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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4년 7월 28일)
제목: "괴롭든, 외롭든 존재는 귀하다"
말씀: 창세기 1:1-3
찬양인도: 쉐키나(),영광찬양대
대표기도: 신성식 부목사님
사회: 임병영 부목사님
 
설교자: 전광식 목사님()
ㅡㅡㅡㅡㅡ
 
*창세기 1:1-3,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ㅡㅡㅡㅡㅡ
 
​▶연일 지속된 폭우와 폭염을 뚫고 우리를 위해 은혜스럽고 거룩한 예배의 자리에 불러주신 우리 하나님께 존귀(尊貴)와 영광(榮光)과 감사를 올려드립니다. 오늘날 우리가 하고 있는 대부분의 학문은 그 기원이 서양에 있고, 구체적으로는 고대 희랍의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연유(緣由)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철학자에 의하면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4가지 원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여러분이 지금 앉아 계신 의자를 경우로 생각하면 그 의자를 만든 재료가 되는 나무는 ⓵진료 인, 그리고 니은 자로 되어 있어서 그렇게 앉도록 되어있는 형태는 ⓶형상 인, 그리고 진료에서 형상으로 가는 목수의 손길은 ⓷동력 인, 그리고 여러분이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그렇게 만든 것은 그것의 ⓸목적 인 이라는 것입니다.
 
*재료인
*형상인
*동력인
*목적인
 
결국 재료에서 형상으로 힘이 가는 이유는 그 형상(刑象)의 목적(目的)을 이루기 위함이라는 주장(主張)입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을 포함한 모든 존재(存在)는 목적을 이뤄야 그 존재의 의미가 있고 목적의 구현(具現)이야말로 최고선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이것이 소위 목적론적 세계관(世界觀)인데, 이후로 서양 사회는 세상이나 존재를 목적적인 측면에서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 이러한 목적적인 측면에서 세상과 사람들을 바라보면 어떤 모습일까?
 
첫 번째로는, 먼저 부정적인 모습인데 목적이 없는 목적이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과 세상의 모습입니다. 사실 목적 없이 살아가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거나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인생관(人生觀)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창조주(創造主)가 없는 거고, 창조주가 없다면 세상의 모든 것은 창조되지 않는 것이고. 창조되지 않았다면 모든 것은 우연(偶然)의 산물이기 때문에 결국 아무런 목적이나 의미가 없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인간도 결국 이 논리에 의하면 운명의 장난에 의해서 세상이라는 들판에 내팽개치신 존재기 때문에 아무런 목적과 의미가 없게 됩니다. 자, 그러면 인간이 어떻게 살게 될까요? 목적과 의미가 없으니까 사람들의 삶은 대개 2가지 극단적(極端的)인 경향으로 흘러갑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니까 이들은 심판(審判)도 없고 지옥(地獄)도 없는 것입니다. 심판과 지옥이 없으니까 내세(來世)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지고 오로지 지상에서는 죄 승의 조종(操縱)을 받는 욕망에 따라가지고 욕망대로 살게 되겠죠. 결국에는 자기 안에는 욕망(慾望)이 있고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이런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다양한 놀거리, 볼거리, 재미거리들이 질펀하게 펼쳐져 있으니까, 결국 하나님 없는 사람들은 향락주의, 쾌락주의적인 인생관을 가지고 살면서 많은 경우에 소비 중독, 문화 중독, 마약 중독 그리고 퇴폐(頹廢)적인 삶으로 귀결(歸結)될 것입니다. 쾌락주의만 있는 것이 아니고 삶의 의미와 목적이 없다고 하는 거니까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은 맹목(盲目)성과 삶의 허허로움과 무의미성에 허무주의(虛無主義)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인생을 조금이라도 고민해 보는 사람은 죽고 나면, 내세도 없고 영원한 세계도 없는 것이니까, 산다는 것이 서글프게 생각이 되고 허무하게 생각되어서 염세적으로 염세주의(厭世主義)적으로 살게가 살 수가 있게 되고 그것의 극단적인 결과는 자살(自殺)입니다.
 
여러분, 실제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은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으니까 한 날개는 허무주의, 다른 날개는 쾌락주의의 날갯짓으로 산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이들과 반대로 의식이 있는 일반인들이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목적 중심의 삶을 주창을 하고 또 영위를 하고 있습니다.
 
