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주일예배(주후 2023년 6월 18일)
제목: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
말씀: 요한복음 14:1-6
찬양인도: 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영광찬양대
대표기도: 백승준 부목사님(1부)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1부)

1.●설교자: 마크 영 총장(미국 덴버신학교 총장-초빙)-1부예배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
(통역 정성욱 목사님-미국 덴버신학교 교수-초빙)
2.○설교자: 정성욱 목사님미국 덴버신학교 교수-초빙)-4부예배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
말씀: 갈라디아서 2:20, 5:24, 6:14
--------------------------

*요한복음 14:1-6,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3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2:20, 5:24, 6:14,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5:24,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라디아서 6:14,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

 
1.▶●설교자: 마크 영 총장(미국 덴버신학교 총장-초빙)-1부 예배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
(통역 정성욱 목사님-미국 덴버신학교 교수-초빙)
 
미국 덴버 신학교 총장이신 마크 영 목사님께서 길가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라는 제목으로 주님 말씀을 전해주시겠습니다. 통역으로 덴버 신학교 교수님이신 정성욱 목사님께서 섬겨주시겠습니다.
 
-네 예수님의 이름으로 덴버 신학교 이사회와 또 우리 교수님들의 안부 인사를 여러분들에게 전해 드립니다. 우리는 여러분들의 신앙과 또 여러분들이 선교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헌신과 또 주님에 대한 깊은 사랑에 대해서 잘 듣고 있습니다. 제 아버지께서 92세가 되셨는데, 여러분에게 안부 인사를 전해 오셨습니다. 1951년 우리 6.25 전쟁 때 제 아버님께서 미군으로 참전하셨습니다. 사실 저희 아버님이 전쟁 통에 오셔서 참 많은 고생을 하셨는데, 한국전쟁 동안에 한국인들이 보여준 그 결단력과 또 환대와 또 그들의 참 섬김과 봉사 이런 것들을 굉장히 기억하고 계십니다.
 
오늘 아침 여러분과 함께 우리 요한복음 14장을 가지고 말씀을 나누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오늘 무엇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의 모든 생각과 우리의 모든 주의를 집중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4장을 다루기 전에 우리 13장에 나오는 대로 예수님의 그 마지막 만찬 그때가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의 장면 그 장면은 우리가 다 알고 있듯이 요한복음 13장에 자세하게 나와 바로 그날 6월 절 식사를 그래서 만찬을 함께 기념하기 위해서 모였던 것이죠. 사실 6월 절 식사는 우리 제자들이 오랫동안 또 여러 번 경험했던 여러분 알다시피 바로 오늘 이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하는 유월절 식사는 정말 그들에게 아주 유일한 경험이었습니다. 여러분이 기억하실지 주님께서 그날 아침, 그날 밤에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으시고 그다음에 수건을 동이신 다음에 대야에 물을 뜨셔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바로 이것은 주님께서 사실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여러 번 했던 것이 아니고 그날 처음 하셨던 것이죠. 바로 주님께서 그들의 발을 시키실 때 그것은 그들의 주의를 끈 것뿐만 아니라 그들의 마음을 주님께서 사로잡으셨습니다. 그러고는 주님께서는 제자들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어떤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내에게 이르노니 너희들 중에 하나가 나를 달리라. 바로 거기에 모든 것이 변화되었습니다. 그 방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제자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기 때문에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잘 알듯이 이 가른 유다에게 사탄이 들어가고, 그는 그 예수님을 배반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떠나가고 바로 그때가 밤이었다고 예수님은 제자들이 듣기 싫어했던 이야기를 하게 되었죠. 뭐냐 하면은 내가 오늘 너희들과 함께 잠시 있겠지만 그다음에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다시 올 수 없을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 지난 3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여러 도시를 다니고 그래서 함께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했는데, 이제는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 제자들이 함께 갈 수 없다는 말을 듣게 된 것이죠.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이제 올 수가 없다.”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은 3년을 주님과 함께 있었고, 또 주님과 계속해서 있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지금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따라올 수가 없다.’고 말씀하고 계시니, 이것은 그들의 기대와는 다른 말씀이었기 때문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이렇게 대답을 합니다.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라가겠습니다. 제가 왜 주님을 따라갈 수 없습니까? 저는 주님을 위해서 제 목숨이라도 버리겠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죠. 네가 나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겠느냐? 그러나 오늘 너는 세 번 나를 부인할 것이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날 밤에 여러분들이 12명의 제자들 중에 한 사람이었다고 한번 상상을 해 보십시오. 뒤에 있었어. 바로 여러분 12명의 제자들 중에서 한 사람이 예수님을 배반할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여러분 가운데 안전감, 안전에 대한 그 감각이 무너져 버렸을 것입니다. 미래는 불안해질 것이고 예수님은 어딘가로 가신다고 하는데 우리가 그 예수님을 따라갈 수 없다면 그들에게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같이 그렇게 신실하게 예수님을 따랐던 그 제자가 결국 세 번을 예수님을 부인하겠다고 하신 주의 말씀을 듣고 얼마나 제자들이 마음이 묻어졌겠습니다. 그들의 안전감, 그들의 확실성, 그리고 그들이 갖고 있던 희망과 소망은 완전히 철저하게 무너져 버렸습니다. 우리 14장 1절로 한번 가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4:1,
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한복음 13장 21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본인도 예수님 자신도 마음이 괴로웠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21,
2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심령이 괴로워 증언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 하시니.
-우리가 잘 알 것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은 더 괴롭게,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그 고난을 생각하면서 괴로운 밤을 보내셨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었던 불안감은 그들의 안정감이 상실되고 그들의 확실성이 무너지고 그들의 미래에 대한 소망이 흔들리는 것, 그것 이상으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쳤던 예수님의 그 정체성, 예수님이 누구이신가에 대한 그 불확실성이 커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안정감을 가지고 확실성을 가지고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바로 너희들은 믿음을 가질 때, 나에 대한 믿음을 가질 때, 너희들이 앞으로 너희들에게 닥칠 미래를 용기 있게 맞이할 수 있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14:2절에 보니까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요한복음 14:2,
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이르렀으리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내 아버지 집’이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과거에도 몇 차례 사용하셨던 표현입니다. 요한복음 2장 16절에 보면 예수님은 성전을, 그 당시에 그 성전을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요한복음 2:16,
16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 하시니.
-이 아버지의 집은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하는데, 이 하나님의 임재는 하나님이 계신 천국을 의미할 수가 있습니다. 결국 ‘내 아버지의 집’이라고 하는 이 표현의 가장 본질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임재 앞에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있다.’ 라는 의미입니다. 아버지의 집에 있다는 것은 아버지의 임재 가운데 있다는 것이죠. 그래서 오늘 이 시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내가 먼저 너희들 먼저 아버지의 집으로, 아버지의 인재 가운데 가서 너희들을 위하여 너희들의 거처를 준비하시겠다는 것이 분명한 것은 예수님이 먼저 가셔서, 예수님이 먼저 가셔서 그들을 위하여 그들이 거처할 곳을 준비하시고, 다시 오셔서 제자들을 데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인재로 나아가게 하시겠다는 것이 예수님은 그들을 지금 포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이 잠시 그들을 떠나지만은 다시 돌아올 것이라고 주님은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어떻게 예수님이 제자들의 거처를 준비하고 제자들이 예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갈 수 있도록 했습니까? 그것은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 가능했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만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갈 수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그래서 제자들에게 너희 내가 가야 하는 ‘그 길을 너희는 따라올 수 없다.’ 고 하신 것은 바로 예수님만이 십자가를 지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완전하신 아들이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희생만이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께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인 줄로 우리는 믿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먼저 가셔서 제자들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서 거처를 준비하실 수 있는 유일하신 분이신 것입니다. 14장 4절에 보니까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라고 주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4:4,
4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예수님은 오늘 밤만 아니라 그 이전에 여러 차례 주님께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심으로 먼저 하나님께로 가실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한 바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그 말씀을 제자들이 어떻게 이해할 수 있었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정치적인 의미로 이루어질 줄로 믿었는데, 예수님은 자신이 고난의 길을 가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그들이 어떻게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요?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 우리가 따랐던 사람, 우리가 정말 존경했던 그 사람이 우리를 떠날 뿐만 아니라 그분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겠다고,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실 때 제자들의 마음, 우리들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요한복음 14장 5절에 보니까,
 
