 있다.
-이걸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에요. 죽음 이후에 영원한 세계가 있다고 믿는 사람은 사후 대책을 세우고 기백을 갖고 살게 되는 것이에요. 준비된 사람으로 믿음의 용사처럼 살 수가 있는 것이에요. 여러분 죽음에 관해서는 확실히 아는 거 있잖아요. 여러분들 제가 100% 아는 게 있어요. 그거 뭐냐면 우리는 100% 다 죽는다는 것이에요. 여기는 예외가 없어요. 우리 하나님은 무시간 대의 개념이 있어요. 우리 하나님께는 과거, 현재, 미래에 대한 개념 그 초월 점 초시간대의 개념 무시간대의 개념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두 100살 살고, 90살 살고, 사람 60살 살고, 다 50살, 이렇게 차이가 30~40년 차이가 있을지 모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그게 아무것도 아니에요. 하여튼 여러분과 저는 100% 죽습니다. 맞습니까? 그러면 그 이후에 죽음에 대한 대책이 뭐냐고요?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죽음 이후에 대책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이 땅에 살면서 아무리 똑똑해도 아무리 대단해도 죽음에 대한 대책이 없는 사람은 대책 없이 매일매일 사는 사람이에요. 죽음 이후에 영원한 세계에 대한 대책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이 땅에서 최선의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하루는 공자의 제자 자로가 여러분 잘 아시는 내용이죠? 공자에게 감히 스승님께 죽음에 대해 묻습니다. 죽음이 무엇입니까? 그랬더니 공자가 뭐라고 그랬어요? 야 이 땅에 삶도 모르는데, 죽으면 어찌 알겠느냐? 삶도 모르게 죽으면 어떻게 알겠느냐? 뭐 거기엔 또 나름 또 생각이 있겠지만 그러나 우리가 명확하게 얘기하면 여러분 공자 같이 사서삼경 뭐, 다 대단하지만 그런 거 대학, 춘추 이야기 다 있지만, 베드로는요 놀라운 얘기를 했어요. 저는 이 공자와 비교해서 베드로가 베드로서 1장 19절에 제가 지난 주간에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너무 제가 이게 너무 귀한 말씀이 여러분 공자처럼 베드로가 많이 공부한 것도 아니고, 공자처럼 베드로가 무슨 많은 제자를 거느린 것도 아니에요.

그는 초라한 어부 출신이지만 하나님께서 성령의 빛으로 그 마음을 깨닫게 하시고 생명의 진리에 대한 문을 열고 죽음에 대한 소망이 있는 사람에게 나타난 이 땅에 사람도 모르는데 죽으면 어떻게 알겠느냐는 공자와, 어부로서 살았지만 분명하게 확인된 베드로의 고백을 한번 들어보시오. 베드로서 1장 19절에 뭐라고 돼 있느냐 같이 읽죠.

*베드로후서 1:19,
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사람들은 다 깜깜해요. 아주 그냥 아주 그 마음이 죽음 이후에 그것에 대해서 모두가 다 깜깜한 암흑같이 아무것도 모르는 그런 빛이 없는 깨달음이 없는 통찰력이 없는 그런 깜깜함 속에 있는 거예요. 그런데 그 깜깜한 어둠 속에 여러분 등불, 한 빛을 봐요. 얼마나 놀랍습니까? 거기에 손전등이라도 비추고 거기에다가 성냥불을 하면 켜 봐요. 환하게 빛나는 것이죠. 그것뿐만 아니라 1장 19절 뒤에 뭐라고 나와 있는가? 이렇게 나와 있어요.

*베드로후서 1:19,
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날이 새어 새별이 너희 마음이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그랬어요. 죽음 이후의 세계뿐만 아니라 여러 우리 삶의 영적인 어떤 질문들이 있을 때에, 그 모든 어두움의 시간이 지나가고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오느니라. 우리가 깨닫는 것이 있는데 오늘 죽음 이후 신비도 여러분들이 말씀하는 이것이 여러분들에게 샛별 같은 은혜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샛별의 청명함과 샛별의 청초함과 새별의 청명함이 여러분들에게 주어지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공자도 뭘? 복을 깨달은 것을 첫 번째, 우리가 깨닫는 것이 무엇인가? 오늘 본문 1절을 보겠습니다.

