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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저녁기도회(주후 2021년 8월 25일)

제목: ''불꽃 같은 삶을 살라는 게 아니라''
말씀: (출애굽기 3:1~12)
찬양인도: 이다니엘 부목사님
사회: 김도훈 부목사님
 
설교자: 강건우 부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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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3:1~12),
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 하는고 하니 그 때에.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12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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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혜를 사모하여 성도의 온전한 블레싱, 수요저녁기도회에 나오신 성도님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하며 축복한다. 사모함의 걸 맞는 은혜와 기쁨을 충만히 공급해 주실 줄 믿는다.
 
▶ 강건우 부목사님.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인사를 건네면, 아주 짧은 적막이 흐르고 상대방도 반응을 보인다. 그 목소리에 힘이 있는 경우가 별로 없다. 모르는 전화로 전화를 거니 낯설기도 하겠지만 혹시 스팸 전화가 아닐까라는 경계하는 마음에 목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그런데 제가 “안녕하세요!! 사랑의교회 강건우 목사입니다.”라고 말씀 드리는 순간 상대방 목소리 톤이 급격히 올라간다. “아! 목사님, 안녕하세요! 하고 러블리 하는 목소리를 내면서 반응을 해준다. 무척 감사한 일이다. 이 목회자라는 이유만으로 반가워해주시니 말이다. 전화뿐이겠는가,
 
지금 코로나 상황에서 사실 심방(尋訪)이 어렵지만 사실 심방을 갔을 때도 마찬가지다. 서로 일면식도 없는 사이가 인생에 깊은 곳에 감추어진 기도 제목을 나누게 된다. 느슨했던 소망의 고삐를 다시 움켜잡고 기도할 힘을 얻기도 한다. 왠만한 사이에서는 꺼낼 수 없는 이야기, 그러라고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마음에 거리가 금 새 좁혀진다. 이번 여름에 가나에 가서도 많이 느꼈다. 가나 사람들이 저를 볼 때, 그저 아시아 사람, 중국 사람일 수도 있고 일본 사람일 수도 있고, 한국 사람일 수 있다. 그러던 저러던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런데 ‘사랑의 교회 목사’라고 하면 뭐가 그렇게 알고 싶은 게 많은지 폭발적인 대화가 시작된다. 기대감을 갖고 말을 건네는 것이다. 여러분 저마다 그런 존재들이 있지 않는가? 휴대폰에 그 사람의 이름만 떠도 위로를 받고 힘을 얻고, 그 사람과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그런 대상들이 있을 것이다. 이 사람하고 전화기를 붙들고 있으면 다른 사람과 달리 이런저런 마음속에 있는 말까지 하게 되고 그 김에 회복도 얻고, 소망도 하게 되는 사람이 저마다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을 드리는 데 그런 존재가 금 새 떠오른다면 여러분들은 참 행복한 사람이다. 하지만 더 행복한 존재가 있는데, 그 사람은 바로 그 대상을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인생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대할 때, 그 이름을 부를 때, 소망과 기쁨이 나름 밀려온다. 그 사람, 이와 반대의 경우로 하나님이 그다지 설레임이 없는 것, 그닥 그렇게 기대감이 없다고 생각하는 자도 있을 것이다. 그럼 오늘 본문의 모세는 어느 편이었겠는가?

(출애굽기 3:1~12),
1 모세가 그의 장인 미디안 제사장 이드로의 양 떼를 치더니 그 떼를 광야 서쪽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매.
-성경은 모세를 이렇게 설명한다. 모세가 그의 장인 이드로의 양떼를 치고 있었다고 한다. 여기 모세의 장인이 어느 민족 출신이라고 말하고 있는가? 바로 미디안이다. 그럼 모세는 어느 민족인가? 이스라엘 민족이며,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이스라엘 중에 레위지파이다. 출애굽기 2장을 보면 레위사람이 레위여자에게 장가들어 한 아이를 낳았다고 표현함으로써 모세는 레위지파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렇게 낳은 모세가 이 소년시절은 어디서 보내는가? 애굽에 왕국에서 보낸다. 청장년 시절은 미디안에서 보낸다. 그렇다면 모세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레위인, 애굽인, 미디안 사람인가? 혈통으로는 분명히 레위사람인 것은 맞다. 그러나 자랄 때는 애굽에 더 친숙하고 지금 살아가는 것은 미디안이다. 그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게다가 지그 그는 양떼를 치고 있다.
 
