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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2년 8월 3일)

제목: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
말씀:빌립보서 4:10-13
찬양인도:쉐키나-(이 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윤주은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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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보서 4:10-13,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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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주은 부목사님.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기쁨을 향유하겠다는 선언이다. 기쁨을 누리고 만끽하겠노라는 당당한 외침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제자라면 기뻐하는 삶이 당연해야 하고 자연스러워야 한다. 그런데 어떤 그리스도인들을 보면 괴롭게 우울한 생활이 당연하고 불평과 우울, 분노와 짜증내는 삶이 더 자연스럽다. 기쁨을 향유하기는커녕 세상 다 사는 얼굴을 하고 힘들어 죽겠다는 그런 언어를 쓴다. ‘예수님을 믿는데 기쁨이 없어서’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마이크 메이스’라는 분이다. 이 분은 평생이 우울했다. 평생을 경계성 우울증을 앓았고 또 신경과민에 시달렸다. 술에 의존해 살면서 알코올 중독자 모임에 나가는 사람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가 예수님을 믿는지 10년이나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깊은 우울증에 빠졌다는 사실이다.
 
어느 날 그의 친구의 두 어린 아들이 교통사고를 당해서 죽게 되었다는 그 비극의 소식을 듣고 나서 문득 성경이 말하는 ‘항상 기뻐하는 삶이 정말로 가능한 것인가?’를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한 가지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했다. 90일 동안 주님 안에서 기뻐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항상 기뻐하는 삶이 가능하구나!’룰 경험했다. 처음에는 이것이 정말로 가능한지 확인해보고 싶어서 그렇게 도전했지만 이 프로젝트를 마치고 나서 그의 대답이 인상적이다. 항상 기뻐하는 삶이 가능합니까? 의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당당히 대답한다. ‘사람이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기는 어렵다. 세상에는 기뻐하지 못할 일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다. 하지만 못할 것도 없다.’ 라고 했다.
 
예수님을 믿는데 기쁨이 없어서, 이 말이 우리의 아픈 곳을 찌른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으면 남들과는 다를 줄 알았다. 아마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라고 고백하는 것을 보시면서 ‘조금 다르겠거니’ 생각하실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의 실재의 모습은 어떠한가? 성경대로 항상 기뻐하는 삶인가? 담임 목사님께서는 작년 5월 2일 주일 예배 때에 감정의 온전함에 대해서 말씀을 전해주셨다. 본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라고 하는 말씀인 빌립보서 4장 4절 말씀이었다. 그때 담임 목사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전해주셨다. “내가 도무지 알 수 없는 환경 가운데서도 만족의 감정을 갖는 것이 가능한가? 여러분의 형편이 현재 만족스러울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그런데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다면 기쁨의 원천이 메마르지 않고, 감정도 치유 될 것이다.” 라고 하셨다. 이처럼 감정의 온전함을 이루는 핵심은 기쁨이다. 그리고 기쁨의 비결은 자족하는 것이다. 우리는 자족하는 삶을 통해 기쁨을 회복하고 감정의 온전함을 이루어서 생명의 부흥으로 나아가야 한다. 오늘 말씀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사도 바울이 그런 삶을 살아냈다. 어떻게 사도 바울은 그런 삶을 살아낼 수 있었을까?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편지를 써서 여러 가지 문제로 당부(當付) 한다. 당부의 말을 전하고 나니까 그동안 자신을 돌보아주고 섬겨준 빌립보 교회에 감사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났다. 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은 자신들도 형편이 썩 좋지 않았지만 이 바울의 물질적인 후원자 역할을 해왔기 때문이다. 빌립보서를 써내려가던 당시 바울은 아시다시피 감옥에 갇혀 있었다. 빌립보 교회가 에바브로드 라는 사람을 파송(派送)해서 이 바울을 다시 한 번 후원한 것이다. 바울은 이 사실에 크게 기뻐하면서 감사해한다.
 
빌립보서 4:10,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그렇다고 해서 바울이 사상의 내용을 써내려가는 목적은 단순히 감사의 인사만이 아니었다.
 
