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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차 봄 글로벌 특별새벽부흥회(하나님께서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주후 2023년 4월 13일)-다섯 째 날(금) 제목: "쇠사슬을 깨뜨리려면" 말씀: 사도행전 16:22-26 설교자: 크리스찬 소니아 목사님(루마니아 호프 교회) ---------------- 제목: “주님과 동행” 말씀: 누가복음 24:13-17 설교자: 박신일 목사님(그레이스 한인교회) ---------------- *사도행전 16:22-26, 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24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누가복음 24:13-17, 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 ▶설교자: 크리스찬 소니아 목사님(루마니아 호프 교회) 제목: "쇠사슬을 깨뜨리려면" 말씀: 사도행전 16:22-26 -사랑의 영 가족 여러분 그리고 존경하는 오정현 목사님, 이렇게 아름다운 봄 글로벌 특별새벽부흥회에서 말씀을 전할 기회를 주셔서 감사하다. 사랑의 교회 특새에 말씀을 전할 수 있어서 개인적으로 큰 영광이다. 하나님께서 사랑의 교회를 통해 역사하시는 모습은 그저 놀라울 뿐이다. 얼마 전에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에 행하신 놀라운 역사에 대해 읽었다. 1970년대 빌리 그래함 전도 집회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하심도 놀랍지만 지금 한국교회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하심도 경이로운 그 자체이다. 1970년대에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대규모 전도 집회가 대한민국 서울에서 열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 기도, 찬양, 고난이라는 자본을 이용하여 한국교회를 성장시키시고 굳건하게 세우셨다. 또한 루마니아 교회들도 성장시키기 위해 하나님은 이 네 가지 자본 모두 사용하셨다. 그리고 초대교회도 마찬가지로 기도, 찬양, 고난, 말씀을 통해 성장시켰다. 그래서 오늘 본문 말씀인 사도행전 16장을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사도행전 16장에는 바울과 실라에 관한 놀라운 이야기가 나온다. 두 사람은 선교 여행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다. 하나님께서 열심히 전하는 두 사람에게 멋진 휴가 같은 보상을 주셔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그런 보상은 받지 못했다. 놀랍게도 여러분의 생각과 전혀 다른 일이 일어났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보상을 받기는커녕 복음을 전하는 대가로 고통과 투옥과 자유의 억압이 찾아왔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하길 무리들이 바울과 실라를 고발했고 상관이 그들의 옷을 벗기고 채찍으로 때리라고 명령까지 했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간수는 두 사람을 잘 지키라고 명령을 받았다. 간수는 바울과 실라를 감옥에 넣고 그들의 발을 쇠사슬로 묶었다. 감옥에 갇히는 것은 복음을 전파한 상급으로 전혀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과 실라 입장에서는 하나님께 불만을 토로하고 왜 이런 고통을 주시는지 하나님께 물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저희가 왜 투옥당해야 합니까? 왜 고통 받아야 합니까?”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불평하는 대신 다른 것을 하였다. 25절을 보면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했다고 나온다. 지금 특새에서 여러분들이 기도하는 것처럼 말이다.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찬송을 불렀고 다른 죄수들은 그들의 찬양을 들었다. 엄청난 이야기이다. 실제로 이런 고난을 겪으면 우리는 선택의 갈림길에 놓인다. 인생 살다 보면 그리고 교회에 다니며 신앙생화를 할 때 항상 이 두 가지 선택 앞에 놓이게 된다. 바울과 실라는 쇠사슬에 묶여 있었다. 바울과 실라는 그들을 묶고 있는 쇠사슬이 찬양 또는 부숴버리도록 내버려둘 수도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삶의 쇠사슬이 믿음의 찬양을 파괴할 수 있다. 실라는 어느 순간 바울에게 “우리가 이런 식의 대우를 받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었다. 바울은 실라에게 “당신 말이 옳습니다. 우리는 이런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이 진짜 계시긴 합니까 왜 하나님은 선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나게 하십니까?” 라고 반문할 수도 있었다. 바울과 실라는 선한 사람들이었다. 바울과 실라는 자신들을 불쌍하게 여길 수 있었다. 우리는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불평할 수 있다. 인생에 쇠사슬이 많이 있다. 물리적인 쇠사슬은 아니지만 보이지 않는 쇠사슬에 우리가 참 많이 묶여있다. 여러분도 잘 아실 것이다. 불안이라는 쇠사슬, 우울증이라는 쇠사슬, 질병이라는 쇠사슬, 암이라는 쇠사슬, 실패라는 쇠사슬, 죄라는 쇠사슬에 매여 있을지도 모른다. 이런 쇠사슬이 너무나 쉽게 삶의 찬양, 믿음의 찬양을 부숴버릴 수 있다. 