본문에서 3장 1절에서 보면 양떼를 치더니를 원문으로 보면 시제가 ‘계속된다. 지속된다.’ 그 의미가 더 강조되고 있다. 즉 모세가 양떼를 치던 것이 하루 이틀이 아니다. 여러분이 잘 아는 것처럼 그의 나이 80세이다. 애굽에서 40세에 뛰쳐 나왔으니까 무려 40여 년간을 이 상황, 시절 가운데 보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을 보낸 그의 인생이 지금 양떼 치는 인생으로 끝날 것만 같다. 모세는 행복했을까? 수천 년 전에 모세의 마음을 헤아리기 위해서 그 당시 근접한 상황으로 한 번 비교를 해보겠다. 창세기에서 모세처럼 왕궁하고 친숙했던 사람을 꼬집어 내 보겠다. 누구인가? 바로 요셉이다. 자문자답을 하는 것은 마스크를 끼어서 일 것이다. 대답을 잘 하고 있을 줄 믿는다. 요셉이 왕궁에서 요직으로 발탁된 나이가 언제인가? 창세기 41장을 보면 30세라고 하고 있다. 그 뒤로 엄청난 고생을 했지만, 말 못 할 문화를 겪었지만 그 뒤로 요셉이 얼마나 승승장구를 했는지 비록 여러 어려움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뒤 형통함, 그 뒤에 모든 문제들이 해결됨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왕궁에 들어간 다음부터는 너무나 다른 천국이 펼쳐진다. 심지어 자기의 가족에게도 은혜의 통로가 된다. 요셉이 왕궁에 들어가 다음에,,, 요셉도 똑같이 왕궁에 들어갔다.
 
그러나 모세는 중간에 들어 온 것도 아니고 오래전부터 살았다. 그리고 공부의 품에서 자랐다. 그런데 가족을 건사하기는커녕 처가에 와 있으니까, 왕궁에서 쫓겨난 신세이고 그리고 80세까지 엄밀히 이야기 하면 남의 양들을 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모세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40년간 켜켜이 쌓였을 그의 내면을 흑암과 혼란 속에서 모세는 지금 나타난 하나님을 보면서 어떤 감정을 품었을까? 섭섭한 마음이 극에 달하고, 이제 어떠한 감정을 마음에 품기에도 지쳐있을 때가 아닌가 싶다. 바로 그때, 떨기나무 불로 하나님이 모세 앞에 나타나신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모세를 부르시고, 왜 떨기나무의 불로 자신을 드러내시는가? 먼저 모세의 부르심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찾아가셨다. 그러나 찾아갈 사람이 모세만 있어서가 아니다. 모세밖에 찾아갈 없어서가 아니다. 보다 더 패기 있고 보다 더 마음이 건강한 사람을 찾아간 것이 나았을 것이다. 힘들어 하는 사람 말고, 아픈 사람 말고, 마음과 육신이 건강한 사람, 그리고 하나님이 뭘 원하면 할 수 있겠다고 하는 사람, 하겠다고 하는 사람을 찾아가는 것이 하나님 입장에서는 더 효율적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이 왜 굳이 모세를 부르셨는가? 무엇보다 모세에게 그 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모세를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지금 삶의 원동력을 잃어가는 있는 모세이다. 자기의 정체성 측면에서 자기는 왕궁을 훑고 간 인생이다. 지나가는 인생이다. 그런 인생으로 오늘에 처한 인생으로서 여러 방문을 할 수밖에 없는 그런 모세이다. 그래서 오늘에 현실이 수긍할 수 없고, 수긍은커녕 숱한 체념의 세월을 보냈다.
 
누가 이토록 깊이 침체된 사람을 일으켜 세울 수 있는가? 누가 이토록 흑암에 빠진 사람에게 생기를 부어줄 수 있겠는가? 누가 그에게 삶의 이유와 존재의 필요에 대해서 설명해 줄 수 있겠는가?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으시다. 하나님 외에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 이 장면을 보면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이 필요해서 모세를 부르시는 것 같다. 그러나 놀랍게도 하나님이 항상 인간에게 어떤 필요를 이야기 하실 때는 바로 그 사람의 궁극적인 필요와 맞닿아 있다.
 