I. 첫째 ‘아느니라.’

*고린도후서 5:1,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이 고린도후서 5장 1절 10절까지는 죽음이 의 신비에 대해서 너무나 영광스러운 말씀이에요. 그런데 1절에 이렇게 절 뒤에 이렇게 나와 있어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뭐라고 돼 있어요? 아느니라. 오늘 첫 번째 우리가 주제가 뭐냐 아는 것 우리는 아느니라. 공자도 모르는데 이태백도, 이황, 이율곡도 한국의 철학자들 대단한 사람들 다 모르는데, 우리는 오늘 이 시간 아느니라. 말씀에 대한 거룩한 기대감을 가지고 나온 성도들에게 알게 하시느니라. 뭘 알게 하시는가? 사랑하는 여러분 죽음이 왜 어려워요? 사람들의 죽음 얘기가 나오면 다 두려워하는 것이에요. 죽음은 두려움을 가져오는 거예요. 그 두려움을 가져오는 것 때문에 사람들이 극복이 안 되는 것이에요. 그래서 죽기 되면 죽기 직전 되면, 아무리 대단해도 다 두려워하고 다 힘들어하고, 몸도 육신도 아픈 거 있겠지만 영적으로 길이 없으까? 깜깜한 절벽이니까 꽉 막혀 있으니까 깜깜하니까 다 두려운 거예요.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아느니라 뭘 깨닫게 하시는가? 우리 성경 전체를 통해 아는 것이 있어요. 그건 뭐냐 보통 우리 성경이 성경에서 신약에서 말하는 성경은 대부분 구약 성경을 말씀하는 거예요. 구약 성경 전체를 딱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요약을 해가지고 깨닫게 하시는 게 뭐냐 하면, 히브리서의 말씀인데 히브리서 가운데 히브리서 2장 14절 15절에 기가 막힌 말씀이 있어요.

*히브리서 2:14~15,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모든 사람의 죽음을 두려워해요. 그런데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까? 예수 믿는 사람들은 피해 복음을 가진 사람들은 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까? 그 이유가 뭘까? 히브리서 2장 14절 이와 같이 나와 있어요. 같이 보겠습니다. 14절만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해 있습니다. 잠깐만요. 우리가 어떤 혈과 육에 속했죠? 우리 다 육신의 몸을 갖고 있죠? 그다음에 또요.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시면 중요합니다. 그가 누굽니까? 메시아 되신 예수님이 우리와 똑같은 육신의 몸을 소위 성육신을 입으셨어요. 인카네이션(incarnation) 하셨다.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시면 그 이유는 그다음 중요합니다.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그다음 또 15절에 같이 또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한 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십니다. 너무나 이걸 말씀을 처음 보는 분들은 조금 더 깨달아야 되겠지만, 성경을 아는 분들은 딱 마음에 아까 말씀한 대로 샛별같이 깨닫게 하신 은혜가 있는 것이에요. 무슨 말이냐? 이런 뜻이에요. 보십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가 마귀의 세력을 멸하러 오신 것입니다. 마귀가 하는 일은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고, 상처를 주고, 그다음 영원한 형벌을 갖게 하고, 우리를 고통 가운데서 온갖 더러움 속에 살게 하는 것이 마귀의 목표에요. 마귀는 한 생명이라도 더, 더 고통 가운데서 영원한 흑암 가운데로 갖고 가게 하는 것이 마귀의 목표에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선한 목자가 돼 가지고 이 땅에 오신 중요하면 마귀의 세력을, 이런 잘못된 마귀의 세력을 멸하시기 위하여, 고통과 저주와 더러움과 모욕과 수치와 부끄러움과 형벌 속에 있는 우리들을, 하나님 예수님께서는 오셔가지고 피의 복음을 통하여 용서의 강을 통하여 우리에게 은혜를 주심으로 말미암아 마귀의 세력을 멸(滅)하시기 위하여 그래서 2장 15절 다시 한 번 뭐라고 나와 있냐면 이렇게 나와 있어요.

