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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4년 7월 10일) 제목: "예수, 나의 치료자" 말씀: 마태복음8:5-13 찬양인도: 쉐키나(오준석 부목사님) 사회, 기도회 진행: 김대규 부목사님 설교자: 정상익 부목사님 ----- * 마태복음8:5-13, 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6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7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8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10 예수께서 들으시고 놀랍게 여겨 따르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며 말씀의 은혜를 드리는 수요저녁기도회에 나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오늘 수요저녁기도회를 통하여 참된 치료와 또 참된 회복을 경험하시는 시간이 되시기를 소망합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마태복음 8장 5-13절 말씀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1절씩 교독하겠습니다. 제가 먼저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신가?’ 시리즈를 통해서 예수님에 대해 계속해서 알아가고 있습니다. 담임 목사님께서 주신 말씀처럼, 생명의 떡이신 그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갈 때 예배가 회복되고 또 우리의 삶이 회복될 줄로 믿습니다. 아멘! 여러분은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그런데 머리로 알고 있는 이 사실이 실제적으로 얼마나 삶에서 구체적으로 체험되고 계신지요? 예수님이 나를 만나주시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보신 적이 없으신가요? 예수님이 눈앞에 이렇게 두 팔 벌려 안아주신다고 하는데, 정작 내 눈앞에는 예수님이 전혀 계시지 않는 것 같은 그런 마음이 드신 적은 없으세요? 특별히 육신의 아픔, 영혼의 고통을 겪고 있는 가운데, 나는 치료가 필요한데, 예수님이 부재(不在)하신 것 같다,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맞으신가요? ‘예수로 나의 구주 삼고’ 라는 찬송가의 가사가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인데 그렇게 고백하지 못하고 주님과 나는 간 곳 없고, 괴로운 나만 보이도다. 라고 고백하신 적은 혹시 없으신가요? 어떻게 예수님의 치료를 경험할 수 있을까? 우리가 이 세상 나그네 삶을 살면서 계속해서 근본적으로 하게 되는 질문 중 하나입니다. 열심히 주님을 따라 살겠다며 고군분투(孤軍奮鬪)하는 가운데 고난을 계속 겪게 되면 이 질문을 자꾸만 하게 됩니다. 더욱 고민하는 가운데 이 근본적으로 질문을 던지게 되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성경(聖經)을 통해서 알려주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에 치료가 필요했던 사람이 한 명 등장합니다. 그리고 그를 치료(治療)해주신 예수님의 이야기가 이어지게 되는데요.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 산상수훈(山上垂訓)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잘 알려주셨던 그 예수님께서 이제 가버나움이라는 동네로 들어가십니다. 가버나움은 갈릴리 호수 북쪽에 위치했던 1세기 당시에 아마 1,500명 정도가 거주했던 그런 도시였어요. 그 도시로 예수님이 들어가십니다. 근데 이 가버나움이라는 도시를 성경은 이와 같이 이야기합니다. 마태복음 9장 1절 말씀인데요. *마태복음 9:1, 1 예수께서 배에 오르사 건너가 본 동네에 이르시니. -성경은 가버나움을 본 동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을, 예수님의 고향과 같은 곳이라는 뜻이지요. 실제로 가버나움의 이 터에 가면 영어로 ‘칼퍼나움’이라고 써 있고, 그 뒤에 또 탄 오브 지저스 라고 적혀 있습니다. 예수님의 본 동네, 예수님의 마을이라고 적혀 있어요. 그도 그럴 것이 예수님께서 공생애 3년간 이 가버나움을 선교 지로써, 이 선교 센터로써 사용하셨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교본부와 같았던 이 가버나움, 이 마을로 예수님이 들어가셨을 때, 한 가지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이 놀라운 기적의 사건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있는데요. 