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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예배(주후 2020년 9월6일)

제목: “한결같은 純金 燈臺派”

말씀: (스가랴 4:6-10,14절)

설교자: 오정현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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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성도들 다시 한 번 코로라 사태에서 모두가 다니엘처럼 말씀에 침 예배자로 성공하길 바란다 오늘 본문은 스가랴 강의에서 그 시대의 형편과 우리의 시대형편과 같으며 데자뷰 같다. 하나님께서 스가랴에게 환상을 주셔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어려운 장애물을 돌파하신다. 우리도 시대의 장애물을 극복하기 바란다. 이 환상의 배경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고 돌아와서 가난하고 불쌍한 상황이었다. 돌아와 제일 먼저 착수한 일은 잿더미에서 하나님의 전을 再建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마리아 사람들을 비롯한 악의에 찬 방해 군들이 공작과 주위의 복잡하고 어려운 환경으로 애초의 꿈과 열심히 다 식어버리고 마치 새싹이 돋자마자 짓밟아 버리는 좌절감과 그 정신적 상처는 말로 다할 수 없었다. 외부적으로 패배주의가 득세했고, 리더쉽을 공격했다. 스가랴나 스룹바벨이나 대제사장 여호수와나 같은 입장에서는 잔인한 상황이었다. 사람들이 마음속에 깊은 회의감이 들었다. 하나님을 잘 해보려고 하는데 ‘왜 이런 어려움이 닥치는가?’란 생각을 했다.

 

1. 스가랴의 환상을 통하여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상황적 장애물을 돌파하였듯이, 오늘 우리에게

주신 본문을 통하여 시대적 장애물을 극복해야 한다.

1. 본문 7절의 ‘큰 산’은 모든 난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못하도록 막는 모든 적대 세력을 말한다.- 큰 산아! 7절에 보면 누가 주저앉은 자에게 사기를 진작시켜 줄 것이며, 비전과 꿈을 상실한 사람들에게 소망의 심어 줄 것인가! 누가 냉소적인 사람들의 무관심의 벽을 헐고 다시 회복시켜 줄 것인가! 누가 노력해도 소용없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회사에서 적대적인 환경 가운데서 초라하고 미약하고 포로에서 돌아온 한 공동체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어떻게 하면 순금 등대가 불을 타게 할 것인가?를 생각했다. 지난 주 설교에서도 힘으로도 되지 않고, 능으로도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하나님의 힘으로 된다. 이것이 답이었다. 대학부시절에 약속의 말씀을 많이 주셨다. 그중에 어려울 때마다 는스가랴 6~7절에 말씀은 나름대로 사회적으로 방향을 잡는데 큰 도움이었다. 얼마나 말씀에 힘을 많이 주셨는지 얼마나 위로가 된지 모르겠다. 지나고 보니 어려운 가운데서도 큰 산 넘어 산 넘어서 인생의 여정 가운데서도 주님을 믿고 찬양했다.

 

2. 큰 산의 문제는 순금 등대에 ‘기름’이 계속 공급되어 등대가 지속적으로 불타는 것처럼,

‘여호와의 영’, ‘성령님’으로 해결된다.

-큰 산은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는가? 네가 무엇인가? 힘으로도 능으로도 되지 하니 하고 여호와의 영으로만이 된다. 말이 무얼까? 지난주처럼 두 감람나무로부터 끊임없이 공급받는 것이다. 그리고 그 금 기름으로부터 공급이며, 끊임없이 공급받는 것은 나의 영으로부터 순금등대의 기름으로 되고 그 기름이 그 순금등대가 불타도록 지속적으로 도와주는 것이다. 기름이 부어진다는 것은 한결 같이 순금등대가 기름이 부어진다는 것이 무엇인가? 구약에 은혜의 기름이 부어질 때 몇 가지 현상이 있다.


3. 성경에서 ‘기름’은 무얼 상징하는가?

① 첫째, ‘치유’를 상징 (시편 23:5) - 양이 다치면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시고, 상처에 발라주며 누가복음 강도 맞는 사람에게도 기름을 발랐으며, 야고보서에 아픈 사람에게도 기름을 발랐다. 성령으로 역사는 우리의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을 주신 줄로 확신한다.

