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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비전새벽예배(주후 2020년 6월 27일) 제목:"믿음의 세대계승(世代繼承), 수선대후(守先待後)" 설교자: 오정현 담임목사님 ----- *이 시간에는 믿음의 축복을 담아서 다음 세대와 이 아이들과 함께 씨름하는 교사들을 축복합시다. 수선대후는 명말 청초(明末 淸初)의 사상가 천췌(1604∼1677)의 말로 선대가 남긴 좋은 전통과 유산을 지키며 후대를 키우고 세우겠다는 뜻이다. 훗날 청나라의 성군 옹정제가 이 말을 편액으로 만들어 맹자의 묘에 바치기도 했다. 오 목사는 이 말처럼 선배들로부터 받은 영적 정신적 혜택을 계승하고, 후배들을 양성해야 할 무한 책임을 느낀다고 했다. 선대가 남긴 좋은 전통과 유산을 지키며 후대를 세우고 키우겠는 뜻이다. 담임 목사님의 책, 통찰과 예견을 보면 수선대후는 어떻게 사랑의 교회와 한국 교회에서 사용되었는지에 대한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다. 중국 주성에 맹자의 묘가 있다. 그 묘에 청나라 송군 옹정제가 편액(액자)을 내렸는데, 그 안에 글귀가 바로 ‘수선대후’였다. 중국의 정신사의 핵심 중에 핵심은 바로 공자이다. 하지만 그 공자의 사상을 후대로 전하여 계승하지 않았다면 그이 사상은 없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맹자가 공자의 사상을 다음세대로 건널 수 있도록 다리 역할을 했기에 전해진 것이며 맹자가 있었기에 지금도 중국 사사을 중요한 핵심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다. 중국 주성에 있는 이 ‘수선대후’ 이 맹자의 이 편액의 글씨를 담임 목사님이 보시고 목사님 마음 가운데 쑥 들어왔다라고 되어있다. 아마도 그 맹자의 묘에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이 다녀갔을 것이다. 그 가운데 많은 사람들과 목사님들도 있을 것이다. 그 글귀가 담임 목사님의 마음에 확 들어온 것은 아마도 우리 사랑의 교회와 한국 교회에 주신 사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함께 해보게 되었다. 한국 교회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귀한 믿음과 신앙의 절개가 있다. 몇 가지를 들 수 있는데 첫 번째는 한국교회 한국 기독교는 선교사들보다 먼저 복음이 들어왔다. 1884젼 첫 선교사는 먼저 알렌 선교사이다. 공관의로 입국되었고, 그보다 20년이 앞 선 1866년에 요동강변에 제너럴 셔먼호를 통하여서 토마스 선교사님을 통해 성경 말씀이 한국 교회인 조선에 들어오게 된다. 선대의 말씀 사람은 정말 대단했다. 사경회가 열리면 멀리서 2박 3박4일을 마다하지 않고 산 넘고 물 건너 그 말씀을 듣기 위해 집을 떠나왔다. 또 한국교회 안에는 부르짖는 기도가 있다. 간난아이를 포대기에 들쳐 업고 바람이 숭숭 들어오는 마룻바닥에 무릎을 대고 몇 시간이고 기도하는 선대들의 기도, 새벽이면 곤한 잠을 멈추어 깨고 자녀들과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그 불씨, 금요일 저녁이면 간절히 통성기오의 소리들, 기도하는 함성들이 그것이 바로 우리 선대의 기도였다. 찬양의 뜨거움도 예외는 아니다. 우연히 할머니의 찬송가를 본 적이 있다. 악보는 없고 글만 있는 찬송가였다. 정확히 음절이 없는 그 찬송가는 목사님의 입만 보고 따라 하는 찬송가였다. 심지어 8절 9절 10절까지 있는 찬송도 보았다. 요즘은 4절도 부르기 어려운데 10절을 불렀다는 것을 생각하니 전율이 흘렀다. 그런데 인도하시는 목사님은 후렴이 끝날 즈음에 목사님이 다시 “처음부터”라고 외쳤다고 한다. 그러면 그 10절의 찬송가가 20절이 되고 30절이 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아름다운 선대의 믿음과 정신을 다음 세대로 전해야 되는 것이 수선대후의 정신이다. 부흥의 진원지였던 유럽을 바라볼 때에 얼마나 그 교회가 황페화(荒廢化) 되었는가? 다시 한 번 우리가 새긴다면 다음 세대를 우해 온 마음으로 집중하여 골든타임을 꼭 붙잡아야 한다. 그래서 2020년 주일학교에서는 수선대후라는 주제아래 가정과 교회가 아름답게 연합하여 후대에게도 계승한다는 시대적 사명을 주제로 잡고 오늘부터 시작하여 한 달여 동안에 여름 수련회의 대 장정을 시작할 것이다. 성도님들의 관심과 기도가 우리와 다음 세대로 닿을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그렇다면 선대의 말씀 사랑과 기도 찬양의 모습을 떠 바치고 있는 핵심중의 핵심을 무엇인가? 오늘 본문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통해서 아버지의 신앙이 어떻게 아들이삭에게 계승되고 전수 되었는지를 함께 살펴보겠다. 오늘 우리가 22장 1절에 먼저 보면 ‘그 일 후에’ 라고 시작된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는 하나님은 21장의 내용을 잠시 살펴봐야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가정 가운데 어려운 문제 두 가지를 해결해 주신 것을 만나게 된다. 1. 