*빌립보서 4:11,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빌립보 교회에 대한 감사는 진심이었다. 그러면서도 바울은 이 성도들의 후원을 초조하게 기다리거나 기대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자신을 후원해 주는 일이 감사하고 기쁜 일이고 자신에게 큰 도움은 되지만 그것은 절대적으로 의지 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빌립보 성도여러분, 이번에 저를 도와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다음에도 잘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다른 부탁을 하기 위해서 쓰는 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런 맥락에서 10절 초반에 ‘크게 기뻐한다.’ 라고 한 말은 자신이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위로와 격려가 필요했는데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이 그것을 채워주어서 내가 힘이 나고 내가 감사합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딱 잘라 한 말이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12-13절에 걸쳐서 자신이 어떤 삶에 도달에 있는지를 말해준다. 자신이 어떤 믿음으로 살아왔는지 그 비결은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그 중심에는 자족함이 있었다. 바울이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은 자족하는 것이었다. 바울이 그렇게 자족하는 삶을 통해 기쁨을 회복하고 감정의 온전함을 이루어서 생활의 부흥으로 나아가는 삶으로 오늘 우리를 초대한다.
 
저는 오늘 말씀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려고 한다. 먼저는 자족에 대한 오해들을 풀어내고 그 이후에는 바울이 가진 자족의 원칙들을 다루려고 한다. 먼저는 자족에 대한 오해들을 몇 가지 풀어보도록 하겠다. 이런 오해를 할 수 있다. “좋습니다. 자족하며 살겠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처한 형편에 무감각 하면서 마냥 긍정적으로 살아야 합니까? 내가 어떻든 간에, 내가 무슨 일을 당했든 간에 두 손 놓고 지내야 합니까?” 바울이 자족했다는 말은 그런 말이 아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처한 형편을 객관적으로 살펴보고 마땅히 반응하는 사람이다. 긍정적으로 사는 것은 좋지만 사리분별하지 않고 살아서는 안 된다. 이와 이렇게 된 것,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살아서도 안 되는 것이다. 시편의 기자들을 떠올려 보자. 그들은 자신들의 처한 형편에 무감각하거나 마냥 긍정적으로 살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형편을 살필 줄 알았고, 마땅히 반응했다. 좋은 일이 있을 때는 기뻐하고, 찬송하고 감사했다. 반면에 마음이 괴로워서 한숨만 쉴 때에는 자신의 심정을 헤아려주시는 그 하나님께 기도했다. 이 때 올려드리는 기도에는 억울함을 기도하고, 답답함이 묻어나기도 했다. 이처럼 바울의 말은 절대로 처한 형편에 무감각하거나 마냥 긍정적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는 이런 오해를 할 수도 있다. “좋습니다. 자족하며 살겠습니다.” 그러면 앞으로 현재에 안주하면서 주어진 대로만 살아야 하는가? 지금의 형편에 그저 만족해하면서 뭔가를 바라거나 더 잘하려고 하거나 더 나은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바울의 자족한다는 것은 역시나 그런 말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발전하려고 하는 욕구가 있다. 그리스도인도 예외가 아니다. 하나님께서도 가나의 혼인잔치를 통해서 하나님의 마음을 보여주셨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예수님을 신뢰하고 말씀을 신뢰할 때에 어제보다 오늘이 더 낫고 처음보다 끝이 더 좋게 하시겠다고 약속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의 삶도 그렇게 이끌어 가실 줄 믿는다.
 
이처럼 바울의 말은 절대로 현재에 안주하거나 주어진 대로 살아야 한다. 라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여전히 무언가를 바랄 수 있고 더 잘할 수 있고 더 나은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자족에 대한 오해는 이쯤으로 정리하고 이제 바울이 가진 자족의 원칙들을 나누려고 한다.
 