*히브리서 2:15,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한 평생 매어 종노릇 하는 자들을 자유케 하시는 것이에요. 오늘 여러분과 저는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한 하나님의 신실한 종들이 된 것입니다. 이건 너무나 신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복음, 그 피의 복음을 믿는 사람들마다 용서의 강을 경험하게 되는 것이에요. 피의 복음을 깨닫는 사람들은 용서의 강, 은혜의 강을 경험하게 되면, 그 우리 뒤를 따라오는 사냥개와 늑대와 마귀 같은 못된 군사들이 우리가 은혜의 강을 지나는 동안에 우리의 냄새를 다 잊어버리고 우리를 추적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 우리의 죄가 용서받도록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나왔고 피의 복음 앞에 주님 우리의 죄가 주님의 피해 복음 때문에 용서받은 줄로 믿습니다. 이렇게 한 사람들인 거예요. 맞습니까? 이 세상에서 대단한 위인들이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제일 위인이 누굽니까? 뭐 세종대왕이다. 그다음에 이순신장군이다. 그래서 그 광화문에 두 분만 있는 거 아니에요? 지금 그런데 아무리 위인이라 할지라도 여러분들이 “이순신 장군님, 나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한 적 있습니까? “네, 세종대왕님 나의 모든 허물과 모든 연약함과 모든 죄를 싸그리 용서하여 주옵소서.” 말이 안 되죠 이 땅에서 오직 유일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문을 열고 성령님을 통하여 “주님, 내 죄의 문제는 예수님의 피의 복음 밖에는 나의 죄를 씻기는 예수의 피 밖에 없네요” 이걸 믿는 사람들은 마귀의 세력을 멸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가 되는 것이에요.

그리고 주님께서 그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여 첫 열매가 되겠다. 그 첫 열매라는 게 오늘 우리들을 위하여 첫 열매가 되신 것이 우리들을 위하여 복음이 되신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 주님은 죽음의 두려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셨고, 이 땅에 있는 육신의 죽음을 죽이신 것이에요. 죽음을 극복하게 하신 주님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이걸 깨닫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느니라.”

그 법이 뭐냐 하면 능력으로, 능력으로 해석할 수 생명의 성령의 능력이 오늘 제가 말씀드린 죽음을 돌파하는 마귀의 세례를 면하게 하시는, 정말 우리로 하여 선한 목자 되시는 이 생명의 성령의 능력이 마귀의 죄와 사망의 능력을 압도하였느니라. 극복케 하였느니라. 이걸 깨닫는 사람에게는 모든 성도들의 죽음은 이 땅은 사망이 왕 노릇하지만 성도에게 죽음은, 영광의 궁전에 입성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올라가는 불 병거가 되는 것이고, 독수리의 날개가 되는 것이고, 천국의 한 문에 들어가는 통로가 되는 것을 확실히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걸 깨닫고 난 다음에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면서 수많은 우수사례와 수많은 참 환난, 근심이 있다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이 땅에 살아가는 또한 남은 인생을 즐거워하느니라. 확실하게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 전체를 통하여 우리가 아는 것이다. 두 번째로 아는 것은 본문에 좀 더 자세히 나와 있는데 본문을 통하여 아는 것이 1절에 있는 내용입니다.