20세기 들어서 ‘미국의 새들백교회의 닉 워렌이라는 목회자’가 있습니다. 이분은 쾌락주의와 허무주의의 거센 물결 속에서 삶의 길과 방향을 찾는 구도자들의 필요에 맞춰서 맞춤형 저서인 “목적이 이끄는 삶”이라는 책을 펴내었는데 성경 다음으로, 이것이 전 세계의 최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대 흥행을 하자 이어서 ‘목적이 이끄는 교회’라는 책을 내어서 오늘날도 세상의 많은 목회자들과 교회들이 이것을 도입하여 스터디까지 하고 있습니다. 하여튼 복음 중심보다 구도자(求道者)들의 필요중심에 맞춤형으로 다가가기에 아쉬운 점은 있다고 하더라도 일단 그가 인생의 목적을 신앙이나 하나님과 연관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그렇게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실은 이분이 목적을 정하기 전에 우리 장로교회가 흔히 신앙 고백으로 따르고 있는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도 제1문이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무엇이냐?’ 아마 저보고 하라면은 이걸 제 1문으로 하지 않고, 사람이 주체가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신 일이 무엇이냐?’ 저보고 하라면 그거 1문을 낼 겁니다. 하여튼, 이 질문에 대한 웨스터민스터 소요리 문답의 답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렇게 멋있는 답변을 하고 있습니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신약 성경에도 이런 목적 지향적인 언급이 곧장 등장을 합니다. 이를테면, 사도바울은 푯대를 향하여,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고, 달음질하고 달음박질한다. 이런 표현이 엄연히 나와 있습니다. 자 이렇다 보니까 우리 그로스도인들은 일반인들보다 훨씬 과도하게 목적 중심의 삶을 영위합니다. 이렇게 목적 중심의 삶을 영위하는 것은 긍정적인 측면들이 물론 있습니다. 무엇보다 주어진 생을 무의미하게 살지 않으려면 몸부림으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자신의 재능과 달란트를 최대한 발휘하려고 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그 옛날 롯의 아내처럼 자본주의가 만들어 내는 이런 질펀한 허영의 시장에 한눈을 팔지 않고 오로지 목표를 향해서 외골수로 달리는 인생길을 제시하기 때문에 그것도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긍정적인 측면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한번은 이런 목적 절대주의, 목적 중심주의를 반성을 해 봐야 됩니다. 먼저 우리의 이성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살펴보면 여러 문제들이 보입니다.
 
첫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육체와 정신에 과부하가 걸립니다. 이런 삶의 태도를 견제하는 이들은 늘 과도하게 일을 하고 성사 여부를 두고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됩니다.
둘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주변을 돌아보지 않기 십상이고 그 결과로 가족들의 희생이 수반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예는 많은 훌륭한 분들의 인생 고백에서 이미 우리는 많은 경우를 찾고 있습니다.
셋째, 목적에 너무 골문하다 보니까 삶의 여유가 없어져 가지고 늘 바쁘고 정신이 없을 뿐만 아니라 따라서 인간미도 없어지고 감성의 문이 닫히기 마련입니다. 그러니까 이런 분들이 들꽃이나 저녁노을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습니다.
넷째, 목적을 이루면 자기 충족감에 잘난 체할 뿐 아니라 또 자기의 성사된 것을 자기 인생의 자랑으로 여기고 만일 목적을 이루지 못하면 좌절감과 패배의식 속에서 심지어 삶을 포기하고 싶어 하는 일까지 생기는 것입니다.
다섯째, 죽기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런 목적을 이루려다 많은 사람들이 마음도 병들고 몸도 병들고 혹 그러다가 일찍 떠나게 되면 남겨진 자들의 슬픔과 비참함이 따라오는 것입니다. 목적 중심주의가 갖고 있는 훨씬 권원적인 문제는 따로 있습니다. 웨스민스터 소요리 문답처럼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떤 목적 설정은 필요할 겁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볼 때, 많은 경우에 이런 목적은 겉으로는 고상하고 선해 보여도 그것을 해체하여 그 심층으로 흐르고 있는 흐름을 꿰뚫어 보면, 그 안에는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욕망의 도도한 흐름이 있음을 살필 수가 있습니다. 닉 워렌이라는 목회자가 멋있게 포장(包裝)하는 언어는 신앙적으로 보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심지어 하나님을 위하여, 그러나 많은 실질적인 경우에는 그리스도인이 목적을 세울 때도 그것은 그냥 음표적인 문제고, 그 목적의 민낯은 자기 영광, 자기 출세, 자기 영광, 따지고 보면 인본주의적인 것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이것을 좀 적나라하게 표현하면 내 욕망이라는 주체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은 매우 두려운 일입니다. 좀 더 근원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이렇게 목적지향적인 삶이나 일을 하게 되면, 목적달성에 혈안(血眼)이 되어서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때로는 신학 양식에 맞지 않는 일도 하고 때로는 하나님의 자녀로 갈 수 없는 자리에도 가고 할 수 없는 일도 하고 볼 수 없는 것도 본부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까지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이 스스럼없이 하는 경우가 흔히 있습니다. 더 나아가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만물(萬物)의 영장으로서 살도록 이성을 주셨을 때는 촐랑대고 까불대는 우리의 감정을 좀 통제하도록 하고, 그리고 끊임없이 제어(制御)함이 없이, 지 맘대로 달아나는 우리의 욕망을 반성(反省)하고 성찰하기 위한 것으로 주신 것인데 욕망의 도구가 돼서 목적 지향적인 삶을 사는 이들에게는 이 이성은 욕망을 성취하는 수단이나 도구로만 활용될 뿐입니다. 이성뿐만 아닙니다. 이런 목적 지향적인 사람들은 주변의 사람들도 자기 목적을 이루는 수단으로 활용합니다.
 