② 둘째, ‘빛’을 상징 (시 43:3) -오늘 시편 43편에 보면 오늘 핵심인데 성도가 가는 길에 환하게 비추어주는 진리의 길이다. 우리를 인도하시며, 성령께서는 어두운 마음을 환하게 밝혀주시고 진리로 인도하시는 줄로 믿는다.

③ 셋째, ‘기쁨’을 상징 (롬 14:17)- 구약 시대 때 기름이 기쁨을 증가시켜서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것이어서 그래서 기름은 기쁨을 상징하고 실제적인 기쁨이기에 하나님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란 기쁨이다. 그래서 예배를 참여하는 모든 우리가 난제 앞에서도 치유와 빛과 기쁨의 능력을 주시길 원한다. 너무 감사해서 7절에 성전 건축이 완공되어 머릿돌이 되어주신 상황에서 무리가 외친 것은 기쁨의 은혜를 받아서 큰 소리를 지른다. 8-9절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 영광스럽게 선포되는데...기초석을 스룹바벨이 놓았는데, 가슴앓이는 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이제 기초 석만이 아닌, 머릿돌까지 놓는다고 하신다. 스룹바벨을 말씀을 듣고 기가 막혀한다. 16년간의 체증이 확 내려갔다. 그래서 수많은 큰 산을 넘게 된다. 마음에 큰 산을 넘게 하소서! 우리 인생은 우리 앞에 놓여진 큰 산들을 맞이하여 큰 산 앞에서 이런저런 삶의 부서짐이 있는 것이다. 부서진 것들이 파편이고 조각이고 깨어졌어도 끝난 것이 아니라 그것의 조각들이 어떻게 해석되는가? 이런 것들이 잘 조화가 되면 어떤 작품이 나오는가이다.

 

4. ‘그리스도인의 삶’은 일종의 모자이크처럼 삶의 ‘조각’들이 모여서 믿음의 작품을 이루는 것이다.

-인생길에서 버려진 조각 같은 상황을 만나게 된다. 빛으로 치유로 기쁨으로 어떻게 창조적 주님으로 치유가 되는 것이다. 모자이크를 보라 인생길에서 날카로운 부서진 조각 같은 상황이 될 때에 인생의 50-60대 가운데 벼랑 끝에 서 보지 않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되겠나? 큰 산을 만나 조각난 상황에서 고통의 신음을 내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런 큰 산에서 딱지를 붙이고 고개를 흔들며, 세상 사람들은 불행이라 한탄하며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자들이지만, 그런데 멋있는 예술가의 손에서 만들어져서 조각조각이 역할을 해서 값으로 따질 수 없는 멋진 작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창조주께서는 우리의 조각들을 붙여서 부분을 붙여주셔서 강력한 명품을 주실 것을 믿는다. 큰 산에서 조각들을 연결하면 순금 등대파가 된다. 해딱해딱 되지 아니하고 꼴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은 내외공격, 내부의 패배주의 리더쉽의 공격, 모든 것을 커버하게 하신다. 은혜를 주신다.

 

Ⅰ. 첫째, ‘작은 일의 날’이라는 조각(10절)

1. 하나님은 ‘작은 일’로 큰 역사를 이루시기에 ‘작다’고 우습게보면 안 된다.

