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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1년 8월 22일) 제목: ''양털로 하나님을 시험해도 되는가?'' 말씀: (사사기 6:33~40) 찬양인도: 이원준 부목사님 기도: 김우원 부목사님 사회: 천동원 부목사님 설교자: 김지찬 목사님(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교수-초빙) ㅡㅡㅡㅡㅡㅡㅡ *(사사기 6:33~40), 33 그 때에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요단 강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친지라. 34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이 그의 뒤를 따라 부름을 받으니라. 35 기드온이 또 사자들을 온 므낫세에 두루 보내매 그들도 모여서 그를 따르고 또 사자들을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에 보내매 그 무리도 올라와 그를 영접하더라. 36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쭈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37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리니 만일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주변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 38 그대로 된지라 이튿날 기드온이 일찍이 일어나서 양털을 가져다가 그 양털에서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하더라. 39 기드온이 또 하나님께 여쭈되 주여 내게 노하지 마옵소서 내가 이번만 말하리이다 구하옵나니 내게 이번만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 원하건대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40 그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그 주변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 -------------------------------------- 1부예배----- ▶제가 살아온 지난 반세기 동안을 회고 해 보면, 돈이 인간의 삶에 미치는 영향력이 이전보다 훨씬 더 커졌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이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거 같다. 그렇다면 인간은 돈에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한 정신과 의사에게서 들은 실험이야기이다. 침팬지가 말을 잘 듣거나 애교를 부리면 건포도를 주는 실험인데, 침팬지가 건포도를 먹으려고 말도 잘 듣고 큰 몸짓으로 애교도 부린다고 한다. 그런데 그 후에 침팬지가 애교를 부릴 때마다 건포도들 주는 것이 아니고, 플라스틱 칩을 주고 그 칩을 넣으면 건포도가 나오는 자동판매기를 다루는 방법을 알려 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루에 열 번정도 이쁜 짓을 하는 침팬지가 이 칩을 얻으려고 열 번 이상 이쁜 짓을 하는 반면에 하루 열 개씩 건포도를 먹던 침팬지가 여섯 개나 일곱 개를 먹고 나머지는 모아두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칩을 한쪽에 쌓아놓고 칩을 볼 때마다 즐거워하면서 잘 때는 그 칩을 끌어안고 자는 모습을 실험을 통해 확인 했다고 한다. 여기서 플라스틱 칩은 돈이고, 침팬지의 이런 행동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축척하려는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정신과 의사들은 분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노동이 부를 창조하는 사회가 아니고 부가 부를 낳고, 돈이 돈을 낳는 이 금융자본주의 사회에서 과연 그리스도인들은 만물의 신을 섬기지 않을 수 있을까? 최근에 한 연예인이 ‘티끌모아 봤자 티끌이다. 그러니까 때로 과감하게 투자해야 한다’고 하면서 ‘티끌모아 태산이다.’라고 하는 전통적 가치를 조롱하는 모습을 보았다. 과연 우리는 이런 탐욕자본주의 안에서 돈에 유혹을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가? 우리는 기드온의 이야기에서 답을 살펴볼 수 있다. 왜냐하면 기드온의 아버지의 집에 바알의 제단이 있을 만큼 사사시대에도 돈을 숭배하는 바알 사상이 횡횡하고 있었다. 따라서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7년 동안 미디안의 손에 넘기셨는데, 이 미디안의 핍박 때문에 이스라엘이 산에 웅덩이와 굴과 산성을 파고 그 안에 살 만큼 피폐해졌다. 이 때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자,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부르시고 “너는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에서 구원하라.” 이렇게 명령하셨다. 그렇다면 기드온이 어떻게 바알과 미디안의 손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할 수 있는가? 우선 기드온은 자기 자신부터 바알 숭배를 제거해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자기 아버지의 집에 있는 바알의 제단을 밤에 헐면서 ‘여룹 바알, 바알과 겨루어 이긴 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도 만찬가지다. 남 이야기부터 할 것이 아니라, 나부터 만물의 신에게 무릎을 꿇어서는 안 되고, 혹시 우리 집안에 있는 만문에 있는 만문의 제단을 헐어야 한다. 어찌 됐던 기드온이 여룹바알이라는 별명을 얻은 지 얼마 안 되어서 미디안이 13만 5천 명의 대군을 이끌고 이스라엘을 공격해 왔다. 