자기 목적을 이루는 데에 도움이 될 만하면 그 사람은 이용할려고 하고, 별 도움이 안 되고 존재감이 없는 그저 그런 사람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을 뿐 아니라 때로는 냉담하고 무시하기까지 합니다. 신 불신을 막론하고 출세나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약은 인간들은 대개 이 모양이라 해도 틀림없습니다. 이성이나 사람만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기도나 신앙도 자신의 따지고 보면 욕망에 기초한 목적을 이루는 도구로 전락하고, 하나님도 말은 하나님의 영광이지만 그 하나님의 영광을 사실은 실제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자신의 욕망을 성취하기 위한 수단과 도구로 다시금 가까이 하는 것입니다.
 
자 그러면은 이러한 목적 중심주의 목적 절대주의의 관점에서는 목적이 없는 것을 어떻게 볼까요? 그럼 우리가 여러분 질문을 드릴 수 있는 것은 이런 목적 지향적인 이들에게 그러면 별 목적이 없이 보이는 존재들은 무가치한 것인가? 라는 질문을 드릴 수 있습니다. 길가에 강가의 돌들, 들녘의 이름 없는 들풀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먹이를 찾아서 배회하는 유기견들, 들고양이들, 아니 목적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인생, 목적을 찾으려고 해도 평생 찾지 못한 인생들은 무가치한 것입니까?
 
사실 우리 주변에는 목적 없이 사는 분도 많이 있고, 목적을 찾으려 해도 인생을 거의 말년까지 다가가도 찾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죽지 못해서 하루하루 연명(連名)하면서 살다시피 하는 힘든 분들도 있는데, 그러면 그들의 존재는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존재는 그 자체가 아름다운 것이고. 어떤 면에서 목적보다 훨씬 더 중요한 가치입니다. 사실 이런 깨달음은 고대 헬라의 사상가들도 하고 있습니다. 후기 고대에 헬라의 사상가들은 순서를 이렇게 매깁니다.
 
온 조에이 누스, 제가 그리스로 말씀드렸는데 누스, 정신이 아무리 중요해도 그거 이전에 조에이, 생명이 있어야 되고 또 생명이라는 것은 반드시 온 존재를 전제로 하지 않으면 안 되기에 존재가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인 것이다. 라는 것이 고대 지혜 자들의 생각입니다. 그러면 성경은 뭐라고 말할까요? 오늘 우리 읽은 본문으로 돌아가 봅니다. 이 본문은 장엄(莊嚴)한 계시의 역사, 하나님 말씀의 민 성경을 여는 첫 문장입니다. 시인들에게도 시의 첫 줄은 신이 준다고들 말하는데, 이 문장은 정말 신이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의 서두입니다.
 