오늘 본문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 3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 번째 그 포인트를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I. 첫 번째,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예수님이 사역의 본부로 사용하셨던 그 가버나움 시대에 그 시내 안에서 누군가 바로 로마 백부장(百夫長)인데요. 오늘 우리가 읽었던 5절 말씀 함께 읽어볼까요? * 마태복음8:5, 5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 간구하여. -우리가 기도용사를 통해서 또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는 그 단어죠. 백부장(百夫長), 이 백부장(百夫長)은 100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거느리고 있었던 군인이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육군으로 비교하면 중대장 정도, 공군이나 해군으로 따지면 때때로는 대대장 정도 되는 그런 지휘관(指揮官)이라고 볼 수 있어요. 팔레스타인 지역을 다스리는 군대의 지휘관이 유대인 랍비로 여겨졌던 예수님께 찾아온 겁니다. 이 백부장은 로마군 소속 이방인(異邦人)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이 백부장을 거절(拒絶)하실 수도 있었어요. 실제로 예수님이 이방인을 거절하신 적이 있었거든요. 이후에 일어난 일이 마가복음 7장 말씀을 제가 한번 읽어 드리겠습니다. 25절에서 27절 말씀인데요. *마가복음 7:25-27, 25 이에 더러운 귀신 들린 어린 딸을 둔 한 여자가 예수의 소문을 듣고 곧 와서 그 발아래에 엎드리니. 26 그 여자는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이라 자기 딸에게서 귀신 쫓아내 주시기를 간구하거늘. 27 예수께서 이르시되 자녀로 먼저 배불리 먹게 할지니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 뒤에 나오는 이야기도 여러분 잘 아시죠? 부스러기라도 받겠습니다. 이야기를 하고 이 여인이 자신이 간구(懇求)했던 바를 그대로 받는 놀라운 사건이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이 나온 것처럼 두로 지방에 있었던 헬라인 여인을 바로 만나지 않으셨습니다. 요청(要請)에 바로 응답(應答)해 주시지도 않았어요. 이처럼 예수님은 이방인이었던 백부장을 만나지 않으실 수도 있었습니다. 아마 백부장과 친했던 유대인 장로들이 예수님이 만나주시지 않을 것을 우려(憂慮)했나 봅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마태복음 8장과 병행 본문인 누가복음에 이런 이야기가 담겨 있어요. 누가복음 7장 3절에서 4절 말씀 제가 읽어드립니다. *누가복음 7:3-4, 3 예수의 소문을 듣고 유대인의 장로 몇 사람을 예수께 보내어 오셔서 그 종을 구해 주시기를 정한지라. 4 이에 그들이 예수께 나와 간절히 구하여 이르되 이 일을 하시는 것이 이 사람에게는 합당하니이다. -유대인 장로들의 말에 예수님이 이방인인 이 백부장을 만나주시지 않을 것이라는 전제(前提)가 깔려 있습니다. 그러나 장로들의 걱정은 기우(杞憂)에 불과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방인이었던 이 백부장을 만나 주셨습니다. 그가 찾아왔을 때 그를 물리치지 않으시고, 그와 대면(對面)해 주셨죠.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찾을 때, 한 결 같이 우리를 대면해 주시고, 우리를 안아주시는 분이십니다. 이방인인 우리가 죄를 짓고 멀리 떨어져 있다가도 마치 이 재산(財産)을 다 탕진(蕩盡)하고 터덜터벅터벅 걸어오던 둘째, 아들을 보고 버선발로 뛰어나갔던 그 아버지처럼 우리를 품에 안아주시고 우리를 만나주시는 분이십니다. 백부장은 이 예수님이 만나주시는 그 특권(特權)을 누렸던 사람이지요. 오늘 본문에 예수님의 모습 두 번째가 나옵니다. 함께 읽어볼까요? 둘째, 예수님은 우리 이야기를 들어 주십니다. II. 두 번째, 예수님은 우리 이야기를 들어 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십니다. 