*고린도후서 5:1,
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여기 보니까 본문에서 장막집이라는 말 텐트라는 말이 두 번이나 나와요. 장막집이 무너지면 그다음에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짐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그러니까 두 가지가 대조가 되고 있는 것입니다. 땅에 있는 장막 집과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대조가 되는 것입니다. 하늘에 있는 땅에 있는 장막 집은 영어로 텐트인데 이것은 뭐 여러 해석도 있지만, 이거 땅에 있는 장막 집을 우리의 육신의 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저와 여러분 육신의 몸을 입고 있는 것이 그런데 이 육체의 몸의 특징은 무너지는 것입니다. 낡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이 땅에 있는 장막집이 무너지는 것을 절감하고 있어요. 육신의 장막집이 무너져 절감하고 있어요. 젊을 때 탄탄했던 장막집이 나이가 들수록 장막집의 지붕이 처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뭐냐 하면요 머리가 빠지는 것입니다. 봐요 말뚝이 느슨해지는 것입니다. 장막 집의 말뚝은 두 다리의 힘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장막 집 볼 때 못은 흔들 조금씩 흔들리게 되는 거예요. 갈수록 다시오. 지붕이 처지는 것은 머리가 빠진 것이고, 말뚝은 다리에 힘이 없는 것이고, 못이 흔드는 것은 이빨이 흔들리는 것이 예전 같지가 않다는 것이에요.

제가 최근에 10여 년 만에 만난 어떤 분이 있었어요. 그분을 제가 10여 년 보면서 아이고야 왜 이렇게 많이 늙으셨습니까? 라고 말은 하지 아니하고 속으로 만나 그리 얘기했어요. 그냥 깜짝 놀랐어요. 근데 그 순간 제가 아 내가 늙은 걸 네가 모르구나. 어떤 사람이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야, 요즘은 거울도 예전 같지 않네. 사실은 거울은 그대로인데 내가 달라진 것이죠. 내가 달라진 것이 땅에 있는 장막 집은 무너지고 낡아지는 것이에요. 이 땅에 지금 의약과 눈부신 진보가 있다 할지라도 아무리 있어도요. 우리는 땅에 있는 장막이 무너지고 다시 사망률 100%예요. 예외가 없어요. 텐트 무너지는 것을 우리가 아나니 장막집이 무너지는 것, 하나님 또 하나 더 우리가 아는 것은 더 중요한 것은 2절 하반 절 뒤에 보면,

*고린도후서 5:2,
2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이 내용은 어떤 장소적인 개념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부활의 몸을 확실히 입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에요. 고린도전서 15장에도 보면 뭐라고 나와 있느냐면, 여기에 대해서 이렇게 나와 있어요.

*고린도전서 15:51,
51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마지막 나팔이 불리는 그 시간에, 순식간에 우리 모두가 다 호연히 변화되리니 여기에 이제 뭐 이렇게 다른 신학적인 여러 내용들은 제가 다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예비 되어 있는 것이고, 우리가 재림의 그 순간 우리의 몸은 예수님처럼 부활의 몸으로 순식간에 변화될 줄로 믿습니다. 자, 그러면 이렇게 아는 사람에게 나타난 현상이 뭔가 이렇게 확실히 피의 복음과 마귀의 세력을 멸하시고 죽음의 두려움을 없애시고 장막 집과 영원한 집에 대한 한 주님의 몸을 입는 것을 깨닫고, 아는 사람이 나타에게 모든 분들에게 나타나는 어떤 실제적인 삶의 현장이 어떤 것인가? 6절이에요.

II. 우리가 담대하여.

*고린도후서 5:6,
6 그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으로 있을 때에는 주와 따로 있는 줄을 아노니.
-6절에 뭐라고 하냐면 이렇게 나와 있어요. 우리가 항상 뭐 때문에 어떻게 됐어요? 담대하여, 그러니까 앞으로 오늘 이후로 사라에게 모든 성도들은 담대해야 돼요. 제 말씀이 아니라 여러분과 저는 담대히 살아야 되는 것이에요. 여러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데, 눈에 보이는 게 없지. 우리는 이 땅에 살아가면서 죽음의 신비에 대해서 깨닫고 난 다음에 우리의 마음속에 간절한 기대감을 가지고 있어야 되는 것이 뭐냐 하면, 오늘 바울이 고백한 대로 담대하게 살아야 한다. 이 담대함이 우리 사랑의 교회의 특성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이 담대함이 앞으로 한국 교회 성도들이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의 특성이 되기를 바라는 것이에요. 담대한 용서가 되는 것이 담대한 주님의 용서가 되는 것이에요. 제가 이 담대함을 얘기할 때에 담대함은 용기를 냅시다. 그리고 입술을 꽉 다물고 파이팅 이게 아니고, 이 정도가 아니고, 영적 기백이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내면 속에서 명맥이 흐르고, 어떤 경우에도 상록수 신앙을 유지하면서 한결 같은 시종일관(始終一貫)을 갖는 것이 영적인 담대함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도 흔들림이 없는 거예요. 담대함을 가지고, 죽음 이후를 예비하고 주님이 예비하신 처소를 사모하게 되면, 이 땅에 있는 것들도 우선순위(優先順位)와 더 중요한 걸 딱!! 과감하게 정리할 수 있는 안목(眼目)도 생기는 것이고, 담대함, 저는 왜 하나님께서 다윗을 다윗도 실수가 많았는데 왜 그렇게 하나님은 다윗에게 “너는 내 마음에 합한 자다.” 무엇이? 다윗으로 하여금 너는 내 마음에 합한 자다. 다윗도 부족함도 많고 그러는데 왜 그랬을까?