자,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이게 무슨 뜻입니까? 무의 세계에서 유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고. 비존재의 세계에서 존재의 세계가 지금 전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고도의 기술의 바벨탑을 쌓아 올린 인류는 대단한 기술을 자랑하지만 다 유(有)에서 유(有)를 만드는 것이지. 무(無)에서 하는 작업은 없습니다. 제가 아는 대단한 도예(陶藝)가들 그들은 이미 존재하고 있는 태토와 나무와 무를 가지고 그 대단한 작품을 생산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무에서 유를 창조할 수 없지만, 우리의 하나님 창조주(創造主)는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우리 하나님은 있게 하신 분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에서 이 있음보다 더 대단한 것이 어디 있으며, 존재보다 더 앞선 가치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 보십시오. 지금 우주여행(宇宙旅行)을 꿈꾸기도 합니다. 달나라, 별나라 신기해 보이지만 그곳은 모든 것이 죽어 있습니다. 아니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다. 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를 보십시오. 사계절마다 옷을 갈아입는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대자연, 바다 속의 놀라운 고기들의 세계 하늘에 구름과 새들 그리고 불어오는 바람들 이 모든 존재들이 얼마나 조화롭고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사실 이 존재들을 우리는 매일 겪지만 잘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 이 존재가 지닌 의미와 가치를 제대로 깨달으면 하루하루 우리의 삶이 얼마나 감사하고 때로는 신비한지 모를 것 우리만 그런 거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더 기뻐하셨습니다. 창세기의 창조기사는 있으라는 명령을 하신 그 명령에 따라서 있는 결과가 전개가 되니까.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있음에 대해서 우리 하나님은 기뻐하셨다는 겁니다. 아직 무슨 일들을 한 것도 아니고 무슨 목적이 펼쳐지는 일이 전혀 아닌데도 그저 있음 자체만으로 창조주 하나님은 크게 기뻐하신 것입니다. 자연계만 그런 거 아닙니다. 인간도 만들어 놓으시고, 우리 하나님은 가장 크게 기뻐하셨다고 성경은 기술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런 하나님의 기쁨은 신약의 탕자(蕩子) 비유에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자식이 집 나가서 돌아오지 않자 아버지는 램브란트의 그림처럼 눈이 짓 이겨질 정도로 눈물로 한 많은 세월을 보냈습니다. 집 나간 자식은 소식이 끊어져 가지고 죽은 줄 알았습니다. 여러분 아버지의 소원이 뭐가 있습니까? 그가 돌아와 가지고 가업을 잇고 효도하는 게, 아버지의 소원이겠습니까? 아닙니다. 아버지의 마음에는 자식이 객사하지 않고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기쁨이요. 설령 집에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어딘가 지상에서 살아있는 소식만 하나 들어도 그에게는 감격(感激)인 것입니다. 누가복음 15장 24절,
 
*누가복음 15장 24절,
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신약만 아닙니다. 여러분 구약에 잘 아시는 요셉의 경우 한번 보십시오. 아버지 야곱은 22년 동안 그가 죽은 줄 알았습니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처럼, 22년 남모르는 눈물과 고통 속에 야곱이 살았는데 어느 날 요셉이 살아 있고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기절초풍할 만한 소식을 접했습니다. 아버지가 뭘 생각했습니까?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게 그렇게 감동스러운 거 아닙니다. 이제 애굽으로 내려가서 거기에서 자식 때문에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리는 것도 그의 큰 소원 아닙니다. 죽었다고 생각한 그 자식 평생 칼에 묻었던 평생 가슴에 한으로 남아 있던 그 자식이, 요셉이 살아있다니 살아있는 소식 하나만으로도, 이제 야곱은 창세기 45장 28절,
 
*창세기 45장 28절,
28 이스라엘이 이르되 족하도다 내 아들 요셉이 지금까지 살아 있으니 내가 죽기 전에 가서 그를 보리라 하니라.
-이스라엘의 가로되 족하도다. 그거는 족한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무슨 예수 믿어서 출세하고, 성공하고, 잘되고, 번영하고 그게 복음이 아니라, 죽었던 인생, 없던 인생, 생겨나고 죽었던 인생 되살아나고 무 존재에서 존재로 다시 드러나는 게, 그게 부활의 복음이고 복음의 핵심 메시지입니다. 여러분 존재가 가장 큰 축복입니다.
 