이런 국가적인 위기의 순간에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고 기도온이 나팔을 불자 여러 지역에서 3만 2천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원하여 모여들었다. 오늘 본문에는 숫자가 안 나오는데, 뒤에 가면 숫자가 나온다. 그러면 기드온이 자원병들을 이끌고 미디안 군대와 전쟁을 한 판 벌일 것이라고 우리는 얼마든지 예측할 수 있는데, 그런데 기드온은 우리의 예측과는 달이 기드온이 양털을 가지고 여호와를 시험하는 장면이 나온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질문이 생기는데, 전쟁을 앞두고 뜬금없이 1)기드온이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하는가? 2) 왜 하필이면 양털뭉치와 이슬의 표징을 가지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인가? 도대체 이 양털 뭉치와 이슬은 무엇이고, 이것은 전쟁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3) 왜 하나님은 기드온의 양털 표징 시험을 허용하시는가? 성경에 하나님일 시험하지 말라고 여러 번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왜 기드온이 시키는대로 행하시고 계시는가? 이런 질문들을 염두 해두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는 말씀이 무엇인지를 귀 기울이며 은혜 받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기도온이 양텅뭉치와 이슬의 표징을 구한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36절에는 안 나오는데 39절에 보면 “내게 이번만 양털로 시험하게 하소서.”라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시험하려고 하는 양털 표징을 구하는데, 그러면 기드온이 양털로 하나님을 시험하려고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뜻의 내용을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알려졌다.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에서 구원하라”고 이미 하나님의 뜻이 알려졌는데, 문제는 자기 힘으로 이스라엘을 과연 구원할 수 있을까? 한다면 기드온이 확신이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려거든”,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한 번 확인을 얻어내기 위해 양털로 시험하는 것이다. 기드온의 이런 모습은 우리에게 큰 위로가 된다. 우리의 영적 전쟁은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지만 때로는 확신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싸워야 하는 영적인 전쟁은 무엇인가??? 바울은 디모데전서에서 말한다. *디모데 전서 6:9-12절에, 9 부 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부 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 한 복판에서 돈을 사랑하는 것을 피하,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도록 우리를 부르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선행이다. 마치 기드온이 바알과 싸우도록 부름을 받은 것처럼 우리 역시 만문숭배와 싸우도록 하나님이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다. 기드온에게 여호와의 영이 임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나님의 영이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과연 나는 만문을 숭배하는 사람들 속에서 과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워 승리할 수 있을까? 라는 점에 확신이 생기지 않는다면 기드온처럼 우리도 하나님을 시험할 수 있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그렇다면 왜 하필이면 기드온이 양털로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인가? 양털과 이슬은 도대체 바알 숭배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인가? 이를 알려면 이스라엘에 대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러면 다 아시다시피, 이스라엘은 여름에는 비가 오지 않는다. 그래서 포도나 무화과나 석류 같은 여름 과일이 성숙하려면 이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기드온 이야기의 배경이 추수직후이다. 한 달에 평균 보름정도는 이슬을 볼 수 있다고 성경은 말한다. 그런데 가나안 인들은 비와 이슬을 관장하는 신이 바알이라고 믿었다. 바알이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르며, 기름이 비처럼 내리고 강들이 꿀이 되어 흘러내리고 여인들은 자녀들을 많이 낳고 심지어는 죽은 자들이 살아난다고 믿었다. 가나안 인들이 바알을 섬긴 것은 경제적인 풍요 때문이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바알을 섬긴 것과 동일하다. *호세아 2:5절에, 5 그들의 어머니는 음행하였고 그들을 임신했던 자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이는 그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음이라. -내가 사랑하는 자들, 나의 연인들이라며,(My lovers him) 이스라엘이 나의 연인들이라고 부른다. 바알이 지역마다. 있었기에 복수로 쓰이기도 한다. 왜 이스라엘이 바알을 나의 전부, 나의 연인, 나의 정부라고 왜 부르는가? 