I. 자족은 배워야 한다.
 
*빌립보서 4:11-12,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본문을 이해하려면 네 가지 핵심 표현들에 집중해야 한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 일체, 비결, 배웠다.’ 라고 하는 표현들이다. 바울은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경험한 사람이었다. 그가 사역하는 현장들마다 열매가 풍성했고 영광스러웠다. 물론 사역이 만만한 것도 아니었다. 항상 기뻐할 일들만 있지도 않았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끊임없는 조롱과 비난을 당해야 했고, 수없이 매를 맞아야 했고, 온갖 위험을 당해야 했다. 잠을 지새운 적도 많았고, 목마르고 굶주리며 헐벗은 일도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감옥에 갇혀있다. 그냥 있는 것이 아니라 족쇄에 매여 있다. 여기에서 죽게 될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사역을 멈춰야 할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동역 자들과 성도들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상황이 생겨날 수도 있다. 이것이 바울이 말한 ‘어떠한 형편’이었다. 이때 바울은 우리처럼 짜증내거나, 분노하거나, 염려하거나 불평하지 않았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자족하겠습니다. 나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습니다.“ 바울이 한 말이니까 뭔가 대단한 구석이 있긴 한데 그게 무슨 뜻인지 정확한 개념 정리가 필요해 보인다. 도대체 바울이 말하는 자족이란 무슨 의미인가?
 
한 마디로 자족이란 모든 형편에 맞출 수 있는 마음이다. 어떤 형편에든지, 억지로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닌 오히려 형편을 주도해 가면서 그 형편에 완전히 맞추는 것이다. 그 말은 현실에 굴복하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겠다는 그런 부끄러운 결단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누리면서 감당해 나가겠다는 그러한 적극적인 결단이며 이것이 바로 자족의 의미이다. 특히 12절 끝에를 보면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 라고 이야기 한다. 이것은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능력, 적응력을 말한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적응하고, 맞추어 살 수 있는 맞춤형의 능력, 그것이 자족하는 삶이라는 것이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상황을 지배할지언정 상황이 나를 지배하지 못한다. 내 기쁨은 내게 닥치는 일들에 좌우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일체의 비결을 배웠다.‘ 라고 하는 바울의 고백이다.
 
여러분, 물의 저력에 대해 생각해 보자. 물의 원리가 그렇지 않은가? 물은 어떤 그릇에 담든지 그 모양대로 자유자재로 바꾼다. 둥근 사발에 담으면 둥근 모양이 되고 우그러진 쪽박에 담으면 우그러진 모양을 하게 된다. 또 깊은 골짜기에 고여 있다가도 그 물이 넘쳐흐르면 하류를 따라서 정처 없이 흘러간다. 돌이나 바위를 만나면 비켜간다. 이처럼 물은 저항을 받아 부정하는 법이 없다. 어떠한 환경이든지 묵묵히 적응한다. 이것이 물의 적응력이고 물의 저력이다. 표현이 좀 어색하지만 물은 자족한다. 결국 본문에서 방점을 찍어야할 표현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하는 표현이다. 우리가 자족해야 하는데 어떠한 형편에든지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가능할 때만 자족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고 바울이 보여준 삶의 모범이었다. 결국 바울은 자신의 경우를 소개하면서 이렇든지 저렇든지 어떠한 형편에든지 맞출 수 있고 적응할 수 있게 우리 가운데 도전하는 것이다. 이게 바로 자족이다. 그렇다면 자족할 수 있는가? 바울은 배움을 통해 자족했다.
 
*빌립보서 4:11-12,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바울은 ‘배웠다.’는 말을 두 번 반복한다. 배웠노니, 배웠노라. 이렇게 고백하는데 이 표현의 더 나은 표현은 ‘배우게 되었다.’ 이다. 단순히 배웠다가 아니라, 배우게 되었다 이다. 바울은 배움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비밀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이 배우게 되었다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공부를 해서 무언가를 습득하듯이 어떤 이론이나 지식적인 것들을 우리가 채워가듯이 그렇게 알게 된 것이 아니다. ‘경험을 통해서 깨닫게 된 사는 지혜’를 가리킨다. 경험은 누군가가 대신 해줄 수 없다. 반드시 직접 경험해야 한다. 바울은 이런 저런 형편을 직접 겪으면서 모든 형편에 맞출 수 있는 마음을 배운 것이다. 그 어떤 경우에도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운 것이다. 경험을 통해 어떠한 형편에든지 살 수 있는 사는 지혜를 이 바울이 깨달은 것이다. 고린도후서 12:9-10절을 보면,
 
