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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차 봄 글로볼 특별새벽부흥회(하나님께서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
(주후 2023년 4월 11일)-둘째 날(화)
제목: "에즈버리 부흥을 묵상하며"
말씀: 마태복음 5:6
설교자: 케빈 브라운 박사님(애즈버리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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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령의 신음”
말씀: 에베소서 6:18
설교자: 김한요 목사님(LA 베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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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5:6,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에베소서 6:18,
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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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빈 브라운 박사님(애즈버리대총장)-"에즈버리 부흥을 묵상하며“
*마태복음 5:6,
6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애즈버리 대학교에서 인사드립니다. 저는 미국 켄터키주 월모어에 있는 애즈버리 대학교 18대 총장인 케빈 브라운이다. 저는 미국 켄터키 주 월모어에 있는 애즈버리 대학 총장이다. 39개 주의 280개 이상의 대학교에서 방문객들이 찾아왔다. 사랑의 교회 글로벌 특새에서 말씀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드린다. 지난 2월에 애즈버리 대학교 캠퍼스에서 며칠 동안 이어진 집회에 대해 여러분과 나눌 수 있어서 참으로 기쁘게 생각한다. 우리 인간의 언어에는 한계가 있다는 말씀을 먼저 드리고 싶다. 지난 2월에 16일 동안 제가 경험한 일은 평생 보지 못한 일이었다. 사람의 말로는 그 16일 동안 보고 느낀 점을 온전히 다 표현하지 못할 것이다. 욥기서에 보면, 욥은 하나님께 자신이 겪은 고난에 대해 불만을 토로한다. 하나님은 욥에게 계속 질문을 던지신다. 욥기 42장에서 욥은 이렇게 말한다.

*욥기 42:3,
3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욥기의 문맥과 다르지만 저도 비슷한 입장에 있는 것 같다. 제가 확실히 못하는 것을 말하고 싶지는 않다. 애즈버리 대학교에서 일어난 일이 너무 놀라워서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 애즈버리 대학교에는 일주일에 세 번 채플이 있다. 이것은 애즈버리 대학교가 설립된 이래로 계속 이어진 전통이 앞으로도 계속 일주일에 세 번 예배를 드릴 것이다. 여러 방면에서 2월 8일에 있었던 채플은 어느 예배와 다를 바 없던 예배였다. 수요일 아침. 저는 제 사무실에서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렸다. 설교 후 찬송을 부르고 예배는 끝난 상황이었다. 저는 제 책상에서 일어나 예정된 회의에 들어갔다. 이후 점심을 먹으려고 하는데 아내가 저에게 학생들이 아직도 채플에서 찬양하고 있다는 문자를 보냈다. 더 많은 학생들이 모이기 시작하더니 늦은 오후 즈음에 뭔가 특별하고 이전과는 다른, 게획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그 시간 동안 직접보고 느끼고 경험한 말로 표현하는 것은 쉽지 않다. 16일 동안 이어진 집회에서 5만 명이 다녀갔다. 수백만 명이 ‘애즈버리 부흥 해시태그가 달린 게시물을 찾아봤다. 39개 주의 280개 이상의 대학에서 방문객들이 찾아왔다. 미국과 해외 전역에서 목마르고 절박한 영혼들이 휴즈 강당으로 왔다. 말 그래로 모든 족속과 언어와 민족이었다. 멀리서 함께 참여하려는 사람들을 위해 우리는 다른 장소들과 혐력해서 밤새도록 현장을 생중계할 수 있었다. 저는 이렇게까지 하나님을 구하고 회개하는 절박한 영혼들이 모이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그리고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간증하는 모습도 처음 보았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따뜻하게 사람들을 맞이하고 선의를 베푸는 모습을 처음 보았다. 당시 분위기는 정말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이를 두고 ’성령님의 조용한 임재‘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는 겸손, 긍휼, 하나님의 사랑, 적나라한 고백, 회개, 풀어진 속박, 무너진 견고한 진, 축성,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증거, 진실한 기도, 삶을 바꾸는 헌신을 봤다.