*요한복음 14:5,
5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사실 도마는 제가 가장 좋아하는 제자들 중에 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도마에 대해서 아는 것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요한복음 14장에 짧은 얘기가 나오고, 11장에 짧은 얘기가 나오고, 나중에 도마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이야기가 나오지만, 그 외에는 도마에 대한 정보를 우리가 많이 얻지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도마에 대해서 오늘 이 본문을 통해서 무언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그는 분명하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분명하게 알고 싶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구체적으로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죠. 그는 정말 주님 앞에서 주님께서 원하시는 뜻이 무엇인지, 주님이 무엇을 우리에게 의미하고 계신지를 분명히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도마는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에, 또 현실적으로 그의 의심을 풀지 않고는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바로 현실주의자인 도마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 가장 심각한 문제는 믿음이 연약할 수밖에 없다는 문제였습니다. 예수님 우리에게 예수님이 가시는 곳이 어디인지 알려주시지 않고도 어떻게 우리가 예수님을 지금 따라갈 수 있고 어떻게 예수님을 끝까지 믿을 수가 있습니까? 의심을 가지고 예수님께 묻는 도마에게 예수님은 가장 분명하고, 가장 확실하고, 가장 구체적인 방식으로 대답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도마야 네가 가는 길, 네가 가야 할 길을 알고 싶으냐? 바로 내가 길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내가 바로 여기에 있다.”라고 말씀하신 것이죠. “도마야 넌 정말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서 알고 싶으냐?” “하나님의 임재가 바로 나고 바로 나는 너 앞에 있다.”라고 말씀하는 것이죠. 그렇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매우 복잡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습니다. We seek a sense of security.
 