*고린도후서 12:9-10,
9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10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
- 바울이 그렇게도 고생했던 육체의 가시가 나온다. 바울은 육체의 가시가 너무도 싫었다. 그래서 하나님께 세 번이나 기도했다. “하나님, 없애 주세요. 가시를 좀 가져가십시오.” 이렇게 세 번이나 간구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뽑아 주시지 않았다. 그러자 바울이 그 결과를 받아들일 수 없고 그러자 조바심이 났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전하고 사역을 더 잘하고 싶은데 이 육체의 가시가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그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교훈을 얻는다. 여러분도 잘 알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충분하구나,” 바울이 깨달은 것이다. 바울의 가시를 가진 형편 가운데 불편한 것이 아니라, 짜증 낸 것이 아니라, 염려한 것이 아니라, 맞출 수 있는 마음을 배웠고,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배웠고, 사는 지혜를 깨달았다. 지혜가 필요하다. 인생에는 많은 굴곡과 변화가 있다. 희노애락(喜怒哀樂)이 있다. 슬플 때가 있고 기쁠 때가 있고 가난할 때가 있고 넉넉할 때가 있고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고 또 실패할 때가 있으면 성공할 때가 있는 것이 인생이다. 전도서의 기자의 따르면 모든 일에는 다 때가 있고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마다 알맞은 때가 있다. 전도서 기자는 7장 14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전도서 7:14,
14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되돌아 보아라 이 두 가지를 하나님이 병행하게 하사 사람이 그의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 바울은 그 진리를 깨달았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이 처한 상태를 배움의 기회로 삼고 자족하기로 결단했다. 자족이라는 것이 바울에게도 배워야 하는 일이었다면 하물며 우리는 어떻겠는가? “앞으로 나는 저는 자족할 겁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는 오늘 말씀을 들은 이후로 이제는 자족하면서 살 것입니다.” 이런 막연한 의지와 결단으로는 절대로 자족할 수 없다. 자족이란 것은 나이가 먹는다고 해서 신앙생활의 연수가 늘어난다고 해서 자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족은 배워야 한다. 쉽고 어려운 일들, 자꾸 큰일들,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경험하면서 사는 지혜를 깨달아가면서 배워야 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어떠한 형편 가운데 놓여있는가? 재물을 잃었는가? 사랑하는 사람이 떠났는가? 진리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고 계신가? 누군가가 여러분을 힘들게 하는가? 하는 일마다 실패하고 있는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있는가? 부모들이여 날마다 자녀를 키우면서 자신의 밑바닥을 확인하고 있지는 않는가? 혹시 자녀들이 아픔과 고통에 함께 신음하면서 그렇게 고통하고 있지는 않은가? 사도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 짜증내고, 분노하고, 염려하고 그러한 것들은 배우지 않아도 잘 한다. 그런데 자족은 배워야 한다. 사람은 절대로 어떠한 형편에 처하기 전에는 절대로 배울 수 없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처해 있는 형편은 자족함을 배워갈 수 있는 절호(絶好)의 기회(機會)인 줄로 믿는다. 그러므로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함을 배워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바울이 가진 두 번째 원칙은
 
II. 자족은 능력 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할 수 있다.
 
빌립보서 4:13,
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여러분이 참 좋아하는 말씀일 것이다. 듣자마자 반갑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이 말씀을 전할 때마다 성도들이 큰 격려와 위로와 격려를 받는 것 같다. 그런데 이 말씀은 하면 된다. 할 수 있다. 하는 식의 긍정의 힘으로 믿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내 안에 잠재력이 무궁무진(無窮無盡)하다. 이런 식으로 우리가 이해해서도 안 된다. 이 표현은 목회자는 목회자로 불리고 그러나 소천하신 ‘유진 피터스 목사님’께서 번역하신 표현이 참 좋다. 이 목사님은 13절을 이렇게 번역한다. “내게 계속 힘을 불어넣어주시는 분이 있어 나는 강해졌습니다.” 아멘, 바울은 이 고백을 통해 자족하는 힘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바울은 그 힘의 근원을 자기 안에서 찾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이나, 자연이나, 물질이나 권력이나 자신이 그동안 이루어 온 일들로 더 찾지도 않았다. 바울은 오직 예수님 안에서 찾았다. 바울은 당시 스토아 학자들이 평소에 메시지를 전했던 그 내용들을 토대로 의식하면서 의도적으로 이렇게 고백한 것이다. 스토아 학자들은 모든 상황에서 필요한 모든 자원을 스스로 마련하라고 가르쳤다. ‘세상에는 소망이 없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니 상처받지 말고 최선을 다하면서 살라.’ 이렇게 가르쳤다. 이런 가르침의 .특징은 오늘날의 동양종교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자족함의 근원을 자기 자신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자족함의 근원을 이해한다. 바울은 어떻게 이처럼 고백하게 되었을까? 예수님을 아는 일이 최고로 가치 있는 일임을 깨달았기 모든 지혜와 지식과 힘과 용기의 원천이 예수님께 달려있다. 그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또 모든 것을 소유하신 만유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면 나는 아무것도 없지만 나도 그 예수님으로 인해서 모든 것을 가졌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바울이 자족했다는 말은 바울이 말하는 자족이라는 말은 단순히 자기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충만함으로 만족하겠다는 것이다. 본문 19절로 이어가면 하나님께서 바울 자신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예수님 안에서 채워주실 것을 믿었다.
 