그런 이유로 여러분이 지금 특별새벽부흥회에 오셨을지도 모르겠다. 저도 여러분과 함께 특새 현장에 있으면 좋겠다. 여러분의 찬양과 기도를 현장에서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지금 여러분이 계신 자리를 둘러보면 좋겠다. 많은 분들이 그 자리에 나와 하나님께 찬양을 드리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많은 성도님들이 특새에 나오셔서 기도와 찬양을 하고 계신다. 여러분은 지금 삶의 묶는 쇠사슬이 너무 많기에 마음을 다해 기도를 하고 싶으실 것이다.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는 인생의 쇠사슬이 여러분의 찬양을 막을 수 있다. 절망이라는 쇠사슬이 여러분 찬양을 깨드릴 수 있다. 너무 힘들면 목소리를 높이고 손을 들어서 하나님을 찬양하기 어려울 수 있다. 가족이나 여러분의 삶에 어떤 큰 사건이 일어났을 수도 있다. 실직을 했거나 질병과 싸우고 계실 수도 있다.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 쇠사슬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그 쇠사슬이 여러분의 찬양을 끊어지게 내버려 두지 말라. 비록 여러분의 삶이 어려울지라도 여러분은 지금 이 자리에 나와서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 드리고 있다. 바울과 실라가 주님께 찬양을 한 것처럼 말이다.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선택한 것이다. 제가 여러번 말씀드려서 아시겠지만 저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자랐다. 그때 너무 고통스러운 터널을 지나야만 했다. 어렸을 때 기억이 난다. 제 아버지는 교회를 섬기셨는데 아버지가 맡은 가장 중요한 임무는 성경을 숨기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공산당 비밀경찰이 성경을 압수했기 때문이다. 비밀경찰이 성경을 압수해서 화장실 휴지로 만들었다는 기록도 있다. 당시에 루마니아에 성경을 몰래 가져와서 제가 자란 교회에 전달해준 서양에서 온 멋진 그리스도인이 있었다. 교회 지하에 방이 하나 있었는데 그곳에 성경이 가득 차 있었던 기억이 난다. 저희 아버지와 장로님들은 성경을 필요로 하는 곳에 나눠주셨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버지와 장로님에게는 기쁨이 가득했다. 교회는 움직였고 성장했다. 교회는 함께 기도했고 찬양했다. 당시에 감옥에 간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감옥에 투옥되었던 사람들 중 특별한 하나님의 사람이 한 명 있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니콜라에 스타인하트’이다. 이분은 루마니아인인데 예수님을 민든다는 ‘믿음’ 때문에 감옥에 갇혔다. 공산당 강제 수용소의 독방에 감금된 상황 속에서도 니콜라에 스타인하트는 하나님을 찬양할 이유를 발견했다. 그 어둡고 외로운 감옥에서 니콜라에 스타인하트는 “행복 일기”라는 책을 썼다. 바울과 실라도 감옥에 있었다. 두 사람이 처한 상황은 정말 힘들고 어려웠다. 그러나 바울과 실라는 그 상황을 “행복 일기”로 만들었다. 여러분이 어떤 어려움이 지나고 계시더라도 교회가 고난을 겪더라도 아무리 큰 고통이 닥치더라도 삶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삶을 찬양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여러분 믿음의 기도로 변화시킬 수 있다. 바울과 실라처럼 여러분의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놀라운 기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여러분의 삶은 지금 이 순간 ‘행복 일기’가 될 수 있다. 여러분에게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첫 번째는 여러분을 묶고 있는 쇠사슬이 찬양을 부숴버리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다. 두 번째는 찬양을 통해 쇠사슬을 끊는 것이다. 이 말을 듣고 여러분은 “뭐라고요? 무슨 뜻인가요? 찬양이 쇠사슬을 파괴한다고요?” 라고 의아해 하실 수 있을지 모르겠다. 당시 상황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감옥에 갇혀있었다. 아마 어두웠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자려고 어떤 이들은 울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찬양을 부르기 시작한다. 바울과 실라 중에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잘 모르겠다. 어쨌든 둘 중 한 명이 찬송을 부르기 시작했다. 무엇을 불렀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찬송을 시작했다. 성경에는 찬송을 했다고만 나와서 어떤 곡인지는 알 수 없다. 상상의 나래를 펴보겠다.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뿐일세’ 라고 누가 먼저 찬송을 부르자 ‘무섭게 바람 부는 밤물결 높이 설렐 때 우리 주 크신 은혜에 소망의 닻을 주리라.’ 부터는 함께 부른다. 바울과 실라는 한목소리로 ‘주 나의 반석이시니 그 위에 내가 서리라 그 위에 내가 서리라’라고 불렀다. 정확하게 어떤 찬송을 불렀는지 모르지만 제가 상상해 봤다. 어쨌든 바울과 실라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다. 성경은 이때 다른 죄수들이 그들의 찬양을 집중해서 들었다고 말씀한다. 지옥과 같은 곳이 찬양의 장소가 되었다. 어둠의 장소가 빛의 장소가 되었다. 갑자기 바울과 실라의 찬양으로 감옥이 다른 곳이 되었다. 여러분, 바울과 실라는 쇠사슬이 찬양을 막지 못하게 했다. 