-성경에는 작다는 것은 –카나니라 한다. 작다는 것- 순금등대 환상도 큰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신 기름이 치유로 기쁨으로 빛으로 계속해서 비추시니, 등대의 교회가 되는 것이다. 성령을 통해 치유, 기쁨, 빛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큰 산을 넘을 수 있다. 갈보리 산의 예수님은 초라했다. 너무 작고 초라하며 자랑할 것이 있겠는가? 그런데 십자가에 달려서 온 세상을 구원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은 작은 일을 통하여 큰 역사를 이루었다. 그 작은 일이 온 세상을 구원하는 천동치는 엄청난 날이 되었다. 하나님은 작은 일을 통하여 큰 역사를 이루었다. 오병이어도 그렇다. 사랑의 교회도 작게 출발했다. 빌보드 차트를 보니 세계역사의 길을 냈다. BTX가 빌보드차트 1위를 한 것이다. 큰 음악의 주류가 되었다. LA에서 전단지를 나누어주며 시작했다. 우리교회도 반포대로 인도했다. 작은 일부터 잘하다 보면 큰 역사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아침 큐티를 하는 것, 이웃에 대해 마음을 쓰는 것, 그리고 주일예배로 온전히 참여하는 것, 옷매무새도 잘 추스르고, 큰 산을 극복하는 것은 작은 일에서 시작하면, 영적인 작품이 되는 것이다. 정오 기도에도 그렇다. 스라랴, 사울에 정오에 빛 가운데 예수님을 만나서, 수치로 대인기피증인 수가성 여인이 물동이를 버리 전도자가 되었듯이 따라서 정오기도회도 작은 일이 아니다.

• 스가랴 4:10,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10절에 다림줄은 대단하지 아니다. 측량추이다. 남들이 볼 때는 초라하다. 주님을 사모하면서 이 측량줄과 다림줄을 가지고 버티면 승리한다. 우리가 비대면도 작은 일이 아니다. 온라인 생중계가 작은 일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큰 산을 넘어뜨릴 역사를 주실 것을 믿는다. 보이지 않는 역할을 잘 하라. (측량줄, 다림줄 예배의 자세 큐티).

2. 하나님이 우리 손에 들려주신 것, 다림줄을 가지고 인내하며 기다려야 한다.

• 스가랴 4:10, “…사람들이 스룹바벨의 손에 다림줄이 있음을 보고…”

Ⅱ. 둘째, ‘실제로 기름 부음 받는 체험’의 조각

1. 순금 등대파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직분과 직업에 상관없이 모든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체험해야 한다.

-14절을 보면, 직접적인 기름부음 받은 자 두 사람은 스룹바벨과 여호수아이다. 한 명은 정치적인 통독인 스룹바벨이고, 종교적인 여호수아 대제사장이다. 왕 같은 제사장, 한마디로 큰 산을 넘어가는 하나님의 작품이라 할 때, 두 번째로 큰 산 앞에서 기름 부음을 체험하는 것이다.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새 기름의 아들들이다( The Suns of fresh oil). 새 기름으로 온 몸이 절어있다. 그래서 스룹바벨과 여호수아는 감람나무에서 나오는 기름으로 온 몸이 절어있다. 성령의 새 기름으로 절었다는 것이다. 모든 상황을 극복할 수 있도록 우리가 성령의 기름으로 절어있기를 바라며, 주님 앞에 쓰임 받기를 바란다. 사회지도자들도 이렇게 기름에 절어있음 한다. 성령으로 절어있다는 것은 신앙은 최선보다 더한 무언가 있다. 세상종교는- 분발하여 능력을 극대화하라는 것이며, 우리는 그게 아니며, 우리는 성령 안에서 절어있는 것이다. 윗소싱이다. 성령을 구하고 받고 순간순간 내 생각을 성령에 의존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를 부인하고 성령으로 절어야 한다. 큰 산을 넘기 위해 조각조각 모아서 작은 일을 몸으로 성령으로 절어야 한다.

• 스가랴 4:14, “이르되 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 하더라”

 

2. 참된 신앙생활은 ‘최선을 다하는 삶’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다. 성령으로 (절어야 )(sated) 한다.

 

Ⅲ. ‘일곱 눈, 온 세상의 주님이 감찰’하시는 조각

1.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온 땅을 감찰하신다.