바알이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을 준다고 믿은 것이다. ▷바알이 준다고 믿는 것들 (1) 떡과 물: 기본 식량(basic nourishment). (2) 양털과 삼: 의복(materials for clothing). (3) 기름과 술: 양질의 삶을 위한 사치품(pleasant luxuries of the good life). -바알이 기본 식량, 양털과 삼, 기름과 술을 준다고 믿고 바알과 연애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바알종교는 도덕적인 요청을 하지 않은 채 내일의 삶과 복지를 약속하므로 인간의 탐욕을 호소하는 종교여서 바알의 신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가까이 있는 신이기에 인간적으로 매우 매력적인 신이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알 신을 나의 연인들이라고 여기고 있다. 반면에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해 낸 다음에 가나안 땅을 선물로 주시고 나서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라고 하나님은 하신다. 의식주를 해결해 줄 것이니 공평과 정의 긍휼과 사랑이 넘치는 제사장 나라를 만들고 살라고 살라 하신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사명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와 비슷하게 우리의 가까이 있는 신, 물질의 풍요가 더 좋으니까 바알을 섬긴 것이다. 바알이 준다고 믿었던 것들은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호세아 2:8절에, 8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은 내가 그에게 준 것이요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가 알지 못하도다. -사실은 삶에 필요한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바알이 준다고 믿은 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가를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실재로 하나님께서 엘리아 시대에 아합 왕이 시돈의 그 딸인 이세벨을 데려와 바알숭배를 강력하게 나라에 퍼뜨렸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비와 이슬은 물론 생명과 이슬은 바알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엘리야를 통해서 알려 주셨다. “내가 섬기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맹세하노니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하면서 바알을 무력화 시킨다. 바알 숭배자들은 기근이 들어 먹을 게 없었지만 그리심 시냇가의 하나님께서 까마귀와 고기로 먹이셨다. 바알의 텃밭이 시돈인데, 그 시돈 사람들이 굶주릴 때에도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시돈 땅 사르박 과부의 집에 보내셔서 그 과부의 집의 기름통에 가루가 떨어지지 않게 했다. 시돈이 바알의 텃밭인데 바알을 믿는 사르박 과부의 아들이 병들어 죽었을 때에도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의 기도를 들으시고 아이를 살리셨다. 이렇게 바알이 다스린다고 믿는 시돈 땅에서 사르박 과부의 집에 기름과 가루가 떨어지지 않게 하시고, 사르박 과부의 죽은 아들을 살리심으로 여호와 하나님은 참 생명의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이미 선포하셨다. 시돈 땅에 가서, 사실 돌아와서 엘리야가 갈멜 산에서 바알 4백 명과 대결하는데 천둥과 번개로 제단에 내리시고 비를 내리시므로 비와 이슬을 관장하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심을 장엄하게 선포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드온의 양털 시험은 누가 비와 이슬을 관장하는지, 누가 진정한 생명과 죽음을 관장하는 주관자인지를 드러내 보여 달라는 표징인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의심하지 않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채우시는 분이심을 믿고 선한 싸움을 싸우는 분이라고 한다면, 표징이 필요 없다. 그런데 모두가 돈을 번다고 미친 듯 뛰어다니고 있는데, 나만 바보처럼 가만히 있는 게 아니냐고 생각이 들면서 확신이 사라지고 있다면, 표징을 요구해도 된다고 것을 기드온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기드온은 누가 진정한 신인지의 표징을 보여 달라고 한다. 기드온은 지금은 가르쳐주고 있다. 우리는 새로운 유혹 앞에 놓여있다. 노동의 대가로 월급을 모아서 집을 살 수 있었던 세대가 우리 세대이다. 그런데 지금은 노동의 대가의 월급을 가지고는 집을 살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방에서 돈을 벌 수 있다며 이것저것을 해보라고 유혹이 우리를 향해서 강력하게 우리를 손짓한다. 이전보다 더 교묘한 유혹 앞에 우리 모두 노출되어 있다. 빚을 내든 영혼까지 끌어오면 돈을 벌거라고 주장하는 우상들이 굉장히 많아졌다. 우상들이 한 두 개가 아니다. 부동산, 아파트 정도가 아니다. 그다음에 때로는 금, 코인, 최근에는 상품권으로 세금을 내면 절세를 한다는 등이다. 사사시대에 조상들을 유혹한 것처럼 오늘 우리도 신앙의 선배들이 알지 못한 교묘하고 새로운 유혹에 노출되어 있다. 이런 유혹 앞에서 흔들림이 없다면 굳이 표징을 요구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기드온처럼 마음이 흔들리거나 확신이 필요하다면 양털을 타작마당에 놓고 양털로 하나님을 시험해도 된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 우리의 삶은 공적인 타작마당이 아닌가? 