바울과 실라의 찬양이 그들에게 역사하기 시작했다. 찬양이 쇠사슬을 끊은 것이다. 두 사람의 발은 묶여 있었다. 여러분이 찬양할 때, 여러분이 기도할 때,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을 때, 고난 가운데 여러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할 때 예수님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하실 것이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있었다. 그러나 감옥 안에서 자유로웠다. 이 상황을 자세히 보라. 찬양은 쇠사슬을 끊을 수 있다. 26절을 보면, *사도행전 16:26, 26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모든 감옥 문이 열리면서 쇠사슬이 다 끊어졌다. 우연의 일치인가? 여러분이 오늘날 어떠한 일들 가운데 있는지 모른다. 저는 확실히 믿는다. 여러분이 어떤 고난을 겪더라도 여러분의 찬양이 여러분을 묶고 있는 삶의 쇠사슬을 끊을 수 있다. 네. 맞다. 저는 여러분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여러분의 찬양이 여러분의 삶을 묶고 있는 쇠사슬을 끊을 수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안다. 찬양이 불안의 쇠사슬을 끊을 수 있다. 바울과 실라가 찬양을 부르자 감옥은 피난처로 바뀌었다. 지옥과 같았던 곳이 찬양의 장소가 되었다. 어둠의 장소가 빛의 장소가 되었다. 갑자기 바울과 실라의 찬양으로 감옥이 다른 곳이 되었다. 여러분, 바울과 실라는 쇠사슬이 찬양을 막지 못하게 했다. 바울과 실라의 찬양이 그들에게 역사하기 시작했다. 찬양이 쇠사슬을 끊은 것이다. 두 사람의 발은 묶여 있었다. 두 사람은 심하게 두들겨 맞아서 아파했다. 얼마나 아팠는지 그 고통 때문에 잠을 잘 수 없을 정도였다. 이런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사람인 바울과 실라는 찬양했다. 바울과 실라의 찬양은 어둠 속에 있던 사람들에게 희망을 줬다. 바울과 실라의 찬양은 지옥 가운데 있던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었다. 바울과 실라는 찬양이 그들을 자유롭게 했다. 두 사람은 자유로워지기 전에 이미 자유로워졌다고 말할 수 있다. 여러분이 찬양할 때, 여러분이 기도할 때, 여러분이 하나님을 믿을 때, 고난 가운데 여러분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실 때, 예수님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하실 것이다. 바울과 실라는 감옥에 있었다. 그러나 감옥 안에서 자유로웠다. 이 상황을 자세히 보라. 찬양은 쇠사슬을 끊을 수 있다. 26절에 보면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감옥이 흔들렸다. 모든 감옥문이 열리면서 쇠사슬이 다 끊어졌다. 우리의 일치일까? 여러분이 어떠한 일들 가운데 있는지도 모른다. 저는 확실히 믿는다. 여러분이 어떤 고난을 겪더라도 여러분의 찬양이 여러분을 묶고 있는 삶의 쇠사슬을 끊을 수 있다. 여러분은 아마 ‘목사님은 제가 지금 어떠한 상황인지 모르십니다.’라고 말씀할 수 있다. 네 맞다. 저는 여러분이 어떤 상황에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찬양이 우울의 쇠사슬을 끊을 수 있다. 찬양이 불안의 쇠사슬을 끊을 수 있다. 찬양이 고통의 쇠사슬, 실패의 쇠사슬, 죄의 쇠사슬을 끊을 수 있다. 지금 여러분은 어떤 쇠사슬에 묶여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번 특새 기간 동안 찬양을 통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쇠사슬을 끊어주시는 자유를 누리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삶을 묶고 있는 쇠사슬을 바로 이 자리에서 끊어 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저는 하나님께서 쇠사슬을 끊으시는 것을 많이 봤다. 바울과 실라에게도 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여러분의 쇠사슬도 끊어주실 것이다. 바울과 실라는 쇠사슬에 묶여 있을 때에도 하나님을 찬양했다. 그리고 여러분들 또한 찬양할 때 여러분들의 쇠사슬은 완전히 끊어질 것이다. ♣요약 바울과 실라처럼 여러분의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놀라운 기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음을 믿고 이 순간 찬양을 통해 쇠사슬을 끊는 것이어야 한다. 찬양할 때, 기도할 때, 하나님을 믿을 때, 고난 가운데 삶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하실 때, 예수님은 자유롭게 하실 것임을 확신해야 한다. 어떠한 어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찬양하면 바울과 실라처럼 주님은 기적으로 인도하심을 믿고 늘 찬양과 기도로 주님을 경배하여야 한다. ============================================================================ 제목: “주님과 동행” 말씀: 누가복음 24:13-17 설교자: 박신일 목사님(그레이스 한인교회) ▶할렐루야!! 기도제목이 있는가? 대답할 필요 없다. 인생이 다 기도제목이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기도제목이 있다. 왜냐면 우리 안에 죄 덩어리가 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 24:13-17, 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14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서더라. ▶할렐루야!! 