나는 다윗이 가진 놀라운 통찰력 가운데 하나가 뭐냐 하면 “하나님 아버지 나는 왕궁에 삽니다. 나는 나름대로 궁에 삽니다. 나는 나름대로 대단한 거 다 경험했습니다.” 여러분 다윗처럼 지상에 정복 왕이 어디 있어요? 그런데 다윗이 뭐라고 얘기냐 합니까? “내가 왕국에서 거하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집에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이건 다윗의 대단한 고백이. 쉽게 말하면 “이 땅에서의 첫날보다도 천국에서의 한 날이 더 낫다.”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죽음 이후를 두려워하지 않아요. 죽음의 신비를 깨달은 사람들은요. 제가 좀 이런 용어를 써서 죄송한데 앞으로 문지기 신학이라고 그럴 거예요.

문지기 신학을 우리가 가져야 되는 것이에요.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은혜를 깨달은 사람들은 야 이 땅에서 왕국에 사는 것보다도 하나님 나라의 문지기로 있는 게 더 낫다. 어떤 장소적 개념을 뛰어넘어가지고 여러분들이 살아가는 이 땅의 삶에 담대함과 역동성, 하나님 나라의 용사로서 그래서 이런 담대함이 있으면 이 땅에 있는 것들을 너무 자고우면하지 아니하고 영적인 용사가 되어가지고 거룩한 홀로 서기가 가능하다 이 말이에요. 좀 누가 상처 주고 좀 이렇고 어렵고 이런 게 있어도 하나님 아버지 나는 하나님, 나라의 문지기 신앙을 가진 줄로 믿사오니, 이걸 통해서 거룩한 용사가 되게 하여 주시옵시고, 이걸 통해서 주님 내 사람들에게도 영향 받지 않고 사건이 되면 영향 받지 않고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내가 뭘 걱정합니까? 하나님 내가 믿음에 홀로서기 있게 하여 주시고 일마다 때마다 믿음 보고 하게 하여 주십시오. 믿음 보고 1점0, 믿음 보고 2점0, 믿음 보고 3.0을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여러분 우리 주위에 있는 가까운 사람도 떠나고, 가족도 떠나고, 육신의 장막도 약해지고 그럴 때마다 우리가 환경에 얽매여서 우울하고 힘들어하게 살 것인가? 아니면 다윗처럼 문지기 신앙을 가지고 용기 있는 홀로서기를 하면서 내 능력과 내 실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부어주시는 은혜를 갖고 빛을 받고 샛별을 경험하고 벌떡벌떡 일어서야 될 줄로 믿는 것이에요. 이걸 5절에서 보니까 성령으로 보증을 받았다.

*고린도후서 5:5,
5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우리에게 보증서를 다 쓰여 주니, 여기에 대해 성령께서 보증서를 쓰시고 도장을 찍어주시고.