우리는 안전감을 추구합니다. 우리는 확실성을 추구하고 우리는 희망과 소망을 추구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안전감을 추구하고 확실성을 추구하고 희망을 찾기 위해서 여러 곳을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내가 길이오 진리여 생명이다.”라는 말씀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 여러분 우리 주에 있는 많은 이 세상의 사람들은 예수님만이 줄 수 있는 그것들을 지금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전해야 될 메시지를 혼란스럽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 이라고 말씀하실 때 바로 예수님은 예수님 자신이 생명이요 진리이기 때문에 우리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진리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1장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은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는 가장 완전하고 완벽한 하나님 아버지의 계시입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예수님과 헤어져서 예수님과 떨어져서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생명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은 생명이었고, 예수님의 말씀 그 생명은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뭐라고 말씀했습니까? “내가 나는 부활이오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분이,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을 보존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시력을 주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우리에게 건강을 주시고 우리의 모든 것, 우리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이신 줄로 믿습니다. 요한일서 5장에서 요한은 다시 한 번 “예수님은 참되신 하나님이시고 영원한 생명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 말씀으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마무리 짓고 있습니다.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말씀의 배타성, 이 말씀의 배타성은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하기 때문에 절대로 이 배타성을 약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말씀하실 때 여러분들에게 무슨 수수께끼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금 바로 도마가 물었던 그 질문에 대해서 답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은 다른 제자들이 듣고 싶었던, 들어야만 했던 이야기를 지금 예수님께서 하고 바로 그것은 바로 저와 여러분들이 꼭 들어야 할, 반드시 들어야 할 메시지입니다.
 
바로 이것은 여러분들이 들어야만 하는 하나님의 메시지, 그것은 오늘 바로 이 세상이 반드시 들어야만 하는 하나 있는 메시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바로 이 예수님의 자기주장이 우리들의 정체성을 결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이 참되신 길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확신한다면 우리는 절대로 기를 이룰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인 것이 분명하다면 우리는 또 다른 길을 찾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길이십니다. 만약 예수님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라면 우리는 모든 다른 사람들, 우리 옆에 있는 모든 다른 사람들을 그 진리와 그 생명과 그 길의 관점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관계없이 진리를 찾고, 길을 찾고, 생명을 찾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슬퍼하고 그들에게 다가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해 주어야 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에게 질문을 하나 드립니다. 여러분이 도시 중앙에 서서 여러분이 가는 길, 가야 될 길을 알고 있을 때, 누군가가 와가지고 길을 묻는다면 여러분은 그 사람에게 뭐라고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네, 저는 그 길을 압니다.’ ‘그럼 저에게 그 길을 가르쳐주시겠어요?’ 라고 물었을 때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렇게 얘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당신이 어디로 가든지 나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알아서 가십시오. 내 일에 참견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아마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러분이 정말 길을 안다면, 여러분들이 가고자 하는 그 길을 그 길을 어떤 사람이 찾고 있고 묻고 있다면 그리고 그 길을 나에게 가르쳐달라고 요청한다면 그러면 여러분 당연히 그 사람에게 여러분이 그 길을 알려 주실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길을 모른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죠. 그 부분을 모르는데 어떻게 질문을 할 수가 있겠습니까? 저는 여러 군데를 여행을 하다 보니까, 길을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제가 길을 잃고 방황할 때, 사람들은 제가 길을 잃었다는 것을 금방 알아챕니다. 그래서 도시에 서가지고 중앙에 서서 어디로 가야 될지 어디가 길인지 당황하고 있을 때, 그리고 제 얼굴을 보니까 벌써 제 인상을 보니까 길을 잃어버리고 방황하고 있는 것을 봤을 때, 어떤 친절한 사람이 다가와서 좀 도와드릴까요? 제가 길을 찾는 걸 도와드릴까요? 라고 묻습니다. 그것은 얼마나 놀라운 선물입니까?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살펴보십시오.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 길을 찾지 못해서 헤매고 있는 사람들을 한번 바라보십시오. 그들에게 내가 그 길을 가르쳐주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특권입니까? 바로 초대 교회가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질 때 그것은 길이라고, 그 길이라고 알려주었던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사랑의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제가 속한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세상 사람들을 위해서, 제가 드리는 유일한 기도는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것을 알게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의 유일한 소원입니다.
 
♣요약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당신이 누구신지를 계시해 주셨으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고백하며 믿고 감사해야 한다. 세상의 근심과 마음이 흔들릴 때, 유일한 길이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하여 주님이 임재하시는 아버지의 집으로 들어가길 소망하며, 인생의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길과 진리와 생명을 증거 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확실한 안전과 희망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복음의 진수를 깨닫기를 소원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신 것, 즉 우리는 하나님을 잊어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사 난관을 극복하도록 도우시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연약해질 때 불안과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목자되신 그리스도를 확고히 믿고 따라가야 하며 우리와 영원히 함께하실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늘에 있는 영원한 처소, 그 처소는 땅에 있지 않으며 사람의 손으로 지어지지 않은 신령한 집이다. 이 처소는 성도의 헌신을 재료로 하여 계속 지어지고 있다. 우리는 불타 없어지는 나무, 풀, 짚으로 집을 짓는 어리석은 자가 아니라 금, 은, 보석으로 짓는 지혜로운 건축가가 되어야 하겠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있는 처소는 지상의 비좁고 한정된 것과는 달리 온 인류를 수용하고도 남을 정도로 무한하고 충분한 것이다.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님 길은 어느 목적지에 이르는 과정이나 통로를 뜻한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께로 이르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리고 진리는 변치 않는 것을 뜻한다. 주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 또한 여기서 생명은 영생을 뜻한다. 예수님만이 생명을 주신다.