기도제목이 있는가? 대답하실 필요 없다. 인생이 다 기도제목이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우리에게는 기도제목이 있다. 왜냐면 우리 안에 죄 덩어리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기도해야 될 줄로 믿는다. ‘하나님께서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이미 응답이 온 분들도 있고 아직 응답이 오지 않은 분들도 응답이 없는 분들은 응답이 오고 있는 줄로 믿는다. 한 가지만 더 질문을 더 해보겠다. “여러분이 원하는 대로 기도응답을 원하는가?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이루어지면 좋겠는가?” 거짓말은 하지 말구요... 우리 믿음의 왜 흔들리는가? 왜 믿음이 가리워지는가? 예수 믿는 우리들이 안 믿는 사람과 똑 같은 가치관으로 성공과 실패, 이 관점으로 내 인생을 쳐다보기 때문에 그 때마다 우리는 좌절할 때가 많다. 오늘 성경에 있는 믿음의 부활이 있기를 기원한다. 예수님은 부활하셨다. 부활 신앙으로 무장되기 바란다. 그래서 여러분 다 어디로 가냐면은 결국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도착할 줄 믿는다. 천국 가는 순례자이다. 우리 옆 사람에게 인사를 하겠다. “우리는 천국으로 가는 인생이다.” 라고 인사하기를 바란다. 부흥은 이 부흥이란 내가 하는 모든 것들이 주님이 원하는 것에 완전히 통제되는 것이다. 이 부흥이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다 죽을 것이다. 죄송하다. 아침부터,,, 그러나 부활할 것이다. 저희 아버님이 돌아가셨을 때, 제가 한국에 와서 장례 천국환생을 다 마치고 신고해야 할 것이 많았다. 무슨 신고를 해야 하는가? 사망신고이다. 이런 고민을 했다. 부활 신고는 없다지? 왜 우리는 부활 신고를 안 하는가? 오늘 예배 마치고 주민 센터에 가셔서 “나는 부활할 것입니다,”라고 해보라. 생각을 해보자. 우리는 사망신고를 할 줄 안다. 부활신고는 어디서 하는가? 자기에게 한다. 에베소서 2장에
*에베소서 2:6,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원래 성경에는 과거 동사로 되어 있다. ‘앉히셨으니. 앉히셨으니, 우리 모두는 신분이 하나님의 하늘나라에 앉아 있는 신분이다. 천국 가는 길이, 우리의 발이 천국에 닿아 있다는 것을 믿고 정말 멋진 그리스도인임을 축복한다. 오늘은 주제를 가지고 나누고 싶은 것이 있었다. ’하나님께서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여러분 구하는 기도에 응답이 왔고 오고 있는 줄 믿는다. 우리가 기도하면 계시록에 표현은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천사에게 받은 향로를 가지고 주께 가면 불을 담아서 다시 이 땅에 쏟아 부으신다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성령의 불이 담겨서 이 땅에 쏟아질 때, 우리 인생이 얼마나 놀라운 역전승이 일어나겠냐는 것이다. 일어나길 바란다. 그런데 오늘 나누고 싶은 것은 ‘하나님께서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저는 이것을 거꾸로 기도하고 싶다. 우리도 많이 구할 수 있다. 그런데 거꾸로 주님이 주시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이다. 저도 여러분도 우리가 구하고 싶은 것이 많은데 주님이 저에게 주시고 싶은 것이 무얼까? 오늘 이것도 깨닫고 가지고 가시길 바란다. 부활절이 끝나면서 부활에 대한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오늘 성경에는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실망한 표정으로 둘이 이야기하며 돌아가고 있다. 왜냐하면 그렇게 자신들이 섬기던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이다. 근심이 가득했다. 들리는 소문이 있는데 부활하셨다는 소문이 들린다. 아무도 본 자가 없다. 세상이 관점으로 패배감으로 걸어가고 있다. 오늘 이 말씀 중에 15절을 보겠다.
*누가복음 24:15,
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이들이 오늘 말씀을 보시면 슬픈 마음 중에 이들이 내려가고 있는데 특이한 구절이 있다. 서로 이야기하며 고민할 때, 예수님께서 가까이 이르러 동행하신다. 이 단어 하나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슬퍼서 내려가고 있는데 예수께서 정확히 와서 그들과 동행하신다. 그런데 16절에 보면,
*누가복음 24:16,
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주님이 오셔서 걸어주고 동행하고 계신데 이들은 눈이 가려져서 안 보이는 것이다. 저와 여러분의 신앙 여정 중에 믿음이 가려지는 경우가 있다.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닌데 믿음이 가려질 때가 있다.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나는가? 세상의 모든 관점으로 바라보면 이런 일이 종종 일어난다. 어려움이 어쩔 때는 겹쳐서 온다. 나 혼자 질 수 없는 것을 혼자 지라고 하는 것처럼 엄청난 고난의 짐을 져야 될 때가 있다. 성경은 예수님이 동행하고 있는데 이들은 알지 못한다. 예수님이 함께 걸어주시는데 예수님이 몰랐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참 재미있다. 17절을 보면,
*누가복음 24:17,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시니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서더라.