*요한복음 4:3-7절에,
3 유대를 떠나 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 새.
4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
5 사마리아에 있는 수가라 하는 동네에 이르시니 야곱이 그 아들 요셉에게 준 땅이 가깝고.
6 거기 또 야곱의 우물이 있더라 예수께서 길 가시다가 피곤하여 우물곁에 그대로 앉으시니 때가 여섯 시쯤 되었더라.
7 사마리아 여자 한 사람이 물을 길으러 왔으매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 하시니.
-사마리아 여인에게 예수님이 요청을 한다. 어떤 요청인가? 물을 달라하신다. 예수님의 목마름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예수님의 필요 때문이라고 생각하는가? 아니다. 4절에 보면, 국이 사마리아를 통과하시겠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신다. 그런 예수님께 사마리아 여인을 괜찮은 듯 예수님께 물을 떠 드렸다. 실상 목마른 사람은 누구인가? 어떤 갈증을 몰랐던 이가 누구인가? 사마리아여인이다. 목마름의 필요한 사람은 예수님이 아니다. 바로 그 여인, 예수님이 그 물을 달라고 하는 그 여인이다. 물을 준 것은 누구인가? 심지어 물이 되시겠다고 하는 분이 누구인가? 예수님이시다.
 
※다섯 살 난 딸아이가 하나 있는데, 한 숨이 나온다. 고집을 부린다. 사랑으로 달래기도 한다. 토라진 아이를 부르면 한 번 불러서 오지 않는다. 두 번, 세 번. 불러도 안 오고 제 앞으로 오지도 않고 제가 보일만한 곳에서 자기 존재를 잠깐 드러낸다. 그때서야 뭐가 잘못되었고, 너랑 나랑 어디서부터 비켜갔는지에 대해서 설명을 해준다. 그러면 닭똥 같은 눈물을 흘린다. 눈물만큼 이야기를 하고 아주 잠깐이지만, 5분도 안되겠지만 수긍이라고 한다. 여러분, 제가 이 녀석이 필요해서 부르겠는가? 녀석을 부는 것은 제가 채워주고자 함이다. 지금 이 순간 더 성숙해지고 더 건강한 아이로 자렸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이 녀석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싶은 마음뿐이다.
 
하나님은 왜 우리를 예배자로 부르시는가? 왜 우리에게 사명을 맡기시고, 왜 우리에게 동역 자 되기를 원하시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무엇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오산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필요한 것이 있으시지 않다. 필요하신 것이 있다고 한들 나여야 한다는 것도 없다. 세상을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해서가 아니다. 그분을 사랑할 대상을 위해서 우리를 창조하신 것이다.
그렇다면 나를 찾고, 나를 부르시는 그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겠는가? 하나님의 필요를 채우고자 함이 아니다. 그 하나님의 부르심이 바로 내게 가장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르심이 하나님의 필요만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슬픈 일이다. 거기에 우리의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교회를 한 번 생각해보자. 지금 우리의 예배가, 존립아 필요 하냐 마냐고 세상이 막 따지고 있다. 그런데, 교회가 세상을 위해서만 필요한 것인가? 무엇보다, 누구보다 교회는 내게 필요한 것 아닌가? 내 필요 때문에 주님이 피 흘리사 허락하신 그 분이 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얼마나 필요에 의해서 이 모든 것들이 존재한다고 그래서 벌어지는 것이라고 착각하는지 모른다. 교회를, 우리의 신앙이 어떤 전반적인 부분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필요에 측면에서만 바라보는 것이다. 거기에 바로 내 필요가 있었다. 나의 필요가 맞닿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하나님의 필요만 생각하던 그 부담에서 좀 벗어나서 이것은 나를 위한 은혜이구나! 이것은 나를 위한 콜링이구나! 하는 그 은혜로 나아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떨기나무의 불을 꺼내 드신다. 떨기나무는 흔한 나무로 생각보다 좀 덥수룩한 형태의 나무를 말한다. 사막은 건조한 것이니까 나무에 불붙는 것 그렇게 뭐 대수이겠나? 모세가 40년 동안 있었다고 하면, 40년 동안 이런 일 한 번 없었겠는가? 모세가 이 큰 반경이라고 하면서 이 불난 곳에 다가간 것을 보면 예사불은 아닌 듯하다.