저는 우리 대학 학생들이 최선을 다하는 멋진 모습을 봤다. 모두가 자기 할 일은 뒤로 한 채, 재정비하며 지치지 않고 일했다. 때로는 밤낮으로 일하며 질서 정연하고 방문객을 환영하는 환경을 만들고자 애썼다. 점점 지역으로 몰려드는 사람의 수가 많아지자 리더들은 빠르게 대응하고 협력해야만 했다. 질서가 세워졌는데, 그것은 사람의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었다.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잘 드러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고, 이는 일부러 만들어 내거나 조작할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힘으로 만든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이 상황을 그저 받아들였다. 상황을 보고 대처하는 이 모든 일에 ‘신뢰’가 이었다. 변화로 인해 신뢰의 단계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상황을 대처하는 이 모든 일에 ‘신뢰’가 이었다. 변화로 인해 신뢰의 단계가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 이 역사적인 애즈버리 부흥집회를 위해 애쓴 사람들 속에는 깊은 신뢰가 자리 잡았다. 이 기간 동안 애즈버리 대학에서 일어나는 일을 설명하는 뉴스와 SNS가 쏟아졌다. 많은 사람들이 전 세계가 보는 가운데 벌어지는 이 일에 이름을 붙이고 싶어 했다. 부흥인가, 아니면 갱신인가? 성령의 부으심인가? 대각성인가? 대체 이 일을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가? 모두가 목도하는 이 시ㅏ건에 가장 맞는 신학적 용어는 무엇일까? 애즈버리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해석을 보면서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시각 장애인이 때문인가? 그의 죄 때문인가? 아니면 그의 부모의 죄 때문인가? 예수님이 이 시각 장애인의 눈을 뜨게 해주신 후에 바리새인들은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싶어서 이 사람을 불렀다. 바리새인은 예수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죄인인지를 물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유명한 대답을 했다.

*요한복음 9:25,
25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사람들은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장기적으로 어떤 영향이 있을지를 궁금해 한다. 또는 이 현상이 부흥인지 아닌지 묻는다. 이에 대한 저의 대답은 ‘모른다’이다. 그 시각 장애인처럼 저도 ‘제가 아는 것은 이것이다.’라고 답할 뿐이다. 5만 명의 목마른 영혼들이 이 예수님을 찾으려고 한 자리에 모였다. 저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목마름에 응답하시는 것을 봤다. 우리 가운데 어떤 움직임이 있었던 것을 안다. 그리고 그 움직임이 달콤하고 부드럽고 선하고 의롭고 진실하다는 것을 안다. 사람들이 짓눌려 있던 삶의 속박에서 벗어났다는 것을 안다. 우리가 생각지도, 만들지도 못하는 방식으로 나타 나셨다는 것도 안다. 우리가 예전과 같을 수 없다는 사실도 안다. 제가 아는 건 이것이 전부이다. 그리고 이 현상은 인간의 노력이나 재주 때문에 시작되지 않았다는 것 역시 안다. 애즈버리 대학이기 때문에 일어난 일도 아니다. 미리 계획한 일이나 프로젝트도 아니었다. 전문 찬양 팀이나 유명한 설교자로부터 비롯한 일도 아니다. 돈을 많이 쓴 마케팅이나 광고 캠페인의 산물도 아니다. 제가 본 것은 더 깊고, 더 진실하고, 더 충만한 것을 바라는 절실함과 영혼의 목마름이었다. 하나님께서 이에 응답하셨다.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과 화목하고 이웃들과 화목하고 싶은 자들은 복을 받을 것이다. 이를 추구하는 자는 배부를 것이다. 예수님은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과의 화목이 제일 우선인 이들에 대해 말씀하신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핵심을 알게 되었다. 이 현상은 그리스도의 연합을 아름답게 보여주는 모습인 것 같다. 우리는 연합에 대해 이야기 할 때, 인간의 담론으로 여기거나 바람직한 조직 같은 희망사항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기독교 전통에서 연합은 희망사항이 아니다. 사도행전 4장 32절에서 연학은 요구이다.

*사도행전 4:32,
32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행전에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한마음 한 뜻이 되었다고 말씀한다. 고린도전서 10장은 성도들이 한 마음 한 뜻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한다.

*고린도전서 10:17,
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갈라디아서 3:28,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바울은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리고 에베소서 4장에서 그리스도인은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는 일에 힘써야 한다고 했다. 바울은 로마서 6장 5절에서 우리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같은 죽음 즉, 우리 자아와 죄를 죽임으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파격적인 말을 했다.