==============================================================================================


 
2.▶○설교자: 정성욱 목사님미국 덴버신학교 교수-초빙)-4부예배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힌 것”
말씀: 갈라디아서 2:20, 5:24, 6:14,
 
*갈라디아서 2:20, 5:24, 6:14,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갈라디아서 5:24,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라디아서 6:14,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

-할렐루야! 오늘 이 오후 시간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자리에 나오신 모든 분들에게 하늘의 신령한 기쁨, 평강 또 축복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옆에 있는 분들 한번 인사합시다. 오늘 참 잘 오셨습니다. 우리 기독교 신앙 저와 여러분이 고백하고 믿는 기독교 신앙을 다른 종교들과 비교했을 때 우리 기독교의 유일 절대성 오늘 우리 1, 2, 3부 마르크 영, 덴버신학교 총장님도 말씀하셨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모든 다른 종교들과 우리 기독교를 구별해 주는 기독교가 모든 다른 종교들로부터 구별되는 절대적인 특성 특정이 있다면,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라는 거죠.
 
여러분 믿으십니까? 기독교라는 게 영어로 크리시 애너디라고 할 때, 이게 바로 ‘크라이스트’라는 단어에서 나왔잖아요? 그죠? 그래서 기독교는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다. 크리시 애너디 이즈 어바웃 크라이스트-Chrissy Enerdy Is About Christ), 기독교는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고 기독교는 예수님에 대한 것이다. 너무나 분명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관련된 예수님과 관련된 여러 가지 사실들이 있고 또 예수님과 관련된 여러 가지 말씀들이 있고 예수님과 관련된 여러 가지 일들이 있는데 예수님과 관련된 일과 사건들 중에서 그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무엇이냐? 그게 뭘까요? 십자가죠. 한번 해봅시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중심이다. 그 믿습니까? 십자가가 빠진 기독교, 십자가가 빠진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가 빠진 하나님, 십자가가 빠진 성경? 있을 수가 없는 일이죠.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 성육신 그분의 삶 그분의 죽으심, 그분의 부활 그분의 하늘로의 승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시고 장차 재림하시는 모든 사건, 예수님이 영혼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고 그 예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하늘 보좌에 올라가셨다가 이제 장차 재림하시는데 예수님과 관련된 모든 사건의 중심 그것은 십자가다. 라는 겁니다. 아멘. 이제 중요한 건 뭐냐 하면 우리가 이제 십자가를 생각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할 때, 우리 많은 분들이 많은 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은 예수님뿐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거죠. 굉장히 중요한 말씀이에요. 잘 들으셔야 돼요.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예수님뿐이다.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 생각이 틀린 건 아니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사실이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셔서 피 흘리시고 생명을 주심으로 저와 여러분이 영원한 구원을 얻고, 영원한 죄 사함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고, 영원히 하나님의 아들과 딸이 되고, 영원한 천국에서 영원히 주와 함께 살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이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모든 구원의 은혜와 은총이 우리들에게 오게 되었다.
 