 
*출애굽기 3:2-3절에,
2 여호와의 사자가 떨기나무 가운데로부터 나오는 불꽃 안에서 그에게 나타나시니라 그가 보니 떨기나무에 불이 붙었으나 그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아니하는지라.
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 하는고 하니 그 때에.
-여러분 이 광경이 특이한 것은, 불이 붙었으나 떨기나무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2절과 3절에 반복하는 것이다. 진술을 반복하고 있다. 반복할 때, 성경은 챙겨 앍으라는 사인이다. 그럼 왜 안타는가? 성경에 이 가이드대로 말해야겠다. 왜 안타는지 궁금해 하다가, 그럼 탄다는 것은 무얼까? 를 고민하게 되었다 불‘에 타다’라는 단어를 찾아보았는데, 멀리 갈 것 없이 저자가 같은 이 출애굽기 안에 들어가 있다.
 
*출애굽기 22:5절에,
5 사람이 밭에서나 포도원에서 짐승을 먹이다가 자기의 짐승을 놓아 남의 밭에서 먹게 하면 자기 밭의 가장 좋은 것과 자기 포도원의 가장 좋은 것으로 배상할지니라.
-여기 어디 태우다가 있는가? 없다. ‘먹다’라는 이 표현의 단어가 이 출애굽기 3장에서 나오는 불이 타다, 불이 붙다와 같은 단어이다. 여러분 이 ‘불다’라는 단어가 왜 같은 어휘일까? 그것만 생각해도 고개가 끄덕여진다. 불이 전쟁을 하려고 뗄 감이 있어야 한다. 연료가 있어야 한다. 그 뗄 감을 소비하고 소화함으로써 불은 존재를 이어간다. 22장 5절에서 자기 짐승을 남의 밭에서 먹여버리면 문제이다. 먹어버리면, 다시 쓸 수 없다. 그렇게 소화하고 소모하는 것이다. 떨기나무에서 불이 소비되려면, 그 나무를 먹어야 된다. 나무를 뗄 감으로 사용해서 나무가 재가 되어야 정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오늘 모세 앞에서 그 떨기나무가 타지 않는 그 모습을 보여주고 계신다. 왜 이런 방식으로 모세에게 나타나시는가? 하나님이 이런 존재라고 설명해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무언가 집어 삼켜서, 무언가 소비해서 존재하는 신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나무를 태워야 불이 존재하는 것처럼 하나님이 나는 뭘 소비해야 인간의 측면에서 보면 뭘 바치고 드려야 먹으면서 존재하는 신이 아니라고 말을 해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왜 이런 이야기를 잘 시각 교재를 가져다가 잘 설명할 수 있는 그림으로 설명하시려면 모세가 자기 것을 다 태워버리는 사람이다.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애굽에 친구나 연줄이 있지 않다. 재산, 권위, 명예, 아무것도 없다. 태우고 싶어도 태울 것이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다. 있다고 한들 여러분 같으면 히브리 동족을 위해 다시 태우겠는가? 있다고 한들 하나님을 위해서 내어 드릴 수 있겠는가? 이렇게 쫓겨 와서
 
*출애굽기 2:11-12절에,
11 모세가 장성한 후에 한번은 자기 형제들에게 나가서 그들이 고되게 노동하는 것을 보더니 어떤 애굽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지라.
12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 그 애굽 사람을 쳐 죽여 모래 속에 감추니라.
-그가 외국 왕궁에 있을 때, 히브리 동족을 위해서 분연이 일어났던 적이 있다. 강력한 민족의식, 동족의식이 아니었다면 가능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 동족을 위했다가 그가 잃은 것이 너무 많다. 뒤에 나오는 말씀이다. 출애굽기 2:15절을 보면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하여 바로가 찾는다.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으로 간다. 이렇게 살해 위협을 받고 미디안 땅에 가서 출애굽기 32장에 미디안 생활이 시작된다.
 