이삭과 이스마엘의 분리. 아브라함이 100세에 얻는 이삭이다. 이 이삭을 태어나는 것을 이 위기 가운데 탐탁지 않는 눈으로 지켜보는 한 사람이 있는데 바로 그는 이스마엘이다. 이스마엘의 입장에서 이삭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의 권리와 권한을 빼앗아 가는 장본이 될 것이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운 시선으로 볼 수 없었다. 이삭을 부모님이 보지 않을 때에 많이 괴롭힌 것으로 여겨진다. 그래서 성경은 이스마엘이 이삭을 많이 놀렸다고 표현하고 있다. 사라가 그것을 지켜보던 가운데 아브라함에게 이야기 한다. 하갈과 이스마엘이 이 집에서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여러 우여곡절 끝에 아브라함은 하갈과 이스마엘은 그와 함께 하는 사람들을 내보내고, 이제 집안의 분란이 없어지는 것이며 이삭과 이스마엘의 분리가 이 문제가 해결 되었다. 2. 아브라함을 시험하신다. 또 한 가지는 22장 2절 이후에 등장한다. 아브라함은 당시 강국 블레셋의 왕의 방문을 받게 된다. 가나안 땅에서 아브라함 세력이 점차 커지게 되자 그랄 왕 아비멜렉은 그의 군대장관 비골과 함께 아브라함과 화친 조약을 맺기 위해 찾아온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이 제의에 應하고 이제 상호 불가침 조약을 締結하게 된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일국의 한 왕이 일국의 족장이 和親條約을 맺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우리 성경을 봅시다. *창21:22: “그 때에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이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이 너와 함께 계시도다.” 그렇다 그랄 왕 아비멜렉이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 화친조약을 맺게 되었다. 아브라함은 가문에 입장으로 본다면 이제 가정 안의 문제도 해결되었고, 또 가정 밖에 있는 문제도 해결이 되었다. 이제 평안을 누릴 가운데 놓이게 되었다. 하나님은 이렇게 주변을 정리 시켜 주시고 아브라함과 하나님 사이에 아무것도 두시지 않는 상황 가운데 본질적인 가장 중요한 문제 속으로 아브라함을 초청하신다. 성경은 아브라함을 시험하고자 하신다고 표현하고 있다. 시험에는 결과가 반드시 뒤따른다. 하나님께서는 시험을 통과한 아브라함에게 반드시 알려주고 싶었던 무엇인가가 있었던 것 같다. 오늘 이 설교를 통해 그 내용이 무엇이며 다음 세대에 우리가 무엇을 계승할 지를 핵심적인 내용을 찾아보고자 한다. 시험의 내용은 내 아들 내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올라가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는 것이다. 처음 이 성경을 접했을 때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랑이 많으시고 사랑의 결정체인 하나님께서 그것도 아브라함이 백세에 어렵게 얻은 아들인데 그 아들을 다시 번제로 달라고 하시는 하나님이 이해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당시에 가나안의 문화를 살펴보면 조금은 이해가 가게 된다. 가나안 땅에는 함의 막내아들 가나안의 후손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함과 가나안의 노아의 수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하나님께 저주를 받게 된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과 결별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단절상태이다. 하나님을 없는 이들은 무엇이라도 붙잡아야 했기 때문에 우상을 섬기고 자신들만의 살아가는 방식을 고수 하게 된다. 그래서 성경 전반에 나타나는 가나안 땅의 모습은 치열한 전투장의 모습이기도 하고 음행과 우상숭배가 만연한 타락의 땅이기도 하였다. 이 우상 제단의 특징이 몇 가지가 있다. 첫째는 몸을 자해하고 상하게 하여 피를 흘리는 제사의식이 있었다. 둘째는 자신의 아이들을 불 가운데에 지나가게 하거나, 혹은 제물을 바치는 인신 제사가 있었다. 바알을 섬기는 우상중에 두드러진 특징 중에 하나였다. 이런 시대적인 관점으로 볼 때, 어쩌면 아브라함의 아들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요청이 지금 우리가 바라보는 것처럼 그렇게 이상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하나님의 명령이니 아브라함은 지체함 없이 이삭과 종들을 데리고 모리아 산을 향해 출발했다. 산이 가까이 눈앞에 가까이 왔을 때에 종들을 머물라 하고 이삭과 함께 아주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둘이서 또 다른 출발을 하게 된다. 