그런데 오늘 여러분 갈라디아서에서 오늘 세 가지 구절들을 여러분들에게 드렸던 것처럼 분명히 우리가 볼 때, 2천 년 전에 십자가에 달리신 분,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신데, 그 한 분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른 많은 것들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번 해보세요. 다른 많은 것들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 뭐가 못 바뀌었을까요? 일단 우리가 큰 틀에서 큰 틀에서 볼 때 십자가에 못 박혔던 원 퍼슨(One person) 한 사람, 한 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불변의 사실이죠.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거기서 피 흘리시고, 살을 찢으시고 생명을 주실 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힌 것들이 여러 가지가 있다. 큰 틀에서 그게 뭐냐 옛 질서에 속한 것들, 옛 창조에 속한 것들이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갈라디아 2장 20절 우리 너무나 잘 아는 구절인데 한번 다 같이 한번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갈라디아 2:20,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 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아마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마이 페이버릿 벌스(my favorite verse)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로 이렇게 정해가지고 암송하고, 항상 묵상하는 분들이 여기 많으실 줄로 아는데, 갈라디아서 2장 2절 너무나 귀한 말씀인데 이 갈라디 2장 20절에 뭐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내가 한번 우리 손을 가슴에 한번 얹어봅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라면 너무너무 중요한 구절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내가라고 할 때 이 ‘내가’라는 것은 뭘 의미하냐 하면은 ‘옛 질서’에 속한 나라는 거예요. 옛 질서 또 ‘사망의 질서’에 속했던 나, 사망의 질서의 노예가 되었던 나, 옛 질서에 사로잡혔던 나, 다른 말로 하면 나의 ‘옛 자’라고 할 수 있겠죠? ‘옛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예수님을 알기 전에 나의 옛 자, 옛 질서에 지배되고 옛 질서에 노예가 되고 옛 질서에 의해서 모든 것이 결정되었던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줄로 믿습니다. 이 옛 자아라는 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아예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자, 하나님이 있다는 것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고 하도다.
어리석은 자아죠? 하나님이 없다고 했던 자, 그리고 하나님이 설령 있다 할지라도 그 하나님은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무시하던 자,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여 나 자신을 높여서 나를 하나님으로 섬기고 나를 하나님으로 대우하라고 주장하고, 요구했던 그 자, 그 내가 스스로 주인 되어, 스스로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 스스로 왕이 되고, 임금이 되었던 스스로 만왕의 왕이요, 만주에 주라고 자기 자신을 높였던 그 자, 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아가 처리되었다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의 자아가 처리된 이 사실이 그냥 역사적인 사실로, 객관적인 사실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되고 예수님의 십자가에 내가 못 박혔다고 할 때, 그 못 박힌 그것이 내게 적용되기 위해서는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어야 한다. 라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에 된 삶을 회개하고 예수님 앞에 나와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인정하고, 나의 구조로 인정할 때에, 그래서 예수님 앞에 우리의 신앙 고백을 올려드릴 때에, 우리의 옛 자아는 처리되고 우리의 옛 질서에 종속되었던 우리의 자아는 십자가에 못 박히고, 이제 우리는 새로운 질서에 속한, 새로운 창조에 속한, 생명의 질서에 속한, 새로운 자아를 가지게 되었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옛 사람은 죽고, 나의 옛 사람은 죽고, 이제 나는 새 사람으로 거듭나고 중생했다.
한 번 해보세요. “나는 새 사람이 되었다.” 우리 옆에 있는 분들 보시면서 서로 나눕니다. “당신은 이제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우리의 옛 질서에 속했던 우리의 자아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버림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새로운 정체성을 얻게 되고, 새로운 삶의 특권을 얻게 되고, 새로운 삶의 사명을 받게 되었다. 라 겁니다. 나의 옛 사람이 죽고 내가 새로운 질서에 속한, 새로운 사람, 새로운 생명, 새로운 나라로 거듭나고 중생함으로 말미암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딸들이 된 줄로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신부가 된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고, 하나님의 딸들이 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제 새로운 정체성을 갖게 된 거예요.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그러셨어요.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 된 거예요. 우리도 우리 가운데 성령이 내주하시는 성전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예수님과 하나가 된, 영적으로 연합하여 하나가 된, 새로운 피조물 새 사람,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라는 거예요. 새로운 정체성을 얻었어요. 또 새로운 특권을 얻었어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말할 수 없는 행복을 누리고, 말할 수 없는 평안을 누리고, 날마다 항상 기뻐하며 살 수 있게 되었고, 거룩하신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거룩한 삶의 열매를 맺는 놀라운 특권의 삶을 누리게 된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질서에 속한 새로운 사람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우리가 다시 거듭나고 중생했을 때, 우리에게는 새로운 정체성과 새로운 특권만 주어진 게 아니라 새로운 사명도 주어졌어요.
 
그게 뭘까요? 저와 여러분이 새로운 질서 속에 새로운 질서에 속한 자로, 새 창조의 질서에 속한 자로 거듭나고 중생함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는 새로운 사명이 주어졌는데 그것이 바로 가장 중요한 것이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아멘! 하세요. 한 번 합시다.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옆에 있는 분들 한번 다시 보십니다. 우리 함께 서로 사랑합시다. 서로 사랑하는 삶의 사명을 주시고 그다음에 마태복음 28장에서 뭐라 그러셨어요?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에게 분반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지키도록 가르쳐라. 원문도 그렇게 돼 있죠? 결국 제자 삼는 사명을 우리에게 주신 줄로 믿습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사명이 주어졌어요. 그것은 두 가지에요. 크게 봐서
 
하나는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심지어 멋까지 사랑하느냐 원수까지도 사랑하라. 너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너를 핍박하고 욕하는 자를 향하여 되돌려 욕하지 말고 그들을 축복하고, 그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적극적으로 사랑하는 수준까지 나아가라. 서로 사랑을 하셨고 그다음에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아서,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증거하고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아멘 아시죠?
-우리의 옛 질서에 속했던 우리가 죽고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 질서에 생명의 질서에 새 창조의 질서에 속한 자들로 우리가 거듭나고 중생하므로, 우리는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특권, 새로운 사명을 받은 자가 된 줄로 믿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두 번째는 십자가에 못 박힌 게 뭐냐 하면, 갈라디아서 5장 24절이에요.
갈라디아서 5:24,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니라.
-한번 다 같이 읽어봅시다. 내가 못 박혔어요. 옛 질서에 속했던 내가 못 박히고 내가 죽었어요. 옛사람인 내가 죽었어요. 새 질서에 속한 자로 거듭나고 중생해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어요. 오늘 이 5장 24절은 굉장히 중요한 지금 말씀을 해 주고 있어요. ‘육체와 함께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한 육체란 무엇입니까? 육체 성경에서 육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데, 이 육체란 무엇인가? 육체라는 것은 우리가 보통 우리의 영혼과 대비되는 우리의 몸, 이걸 의미하는 ㄴ느게 아니고, 이 육체라는 것은 영과 몸을 포함한 모든 인간의 본성인데 인간의 본성이 죄로 물들고, 죄로 오염된 상태로 있는 인간의 본성 그게 육체다. 라는 것이에요. 그래서 성경에서 육체라고 할 때, 이 육체는 단순한 영혼과 대비되는 것으로서의 우리의 몸, 우리의 바디가 아니고, 우리의 바디가 아니고 우리 헬라로 싹스라는 단어를 쓰고, 영어로는 지금 이게 플래시라고 번역이 돼 있는데, 이것은 영과 육을 포함하는 모든 인간의 본성이 죄로 물들어 있고, 죄로 오염되어 있는 그것을 육체라고 부르는데, 놀라운 것은 우리의 죄의 본성, 죄로 물든 우리의 인성 죄의 본성도 십자가에 못 박혔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현실은, 현실은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는 날마다 싸우고 있어요. 날마다 싸우고 있고, 날마다 우리 안에 있는 죄가 우리를 죄 가운데로 사로잡아 가는 것을 보는 도다.
 