우리 삶을 통해 누가 우리 생명의 주관자이며 우리의 삶의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 누구이신지를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타작마당인데 손님이 가장 많은 하나님이 필요를 채우시는 분이 누구이신지를 우리가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그러한 타작마당인데, 이를 위해서 신앙의 선배들은 손님이 가장 많은 일요일에 주일 성수를 하기 위해 식당 문을 닫거나 택시 운전을 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이 채워주실 것을 기도했다. 양털 뭉치와 이슬의 표징을 요구한 것이다. 그런데 주일 성수를 하면 하나님께서 필요를 채워주셨고 이상하게 토요일 날 손님이 두 배나 늘었다는 간증을 어렸을 때 많이 듣고 자랐다. 그런데 최근에는 이런 간증을 듣기가 어렵다. 최근에 성도들은 왠만 해서는 표징을 구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일부 성도님들은 기드온이 표징을 요구한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면서 시험이 믿음이 없는 행동이라고 반대한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으면서도 제대로 믿는 이상만을 고집하면서 하나님을 시험해서는 안 된다고 이렇게 주장한다. 그런데 이런 분들의 시험의 삶을 들여다보면 표징도 구하지 않고, 믿음대로도 살지도 않는다. 표징도 안 구하면서 믿음대로 산다면 최선이다. 표징도 안구하고 믿음대로 살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혹시 흔들려 가지고 마음이 의심이 생긴다고 한다면 얼마든지 표징을 구하라고 요구하신다. *이사야 7:10~11, 10 여호와께서 또 아하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1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 데에서든지 높은 데에서든지 구하라 하시니. -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통해서 아하스 왕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먼저 요구하신가?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런데 한 왕으로 나라를 다스리면 여호와를 신뢰하는 것이 정말 어렵다. 그런데 북방의 이스라엘 왕과 다메섹 왕이 연합해서 남방 왕, 아하스를 공격해오니까 *이사야 7장 2절에, 2 어떤 사람이 다윗의 집에 알려 이르되 아람이 에브라임과 동맹하였다 하였으므로 왕의 마음과 그의 백성의 마음이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렸더라. -이제 왕과 그 남방 유다 백성들이 심각하게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데 그 때 여호와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북방 왕과 다베섹 왕은 연기 나는 두 부지깽이에 두려워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라고 하신다. 위로하면서 징조를 구하라고 한다. 얼마든지 표징을 통해 아하스의 믿음을 굳건하게 해주겠다고 한다. 아하스는 대답을 한다. *이사야 7:12절에, 12 아하스가 이르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하지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진짜 겉으로 보면 경건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아하스는 이를 핑계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려고 한 것이다. 이것을 간파한 이사야가 구하지도 않은 징조를 아하스에게 준다. *이사야 7:14-16절에, 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15 그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 때가 되면 엉긴 젖과 꿀을 먹을 것이라. 16 대저 이 아이가 악을 버리며 선을 택할 줄 알기 전에 네가 미워하는 두 왕의 땅이 황폐하게 되리라. -이것은 너무나 잘 아는 임마누엘 징조이다. 젊은 여인이 이제 아들을 낳으면 그를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인데 그 아이가 젖을 떼기 전에 아하스 왕이 그토록 두려워하는 북방 이스라엘 왕과 다메섹 왕의 땅이 망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잉태를 해가지고 젖을 떼기까지는 한 3년이 걸린다. 3년 안에 일어날 일을 미리 보여 주면서 아하스가 하나님을 믿기만 하면 이들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임마누엘의 표징을 보여 준 것이다. 이렇게 표징을 보여주면 믿고 순종해야 하는데, 그런데 괜히 아하스가 표징을 구했다고 표징이 구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표징을 구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다. ※저는 아이 셋을 키우면서 필요하면 표징을 구하며 아이들을 가르쳤다. 특별히 공부가 중요하니까 대학때까지 열심히 공부하는 것만이 인생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하나님이 간섭하실 수 있는 공간을 드려야 한다고 했다. 주일 성수를 해야 하니까 학원가는 것을 반대했다. 아침 일찍 예배를 드리고 그 다음에 오후에 학원에 가는 것도 허락지 않았다. 큰 아이가 중3 때인데 성적이 원하는 만큼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때 분당도 입시에 과열했다. 아내랑 둘이 합세해서 예배를 드리고 학원가게 해달라고 저에게 강력하게 요청했다. 그래서 제가 여러 번 반대를 하다가 표징을 세웠다. ‘주일날 학원을 가봐라. 성적이 잘 나오는지를 보자.’ 만일 성적이 잘 나오면 대재앙이고 성적이 안 나오면 재앙이다. 물론 아프거나 그러면 비대면 예배를 드려야 한다. 당연하다. 그러나 코로나가 전국으로 확산되고 있는 상황인데 대구에 나훈아 콘서트에 4천 명이 모였다. 제가 얼마짜리인지를 뒤져 보았더니 R석이 16만 오천 원이고, S석이 14만3천원 이고 A석이 12만 천원이었다. 