그때에 이삭이 아버지에게 묻는다. “아버지 번제 드릴 나무와 불은 준비가 되었는데 이상합니다. 왜 제물이 없는 것인지요?”라고 묻는다. 그 아들의 질문에 아브라함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우리가 아이가 아플 때에 병원에 가서 주사를 여러 번 맞힌 경험이 있다. 작은 주사바늘 하나가 아이의 피부를 뚫고 있는 모습도 지켜보기가 어렵다. 그것이 바로 부모님의 마음일 것이다. 그런데 오늘 아브라함에 있어서 이삭은 백세에 얻은 아들이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얻은 아들이다. 그 아들을 이제 번제로 바쳐야할 상황을 아브라함은 알고 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렇게 대답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준비해 두셨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들의 이삭의 질문을 아마도 回避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된다. 그런데 이 때 질문을 한 번 하겠다. 우리는 결말을 잘 알고 있기에 당시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떤 심정이었는지 잘 파악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질문하고 싶다. 정말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하나님께 드릴 작정이었을까요? 이삭은 죽이고, 각을 뜨고 그리고 하나님께 모든 것을 불태워 올리는 이 번제를 드릴 마음이 있었을까요? 속으로 대답해보자. 있다. 없다. 아님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성경을 읽어보고 보자. *창 22: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오늘 아브라함은 아들과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다시 돌아오겠다고 이야기 하고 있다. 모두가 아브라함이 아들을 번제로 드리고 올 것이라고 모두들 이야기 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이 5절을 읽으니 조금은 햇갈리기도 할 것이다. 읽어보니 같이 오겠다는 말에 의하면 죽이려는 마음이 없었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구체적인 정답은 없다. 다시 말씀을 진행 후에 하겠다. 이윽고 아브라함과 이식이 제단 앞에 도착한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제사를 드릴 준비를 위해서 분주했을 것이다. 이때 이삭의 나이을 살펴보면 보통 학자들은 15-20세 사이로 추정하고 있다. 그리고 초대 유대 전승에는 30세가 넘은 이삭이었다고도 한다. 어쨌든 장성한 아들이었고, 아브라함이 나무를 쌓고 이를 주도하는 가운데 마지막 이삭을 결박하고 제단 위 나무에 올려놓았을 때에 이삭은 아브라함의 이 일을 피해 도망을 할 수도 있었을 상황이었을 것이다. 아주 어린 아이들을 다그치고 훈계할 때에 3학년까지는 어머니의 훈계를 잘 듣는다. 그런데 고학년이 되면 어머니가 아이들 앞에 꼼짝을 못한다. 때로는 너무 화가 나서 체벌하려면 그 아이가 어머니의 그 손을 붙잡고 오히려 억제한다. 이삭은 최소 15-20-30세까지의 장성한 모습이었다면 멀찌감치 도망가며 아버지를 항하여서 아버지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이야기 할 것이다. 다시 생각하시라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상하리만큼 이삭은 순종적이었고 결박당한 체 그대로 누워있다. 참으로 이상한 모습이다. 아브라함이 이제 이삭을 잡아야 할 때가 되었다. 아까 질문의 정답을 찾아봅시다. 그것을 찾기 위해서는 우리는 성경 말씀을 찾아봐야 한다. *히브리서 11:19 :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 아브라함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브라함은 비장의 마음을 먹고 그를 정말 죽일 작정이었다. 실질적으로 그의 마음은 이미 번제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을 때에 드렸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장면이 너무나 극적이기에 많은 화가들이 이 장면을 당신들의 그림의 소재로 삼는다. 화가들이 그린 그림 중에서 램브란트가 그린 그림이 참 좋아한다. 지금 보는 이 그림을 보아라. 이 그림은 1635년에 그렸다. 이삭에 희생에 대한 그림을 많이 그렸다. 그런데 참 재미있게 보여 지는 부분이 있다. 천사가 아브라함의 손을 붙잡고 힘주어 칼을 떨어뜨리게 만든다. 그런데 그 반대의 손을 보면 얼마나 다급했으면 아브라함의 의지를 꺾기 위해 마치 때리려고 하는 느낌까지 받게 된다. 그리고 대답이라고 하는 듯이 아브라함이 쫄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아브라함은 당황했다. 