*로마서 6:5,
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요한복음 17장에는 연합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나온다. 예수님은 획일성이 아닌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 되는 것과 같은 연합을 찬양하셨다. 예수님은 한 번만 언급하신 것이 아니라, 다섯 번이라 기도하셨다. 성경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하나 되라는 이 분명하고도 구별된 부르심을 간과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연합은 제자와 공동체룰 향한 요구이다. 오랫동안 저는 기독교 내의 분열이 심화되는 모습에 무거운 마음의 짐을 느껴왔다. 우리 중에 분열에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없다. 연합에 대해, 특히 어떻게 하면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연합을 이룰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은 많을 것이다. 저는 시간이 갈수록 우리의 자아가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만이 유일한 답이라고 확신한다. 예수님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무슨 뜻인가? 어떻게 하면 되는 걸까? 저는 겸손이라는 뜻이라고 생각한다. 완전히 엎드리는 것이다. 예수님이 만물을 다스리는 통치자라고 인정하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런 모습을 ‘십자가를 본받는 삶’이라고 말한다. 저는 ‘자신을 비우고 하나님의 가득 찬 삶’이라고 말한다. 이런 삶이 요한복음 17장에서 말하는 연합이라고 생각한다.

*열왕기하 10:15,
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본문으로 한 존 웨슬리의 유명한 설교가 있다.
※“네 마음이 네 마음을 향하여 진실함 같이 네 마음도 진실하냐... 그러면 나와 손을 잡자.”
-존 웨슬리-
-네 마음이 옳고, 내 마음이 옳고, 우리 마음이 옳으면 다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을 경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애즈버리 대학교 캠퍼스에서 목도한 놀라운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은 그리스도의 응답이다. 지난 몇 년 동안 우리가 어떤 상황 속에서 있었는지 생각해보자. 세상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살펴보자. 정치 양극화, 사회불안, 인종차별, 전쟁, 경제 불확실성과 더불어 코로나 펜데믹을 겪어야만 했다. 교회를 보자. 교회에 좋은 점이 많이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부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구언 사역을 위한 도구이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해결해야 할 과제들이 있다. 교회가 너무 시장화 되어 소모품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뉴스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교회의 타락을 보심 알 것이다. 신앙과 삶의 불일치를 보자. 주일과 월요일의 삶이 너무 다르다. 제자도의 잘못 된 개념도 보자. 제자도는 단순히 믿음을 확인하거나 전반적인 삶이 변하지 않고 교회 콘텐츠만 소비하는 것이 아니다. 나날이 떨어지는 교회 신뢰도를 보자. 사회 속에서 교회가 차지하던 중요도가 사라지고 있다. 특히 젊은 세대의 불안, 우울, 중독, 자살 충동이 심하다. 우리 안에 만연한 외로움도 보자. 21세기에 들어서 절망사가 점점 크기 늘어가고 있다. 스마트폰과 sns를 통해 이러한 불안정한 현상을 너무 많이 접하게 되어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어 가고 있다. 그리고 SNS로 인해 이념적 성향이 점점 고착화 되고 있다. 이런 모든 현상을 보고 새롭고 신선한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많은 이들이 의에 주리고 목말랐다.

최근 몇 주 동안 이들이 자유로워지고 치유 받고 화해하고 고백하고 죄와 짐과 두려움을 내려놓았다. 견고한 짐이 무너졌다고 간증했다. 누군가가 이를 두고 우리에게 영적인 눈이 있다면 풀린 쇠사슬로 덮인 제단을 볼 것이라는 멋진 말로 표현했다. 많은 이들이 갈등의 부재를 넘어선 이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평화를 경험했다. 또한 그들 안에 하나님의 영이 충만함을 경험했다. 이로 인해 새 생명을 느꼈다. 실제적이고 진실한 무언가를 갈망하는 마음이 있었다. 이는 그저 만족이나 화력하고 비싸고 최첨단이고 즐거운 것이 아니다. 실제적이고 선하고 올바르고 진실한 것을 바랐다. 그리고 많은 이들이 요한복음 17장에서 말하는 연합을 경험했다.