아니 콘서트로 비 대면으로 안하고 가서 보는데, 대면으로 하나님께 예배드릴 수 있는데도 비 대면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제2의 종교개혁이라고 하면서 정말 이해가 안 된다. 왜 콘서트는 비 대면으로 안하는가? 왜 정치인들은 대면으로 다니면서 그렇게 말하고 왜 비 대면으로 찍어가지고 돌리면 되지 않나? 얼마든지 대면 예배를 드릴 수 있는데, 시험 준비를 하려고 시간을 벌기 위해 비대면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은 기뻐하시겠는가? 시험 타작마당에 앙 털 뭉치를 놓고 표징을 구하면 된다고 가르쳤다. 막내가 대면 예배를 드리고 시험기간에 성적도 잘 나왔다. 그러니까 한 번에 되고 안 되고 그런 것이 아니라, 안 될 수도 있지만, 대면 예배를 드렸는데 시험 준비를 안 해놓으면 성적이 안 나온다. 준비 잘 하고 대면 예배를 드려야 그래야 성적이 나오는 것이지, 주중에도 놀고 주일에도 놀면 당연히 성적이 안나온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려면, 시험 준비도 잘 하고 주중에 1.2배를 해놓아야 그다음에 주일에 쉬면서 예배를 드리면 성적이 나오는 것이다. 다 놀면 성적이 안 나오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일에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 주중에 열심히 하고 그리고 주일에 시간을 하나님께 나와서 찬양과 예배를 드리고, 친구들도 만나고ㅈ 함께 찬양도 하고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은혜를 받아야지 이 영혼이 살아야 행복한 삶을 사는 것인데, 도대체 좋은 대학 간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교회를 안 보내고, 시험 기간만 되면 반 토막이 되는 이 한국 주일학교 상황은 심각한 상황이다. 표징을 구하여야 한다. 되나 안되나 표징을 구하라. 안 나와서 성적이 잘나오면 대재앙이다. 그렇다고 성적 떨어지라고 기도한 적은 없다. 보면 뻔하니까. ... 하나님께서는 아하스 왕에게 표징을 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자기를 시험해 보라고 초청한다. *말라기 3:10절에, 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어떤 해석자들은 백성들이 너무나 고갈해졌기 때문에 자신을 시험하라고 하시니까 매우 비상적인 상황이며, 따라서 일반적인 원칙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고 해석한다. 다른 해석자들은 나를 시험하라고 한 것은 수사법이기 때문에 실제로 시험하라는 것이 아니고, 십일조를 잘 드리라는 권면이라고 해석한다. 그런데 이렇게 해석하는 것은 본문을 오해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시험하라는 명령에 뭐가 붙었냐면 ‘제발’ 영어로 Please,라고 하는 ‘나’라는 조사가 붙어있다. 하나님께서 무어라고 하시냐면 ‘제발 나를 시험해보라’고 하는 뜻이다. 믿음이 사라졌던 약속을 믿기가 어렵든 상관없이 제발 나를 시험해 보라는 것이다. 그런데 십일조로 하나님을 시험해보라는 권면은 핑계를 대면서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불신앙일 수 있는 것이다. 시험하지 않고 드린다면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러면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자신을 시험해 보라고 하시는데 무엇을 시험하라고 하시는가?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에게 복을 쌓을 것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하늘 문은 노아와 홍수를 가리키는 어구이다. *창세기 7:11절에, 11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께서 노아와 홍수 때처럼 직접 하늘 문을 여시겠다는 것이다. 여기에 하늘 창문을 열고 복을 부어주시겠고 하시는 것이다. ‘붓다’라고 하는 단어가 텅 비게 만들다. 이다. 하늘의 문을 열어서 복을 하나도 남김없이 몽땅 쏟아 부어 텅 비게 만들 것이라고 하신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얼 약속하시는 것인가? 시험해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라기서에서 자신을 시험해 보라고 초청하신 것을 보면 기드온의 양털의 시험을 받아들이셨는지 이해가 도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의 첫 번째 시험에 긍정적으로 답을 하셨다. 양털에만 이슬이 모인 것이다. 이슬을 짜니까 물이 그릇에 가득했다. 아시다시피 공기가 따뜻하게 하면 이슬이 맺히는 것인데 짜니까 그릇에 가득했다. 여러분 우리가 그 캐시미어, 양털을 좋아하는가? 이것을 입으면 수분을 흡수한다고 한다. 그래서 양털로 만든 것을 입으면 가벼운데다가 이게 수분이 흡수해서 쾌적한 것이다. 양털이 물을 흡수하니 양털에 이슬이 모인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이제 마당에는 없고 아시다시피 딱딱한 이런 곳에 공기가 따뜻한 공기가 찬 공기에 닿으면 이슬이 맺히는 것인데, 양털에 이슬이 맺히기도 하지만 주로 다른 것에 많이 맺히기도 한다. 양털을 짜니까 그릇에 물이 가득한 것이다. 기드온이 만족하지 않고 그러면 양털에는 이슬이 없고, 주변 땅에만 이슬이 있게 해달라고 요청을 했더니,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신다. 그래도 행하셨다고 했다. 마치 기드온의 명령에 순종하시는 것처럼, 그대로 행하신 것이다. 여호와께서는 단순히 기드온에게 명령만 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때로는 기드온이 요청을 하니까 그대로 행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왜 기드온의 시험을 긍정적으로 응답하셨을까? 확신과 신뢰가 부족한 기드온을 이해하고, 믿음이 많은 기드온을 훈련을 시키기 위함이시다. 