출애굽기 2:15절에,
15 바로가 이 일을 듣고 모세를 죽이고자 하여 찾는지라 모세가 바로의 낯을 피하여 미디안 땅에 머물며 하루는 우물곁에 앉았더라.
-이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다 태워버렸다. 이제 남아있는 것이 없다. 애굽에 신분이, 연줄, 재산이, 권위가, 명예가, 아무것도 없다. 태우고 싶어도 태울 것이 남아 있지 않은 상황이다. 있다고 한들, 여러분 같으면 히브리 동족을 다시 태우겠는가?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을 내어드릴 수 있는가? 그래서 지금 모세에게 하나님은 떨기나무의 불로 질문을 던지신다. 지금도 태워져야 불이 붙고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하니 “크게 네 방식일 수 있겠지만 지금도 내 방식이라고 생각하니 그게 몰고 온 처참한 결과에 대해서 네가 침체될 수도 있겠지만 과연 내가 하는 일도 동일한 수준과 결과에 이르게 된다고 생각하니?” 하나님이 질문하고 계신다. 아니다. 모세는 이제 죽임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애굽에 가서 죽음을 몰고 올 사람이 될 것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지금 모세 앞에 중요한 이정표를 세우고 계신다. “내가 너를 부르는 것은 너의 무엇을 탈탈 털겠다는 것이 아니라 너에게 내가 불을 붙이겠다”는 것이다. 이로써 내가 세상과 만천하에 드러내겠다고 하신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를 하실 때가 있다. 풍성해서 힘이 있어서 기꺼이 드릴 때도 있지만, 모세와 같이 아주 침체된 상황에서 어떻게 더 쏟아 붓느냐고 말할 때도 있다. 그런데 그게 우리의 착각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없는 것을 짜내서 그것을 받아야만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상들이나 하는 짓이다. 어떻게든 해야만 신이 통한다고 하는 것은 우상에게나 통한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필요에 의해서 같은 방식으로 생각을 했다면 우리 또한 그분을 전락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떨기나무의 불은 하나님이 신기한 불 쇼를 주신 게 아니다. 그동안 힘들었다고 불 멍하라고 불을 보여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네가 나의 말을 듣는다면 지금 이것에 순종하고 반응한다면 ‘네가 너에게 불을 붙여 주리라.’ 너의 것이 타고 있다면 그 불을 다 거두고 내가 너에게 주는 불을 받으라고 하신다. 알고 보면 우리는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출애굽기 3:3-5절에,
3 이에 모세가 이르되 내가 돌이켜 가서 이 큰 광경을 보리라 떨기나무가 어찌하여 타지 아니 하는고 하니 그 때에.
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5 하나님이 이르시되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하나님은 밀 당의 천재이시다. 하나님의 거룩함에 가까이 오면 죽는다. 떨기나무를 생각해보라. 우리는 늘 우리 걸 드려서 태워서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 얼마나 오산인가? 하나님은 뭘 필요한 분도 아니다. 떨기나무 그림으로 한 번 생각해 보자. 내가 뭘 해서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 얼마나 오산인가? 뭐 필요한 분도 아니시다. 원래 잘 뭐가 필요해서 창조하신 분은 아니니까. 그런데 여러분, 우리가 어떤 것이 필요하다고 치자. 우리의 것이 필요했다 치자. 그런데 이 분 앞에 가면 가까이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가까이 하면 죽는다. 없어진다.
 
그럼 우리의 무엇으로 하나님을 존재하게 할 수 있다는 것인가? 떨기나무에 불이 붙으면 한 쪽은 사라져야 하는 것인데 불이 공존하는 것처럼 우리는 원래 하나님께 가면 하나님이 임재하면 우리에게 임재하면 우리의 죄와 그분의 거룩의 따위는 우리는 소멸해야 하는 것이 맞는 존재이다. 그런데 떨기나무의 불처럼 우리가 존재하면서 심지어 우리의 것을 태우지 아니하면서도 하나님이 나 같은 존재에게 우리에게 그 인생에게 임하여 주신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은혜인 것이다. 이 은혜를 모르니까 내 것을 태워드린다는 착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신비를 깨달으면 하나님이 찾아주시고, 사용해 주시는 것과 나와 함께 하는 것이 얼마나 큰 감사이고 은혜이고 벅참으로 다가오는지 모른다. 실제 출애굽기 역사에게서도 그것이 증명된다. 
 