아브라함이 당황하는 저 모습은 이미 그 마음 가운데서 이삭을 죽이려는 결연한 마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순간 아브라함의 믿음이 극명하게 드러났다. 아브라함은 백세에 얻은 그 이삭을 정말로 죽였다. 그런데 그가 이삭을 죽일 수 있었던 이유는 히브리서에서 다시 볼 수 있다.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리심을 믿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의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히브리서에 나와 있다. 히브리서 11:17~18: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그는 약속들을 받은 자로되 그 외아들을 드렸느니라. 18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통하여서 자손들을 주실 거라는 약속을 신실하게 붙잡고 믿었던 것이다. 믿음이란 막연하게 상황이 열릴 것을 기대하거나 혹은 막연하게 잘 될 거라는 희망, 포기하지 않는 어떤 신념, 이런 것들을 우리는 믿음이라고 착각할 때가 많다. 하지만 아브라함을 통해서 함께 살펴볼 수 있는 믿음은 일반적인 기대와 희망, 신념과 같은 것이 아니다.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전개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약속은 신실하여 변하지 않는다는 하나님을 향한 신실한 믿음, 하나님을 향한 일관된 태도 그것이 바로 믿음인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믿었다. 왜 그런가? 그의 평생의 삶 가운데 늘 하나님을 대적하고 늘 질척거리며, 늘 의심하였던 그의 삶과는 정 반대로 늘 신실하게 주신 그 약속을 아브라함의 인생 가운데 하나님은 나타내고, 드러내고, 이루시고, 성취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부모, 우리 이전 선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바로 이 신실한 약속을 우리의 마음 가운데 신뢰하며, 그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다시 한 번 돌아보고 그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어떤 상황 가운데서도 신뢰하며, 그 신뢰하는 믿음을 끝까지 고수하는 것 그것이 우리 믿음의 선대에게 필요한 믿음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종중 학생들이 세상 불안한 느낌으로 부모님을 바라본다. 세상 불안한 눈빛으로 목사님을 바라보고 선생님들을 바라본다. 그리고 입으로는 이제 자기가 소망이 없다고 더는 틀린 인생이라고, 누구에게도 소망이 없는 자라고, 자기만 없으면 모두가 행복할 것이라고 하면서 부모님의 속을 뒤집어 놓기도 한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말을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서 아니라는 말을 듣고 싶은 것이다. 그렇게 비관하는 자신을 흔들리고 두려움의 모습가운데 오히려 확신에 찬 모습으로 너희가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다라는 것을 부모님의 눈빛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오히려 부모님이 더 그것을 보고 떨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 일어나는 일을 모르기에 불안해하는 것이다. 코로나의 사태가 다가올 때에 누구도 예측할 수 없었다. 코로나 뿐이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자녀들을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자녀의 상황이 나아졌기 때문에? 우리 자녀가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아니다. 그런 것 보다. 이 자녀를 붙잡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이 자녀를 끝까지 약속의 자녀로 키워주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바라보는 상황과 현실이 조금은 불안할지라도 그 하나님을 향하여서 우리의 눈을 고정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있을 때에 확신에 찬 눈빛으로 우리의 자녀들에게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야” 하나님이 너를 부르셨고, 너를 세상 가운데 보내시고, 부르시고 널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실 것이다. 그러니 너는 불안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어“라고 표현 하고 는 것이다.