*고린도후서 5:7,
7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로라.
그리고 7절에 보니까 무슨 일이 벌어지니까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행하지 않는 삶을 살게 한다. 소위 믿음 보고 하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실 것이다. 장막 집이 무너지고 영원한 집을 믿는 사람들은 죽음의 신비에 대해서 눈을 뜬 사람들은 순식간에 주님 오실 때, 우리가 홀연히 주님의 옷을 입기를 확신하는 사람들은 우리는 담대함을 평생 유지할 줄로 믿습니다. 담대함의 표현이 다윗처럼 문지기 신앙을 가지고 이 땅에서 수많은 하늘나라에 차루가 더 낫다는 것을 알고 이리 생각하고 그렇게 살 때 매일매일 삶이 하나님 앞에 믿음에 보고를 하고 살 수 있도록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8절에 담대함을 가지고,

*고린도후서 5:8,
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주님과 보냄 갈 것을 확신하고 현재는 육체의 몸을 떠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우리가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을 것이라는 담대함을 가지고 문지기 신학을 가지고 홀로 서기를 갖고 주님의 주님 앞에서를 우리가 기억하면서 이제 중요하면서 9절에,

*고린도후서 5:9,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주님을 기쁘시게, 믿음의 용사로, 문지기 신앙을 가지고 어제 우리 설교 컨퍼런스를 하면서 어제 그런 말씀 나눴잖아요? 남김없이, 후퇴 없이, 후회 없이, 살아가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런 담담함을 가진 사람의 나타난 특징은 9절에,
*고린도후서 5:9,
9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죽음의 신비를 깨닫는 사람들은 죽음을 해결하는 사람은 어떡하든지 이 땅에 살아있는 동안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사람 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러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어떤 것인가? 현장으로 나온 것이 10절이에요.

III. 담대함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하는 자는 심판대 앞에 설 것을 늘 준비하는 삶을 산다.

*고린도후서 5:10,
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가 다 심판대 앞에 섰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의 삶이라는 것은 심판대 앞에 설 것을 기대하고, 그 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선악 간에 우리가 상급을 받을 것이다. 심판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이런 뜻이에요. 우리는 지금 구원을 받느냐? 안 받느냐?는 심판을 우리가 끝난 사람들이에요. 피의 복음을 통하여 정리가 된 사람들이 줄을 믿습니다. 아까 우리가 용서해달라고 어떤 위인에게 말한 것이 아니라, 메시아에게 그리스도에게. 기름 부분 받은 자에게 우리가 말씀한 거예요. 우리가 기도한 것이 그래서 그 문제로 해결된 거예요. 이제 나타난 것이 우리에게는 뭐가 있냐, 상급 심판이 심판대 앞에 우리가 우리에게 받은 공적을 따라서, 선악 간에. 이거는 무슨 누가 이 땅에서 뭐 잘하면 축복받고 못하면 이런 개념이 아니에요. 이거는 이거 완전히 다른 차원이에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가지고 어떻게 살았느냐? 우리 우리의 삶을 쭉 이렇게 사는 걸 가지고 하나님 앞에 상급 심판을 받는 것이에요.

이걸 왜 이렇게 제가 좀 이렇게 오늘 말씀을 드리는가 하면 과거에 16세기에 캐톨릭이 너무나 그 당시에 캐톨릭이 너무나 부패를 하고 그다음에 이 소위 사람의 구원을 가지고 장난을 쳤어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구원은 예수님 피로 받는 것이에요. 맞습니까? 그런데 그 구원을 공로 주의로, 공로 주의로 우리가 행한 바에 따라서 구원을 받는다고 이런 식으로 표현을 해가지고 한 것을 마르틴루터가 너무 열 받아가지고 그건 아니다. 그러면서 그 캐돌릭의 공로주의와 이런 것들을 가지고 없는 성경에 연옥도 막 만들고, 그다음에 또 죽은 자를 위한 기도 막 이런 것도 만들고 막 그렇게 했어요. 그것이 싫어가지고 우리가 물을 버릴 때 그냥 와장창 버렸는데, 버린 것 중에 하나가 뭐냐면 선악 간에 심판받는다는 이 상급 심판에 대한 걸 버려버린 것이에요. 구원받은 자는 상급 심판을 잘 받을 수 있도록 은혜로 준비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에요. 이게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상급은 은혜 받은 자에게 나오는 자연스러운 행위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거 있잖아요. 시험 준비를 열심히 최선을 다하여 이렇게 한 사람은, 시험 볼 날이 두려워요?. 시험 볼 날을 막 기대해요? 저는 그런 거 한 번도 안 해봤습니다. 그런 분도 있을지 모르는데 정말 시험 준비를 최선을 다해서 잘하고 막 그렇게 하면 시험 볼 날을 기대하면서 막, 막 기대가 돼요. 그래요. 뭔가를 열심히 준비하면 그날이 와도 두렵지가 않는 것이죠.