• 스가랴 4:10,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다니는 여호와의 눈이라 하니라”

• 스가랴 4:14, “이르되 이는 기름 부음 받은 자 둘이니 온 세상의 주 앞에 서 있는 자니라 하더라

• 역대하 6:1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들을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하나님의 눈은 온 세상을 감찰하시고 우리를 살펴보신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떤 입장이 되어야 하는가? 천상의 병거, 중요한 것은 삶의 큰 산을 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이 살피신다. 하나님이 감찰은 징벌이 아닌 심판도 아닌 온 세상을 감찰은 자신의 삶과 사역과 현안을 감찰하신 것이다. 회초리가 아닌 하나님의 심정을 갖고 하나님 앞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여호와는 감찰하시며 여호와는 온 세상을 비추어 주신다. 감찰은 죄악을 해결하기 위해 감찰하신다. 하나님이 알고 계신다. 해결하기 위한 것이다. 진짜 큰 위로이다. 여호와의 감찰은 가장 따뜻한 언어이며 위로이다. 죄악을 감찰, 고난, 수고, 원통 환란, 억울함 아마음 걸음 인생 이 땅을 감찰하신다. 하나님의 감찰은 가장 따뜻한 언어이다.

2. 하나님의 눈은 우리의 무엇을 감찰하시는가?

① 죄악을 감찰하신다. (시 130:3) ② 고난을 감찰하신다. (느 9:9)

③ 수고를 감찰하신다. (창 31:42) ④ 원통함을 감찰하신다. (삼하 16:12)

⑤ 환난을 감찰하신다. (시 31:7) ⑥ 억울함을 감찰하신다. (애 3:59)

⑦ 마음을 감찰하신다. (시 7:9) ⑧ 걸음을 감찰하신다. (욥 34:21)

⑨ 인생을 감찰하신다. (시 11:4) ⑩ 이 땅을 감찰하신다. (시 102:19)

 

3.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신 것도 ‘징벌’이 목적이 아니라 (회복)이 목적이었다.

이것이 ‘목자의 심정’이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도 징벌이 목적이 아니라 회복이 목적이었다. 율법은 기초가 된다. 제사법을 주셔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회복되게 하신 것이다. 목자의 심정이다. 하나님은 일곱 눈을 가지고 지금도 우리를 감찰하신다. 우리의 상한 마음과 고통과 억울과 상처, 아픈 곳을 치유하신다. 우리는 감찰하시는 하나님께 눈이 열리기를 바란다. 온 세상의 주님은 온 세상을 통치하신다.

 

4. ‘온 세상의 주’는 우리에게 세계 비전(10절, 14절)을 주셔서, 온 세상을 품게 하신다.

-우리는 태성 적으로 이기주의자들이다. 그런데 순금 등대를 보여 주시면서 전체를 품으라 하신다. 종지가 아닌 다라이가 되고, 함지박이 되라하신다. 세계비전을 품던 제자들도 초라한 어부들이었다. 예수님 시대의 어부는 상상도 안 되는 어부였다. 그때의 시대보다 지금은 백배나 더 컸고, 그 시대의 어부는 상상도 안 되는 어부들이었다. 우리 앞에 큰 산이 있는가? 우리가정 앞에 큰 산이 있나를 보라.

 

{결론}

1. 인생길에 큰 산이 가로막고 있다면, 나의 힘과 지혜와 능력으로 큰 산과 싸우지 말고 (성령 )으로

무장하여 극복되어야 한다.

-성도들이 어떤 큰 산이 있으면 성령으로 무장하여 이 산을 극복하는 동일하게 은혜를 주시기를 바란다. 산을 품어라 작은 일이라고 멸시하지 말고, 실제적으로 성령께 쩔어 있고, 일곱 눈으로 감찰하시는 하나님으로 위로 받고 회복되어 온 세계를 은혜의 함지박으로 다 품는 저수지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 인생은 끝이 좋아야 한다.

 

2. 성령님을 통하여 한결같은 순금 등대파가 되어야 신앙의 끝이 아름답게 된다.

-모니터를 관통해서 가을 사역을 잘 해놓으리라 빈다. 우리의 인생은 끝이 좋아야 한다. 절대 우리 힘으로 되지 않는다. 능으로도 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된다. 잘 감당하길 바란다. 모든 산을 옮기는 주의 자녀 되기를 바란다.

 

♣ 요약.