사랑이 많으신 여호와는 기드온을 전쟁의 용사로 훈련시키기 위해 오래 참으신 것이다. 무례한 것처럼 보이지만 요청도 들어주시면서 기드온을 시키는 대로 다 하면서 기드온을 용사로 만들어 가신다. 그래서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부자가 되려는 전투에 나설 건지, 아니면 선한 싸움을 할 것인지 우리는 선택해야 한다. 물론 이때 표징을 구하지 않고 담대하게 선한 싸움도 하지 않으면 이것은 최선이다. 그러나 표징도 구하지 않고 선한 싸움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최악이다. 그렇다면 이럴 때 기드온처럼 양털 표징을 구하면서 선한 싸움을 싸운다면 이것은 차선일 수 있다. 십일조를 가지고 하나님을 시험해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시험해 보라가 하신 말씀은 십일조를 내라는 강요가 아니다. 모든 필요를 채우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섬기는지, 아니면 하나님과 돈을 섬기는지 솔직히 자신을 들여다보라는 것이다. 십일조는 구약의 제도이기 때문에 폐기되었다면서 십분의 일만이 아니라 전부가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만 할 뿐, 실제로 십일조를 하나님께 안 드리는 것은 아닌지,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얼마든지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 십일조를 드리면 하나님이 하늘 창고를 여시고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과 하늘에 양식을 맛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말라기서 핵심 메시지이고 바로 기드온이 구한 양털과 이슬을 구한 핵심인 것이다. ※중국 내지 선교에 창시자인 허드슨 테일러 역시 양털로 하나님을 시험하며 표징을 맛본 사람이다. 그는 하나님은 살아계셔서 지금도 자신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사실을 경험하기 위해서 표징을 구했다. 그의 자서전에 오직 하나님께만 메어 달리리라고 한다. 영국을 떠나기 전에 오직 기도를 통해서만 사람을 움직이는 방법을 먼저 배우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테일러가 병원에서 의사의 조수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의사가 자신이 바빠서 잊어버릴 수 있으니까 자신의 봉급날이 되면 알려 달라고 했는데, 테일러는 의사에게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인의 기억을 상기시켜 달라고 기도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하나님이 안 알려주신다. 의사는 잊어버린다. 봉급날이 지났는데 주인이 기억을 못했다. 테일러가 며칠이 지나도록 기도만 했다. 당시 주머니에 1실링의 화폐만 남아 있었는데 그러던 주일 저녁에 가난한 사람이 자기 아내가 죽어간다고 기도해달라고 한다. 허드슨 테일러가 처음에는 자기가 2실링 5페니만 있으면 그 형제에게 줄 수 있을텐데,,, 라고 생각했을 뿐 있는 돈을 주지 못했다고 했다. 병든 여인을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돈이 없어도 하나님을 신뢰는 법을 신뢰하는 삶을 살 준비가 안 되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가지고 있던 돈을 다 내 주었다고 한다. 그때 허드슨 테일러의 일기에 적어놓았다. 축복을 가로 막고 있는 장애물이 사라졌다고 한다. 불쌍한 여인의 목숨이 구원 받은 게 다가아니고 바로 나의 영혼도 구원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하고 있다. 다음날 편지를 받았는데, 가죽 장갑한 켤레와 반 파운드 금화가 들어 있었다. 큰 소리로 외치면서 “주님, 감사합니다. 열 두 시간 만에 4배로 갚아주시다니요! 이런 수지맞는 일이 어디 있나요!” 그 자리에서 팔리지 않는 천국 은행에 내 수입을 저금 하리라고 굳게 결심하였고 지금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기록해 놓았다. 대학 한 번 못가고 더구나 선교훈련도 받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의료학교의 학력과 자기의 경험만으로 허드슨 테일러 6천 명의 선교사를 보내는 일을 하는 창립자가 된 것은 표징을 통해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살아계심을 직접 체험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결론은 바울은 디모데에게 부와 재물을 강조하는 물질적인 세상에서 우리를 어떻게 선한 싸움을 싸우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디모데전서 6:9-10절에, 9 부 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우리가 왜 시험과 올무에 떨어지는가? 부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왜 파멸과 멸망에 빠지는가?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 해로운 욕심이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예레미야가 일찍이 간파했다. *예레미야가 3:24절에, 24 부끄러운 그것이 우리가 청년의 때로부터 우리 조상들의 산업인 양 떼와 소 떼와 아들들과 딸들을 삼켰사온즉. -우상이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파멸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현실이 되어가고 있다. 50년대 중반부터 태어난 베이붐 세대가 은퇴하고 재산이 이제 자녀들에게 넘어가고 있다. 만일 자녀들이 돈을 사랑하여 십일조나 헌금을 하지 않게 된다면 그것은 하나님 나라에 쓰지 않게 되고 허망한 데 사용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돈과 재물이 우리의 자녀들을 삼키고 말 것이다. 