그런데 이제 이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상급 심판, 이런 것들이 좀 늘 마음속에 다짐이 되고 확고하게 좀 뭔가 와 닿을 수 있는 뭐가 없을까? 그런 좀 현장을 보고 좀 도전 받고 그런 게 없을까? 그게 바로 양화진이에요. 아멘. 양과자 선교 사람들 묘에 가면 거기가 상급 심판과 살아온 삶의 선교 사람들의 히스토리가 다 들어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지금 올해도, 천오백 몇 십 명이 선교 나가잖아요? 국내 선교 750명, 단기 선교가 700명, 그 거의 1500명이나 해외 선교 700 넘게 나가는데, 그 나가기 전에 단기 선교 팀도 나가기 전에 야마지 묘소에 가가지고 서 있기 해도 좀 각오가 되는 것이에요. 나를 좀 추슬러지고, 나를 문지기 신앙으로, 나를 그리스도의 용사로, 믿음에 홀로 서기를 감당할 수 있도록 다짐하게 하는 곳이 양화진 묘역이에요. 거기 가면, 몇 분들 제가 좀 골라봤는데 거기에


“하나님께 영광”(Give God Glory)
- 이렇게 해가지고 윌리엄 베어드 2세 묘지에요.
-숭실 대학을 만들었던 윌리엄 베어드 선교 사람의 자녀들이 죽어갖고 계세요.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도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I would rather he buried in Korea the in Westminster Abbey.(헐버트)

“만일 내게 줄 수 있는 천 개의 생명이 있다면, 나는 조선에 다 바치리라.”(If had thousand lives to give, Korea should have them all)-(루비 캔드릭-Kendrick, Ruby R)

“뜻이 이루어지이다”(Thy Will be Done).(에이커 홈)
-저런 내용들을 보면 우리가 마음에 숙연해지잖아요. 근데 양화진에 가서 양화진에만 봐야 되나 저 무슨 길이 없나? 근데 우리가 몇 년 동안 준비를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의 동산을 주신 줄로 믿습니다. 저는 이 사랑의 동사를 위하여 기도 저희 메모얼 파크인데 양평에 아주 참 괜찮은 지역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어요. 제가 그걸 이거 도대체 하나를 우리에게 왜 주시나? 오목사, 앞으로 양평 사랑의 동산(사랑 메모리얼 파크)는 제2의 양화진 묘가 돼야 하는 것이에요. 양화진은 풀타임 선교사들이 거기 가서 살았다면 여기에 양평에 있는 사랑의 동산은 사랑의 교회, 제자 훈련 목회 철학을 가지고 한 3년 동안 보냄 받은 소명자로서 온전한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평생에 달려갈 길을 달리는 그런 사람들의 삶의 현장이 돼야만 하는 것이야, 에요. 라틴어로 히스토리아 미션 히스토리, ‘선교 적 삶을 살았던 곳이 되어야만 하는 것이야.’ 그런 깨달음을 주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그 양평 ‘사랑의 동산’에 대해서 ★사랑의 동산은 죽은 자의 고귀한 삶을 통하여 산 자의 영혼을 깨우치는 장소가 될 것이다. 이런 깨달으셨어요. 죽은 자의 고귀한 삶을 통하여 산자의 영혼을 깨우는 장소가 될 것이다. 이걸 하면서 제가 깨달은 몇 가지 진리가 있는데 여러분과 저는 태어난 곳은 다 달라요. 어떤 사람은 지방에 태어나고, 어떤 사람은 서울 태어나고, 도서 팔도에 태어나고, 심지어 우리 교회 교인들 가운데 북한에서 태어난 우리 북사선 식구들이 있어요. 북한 사랑의 선교회 어떤 사람은 또 해외에서 태어난 분들도 있어요. 태어난 고향은 다 달라요. 그런데 돌아갈 본향은 같아요. 그래서 제가 태어난 고향은 다를지 모르지만 돌아갈 보향은 같다. 나와야 되는데 시작. “하나님의 자녀들은 고향은 다르지만 본향은 동일하다.”