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죽음의 사지로 이삭이 비록 내 몰릴지라도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겠지만 하나님은 어떤 상황도 해결하실 수 있는 그 믿음만을 붙잡고 아브라함은 나아갔던 것이다. 눈을 질금 감고 아브라함은 이삭의 심장에 칼을 꽂아야 할 때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 꽂으려는 순간 ”아브라함아!“ 급하게 멈추시고 이삭의 생명을 구하셨다. 나는 너의 아들이삭을 바치는 것이 기뻐하는, 인신제물을 바치는 여러 신과 같지 않다. 나는 그런 이방신이 아니다, 나는 비인격적인 이방신이 아니라고 하신다. 내가 너와 화평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모든 것은 내가 준비하게 한다고 하신다. 그리고 그 길에서만 나와 만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것이 바로 여호와 이레이다. 우리가 필요한 것을 채우시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준비하심을 통해 우리의 구원이 탈락, 실패되지 아니하고 구원의 길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바로 여호와 이레인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이지 않았지만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피 한 방울 떨어져도 침묵했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죽은 자 가운데서도 다시 살아나게 하신다는 것을 하나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 어쩌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거라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과 정확하게 일치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그림 언어를 통하여서 우리가 붙잡아야할 믿음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분명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수선대후, 우리가 다음 세대인 우리 아이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믿음은 단순히 하나님을 믿을 때 상황 가운데 열어줄 것이라는 정도가 아니라 세상이 너를 감당할 수 없는 이유는 하나님이 너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믿음의 원형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우리에게 그런 신앙이 우리에게 있는가? 어쩌면 우리의 자녀의 신앙이 올바르게 가고 있는지 점검하고 있는지 모르지만 선대인 우리는 다음 세대를 바라보며, 다음 세대를 위해 먼저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을 붙자고 있는가를 점검해봐야 할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020년 여름학교는 단순히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수선대후는 우리 아이들만이 아닌 우리가 모두가 하나님께 달려 나아가야 하는 우리 모두의 주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 번 해본 것이다. 계속되어지는 스가랴를 통해서 회복되고, 재건, 그것이 하나님이 온전하게 주신다는 것을 하나님의 믿음이 되고 이 시간이 선대의 신앙과 후대의 순종이 만나게 되는 기회가 되길 소망한다. 다시 회복되어지는 놀라운 은혜가 있는 사랑의 교회가 되고 우리 교회를 통하여서 나아가 한국과 나아가 세계 가운데로 하나님의 부흥이 다시 한 번 이룰 수 있는 기회로 그 놀라운 날개짓과 초석이 놓일 수 있는 여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 후 예배. 오늘 주일 학교 축복 송에 감동했다. 대포를 쏘고 시작하고 축하하는 것으로 시작하며 보니 이 아이들을 보니,,,성도는 신앙 따라서 신앙 지켰네를 생각하며, 어떻게 가르쳐야 하나를 생각했다. 워쉽 댄스를 할 때도 이런 아이들을 보면서 어떻게 환난과 팹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하도다. 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오늘 설교 소 목사님의 말씀을 들었듯이 우리 아이들 이 시대의 옷을 입고, 또 시대에 앞서서 선도를 하지만, 신앙의 본질 헌신과 충성, 영적 전쟁, 겸손, 깨어짐, 고난, 자기 죽음, 십자가, 이런 어떻게 믿음으로 가르칠 것인가? 복음의 순수성에 사랑 의교회가 승리하길 바란다. 왕성교회에서 코로나가 나타나 마음이 짐이 컸다. 