-오히려 질문하신다. 이들은 슬픈 동행과 여정을 하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냐? 이렇게 질문하신다. 그랬더니 두 사람이 슬픔 마음으로 머물러 섰다. 18을 보면,
*누가복음 24:18,
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이 예루살렘에 체류하면서도 요즘 거기서 된 일을 혼자만 알지 못하느냐.
-이 사람이 해주고 싶은 이야기는 우리가 그렇게 사랑하던 예수님이 죽으셨다고,,, 아니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가는 길인데 예루살렘에 내려와서 모든 사람이 아는데 왜 당신은 모르냐고 이렇게 이야기 하는데 그 분이 누구인가? 우리가 이럴 때가 종종 있다. 아니 무슨 일 하느냐? 아니 예루살렘에 내려가는데 예수님이 죽으신 거 모르냐고 한다. 믿음이 있는 건가? 없지는 않다. 여러분 없지 않는다. 있는데 발휘가 안 되는 것이다. 왜? 다른 것이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문제가 앞을 가리고 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우리 믿음은 죽지 않는다. 진짜 믿음은 없는 것처럼 보여도 믿음은 결코 죽지 않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그 믿음이 살아있도록 도와주시는 분이시다.
*누가복음 24:19-20,
19 이르시되 무슨 일이냐 이르되 나사렛 예수의 일이니 그는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이거늘.
20 우리 대제사장들과 관리들이 사형 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이들은 슬픈 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다. 왜? 주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주님이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동행하고 걸으면서도 주님이신 줄 모른다. 죽으신 예수가 압도하고 계신 상황이다. 21절에 보면,
*누가복음 24:21,
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이뿐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사흘째 절망하고 있다. 저는 이 구절이 역사적인 구절이라고 생각한다. 한 번 따라 해보라. “이 일이 일어난 지가 사흘째요.” 주님이 어떻게 되셨는가? 죽으신 지가 사흘째이다. 왜 역사적인 구절이이냐면 사람이 하나님을 염려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지가 주님을 염려한다. 돌아가셨는데, 이들은 매우 낙심한 상태로 절망으로 엠마오로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면서 이어지는 동안 대화는 22절에 있다.
*누가복음 24:22-2,
22 또한 우리 중에 어떤 여자들이 우리로 놀라게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23 그의 시체는 보지 못하고 와서 그가 살아나셨다 하는 천사들의 나타남을 보았다 함이라.
-이것을 본 적이 없는 것이다.
24 또 우리와 함께 한 자 중에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과연 여자들이 말한 바와 같음을 보았으나 예수는 보지 못하였느니라 하거늘
-소문은 도는데 만난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슬픈 동행을 하고 있다. 주님이 계시는데 없는 것처럼 그 길을 걷고 있다. 이 본문을 다른 관점에서 이들은 기쁨 가운데 걸어가는가? 실망과 낙심 가운데 걸어가는가? 영적으로 패배감으로 걸어가고 있다. 왜? 우리 주님이 죽으셨기 때문이다. 이제 제가 이 똑 같은 것을 다른 관점으로 설명해 보겠다. 여러분들이 대답을 잘 해 주기를 바란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패배당한 것처럼, 고난이 압도할 때 실패한 거처럼 이렇게 살아갈 때가 있다는 것을 아신다. 그때 우리가 이런 관점으로 살아가고 있을 때, 오늘 성경은 예수님이 나타나셔서 그들과 동행하고 있다는 말씀인데 이들은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질문이 뭐냐면, 우리가 이렇게 비참한 영적 상태가 있다는 것이다. 그때 우리 주님은 나에게 관심이 있으신 것이다. 이 성경은 무엇을 이야기 하는가? 내가 영적으로 믿음이 영적으로 쓰러지고 그런 때가 왔을 때, 우리 주님은 나를 돌보시는가? 나에게 관심이 있으신가? YES? NO? 이 본문을 다른 관점으로 보면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다. 이들이 영적으로 지쳐 있을 때, 어디로 가는지 주님은 아시고 그 자리에 정확히 오셔서 그들과 동행해 주신다. 우리 주님은 이들의 마음속에 있는 혼란을 아신다. 본문이 우리에게 주는 은혜가 뭐냐면 우리가 힘들고 지치고 믿음이 발휘를 못하고 고난이 압도하는 이 상황에 우리 주님이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상태인지, 그 자리에 오셔서 우리 걷고 계신다는 것을 너희는 믿냐고 하신다. 이것을 깨닫게 해주시는 말씀이다. 그들은 몰랐지만 그들과 함께 걸어주고 계시는 것이다. 이들의 입장에서는 주님이 안 계신다. 주님의 부재(不在)이다. 오늘 성경은 거꾸로 말씀한다. 주님이 안 계신 것처럼 느끼는 순간에도 주님은 완벽한 임재로 동행하고 계신다. 오늘 이 새벽 제단에 주님이 동행하시는 눈이 활짝 열리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아멘!.....시편 139편에 그분은 내가서고 앉고를 아신다.