미국과 한국이 동일한 상황에 놓여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왜 우리가 유혹을 받는가? 탐욕 때문이며, 왜 우리가 믿음에서 떠나는가? 돈 때문이다. 왜 우리가 많은 빈 심으로 자기를 찌르고 있는가? 돈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디모데전서 6:11-12절에,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받았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언을 하였도다. -바울은 돈을 사랑하는 것을 피하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권면한다. 여기서 싸우라는 단어는 수 천 만의 관객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원형 경기장에서 죽기까지 싸우는 검투사의 싸움을 묘사할 때 사용된 동사이다. 필사의 노력을 하다. 목숨 걸고 싸우다.는 뜻이며 승리로 결론 날 때까지 영생을 목표로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목숨을 걸고 끝까지 싸우라는 것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세상을 떠날 때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며 오직 선한 싸움에 구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만을 가지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것이 때문이다. 우리가 쌓아놓은 돈은 한 푼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 그래서 바울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여기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한다. 여기까지는 아직 부자가 아닌데 부자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는 싸움이라면, 이미 부유한 성도들도 마찬가지로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디모데전서 6:17-18절에, 17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의 자기를 위한 선한 터, 선한 터를 쌓아 참되 싸움을 하는 것이다. 부한 자들에게 내리는 말씀 가운데에도 선하다는 동사가 선한 성, 선한 성을 쌓으라고 나와 있고 그 다음에는 단어는 좀 다르지만 선을 행하라는 것이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라고 하신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으면 그것을 위해 애를 더 써야한다. 없는 것 가지고 그냥 족한 줄로 알라고는 하지 않았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없으면 이해서 애를 쓰고 그것이 있으면 만족하고 선한 싸움을 싸우라는 것이며 이미 부유한 분들은 선한 사업을 하고 선한 터를 쌓고 너그러운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부하면 부한 대로 각자가 담당해야 될 선한 싸움이 따로 있는 것이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대리석으로 우리가 선한 조각품을 만들면 된다. 하나님 앞에 설 때 무얼 가지고 가겠는가? 저만 가지고 간다. 저의 싸움의 결과와 저의 행위와 믿음을 가지고 간다. 칼뱅이 말한 대로 하나님은 가난한 자에게 가난을 주신 것은 그 가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얼마나 신뢰하는지 보기 위해서이고, 부자에게 부를 주신 것은 하나님은 이웃을 어떻게 섬기려고 하는지 보시려고 주신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믿음의 선한 싸움을 끝까지 싸울 수 있는가? *히브리서 13:5절에, 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하나님의 임재를 신뢰하고, 하나님이 결코 버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지하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끝까지 싸우면 끝내 영생을 취할 수 있다. 바울은 말하고 있다. *디모데후서 4:7-8절에, 7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바울은 로마의 감옥에 갇혀있으면서 임박한 죽음을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사도로서 30년간의 사역을 회고해보면서 바울은 의의 면류관을 바라본다. -왜 하필 의의 면류관인가? -첫째로, 바울은 그의 삶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추구했기 때문에 그의 삶의 내용은 의였고, 의의 면류관을 받기를 원한다. -둘째로, 바울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끝까지 잘 싸웠는데 믿음의 선한 싸움은 돈을 사랑하는 것을 피하고 의와 믿음과 경건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추구하는 것인데, 의가 대표적인 미덕이니까, 의의 면류관이라고 하는 것이다. -셋째로, 의로우신 재판장이사다. 마지막 심판대 앞에 설 때, 의로운 기준을 가지고 공정한 판결에 따라서 의로우신 재판장님이 우리에게 의로우신 것이기 때문에 의의 면류관(冕旒冠)인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기드온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양털 표징을 구하면서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마침내 3백 명의 용사로 13만 오천 명의 미디안 군대를 이기고 승리한 것처럼 우리 역시 믿음이 선한 싸운다면 만문과의 전쟁에서 끝내 승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바울처럼 우리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우리의 달려갈 길에 믿음을 지킨다면 의로우신 재판장님이 우리에게도 의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이다. 