탕자의 아버지나 야곱에게 가장 큰 기쁨이듯이, 우리가 이 땅에 생명을 유지하고 존재하는 것 자체가 무슨 일을 대단하게 안 하시더라도 우리 하나님께는 큰 기쁨이요.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여러분 웨스민스터 소요리 제1 문답을 보십시다. 우리가 이 문답을 이렇게 착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좋은 대학에 합격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그런 대학에 못 들어가면 영광이 가려워지고, 우리가 성공하고 출세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실패하면 영광이 되지 않고 그거 아닙니다.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든지, 우리의 노력의 결과를 통해서 그 하나님께 하나님의 영광에 보탬이 된다. 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착각(錯覺)입니다. 사도행전 17장 24절,
 
*사도행전 17장 24절,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아레오바고 설교에서 바울은 이렇게 외칩니다.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그렇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미 영광중에 계신 하나님이요. 영광의 충만 속에 계십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유무가 우리 행위에 달린 것도 아니고, 우리 삶의 결과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럼 무엇에 기뻐하실까 탕자의 비유해서 그 아버지의 마음이 드러나듯, 잃어버린 한 어린 양을 찾는 것이 목자의 큰 기쁨이라고 말씀하시듯, 우리 하나님은 우리가 살아 있고, 돌아오고, 말하자면, 우리의 존재 구원받아서 회복된 우리의 존재, 우리의 있음, 그 자체를 우리 하나님은 가장 크게 기뻐하십니다. 존재의 목적은 존재가 있고, 난 이후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설령 존재가 없더라도 모든 존재는 귀한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되겠습니까? 물론 이 땅에 살면서 보내신 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내 삶의 이유와 목적을 찾도록 노력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찾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고 또 세상에는 의미 없이 목적 없이 사는 사람들도 부지기수입니다. 우리 청년들, 가운데도 이런 분들이 있을 건데, 그럼 이들은 가치 없는 존재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나라는 정말 청년 자살률이 세계 제1위인데, 젊은이들이 살 이유나 목적을 찾지 못해서 생을 마감한다면,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살아있는 것만 해도 좋은 것입니다. 교회가 젊은이들을 향해서 목적을 품어라. 꿈을 지녀라 의미 있는 삶을 살아라. 가르치는 것도 좋지만 그것에 앞서서 청년들이여,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아름답다. 여러분이 비틀대고, 쓰러지고, 외롭고, 괴롭다 하더라도, 존재만으로 귀하다. 이걸 가르쳐야 됩니다.
 
독일의 문호 괴테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파우스트에서 존재는 의무다 비록 일과성이라 할지라도 비록 순간이라 할지라도,’ 아니 괴테만 그렇습니까? 우리 예수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이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여러분 여기에 우리 예수님의 가치 판단이 나타나는데 천하를 얻는다는 거는 대통령쯤 되는 걸 말하는 것 아닙니다. 온 천하를 손에 쥐는 겁니다. 인생의 성공의 출세에서 천하를 얻는 것보다 더 나은 성공과 출세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니가 설령 천하를 얻더라도 니 목숨을 잃으면 니 존재를 상실하면, 그게 뭔 가치냐? 여러분 우리 예수님의 이 가치 판단에서 우리가 뭘 깨달을 수 있습니까? 목적이 대단한 것 같지만은 존재는 귀한 것이고, 삶에 대한 이유나 목적을 찾지 못해도 있음만으로 그거는 아름다운 겁니다.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되겠습니까?
 
첫째는 인생의 좌표를 설정해야 되겠지만, 과도하게 목적 중심 성취 중심으로 세우지 말고 존재 중심으로 설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생 어떠한 세상입니까? 이 도시의 거대한 조직과 질식하듯이 압도하는 분위기는 어린 시절부터 청년시절까지 우리를 출세, 경쟁 무한경쟁으로 몰아가고, 우리가 받는 모든 교육은 출세를 위한 조건을 구비하는 데에 모든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이 혹한에도 울지 않는 이 냉혹한 세대에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시기(猜忌)하고, 경쟁(競爭)하면서 성공하기 위해서 치열(熾烈)하게 살아가는데 벌써 사람들과의 만남에도 순수함과 착함이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겉으로는 교양과 화려함으로 포장되어 있지만 실은 산다는 것의 재주들로 잘 무장되어 있고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마저도 그 속에서 호흡하고 그 시대정신에 젖어서 의식 없이 살고 있습니다. 밀란 군대라 소설의 제목처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욕망적 목적의 무거움입니다. 여러분 따라서 이제 우리는 참을 수 없는 목적의 무거움에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치와 무거움을 인식해야 할 것임
 