*시편 139:2,
2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주님은 내 혀의 말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다. 우리가 신앙생활로 걸어갈 때, 하나님의 부재를 느낄 때가 있다. 그런데 이 본문은 다른 관점으로 보면 그때도 내 곁을 걸어주고 계신다. 이것을 보는 날이 되기를 바란다. 부활신앙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누가복음 24:25-,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우리 주님은 이들에게 성경 말씀을 기억하게 하신다. 말씀으로 26절에 보면,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미 메시아가 죽을 것과 부활의 일을 약속대로 되어 있다는 것이며 그들을 말씀으로 돌아가게 한다. 믿음은 들음에서 날 줄 믿는다. 27절에 보면,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구약이다. 율법과 선지자는 구약이다. 어떻게 부활하신 것을 다 설명하신다. 저는 감사한 것이 있다. 우리 주님은 이들의 믿음을 회복시키시는데 말씀을 사모하게 한다. 그리고 28절에 보면,
28 그들이 가는 마을에 가까이 가매 예수는 더 가려 하는 것 같이 하시니.
29 그들이 강권하여 이르되 우리와 함께 유하사이다 때가 저물어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나이다 하니 이에 그들과 함께 유하러 들어가시니라.
-예수님이 억지로 머무시는 것처럼 거기에 유하시러 들어가신다. 이제 문제는 그 다음이다. 30절에 보면,
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 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니.
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 예수는 그들에게 보이지 아니하시는지라.
-어떤 상황인지 이해할 것이다. 눈이 가리워졌고 다 수동태이다. 내가 가린 것이 아니라 열리어졌고, 열릴 때도, 눈이 밝아졌다. 그래서 그분이 누구인가? 예수님이신 것이 깨달아진 것이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줄로 믿는다. 오늘 아침 부활의 주님을 여기 계신 것을 목격하고 체험한 것을 믿기를 바란다. 주님은 부활하셨다. 아멘. 예수님인지 알아봤는데 그 순간에 어떻게 되었는가? 부활의 몸으로 자유롭게 되었다. 예수님인 줄 알았는데 사라졌다. 정말 재미있는 말씀이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이제는 같이 안 계셔도 된다. 왜? 알았기 때문이며 부활을 봤기 때문이다. 먼저 이야기 해보자. 어느 시점에 눈이 열렸는지, 어느 시점에 눈이 열렸는가? 30절에 다시 보면 성만찬 하시듯이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그들에게 주신다. 물론 이 눈이 열리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말씀을 풀어주시니 말씀이 깨달아지고 신기한 것은 축사하시고 주님이 떡을 떼어 그들에게 왜 이때 먹는 것이 중요한가? 이 답은 무조건 상상이 아니라, 기독교 역사에서 해석해온 것이 있다. 이 사건 이후에 제자들에게 나타나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신다. 제가 이 해석을 본문 속에서 해석한 것이 있다. ‘떡을 떼어 주실 때.’ 주님의 손을 본 것이다. 그분의 손에는 못 자국이 있었다. 예수님이 이후에 주님의 손과 발을 보여주신다.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신다. 이들은 충격이었을 것이다. 주님이 살아나신 것이다.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순간 주님은 떠나셨다.
여러분,주님은 떠나셨다. 주님의 물리적으로 부재, 주님의 부재, 그런데 여러분, 놀라운 것을 아는가? 이제부터는 동행이시다. 할렐루야!! 내가 주님을 보았기 때문에 안 계시는데 동행이 시작된다. 주님이 나를 아신다는 것, 그 사람은 동행이다. 주님이 나를 찾아주셔서 아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여러분, 물리적으로 안 계셔도 동행이다. 이 동행이 회복되는 귀한 성도님들이 되기를 바란다. 무슨 일을 만나도 동행이다. 내가 죽일 일을 당해도 동행이다. 내가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나니. 사나 죽으나 나는 주의 것이다. 아멘!! 여러분, 거룩한 동행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아멘...
주님이 사라지셨다. 동행하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이 대화를 한다. 32절에 보자.