본문의 6절과 7절 말씀을 통해서도 이 내용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6절7절 함께 읽겠습니다. * 마태복음 8:6-7, 6 이르되 주여 내 하인이 중풍 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7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예수님은 백부장을 만나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셨습니다. 백부장은 자신의 하인이 이 중풍 병(中風病)으로 인해 마비(痲痹)가 되어 있다고 이 중풍 병으로 인해서 너무나 고통스러워하고 있다고 예수님께 이야기합니다. 예수님 입장에서 이방인(異邦人)인 사람을 만날 필요도 없는데 그가 늘어놓는 이야기를 경청(敬聽)하실 필요는 더더욱 없었을 겁니다. 바쁜 사역(事役) 스케줄 중에 가버나움에서 할일이 정말 많은데, 산상수훈을 막 마치고 다시 이 선교본부와 같은 가버나움으로 돌아와서 다음 사역을 준비하기에도 벅찬 일정인데, 이방인인 백부장이 와서 하소연하는 이야기에 굳이 귀를 기울이실 필요는 없었죠. 그런데 예수님은 이방인 백부장의 말을 들으십니다. 단순히 듣는 척 하시는 게 아니라 경청(敬聽)하십니다. 그의 말에 대답하시고 반응(反應) 하셨거든요. 예수님은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분입니다. 예수님은 가던 길도 멈춰 서서 우리말에 귀를 기울여 주시는 그런 분이세요. 그걸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시각(視覺) 장애인(障礙人)인 바디메오가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돌아봐 주시옵소서!’ 라고 이야기했을 때 예수님이 보인 반응을 통해 우리는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알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0장 48절에서 49절에, *마가복음 10:48-49, 48 많은 사람이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9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그를 부르라 하시니 그들이 그 맹인을 부르며 이르되 안심하고 일어나라 그가 너를 부르신다 하매. -안심하라고, 일어나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십니다. 가던 길을 멈춰 서서, 그의 말을 경청하시고, 안심하라고, 일어나라고 예수님께서 바디메오에게 이야기 하셨죠. 바디메오의 말을 들어주셨던 그 예수님이 동일하게 이 백부장의 말을 들어주시며 경청하시고, 반응하시는 모습을 몸을 통해 살펴볼 수 있습니다. 백부장의 이야기를 들으시고 반응하신 그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가 예수님께 올려드린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 경청하실 줄 믿습니다. 아멘~! 오늘 본문에서 알아볼 수 있는 예수님의 세 번째 모습은 이와 같습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시작 예수님은 우리를 고쳐주십니다. III. 세 번째, 예수님은 우리를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고쳐주시는 분이시기도 합니다. 본문 7절과 13절에 그 내용이 구체적으로 나오는데요. *마태복음 8:7,13, 7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13 예수께서 백부장에게 이르시되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즉시 하인이 나으니라. -예수님께서는 백부장을 만나주셨어요. 그리고 그 백부장의 이야기에 경청(敬聽)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 이야기를 들으시고, 자신의 종을 고쳐달라는 그 절박한 심정이 담긴 간구를 흘리시지 않으시고, 그 간구(懇求) 그대로 이 백부장의 종을 고쳐주시는 예수님을 우리는 본문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백부장의 집에 가셔서 직접 고쳐주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예수님의 강력한 의지(依支)가 담겨있습니다. 바쁜 사역 스케줄 가운데서도 반드시 내가 너희 집에 가서 중풍 병에 걸려서 마비(痲痹)가 와서 있는 고통(苦痛)하고 있는 그 종(從)을 고쳐주겠다 라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약속에서만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까 13절에서 읽은 것처럼, 그대로 이루어진 것을 봅니다. 