로마서 7장에서 사도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공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그렇게 말씀하면서 정말 탄식할 때, “나를 사로잡아 가는 것을 보는 도다.”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서 그런지 현실적으로 영적인 싸움을 벌이고 있고, 우리 안에서 우리를 사로잡아가려고 하는 죄의 소욕, 죄의 정욕, 그 죄 성의 강력한 힘에 의해서 우리는 도전을 받고 계속 싸우고 있는데, 놀라 것은 놀라운 것은 오늘 갈라디아 5장 24절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의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함께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뭐냐 하면 지금 현재 우리가 여전히 싸우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 있는 죄성과 우리 안에 있는 정욕과 우리 안에 있는 탐심과 더불어 싸우고 있지만, 이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육체에 대하여 승리했다. 라는 거예요. 아멘!. 한 번 합시다. “우리는 이미 승리했다.” 우리의 현실 속에서 죄가 우리를 사로잡아가려고 하고, 우리를 불순종으로 사로잡아가려고 하고, 우리 하나님이 원하시는 뜻을 행하지 못하게 사로잡아가려고 하는 죄의 소욕이 여전히 남아 있고, 우리 가운데 잔존하고 있지만, 그것이 우리가 패배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를 위하여 피 흘리시고 생명을 주셨을 때, 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함께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으실 때, 그와 함께 우리의 육체도, 탐심과 저녁 저녁도 십자가에 못 박았다. 결국은 결정적으로 승리했고, 최종적으로 승리할 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확실하게 하셨다. 라는 것이에요. 아멘. 결코 우리는 패배하지 않습니다. 때대로 넘어지고, 때때로 갈등하고, 때때로 안타까운 범죄를 범할 때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결국,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점점 성화되어지고 더 성화되어지고, 더 성화되어져서, 장차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나라로 부르실 때 우리의 몸과 영혼이 완전히 거룩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무슨 말이에요? 승리자가, 승리자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육체가 아니라, 승리자가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정력과 탐심이 아니라 승리자가 바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이고, 우리 안에 계신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의 소욕이, 거룩한 소욕이 결국은 최종적으로 이기고 승리하실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십자가에 못 박았다. 라는 말이에요. 아멘.
 
현실적으로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우리가 겪는 갈등과 영적인 싸움을 거부하거나 그것을 무시하면 안 되죠. 현실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왜냐하면 죄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 죄의 존재와 죄의 현존으로부터 우리가 완전히 해방되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부르실 때, 그리고 주님이 다시 오셔서 재림하실 때, 죄로부터 완전히 분리되고 죄의 존재로부터 우리는 완전히 해방되는데, 우리의 영혼이 거듭나고 중생에서 성화되어져 가는 과정 중에, 영화의 단계에 가기까지 하나님께서 놀라운 섭리 가운데 죄를 우리 가운데 남겨주신 것은 이것은 패배의 상징이 아니라,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이 죄를 결국 우리가 성령의 능력으로 이기고, 극복하고 넉넉히 이기고, 정복함으로 말미암아 죄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를, 우리의 삶 속에서 날마다 경험하게 하시고, 근데 우리가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것을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세 번째는 오늘 갈라디아서 6장 14절 한번 읽어볼까요? 갈라디아서 6장 14절
*갈라디아 6:14,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느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놀라운 말씀이에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한 사람, One person,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만 십자가에 못 박힌 줄 알았는데, 오늘 갈라디아 6장 14절 말씀에서 바울은 “세상이 나를 대하여,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무슨 말일까요? 이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요? 옛 질서에 속한 세상, 옛 창조에 속한 세상,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무시하고 하나님보다 물질을 높이고, 하나님보다 다른 피조물에 속한 것들을 높이는. 옛 질서, 옛 창조에 속한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다. 라는 거예요. 이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이 세상은 우리들을 유혹하는 세상이에요. 우리를 끊임없이 유혹하는 세상이고, 이 세상은 우리를 끊임없이 위협하는 세상이에요. 어찌 보면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우리의 싸움의 대상 중에서도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운 사실 거대한 대적이에요. 그런데 오늘 주님 주님은 바울을 통해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새 질서 안으로 들어왔고, 우리는 새 창조 안으로 들어왔고, 새로운 질서 새로운 창조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에 새로운 사람이 되었고,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세상 가운데 살고 있지만, 세상 가운데 살고 있지만 In the world!, 세상 가운데 살고 있지만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닌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세상이 우리를 지배하거나 세상의 가치관이 우리를 지배하는, 그런 삶을 더 이상 우리는 살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오늘 세상의 가치관으로부터,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세상의 유혹으로부터 해방되어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을 이긴 자가 되었다.
 