*출애굽기 1:22절을 보면,
22 그러므로 바로가 그의 모든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아들이 태어나거든 너희는 그를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거든 살려두라 하였더라.
-이스라엘이 불어나는 숫자를 걱정하면서 바로가 비인격적인 정치를 펼친다. 남자아이를 나일 강에 던져버린다. 죽은 아이도 아니고 산 아이를,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아이를 던진다. 이 장면에서 떨기나무에서 이 이정표, 이정표로 세우는 두 갈레에서 한 갈레 길로 가는 바로를 볼 수가 있다. 그는 자기 왕권을 위해, 유지를 위해 이것저것 다 소모하고 태워버린다. 처음에는 이스라엘의 노동력만 소비했다. 그래서 유지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의 생명까지 소모하려고 한다. 왜 그랬는가를 살펴보면 사람은 자신이 숭배하는 것을 닮아가는 것이 마련이다. 그래서 우상을 믿고 있으니 우상의 방법대로 자기 존재를 보호하려고 하고 연명하려고 한다. 그 보상의 방식은 무엇인가? 주변을 다 태워버리는 것이고 다 소모시키고 다 소진시키는 것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렇지 않다. 물론 사탄이 여전히 공중의 권세를 잡고 있기 때문에 우리 삶을 다 몰아붙여서 한 쪽으로 몰아붙여서 무언가 다 태워지는 것처럼 다 소비되고, 소모되는 것처럼 여기게 한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이 우상과 다를 바 없다고 우리를 기만하려는 사탄의 아주 정교한 전략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다르시다. 결코 우리의 무엇을 태우거나 소비하려고 들지 않으신다. 오히려 우리를 가만히 둔 채 사실은 뭐가 없어져야 하고 태워 없어져야 될 존재를 보호하실 뿐 아니라, 존재하게 하게 하실 뿐 아니라 하나님이 그 위에 부를 입히셔서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는 귀한 존재로 사용하신다. 아브라함과 약속에서 하나님이 질문을 다 쪼개게 하신 다음에 본인이 지나가셨다. 아브라함이 아니었다. 나중에 그것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성취가 되고 오늘 이 떨기나무에 불이 불 쇼가 아니었음을 스스로 천명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를 기만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이런 방식으로는 안 될 거라는 계속 속삭여 대는 사탄이다. 저는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이런 영적 전쟁에서 반드시 이기는 모두가 되기를 소망한다. 여러분,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더욱 사단의 계획이 더 정교해지고 강력해지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고결히 불을 붙이시는 하나님이시다. 내 것을 태우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태우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기대하고 또 나에게 임재 하셔서 이같이 불타는 수준을 넘어서 빛나는 백성으로 제자로 쓰임받기를 소망하고 기대하는 귀한 인생이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그런 면에서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오늘 떨기나무에 불을 만난 사람이 어떻게 달라지는가?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 이 사람은 방향감각이 다르다.
 