백부장의 집에 가지도 않으시고 말씀만으로, 백부장의 종에 그 질병을 고치시고, 백부장이 이제는 종이 건강(健康)해졌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하는 모습을 우리는 살펴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간절(懇切)한 간구(懇求)를 흘리지 않으시고, 들으실 뿐만 아니라 직접 고쳐주시겠다고 의지적으로 약속해 주시고, 그 약속을 반드시 이행(履行)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멘. 이 ‘고쳐주리라’ 그리고 ‘나으리라’ 라고 번역된 헬러 원어인 이오마이라는 동사는 신약 성경에서 총 27번 사용된 단어입니다. 근데 이 단어는 단순히 육체적인 치료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회복, 전인격적인 회복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동일한 단어를 사용한 누가복음 6장 18절 말씀을 살펴보면 이유를 알 수 있는데요. 제가 읽겠습니다. *누가복음 6:18, 18 더러운 귀신에게 고난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은지라. -귀신에게 고난을 받는 자들도 고침을 받았다라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 단순히 육체적인 회복을 넘어서서, 영적인 회복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 단어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백부장의 종(從)을 고치신 것은 단순히 중풍병(中風病)만, 단순히 육체적인 어려움만 고쳐주신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서 그의 영을 함께 회복해 주신 것이란 것을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또 이 단어를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전인격적으로 회복(回復)되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육체(肉體)뿐만 아니라, 그 영혼(靈魂)마저 회복(回復)되기를 간절(懇切)히 소망(所望)하시며 일하시고 계십니다. 이 예수님의 치료(治療)는 전인격적(全人格的)인 치료입니다. 온전(穩全)한 치료입니다. 미처 우리가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마저도 미처 우리가 돌보지 못했던 영역(領域)마저도 회복시키실 수 있는 그런 완벽(完璧)한 온전한 치료입니다. 이런 치료를 행해 주시는 예수님이야말로 우리는 참된 치료자이심을 고백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어떠세요? 나의 참된 치료자 되시는 예수님을 늘 온전히 경험하고 계신가요? 오랫동안 기도했던 질병이 낫지 않고, 악화되는 상황을 혹시 발견하고 계신가요? 그런 경우에 주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원망하는 마음이 들지 않으신가요? 아니야, 전인격적인 치료를 하고 계셔,, 라고 당연(當然)하게 여기시면서 담대(膽大)하게 선포(宣布)하고 계신가요? 전격적인 치료를 약속하시고, 또 실제로 베푸시고 계신 그 예수님께서 유독 내 인생만은, 유독 내 육체만은 왜? 돌보시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 너무 서운한 마음이 들고, 너무 억울한 감정이 들고, 예수님과 더 깊은 관계를 가지기 어려운 경험을 가져본 적은 없으신가요? 왜, 우리에게 치료한 치료가 필요한 상황이 생길까? 왜 우리에게 고난이 닥쳤고 왜 나는 상처를 받아야만 할까? 이러한 질문처럼 우리에게 왜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 다가오는지, 왜 어려움이 있는지, 왜 그 어려움이 지속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다 알 수는 없습니다. 우리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또 우리가 참 연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무엇보다 우리는 무지(無知)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렇죠. 하나님께서 어떤 큰 계획을 가지시고 내 삶을 운행하고 계신지에 대해 다 알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또 여전히 지속(持續)되고 있는 어려움에 대한 그 의미를 다 헤아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왜 주님은 치료가 필요할 때 보이시지 않는가? 라는 우리의 질문에 명확한 대답을 주고 있습니다. 