날마다 세상을 이기는 선택, 날마다 세상을 이기는 결정을 함으로써 날마다의 삶 속에서 세상을 이기는 자로 살아갈 수 있게 된 줄로 믿습니다. “보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한번 해볼까요? 보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로마서 8장에서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아멘 하시죠? 하면서 우리가 넉넉히 이겠느니라. 사실 이것은 굉장히 중요한 얘기예요. 세상 옛 질서에 속한 세상이 이미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은 하나님에 의해서 완전히 심판 당했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은 장차 망할 성이고 이 세상은 장차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받아 멸망할 세상이다. 라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건을 통해서 이 세상의 심판과 이 세상에 대한 멸망이 확정되었다. 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유혹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우리는 더 이상 세상의 위협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세상과 맞장 뜨면서 세상을 이기고, 세상을 극복하고, 세상의 가치관을 전복시키고, 하나님 나라 가치관으로 무장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군사로 살아갈 수 있게 된 줄로 믿습니다. 아멘. 한 번 더 “세상을 이미 이기고 극복했다.”
 
오늘 이제 세 가지 보면 제가 말씀을 드렸는데 두 가지만 더 살펴보고 오늘 말씀 마무리하겠습니다. 1. 갈라디아 2장 20절에서, 옛 질서에 속했던 내가 죽고, 새 질서에 속한 새로운 사람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새로운 존재로 우리가 거듭나고 중생했다. 그랬고
2. 갈라디아 5장 24절에서 육체와 함께 그 정력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으므로 우리가 날마다의 삶 속에서 여전히 갈등과 현실적인 영적인 투쟁이 남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우리의 실패에
우리의 패배의 상징이 아니라 오히려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승리를 경험하고, 경험하고, 경험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우리가 승리자가 될 것을 주님은 십자가에서 이루셨고,
3. 세 번째로 세상이 내가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므로 세상의 유혹과 세상의 위협에 우리가 굴복하지 않는 승리하는 그리스도의 전사로서 삶을 살게 되었다. 그랬습니다. 골로새서 2장 1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어요.
 
*골로새서 2:14,
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라고 되어 있습니다. 골로새서 2장 10절에 보니까
*골로새서 2:10,
10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았다
-라고 말씀하죠. 뭘 못 박았다는 거예요? 율법에 기초해서 우리를 기소하는 기소장을 못 박았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기초해서 우리를 해 우리를 대하여, 사망의 판결을 내렸던 그 판결문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거예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율법은 끊임없이 우리를 기소하고, 우리를 정죄하고, 우리가 너는 죄인이야, 너는 죄인이야, 그래서 너는 죄인이라고 고발하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율법에 율법의 정제와 율법의 저주와 율법이 우리를 고소하는 그 고소장과 율법의 기초에서 우리를 향하여 판결문을 썼던, 너는 사형이야 라는 판결문을 내렸던 그 증서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말소되었다.라는 것이에요.
 
여러분 믿습니까? 한 번 해봅시다. 나에게는 정죄함이 결코 있을 수 없다 아멘 하시죠? 우리가 예수님 믿고 살아가면서 성화 과정을 거쳐 가면서,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가 영적인 싸움을 하면서 때로 무너지기도 하고 때로 실패하기도 할 때 그때 우리가 느끼는 죄의식은 복음적인 죄의식이어야 돼요. 율법적인 죄의식이 되면 안 돼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율법적인 죄의식은 내가 이런 혹시라도 주님 앞에서 범죄하고 잘못했을 때, 이것 때문에 내가 지옥 가는 거 아닌가? 이것 때문에 내가 자꾸 하나님 앞에 버림받는 거 아닌가? 이런 식의 죄의식이 바로 율법적인 죄의식이에요. 그게 아니고 복음적인 죄의식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려고 애쓰고 노력하다가 실수하고, 하나님 앞에서 범죄 할 때 나를 사랑하시는 내 아버지의 마음을, 나를 사랑하시는 나의 구주, 나의 주님, 나의 영적인 남편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 그것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아프고, 우리의 마음이 주님 앞에서 참회하고 우리의 이 아픈 마음을 주님 앞에 올려드리는 것, 그것이 복음적인 죄의식, 복음적인 회개다. 라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거듭나고 중생해서 영, 단번에 죄 사함을 얻은 자로 이 땅을 살아갈 때, 우리는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죄로 인하여 때때로 넘어지고 범죄를 하고 허물지게 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상황 속에서 여전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아와 하나님께서 “내게 오라. 내 아들아 내 따라 내게 와라. 내게 와서 자백하고 회개하고 다시 시작해라.” 그렇게 하실 때 기쁨으로 아버지께 나아가고, 기쁨으로 예수님께 나아가서 부족하지만 주여, 이제 다시 시작하오니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고 나를 당신의 능력으로 새롭게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아멘! 한 번 읽어봇시다. “아들아, 내게 와라 다시 시작해라. 딸아, 따라 다시 시작해라.” 아멘 하시죠? 왜? 율법의 저주와 율법이 우리를 고소하고, 기소하고, 심지어 율법에 기초해서 우리를 향하여 사형이라는 판결문을 내렸던 그 모든 증서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처리된 줄로 믿습니다. 마지막 우리 한 구절만 더 보겠습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로 15절 말씀이에요. 제가 읽어볼게요. 히브리서 2장 14, 15절에 보니까
 
*히브리서 2:14-15,
14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음에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시면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함으로 한평생 메어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여기서 지금 ‘십자가에 못 박았다.’ 라는 그 정확한 언어가 나오지 않지만 여기 지금 말씀할 때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셨다. 이렇게 나와 있어요.
 