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내가 믿는 믿음이 확인되고 그 마음에 뜨거워지지 않느냐고 하신다. 여러분, 이스터 파이어, 이스터 파이어, 부활을 만날 때, 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이다. 오늘 이 새벽에 기도할 때 이 불이 떨어지기를 바란다. 이스터 파이어!!!~ 하나님의 불이, 동행하시는 불이 우리 가슴에 새겨지는 아침이 되기를 바란다. 문제만 보이던 사람이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 동행의 능력, 이 놀라운 이 능력이 가슴 속에 떨어져서 주님, 할렐루야!! “저는 주님과 오늘도 동행합니다.” 우리 마음 뜨겁지 아니하냐? 고 하신다. 그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을 만나신다. 그리고 44절에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가복음 24:44,
44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45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46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47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48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뭐에 중인이라 하시는가? 부활의 증인이다. 기독교인은 부활의 증인이다. 아멘. 성경은 4복음서 모두가 부활로 끝을 맺는다. 부활이 끝이 아니다. 승천하시고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신다. 다시 오셔야 역사가 완성된다. 그런데 승천하시기 전에 주님이 하신 것이 무어냐면, 사명을 주신다. 다시 올 때가 할 일이 있다고 하신다. 인생이 무엇인가? 기독교인 존 버네인이다. 오래전에 주님이 꿈속에 나타나셨다. 이런 질문을 하셨다. 너 인생이 무엇인지 아니? 라고 하셨다. 인생은 제가 들었던 가요 중에는 것은 인생은 미완성이라고 안다. 꿈속에 듣고 있는데 주님이 저에게 하시는 말씀이 “너 초등학교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심부름 시킨 적이 있지? 돈 주시면서 이것 좀 사와라.” 저의 어린 시절에 꼭 이 두 가지를 사오라고 하셨다. 공감하는 분들은 두부와 콩나물을 사오라고 하셨다. 고개 끄덕이는 사람들은 다 55세 이상이다. 그런데 그 돈을 가지고 두부 콩나물 사러가는 길은 유혹의 길이었다. 저희 때는 12시에 만나요. 부라보콘, 등을 아시는 분도 50대 이상이다. 그 부라보콘이 얼마나 먹고 싶은지, 이것을 사면 이것을 못 사니까, 그 다음에 나왔던 것이 누가봐, 등, 그것을 먹으면 그냥 헤븐이다. 그런데 이 돈을 들고 이걸 사먹고 싶은 유혹, 저는 그때 초등학생의 고뇌가 무언지 안다. 그러나 그 모든 유혹을 물리치고 돌아왔을 때, 온 가족이 모여 콩나물국을 먹고 두부요리를 먹을 수 있었다. 주님이 꿈속에 주신 것은 “인생은 내가 너한테 맡긴 것이다. 심부름 잘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라고 꿈속인데도 눈물이 났다. 왜? 심부름을 못해서, 인생이란 여정은 30년을 살아도, 100년을 살아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맡기시는 때가 다시 온다. 우리 손에 쥐어주시는 것을 잘 하고 집으로 와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성도가 되시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증인이 되라고 하시고 49절에 보면,
49 볼지어다 내가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 이 성에 머물라 하시니라.
-이성에 머물고, 성령에 머물라고 하시고.
50 예수께서 그들을 데리고 베다니 앞까지 나가사 손을 들어 그들에게 축복하시더니.
51 축복하실 때에 그들을 떠나 [하늘로 올려지시니].
52 그들이 [그에게 경배하고] 큰 기쁨으로 예루살렘에 돌아가.
53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니라.
-늘 성전에서 하나님을 찬송하리라. 여러분이 오늘 하신 것처럼, 이 말씀을 마지막 절에 하시냐면, 주님은 어떻게 하시는가? 주님은 어디계시는가? 승천하셨다. 물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올라가셨다. 주님은 떠나셨다. 그러나 떠나셨는데 큰 기쁨으로 늘 찬송하고 있다. 내 질문은 주님이 안 계시는데 왜 찬송하는가?이다. 안 계신데, 계시는 것이다. 주님은 물리적으로 육체적으로 승천하셨는데, 그들은 분명히 알게 되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았다. 주님이 동행하시는 것을 알아채는 것을 주님의 이름으로 확신한다. 이 똑 같은 상황에서 마태복음 28장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면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나서 마태복음 28장 20절에 주님이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28:20,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우리의 상상이 아니다. 우리의 믿음이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이들과 함께 계시던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난 다음에 승천하셨다. 물리적으로 떠나셨다. 완벽한 부재이다. 완벽히 안 계시는데, 완벽한 임재를 동행을 믿고 살아가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다 완벽한 임재와 동행을 누리고 사는 온 교회 성도가 되기를 바란다. 그 사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 나냐면 ‘늘 찬송 하겠네’ 이다. 늘 모여서 주님을 찬송하는 것이다. 무슨 일을 만나든지, 주님을 찬송하는 회복이 있기를 바란다. 어떤 사람에게냐면, 주님과 동행을 믿는 사람이 가능하다. 마지막 한 사람 이야기를 하고 마치겠다. 성경을 보면 마태복음 15장에, 마가복음 7장에, 마가복음에는 수로베니게 여인이 나오고, 마태복음에는 똑 같은 여인인데, 가나안 여인으로 나온다. 아방 여인들은 유대인들은 ‘개’라고 이야기 한다. 정말 유치찬란할 정도로 아주 비극적이다. 지금 미국에서는 유대인들이 많이 사는데 유대인들은 지금도 안식일에는 걸어 다닌다. 회당에도 절대 차를 안탄다. 안식일 전날 불을 켜 놓는다. 실수로 불을 못 켰으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불을 켜 달라고 한다. 이게 유대인이다. 철저하다. 이 가나안 여인이 예수님께 달려와서 내 딸이 귀신 들렸으니 도와달라고 한다. 제자들이 이방여인을 가라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있다. “나는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을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다.” 라고 말씀하신다. 이 여인은 포기하지 않는다. 어떻게 하냐면 딱 엎드려 버린다. 주여, 저를 도와주십시오. 라고 한다. 저는 성경을 읽다가 이렇게 주님이 차가우신 것을 처음 보았다. 살려 달라고 하는데, 나는 너한테 오지 않았고 이스라엘 잃어버린 양을 위해서 왔다고 하신다. 신가한 것은 마태복음 15장에 말씀이 나오는데 28장에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로 삼아, 라고 하신다.’ 저는 이 넌센스를 푸는 방법이 1번 마태가 졸다가 기록했다. 2번 예수님이 말씀이 왔다 갔다 하셨다. 3번 모르긴 몰라도 깊은 뜻이 있을 것이다. 몇 번인가? 3번, -대한민국은 객관식에 천재이다.