고난 가운데서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요. ※제가 섬기는 교구 안에 참 큰 어려움을 당하신 권사님이 한 분 계십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결혼 이후에 정말 아름다운 가정을 정말 만들어가는 것을 보고 기뻐한지가 얼마되지 않았는데, 며느리가 둘째 딸을 낳고 10일만에 대동맥 파혈로 소천하게 되었습니다. 졸지에 60대 내외 권사님 내외가 주 양육자가 되어서, 7살 손녀와 이제 10일 된 손녀를 양육하게 되었습니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갓난아이를 부모처럼 돌봐야 하기 때문에 주일 현장 예배조차 오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게 됐어요.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그 사랑하는 아들마저 올해 초의 급성 백혈병(白血病)으로 항암치료를 갑작스럽게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궁극적인 치료를 위해 골수 이식을 받아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당장 항암 치료를 받는 과정 가운데 골수 이식자를 열심히 찾아봤지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결국 골수 이식을 해줄 수 있는 사람이 그 아들의 딸, 사랑하는 첫째 손녀밖에는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마땅한 사람을 찾지 못해 결국 초등학교 2학년 된 그 첫째, 손녀가 병실에 입원하는 모습을 봐야 했던 그 할머니, 할아버지의 찢어진 심정, 사랑하는 며느리를 떠나보낸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들에게까지 이런 병마(病魔)가 찾아와야 했다는 사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눈물로 기도할 수밖에 없었던 어미 아비의 심정은 겪어본 사람이 아니라면 그 누구도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을 견뎌내셔야 했던 우리 권사님과 안수 집사님이 너무나 가여워 보이고, 너무나 안타까워하면서 교구에서 정말 마음을 다해 함께 기도했습니다. 1학기 종강 주간 마지막 다락방 모임이었던 그 금요일에 마침 골수 이식이 진행되게 됐습니다. 그래서 그 마지막 모임을 청계산 기도원에서 기도회로 모인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찾아뵈었어요. 청계산에서 간절히 주님의 도움을 구하며 눈물로 기도하는 가운데 이 권사님은 이런 고백을 들려주셨습니다. ‘이번 일을 통해 하나님이 살펴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나를 사랑해 주시고 함께 하신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제 주님께 더 질문하지 않고 잠잠히 기도하려 해요.’ 권사님의 그 눈물의 고백을 듣는 가운데 저와 순장님, 순원들 모두 고난 가운데 함께 하시는 그 예수님은 깊이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이 백부장의 이야기처럼 예수님은 우리를 만나주시며, 우리 이야기를 들어주시고, 우리를 고쳐주십니다. 우리의 상황을 아시는 그 예수님은 지금도 이해하고 계십니다. 어떻게 백부장의 종과 같이 전인격적인 치료를 경험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하면 그 예수님의 온전히 체험할 수 있을까요? 기도 응답이 없는 것 같은 이때에, 그리고 고난이 계속 되는 이때에, 그 괴로움의 시간 가운데,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우리의 주인으로 모시는 것입니다. ‘목사님 예수님을 이미 모신 지, 제가 30년 40년이 되었걸랑요?’ 라고 이야기하시는 분이 여기 계실 수도 있습니다. ‘목사님, 이미 삶의 주인이신데도 여전히 변화가 없어요. 대답이 하나도 변화가 없구요. 나는 여전히 이 질병과 싸워야 하고요. 여전히 이 가정의 문제와 씨름해야 하고요. 여전히 재정의 문제, 관계의 문제에 여러 가지 상황적인 문제로 예수님이 계신지 안 계신지도 가끔 헷갈릴 때가 있어요.‘ 라고 이렇게 반문하는 분이 여기 계신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렇게 반문하게 되신다면, 오늘 나의 모습은 이 성경 말씀에 나오는 백부장의 모습과 한번 비교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백부장은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오늘 8절 말씀 우리 함께 읽겠습니다. * 마태복음8:8, 8 백부장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 -백부장의 대답에 중요한 진리가 담겨 있어요. 