둘째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 하나님은 야곱과 탕자의 아버지의 경우에 보이듯이, 무슨 목적을 이루는 것도 기뻐하시겠지만, 사실은 존재와 생명을 훨씬 더 귀하게 여깁니다. 우리 예수님도 아침 일찍 나와서 성취를 많이 하는 사람이나 오후 늦게 와 가지고 조금 일하는 사람을 똑같이 대우했습니다. 그 예수님이 하시는 달란트 비유도 잘 나가지고 5달란트 남긴 사람이나, 겨우 한 달란트 남긴 사람을 똑같이 대우하면서 말씀해 보시면 글자 하나 안 틀리게 똑같은 대우를 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셋째는, 더 나아가서 이제 우리는 좀더 존재 중심과 생명 중심으로 해야 됩니다. -목적이 이끄는 공동체보다 존재가 귀한 공동체가 더 아름다운 집단입니다. 목적 지향적인 사람보다 존재와 생명을 더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더 귀한 분들이라고요. 그러면 이제 목적을 세우지 말까? 아닙니다. 존재가 중함을 알고 그다음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나아가야 됩니다. 이제 말씀의 마무리로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논의를 하다 보니까 우리가 깨닫는 깨달음은 무엇이겠습니까?
첫 번째는, 한 영혼의 소중함, 귀함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가 너무 큰 꿈을 지니고 그렇게 나가면, 가시적인 성취 중심으로 흐르기 쉽습니다. 가시적인 결과 중심으로 흐르다 보면 영혼에 대한 안타까움이 사라집니다. 개인적으로 사람을 대할 때, 내 인생에 별로 목적에 도움이 안 되면 우리가 소홀히 할 수 있는데, 내 인생의 목적에 도움이 되든지 안 되든지 똑같이 소중히 여기고 존기 여겨야 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교회라는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앞장서 가지고 직분 받아서 열심히 봉사하고, 헌금 많이 하시고, 헌신하는 분들 당연히 매우 귀한 분들입니다. 그 헌신과 헌금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들 직분을 받은 건 아니니까, 혹 직분이 없고 혹 별로 기여하는 것이 별로 없어 보여서 별 존재감이 없어 보이는 분들도 똑같이 하나님 나라의 존귀한 자들입니다.
 
여러분 따라서 우리 예수님께서는 들녘에 피어 있는 들꽃에 대해서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우리 예수님은 시인이십니다. 우리 예수님 뭘 노래했습니까? 들꽃이 너무 아름다워서 들꽃이 하나님께 영광을 대단하게 돌려서 어쩌면 그거 아닙니다. 그 들꽃이 사람들은 몰라주고, 거기에 비바람 다 맞고 거기에 온갖 풍랑과 풍상을 다 막다 하더라도 쓰러지지 않고, 그 자리에 꾸준히 서가지고 서 있는 들꽃의 존재 자체가 아름다운 것입니다. 혹시 우리 교회 가운데 들꽃 같은 분들 계신다면 힘을 내시기를 바랍니다.
두 번째는, 병(丙)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여러분 세상에는 뭐 세상 논리처럼 갑(甲)과 을(乙)만 있는 거 아닙니다. 이거는 조직사회서 대표나 책임자가 갑질 한다고 을의 아픔이 물론 있습니다. 그 을의 아픔 때문에 데모도 하고 광화문에 가서 깃발도 드는 분이 있는데, 을의 아픔이 있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그분들의 그런 시위도 정당성이 많은 경우에 있을 겁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갑과 을만 있는 거 아닙니다. 을이라도 될려면, 직장이라도 있고 조직이라도 있어야 되는데 세상에는 아무런 을도 되지 못한 소위 병(丙)이 있습니다. 노숙자들, 외톨이들, 실직자들, 독거노인들, 환자들, 장애우들, 고립된 자들, 이건 병(丙)입니다. 교회는 뭐하는 단체냐? 병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그들을 돌보는 것이 예수님을 닮은 사이고 그것이 손양원 목사님, 서서평 선교사가 한 일입니다.
 