복음서를 읽어보면 구속을 완성할 때까지는 비밀이다. 십자가에 구속하시고 부활하신 다름에 더 이상의 복음서는 없다. 그때부터 땅 끝까지 가라고 하며 우리 주님은 제자들 앞에서 엎드려 다시 그 여인을 말한다.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것을 개에게 주는 게 마땅치 않다고 하신다. 유대인들은 기뻤을 것이다. 당연이 유대인들에게는, 그때 이 여인이 “주여, 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진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라고 한다. 이 장면에서 예수님의 태도가 바뀐다. 하시는 말씀이 “네 믿음이 크도다.” 하신다. 알고 계신 것이다. 이 때 유대인들 제자들은 당황했을 것이다. 개라고 내보내고 개라고 우겨야 되는데, “네 믿음이 크도다. 네 믿음대로 될지어다.” 저는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이런 응답을 받으면 얼마나 좋은가!!이다. 주님이 나타나셔서 네 믿음이 크다. 라고 하신다. 제 질문은 주님이 이 여인에게 해주고 싶었던 본심은 무엇인가? “안 돼, 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왔어.” 이것이 주님의 본심인가? 아니면 제자들에게 알려주기 위해서 이 여자는 진짜 안아주고 싶으신 건가? 저는 아무리 읽어봐도 이 여자의 믿음을 드러내고 싶으신 것이 주님의 본심이었던 것을 알게 된다. 더 놀라운 사실은 집에 가서 읽으실 말씀이 많다. 마태복음 15장과 마가복음 수로베니게 여인과의 위치가 어디에 있냐면 놀랍게도 똑 같이 이 부스러기를 얻어먹는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는 이 여인의 앞 이야기는 오병이어 오천 명이 배불리 먹은 이야기가 나온다. 이 여인이 먹은 다음에는 사천 명이 먹은 기적이 나온다. 성경은 어마한 풍성한 음식이 두 가지 음식 사이에 부스러기 얻어먹는 이야기를 끼어넣고 있다. 오천 명을 먹이신 다음에 요한복음에 수많은 사람들이 따라온다. 그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너희가 나를 찾는 까닭은 먹을 것을 위해 배부른 까닭이요, 너희는 세상에서 잘 되기 위해서 나를 쫓아온다.” 주님이 하신 말씀은 “나는 생명의 떡이니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 왔다.”라고 말씀하신다. 이 어마어마한 것을 먹는 사람들에게는 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전부였다. 그 사이에 열 두 광주리가 아니라, 부스러기를 먹는 이 여인의 믿음을 드러내신다. 오늘 강대상에 올라오신 분들은 부스러기를 드시려고 올라오셨다. 모두가 다, 저는 이 여인의 마음을 나누고 마치겠다. 내가 믿는 예수님, 저 여인은 이방여인이지만 저분이 예수님이신 것을 알았다. 그리고 여러분, 끝까지 매달린다. 메시야는 저를 못 버리신다. 주님은 저를 못 버리신다. 오늘 우리의 기도할 때 이런 기도가 있기를 바란다. 부흥은 겸비할 때 온다. “주님, 저 못 버리신 것 알아요”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허락하신 줄 믿는다. ♣요약
우리가 믿는 주님은 부활하신 주님이시니, 승천하셨고, 다시 오실 주님이오니 오늘 우리가 특새의 주제처럼 하나님께서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다고 하셨으니 내가 믿는 주님은 나를 못 버리심을 믿고 부스러기를 주시더라도 좋으니 우리 가정과 일터와 교회, 그리고 우리나라의 모든 문제들을 해결해 주시길 간절히 기도하며 주님이 주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서 동행하고 계심을 믿고 우리는 늘 찬송하고 완벽한 부재이지만 완벽한 임재이심을 믿고 살아가는 믿음의 성령의 불이 우리 가슴에 임하시고 동행의 축복이 임하시길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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