스가랴의 환상은 순금 등대의 환상이었듯이. 순금은 고귀하고 불변하는 천성을 의미하며 등대란 세상의 빛 곧 교회를 의미한다. 따라서 이 환상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와 세상에 대한 빛의 역할을 회복한다는 사실을 의미이다. 또한 이스라엘을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민족으로 만드시려고 계획하신 것을 상징이다. 두 금관과 두 가지는 이것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총독 스룹바벨을 가리키며, 또한 이는 이스라엘의 영원한 회복자로 이 땅에 오시는 그리스도의 제사장과 왕의 신분을 예표 하는 것이기도 하다. 성도들이 어떤 큰 산이 있으면 성령으로 무장하여 이 산을 극복하는 동일하게 은혜를 주시기를 바란다. 산을 품어라 작은 일이라고 멸시하지 말고, 실제적으로 성령께 쩔어 있고, 일곱 눈으로 감찰하시는 하나님으로 위로 받고 회복되어 온 세계를 은혜의 함지박으로 다 품는 저수지가 되기를 바란다. 우리 인생은 끝이 좋아야 한다. -모니터를 관통해서 가을 사역을 잘 해놓으리라 빈다. 우리의 인생은 끝이 좋아야 한다. 절대 우리 힘으로 되지 않는다. 능으로도 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영으로 된다. 잘 감당하길 바란다. 모든 산을 옮기는 주의 자녀 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그래서 이 말씀에 비추어서 성령에 절어서 오직 주님 앞으로 나아가 작은 일에 더욱 힘써야 한다. 그것은 아침 큐티 하는 것, 이웃에 대해 마음을 쓰는 것, 그리고 주일예배로 온전히 참여하는 것, 옷매무새도 잘 추스르고, 정오기도회도 마찬가지다. 작은 일이지만, 큰 산을 극복하는 것이며, 작은 일에서 시작하면, 영적인 작품이 되는 것이다. 초라하고 작은 일이지만 큰 산을 옮기는 것이며 영적인 기쁨이다. 주님을 사모하면서 이 측량줄과 다림줄을 가지고 버티면 승리한다. 우리가 비대면도 작은 일이 아니다. 온라인 생중계가 작은 일이 아니며, 우리를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큰 산을 옮기게 하실 역사를 주실 것을 믿는다.

 

♠느낀 점.

오늘도 비대면이라 불편한 것은 있지만 화상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만으로도 하나님과 함께 드리고 있다는 것에 위안을 느꼈다. 이 비대면을 우리도 힘든데 담임 목사님과 목사님들은 마음이 어떠하실까하는 생각을 하게 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만으로 위로와 평화가 느껴지지만, 그래도 현장 예배가 속히 오기를 기도해야겠다. 매일 기도를 쉬지 않고 하고 우리 교회가 전처럼 은혜롭게 예배드리고 주님을 더 큰 성령으로 만나서 나의 변화를 맛보고 싶은데 아직도 올해 내내 교회를 가본일 몇 번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마음은 늘 교회에 가고 싶지만 이런 상황을 아시는 하나님은 왜 지금 이렇게 침묵하시는지... 오늘 남편과 예배를 드리고 자녀들이 주말에 와서 자고 있기에 깨워서 식사를 먼저 준비해 주고 마친 뒤에 예배를 인터넷으로 드리게 했다. 그래도 본인들은 좋다고 하는데, 나는 그 마음이 편안하지 않았다. 어쩌다 한 번씩 오는 아이들이 함께 예배하고 가정예재를 드리고 떠나가면 제발 각처에서 예배에 집중했음 하는 바람과 지속적인 기도를 간절히 하고 있다. 속히 믿음 좋은 배우자를 만나서 믿음의 가문을 만들어 가면 좋겠고, 모두가 한 마음으로 화재거리가 주님을 만나는 이야기로 가득하길 소망해본다. 오늘 말씀대로 작은 일에도 소홀히 하지 않는 예배가 되어서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본이 되는 부모가 되어야 하겠으며, 매일 더욱 주님께 온전히 나아가기를 힘쓰자. 작은 일에도 소홀하지 않고 주님을 바라보며 성령에 절어서 모든 예배와 훈련에 집중하고 변화되는 주님 자녀가 되길 소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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