*빌립보서 4:19,
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비록 자신은 감옥에 갇혀있지만 하나님께서 바울 자신에게 이런 모든 것을 누구 안에서 예수님 안에서 채워주실 것을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인하여서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게 하실 줄로 믿었다. 이것이 바울의 자족함이었다. 여러분도 믿는가? 여러분도 그런 삶을 살아가고 싶지 않은가? 그렇다면 우리 가운데 요구되는 두 가지 삶의 모습을 기억해야 한다.
 
첫째는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사는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것이 있음을 믿는 것이다. 나는 약하지만 예수님 안에는 변함이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도 부정하지만 죄 많은 죄 투성이 죄인이지만 예수님은 강하심을, 그리고 예수님의 거룩하심을 믿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예수님의 능력을 힘입어야 한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또 하나의 모습은
 
두 번째는 예수님으로 만족하는 것이다. 살면서 한번쯤은 진정한 만족이 어디에서 오는가? 를 고민해 보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아, 세상에는 참된 만족함이 없구나!’ ‘사람을 보며 세상을 볼 땐 만족함이 없었구나!’ 를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참된 만족을 주시는 예수님을 정답이라고 고백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 믿음을 가지고 이 자리에 회복을 넘어 부흥으로 나아가고 치유와 응답을 체험하기 위해 이 자리에 온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정답대로 그렇게 살면 된다. 예수님 안에서는 우리가 할 수 있음을 믿고 하나님께서 주신 충만함으로 만족하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님 안에서 만족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극치이요, 최상의 기쁨인줄로 믿는다.
 
여러분, 내 안에서는 할 수 없지만 예수님 안에서는 할 수 있다. 내 안에서는 할 수 없지만 늘 뒤통수만 치는 세상의 허무한 것들을 의지하면 할수록 할 수 없지만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인도하시는 예수님 안에선 할 수 있다. 여러분이 아는 사람, 여러분이 가진 것들 물질과 권력과 그동안 이루어 왔던 수많은 것들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지만 여러분에게 계속 힘을 불어넣어주시는 예수님 안에서는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어떤 형편이 주어지든지 그것이 심지어 불의의 사건일지라도 여러분은 그 형편 가운데 자족할 줄 믿는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서 약속하신 것처럼 오늘 저와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도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그 충만함의 은혜가 우리 가운데 넉넉히 부어질 줄 믿는다. 그러므로 능력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자족할 수 있는 고백이 되길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마지막으로 바울이 가진 세 번째 원칙은
 
세 번째는 주님께서 내 모든 형편을 섭리 안에 있음을 믿는 것이다. 배고픔과 비천함에 처하는 것, 배부름과 풍부함이 처하는 것, 그 어떠한 형편도 바울에게는 문제되지 않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바울은 현재 자신이 처한 형편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여 주신 것인 줄로 믿었다. 하나님께서 모든 형편 가운데에 먹이시고 입히시고 채우시며 인도해 가실 것을 믿었다. 하나님께서 모든 일을 먼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그리고 이후에는 믿는 자의 유익을 위해서 선이 되도록 역사하실 것을 믿었다. 그래서 이 바울은 ‘주님께서는 모든 내 형편을 아신다.’ 이 믿음 가지고 자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로마서 8:28,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심지어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있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 일이 복음 전파에 도움이 되었다라고 고백을 한다. 이 일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음을 믿은 것이다. 빌립보서 1:12절을 보자.
 