사랑한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 흘리시고 생명을 주실 때에 마귀도 십자가에 못 박힌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마귀 처리된 거예요. 마귀를 향하여 예수님께서 영 단번에, 결정적인 승리를 이루신 줄로 믿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고 나서 주님께서 뭐라 그랬어요? 여자의 후손이 와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뱀은 그 여자의 후손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지만, 여자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다. 여자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한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었다. 그리고 십자가로 말미암아 승리하심을 확증하신 사건이,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하신 사건인 줄로 믿습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서, 사망의 권세를 품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사망의 권세를 처리하신 줄로 믿습니다. 사망아, 네가 서는 것이 어디 있느냐? 저와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사망의 권세에서 자유롭게 되고 해방된 줄로 믿습니다.
 
이제 사망은 우리에게 더 이상 위협이 되거나, 두려움의 요소가 되거나, 겁내하는 요소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도의 죽음을 기뻐하시고, 도리어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그 죽음의 나를 담대하고, 소박하게, 정말로 주님 안에서 기쁨으로 죽음의 날을 기다릴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의 소유자들이 되었다. 예수 믿는 사람과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이 죽음을 대하는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여러분 알고 계세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어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과,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영원한 사망과 마비의 종이 된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죽음에 대한 반응이 완전히 다르다. 사망아, 네가 쏟는 것이 어디 있느냐?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그 죽음의 사건 역시도, 신비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놀라운 특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신비한, 신비한 믿음의 사람들이 된 줄로 믿습니다.
 
사망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내시고, 이제 우리는 사망을 조롱하며, 죽음을 조롱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죽음이, 죽은 것이 되었다 이 말이에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를 사로잡으려고 하는 사망의 권세가 사망을 당했다는 겁니다.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사망의 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와 연합함으로 우리는 사망의 권세를 함께 이긴 자가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내 생명을 조금 더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바울의 고백 그대로 주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기 위해서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목숨을 조금 더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는, 순교자의 자세, 순교자의 영성으로 우리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된 줄로 믿습니다.
 
이제 결론을 맺겠습니다.
십자가는 옛 질서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고 옛 질서에 대한 승리를 의미합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아, 나는 새로운 질서에 속한 사람이구나! 나는 새로운 질서, 생명의 질서에 속한 새로운 피조물이구나! 새로운 존재가 되었구나! 새로운 정체성을 받았구나! 새로운 특권을 얻었구나! 새로운 사명을 받은 사람이 되었구나! 이 사실을 확인하면서 새 사람으로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새 사람은 누구냐?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된 사람은, 예수님과 연합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님과 연합하여 영적으로 하나가 된 사람이에요. 예수님을 나의 영적인 의미의 신랑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내 자신이 예수님의 영적인 신부가 되었음을 확인하고 살아가는 사람이에요. 예수님과 연합됨으로, 예수님의 신부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친구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 참 포도나무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부르심의 목적 하나님을 위하여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삶, 성령의 열매를 맺고, 전도의 열매를 먹고, 제자 삼는 삶의 열매를 맺고, 입술에 감사의 열매를 맺으며 ,찬송의 열매를 맺으며 많은 사람들을 그리스도교로 인도함으로, 우리가 맺은 열매가 주님 앞에 상달되고 그래서 그리스도의 향기로 충만한 삶,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충만한 삶,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으로 깨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하신 주의 말씀대로 성령의 능력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영원한 생명, 영원한 생명이 우리가 죽어서 주님 나라 갈 때 누리는 것이지만 그 이전에 이미 우리에게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새로운 피조물의 삶. 새로운 존재로서의 삶, 새 사람으로서의 풍성한 생명력 있는 삶에 주인공들로 여러분 모두가 살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한번 해봅시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 옆에 있는 분들 확인합니다. 서로를 바라보면서 “당신은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한 번 더 “새로운 사람으로 살아가십시오.”아멘 하시죠?
 
♣요약
2천 년 전에 십자가에 달리셨던 그 한 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옛 질서에 속했던, 옛 창조에 속했던 많은 것들이 이미 십자가에서 처리되었고, 이제 새로운 질서에 속한 사람으로, 생명의 질서에 속한 사람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새로운 피조물로, 하나님의 아들과 딸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인 신부로, 살아가길 원해야 한다. 날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서 결코 실패하거나 패배하는 삶이 아니라, 날마다 승리하는 삶의 주인공이 되어,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사망을 이기고, 나의 옛 자를 이기고, 내 안에 있는 육체의 소욕을 이기는, 마비를 이기는,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원한 생명을 이 땅에서 미리 맛보며 살아가는 풍성한 삶의 주인공들로 주안에서 삶을 살아내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이란 의로우신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의지하고 자신을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는 삶을 말한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주어진 삶은 죄와 사망으로부터 분리된 삶이며, 그리스도께서 주신 완전한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삶인 동시에 부활의 새 생명으로 덧입게 될 영원한 삶이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