그래서 성경은 참 재미있어요. 태어난 생일보다도 장례식을 훨씬 더 많이 언급하고 있어요. 오죽하면장례식 가는 자가 더 지혜로운 자다. 돌아갈 본향에 대해서 깨달음이 있으니까. 성경의 생일은 창세기 4장의 바로의 생일과 또 복음서에 보면 헤롯의 생일 잠깐 언급하고, 나머지는 다 장례식이에요. 그래서 성경은 묻히는 장소가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지금도 태어난 고향보다도 죽고 묻히는 장례 장소가 중요한 것이에요. 제 얘기가 아니고 아브라함이 175세를 살면서 후손들에게 꼭 필요한 유산을 남겨 레가스를 남겼어요. 그 물질적인 것이 영적 유산의 표현으로서 뭘 남겨냐 하면 막벨라굴을 사가지고, 거기에 자기도 묻히고, 아내도 묻히고, 이삭도 묻히고, 야곱도 묻히게 했어요. 3대가 다 같이 묻혔어요. 여기는 너무 성령이 주신 음성이 있는 것이에요. 여러분들이나 제가 다시 한 번 태어난 고향은 달라도 돌아갈 본향은 같아야 되는 것이야. 그 3-4대가 같이 묻힐 때 더 은혜가 있는 곳이에요. 그래서 ‘사랑의 동산’이 돌아갈 본향의 하나의 예표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 선대들의 믿음의 순례를 보고 후대들이 이 땅에서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정리를 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을 먼 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이 나와 상관이 없는 일로 여기는 것입니다. 그럴 때마다, 이 사랑의 동산을 볼 때마다 내가 주님 앞에 설 때 부끄럽지 않아야 되지 않겠는가? 그걸 결심하고 도전받는 그런 장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우리는 아픔을 경험하고 사랑하는 가족이 떠날 때 눈물이 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문지기 신앙을 가지고, 믿음에 홀로서기를 하고 상급을 바라보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면 우리는 죽음조차도 담담하게, 대담하게, 담대하게 맞이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선교 적 삶이여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삶이라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귀한 은혜가 여러분들에게 전달되어 피차사로 격려하고 서로 축복하는 시간되기를 축원합니다.

♣요약
주님은 죽음조차 극복하시고 마귀의 세력을 멸하여 주시려고, 우리 모두에게 죽음의 두려움을 해결해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으니 감사와 영광을 돌려야 한다. 우리가 몸이 약해지고 육신의 장막 집이 무너지는 것을 절감하게 되는 시점에, 우리의 죽음은 영원한 처소인 하나님 나라의 영광의 궁전에 들어가는 영광의 문인 줄로 믿고,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함으로 승리해야 한다. 문지기의 신앙을 가지고, 담대함을 가지고 하나님 나라의 용사가 되어서 이 시대에 믿음 보고를 하고, 기쁨으로 심판대 앞을 준비하는 하나님의 귀한 종들로 살아가야 한다. 그리하여 예비하여 주신 ‘사랑의 동산’이 영혼 구원의 플랫폼이 되기를 간구하며, 제2의 양화진 묘지가 되기를 소망해야 한다.
-바울의 주된 관심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장차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입혀주시는 신령한 옷을 간절히 사모하고, 육체 가운데 사는 현재의 삶보다, 죽어서 육체를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삶을 더 소원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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