*출애굽기 3:6-10절에,
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매.
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분명히 보고 그들이 그들의 감독자로 말미암아 부르짖음을 듣고 그 근심을 알고.
8 내가 내려가서 그들을 애굽인의 손에서 건져내고 그들을 그 땅에서 인도하여 아름답고 광대한 땅,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곧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의 지방에 데려가려 하노라.
9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10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11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이제 가라고 하신다. 모세는 이제 어디로 가는가? 애굽으로 가야된다. 돌아가서 무엇을 하는가? 모양새는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 같다. 그런데 모세의 옛 영광이 회복되는 것인가? 애굽으로 돌아가니까,,, 이렇게 고생하다가 돌아가게 되는데 금의환향해야 되지 않겠는가? 모세가 하나님을 위해 드리고 동족을 위해 드렸던 모든 영광과 지위들이 회복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이제 모세가 돌아가면 그런 지위가 회복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지위에 있는 사람들과 대적해야 하는 또 다른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인지 모세도 안 가겠다고 무지하게 버틴다. 여러분, 그럴 때가 있다. 하나님이 우리 이마에 주셔서 은혜를 받는다고 하는 게 뭔가 과거에 만족스럽던 어떤 지점으로 돌아가면, 그것보다 조금 더 수위가 높은 것이 그게 은혜라고 생각 될 때가 있다. 그럼 모세를 생각해보자. 모세가 나름 왕자였다. 공주의 자녀였으니까, 왕자의 신분에서 좀 더 좋은 자리인 왕의 자리로 가야 은혜이겠지만,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방향은 애굽으로 간다고 그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니다. 갈라지는 방향이다. 모세를 40여 년간 양치는 곳에 두시는 것은 앞으로 그의 혈기를 그동안 누그려뜨리시는 것은 그것을 통해서 다음에 새로운 사역과 사명이 있기 때문이다. 모양새는 애굽으로 가지만 애굽에 가서 해야 할 일, 거기서 누려야 할 지위, 거기서 해야 할 사명은 달라졌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지금 기도하며 간구할 것은 과거로의 회기가 아니다. 감히 말씀드리자면 옛 영광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의 고난 지금 이 코로나 때문에 당하는 이 믿음의 고난이 반드시 활용될 수밖에 없는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사명, 새로운 역할로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고 또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어떤 고점이나 정서적 만족이 없던 지점으로 그런 옛날로 돌아가는 게 은혜가 아니다. 오히려 여전히 우리는 이런 시대에도, 이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것이 되어서 하나님의 일을 위해 준비되고 있다. 곧 하나님의 일을 행하는 지팡이가 되고 막대기가 될 것이다. 라고 하는, 그리고 하나님의 역사의 임재 현장에서 내가 있었다고 고백하는 그 일에 있어 누가 방향 감각을 가지고 주님을 따라 나설 것이냐는 그 문제가 우리에게 남겨져 있는 것이다. 여러분, 코로나 시대 이전으로 돌아가는 게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저는 간절히 소망한다. “주여!, 여기 있는 모세처럼 고난당하여 우리가 가게 될 곳에 그곳에 새로운 이야기를 펼쳐주옵소서.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부대로 우리를 사용해 주옵소서. 믿음을 가진 주의 백성들 한 사람도 낙오하지 않고 이 고난 중에 주님 부르시고 찾으실 때, 반응하게 해 주옵소서.” 한 때 불꽃 같이 하나님을 위해 헌신했지만 오늘은 꺼져가는 사람이 없게 해주옵소서. 한 때 불꽃 같이 하나님의 필요가 되려고 했지만 오늘은 어둠에 집어 삼켜지는 바로 그 연약한 자가 한 사람도 없게 해주옵소서.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소멸하기 쉬운 나의 인생을 불 붓게 하시고 영원하게 하실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는 귀한 축복과 은혜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래서 이 떨기나무 사건으로 여러분께 감히 요청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불 꽃 같은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니다. 다 태워봐라, 다 헌신해봐라, 그 이야기 하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에게 “내가 불을 붙여 주리라.” 그 말씀을 하신다. 불꽃처럼 네 삶을 태워서 네 가진 것을 태워서 내 앞으로 나오라는 것이 아니라 ‘불같이 뜨겁게 나와 사랑하자,’ 그 요청을 하고 계신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이 기대가 되는가? 하나님이 마음껏 내 인생에 불을 붙이시고, 내 인생을 새로운 지평을 향해 인도하시기를 소망하고 있는가? 이것도 억지로 짜내라는 것이 아니다. 불붙이시는 하나님이 불같은 사랑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도록 우리에게 그분의 사랑을 부어 주실 것이다. 여러분의 헌신과 사랑이 하나님 앞에 충성이 너무나 귀했지만, 우리 모두 떨기나무 아래에서 다시 한 번 비춰보기를 원한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우리의 헌신과 충성에 다시 한 번 불붙일 채비를 하면서 이 시대에 가라고 명하시는 그 방향을 향해 기꺼이 가고 기꺼이 쓰임 받는 귀한 인생이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지금 처한 모든 현실에서 끝내 불붙이시고 빛내시는 하나님께 마음을 두고 오늘 주어진 현실을 이겨 나아가고 넉넉히 이겨 나아가는 귀한 성도가 되길 소망한다.
 
♣요약
하나님이 우리에게 지금도 일하시는 줄 믿는다. 코로나 상황 중에 경제적, 정서적, 우리 인생 가운데 너무나 어려운 고난의 때를 보내고 있지만, 하나님이 찾으실 때마다 기쁨으로 반응할 수 있는 하나님 향한 불같은 사랑을 주실 것을 믿고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과 희생에 더욱 불을 붙여 주실 것을 소망하고 고대하며 기꺼이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태워버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빛나게 하시는 하나님께 산 제물로 드려 주님께서 우리를 통해 일 하시도록, 여전히 하나님이 이 땅 가운에 살아계심을 증거 하여야 한다. 우리를 통해 구원할 바로 그 사람들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모세가 양 무리를 치려고 호렙 산 밑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셨다. 떨기나무는 광야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잡목이다. 그래서 사막의 열기 속에서 쉽게 불이 붙고 금방 타오르며 곧 사라진다. 그러나 모세가 본 그 떨기나무는 불이 붙었으나 타서 사그라들지 않았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서 나타나신 것은, 떨기나무와도 같이 연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지만 고난과 압제를 당해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사그러들지 않고 타오를 것임을 암시해 준다. 하나님은 일상생활 가운데서 우리를 불러 쓰신다. 따라서 우리는 매일의 삶을 주님 앞에 헌신하며 더욱 사모하고 성령중만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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