우리가 철저히 지켜서 방역을 지키고 이 마음을 가지고 주의 전을 지키고 교회를 죽도록 충성하겠네를 믿고 지켜야 한다. 어려운 교회들이 많은 것도 마음이 아프다. 승리하는 방법은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다. 이 것 외에는 없다. 기도는 타종교도 한다. 우리의 기도의 차이는 말씀과 찬양이 뒷받침 되는 것이다. 말씀과 찬양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Niothing이고 헛것이고 성령의 기름부음이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하든 사랑의 교회는 말씀과 찬양이 뒷받침 되어 기도를 잘 할 것인가가 핵심이다. 누가 뭐라해도 환난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를 생각하여 이 신앙 지켜 기쁨이 충만했듯이 그래서 이 여름을 하나님이 주신 이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많은 교회들이 쉽지 않다. 멀리서도 교회를 온다. 그런데 가까운 곳에서 안 나오는 것은 말이 아니다. 우리가 주님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시겠는가? 사명으로 순교적인 정신으로 모두가 조심하자. ♣요약 독자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아브라함에게 가장 큰 시험이다. 하나님께서 이삭 대신 준비하신 번제물은 숫양으로 하고 아브라함의 온전한 믿음을 확인하시고 친히 숫양을 준비하신 것은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길을 준비하실 것을 예표 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순종하여 큰 시험에 승리한 아브라함에게 큰 축복이 임한 것처럼 오늘 우리 성도들도 모든 시험을 믿음으로 순종하고 인내로 승리하여 복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하겠다. 수선대후인 믿음의 다음 세대들과 주님 앞에 서서 하나님을 믿고 붙잡고 나아갈 때에 오늘 그 모습을 바라보는 다음 세대는 최선을 다하여 순종하는 모습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오니 하나님께서 최선을 다하여 주심으로 어린양을 준비하여 주시고 그 어린양을 통하여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실 줄로 믿기에 그 아름다움 만남과 기쁨의 회복이 모든 성도와 우리 다음 세대의 아이들에게 가슴마다 새겨지기를 원한다.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준비하심을 통해 우리의 구원이 탈락, 실패되지 아니하고 구원의 길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바로 여호와 이레인 것이다. 선대의 신앙과 후대의 순종이 만나게 되는 기회가 되길 바라며, 다시 회복되어지는 놀라운 은혜가 있는 사랑의 교회가 되고 우리 교회를 통하여서 나아가 한국과 나아가 세계 가운데로 하나님의 부흥이 다시 한 번 이룰 수 있는 기회로 그 놀라운 날개 짓과 초석이 놓일 수 있는 여름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본문은 아브라함의 믿음에 초점을 맞추기 쉽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이 좋아서 아들이삭을 제물로 바쳤다기보다는 철저한 하나님의 주도적 역사임을 말씀하고 있다. 왜냐하면 본문에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세 번이나 나온다(하늘의 소리1,11,15,). 이로 미루어보아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드리게 된 것은 그의 믿음이 좋아서나 당시 고대근동의 인본주의적 인신제사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 아닌 철저하게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임을 말씀하고 있다. 때문에 본문을 구약의 갈보리 사건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이 사건은 400년 후 모세의 제도(레1:1-9)와 맥을 같이하면서 또한 2천년 후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요19:17,18)과 구속사적(救贖史的)으로 직결되는 예표(豫表)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이 세 사건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제물은 흠 없는 어린양이어야 한다는 점, 제물은 자발적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 그리고 제물은 희생되어 그 피가 뿌려져야 된다는 점 등이다(히9:18-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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