여러분, 따라서 우리 사랑의 교회가 약한 교회를 돕고, 힘든 목회자들을 격려하는 한국교회 섬김의 날 매년 하시는데 힘들지만은 정말 잘하시는 겁니다. 교회는 아웃사이드, 가난한 자들, 병든 자들, 소외된 민초들을 위한 어쩔 수 없이 승진의 삶과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이제 표대를 향해서 달리는 것만 아니라, 옆으로 돌아볼 수 있는 여유와 마음을 지녀야 됩니다. 다시 닉 워렌 목회자의 생명으로 돌아가 봅시다. 영어로 보니까 포포즈 드라이븐(purpose of driven), 목적이 이끄는 데 드라이버, 라고 돼 있다고 저는 드라이버가 고속도로에서 질주하는 것만 생각이 나 가지고 아찔하고 무서운 용어입니다. 이것이 능동태든 수동태든지 간에 강하게 드라이브를 하게 되면 사고 날 가능성이 늘 있습니다. 인생이란 늘 그렇게 앞만 드라이브하고 달리는 거 아닙니다.
 
여러분, 성경을 잘 보시면 창세기도 족장 중심으로 이 게시 역사가 전개되지마는 하나님께서 그렇게 안 하셨습니다. 갑자기 카메라의 앵글이 광야로 확 돌려져 가지고 광야에서 야곱에게 버림받아가지고, 슬피 울면서 목말라서 배고파서 굶어 죽어가는 하갈과 이스마엘에게 그 계시의 카메라 앵글이 비추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정신없이 달리면 옆을 돌아보지 못합니다. 항시 개인이나 공동체가 연약한 우리의 이웃들, 연약한 동료들을 돌보는 안목이 있어야 됩니다.
 
※이거는 조선 시대 선비들 했던 겁니다.
⓵경주의 유명한 최 부자, 그분의 소신이 뭡니까? 앞으로 돈을 더 벌어가지고 더 아파트 사놓고 더 땅 투기하고, 더 빌딩 사 놓고, 강남에 그 꿈 안 꿨습니다. ‘100리 안에는 굶는 백성이 없게 하라.’ 나는 충분히 지금 배불리 먹고 사니까 그런 투자를 한 게 아니라 100리 안에 굶는 사람 없게 하자.
 
⓶전라도의 구례의 운조루 그 집에 쌀독에는,,, 큰 쌀독에는 한문으로 ‘타인능해(他人능能解)’ 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퍼가라. 이겁니다. 그러면서 그 쌀독을 나무 독을 밖에 입구를 두고 가난한 마을 사람들이 끼니가 없으면, 그 집에서 무한정으로 퍼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것이 이 운조루가 오랜 세월 동안 그 지역에 있었던 민란, 동학, 여순 사건, 한국동란, 한국전쟁 겪으면서도 건재할 수 있었던 배경입니다. 아무리 악한 이들이라도 집안이 행한 선행을 알기 때문에 그거는 감히 누가 손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안 믿는 사람들로 이렇게 살았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목적을 향해서 미친 듯이 드라이브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드라이브 덜 하고 좀 느리게 가더라도 우리 주변에 어려운 문제를 돌볼 수 있는 그런 따뜻한 이웃 사랑의 시각을 지니할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가 존재하는 것이 출세보다 더 큰 축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아침에 일어나서 창문 밖으로 햇빛이 비치고, 새소리만 듣는 것도 감사입니다. 아니 아침에 일어났는데 눈이 떠지고, 숨을 쉴 수만 있다면 그것도 은혜요. 행복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뭐가 감동입니까? 목적 성취가 아니라 존재가 지속하는 겁니다.
 
여러분, 따라서 진학하시고 취업하시고, 승진하시고, 당선되시고, 결혼하시고, 자녀 놓으시고, 그런 일에 대해서도 특별감사헌금을 당연히 하셔야 되고, 거기에 더해서 우리를 부르시는 것을 깜빡 잊으시고 계시는 우리 하나님의 은혜로운 망각 증에 따른 생존 감사헌금을 매주 매일 모아가지고, 드리셔야 그게 수준 높은 신앙이라고요.
 