주여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이 두 가지 표현에 아주 중요한 진리가 담겨있어요. 백부장은 예수님을 ‘주’, 라고 지칭하며 존경의 표시를 합니다. 물론 이때 유대 랍비에 대한 의례적인 정말 예의상 표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찌됐든 주님이라는 뜻으로 예수님을 부릅니다. 그뿐만 아니라,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라고 고백하는데요. 이 뒷부분을 통해 백부장이 단순히 예의상 주님이라고 얘기 했는지, 아니면 자신의 인생에 주인이라고 고백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말씀만으로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잘 알고 믿고 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라고 말씀하셨네요. 아닙니다. 예수님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백부장이 ‘주여’, 라고 고백했을 때 단순히 랍비여, 단순히 선생이여, 가 아니라 ‘내 주인이시여’, 라고 이야기할 게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백부장이 감당하지 못 하겠사오니. 라고 이야기를 했는데요. 여기에는 감히 자신이 예수님을 모실 자격(資格)이 없다. 라는 고백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모실만한 자격이 없는, 한없는 죄인(罪人)에 불과한 나를 찾아오시려 하십니까? 예수님의 말씀만으로 충분합니다. 라고 백부장이 고백하고 있는 거죠. 백부장에 이어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구절 말씀도 함께 읽어볼까요? *마태복음 8:9, 9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 -백부장은 예수님의 권위(權威)를 인정했습니다. 자신이 지휘관이기 때문에 내 밑에 있는 100명에게 뭐라 하면 오고, 가라하면 가고, 또 하라 하면 하는데,,, 예수님, 예수님 말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럼 예수님, 내 삶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하실 수 있는 권위가 예수님께 있습니다. 백부장은 이렇게 ㅖ수님의 권위를 인정했습니다. 우리는 백부장과 같이 예수님이 전능하신 분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백부장과 같이 예수님이 우리 삶의 주인이심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권위가 예수님께 있습니다. 내가 내 자신의 주인이 아니라 예수님이 내 자신의 다시 한 번 인정해야 합니다. 근데 여러분 실제로 정말 그렇게 인정하고 계세요? 내 삶의 왕좌(王座)에 정말 예수님이 늘 언제나 항상 앉아계신다고 단언 하실 수 있으신가요? 사실 많은 경우에 우리 인생의 왕좌에 다른 것이 앉아 있을 때가 많습니다. 자녀를 두신 분들은 자녀가 그 왕좌에 앉아 있는 것을 경험하실 거에요. 그 자녀의 앞길이, 자녀의 학업이, 또 자녀의 학업 성취도가 또 자녀의 구직 활동이, 수험생활이, 내 인생의 왕좌에 앉아 있는 것을 봅니다. 내 건강이, 내 재정이, 내 시간이, 내 가정 상황이, 내 인생의 왕좌에 앉아 있을 때가 예수님이 앉아 있을 때보다 더 많기도 합니다. 말로는 예수님을 모신다고 실상 예수님을 모시기 보다는 내 인생이 중요하다고, 내가 간구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왕좌에 앉아 계신 주님을 더 끌어내릴 때가 있기도 합니다. 내가 원할 때만 예수님을 찾고 싶어 해요. 그리고 내가 원하는 것만 예수님이 이루어 주시기를 바라곤 합니다. 그렇다 보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현재 장소, 가버나움이라는 이 우리의 삶은 괴로움의 장소가 돼 버립니다. 좌절(挫折)의 장소가 되어 버리곤 해요. 그래서 고난을 겪는 가운데 치료하시는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본인이 백부장을 만나주셨던,이야기를 들어주셨던,그리고 고쳐주셨던 가버나움으로 인도하십니다. 가버나움이라는 말은 원래 다음과 같은 ‘크파르 나훔’이라는 문자적으로 봤을 땐 나훔의 마을인데 이 나홈이라는 단어에 위로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가버나움은 위로의 마을이란 뜻을 담고 있어요. 예수님은 우리를 괴로움의 마을이 아닌, 위로의 마을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가버나움이 괴로움의 장소가 되지 않도록, 위로의 장소가 되도록 지금도 함께 하시며 치료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8장 7절 말씀드리면, 1번 더 같이 해볼까요? 