애즈버리 대학에서 일어난 이 역사적인 부흥집회에 대해 할 말은 많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바로 ‘그리스도 중심’이었다는 사실이다. 이 집회로 하나가 되었다. 이 집회로 겸손해졌다. 이 집회로 회개(悔改)했다. 이 집회로 자유로워졌다. 이 집회로 새 삶을 얻었다. 이것이 바로 저의 간증이다. 제가 본 것은 이것이다. 이 말로 마무리하고자 한다. 애즈버리 대학에서 일어났던 역사의 궤도는 더 뻗어 나갈 것이다. 불을 비유로 설명할 수 있다. 불은 가장 높게 치솟을 때 가장 밝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캠퍼스에서 엄청나게 커서 잊혀 질 수 없는 큰 영적 모닥불을 경험한 것이다. 불은 가장 높게 치솟을 때가 가장 밝다. 그러나 불길이 잦아들고 있을 때 가장 뜨겁다. 일어난 일이 잠잠해지거나 끝나 보일 때도 마찬가지이다. 제가 바라는 것은 애즈버리 대학에서 일어난 불이 꺼지지 않는 것이다. 저는 이 불길이 앞으로 계속 활활 타올라 번지기를 기도하고 있다. 불을 다시 비유로 들겠다. 전 세계의 다른 학교와 교회 사역 단체들이 이 불길을 이어받아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고 세상의 빛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 복음과 소망을 전하기를 기도한다. 그리고 긍휼한 마음으로 연약한 공동체를 섬기고 돕기를 기도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요약
우리를 변화시켜 주시고 구별하여 주시는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우리가 겸손해지고 이웃과 공동체를 도우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이 세상에서의 외적인 빈곤과 비천한 상태에 대한 계속적인 예로 이해한다. 그러한 상황에 처해 있을지라도 만약 그들이 선한 양심을 위해서 그리고 선한 양심을 가지고 이러한 곤란들을 겪는다면 그들은 복이 있다. 그러므로 고난을 받는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자. 심한 압제를 받으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처지를 변호해 주시도록 조용히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들은 때가 이르면 만족하게 될 것이다. 만족하되,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나타나실 때 보여 주실 지혜와 자비를 보고 크게 만족할 것이다. 의가 여기에서는 모든 영적 축복들을 가져오는 근거로서 제시된다. 모든 영적 축복들이 그리스도의 의에 의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새 사람이 되는 것,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는 것 그리스도와 그 약속들에 관심을 갖는 것, 이것들이 곧 '의'이다.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우리는 진정으로 그리고 실제로 의를 갈망해야 한다. 영적인 복들에 대한 우리의 갈망은 진지하고 끈질겨야 한다. 구해야 한다. 배고픔과 갈증은 자주 발생하는 욕구로서 새로운 만족을 요구한다. 소생한 영혼은 끊임없는 의의 양식을 요구하며 매일 매일의 일을 수행하기 위한 은혜의 양식을 필요로 한다. 주리고 목마른 자들은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애써 일할 것이다. 그처럼 우리도 영적인 복들을 바라야 할 뿐만 아니라 정해진 수단들을 사용하여 그 복들을 얻기 위해 수고해야 한다. 이처럼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들은 그와 같은 복들로 배부를 것이다. 첫째, 그와 같이 갈망하는 자들은 복이 있다. 은혜를 바라는 모든 욕구가 다 은혜는 아니지만(가장되고 희미한 욕구는 은혜가 아니다) 이와 같은 욕구는 은혜이다. 그것은 좋은 어떤 것의 증거이며 보다 나은 어떤 것의 보증이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이 일으키시는 욕구이다. 둘째, 그들은 그와 같은 복들로 배부를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바라는 것을 충분히 만족할 만큼 그들에게 주실 것이다. 영혼을 만족시킬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시며, 그의 은혜와 은총만이 영혼이 정당한 욕구에 적합하다. 하나님은 주린 자들을 배불리시되, 차고 넘칠 정도로 풍족히 주시리라 확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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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령의 신음”
말씀: 에베소서 6:18
설교자: 김한요 목사님(LA 베델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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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6:18,
18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풋볼에서 쿼터백은 사령탑의 지시를 받는다. 지상 현장에서는 전반적인 상황을 보는 시야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도 이 땅에서 살아갈 때는 잘 보이지 않지만, 위에서 보면 다 보인다. 모든 일을 영적으로 결부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역사와 악한 영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영적 전시 상황에 있다. 잠을 자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깨어 기도하라, 깨어 구하라는 말은 전시에 불침번 서듯이 그 연통을 유지하라는 말이다.

I. 깨어 구하라
-‘기도’란 전시상황의 워키토키와 같다. 인생이 전쟁임을 믿기 전 까지 기도가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 수 없을 것이다 기도는 전시에 사명 완수를 위한 것이다’ - 존 파이퍼 - 기도를 그러한 의미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집의 초인종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다.