여러분, 앞으로 사랑의 교회 헌금을 지켜보겠습니다. 자 이제 마지막으로, 인생은 목적이 이끄는 삶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끄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성경의 인물들 한번 보십시오. 누가 목적이 그렇습니까? 아브라함이 언제 믿음의 조상이 되려는 목적을 언제 품었습니까? 모세가 한사코 발뺌을 했지, 언제 출애굽의 영도자가 될 계획을 언제 꾸었습니까? 다윗이 양이나 치고 노래나 좋아해서 불렀지, 언제 이스라엘의 임금이 되고, 그것도 성군이 될 목적을 언제 세웠습니까? 신약에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요한이 갈릴리 바다에서 그냥 고기나 잡고 살 인생이라 생각했지, 언제 비교가 안 되는 세상의 넓은 바다에서 어부가 살아남은 어부가 될 목적을 언제 꿈꾸었으며, 언제 성경 기자가 되고, 사도가 되고 오는 세대의 믿음의 사표가 될 꿈을 언제 꾸었습니까? 성게의 어떤 인물이 목적을 설정했습니까? 없습니다.
 
여러분, 모든 믿음의 인물들은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대로 인생의 어떤 삶의 한 순간 하나님의 음성 예수님의 부르신 한 번 듣고, 자기 목적을 성취하는 삶이 아니라 그 부르심에 존재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산 것입니다. 이제 말씀에 결론을 내립니다.
 
저와 여러분은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천국을 갑니다. 그 천국이 어떤 세상인지 요한계시록 22장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 성의 성곽의 기초 석은 각색 보석으로 꾸몄는데 첫째, 기초석은 벽옥이오, 둘째는 남보석이오.”, 등등,,, 여러분 천국은 우주 최고의 주얼리(Jewelry) 상점입니다. 혹시 보석을 연구하시는 분들은 게시로 22장을 좀 잘 연구하시고, 보석상을 하시는 분들은 천국보석상, 아마 이러면 많이 모여들 겁니다. 저는 여러분 천국이 보석천국인 거 관심 없습니다. 천국에 어디에 관심 있느냐, 이 보석의 세계라 좋은 게 아니라, 시간의 위협에 굴하지 않는 영원한 세상이기 때문에 관심이 있다고요. 제가 그래서 하는 이 낙은 인생은 늘 무 존재 위협, 늘 비존재의 불안 속에 노출되어 있고 우리 모두는 그것에 노심초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천국 시민들인데 우리가 가는 그 세계는 시들고, 병들고, 늙어가는, 죽어가는 세월의 무자비한 법칙이 통용되지 않는 영원한 존재의 세상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유나 목적을 찾으면 좋을 거지요. 그러나 혹시 삶의 이유를 모른다고 해서 무가치한 인생이 아닙니다. 인생의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고 의미 없는 삶이 아닙니다.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하나님이 주신 귀한 생명을 지키는 것이니까, 그것도 대단한 순종입니다. 그리고 내게 많은 복을 주시지 않아도, 숨쉬게 하는 것만도 은혜요. 형언하기 어려운 축복인 것입니다. 이런 마음으로 우리의 나그네 길이 괴롭든, 외롭든, 성공하든, 실패하든 흔들리지 마시고 나그네 길을 아름답게 걸어가는 모든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요약
-우리는 말씀을 통해서 가치가 어디에 있는지, 우리의 삶을 반성해야 한다. 우리들이 숨 쉬고 있는 거, 살아가는 거, 다 하나님 은혜인 줄 알고 감사하며, 세상의 욕망을 이루지 못하더라도 불평 불만하지 않고, 좌절하지 않고, 하나님 의지하고 담담하게 살며, 특별히 부르심이 있을 때 그 부르심 순종하며 살아가는 복된 인생길이 되어야 한다. 있음으로 가치 있는 존재​, 있음만으로도 아름다운 것, 한 영혼의 소중함을 깨달아서, 들꽃도 그자체가 아름다운 것처럼,​ 갑(甲)을(乙)만 있는 것이 아니라, 병(丙)에도 신경 써야한다. 노숙자, 실직자, 독거노인., 아웃사이더들을 돌보는 사역이 소중하며, 옆을 보는 여유와 삶이 주님 앞에 가장 아름다운 삶이어야 한다. 질주하는 삶은 아님을 기억하여 항상 그 존재만으로 하나님이 주신 귀한 생명임을 알아 늘 감사하며 살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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