시작 *마태복음 8:7, 7 이르시되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예수님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중풍병자에게 치료를 약속하셨습니다. 고통 받고 있는 종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백부장에게 반드시 고쳐 주리라. 약속하셨고 그것을 이뤄 주셨습니다. 확신을 주시며, 오늘도 일하고 계신 그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동일한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 예수님께서 오늘 우리의 이와 같은 말씀을 주고 계십니다. ※올해 초에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몇 년 전에 함께 제자 훈련을 했던 집사님께서 췌장(膵臟)암 진단을 받으셨다는 소식이었어요. 근데 이분이 유방암을 두 번이나 앓고 극복하셨던 분이세요. 추적(追跡) 검사 때마다 깨끗하다는 소식을 간증으로 삼으셨는데, 췌장암 3기라는 소식을 들으셨다고, 작년 연말에 이미 친정동생이 위암 4기 판정을 받았다며, 목사님 기도 부탁합니다. 라고 소식을 전한지 얼마 안 되어서 이런 소식을 전해 듣고, 제가 전화상에서 제가 많이 울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지난 4월에는 우리 남편 집사님께서 교통사고를 크게 당해 어깨와 척추 뼈가 골절(骨折)되었습니다. 뺑소니 사고였는데요. 3개월 넘게 재활을 해야만 하는 상황 그리고 그 이후에도 여전히 후유증이 있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이 집사님께 한꺼번에 일어날까, 모두가 그런 질문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췌장암 수술을 앞둔 집사님을 위해, 기도하기 위해 오랜만에 또 제자 반 집사님들이 함께 모여 병문안을 갔습니다. 근데 그 자리에서 이 집사님이 ‘목사님 집사님 저는 정말 감사해요. 지금까지 지켜주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인 걸요. 제 인생의 주인이시니 가장 선한 길로 인도 해 주실 줄 믿어요.’ 이 집사님의 고백은 정말 큰 도전이 됐습니다. 이 집사님의 고백대로 예수님께서 우리 집사님을 선한 길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8차 항암 이후에 진행된 제거 수술이 잘 진행되게 해주셨고, 이후 치료 과정이 잘 진행될 수 있도록 의료진의 지혜를 주고 계신 상황입니다. 중풍병은 백부장이 예수님을 만나게 하는 매개체(媒介體)가 됐습니다. 어 중풍병(中風病)은 예수님이 이야기를 들어주신다는 그 사실을 깨닫게 하는 도구(道具)가 되었습니다. 이 중풍병은 백부장의 종이 예수님의 전인격적인 치료를 경험하게 하는 놀라운 도구가 되었습니다. 만약에 종이 병에 걸리지 않아도 백부장은 예수님을 찾아올 생각조차 못 했을 겁니다. 만약에 중풍 병이 아니었다면 이 병에 걸렸던 종은 예수님이 치료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을 겁니다. ※저는 엊그제 저녁까지 제자반 집사님들과 함께 대만 북부 신주시에서 3박 4일간 훈련 아웃리치를 진행했습니다. 지난 25년간 선교 사역을 이어오셨던 우리 교회에서 파송되었던 선교사님과 협력해서 사역을 진행했는데요. 막상 이야기를 듣고 보니 대만에 가신 지는 2년 밖에 안 됐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자초지종(自初至終)을 들어봤더니, 이전에 중국 우루무치에서 위구르족을 상대로 20년간 사역을 이어오셨는데, 갑자기 바뀐 중국 정세(政勢) 때문에 쫓기듯이 그 사역(事役)지에서 나올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셨답니다. 많은 중국 선교사님드링 그리 하듯이, 어쩔 수 없이 중국 사역지에서 갑작스럽게 나오게 되신 거에요. 그리고 정말 뜻하지 않은 상황 가운데 하나님의 신적 개입으로, 정말 예상치 못했던 대만 땅에, 아이티(IT) 도시라고 불리는 신주시에 사역을 하시게 되었습니다. 그 신주시에 60년 전에 우리 한국 고신교단 첫 번째 선교사로 파손되었던 그 사역자가 세웠던 교회, 현지 교회 신주 장로교회에서 협력하게 되신 거였어요. 