II.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1) 기도의 폭은 인격의 폭이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의 최대 궁극적인 신분은 우리의 기도 생활로 그 인격이 측정된다. 이것은 말씀에 대한 지식이나 이해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다. 나에게 있어 성경에 지식보다 저 중요한 것은 딱 하나이다. 그것은 기도이다. 나의 성경에 대한 이해와 지식은 나의 기도하는 양에 절대적으로 비례하기 때문이다.’-마틴 로이드 존스 -

2) 기도는 나의 정체성
-기도는 인격을 넘어 정체성이다. 기도를 듣고있다보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의사였지만 뒤늦게 사명을 받고 목회의 길을 걷게 되었다. 말씀에 대한 집중력과 강해 력이 탁월하시다. 그렇게 지적으로 말씀을 깊게 탐구하시는 분이 말씀에 대한 지식이나 이해력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라고 말씀한 것이다. 들어보면 그 사람의 정체성을 알 수 있는 엄마의 기도, 남편의 기도, 순장의 기도, 담임목사의 기도가 있다. 정체성을 기도로 드러내기를 바란다.

3) 기도는 하나님과의 사귐-주님과 친밀하라.
※-‘제가 다시 강조하는 사실은 크리스천의 삶은 기도드리는 시간의 양으로 궁극적으로 검증된다. 그러나, 저의 말은 오해를 유발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의무라고 말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맞다 기도는 의무이다. 그러나, 의무 그 이상이다. 기도는 기쁨이며, 크리스쳔의 삶의 가장 궁극적인 표현이어야 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

-이는 기도를 많이 한다고 장땡이라는 것이 아니다. 만일 그렇게 말한다면 그것은 정확히 바리새인의 모습이다. 기도는 인격의 폭, 됨됨이 라고 하였다. 그러나 기도의 양은 그 이상을 말해준다. 3분이면 기도가 금방 끝나는 사람들이 있다. 미국에서 오래 산 한 성도가 간만에 재회한 부모님과 30년 동안 못 만났다가 만나니까 할 말이 없다고 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할 말이 없다고 하면, 그간 떨어져 지냈다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도는 관계이자 교제라 할 수 있다. 기도의 양은 친밀성이자 관계의 밀도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요한복음 17:3,
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 하였다. 기도를 들어보면 그가 예수님과 친한지 알 수 있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는 아래 구절과 상통한다.

*빌립보서 4:6,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모든 형태의)와 간구(간절한 특별요청)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기도의 능력은 화려한 문장에 있지 않다. 기도의 생명력은 간절함에 있다. ‘주여!’는 ‘당신만이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십니다.’라는 뜻이다.

※마치 막내딸이 아빠에게 선물을 구하고 받는 과정처럼 간절히 아뢰는 것이 중요하다. 막내딸의 요청이 해외에 나가면 아른거린다. 이처럼 우리의 기도도 하나님이 아른거리시지 않을까? 그런 기도와 응답이 있기를 바란다.

III. 성령 안에서 기도
-기도는 요술방망이가 아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한다는 적절한 범위가 있다. 그렇다면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가 무엇일까?

*로마서 8:26-27,
26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27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희망찬 것은 우리가 기도를 잘 못할지라도 그에 대해 주께서 원하시는 최선을 우리에게 응답하신다는 점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신다. 하나님 아버지가 알아들으신다. 또박또박 멋있게 하는 기도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절박함으로 간절함으로 주의 이름을 외칠 때 성령께서 중보 하신다. 하나님의 놀라운 기도응답의 역사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한다.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를 중보기도 해주신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의 축복이다. 성령께서 탄신하며 신음하며 기도하신다는 것이다. 음!!~~ 라고 해도 다 아신다.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초심으로 새롭게 시작하는 특새에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있기를 소원한다.

♣요약
연약하기 짝이 없고 어떻게 기도할지 모르지만 주님 안에 있기에 성령 안에 있음을 믿고 성령의 도고와 중보를 기도해야 한다. 주님 앞에 외치는 기도가 간절하게 상달되어서 모든 기도가 응답되기를 소원하며 주님의 뜻이 우리의 삶 속에 일어나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가지고 주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교회와 가정이 영적 계보를 이어가기를 간절히 기도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음에도 응답해 주심을 믿고 늘 주관자이신 주님 앞에 모든 문제를 가지고 나아가 엎드려 기도해야 한다. 

-영적 전쟁의 수행 방법으로써 바울은 성령 안에서 항상 깨어 기도하되 함께 은혜를 나누는 주위를 위해 기도하고 복음의 비밀을 맡은 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밝혔다. 때로 이웃이 어려움을 당하여 권력에 복종할 때가 있다. 이럴 때는 힘을 다해 이웃을 격려하고 그들이 믿음 가운데 거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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