*빌립보서 1:12,
12 형제들아 내가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 전파에 진전이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우리의 이 형편 가운데 두실까? 왜 하나님께서는 나를 오늘의 형편 가운데 두시는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오늘의 형편 가운데 두셔서 한계를 만나게 하여 주시는 것은 “한 번 살아보아, 너 믿음의 실력 좀 보자.” 도전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저런 형편에 머물면서 감정의 온전함을 이루고 예수님의 신실한 온전한 제자가 되게 하려는 것, 하나님의 뜻, 그것이 하나님께서 오늘을 사는 가운데 우리를 두시는 이유이다. 사람이 한 단계 성장하고 성숙하려면, 사람이 실력이 되려면, 가장 좋은 비결은 자신이 마주한 한계를 뛰어 넘는 것이다. 운동을 하다보면 어느 순간에는 육체의 한계를 만난다. 그만 포기하고 싶다. 그런데 그 한계를 뛰어 넘어야만 비로소 실력이 늘고 육체가 더욱 건강해진다.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떠한 형편 가운데 두시고, 한계를 만나게 하실 때에 그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하나님, 나는 싫습니다. 나는 아닌 것 같습니다. 다음에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어떠한 형편을 만나게 하여 주실 때에는 그래서 한계를 만나게 하여 주실 때에는 그 도전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저와 여러분의 순종이다. 그래야 예수님의 제자답게 사는 실력이 늘 수 있다. 그래야 감정의 온전함을 이룰 수 있고, 그래야 예수님의 온전한 제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신앙이라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뭔가를 하겠다는 결단이 아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어제 무엇을 해주셨는지 오늘 무엇을 하고 계시는지, 내일 무엇을 해주실지를 이해하고 신뢰하는 것이다.
 
여러분, 결국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해서 믿어야 할 것은 무엇이고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찬송가 310장의 고백대로 모든 형편을 아시는 주님, 그렇게 선포하고 그렇게 묵상하고 그렇게 찬송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형편을 잘 아시고 헤아리시며 목자의 심정으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그 주님 안에서 우리도 자족할 수 있음을 믿는다. 우리가 처한 형편을 묵상하면 거기에는 답이 없다. 묵상하면 우리의 믿음만 사라져갈 뿐이다. 그러나 우리 주님을 묵상하면 거기에 답이 있고 그것이 우리의 믿음을 온전하게 하는 유일한 길임을 믿는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내 모든 형편을 아시는 주님을 믿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란다. 말씀을 정리한다.
 
-저는 중학교 시절에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비록 녹녹치 않은 유학 생활이었지만 학업을 마치고나면 나름대로 탄탄대로가 펼쳐지겠지, 하는 생각이 있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제가 미국 생활을 하게 된 이유는 제가 목회자가 되게 하려는 하나님의 큰 그림이었다. 저는 어떠한 계기를 통해서 부르심을 확신하고는 학업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신학과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래서 십년 도 더 된 이야기이다. 비록 바울이 비할 바는 아니지만 그리고 모든 목회자들이 그런 과정이 다 있었겠지만 여러모로 쉽지 않았다. 부르심에 대한 기대와 설렘을 가지고 귀국했지만 가족 하나 없이 나 홀로 궁핍하고 초라한 시간을 보내면서 모든 것을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상황이 제 마음을 매일 짓눌렀다. 그래도 두 얼굴의 인생을 주관하신 하나님께서 때마다 일마다 하나하나 세워 가시고, 자라게 하시며, 이루어가셨다. 지난 모든 형편 가운데 데 아내는 분명한 믿음이 있었다. 내 모든 형편을 주님이 다 아신다. 숱한 밤을 지새우면서, 제 모든 형편을 아시는 주님을 참 많이도 묵상하고, 선포하고 찬송했던 것 같다. 그렇게 믿음 안에서 몸부림쳤더니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다. 이런 저런 형편 속에 있던 지난 모든 시간은 결국 하나님께서 제게 허락해 주신 배움의 기회가 되었다. 주 앞에서 사랑하고 응원하는 영 가족 여러분,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고 싶은가? 감정의 온전함을 이루고 싶은가? 그래서 생활의 부흥으로 나아가고 싶은가? 저도 그런 은혜를 소망한다. 그런데 현실은 쉽지 않다. 우리가 살다보면 이런 저런 형편이 놓여 산다. 그리고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다 나름의 형편이 있다. 세상에는 완벽한 형편이 없다. 그래서 자족하라고 하는 이 말이 참 많이 무겁다. 이런 저런 형편 가운데 바울처럼 자족하며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자족하라고 제안하시는 것이 아니라 명령하시는 것이다. 호락호락하지 않는 세상이지만 한 번 지켜보자는 것이다.
 