제가 선교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나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만약 선교사님께서 20년 동안 생각하셨던 그 사역 지를 갑작스럽게 떠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함께 생각하지 않았겠구나, 만약에 선교사님이 고난(苦難)의 길을 겪지 않으셨다면 신주 장로교회가 사랑의 교회에서 전해준 그 사랑의 섬김을 받지 못했겠구나, 만약 이 선교사님의 거처를 그렇게 옮기시지 않으셨다면 하나님께서 대만 땅에서 일하시는 것을 우리 모두가 보지 못했겠구나, 선교사님 부부에게 찾아왔던 이 고난의 길로 보이는 변화(變化)가 우리 제자 반에게, 신주 장로교회에게, 사랑의 교회 영 가족에게 있어서는 위로의 길, 치료의 길이 된 것을 저는 봤습니다. 선교사님 부부 덕분에 주변 지역의 노방전도를 할 수 있었고, 더운 날씨에 그리고 여러 가지 상황에 지쳐 있었던 현지 교회 성도들을 위로할 수 있었습니다. 그 대만 사람들에게 영혼 구원의 열정을 나눠줄 수 있었어요. 말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모통 동네였던 가버나움은 괴로움의 마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괴로움을 털어놓을 수 있는 곳 괴로움의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피난처, 치료가 일어나는 현장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함께하시는 그곳은 백부장뿐만 아니라, 기적을 체험한 모두에게 치료의 현장이 되었습니다. 내 삶에 가버나움은 비록 고난이 가득해서 괴로움의 장소처럼 보이지만, 예수님이 함께 하시며 일하시는 나의 치료자 되시는 그 예수님께서 지금 역사하시는 위로(慰勞)의 장소가 된 줄 믿습니다. 아멘.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곳이며, 위로를 경험하신 하는 곳이며, 소망을 발견하는 곳이 된 줄도 믿습니다. 나의 치료자 되시는 그 예수님께서 오늘 외로움의 가버나움에 있는 우리를, 위로의 가버나움 치료의 가버나움으로,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그 가버나움으로, 초청하고 계십니다. 치료자 되시는 예수님께서 고통과 절망 가운데 이 말씀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만나주십니다. 아멘.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십니다. 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우리를 고쳐 주십니다. 아멘. 그 예수님께서 육체뿐만 아니라 우리 영혼까지 전인격적인 치료를 베풀어 주신 것을 경험하시며 나의 치료자 되시는 그 예수님을, 치료가 필요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우리 영 가족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우리의 치료자 되시는 그 예수님께서 우리뿐만 아니라, 복음을 받는 모든 이들을 치료하실 줄 믿습니다. 나의 치료자 되시는 그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참된 회복을 경험하시는 사랑하는 영 가족 여러분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여전히 배반하고 여전히 의심하며, 여전히 주님을 왕좌에서 끌어내리려고 하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우리를 만나주셔서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의 이야기를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고쳐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전히 우리 삶 가운데 있는 고난 그 길 앞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해 주옵소서. 그 고난의 길이 위로의 길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나의 치료자 되신 예수님께서 괴로움에 가버나움을 위로와 치료의 가버나움으로 바꾸어 주시는 것을 경험하게 해 주옵소서. 그리하여 나의 치료자 되시는 예수님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그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요약 언제나 우리를 만나주시고 이야기를 들어주시는 예수님만 찾고 따르는 인생이 되어야 한다. 참 된 치료자이신 예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전인격적인 회복을 경험하며, 예수님을 삶의 진정한 주인으로 모시며 위로와 치료의 기적을 경험하는 인생이 되어 우리 예수님의 지상 명령인 예수님을 증거 하는 구힌 자녀로 살아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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