주님이 나타나셔서 우리에게 씌워줄 의의 면류관을 고대하며 선한 싸움 다 싸우고 우리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키는 우리가 되길 축복한다. ♣요약 우리에게 주신 이 권면의 말씀을 가슴에 깊이 새기고 때로 필요하다면 우리의 삶에 타작마당에 표징을 놓고 우리의 믿음을 고백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확신을 삶 가운데 주실 것을 기도하는 그 표징을 받아서 담대하게 하나님만을 신뢰하며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계속 확인하고 싶어 하는 연약함이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책망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오직 사랑과 은총과 자비로 연약한 인간을 도우시는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의심의 구름이 걷히지 않아 하나님의 뜻을 확신하지 못했을 때는 자신의 사정을 정직하게 하나님께 말씀드려 확신을 구해야 한다. 우리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우리의 달려갈 길에 믿음을 지킨다면 의로우신 재판장님이 우리에게도 의의 면류관을 씌워주실 것이다. 주님이 나타나셔서 우리에게 씌워줄 의의 면류관을 고대하며 선한 싸움 다 싸우고 우리 달려갈 길을 다 마치고 믿음을 지키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의 대적들이 내습했다. 수많은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 사람들은 기드온이 살던 성읍에서 멀지 않은, 므낫세 지파의 심장부에 있는 이스라엘 골짜기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그러나 그들의 죄악이 충만하여 보수의 때가 이르렀음이 입증되었다. 이제 그들의 약탈은 종말을 고하고 도리어 약탈당할 것이 기정사실화되었다. 그들은 기드온의 타작을 위해, 타작마당의 곡식단과도 같이 모이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신을 통하여 기드온에게 활기를 집어넣으셨다.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즉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을 영예롭게 하기 위해 겉옷과도 같이 그에게 입혀졌으며 그를 보호하기 위해 쇠 미늘 갑옷과도 같이 그에게 입혀졌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일을 위해 부르신 자를 그 일에 합당하게 만드시며 격려하신다. 기드온의 나팔 소리는 그의 이웃들에게 원기를 불어넣었으며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일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었다. ①아비에셀 사람들은 비록 최근에 그가 바알의 단을 헐어 버린 것에 분노하여 그를 범죄자로 처형하도록 정죄까지 했었으나 이제는 자기들의 잘못을 깨닫고 그를 도우러 용감히 나아왔다. ②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으므로 그와 소원한 관계에 있었던 아셀과 납달리 지파까지도 그의 소집에 응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자들의 신앙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표징으로써 그들을 만족시키셨다. -표징을 보여 달라는 기드온의 요청이다.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 내가 알겠나이다.’ ("주여 내가 믿나이다. 주께서 나의 불신앙을 도와주소서"가 이 요청의 의미이다. 그가 첫 번째 표징과는 반대 현상인 두 번째 표징을 다시 요청하게 되었을 때, 그 요청이 하나님에 대한 까다롭고 변덕스러운 불신임처럼 보였으므로 제발 분노하지 말아 주시기를 바라는 매우 겸허한 사과를 드리며 요청했다. 하나님의 은총을 구할 때, 우리는 큰 경외심을 품고, 즉 우리의 부족을 인식하며 경건한 두려움을 가지고 그것을 구해야 한다. 그의 요청에 대한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응답하신다. 참된 신자들이 비록 나약할지라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얼마나 다정하신가를 보라. 기드온은 양털이 젖고 땅은 마르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이슬이 아무리 조금 내리더라도 양털은 그것을 흡수해서 머금고 있을 것이므로 이 일에 특별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라는 이의가 생기지 않도록 그는 양털에서 충분한 양의 물을 짜내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날 밤에는 땅은 젖고 양털은 마르기를 원하였다. 그리고 이 일은 이루어졌다. 심지어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통해서까지 '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큰 안위를 주시고자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끈덕진 요구를 들어주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그들의 의심과 불만을 해결해 주시기까지 하신다. 기드온은 하나님의 은혜의 이슬이 특별히 자기 자신에게 내려지기를 원했는가? 그는 양털이 이슬로 젖은 것을 봄으로써 그것을 확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하나님께서 온 이스라엘에게 이슬처럼 임하시기를 원했는가? 보라, 온 땅이 젖었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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