여러분 포기하겠는가? 포기하지 말라, 왜냐하면 우리 주님은 우리를 너무도 잘 알고 계신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내 모든 형편을 아시는 주님을 선포하면서 묵상하면서 이렇게 찬송하면서 자족하는 삶이 하나님의 명령인줄 믿고 그 삶을 살아낼 줄 믿는다. 그 삶을 살아내기 위해서 세 가지 원칙을 기억하라. 자족함을 배워가라. 능력 주시는 예수님 안에서 살 수 있음을 고백하라. 주님께서 내 모든 형편을 아심을 믿으라. 모든 형편이 섭리 안에 있음을 믿는 것이다. 바라기는 이렇든지 저렇든지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하기를 결단하기를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망한다. 자족하는 삶을 통해 기쁨을 회복하고 감정의 온전함을 이루어서 생활의 부흥으로 나아가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간절히 소망한다.
 
♣요약
우리의 필요한 모든 것을 베푸시고 채우시는 우리 하나님께 오늘 자족하는 마음을 주심에 감사하고 예수님을 믿는데 기쁨이 없는 우리의 삶을 뛰어 넘어서 우리는 온전한 예수님의 제자로 살아가야 한다. 자족하는 삶을 통해서 기쁨을 얻어서 감정의 온전함을 이루어가서 생활의 부흥으로 나아가길 소원해야 한다. 인생에는 두 얼굴이 있음을 깨닫는 지혜를 간구하여 어떠한 형편에든지 자족함을 배우면서 내 안에서는 할 수 없지만 내게 힘들 불어넣어 주실 줄 믿고 예수님 안에서는 할 수 있음을 고백하고 내 모는 형편을, 섭리 안에 있음을 믿어서 자족하는 삶을 살아내야 한다.
 
그것은 곧 빌립보 성도들이 바울을 사랑한다는 증거였으며, 아울러 그들 가운데서 바울이 사역한 것이 성공하였다는 증거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는 곧 바울이 궁핍을 겪었기 때문이거나 혹은 두려워했기 때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가 궁핍을 겪었기 때문이 아님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지극히 적은 것으로 만족했으며 또 그것이 그를 만족케 했던 점을 생각할 수 있다. 그가 궁핍을 두려워했기 때문이 아님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하나님께서 날마다 그에게 공급해 주실 것을 믿었으며 따라서 만족했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겠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에 있어서와 같이 그에게 있어서도 고난과 역경 속에서 경험하여 배울 필요가 있는 교훈이었다.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이와 같이 삶의 모든 여건에 사진을 순응시키는 것은 은혜에서 비롯된 특별한 생활의 태도이다. 우리가 고난의 여건에 순응하는 것 이것은 비천에 처할 줄 아는 것이다. 우리가 부유한 여건에 순응하는 것, 이것은 풍부와 배부름에 처할 줄 아는 것으로서 자만이나 안주와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천에 처할 줄 아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교훈이다. 이는 배부름과 부요의 상태에서 오는 유혹이 고난이나 궁핍의 상태에서 오는 유혹보다 못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우리는 모든 여건 속에서 자족하도록 그의 힘이 우리를 가르치는 것을 필요로 한다. 바울 사도는 마치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의 힘에 대해서 자랑한 것처럼 보인다. 12절의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에서 그렇게 느끼기가 쉽게 그러나 13절에서 그는 모든 찬양을 그리스도에게 돌리고 있다. 즉 그는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음은 그의 끊임없이 새롭게 공급되는 힘에 의해서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 처해 있을지라도 자족하는 비결을 터득했다. 이는 모든 일에 있어 살아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을 의지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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